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7월 7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1. 7. 7. 06:40

2021 7 7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 
(마태오 10,1-7)

 

Jesus summoned his Twelve disciples
and gave them authority 
over unclean spirits to drive them out
and to cure every disease 
and every illnes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사제의 삶은 ‘보내어지는 삶’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없는 삶입니다. 원하지 않은 곳이더라도 일단 파견되면 자신의 생각과 의향은 접고 보낸 사람의 뜻과 가치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사제는 이러한 생각과 순명의 의지를 가슴 속에 담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제만 그래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파견되는 삶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미사 전례는 언제나 파견 예식으로 끝마칩니다. 사제가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다짐을 권유하면, 신자들은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응답합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사람들은 어떤 이들일까요? 바로 ‘사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가까이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시고, 그들은 예수님을 온몸과 온 마음으로 느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나누어 주십니다. 당신께서 가지고 계시던 능력, 곧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사도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자신의 능력과 장점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분에게서 거저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에게서 파견된 사도입니다. 이때 우리의 재능이나 능력이 아닌 그분의 선택과 부르심으로 그렇게 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기도 안에서, 말씀 안에서, 성사를 통하여 늘 그분 발치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분 곁에서 우리는 그분을 알고 그분을 배우고 그분을 느끼며 그분의 힘과 능력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연대하는 용기와 위로하는 마음을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사도로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이었던, 2004년은 제가 갑곶성지에 처음 발령받아왔던 해였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미사를 할 수 있는 경당을 먼저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원래 있던 건물 일부분을 부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미사 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토목 공사를 했습니다.


솔직히 건물 허무는 것을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오함마라고 불리는 커다란 망치로 마구 부수고 정리하면 되는 것으로 간단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일에 순서가 있다고 토목회사 사장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렇게나 허물다 보면 건물이 무너져서 위험할 수도 있고, 또 시간 절약을 위해서도 체계적으로 따로 떼어 부셔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사로운 욕망을 품습니다. 이를 부셔야지만 깨끗한 마음으로 지금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욕망을 억제할 수 있을까요? 건물을 부수는 것처럼 우리의 욕망도 체계적으로 부숴 나가야 합니다. 간단한 것부터 어렵고 힘든 것을 향해서 체계적으로 말입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셨습니다. 사도는 단순히 제자와 다릅니다. 사도는 파견된 이, 사자, 더 나아가서는 전권을 위임받은 이를 뜻합니다. 특수 사명을 띠고 파견된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와 동등하다.’

사도가 되어 세상에 파견되는 것은 주님과의 동등함을 가지고 파견된 것입니다. 그래서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받았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체계적인 교육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같이 다니며 하나씩 가르쳐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세상에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교육 방식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계속됩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또 신심 서적 등을 통해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이런 노력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처럼 삽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지금 해야 할 것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분명히 도착하게 되어 있어. 오래 걷다 보면 말이야(루이스 캐럴).

인간의 네 부류

인간은 네 부류로 나눠진다고 합니다.

첫째, 훌륭한 사람. 자신을 존중하고 남을 존중합니다. 자신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남도 귀하게 여길 줄 압니다. 타인과의 관계도 잘 이끌어가며 자신과의 관계도 잘 유지합니다.

둘째, 나쁜 사람. ‘나쁜 놈’이 ‘나뿐인 놈’에서 나왔다고 하듯이, 오직 나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나를 귀하게 여기지만 남은 발가락의 때만도 안 여깁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은 어떤 피해를 보든지 알 바가 아닙니다.

셋째, 착한 사람. 남은 존중하지만, 자신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남을 돌보느라 자신이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자신의 욕구보다 항상 남의 눈치가 더 중요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편의를 위해 이 착한 사람을 자꾸 이용합니다. 세상살이에서 상처받아 점점 지쳐갑니다.

넷째, 아픈 사람. 자기도 돌보지 않고 남도 돌보지 않습니다. 남을 돌보지 못하므로 관계가 나빠지고 이것이 아픈 자신을 회복시키기 어려운 쪽으로 작용해서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자신을 싫어하는 것을 넘어 혐오 수준으로 갑니다. 세상만사가 다 싫고 미우니 심한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존중은 훌륭한 사람이거나 최소한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냉담률이 높으면 선교도 힘들어진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뽑으시고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하십니다. 이때 이렇게 분부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하늘 나라는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마음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한 이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다른 민족이나 사마리아인들에게 가지 말라고 하시고 우선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하신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어쩌면 아직 그들의 능력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습니다. 이미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길 잃은 양에게 하늘 나라를 실현하게 하라는 말씀은 우선 ‘내실’을 먼저 기하라는 의미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요즘 코로나가 회복되어도 기존의 50% 신자만 다시 성당을 찾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국 평균으로 하면 신자의 10% 수준만 주일미사에 참례한다는 뜻입니다. 세례받은 10명 중의 9명은 길잃은 양들입니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2021.06.08 방송)에서 방영된 내용입니다.

아파트 9층 베란다에 사납기로 소문난 황조롱이가 날아들었습니다. 주인장의 눈을 오랫동안 응시하던 천연기념물 황조롱이는 다음 날 알 하나를 베란다에 낳고 갔습니다. 그다음 날도 하나, 그다음 날도 하나. 이렇게 6마리의 새끼들이 태어났습니다. 엄마 황조롱이는 아빠 황조롱이가 물어오는 음식을 잘 다듬어 새끼들에게 먹였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흐른 어느 날 새끼 한 마리가 없어졌습니다. ‘이소’를 시작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소란 새가 자기 둥지를 떠나는 첫 비행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없어진 한마리가 이소에 성공하지 못하고 다른 새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파트 바닥까지 떨어진 첫째는 고양이와 다른 동물등의 공격 대상이 되었지만, 아파트 주인의 발 빠른 대처로 전문가를 불러 다시 베란다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첫째 황조롱이는 바로 다시 비행을 시도했고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가 하는 것을 보고 둘째도, 셋째도 그렇게 이소에 성공합니다. 마지막 남은 막내는 좀 약해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있던 어미 황조롱이가 무서워하는 막내를 위해 먹이로 유인해서 조금씩 나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러자 황조롱이의 새끼들이 모두 다 잘 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며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 어때야 하는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어미 새는 새끼 새의 주위에서 항상 새끼 새를 지켜보며 스스로의 힘으로 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줬던 것입니다. 그리고 새끼 새가 아파트 베란다에 있으면 언제나 안전할 것이란 믿음이 있었습니다. 또 새끼들이 하늘 높이 비상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보호해주고 응원해주었습니다. 이는 새끼 새를 안전하게 맡아줄 아파트 주인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렇다면 새가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기 본성을 완성하는 순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본성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리스도처럼 사랑으로 또 누군가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선교’라 할 수 있습니다. 본성적으로 선교하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만들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선교하려면 자녀를 낳아 안전하게 맡길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만약 교회가 그런 사도들을 배출할 수 없고 또 그렇게 한다고 해도 10명 중의 9명을 잃어버리는 상태라면 선교를 하고 싶어도 어떻게 선교할 마음이 생길 수 있을까요?    

 

    영화 ‘가버나움’(2018)에서 집을 뛰쳐나온 자인은 결국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를 법정에 고소합니다. 키울 능력도 없으면서 자신을 낳아놓고 형제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 부모가 원망스러웠던 것입니다. 부모는 능력을 다 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자인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부모를 고소하는 자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냉담률을 줄이지 않고 선교만 강조한다면 이와 같은 상황에 놓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당에 나와서 세례를 받았더니 고해성사도 두렵고 미사 드리는 것도 재미가 없는데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 하나 없다면 그런 식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어쩌면 자신에게 선교한 교회를 고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냉담률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 이전에 ‘기를 살려주시는 목자’로 나오십니다. 그리고 그런 목자들을 많이 보내 달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미사 때 하느님의 자녀가 됨을 기뻐하며 기가 살아야 하고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공동체가 있기에 세상에서도 당당히 기를 펴고 살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냉담률이 높은 것입니다.

     

    먼저 전례를 통해 기쁨,감사,찬미와 소공동체 재정비를 통해  기가 사는, 행복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길 잃은 양들이 돌아올 것이고 그들이 또 새로운 이들을 선교할 것입니다.

    냉담률이 높다는 말은 교회가 매력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먼저 매력 있는 교회가 되어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처럼 선교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는 사도들과 그 곁에 모이고 싶어서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고 싶어 했던 그런 교회의 모습을 희망해 봅니다.

 -조재형신부-

 

교구 사제 모임엘 다녀왔습니다돌아오니 우편물도 있고결재할 서류도 있습니다여행이 좋은 것은 돌아올 집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텃밭에 물도 주고아침이면 산보도 가고신문을 만드는 것도 커다란 축복입니다그러나 지친 일상에 힘을 주고충전의 시간을 주는 것은 여행입니다여행 중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견문을 넓히기도 합니다세상은 넓고할 일은 많습니다새는 좌우의 날개가 있기에 목적지를 향해서 날아 갈 수 있습니다일상의 삶을 충실하게 살았다면잠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습니다코로나 팬데믹으로 아직 멀리 가기가 어렵다면 가까운 곳에서 잠시 쉬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습니다베네딕토 성인은 기도하고 일하라.’고 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전하시면서 따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국의 제야당에 새로운 당대표가 선출되었습니다. 30대의 젊은 정치인입니다경험과 경륜이 많은 중진의 정치인보다는 변화와 개혁을 이야기한 젊은 정치인을 선택하였습니다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40대 기수론으로 정치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던 분들도 있습니다당대표가 된 젊은 정치인이 한국의 정치에도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면 좋겠습니다그렇습니다나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변화와 개혁의 가치를 존중한다면 그것만으로 젊음입니다젊음은 육체적인 나이만이 기준이 아닙니다가치와 생각도 젊음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요한 23세 교황님은 고령의 나이였지만 바티칸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습니다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님도 고령의 나이지만 회칙을 통해서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습니다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하였습니다교회는 옷에 흙이 묻을지라도 세상을 향해 나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의 정치에 새로운 바람이 불면 좋겠습니다지역주의의 낡은 유산들은 사라지면 좋겠습니다반대를 위한 반대로 많은 민생법안들을 팽개치는 일도 없으면 좋겠습니다막말과 가짜뉴스도 사라지면 좋겠습니다정치인들이 존경받고정치인들이 모범이 되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투쟁과 타협의 방법이 좀 더 성숙하면 좋겠습니다아모스 예언자가 말했던 것처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면 좋겠습니다이사야 예언자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의 정치에도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면 좋겠습니다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헌신하는 정치가 되면 좋겠습니다무엇보다 청렴하며 겸손한 정치인이 되면 좋겠습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요합니다결국 선출되는 정치인은 시민들의 투표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영원한 야당이 있고언제나 여당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그런 정치는 독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국민들에게 선택될 수 있도록 국민을 위한국민에 의한국민의 정치와 정책을 만들어야 합니다그런 정당을 선택하는 성숙한 시민의 현명한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요셉은 기근으로 굶주린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었습니다요셉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고버렸던 형제들을 용서합니다요셉은 가족들을 이집트로 데려왔습니다우리의 정치도 고통 중에 있는 사람소외된 사람가난한 사람굶주린 사람들을 위로하면 좋겠습니다그들의 편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증오와 갈등으로 정치를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기 보다는 상생과 화합으로 정치를 신바람 나는 굿판으로 만들면 좋겠습니다해외에 있는 동포들의 안전과 권익도 살피면 좋겠습니다해외에 있는 동포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한국의 정치를 이야기하면 좋겠습니다한국은 코로나 방역도 효율적으로 하고 있습니다한국은 문화와 예술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한국은 경제력으로도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왔습니다이제 한국의 정치도 한 걸음 더 도약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권한을 주셨습니다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는 권한입니다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권한입니다정치인들에게 정치인의 길이 있다면 신앙인들에게는 신앙인의 길이 있습니다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은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에게도 주시는 사명입니다. 2021년도 절반이 훌쩍 넘었습니다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도록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인의 길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충실하게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요셉은 시련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고통 안에 반드시 하느님의 뜻이 있었음을 확신합니다!

 -양승국신부-

 

우리는 요즘 첫째 독서인 창세기를 통해 성경 안에서 가장 재미있고 아름다운 장면으로 손꼽히는 요셉의 인생 역전 스토리를 전해 듣습니다. 봉독하고 묵상할 때 마다 감동 또 감동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총애를 받는 요셉을 시기 질투한 형제들이 의기투합해서 요셉을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건진 요셉은 이집트로 팔려가 노예생활을 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한 인간 존재로서, 그리고 혈육으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비록 요셉이 죽지는 않았지만, 그들 마음 안에는 분명한 살의(殺意)가 있었습니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창세기 37장 20절) 

 

그리고 형들은 또 다른 대죄를 지었습니다.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은전 스무 닢을 받고 팔아놓고서는, 아버지 야곱에게는 그가 산짐승에게 공격을 당해 찢겨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야곱은 옷을 찢고 허리에 자루 옷을 두른 뒤 오랫동안 슬퍼했습니다. 그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었으며, 남은 세월을 눈물로 지냈습니다. 형들은 더 이상 악할 수 없는 불효를 저지른 것입니다. 

 

제가 요셉이었더라면? 하는 묵상을 해봅니다. 아무리 내가 철딱서니 없고 버릇이 없는 동생이라 할지라도, 형들의 만행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한 아버지에게서 나온 혈육으로서, 없애버릴 결심을 할 수 있었는지? 

 

짐승만도 못한 형들을 향한 미움과 분노로 복수의 칼날을 갈았을 것입니다. 언젠가 반드시 내가 받은 수모를 똑같이 되갚아 줄 것이라는 생각을 되풀이했을 것입니다. 

 

아마 요셉도 그런 비슷한 마음으로 이집트에서의 혹독한 생활을 악착같이 견뎌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도움과 불굴의 노력으로 요셉은 놀랍게도 대제국 이집트의 넘버 투 자리에 올라서게 됩니다. 

 

이윽고 이집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비롯한 근동 지방에 대기근이 발생합니다. 요셉의 기지로 이집트는 7년간 대풍년 기간에 잘 저장해놓은 곡식을 백성과 이웃나라에 팔수 있었습니다.

  

요셉의 형들도 곡식을 구하러 이집트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이집트의 통치자가 된 요셉 앞에 형들이 다가와 얼굴을 땅에 대고 절을 했습니다. 저 같았으면, 그 순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형들, 그때 대체 왜 그랬어요? 형들 때문에 내가 평생 타국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형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그러나 요셉은 꾹 눌러 참습니다. 지나간 시절의 고통과 슬픔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습니다. 시련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고통 안에 반드시 하느님의 뜻이 있었음을 확신합니다. 부족한 형들을 관대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너그럽게 형들을 용서합니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기 44장 4~5절)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은 요셉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요셉의 심성이요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요셉을 큰 축복과 은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이영근신부-

 

오늘부터 우리가 듣게 되는 말씀은 <마태복음>의 다섯 개의 설교모음집 중에 두 번째에 해당하는 제10장의 “파견설교”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 9,37)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당신의 일꾼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파견하기에 앞서, “먼저” 사도로서의 권위와 힘을 부여해주십니다.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마태 10,1)

이는 제자들의 권위와 능력이 그들 자신들이 아니라, 당신으로부터 온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요,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징표가 됩니다. 이제 제자들은 단지 예수님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승과 하늘나라를 증거 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특별한 이들이 된 것입니다.

이는 여기 모인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을 따라나선 가난한 이들이지만, 예수님께로부터 파견 받았다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소명을 부여받은 특별한 이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5-6)

복음전도의 대상을 이스라엘로 제한한 이러한 사실은 민족적 편견이나 영원히 지켜져야 할 지침이 아니라, 복음이 하느님의 경륜에 따라 먼저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아직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된 것은 <사도행전>에 따르면, 스테파노가 순교한 후라 할 수 있습니다(사도 11,19-20).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하시니, 우리는 먼저 내 곁에 있는 우리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이 누구인지를 찾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무엇이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인지를 분별하고 그분의 뜻과 하늘나라의 의로움을 앞세워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곧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가까이 왔다.’라는 말의 원어의 뜻은 ‘주먹 안에 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미 내 손에 들린 나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하늘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와 있다.’고 선포 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이미 선물로 주어진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나라는 우리의 협조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 이루어나가는 나라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나라를 우리 안에서 발견하고, 또 실현해야 할 일입니다. 그 사랑, 그 자비를 드러내야 할 일입니다.
 

-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주님!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보내신 곳으로 가게 하소서!

하고 싶은 바를 하는 것이 아니라하라 하신 바를 행하게 하소서!

아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알려주신 바를 선포하게 하소서!

해야 할 바를 그만두지 않고가야 할 길을 멈추지 않으며,

지켜야 할 바를 끝까지 지키게 하소서!

내 나라가 아니라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당신의 나라를 드러내게 하소서아멘.

 약속을 기억하라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주시어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삼았듯이 오늘 우리도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불러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삶의 자리는 주님께서 마련하신 꽃자리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처지, 상황에 구애됨이 없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로 서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자매의 부르심에 대한 묵상글을 적어봅니다.

 

나를 부르신 주님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부르셨는데

파아란 잔디 위에서도

잔잔한 호숫가에서도

때로는 떠오르는 아침 태양과 저무는 낙조의 여울 속에서도

그분은 밤낮없이 부르고 손짓하셨는데도….

스쳐가는 바람소리에서도

노도와 같은 파도 속에서도

당신의 손길 속으로 부르시고 이끌어 주셨는데도…

나는 외면하고 뒤돌아서며 눈길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분은 조금도 섭섭해 하거나 노여워하지도 않으셨으며

끊임없이 기다려 주셨고

내가 방황의 끝자락에서 지치고

좌절과 절망 속에 일어설 수 없어 누워 있을 때에

그분은 살며시 내 손을 잡아 주시며

“나다, 일어나거라. 나와 함께 가자.” 하고 나를 일으켜 주신 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그 한 말씀으로

내 온 생애의 모든 어둠과 죄를 용서해 주신 분.

 

아무런 조건도 없이

사랑이라는 한 말씀으로 죽음의 긴 터널에서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신 내 사랑 주님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선택받은 자녀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내가 느끼든 그렇지 않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 마음을 열어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에로 부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활동을 하느냐? 또는 얼마나 널리 영향력을 미치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범위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은 '하고 싶은 일을 우선 하기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나를 뽑아주신 분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복음은 바로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보여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생명의 책>

 -송영진신부-

 

신약성경에 사도들의 명단과 그들이 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최후의 심판 때에 공개된다는 ‘생명의 책’과

‘모든 사람의 행실이 기록되어 있는 책’이 연상됩니다.

(사도들에게는, 신약성경 자체가 ‘생명의 책’과 ‘행실이 기록되어 있는 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죽은 이들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책들이 펼쳐졌습니다. 또 다른 책 하나가 펼쳐졌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이들은 책에 기록된 대로

자기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묵시 20,12).”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묵시 20,15).”

그런데 열두 사도 명단을 보면, 유다는 처음부터 배반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를 배반자가 아니라 사도로 뽑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스스로 예수님을 배반하고 떨어져 나감으로써

영원히 배반자로 이름이 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이름을 ‘생명의 책’에 기록하셨는데, 그 자신이

자기의 이름을 지우고 ‘죽음의 책’에 옮겨 적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자신의 이름을

끝까지 잘 지켜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행실이 기록되어 있는 책’에는 사도들이 잘못한 일들과

실수한 일들과 부족했던 점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록 뒤에는 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회개했는지,

또 자신의 부족한 점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에 관한

기록이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과거에 했던 일’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현재 상태’에 대한 심판입니다.

<사도들에 대해서 말할 때, 사도들이 잘못한 일들과 부족했던 점들만 말하고,

그들이 끊임없이 회개하고 노력한 것을 말하지 않는 이들이 있는데,

사도들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고, 불공평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사도들은 철저한 회개와 끊임없는 노력으로 완전함에 도달한

분들로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는 분들이고, 위대한 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들을 존경하고 있고, 그들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구원받을 자격을 얻게 되면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됩니다.

“...... 이들은 클레멘스를 비롯하여 나의 다른 협력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려고 나와 함께 싸운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이들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적혀 있습니다(필리 4,3).”

“승리하는 사람은 이처럼 흰옷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고, 내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묵시 3,5).”

그렇지만 이름이 한 번 적혔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고,

배반자 유다처럼 중간에 떨어져 나가면 이름이 지워집니다.

주님께서 지우시는 것이 아니라,

떨어져 나가는 사람 자신이 자기의 이름을 지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1-7)”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과 ‘병자들을 고쳐 주는 능력’을

주시고, 복음 선포 임무를 맡기신 것은, 당신이 하시던 일을 당신의 승천 후에도

사도들이 계속 이어받아서 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하는 일은, 그리고 사도들과 함께 교회가 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 이어받아서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단순하게 표현하면,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건물이라면, 사도들은 교회의 주춧돌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0-22).”

주춧돌은 건물의 가장 밑에서 건물 전체를 받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사람들을 섬기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뽑으실 때,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사람들에게 권세를

부리라고 뽑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라고 뽑으셨습니다(루카 22,25-26).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의 그 뜻을 충실하게 실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일과 교회의 주춧돌로 사도들을 뽑으신 일과

그 주춧돌 위에서 사람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신 일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뒤에야 계획하고 실행하신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 이전부터(한처음부터) 계획하신 대로 하신 일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계획과 부르심’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4-5).”

사도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모두 ‘한처음부터’ 뽑혔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어쩌다가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한처음부터

사랑하신 소중한 존재이며, 하느님께서 어떤 임무를 맡기셔서

세상에 보내신 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연히 태어난 존재라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되고,

만일에 실제로 그렇다면, 우리는 참으로 비참하고 불쌍한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사도들이 받은 부르심과 임무만 고귀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받은 부르심과 임무도 고귀합니다.

세속의 눈으로 볼 때에는 높거나 낮거나 귀하거나 천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하느님의 부르심과 임무에 그런 차이나 차별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하고, 각자 자신이 할 일을 충실하게 실행하면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인생을 마지막까지 ‘잘 살아야’ 합니다.

 복음: 마태 10,1-7: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다.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비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선택하셨다. 그리고는 당신께서 모든 질병과 병을 고쳐 주셨듯이, 제자들에게도 치유 권한을 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그 일을 해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속하도록 열두 사도를 선택하신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구약을 완성하시는 예수께서 새로운 백성을 이끌어갈 열두 명을 뽑아 사도로 부른 것으로 본다.

 

그런데 제자들의 신분을 보면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의아한 선택이셨다. 어부, 세리, 열성 당원과 같은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로 볼 때 지도자급에 속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것을 잘 아시고 꿰뚫어 보시는 주님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제자들로 선택하셨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과 하느님 지혜의 차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실 때, 지금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보신 것이 아니라, 그를 어떤 사람이 되게 하여 그가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보시고 그들을 선택하셨다. 즉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장차 무엇을 해나갈 수 있는가를 보고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다. 즉 자신의 모든 능력을 겸손되이 하느님을 위해서 쓸 줄 아는 사람을 택하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그러면서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5절) 하신다. 이 말씀은 다른 민족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실과 생활양식을 제자들이 피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치유해 주셨다. 이 말씀 바로 이단자들의 집회에 가지 말라는 경고이다.

 

이 분부는 또한 자신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가 다른 민족들과 이단자들의 길을 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그들은 신앙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도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6절) 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다음으로 다른 민족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게 되어있었다. 결국은 유대인들이 부름을 받고도 회개하기를 거부하여 다른 민족들에게로 복음이 선포되었다. 이는 다른 민족들이 더 큰 은총을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제자들은 하늘나라와 그것이 뜻하는 모든 것을 선포하였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7절) 어떤 사람이 복음이 선포되지 못하도록 자물쇠를 채운다고 하여도, 이제는 세상이 그것을 선포할 것이다. 복음이 전해지면 세상은 파멸하고 만다. 그 세상은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살아가려 하므로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그렇게 변화시키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10, 7)

-한상우신부-


하늘 나라를
찾습니다.

하늘 나라는
우리의
다양성과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인정하는
나라이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새로운 삶의
나라이다.

가까이 온
하늘 나라는
이렇듯
친근한
고향과 같다.

하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하늘 나라의 길을
힘차게
걸어가신다.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시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는
복음의 길이다.

하늘 나라는
하늘 나라로
이어지고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완성된다.

하늘 나라의
구원은 단연코
실천이다.

가슴 뛰도록
기쁘고 행복한
하늘 나라와의
만남이다.

하늘 나라가
우리의 참
스승이시다.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도 맑다.

가까이 온
하늘 나라가
맑다.

맑기에 아파도
희망이 있다.

마음과 실천
부르심과 응답은
분리될 수 없다.

하늘 나라가
먼저
하늘 나라를
여셨다.

절망과
간절한 마음을
위로하시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가까이서
가르쳐주신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다시 묻는다.

하늘 나라가
부재중이
아니라
우리의 실천이
부재중인 것이다.

하늘 나라는
실천의 나라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계승하는 열두 사도를 소개합니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마태 10,2)
복음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이름을 하나하나 소개합니다. 인척 관계나 직업 등의 특이점을 간략하지만 명확히 서술하면서요. 그들은 영향력 있는 신분이나 제도권 안의 인물들이 아닌, 그저 평범하고 단순한 서민에 가까운 이들이지요.

제1독서는 이집트의 재상이 된 요셉과 나머지 형제들의 만남의 순간을 보여줍니다.

"그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창세 42,21)
막내 벤야민을 제외한 요셉의 이복 형들은 요셉을 무척 시기하여 살해할 음모까지 꾸몄습니다. 하지만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은 이방인들에게 발견되어 이집트에 팔려가게 되었고,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하느님의 보호로 재상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온 세상에 든 기근 때문에 양식을 사러 온 형들을 요셉은 부러 을러매었고, 이 과정에서 형들은 요셉에 대한 자기들의 잘못을 소환합니다. 그 죄의식이 하도 깊어서 닥쳐온 위기를 그 잘못의 결과로 받아들이지요. 시기와 증오가 낳은 폭력은 피해자 못지 않게 가해자에게도 깊은 생채기를 내고 그 자신을 죄로 옭아맨다는 걸 보여 줍니다.

성경은 이처럼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의 뿌리인 열두 형제의 모습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 줍니다. 그 안에서 일어난 험하고 수치스런 사건들도 하느님 구원 계획을 향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지요. 복음 속 열두 사도 역시 그들의 자질과 능력이 아니라 은총으로 하느님 구원 계획에 초대되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6)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치 구약 백성의 배타적 선민 사상이 그대로 계승된 듯한 오해를 살 수 있지요. 사도들이 받은 구마와 치유, 그리고 하늘 나라의 선포를 이방 민족이나 사마리아가 아닌 이스라엘에게 베풀라고 콕 짚어 명하시니 말입니다.

하지만 복음서의 다른 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방인과 사마리아인들을 포용하시며 구원의 지평을 넓히십니다. 예수님께서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실 리 없으시니 그분 마음을 살펴야겠지요.

제1독서 창세기에 기록된 세계적 기근의 위기 상황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구하시기 위해 먼저 요셉을 이집트로 들여보내십니다. 형들의 시기와 증오는 명백한 악이지만 하느님께서 그조차도 선으로 이끄셨지요.

하느님은 요셉에게 허락하신 지혜를 통해 이스라엘은 물론 이집트를 비롯한 주변 민족들까지 구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온 세상에 보편적으로 펼쳐질 하느님 보편적 사랑의 발화점이고 출발선이며 교두보가 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열두 사도로 뽑히자마자 이루어진 첫 파견에서 여러 모로 서툴고 미숙한 사도들이 '그래도' 하느님을 아는 동족에게서 먼저 시작하도록 안배하신 배려일 수도 있습니다. 


이 구원의 메시지와 활동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기본 관습을 듣고 배운 이스라엘 안에서 무르익고 열매를 맺다가 "때"가 되면 이방신을 섬기는 다른 민족들에게까지 자연스레 확장될 것입니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스라엘부터라고 본다면 사도 바오로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구원 역사의 연속적 맥락이 한 눈에 보일 겁니다.

하느님 백성의 역사는 증오와 용서, 폭력과 사랑, 결핍과 충만이 마치 시소처럼 그리고 파도처럼 반복되며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구약의 열두 선조, 신약의 열두 사도 못지않게 저마다 부족하고 때로는 악하기까지 한 우리가 하느님 자녀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이 모두를 당신 구원 계획 안에 품으시는 하느님의 거대하고 무량한 사랑의 의지 덕분일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 백성의 역사 안에서 눈에 띄이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점 하나 크기도 못 되는 우리지만, 그분께는 개개인이 누구도 대체할 수 없이 고귀하고 소중한 존재들이랍니다. 우리에게 조건없이 쏟아부어진 사랑의 자취들이 모여 하느님 구원 계획은 완성되어 가는 중이니, 실패처럼 보이는 현실 안에서도 희망을 놓지 말고 나아갑시다. 우리는 부족한 죄인이지만, 분명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 안에 들어 있답니다. 

 모이는 자, 모으는 자 

 -김찬선신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오늘 복음은 제자들중에서 열둘을 사도로 부르시고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의 <부르심과 파견>의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진지하게 성찰한다면 누구나 이것이

사도들만의 얘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성찰할 것이고,

저도 여러분도 사도로 부르심받고 파견되는 존재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란 어떤 존재입니까?

 

첫째로 부르심에 주님을 중심으로 모인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뭐 대단하다고 하느냐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것도 잘 성찰하면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란 주님께서 부르지도 않았는데도 제자들이 마음대로

또는 잇속으로 모여든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응답한 존재이며

그뿐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을 걷어차지도 않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둘째로 모인 존재란 혼자가 아니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만 부르시고 그래서 혼자 갔으면 모였다고 하지 않지요.

 

우리 성소의 아주 중요한 측면입니다.

우리의 성소는 개별 성소이기도 하지만

모임의 성소요 그래서 교회 성소입니다.

 

수도자로 치면 우리는 독수 수도자가 아니라 공동생활 수도자이고,

주님 앞에 공동으로 나아가고 주님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도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것이듯

우리의 숫자가 셋이나 넷밖에 안 될지라도

우리가 주님을 중심으로 모이면 우리는 교회를 대표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이는 존재일 뿐 아니라 모으는 존재여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특별히 부르심받는 이유도,

파견되는 이유도 바로 그리고 다 이것 때문입니다.

 

나만 주님 곁에 있고,

나만 주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나만 주님의 치유를 받고,

그래서 나만 구원을 받는

그런 이기주의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는 모으기 위해 파견되어야 합니다.

 

어제 복음의 끝에 목자 없는 양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음을 한탄하시며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추수 밭 주인에게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라고 하신 주님의 뜻에 따라

사방에 흩어진 주님의 양 떼를 모으기 위해 파견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을 자랑스럽게나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부담스럽게만 생각할 사람은 빠질 것입니다.

 

며칠 전 이 영광스러운 일에 초대를 하였더니

나이 핑계를 대며 빼는 것이었습니다.

 

늙어서도 늙은 것 만큼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늙은이이면 늙은 사람을 모아도 되는데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부르심을 걷어차니 불쌍해보였습니다.

 

저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7월 10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