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7월 11일 연중 제15주일

Margaret K 2021. 7. 11. 07:52

2021 7 11일 연중 제15주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
(마르코 6,7-13) 


Jesus summoned the Twelve

and began to send them out two by two
and gave them authority over unclean spirit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여행을 떠나려고 짐을 싸다 보면 가방이 언제나 작게 느껴집니다. 필요한 물건을 하나씩 챙기다 보면, 어느새 빈 공간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제는 여행에 무엇을 가지고 갈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놓고 가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여행 가방 앞에 우두커니 서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따져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여행을 떠나십니다. 여행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이 여정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 여행은 ‘머물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떠나기 위한 여정’입니다. 그래서 가벼워야 합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머무는 동안 더 가지려고 집중합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그들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채우려고 집착합니다. 짐이 가벼우면 쉽게 떠날 수 있습니다. 나의 울타리, 습관, 행동 방식, 소유와 집착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쌓여 무거워지고 챙겨야 할 것이 많아지면 떠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짐 꾸러미를 가볍게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지금 예수님과 함께 떠나야 합니다. 자신을 묶어 두었던 것으로부터, 자기가 선택하고 결단하였다고 생각한 것들로부터, 그러한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세상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그대로 지니고 간다면, 또 다른 집착에 허덕이며 살게 될 것입니다. 짐을 가볍게 하고 예수님과 함께 떠나는 길은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 그 중심으로 향하는 여정입니다. 그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머무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를 발견합니다. 버리고 떠나 봅시다. 그러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선교를 떠날 때 필요한것

-키엣 대주교-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모든 것을 버리고 선교에 꼭 필요한 것만 지니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멀리가면 갈수록 짐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데 모든 것을 버리고 가라고 하시니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 꼭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예수님과의 친밀한 유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생활한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 동안 스승님을 이해하고, 스승님과 하나되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스승님과 하나되는 친밀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먼 길을 떠나는 주님의 제자들이 꼭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친밀함을 지니고 떠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하나되는 친밀함이야말로 성공리에 선교를 마칠 수 있는 원천입니다.

선교를 떠날 때는 주님께 의탁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

돈과 물질은 한 순간의 달콤한 안락과 성공을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 성공이 마치 자신의 능력으로 만든 것이라는 착각과 오만, 자만심을 갖게 하여 주님의 뜻보다는 내 뜻이 중요하고, 주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이 나에게 실현되기만을 바랍니다.

그러나 빈곤은 자신의 부족함과 무력함을 깨닫게하여 주님께 의탁해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성공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의지할 때만이 영원하고 변치 않는 성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의탁하는 마음은 선교를 떠나는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을 버리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믿음만 갖고 떠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선교는 혼자가 아니라 연대감속에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두 명씩 짝을 지어 보내셨습니다. 나약한 인간이기에 서로 도와주며 소명을 완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증거하는 말은 한 명보다는 두 명, 두 명보다는 세명의 일치된 말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치된 여러 사람의 증언을 더 신뢰합니다.

선교는 자비로운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여유롭고 풍족한 사람들이 아닌 가난하고 장애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사회에서 소외된 불우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이처럼 나약한 형제들과 함께 살아야 하기에 더욱 주님과 같은 자비로운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선교의 소명을 받은 주님의 제자입니다.

주님께서는 세례와 견진 성사를 통하여 당신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선교의 열매를 거두려면 주님과 함께,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고, 형제자매와 연대감을 이루고, 자비로운 사랑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이 이웃과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이 모든 사람과 불화가 없는 연대를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이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있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우리 모두는 하느님을 증거하는 사도직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주님께 받은 소명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2. 주님이 말씀하신는 선교를 떠날 때 필요한 것들을 나는 얼마나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3. 이웃에게 주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가장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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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은 우리 학생들에게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 이때를 놓치면 공부하고 싶어도 못 해. 대학교에 들어가서 실컷 놀고 지금은 열심히 공부할 때다.”

각종 고민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를 향해 어른들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합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 좋아진단다.”

어떻습니까? 모두 맞는 말입니까?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다 거짓말 같습니다. 공부는 고등학교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하는 것이었고, 어른이 될수록 책임이 커져서 더 힘든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어른이 하는 말에 문제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어쩌면 세상 안에 거짓이 많아서 거짓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닐까요?

시간이 지나면 잘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보다는 분명히 잘 되는 근거 있는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바로 주님이 그 희망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 그 나라에 대한 희망이 지금에 더 충실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이라는 거짓된 희망이 아닌, 주님이라는 진짜 희망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 그런데 특별한 명령을 하십니다.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많은 것을 챙겨줘서 기쁜 소식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시니 이해하기 힘듭니다. 더군다나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제자가 아닙니까? 특히 악이 가득한 세상에 제자들을 보내는 것이 불안하지 않으셨을까요?

세상의 것에 희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만 희망을 둘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의 것에 희망을 두고 세상의 것을 채우다 보면 주님의 자리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빈 마음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빈 마음이 있어야 그 자리에 주님께서 사랑으로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희망을 두고 있을까요? 주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만이 희망 없는 세상 안에서 진짜 희망을 품고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꿈은 머리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손으로 적고 발로 실천하는 것이다(존 고다드).

괴물이 되면 안 됩니다.

기원전 4세기에 활약하던 그리스 조각가 프락시텔레스는 어느 날 두 개의 조각상을 만들었습니다. 모두 정교하고 빼어난 작품이었습니다. 이 중 하나를 감추고, 다른 하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공개했습니다.

공개된 작품을 보고 “이곳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라고 사람들이 말하면 그 말대로 고쳤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하나도 흘려버리지 않고 모두 따르면서 조각상을 만들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조각상은 어떠했을까요? 처음에 만든 작품보다 더 뛰어난 작품이 되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하나의 괴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숨겨둔 조각상을 꺼내 보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혼자 만든 것인데 이렇습니다. 그리고 이 괴물은 사람들의 말을 모두 듣고 만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모두 달라서, 제가 모든 사람에게 아름답게 칭찬받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겠다고 고치다간 이렇게 괴물이 될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이 때로는 필요하겠지만, 전적으로 따르다 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괴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말씀만을 온전히 따르면서 자기 고유의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지닌 말씀의 칼날을 날카롭게 유지 하려면?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왜일까요? 혼자 다니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 충실할 수 있을 텐데 둘이 다니면 계속 상대를 신경 써야 하는데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근본이 먼저 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사랑실천에 있음을 보여야 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본당 신부와 보좌 신부, 본당 신부와 수녀님들, 혹은 수녀님들 간에 화목하지 못한 상황이라면 그분들이 어떤 복음을 신자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요?
    먼저 복음을 전하는 이들 안에서 사랑이 실천되어 화목하고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 내용보다는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주님이 계심을 믿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 실천해야 하는 것이 ‘가난’입니다. 예수님은 빵과 돈과 여벌 옷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먹고 자고 입을 것에 신경을 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충분히 있어야 신경을 쓰지 않게 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가질수록 더 신경 쓰게 되어있습니다. 그냥 주님의 섭리에 맡기면 됩니다.

     

    저도 돈이 필요할 때면 사람들이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돈을 줄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 분별하게 됩니다. 욕심이 생기면 사람의 영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익을 챙길 도구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큰 장애가 됩니다.

     

    만약 어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지나치게 막 대하다고 가정해봅시다. 시어머니는 자신처럼 부잣집에 자기 아들처럼 대단한 사람에게 며느리가 합당하지 않다고 여겨서입니다. 이렇게 돈을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이 공동체에 있다면 그것 때문에 공동체가 갈라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오는 사람도 그러한 시선으로 보기에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만약 복음을 전하는 이가 이런 시어머니와 같이 되면 아무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중국 고대 전국시대 문혜왕(文惠王)을 위하여 당시 최고의 백정인 포정(庖丁)이란 사람이 소를 잡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의 손이 닿는 곳이나 어깨를 기대는 곳이나 발로 밟는 곳이나 무릎으로 누르는 곳은 푸덕푸덕 살과 뼈가 떨어졌습니다. 칼이 지나갈 때마다 설겅설겅 소리가 나는데 모두가 음률에 들어맞았습니다. 그의 동작은 상림(桑林:탕 임금이 만든 춤)의 춤과 같았으며, 그 절도는 경수(經首:요임금이 만든 음악)의 절주(節奏:가락이 반복될 때의 그 규칙적인 음의 흐름)에 들어맞았습니다. 문혜왕이 보고 말하였습니다.

    “아아, 훌륭하도다. 재주가 이런 지경에 이를 수가 있을까?”

  

백정이 칼을 놓고 대답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道)로서 재주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처음 제가 소를 잡았을 적에는 보이는 것 모두가 소였습니다. 그러나 3년 뒤에는 완전한 소가 보이는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의 작용은 멈춰 버리고 정신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천연(天然:사람이 힘을 가하지 않은 상태)의 조리를 따라서 큰 틈을 쪼개고 큰 구멍을 따라 칼을 찌릅니다. 소의 본래 구조에 따라 칼을 쓰므로 힘줄이나 질긴 근육에 부닥뜨리는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에야 부딪치겠습니까?

 

    훌륭한 백정은 일 년마다 칼을 바꾸는데 살을 자르기 때문입니다. 보통 백정들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의 칼은 19년이 되었으며, 그사이 잡은 소는 수천 마리나 됩니다. 그러나 칼날은 숫돌에 새로 갈아 내온 것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엔 틈이 있는데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곳에 넣기 때문에 휑하니 칼날을 움직이는데 언제나 반드시 여유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19년이 지나도 칼날은 새로 숫돌에 갈아 내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뼈와 살이 엉긴 곳을 만날 때마다 저도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조심조심 경계하면서 눈은 그곳을 주목하고 동작을 늦추며 칼을 매우 미세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면 뼈와 살이 후드득 떨어져 흙이 땅 위에 쏟아지듯 쌓입니다. 그러면 칼을 들고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기분에 잠깁니다. 그러고는 칼을 닦아 잘 지킵니다.”

  

문혜왕이 말하였습니다.

    “훌륭하도다. 나는 백정의 말을 듣고서 삶을 기르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이 이야기는 『장자』의 '양생주(養生主)'편에 나오는데 포정이 소를 잡는다는 뜻으로 ‘포정해우’(庖丁解牛)라 합니다.

     

    장자가 말하는 ‘도’(道)’란 우리가 말하는 ‘진리’와 같습니다. 진리를 터득한 포정은 다른 백정들과는 달리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정신으로 봅니다. 진리를 터득한 사람은 소를 돈으로 보지 않고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분해한다는 뜻입니다. 무아의 경지에서만 소의 본질을 보고 그것을 분해하는 데에서 춤추듯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도 병자가 잘 낫지 않고 악령을 쫓아내려고 해도 잘 안 됩니다. 어쩌면 우리 진리의 칼이 무뎌졌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선 내가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이들과의 관계가 좋은지 살펴야 합니다.

    좋은 공동체를 형성하며 서로 사랑한다면, 그다음은 ‘가난’에 집중해야 합니다. 내가 세상 것을 바라고 있다면 그 사람의 시선이 소에게 빼앗겨 힘줄을 건드리고 뼈를 건드려 칼날이 무뎌집니다.

  

    우리도 포정이 소를 육신의 눈이 아닌 정신으로 대하되 이치에 따라 조금도 억지가 없이 춤추듯 칼을 놀리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 대해 스스로 욕구를 버리고 대상에 대한 의식이 없이 자연의 섭리를 따라 행동한다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욕구에 사로잡히면 자연의 이치를 보는 눈을 잃어 성령의 칼날도 무뎌지고 그러면 복음을 전할 힘을 잃습니다. 백정이 무딘 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말씀의 칼날이 무뎌지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공동체가 사랑의 가족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우리 자신부터 세속의 욕망을 없애 공동체와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무언가 세속적인 것을 바라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우장춘 박사는 세계적인 육종 학자였습니다일본에서 공부하였고일본인 아내와 자녀를 낳아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1950년 대한민국은 가난하였습니다농사를 지을 씨앗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일제 강점기에 모든 씨앗을 일본을 통해서 얻었기 때문입니다당시 한국의 농림부 장관은 우장춘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한국에 와서 일할 수 있도록 부탁하였습니다우장춘 박사는 195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대한민국의 농업발전을 위해서 헌신하였습니다제주도에서는 감귤을 재배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강원도에서는 씨감자를 재배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배추를 재배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우장춘 박사가 한국의 농업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에서의 풍족한 삶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포기의 또 다른 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저는 그것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우장춘 박사가 일본에서의 풍족한 삶을 포기하고 신생 대한민국에서 고된 삶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 나라에 대한 헌신이라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저는 2018년 교구청에서 성소국장으로 5년을 지내고 떠났습니다특수사목을 5년 동안 했었기 때문에 본당사목을 원하면 주교님께서는 본당사제로 보내 주셨을 것입니다저는 주교님께 본당으로는 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주교님께서는 저의 청을 받아 주셨고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로 갈 수 있는지 제안하셨습니다저는 주교님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2019년 8월 21일 미국으로 왔습니다어느덧 2년이 되었습니다우장춘 박사처럼 특별한 사명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저의 포기를 후회하지 않습니다미국에서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사명감을 이야기합니다사명감은 목적지와 같습니다목적지를 아는 사람은 비록 힘들어도고난이 닥쳐도 한걸음한걸음 발길을 내딛습니다. 1시간만 더 걸으면 시원한 오아시스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참을 수 있습니다곧 더위와 갈증을 피할 수 있는 물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오늘 제1독서에서 아모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 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아모스는 그저 가축을 키우는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이제 아모스는 가축을 키우는 목자의 삶을 포기하였습니다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셨습니다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마귀 들린 사람을 쫓아내는 것입니다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빵도전대의 돈도 포기하라고 하셨습니다신발은 신지만 옷도 두벌은 입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여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성공명예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제자들은 세상의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였고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박해와 고난이 있었고목숨을 바쳤지만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내가 선택한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내가 포기한 것이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포기도선택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체험한 것이 있습니다우드사이드 성당 신부님이 휴가를 갔습니다제게 본당에 일이 생기면 부탁을 하였습니다마침 장례가 났습니다저는 기쁜 마음으로 장지에 가서 하관 예절을 하였습니다제의하고성수하고예절서를 가지고 갔습니다하관 예절을 잘 마치고 왔는데 한 분이 신문사엘 찾아오셨습니다. 10,000불을 선뜻 후원금으로 내 주셨습니다걱정하고근심하면 100불도 오지 않았습니다기쁜 마음으로 좋은 일을 하니 주님께서 축복해 주셨습니다장지에 갔던 분들과 점심 식사를 하였습니다저는 가벼운 마음으로 신문 구독을 이야기하였습니다함께 식사했던 7분 모두가 기꺼이 신문구독을 신청하였습니다이 모든 것이 고인을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하관예절에 함께 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하느님께 감사드리는 한 주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양승국신부-

 

수도자로서 오랜 초기 양성기간을 마무리한 형제들, 이제 곧 사제품을 받고 본격적인 사목 일선에 투입될 형제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길이기에, 다양한 어려움이 곳곳에 산재한 십자가 길이기에, 선배로서 이런 저런 충고를 하다 보니 말이 자꾸만 길어지더군요.

  

“잘 아시는 바처럼 사제품은 끝이 아니라 출발입니다. 여러분은 신입사원도 아니고 수습사원인 셈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궂은일을 하는데 주저하지 말길 바랍니다. 만나게 될 신자들과 청소년들, 함께 일하는 직원들 앞에서 한결같은 겸손의 자세를 유지해 주십시오. ‘내가 신부인데! 내가 원장인데!’하는 말은 절대 금지입니다. 무엇보다도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한평생 가난한 사제로 살아주십시오. 소임이동 때는 여행용 가방 두개면 충분합니다. 양손에 가방 두개 달랑 들고 고속버스 타고 이동해주시면 그 자체만으로 사제로서 성공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목 실습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저처럼 훈시 한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 용 짐을 이런 식으로 꾸리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를 ‘여장규범’이라고도 합니다. 여러 말씀 가운데 유독 다음의 말씀이 가슴이 꽂힙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갖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을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코 복음 6장 8~9절)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에게 럭셔리한 부자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떠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이 자신의 힘이나 세상의 힘을 믿기 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 유사한 말씀이 ‘열두 사도의 가르침’ 11장 6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 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예수님의 미니멀리즘과 관련된 당부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사목자들이 좀 더 헌신하지 못하는 이유, 신앙의 본질과 핵심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 비본질적이고 지엽적인 것들에 몰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제 개인적 생각인데, 아무래도 우리가 행하는 제반 사목에 대한 지속적인 회개의 결핍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사목자로 서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반성이 요구됩니다. 거듭되는 사목적 회개가 필요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은혜로운 사목적 회개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수도회 입회 전, 중고등부 교리교사를 할 때였습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부족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일종의 천국 체험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을 위해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다른 것들은 별로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자연스레 교리교사로서의 사명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수도회 입회 후에도 비슷한 체험이 계속되었습니다. 상처 입은 아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틈만 나면 티격태격했지만, 그 와중에 아이들로부터 혈육 이상의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을 맛본 이후 사목자로서의 대대적인 회개가 이루어졌습니다.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니 그걸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습니다. 힘들지만 아이들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최고의 행복이었습니다. 돈이며, 좋은 차며, 메이커 옷도 다 필요 없었습니다. 어디 외출 나가도 머릿속은 늘 아이들 생각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아이들의 행복, 아이들의 구원만이 유일한 관심사였습니다. 자연스레 나 자신을 위한 투자는 줄어들었습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청빈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왜 우리가 부차적인 것들, 외적인 것들, 스쳐지나가는 것들에 그리도 관심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일까요? 진정한 사목적 회개가 이루어지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사목 대상자들, 양떼들로부터 진한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그들이 나를 너무 사랑하고 존경해서 틈만 나면 나를 찾고, 내 소매를 붙들고 늘어진다면, 그 사랑 체험을 한 이후 어찌 그들에게 헌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다.

-이영근신부-


우리는 모두 각자 사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사명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그것은 신원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신원에 대한 각성이 자신의 사명을 충실하게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전례>는 말씀 선포의 사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파견 받은 이라는 신원에서 주어집니다.

<독서>에서 아모스는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파견 받음에서,

<독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는 아버지로부터 파견 받음에서,

그리고 <복음>에서 열두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음에서 그 사명이 주어집니다.

 

오늘 <1독서>는 남 유다의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에 와서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자사제 아마츠야가 그를 위협하며 쫓아내는 장면입니다왕실 사제인 아마츠야가 자신을 반대하는 아모스를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은 자신의 신원과 권한이 침해당하고 위협당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자신의 기득권을 놓을 수 없어일종의 제도권의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이처럼말씀의 선포는 아프게 찌르기에 때로는 받아들여 지지 못하고주변부로 내쳐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역사 속에는 흔히 말하는 말씀의 유배 시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예수님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내쳐졌고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 성문 밖에서 매달리어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오늘 <2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소아시아의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옥중서한의 서두 부분입니다여기에서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파견하시어 그분의 피를 통해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고이 사명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성령을 파견하셨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의 파견 장면입니다.

이는 세 장면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기 이전의 장면과파견하시는 장면그리고 파견 받은 제자들이 그 사명을 이루는 장면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는마치 <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아모스를 붙잡으셨듯이,

<2독서>에서 우리를 창조 이전에 이미 선택하셨듯이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마르 6, 7).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가르쳐주십니다

파견 받은 자에게 길을 떠날 때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곧 빵도여행 보따리도전대의 돈도 가지지 말며신발도 옷도 두 벌을 가지지 말라(마르 6, 8 참조)고 제시하십니다.

이는 자신의 능력으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오로지 하느님께만 의탁하여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

 

성경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지팡이는 모세의 지팡이입니다.

양치기 모세에게는 너무도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지팡이였지만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병든 이들이 쳐다보기만 하면 살아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인 이 지팡이그것은 곧 말씀의 지팡이입니다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요쌍날칼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하느님의 권능인 이 말씀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는가?

             그래서 말씀의 권능에 위탁하여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파견 받은 이들이 한 일에 대해서 전해줍니다.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다.”(마르 6,12-13)

 

이는 파견 받은 자는 파견 하신 분의 뜻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을 하여야 함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그분의 권능으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는 파견 받은 자임을 돌이켜보고내가 지금 파견하신 분께 매여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 말씀의 지팡이를 꼭 붙들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 6,8)

 

그렇습니다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무능함과 허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아멘.

 한눈팔지 마라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오직 당신께 의지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의지하는 만큼 주님의 사랑을 체험케 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면 실망하고 상처를 안고 살지만 주님께 의지하는 이는 하는 일마다 잘될 것입니다. 이 시간 각자에게 주어진 주님의 소명을 일깨우고 그분의 바람을 살 힘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먼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냥 빈손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능력을 담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자를 파견 하셨습니까? 사도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대로 “하늘의 온갖 영적인 축복을 주심”과 당신의 가르침, 즉 “하느님나라 건설”을 위해서입니다. 그 사명은 열두제자에게 국한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실 우리도 이미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고 마귀를 끊어버리고 허례허식을 끊어버리겠다고 약속했으며 그 기초 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주님의 능력을 입었고 파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온갖 유혹 앞에서 주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꿋꿋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파견하셨습니다. 짝을 지어 파견한 것은 증언 내용에 대한 진실성을 말해주는 관례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공동체성을 상기시켜 주며 복음의 선포는 개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래서 함께하면서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고 서로의 연약한 마음을 붙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이 함께하는 것은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가야할 길을 갈수 있도록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도 혼자 독불장군으로 일하지 말고 협력자와 함께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시편에서는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55,23)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함께 일하되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이웃과도 함께합니다.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과 함께하는 척 할 수는 있겠지만 진심으로 함께하지는 못합니다. 먼저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을 파견하기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한 눈 팔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옛 말에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것에 대한 애착을 아예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께 의지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먹을 것이 많고, 소유하는 것이 많으면 당연히 하느님께 가는데 소홀해지기 마련입니다.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입니다. 주님께 의지하여 도움을 청하고 주님의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모든 것(먹을 것, 입을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당에 나오면 뭐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하고 왔는데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런저런 일에 신부님으로부터 잔소리 듣고, 시간을 투자해야 하며 거기다 돈도 내야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정직하게 살려고 하니 손해 보는 느낌입니다. 좋은 마음으로 기도하러 왔는데 왜 그리 말이 많고 설치는 사람이 많은지…밖의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주님은 눈에 보이는 힘을 비울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채워주십니다. 더 큰 마음의 자유와 기쁨과 평화를 주십니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준다”(이사41,10). 그러므로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을 전하는 가장 큰 몫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의로움을 선택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 접하기도 합니다. 고지식한 사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세상의 것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답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돌아보면 은총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당장의 결과에 얽매이지 말고 삶의 자리에서 충직하시기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면 열매는 주님이 주십니다. 주님의 뜻을 행했으면 결과에 연연해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내가 흘린 수고와 땀은 주님께서 차고 넘치도록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근본을 얻으면 일의 결과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따라서 농부가 온종일 땀 흘리며 고랑을 파듯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생명의 길을 파는 농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열심히 일해 어떤 좋은 결과를 이루었을지라도 가까운 이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면 낙담과 실망에 빠져서 일할 의욕을 잃고 손을 놓아 버리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고, 사람들은 음모를 꾸미고 심지어 죽이려고도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 안에서도 당신의 일을 한결같이 행하셨습니다. 우리도 누가 무어라 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사도들을 파견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의 일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에 매이지 말고 천상 것을 추구하는 의로움을 통해 주님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정에서 주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기쁨을 주며 힘을 주시는 분입니까? 아니면 그렇게 만드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지켜줄 힘과 능력을 지닌 분입니다. 성경은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하고 선언합니다.

 

우리 가정은 하느님의 말씀과 더불어 사랑의 생활을 하는가? 아니면 출세와 물질에 치중하고 있는가? 점검하고 사랑의 삶을 증가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가? 데리고 사는가? 자문하며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영적축복을 전하며 또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한 어린이가 어머니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엄마, 도둑질 하는 것과 거짓말 하는 것 중에 어는 것이 더 나쁜 거예요?” 엄마는 이이에게 “그야. 도둑질 하는 것이 더 나쁘지”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엄마, 아니예요, 거짓말이 훨씬 더 나빠요. 왜냐하면 도둑질 한 것은 돌려 줄 수 있지만 거짓말은 돌려줄 수 없잖아요!” @@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약속과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지키지 못할 때 본이 아니게 거짓말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주님께 한 약속에 충실하고 이웃에게 한 약속을 꼭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송영진신부-


“...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7-13).”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 28,20).

이 약속은 승천 후에도 항상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이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승천 전에도 항상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때가

가끔 있었지만, 그런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언제나 항상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에도 제자들만 보내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함께 가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파견된 제자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에,

결코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수호천사’를 보내 주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은

선교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의 상황에도 해당됩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탈출 23,20).”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시편 91,11).”

우리는 수호천사의 존재를 믿고 있고,

수호천사가 언제나 항상 우리를 지켜 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또는 수호천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제자들은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힘에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에 세속의 물질에 의지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는 것이고,

예수님의 보호를, 또는 수호천사의 보호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는 사람은 복음을 선포할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당신만 믿고 의지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러 가는 사람은 ‘복음만’ 가지고 가면 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님만 믿으면 됩니다.

(이 말은 신앙생활 전반에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여행인데,

이 여행은 예수님과 함께 가는 여행이고, 예수님만 믿으면서 가는 여행입니다.)

 

“그래도 최소한의 생활비와 활동비는 필요하지 않은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믿음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들을 언제나 어디서나 믿어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마태 6,31-32).”

(이 말씀에서 ‘다른 민족들’이라는 말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생활비와 활동비를 걱정하는 것은 믿음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선포하러 떠나는 제자들이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빈손’으로 가는 것은, ‘능동적인 버림’입니다.

가져갈 것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호만’ 선택하고, 다른 것은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능동적인 버림’은 곧 ‘능동적인 응답’입니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1).”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일은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그리고 자신들이 원해서 능동적으로 한 일입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린 것은,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러 가는 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전히 복음 선포에만 집중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모두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그렇게 사는 것은 당연하고 옳은 일이지만,

세속 생활과 신앙생활을 병행해야 하는 일반 신자들은 ‘빈손’으로 살 수 없다.

‘빈손으로 떠나라.’ 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일반 신자들에게까지

확대 적용하면 안 된다.” 라고 말할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신앙인이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전부 다 수도자가 될 수는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각 개인에게 주어진 ‘부르심’이 다르고, ‘탈렌트’가 다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면 안 된다.”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마태 6,24) 모든 신앙인이 지켜야 하는 계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혼자서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만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하느님은 우리 목숨의 주인이십니다.

목숨도 나의 것이 아니니, 재물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연중 제15주일 : 나해

-조욱현신부-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계획으로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에페 1,4)하셨으며, 이 구원은 복음선포를 통하여 실현된다(마르 6,7-13 참조). 오늘의 주제는 복음선포이다. 오늘 우리의 활동들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하고 계시다. 하느님께서는 목자이면서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인 아모스를 선택하셨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여야 한다. 예언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선포해야 한다. 이래서 예언자들은 거부를 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언제 어디에서나 부정과 불의와 부패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우는 자유로운 예언자의 전형이다. 십자가의 죽음이란 바로 나자렛의 목수(마르 6,3)인 예수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고(마르 1,14 참조) 세상이 심판받을 때가 되었다(요한 12,31 참조)는 사실을 선포한 충실성과 진실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다.

 

복음: 마르 6,7-13: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셨다.

 

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구원계획을 첫 번째로 실행하시는데 아모스의 경우와 같은 모습이다. 그들의 사명 역시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도적 사명이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사도들의 파견은 인간적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존하라는 것이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8-9절). 즉 이 말은 그 규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한 “열정”이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리라는 무한한 신뢰를 하라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이제는 사람에 대해 신뢰도 해야 한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협조자가 된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10절). 그러나 때로는 거절당할 수도 있다.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11절). 그것을 각오해야 한다.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것은, 복음이 선포되어 실현되고 있는 약속의 새로운 땅에 가까이 갔느냐 못 갔느냐를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의 파견을 받은 제자들은 자신들의 전교활동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하신 복음선포와 구원의 활동을 계속한다(12-13절 참조). 이렇게 교회는 세상에 주님을 증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반영시키고 그분의 모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성과는 어느 정도 우리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현대의 복음선교 76). 그것은 이런 의미이다. 우리의 복음선포가 아모스의 경우나 그리스도의 예언적 선포와 같이 권력이나 힘 앞에 항상 자유로운가?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들든 안 들든 하느님의 진리를 선포할 용기를 항상 가지고 있는가?(로마 1,14참조).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가 아니면 우리의 능력을 믿는가? 극단적일 때 발바닥의 먼지를 떨어버릴 각오가 되어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영원한 구원계획이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에페 1,10)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될 것이다’라는 말은, 전에 파괴되었던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다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창조의 근본적 의미가 다시 드러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 구원계획은 우리들의 협력, 특히 교회가 실현하여야 하며, 이를 이루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서 비록 고달프게 느껴져도 우리가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신 그 사명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세상에 주님을 증거하고 우리 자신이 그분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아모스와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진리를 용감하게 선포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 갈 것이다. 주님께 파견받은 제자들과 같이 힘차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청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마르 6, 12)

-한상우신부-


제자들은
주님께서
바라시는대로
길을 떠난다.

길을 떠나면서
더더욱
깨닫게되는
하늘 나라의
신비로운
여정이다.

사랑은 회개를
동반한다.

회개의 삶이란
소유하지 않고
나누는
하늘나라의
삶이다.

하늘 나라의
삶은 빛처럼
감출 수 없다.

우리의 삶이란
신비로운
만남의
연속이다.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총이다.

떠나고
돌아오는
모든 여정이
은총이다.

떠나는 여정은
믿음의 여정이다.

믿음은
소유하지
않는 가난한
여정이다.

가난하기에
깨어있을 수 있고
맡길 수 있다.

가난한 마음이
믿음이다.

우리가 가지고
떠나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니라
믿음이다.

물질은 우리를
얽매이게 하지만
믿음은 우리를
자유롭게한다.

믿음은
구체적인
하늘 나라의
나눔이다.

떠남도
회개도
선포도
나눔이다.

은총은
나눔으로
빛을 발한다.

제자들은
사람들 안에
계시는 주님,

그 빛을
기쁘게
뵙게된다.

믿음은
거룩한
만남의
여정이다.

거룩한 은총의
주일에 기도를
나눈다.

믿음의 향기와
맛은 간절한
마음에 있다.

활짝 피어나는
믿음의 꽃이길
기도드린다.

 -오상선신부-


오늘 주일 미사의 말씀은 부르심과 파견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6,7)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어 파견하십니다. 부르심과 파견은 온전히 예수님의 권한입니다. 누군가를 어떤 이유로, 또 어떤 목적으로 부르시고 파견하시는지는 오직 주님만 아십니다. 부르심을 받아 파견된 이는 진지한 기도와 성찰을 통해 그 이유와 목적을 더듬어 찾아나갈 뿐입니다. 그 과정이 곧 자신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알아나가는 여정이 될 겁니다.

제1독서는 아모스 예언자의 소명을 다룹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아모 7,14-15)
자신을 못마땅해하고 경계하는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의 위협에 아모스 예언자가 꾸밈없이 답합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입니다. 남 유다 출신 목자요 농부인 아모스가 스스로 어떤 의도를 품고 북 왕국까지 가서 주님의 말씀을 전한 게 아니지요, 그는 그저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했을 따름입니다. 아모스는 주님의 깊은 뜻을 다 알지 못해도 순명함으로써 소명을 완수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선택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에페 1,4)
한 사람의 부르심과 파견은 이미 태초부터 시작된 여정입니다. 세상은 사람을 뽑을 때 배경이나 전문성, 기술이나 신분을 따지지만 주님은 가능성을  보십니다. 그 가능성은 당신께서 태초에 그를 창조하실 때 그에게 심어주신 것입니다.

한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 저마다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정을 거쳐 다시 주님께 돌아가는 순간까지 이 부르심은 차츰 선명해지고, 이윽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완성의 상태를 향해 갑니다. 이 완성은 자기 혼자서 끌어갈 수 없고, 가족과 이웃, 공동체가 함께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함께 파견하십니다. 짝을 지워 주십니다. 때로는 왜 그러는지도 모르면서 직관과 영감에 의해 끌어주고 협력하며 함께 주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겁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12-13)
파견된 이는 파견하신 분의 일을 합니다. 예수님에게서 파견을 받은 제자가 어부였건 세리였건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게 됩니다. 그들의 말과 손을 통해 일어나는 기적만이 기적이 아니라, 그들의 변화부터가 기적인 셈입니다. 회개를 선포하고 구마와 치유를 베푸는 일은 예수님의 일이 동시에 예수님을 파견하신 아버지의 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해 주소서."(복음 환호송)
이 말씀이 바로 무지한 우리가 일생동안 바쳐야 할 기도입니다. 우리는 주님에게서 저마다 고유한 부르심을 받아 파견되었지요. 꼭 수도자와 성직자, 선교사가 아니어도 우리는 가정과 공동체, 사회와 국가 그리고 이 세상에 파견된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당장은 내가 왜 이곳으로, 이들과 이 환경 가운데로 불리우고 파견되었는지 주님의 뜻을 명확하게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저 모든 게 모호하고 희미한 가운데 인내하며 나아가야 하는 시간이 꽤 길어질 수도 있고요. 때로는 지금의 모습이 잘못된 만남과 어리석은 선택의 결과처럼 느껴져 후회되고 슬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태초에 우리를 선택하셔서 당신의 꿈과 바람을 우리 존재 안에 심어 주신 주님의 계획을 믿고, 주님의 그런 기대가 차츰차츰 내 존재 안에서 완성되어 가리라고 희망해야 합니다. 당장의 결실과 성취가 없을지라도 우리 모두는 불리우고 파견된 자리에서 미소하나마 주님의 일을 하는 중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각자 파견된 자리에서 주님의 일, 곧 사랑을 이루어가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가까운 사람에게 파견되는 우리

 -김찬선신부-


오늘은 파견 얘기이고 독서는 아모스 예언자가 파견되는 얘기입니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복음은 사도들이 파견되는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파견되는 얘기를 묵상하다가 남의 파견 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나의 파견도 얘기해야 하지 않나 생각되어 나의 파견을 묵상케 되었습니다.

 

관구장을 마치고도 저희 관구의 선교 책임을 오랫동안 맡았던 저는

파견된 적은 없고 형제들만 파견한 것 같았기 때문인데

그런데 저는 정말 파견되지 않고 파견만 한 존재였는가?

하느님만 파견하시는 분이고 인간은 누구나 파견되는 존재가 아닌가?

이런 묵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시작된 묵상은 저에 대한 성찰로 바뀌었고,

성찰은 반성으로 바뀌었는데 그것은 감히 하느님 자리를 차지하고는

자신이 파견되었고 파견될 존재라는 저의 정체성을

너무도 어처구니없지만 까맣게 잊고 살았다는 반성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수도 생활에 관한 문헌 <봉헌 생활>이 생각났습니다.

여기서 수도 생활의 모범인 예수님께서는 <A Patre, Ad Patrem>의 존재

그러니까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가신 분이라고 얘기되고 있지요.

 

그러고 보니 참으로 그렇습니다.

저라는 존재는 근본적으로 출생 자체가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으로 파견된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시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거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지요.

그것도 우리의 의사를 물으시고 태어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당신 뜻대로 창조하셨고 이에 우리는 군소리 없이 태어난 존재이고요.

 

그렇다면 파견된 나는 과연 파견의 삶을 살고 있는가?

 

답하기 참 어렵지만, 예나 지금이나 파견을 거부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파견에 얼마나 깨어 있었는지 그 의식의 차원에서는

오늘 독서에서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라고 한 아모스 예언자처럼 

많이 깨어 있지 못했고 특히 일상의 차원에서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선교 강의 때 참 많이 얘기한 바와 같이 우리는

매일 미사의 끝에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파견을 받는데

해외 선교사라면 해외로 파견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우리는

그 첫째가는 파견지가 바로 같이 사는 가족이요, 형제들이지요.

 

같이 사는 사람에게 나는 남편이기도 아내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파견되는 선교사요 예언자이기도 하다는 말이고,

그들은 내가 복음을 들고 또는 살아있는 복음으로

찾아가야 할 대상이라는 말이지요.

 

이렇게 우리는 이웃에게도 직장 동료에게도 파견되었고 찾아가야 하는데

수없이 만나면서도 하느님께서 나를 그들에게 파견하셨다는 의식이 없이

만났고 그래서 많은 경우 저는 복음 없이 주님은 떼어놓고 만났습니다.

 

게다가 요즘의 저는 현저하게 인간적인 만남조차도 소극적입니다.

일의 추진력이 전보다 못함은 물론 일을 벌이는 것도 주저합니다.

 

이것을 저는 전보다 힘이 떨어져서 그런 줄로만 생각했는데 오늘

저 자신을 더 성찰하고 반성해보니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성찰인데 지금의 저는 여기서 무엇을 하기보다

여기를 떠날 생각을 더 하고 그래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부터인 것 같은데 그때부터 저는

이 세상에서 뭘 하는 것보다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을 더 생각하고

그 돌아갈 준비를 서서히 하고 있었던 겁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왔으니 아버지께 돌아가긴 가야지요.

그래도 돌아갈 그때까지는 파견된 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어쩌지요?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7월 15일 연중 제15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

(마르코 6,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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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님께서는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

성경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지팡이는 모세의 지팡이입니다.

양치기 모세에게는 너무도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지팡이였지만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병든 이들이 쳐다보기만 하면 살아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인 이 지팡이그것은 곧 말씀의 지팡이입니다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요쌍날칼의 말씀입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 6,8)

-이영근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