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10일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더 높을 수 없다.
제자가 스승만 해지고
종이 주인만 해지면
그것으로 넉넉하다.
(10,24-33)
"No disciple is above his teacher,
no slave above his master.
It is enough for the disciple
that he become like his teacher,
for the slave
that he become like his mast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강의를 끝마치고 나면 스스로 강의에 대한 평가를 합니다. 내용은 어떠하였는지, 강의에 참여한 이들의 반응은 좋았는지 반성하는데, 그 평가는 언제나 박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제가 채우지 못한 것은 하느님께서 채워 주셨다고 믿으며 주님의 은총을 청합니다. 또한 사소한 내용을 말하더라도 대단하게 받아들여 주는 신자분들이 있기에 감사합니다. 이러한 반성 가운데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얼마나 진심으로 강의를 준비하였는지,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삶의 이야기로 다가갔는지, 그리고 최선을 다하였는지 되돌아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한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정의를 부르짖으며 옳은 일에 나서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행하려는 노력들이 부끄럽고 어색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이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판단할지 의심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그분처럼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겨 드리고 의지하는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때로는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고 외치는 것이 오지랖이 넓은 것 같고 어색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외면하고 숨고 피하며 살아갑니다.
주님께 맡기는 삶은 우리의 두려움을, 어색함과 창피함을, 그리고 나약함과 죄스러움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 봉헌으로 더 많이 채워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오로지 사랑과 열정만 있으면 됩니다.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아가고 싶은 바람과 희망만 있다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그분께서는 세상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이 귀한 존재임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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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집에 질투가 심한 사람과 몹시 인색한 사람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질투와 인색함은 서로 함께 잘 살도록 도움을 주었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예상대로 허구한 날 둘이 싸웠고, 이 점을 마을 사람 모두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이 이 둘을 화해시키려고 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원하는 것을 내가 모두 들어주마. 그런데 먼저 청하는 자에게는 하나를 주고, 나중에 청하면 그것의 두 배를 주겠다.”
이 둘은 어떻게 했을까요? 소원을 이야기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상대방이 두 배 얻는다는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대방이 먼저 이야기하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말을 하지 않자 임금은 질투가 심한 자에게 먼저 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잠깐 머뭇거린 질투가 심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제 눈 하나를 뽑아주십시오.”
먼저 말한 사람의 두 배를 상대방이 받는다는 말에, 자기의 눈 하나가 뽑히면 상대는 두 눈을 잃게 될 것으로 생각한 것이지요.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남 좋은 꼴은 보지 못하겠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남의 이익을 보지 말고, 호의를 베풀어 준 임금을 봤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질투를 없애고 인색함도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계속해서 남의 이익만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질투가 넘쳐나고 인색함이 멈추지 않게 됩니다. 우리도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베풀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질투와 인색함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에 충만해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을 배척하듯이 제자들을 배척할 사람들의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바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질투와 인색함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사랑의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 주님의 보살핌을 계속해서 받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기에 두려움 없이 힘차게 복음을 전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주님의 호의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참 많은 보살핌을 받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밤에 잠자는 순간까지…. 단 한 순간도 주님의 보살핌이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 내가 가장 힘들다고 여겼던 그 순간에도 생각해보면 주님께서 분명히 함께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세상의 모든 질투와 인색함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랑 가득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어느 의사의 책을 읽다가 이런 내용을 읽었습니다.
바쁜 아침의 회진 시간에, 자신이 돌보는 유방암 환자가 물어보지도 않는 내용까지 계속 의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바쁘고 귀찮기도 했지만, 차마 이 말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지요. 이런 의사의 마음도 모르고 환자는 자기 집안의 일을 비롯한 병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환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선생님. 미안해요. 바쁜데 내가 너무 귀찮게 하지? 사실 선생님이 나를 암 환자로만 기억할까 봐 그래. 나야 선생님이 보는 수많은 환자 중 하나겠지만, 그냥 암 환자가 아니라 적어도 ‘재밌었던 아줌마’로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다른 이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길 원하십니까? 몸이 아픈 사람? 돈만 밝히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
아니지요. 아마 열심히 살았던 사람, 사랑을 실천한 사람, 주님 뜻에 맞게 산 사람 등등 긍정적 이미지로 기억되길 바랄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당장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지금 속한 세상을 찟을 용기를 준다
-전삼용신부-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들을 두려워한다면 영혼까지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은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사람이 죽음을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도 죽음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전보다는 덜 두렵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주님을 조금 더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알아갈수록 당연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줄어들게 되어있습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사랑하면 큰 차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사랑이 이렇게 죽음의 두려움도 이기게 만드는 이유는 사랑이 영원한 생명의 보장이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어머니 사랑만 받으며 삽니다. 그러나 더 넓은 가정이라는 세상으로 나아오면 가족을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그것을 넘어서면 이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지금 있는 세상에 갇히게 되고 제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지금 세상을 극복하여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힘은 지금 함께 사는 사람들이 나를 죽이더라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여기 피로와 무기력감, 자살에 대한 유혹을 느끼는 막 40대에 접어든 미혼 여성의 삶을 보고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이 여성은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연봉은 많지 않았지만, 그녀가 만족스럽게 살아가기에는 충분했습니다.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난 그녀는 소위 한국의 전형적인 장녀였습니다.
아버지를 일찍이 사고로 잃은 그녀는 고등학생 때부터 집안의 기둥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도 사춘기도, 질풍노도의 시기도 그녀에게는 사치에 가까웠습니다. “네가 빨리 자리를 잡아 어린 남동생을 경제적으로 도와줘야 한다.”라는 어머니의 말에 따라 청춘도 연예도 뒤로하고 오직 안정된 직장을 잡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남동생이 재수, 삼수를 하는 동안 학원비는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습니다. 대학에 합격하자 남동생은 그녀가 평생 엄두도 내보지 못한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오기를 원했고 그다음은 사업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사업비용은 어머니의 대출로 이루어졌고 어머니의 대출금은 당연하게도 그녀가 갚아나갔습니다.
동생의 결혼을 여러 날 앞둔 어느 날 어머니의 다음 말은 그녀를 폭발하게 하였습니다.
“너희 아버지가 남겨준 아파트 있지? 그거 네 동생 신혼집으로 주기로 했다. 그래도 명색이 남잔데 집 한 칸은 해줘야 사돈 보기에도 체면이 서지.”
기가 막힌 그녀가 “그러면 엄마는 어디로 이사할 건데?”라고 묻자 어머니는 당연한 듯 말했습니다.
“너희 집으로 가면 되지. 이제 같이 나이 먹어 가는 모녀끼리 친구처럼 한 번 살아보자!”
그녀도 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애 처음 반대의견을 내본 뒤 돌아오는 것은 어머니의 순식간에 일그러진 얼굴과 폭언,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빨대 꽂아 다 빨아먹은 동생의 적반하장 반응이었습니다.
“불효녀”, “욕심 많은 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누나 왜 그렇게 엄마 힘들게 해!”와 같은 비난이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남겨준 아파트는 동생이 신혼집으로 쓰고 있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집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만나던 남자친구는 어머니의 반대로 헤어졌습니다.
[출처: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시다』, 권순재, 생각의 길]
위 여성의 문제는 이전 세상을 찢을 용기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자궁이 좋아서 자궁을 찢을 용기가 없다면 아기는 자궁보다 더 넓은 세상을 맛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에서도 어머니, 아버지를 버릴 용기가 없다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자신의 세상에 머무르도록 딸과 아들을 자기가 꼭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려는 어머니가 나쁜 사람입니다. 나뿐인 사람인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자신을 버리게 할 의무가 있습니다.만약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딸은 어머니와 동생을 버릴 용기를 가졌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평생 살아봐야 자신의 인생은 단 하루도 살 수 없고 그렇게 해도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삶이 될까요? 어리석은 삶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도 우리를 자신들에게 충성하도록 붙잡아놓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 방법으로 위협을 합니다. 돈을 덜 준다던가 빼앗는다던가, 사랑하는 가족을 잃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 여러 위협을 견뎌낼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사람은 어쨌건 하느님 나라로 나아갈 준비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집착하여 두려움 속에 당신을 증언하지 못하고 당신을 믿는 것을 부끄러워한 것을 이해하실 수 있으실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세상의 많은 회유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안다고 증언하셔서 순교하셨습니다. 이 모습이 천국으로 나아갈 준비가 된 분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이용하려고 두려움이란 무기로 우리를 잡아두려 합니다. 그러나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제가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고 또 성체조배도 하며 결국엔 사제의 길로 부르심에 응답하기로 했을 때 적지 않은 반대가 있었습니다.
먼저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고 여자들의 반대도 있었으며 다니던 학교도 지금까지 공부 잘해놓고 왜 그러느냐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을 극복할 힘은 더 큰 사랑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 사람들을 더 구원하고 싶은 사랑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 사랑이 이 세상에서 저를 붙잡는 힘을 이겨내게 하였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성소자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위 40대 노처녀는 어머니와 동생이 자신을 미워하고 원망해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본성이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끊을 힘도 줍니다. 따라서 사랑을 많이 성장시킨 사람은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꾸준하게 해나가야 하는 일은 ‘사랑을 성장시켜’ 언제라도 이 세상을 찢고 영원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 ‘평화 책꽂이’라는 지면이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6월 13일에 소개된 ‘사라예보의 첼리스트(The Cellist of Sarajevo)'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전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갔습니다. 22명이 죽은 자리에서 첼리스트는 22일간 첼로를 연주하기로 합니다. 첼리스트가 연주를 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도 아닙니다. 첼리스트가 연주를 한다고 해서 전쟁이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첼리스트의 연주는 전쟁의 참상 속에서도 인간의 품격과 인간의 가치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저격수였던 여성은 첼리스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더 이상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노인의 물병을 더 이상 가져다주지 않기로 했던 청년은 첼리스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노인을 위해 물병을 가져다주기로 합니다. 특종을 내기 위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카메라에 담으려했던 기자는 첼리스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사진 찍기를 포기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줍니다. 1992년 5월 27일부터 22일간 첼리스트 Vedran Smailovic는 목숨을 걸고 사람들이 죽어간 곳에서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예전에 보았던 ‘타이타닉’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기억납니다. 이제 곧 배는 깊은 바다 속으로 침몰하게 됩니다. 악단은 마지막 한 사람이 구명정에 오를 때까지 음악을 연주하였습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의 선한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배가 침몰하는 혼돈의 상황입니다. 구명정에 오르지 못한 사람은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엄혹한 현실입니다. 절망하고, 현실을 부정하고, 누군가를 원망하면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는 이들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해 주었습니다. 예전에 함석헌 선생님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신앙이란 바로 ‘그 사람’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모습을 많이 닮았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돈을 받고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는 예수님을 율법학자와 대사제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요셉은 유혹을 받았지만 이겨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받았지만 이겨내셨습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옥에 갇혔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요셉은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 하였습니다. 가족들을 이집트 땅으로 데려와 편히 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겼던 형제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께 이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용서하셨습니다. 평화를 빌어 주셨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신앙이란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첼로를 연주했던 것처럼, 침몰하는 배위에서도 음악을 연주했던 것처럼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 ‘그 사람’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요셉이 자신을 버렸던 형제들을 용서했던 것처럼, 나에게 잘못한 이를 기쁜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육신을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께서 자리하시고, 그분의 영으로 가득 찰 때, 우리는 아름답습니다!
-양승국신부-
시골 살다보니 참 재미있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며칠 전부터 삐쩍 마른 개가 수도원 주변을 서성거렸습니다. 배가 딱 붙어버린 것이 보아하니 일주일은 굶은 것 같았습니다. 정말 불쌍해보였습니다. 순해 빠져서 아무에게나 꼬리를 흔들었습니다.
알아보니 연로하신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키우시던 개인데, 얼마 전 목줄을 끊고 달아나 애타게 찾고 계신답니다. 고기 몇 점으로 유인해서 트럭 옆자리에 태웠습니다.
슬쩍 옆을 쳐다보니 정말 재미있는 녀석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엄청 긴장했던지 엄청 발버둥을 치고 난리더니, 조금 달리니, 여유롭게 서서 바깥 풍경을 만끽했습니다.
마침내 그리던 집에 도착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아까 수도원에서의 불쌍하고 비참한 모습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자기 집이라고 행동이 아주 자신만만했습니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확인하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타나시자, 세상 행복한 얼굴이었습니다.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에도 환한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주인집을 떠난 강아지와 주인과 함께 있는 강아지는 천지 차이였습니다. 마찬가지겠지요. 주님과 늘 함께 있는 우리는 언제나 행복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멀어져버린 우리는 비참한 존재일 뿐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때로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한 존재로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마냥 그렇게 살지는 않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제의 나를 훌훌 털고, 화사하고 찬란한 얼굴로 변모합니다. 아름답고 위대한 존재로 탈바꿈합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는 극단적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때로 천사의 얼굴을 하고 살아가지만, 순식간에 사탄의 얼굴로 돌변합니다.
언젠가 정말 오랜만에 성당 장식을 하면서 등경을 제작했습니다. 나무 조각으로 먼저 틀을 만들고, 바깥을 한지로 감쌌습니다. 십자가도 그려넣었습니다.
미술 실력이 없어서 인지 참으로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저물고 나서 그 볼품없는 등경들 속에 초를 한 자루씩 넣고 불을 밝히니, 세상에 작품도 그런 작품이 없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나만 가득할 때, 세속적인 욕심과 이기심, 자만심으로 가득할 때, 우리는 정말이지 볼품이 하나도 없습니다. 초라하고 누추함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주님께서 자리하시고, 그분의 영으로 가득 찰 때, 우리는 아름답습니다. 존재 자체로 찬란하고 영롱합니다. 그때 우리는 인간 본연의 비참과 어둠을 딛고 위대함으로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하며 언제나 죄인인 우리들이지만, 주님으로 인해 존귀해지고 가치를 지닙니다. 투박한 질그릇 같은 우리들이지만, 보잘 것 없는 우리들의 그릇 안에 주님의 영을 가득 담게 될 때, 우리는 더없이 사랑스런 존재로 변모합니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해 주십니다.
곧 그 어떤 박해와 고난을 겪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께 대한 믿음과 의탁의 요청입니다.
사실, “두려움”의 원래 이유는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말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2,10)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숨은 이유가 사실, 아담의 말처럼 알몸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처벌하시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원죄는 단지 금기사항을 위반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하느님의 모습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빼앗는 하느님, 자유보다 속박하는 하느님, 용서보다 처벌하는 하느님으로 왜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의 반대는 용기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있는 호수 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겁내지 마라.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이처럼, 불신이 두려움을 불러왔으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심은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의 촉구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을”(마태 10,30) 만큼 제자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보살피고 돌보시는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이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만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러한 “주님을 두려워함”은 처벌에 대한 노예적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과 믿음을 지닌 ‘사랑의 두려움’입니다.
이를 <집회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집회 2,15).
“주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집회 25,12)
그러니 오늘 <복음>에 세 번 나오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한 번 나오는 “두려워하여라.”는 말씀은 다 같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활동하시거나 우리를 박해나 고통으로부터 빼내주시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는 그 박해와 고통을 함께 견디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구해주시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보호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로부터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오십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박해와 고통 속에서 동행하시는 그분을 만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말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두려워하지 말라”(마태 10,31)
주님!
받아들여지지 않더라고 박해를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께 희망을 두고,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신 당신의 사랑으로 제 두려움을 몰아내소서. 아멘.

참된 두려움
-반영억신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경외심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합니다. 사도행전9장을 보면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효가 늘어갔습니다. 진정한 두려움은 주님을 차지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을 것이다”(창세15,1)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도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이사41,10). “내 가르침을 마음속에 간직한 백성아, 사람들의 모욕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악담에 낙심하지 마라”(이사5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도 더 귀하다”(마태10,31)고 하셨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하시며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14,28)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힘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분명 ‘아니오’ 하고 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적인 힘도 천상 생명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수많은 참새보다 더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드러나게도 부르시고, 때로는 침묵하시고, 때로는 어떤 일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 때에 그분의 뜻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응답은 좋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이 뒤 틀릴 때, 그때야말로 결단의 순간이고 신앙이 증거 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사랑이시고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8,38). 주님께서는 우리의 힘이시니 주님을 경외하고 세상 것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 ‘잘 왔다. 그간 내 뜻대로 살았으니 이제 편히 쉬어라.’ 는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까? 아니면 ‘너는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다. 좀 더 단련을 받아야 하겠는 걸?’ 하는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주변 사람에게 원성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랑과 봉사의 삶으로 이웃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주님을 증거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세례명을 받은 선택받은 신앙인의 품위를 지켜 주님과 하느님 아버지 앞에 당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 마태 10,24-33: 육신만 죽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조욱현신부-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25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스승으로 모시고 있기에 우리가 그분과 같이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자신을 스승이나 주님보다 더 높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종이라 하시지 않고 친구라고 하셨다(요한 15,15 참조). 그들이 예수님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제자들에게는 더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박해자들의 위협이나 모략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이 헛된 일이라는 것이 심판 날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에서 나오는 “어두운 곳”, “밝은 곳”, “귓속말”, “지붕 위”(27절) 라는 말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둠이고 밤이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높은 곳에서 선포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28절)고 하신다. 육체적으로는 죽일 수 있지만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28절)이시다. 이 멸망은 묵시록에서 “두 번째 죽음”(20,6)이라고 하며 이 죽음은 지옥에서 겪게 될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새는 창조물 가운데서도 아주 작은 것이다. 아주 하찮은 것이다. 그러나 그 참새조차도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알고 계신다는 뜻이다. 이렇게 미물까지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인 우리는 얼마나 더 잘 알고 계시겠는가?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섭리로 돌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참새의 생명보다도 오히려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보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과 입으로 하느님을 안다고 증언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32절)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지 않으면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어도 아무 소용없다. 고백의 뿌리는 마음의 믿음이다. 고백은 믿음의 열매이다. 뿌리가 살아있는 한, 뿌리는 가지나 잎을 만들어 열매를 맺게 되어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10)라고 하셨다. 마음의 믿음이 없다면 입으로 고백할 수 없으며, 마음의 믿음도 입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우리의 믿음을 건강하게 하여 입으로 늘 고백의 씨앗을 뿌리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진정한 두려움을 이야기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미움과 박해는 기정 사실이고 예견된 미래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베엘제불이라 손가락질했다면 그 제자들을 어떻게 대할지 불보듯 뻔하니까요.
그들은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까요? 인간적으로야 당연히 두렵고 불쾌하기까지 하겠지요. 아무리 선하고 진실하게 다가가도 상대가 곡해해서 반응하고 베엘제불 일당으로 몰아세운다면 답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것이 예수님의 해답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로서 갖는 진정한 두려움은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경외심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껏해야 육적인 생명과 안위 정도를 좌지우지하는 존재가 진정한 경외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제1독서에서 요셉이 형들에게 하는 말 안에 이 점이 잘 드러납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창세 50,19)
야곱이 죽은 뒤 형들은 과거 요셉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유언이라며 요셉에게 용서를 구하고 스스로를 아우의 종이라 칭하지요. 이미 용서와 화해가 오간 일이었음에도 가해자의 영혼은 여전히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요셉의 쿨한 답변에서 그의 깊은 신앙적 면모가 드러납니다. 그는 하느님만이 두려움의 대상이어야 함을 잘 알고 있지요. 비록 자기에게 못할 짓을 한 형들이어도, 그들이 꾸민 악을 선으로 바꾸신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라면 함부로 앙갚음하지 않습니다. 갚으실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니까요.
형들은 요셉의 육적 생명에 해를 가했지만 영혼까지 해치지는 못했습니다. 만일 그가 스스로 버림받은 데 대한 상처와 분노에 사로잡혀 칼을 갈면서 제 영혼을 갉아먹었다면 사정이 달랐겠지만, 요셉은 어떤 고난과 시련 한가운데서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순수하고 진실하게 영혼을 지켰습니다.
요셉은 '인간에게 당한 악을 하느님께서 선으로 바꾸어 주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반드시 이스라엘을 찾아오셔서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이야말로 하느님과 친밀하고 충실한 관계 안에 있는 영혼의 통찰일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31)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십니다. 사람이나 이념, 제도, 형벌은 두려움이 대상이 되지 못하지요.
그런데 그분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경험으로 아시겠지만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늘 약자가 됩니다. 사랑하기에 받아들여 주고 사랑하기에 믿어 주지요. 사랑하기에 져 주고 사랑하기에 내어 줍니다. 거창하게 신앙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가족과 이웃에게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면서 성장해 왔습니다.
순진무구한 아기처럼 주저없이 거침없이 하느님 아버지께 달려가 영혼을 던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오직 한 분, 그분은 우리 앞에 늘 활짝 열린 "사랑"이십니다.
코로나19 대응 단계가 격상되어 다음주부터는 대면 미사가 어렵다고 합니다. 다시 영상을 통한 비대면 미사로나마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영혼의 허기를 달래야겠네요. 앞뒤 꽉 막힌 것 같은 힘겨운 상황이지만, 믿음과 인내로써 영혼의 아름다움을 간직하시길 기원합니다. 말씀과 함께 주님 안에 머물러 이 고통의 시기를 건너고 있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곧이곧대로 믿었다가는
-김찬선신부-
오늘 주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간 낭패를 보거나
신앙의 위험에도 빠질 수 있을 겁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설마 이 말씀대로 될까,
설마 이 말씀대로 하실까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말씀들이지요.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 허락 없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인간의 악행에 의한 수많은 살해가
다 하느님 허락 하에 이루어진다는 말입니까?
인간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금하셨는데도
하느님 무시하고 제 뜻대로 하고 그래서 그것이 죄가 되잖아요?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 손밖의 존재는 하나도 없고,
하느님 사랑에서 제외된 존재는 없는데 사람은 더 그러하다는 뜻이지요.
우리는 손가락 하나도 다치지 않아야지만,
고통이나 불행한 일이 하나도 없어야지만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는,
그런 낮은 차원의 신앙에 계속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를 온실의 꽃처럼 키우는 것을 높은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요즘 면역력 약화의 문제도 비슷한 맥락에서 얘기하는 사람입니다.
요즘 엄마들은 아이들을 자연과 멀리 그러니까 인공적인 환경에서 너무
깨끗하게 키워 아이들이 균들과 싸워 이길 면역력을 키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하면
주님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거라는 말씀도
주님께서 설마 정말 이러실까 생각이 들 정도로 과장됩니다.
우리는, 나는 그를 아는데 그는 나를 모른다고 하면
자존심에 크게 상처입어 나도 그를 모른다고 하기로 마음 먹지요.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그러실 리 없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아무리 모른다고 하여도 주님은
우리처럼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주님을 우리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불붙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지옥은 불이 이글이글 타오는 곳이라고 믿는다면
그 믿음은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는 구식 믿음이지요.
지옥은 불이 이글이글거리는 내 밖의 어떤 곳이 아니라
미움과 분노가 이글이글거리는 내 마음 상태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내치지 않고 우리가 오히려 그분을
모른다 하고 주님 사랑을 차버렸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지요.
그리고 이 믿음을 어떻게 갖게 됐냐 하면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차버러지 부모는 결코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고서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머리로서는 아는데 그런데 우리의 실제 삶에서는 어떻습니까?
고통을 받게 되면 자신이 주님의 사랑 밖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고,
고통을 주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을 모른다고 한 죄의 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더 나아가 그렇게 믿어버리면 주님도 어쩔 수 없으십니다.
믿는 대로 될 것이기에 그것이 그의 벌이고 그의 지옥일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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