2021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마태오 11,25-27)
"I give praise to you,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for although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the learned
you have revealed them to the childlik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사제로서 다른 사제의 강론을 듣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강론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아야 하지만, 정작 가슴으로 듣지 못하기도 합니다. 제단에 올라 강론하려면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교리의 내용도 오랫동안 배워 왔고, 신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지금 무엇이 필요하고 중요한지를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기에, 좋은 말씀과 강론인데도 마음을 열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유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내가 해 봐서 다 알아!’, ‘왜 그 정도밖에 못해!’라며,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거나 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자신만이 옳다는 오만과 편견 속에 갇히게 됩니다.
인간은 하느님에 대하여 스스로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이해와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시며, 우리가 바라거나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어쩌면 그런 오만과 편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하느님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함과, 자신이 바라는 방식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방식이라는 편견으로 다른 이들의 처지와 생각을 헤아리지 않은 채 자신의 방식과 뜻만을 강요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그러하였고 빌라도가 그러하였으며 가끔씩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도 그러하였습니다.
편견과 선입관 없이 무엇인가를 판단하기란 어렵습니다. 아니 어쩌면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경험과 삶이 판단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알고자 한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철부지들처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먼저 많이 바라보고 들어야 합니다. 듣지도 보지도 않고서 판단하고 결정지으며 선택하는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많이 들으십시오.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바라보십시오. 그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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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동무’라고 말하면 아마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것만 같습니다. 남북으로 분단되고 대립해 있는 상태의 산물로 여겨지는 싸구리 정치이념에 따라, 남한(대한민국)에서는 ‘동무’라는 말이 금칙어 비슷하게 된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길을 가며 이런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어깨동무, 내 동무. 미나리 밭에 앉았다.”
분명히 많이 썼던 ‘동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조건 ‘친구’로 써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자동으로 부여되었습니다. 하지만 ‘동무’라는 말을 잘 보십시오. 얼마나 정겹고 따뜻한 말입니까? 이 말을 쓰지 않다 보니 이제는 더욱 어색하고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단어도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사용하지 않으면 이렇게 낯설게 됩니다. 어쩌면 주님도 그렇지 않을까요? 어떤 분은 나중에 할 일이 없을 정도로 여유가 생기면 그때 주님을 믿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때 과연 주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동안 주님을 부르지 않고, 주님을 만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중의 그 시간은 너무 낯설고 어색해서 믿기 힘들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많은 대화를 나눠야 낯설지 않은 친밀한 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혼자 모든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주님과 함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감사의 기도를 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아니면 아무거도 모르는 철부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말입니다. 아마 모두가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할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스스로 철부지라고 부르면서 자신을 낮추지 않는다면 진실로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을 지향하고 있었나요? 이 세상에서 완벽하다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을 지향하면서 교만 속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런 모습을 지향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앞에서는 가장 못난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모습으로, 가장 낮은 자세를 지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 의지하는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의 모습이 될 수 있으며, 가장 행복한 사람의 모습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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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퍼드 대학교 시브 연구진은 실험을 하나 진행했습니다. 연구진은 한 헬스장에서 이제 막 운동을 시작하려는 회원 38명에게 에너지 음료를 마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음료가 2.89달러이며 근처 편의점에서 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중 절반(19명)에게는 할인가격인 0.89달러에 샀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음료를 마신 후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1시간 후, 연구진은 이 사람들을 다시 찾아 피로도를 물었습니다. 과연 어떤 사람들이 더 피곤을 느꼈을까요?
정답은 반값 음료수를 마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피로감을 더 느꼈을 뿐만 아니라, 운동 강도 또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낮추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도 있듯이, 비싼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을 갖는 것 같습니다. 비싼 음료를 마셔서 피로도 줄여주고, 운동 효과도 더 크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주님을 싸구려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주 높으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위해 스스로 낮추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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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알려거든 순종해 보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철부지이십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아십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철부지 자녀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아는 것이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위에서 내려다보아서는 잘 모릅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아야 합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변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래에서 보니 그 사람이 더 잘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오르기 전의 모습이지만 그 사람에게 순종해야 하는 철부지 같은 처지가 되면 그 사람의 보이지 않는 면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본성을 쉽게 드러냅니다. 그래서 사람을 알려면 철부지처럼 낮아질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 ‘의뢰인’(2019)은 칠곡 어린이 학대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분노와 슬픔이 가득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영화는 그나마 보는 이들에게 충격을 덜 주게 하려고 현실보다 많이 순화되어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새엄마는 아빠의 묵인하에 어린 남매를 학대합니다. 문제는 아이들이 그렇게 사정을 하는데도 경찰도, 복지센터도, 학교 선생님도 그냥 골치 아파질까 봐 모든 것을 묵인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 앞에서 그들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 사회 분위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그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되고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아이들 앞에서 발각되게 됩니다.
너무 솔직해서 진급하지 못하던 한 변호사만이 직장을 때려치우고 남은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칩니다. 처음엔 성공만을 바랐던 그였지만 아이들은 그의 마음을 알아보았습니다. 아이들의 시각으로 누가 착한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변호사는 아이들에게까지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유일하게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멀리서 들리는 한 음성에 순종할 수 있어서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있어야 사랑할 수 있는데 이해하려면 이렇게 누구에게나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낮아져야 합니다.
미국에서 한 아버지가 아들이 마약을 한다며 상담을 신청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매우 화가 나 있었습니다. 의사는 이 부자에게 역할극을 시켜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뭘 못 해줘서 그렇게까지 아이가 망가졌는지 답답해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주눅이 들어 있었습니다.
의사가 이제 역할을 바꿔보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아버지가 “내가 마약 중독자입니까?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사실, 이 아버지는 자신이 마약 중독자 아들의 역할을 하기를 꺼린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까 봐 두려워 그 역할을 맡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은 높이 있어서 자신이 보이지 않지만, 아들의 위치로 낮아지면 자신의 모습이 보이게 될까봐 그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성경에서는 아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도 몰랐고 그래서 아버지도 몰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철부지가 되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하느님보다 높은 위치에 있으니 하느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 어린이처럼 진정으로 순종해 본 적이 없어서 그분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철부지의 마음입니다. 순종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낮아져서 누군가에게 순종하게 될 때 그 사람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을 알고 싶거든 모든 사람에게 순종해 보십시오. 물론 죄가 되지 않는 한계 내에서.. 그러면 그 사람이 보일 것입니다.
교만하게 위에서 명령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고 이웃도 모르게 됩니다. 아는 것이 사랑이기에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알고 싶으면 철부지처럼 순종해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알고 싶거든 그렇게 해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사랑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순종하는 대상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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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항해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위치를 아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망망대해에서 지금 내가 있는 곳을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원하는 목적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 원하는 목적지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등산로에서도 산의 지도가 표시된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림은 빨간 점으로 ‘현재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 있는 곳에서 원하는 곳까지의 거리와 시간을 알 수 있습니다. 지하철에서도 그렇습니다. 낯선 곳에서 내리면 방향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역에는 지역을 안내하는 지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빠짐없이 빨간 점으로 ‘현재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도 현재의 위치를 알아서 어렵지 않게 숙소를 찾았던 적이 있습니다. 1시간 30분 정도 가는 거리였습니다. 곳곳에 지도가 있었고, 현재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시가 있었습니다. 비록 숙소가 보이지 않았지만 지도를 보면서 방향을 잡을 수 있었고,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요즘 우리는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모세는 히브리인으로 태어났지만 이집트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히브리인에게는 이집트인으로 여겨졌고, 이집트인에게는 히브리인으로 여겨지는 경계인이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히브리인들과도 어울리지 못했고, 이집트에서도 적응하지 못하였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목적지를 잃어버린 난파선처럼 방황하였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오늘 모세는 하느님이 계신 호렙 산으로 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모세는 드디어 현재의 위치를 알았습니다. 바로 하느님 계신 거룩한 땅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것이다.” 모세는 가야할 목적지를 알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모세는 목적지에서 해야 할 일을 알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하셨고, 모세는 약속의 땅을 향해 길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2021년 7월 14일 인류는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놀라운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물질과 자본을 이용하여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이 하느님 나라일까요?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행복한가요?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과 연대하며 지내고 있나요?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미래를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을까요? 놀라운 과학과 기술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앞에 일상의 삶이 무너졌습니다. 인류의 욕심 때문에 많은 피조물들이 멸종하고 있습니다. 물과 공기는 오염되고 있고, 자연은 파괴되고 있습니다. 인류의 생태계 파괴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자연은 더 큰 재앙으로 인류에게 다가 올 것이라고 합니다. 인류가 추구하는 삶의 좌표를 수정하지 않으면 수많은 암초를 만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인류가 수정해야 할 좌표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교황님은 문헌 ‘복음의 기쁨, 찬미 받으소서, 모든 형제들’을 통해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말합니다. 개발과 발전 그리고 욕망과 소유는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이끌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연대와 협력 그리고 나눔과 헌신이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안내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반도체 산업이 발전해서 겨자씨보다 작은 공간에 전 세계의 모든 책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경제학자, 수학자, 과학자들은 머리로 해결하려고 하니 신앙의 신비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가슴으로, 믿음으로, 사랑으로 바라보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그분이 십자가를 지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모든 분자와 원자들은 우주와 지구의 시작 이후 소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단지 형태가 변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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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성화(聖化)의 도구는 기쁨과 미소입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작고 소박한 삶, 순수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총애하신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오 복음 11장 25~26절)
여기서 눈여겨보고 유념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라는 표현에서 이 사람들은 자칭 지혜롭다는 자들입니다. 사실 속은 텅텅 비어있으면서도 슬기로운 척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과장하고 살려하니 삶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철부지’는 그냥 철부지가 아니라 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지혜와 슬기로 충만한 철부지입니다. 인생의 진리를 터득한 철부지입니다. 삶 속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깨달은 철부지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철부지는 단순하고 솔직하며, 순박하고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권능과 선하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삶이 행복해지려면 너무 복잡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때로 철없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삶이 편안해지고 기쁨이 찾아옵니다.
기쁨은 고통을 치유하는 힘입니다. 기쁨은 슬픔에서 벗어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기쁘게 사는 것은 가장 좋은 복음 선포입니다. 기쁜 얼굴은 하느님의 은총을 드러내는 가장 탁월한 표지입니다.
작고 단순한 삶의 대가(大家)가 있습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입니다. 그녀의 평생에 걸친 소원은 작고 소박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내 성화(聖化)의 도구는 바로 기쁨과 미소입니다. 나는 내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에도 미소 지으며 감사드립니다. 많은 일들이 나를 억압할 때, 어렵고 불쾌한 일들이 내게 닥칠 때, 나는 조금도 슬픈 얼굴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어려움에 미소로써 답합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아주 단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단순함 안에는 하느님께서 거하셨습니다. 당시의 이교도 설교가들은 해박한 지식, 철학적 고찰에 근거한 현란한 설교를 시도했지만, 바오로 사도의 설교는 늘 직설적이었고 단순했습니다.
사람이 위대한 것은 그가 비록 병들고, 늙고, 가난하더라도 그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배경에는 다른 무엇에 앞서 단순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철부지들은 아직 영혼의 때가 묻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순수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깨끗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 그래서 이웃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느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더욱 뚜렷이 당신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이런 맑은 영혼의 철부지들은 세파에 찌든 영혼들보다 훨씬 쉽게 세상만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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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영근 신부-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으로 깊고 아름답습니다.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기도요,
<뒷 장면>은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입니다. 오늘은 두 개의 절로 된 <앞 장면>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 장면>의 예수님의 감사기도는 마치 겟세마니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뜻”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니 기도가 수난의 길을 앞두고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마태 26,42)라는 순명과 의탁의 기도라면, 여기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라는 확신에 찬 감사와 찬미의 기도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단어는 “감추시고”와 “드러내 보이시고”와 “감사”라는 단어입니다.
“감추시고”는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시고”는 하느님의 계시를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우주의 주권자로서 당신의 뜻을 자유롭게 ‘드러내 보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처럼, “감추시고”와 “드러내 보이시고” 라는 표현을 통해서, 영적 진리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배려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주권적인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드린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찬양을 나타내는 감격스런 고백’을 뜻한다고 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말합니다. 곧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의 뜻과 섭리에 대한, 완전한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감사의 이유를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그렇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은 결코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드러내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다.’ 해서, 모두가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라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고 일하셨음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일하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감사드리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1코린 5,18)라고 말씀하신 사도 바오로처럼 말입니다.
‘하늘나라의 장막에 머무는 길은 우리 안에 일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라.’(수도규칙 머리말 30)고 제시하신 성 베네딕도의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마태 11,25)
주님!
당신께서는 지혜롭다는 자에게서 감추시니, 믿음 안에 저를 가두소서!
철부지에게서 드러내시니, 신비 안에 저를 가두소서!
아버지의 뜻 안에 저를 가두시어, 신뢰하고 의탁하게 하게 하소서.
또한 감사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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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철부지가 되어야
-반영억신부-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내로라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최고였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이 들어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야말로 촌놈들, 상것들, 별 볼 일 없는 못난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순함이 있었고 부족하다고 인정하는 겸손이 있었기에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일찍이 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으뜸이요, 모르면서 아는 게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때 묻지 않은 철부지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철부지들의 특징은 의탁입니다. 철이 없고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보호자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함께야). 그들은 그야말로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을 미덥게 여기십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보호가 절실한 이들이고 우리는 하느님의 철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결코 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철부지는 어리광도 부리고, 떼도 씁니다. 그러다 품에 안깁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리키며 친숙해지는 것,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가장 깊이 만나는 것을‘안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고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태11,27). 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그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 자세가 “어린이와 같이”(마르10,15)단순한 마음으로 온전히 의탁하며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온전히 의지하고 맡길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정희성씨의 ‘교감’이라는 시입니다. “전깃줄 위에 새들이 앉아있다. 어린아이가 그를 보고서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 ‘내려와 위험해여’”. 그런 순수함이 사라진 시대이라서 더욱더 어린이의 마음이 간절해지나 봅니다. 순진무구함으로 하느님을 알고 전할 수 있는 은혜가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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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송영진신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26).”
여기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자기가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칭하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힘 있고 높은 위치에 있는 기득권층 사람들,
교만한 위선자들을 뜻합니다.
‘철부지들’은 단순하고 순박하고 겸손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소외계층에 속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것’은 인간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라는 말씀은,
교만한 위선자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구원 의지와 계획을 감추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교만과 위선에 빠져서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라는 말씀은, 순박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여서 신앙인이 된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만 당신의 구원 의지와 계획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감사드리는 것은, 교만한 위선자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소외계층 사람들이 구원받게 된 것에 대해서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소외계층에 속해 있고, 가난하고 힘이 없어서 억압받고
차별당하고, 무시당하고, 천대받으면서 살고 있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런 일을 전혀 겪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에는 기득권층도 없고, 소외계층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로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섬기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교만한 위선자들도 회개하고,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에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지 않고, 이쪽 세상에서 권세를 부리면서
살았던 것처럼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면,
그 나라에 아예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라는 말씀은,
소외되는 사람 없이 모두가 구원받게 된 것을 감사드린다는 뜻입니다.
18장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아지려면,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낮은 곳으로
내려가거나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그런데 높은 위치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일은
각자 스스로 회개하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낮은 위치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일은
개인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고, 누군가가 끌어올려 주어야 합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올려 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인간 세상에는 자신의 학식, 학력, 재력, 권력 등을 내세우면서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그 ‘잘난 체’를 버려야 합니다.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학자도, 부자도, 권력가도 필요 없습니다.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로운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논객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1코린 1,20-21).”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7-29).”
‘잘난 체’를 버리는 일은, 하느님 나라의 문 앞에 간 뒤에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만 하느님 나라의 문 앞에까지 갈 수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이 말씀에서 ‘모든 것’이라는 말은, ‘모든 권한’을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하느님을 아는 능력과 권한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예수님께 넘겨주셨다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아버지를 온전히 아시고, 아버지만이 예수님을 온전히 아신다는 뜻이 됩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완전한 일치를 뜻하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알고 싶다면, 먼저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알다.’ 라는 말은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기를 원한다면
먼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라는
말씀과 뜻이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유일한 구원의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참되고 유일하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만이 유일하고 참된 구원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기 혼자 연구하고, 수행하는 등의 방법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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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마태 11,25-27: 그렇습니다, 아버지.
-조욱현신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25절) 이 말씀은 당신에 관한 신비를 지혜롭다는 이스라엘에게는 감추시고, 아직 철부지인 다른 민족들에게는 드러내신 아버지의 뜻에 대한 찬미이다. 우리도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지만,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도 외면을 당할 것이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란 말은 창조계 전체의 주님으로 하늘은 하늘에 있는 모든 것, 땅은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계시다. 예수께서는 이 일들을 다 하시고도 아버지께서 그 일을 하신 것으로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신다. 그럼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의 뜻이 하나임을 보여주시며, 우리에게 좋은 것을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신다.
주님의 말씀에서 “철부지들”은 나이가 어려 철부지가 아니라, 죄와 사악함에서 거리가 먼 철부지라는 것이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이유가 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인지는 설명하지 않으신다. 다만 감사를 드리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져 물어서는 안 된다. 단지 그분의 뜻을 따리 실행하고 그분께 충성을 다하는 일만이 우리의 할 일이라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27절)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 다가간 사람들과 전에는 반항했으나 이제는 하느님을 알게 된 모든 사람을 맡기셨다는 뜻이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27절)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아는 점에 있어서 같은 본질이다.
같은 본질이 아니면 아들은 아버지를 알 수 없다. 그러기에 아들을 아는 사람은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알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넘겨주셨고, 이제 이 모든 것이 아들을 통해서만 드러나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신비를 통하여 아버지에게 있는 모든 것이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주님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으로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잘 아시며, 아버지를 잘 아는 유일한 분인 만큼 아버지와 같은 본질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아버지의 모상이신 아들을 보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삼위일체 안에서만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만이 당신 본질의 열매인 당신의 아들을 아신다. 오직 아들만이 자신을 낳으신 아버지를 알아본다. 그리고 거룩하신 성령만이 하느님의 깊은 비밀들, 곧 아버지와 아들의 생각을 아신다.
하느님을 아는 우리는 그러기에 그분의 뜻을 알고 실천하여 참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 삶으로 하느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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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의 선택 기준을 보여 주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이 대목의 병행구인 루카 복음을 보면, 파견 받았던 일흔두 제자가 돌아와서 선교 여행의 성과를 보고할 때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가득차 이 기도를 드리십니다. 제도적 신분이나 학식, 가문 등 세상 기준과는 거리가 먼 제자들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기뻐하고 감사하시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선하신 뜻"입니다. 그분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 다르지요. 영의 세계와 물질 세계는 추구하는 바가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아버지의 뜻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선택과 부르심, 소명에 대해 자기들의 잣대를 들이대며 이해하려 하지만, 그럴수록 자기 모순에 빠지고 번번이 헛다리를 짚게 되지요. 세상 눈에 부유하고 탁월하고 출중한 이라도 아버지 시각에서는 다른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세상에서 늘 환영받는 것도 아니고요.
제1독서는 모세의 부르심 대목입니다.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 3,10)
모세는 불에 타면서도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러 갔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당시 그는 미디안 땅에 몸 붙여 살면서 장인의 양 떼를 치는 처지였습니다.
우리도 잘 알다시피 모세는 도망자입니다. 공소시효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살인을 저지른 범법자 신세지요. 성장 시기를 이집트 공주의 아들로 지내면서 동족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충분히 수혈받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이집트인도 아닙니다. 혼인은 미디안 여인과 했고요. 그는 어느 편에서도 자기 소속을 주장하기 애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런 모세를 선택하십니다. 당시 거대 강국인 이집트의 파라오와 교섭을 할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로 그를 뽑으신 겁니다. 그런데 대표는 아무나 합니까? 롤러코스터 같이 출렁였던 자기 인생사를 내내 곱씹었을 모세로서는 두렵고 주저되는 게 당연하지요. 보잘것없는 한 인간으로서, 태초부터 계획하신 하느님의 섭리를 알 길이 없으니 그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그저 막연했을 겁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
하느님의 현존과 동반. 이것이 모세가 이스라엘을 대표해 나설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며, 모세의 소명을 뒷받침하는 표징이고 인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파라오 같은 타인이 그를 인정하기 이전에 본인 스스로부터 먼저 믿고 의탁해야 하는 진실입니다.
하느님의 선택 기준은 세상의 지혜나 슬기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신비에 대한 겸손과 하느님 주도권에 대한 겸허한 수용, 그리고 순수한 의탁으로 받아안고 그분과 함께 안개 속으로 들어가 걷다 보면 언젠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차츰 선명해리라고 믿을 뿐입니다. 나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욕망까지 내려놓을 때 각성과 통찰의 순간이 허락될 수도 있습니다. 이조차도 그분 마음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다행히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시려고 마음에 두신 사람들입니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이 의지 덕분에 죄인이고 부족한 우리가 아버지의 현존과 동행 속에서 나날이 새로워지고 성장합니다.
비록 세상 기준에 못 미치더라도 아버지의 선하신 뜻으로 그분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은총에 감사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철부지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아버지를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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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소크라테스만큼은
-김찬선신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말에 '덩치만 크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덩치는 이미 어른이지만 다른 것은 아직 애라는 말입니다.
겪어야 할 고통이 있는데 고통에 약하며
알아야 할 것 특히 인생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많은데
아직 그런 것은 모른다는 얘기이겠지요.
비슷한 말로 '머리만 커가지고'라는 말도 있습니다.
아니 심한 말로 '대가리만 커가지고'라고도 합니다.
어른이 됐다고 하며 어른들에게 대드는 아이에게 어른들이 하는 말인데
어른이 보기에 세상에 대해 조금 알기 시작한 것을 가지고 다 아는 양
어른들에게 대들지만 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시건방만 떤다는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지혜롭다는 자와 슬기롭다는 자가
주님 눈에는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닐까요?
지혜롭다고 하고 슬기롭다고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인데
이 세상에서는 실제로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진정 지혜롭고 슬기로울지라도
하늘에 대해서 얘기할 때는 겸손해야 하고,
특히 주님 앞에서 얘기할 때는 뒤로 빠져야 하겠지요.
하느님 나라 신비와 관련해서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지 말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런 뜻에서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계시론과 조명론이 나옵니다.
세상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도 알 수 있지만
이 세상의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은 거기까지입니다. 그 이상은 모릅니다.
지혜롭고 깨달은 자라는 석가모니도 여기까지이고,
공자나 소크라테스도 그 이상은 모른다고
그러니 그런 자신을 알라고 하였지요.
하늘의 신비와 하늘의 지혜는 계시의 영역이고,
우리 인간의 지혜가 완전한 계시이신 그리스도의 조명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 조명론에 대해서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생명의 샘이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
앞의 "당신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뒤의 "빛"은 모든 빛의 원천이신 하느님이신데
그리스도이신 주님의 빛을 받아야만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만 있으면 그리고 눈만 뜨고 있으면 다 볼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눈이 백 개 있어도 그리고 그 눈을 다 부릅뜨고 있어도
빛이 한 줄기도 없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고 그래서 그 눈들은
결국 빛이 없는 심해의 고기들처럼 퇴화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사실 내가 아는 것이 어디까지인지를 아는 것이 지혜이고,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적어도 소크라테스만큼은 지혜로워야 하고
소크라테스만큼 겸손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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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마태오 11,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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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생명의 샘이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
앞의 "당신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뒤의 "빛"은 모든 빛의 원천이신 하느님이신데
그리스도이신 주님의 빛을 받아야만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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