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7월 6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1. 7. 6. 07:26

2021 7 6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시는 곳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마태오 9,32-38)


Jesus went around to all the towns and villages,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proclaim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curing every disease and illnes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저는 평소에 꽤 열려 있는 시각과 사고를 가졌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또한 선입관을 버리고 내 안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잘 바라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얼마 전, 우연히 트로트 생활 성가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나는 리듬과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박자도 어색하고, 그 자리가 무척이나 불편했던 기억이 납니다. 머리로는 ‘트로트도 성가가 될 수 있다.’라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거부하고 있었나 봅니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것을 차별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스스로 열린 마음을 가졌다는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행동, 말씀과 시각은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낯선 것이었습니다. 군중은 언제나 예수님을 보고 놀라워하였고, “이런 일은 본 적이 없다.”며 감탄하면서도 낯설어합니다. 바리사이들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그 낯섦은 예수님에 대한 시기와 질투, 그리고 미움으로 발전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욕심과 더해져 결국 그 낯설고 다른 것을 거부하고 오해하면서 자신의 이기적인 시선과 마음에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하늘 나라의 복음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하고 스스로 고통과 아픔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희생과 수고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온 마음으로 가난하고 길 잃은 사람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때로는 죽음 앞에 당당해야 하고 두렵지 않은 척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 낯선 일을 나의 일로, 나의 일상으로 만들어 가는 주님의 일꾼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한 당신을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떤 분이 제게 기도를 부탁하십니다. 암으로 인해 많이 힘들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무슨 암인데요?”라고 여쭤보니 ‘갑상선암’이라고 하십니다.

갑상선암은 가장 흔한 암이고, 간단한 수술로도 완치가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최근에는 그런 수술조차 권장하지 않는다는 말도 들었지요. 더군다나 잘 전이가 되지 않아서 착한 암이라고 불린다고 하더군요. 이런 말을 들은 기억이 나서 “그래도 다행이네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자신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암은 갑상선암 중에서도 1%에 해당하는 매우 위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전이가 되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검색해 보니 정말로 그런 암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상식의 오류에 자주 빠집니다. 언젠가 들은 이야기가 마치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처럼 말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나와 다른 의견이라고 무조건 반대하고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품습니다.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이 점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말 못 하는 사람이 말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하느님의 힘’ 외에는 불가능하다고 교부들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상식의 오류에 빠집니다. 부정적인 마음을 품고 있다 보니, 하느님의 일이 아닌 마귀 우두머리의 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의견이라고 무조건 반대하고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품는 바리사이의 모습이 지금을 사는 우리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상식의 오류에 빠져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또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 기쁨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힘든 세상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주님의 일꾼이 필요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너무 적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께 그 일꾼을 보내주십사고 계속 청해야 하겠습니다.
용기란 일어나서 말하는데도 필요하고 앉아서 듣는 데도 필요하다(윈스턴 처칠).

인생

5월에 지방에서 충청도 대전에서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인연으로 주례를 서게 되었지요. 그 시각이 낮 12시 30분이었습니다. 이 결혼은 모두에게 커다란 기쁨을 가져다주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1시가 넘어 결혼식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 좋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글쎄 저의 작은 아버지 부고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1시에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결혼의 즐거움이 가득할 때, 사랑하는 가족은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삶과 죽음이 이렇게 연관되어있습니다. 항상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도 함께하면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삽니다. 이런 인생을 바라보면서 왜 겸손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삶과 죽음을 모두 감당하기에 우리는 너무나도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기를 살리는 리더, 기를 죽이는 리더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두 리더의 상반된 모습이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유다 지도자들을 대표하는 바리사이들과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마귀에 들려 말을 못 하는 한 사람을 치유해 주시어 말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많이 하면 실수를 많이 해서 최대한 말을 안 한다고 합니다. 좋은 생각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두려움에 짓눌려 있는 것인지도 모르니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귀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존재이고 예수님은 입이 열려 말을 하게 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에 바리사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권한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지도자들에게 시달리며 고통받는 당신 백성을 보시고 가엾어하십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자신들이 아니면 안 된다고 믿는 유다 지도자들에 반해서 예수님은 마치 당장이라도 떠날 분처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양들의 기를 살려주시는 예수님의 모범이십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믿는 목자는 양들의 기를 죽입니다.

     

    이무석 교수는 자신의 책 『30년 만의 휴식』에서 자신이 썼던 논문 주제인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분석해 놓았습니다.

    고흐는 스물일곱 살에 미술을 시작해서 서른일곱 살에 자살하기까지 불과 10년 동안 850여 점의 창조적인 미술 작품을 그린 천재 화가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불행했고 정신이상으로 귀를 자르더니 2년 후에는 가슴에 권총을 쏘고 자살했습니다.    

 

    이 교수는 고흐의 이런 삶 이면에는 아버지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고흐는 엄격한 켈빈주의 목사인 아버지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엄격함에 고흐는 죄책감을 많이 느꼈고 그것을 씻기 위해서는 자신을 학대하거나 혹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에 대한 지나친 연민을 가졌습니다.    

 

    그가 누예넨의 광산에서 전도사 생활을 할 때는 불쌍한 광부들을 위해 자기 빵과 매트리스까지 주고, 자신은 2년 동안 거의 거지처럼 살았습니다. 헤이그에서 그림 공부를 할 때는 늙은 창녀와 그녀의 딸을 먹여 살려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농부들을 그렸고 그들의 거친 손을 예찬했습니다.    

 

    이런 동정심은 바로 아버지에게 짓눌려 고통받아온 불쌍한 자신의 모습을 그들에게서 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약한 자들을 돕는 선한 행동을 한 것이므로 죗값을 치르는 속죄 행위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고흐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5년쯤 되었을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그 사건 이후 그의 그림은 극적으로 발전했고, 대작이 쏟아져 나왔으며, 색채도 화려해졌습니다. 아마 그를 괴롭히던 엄한 아버지로부터의 해방 덕일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안에서 아버지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아버지처럼 남을 비난하고 폭발적으로 화를 자주 냈기 때문에 대인관계가 아주 안 좋았다고 합니다. 보통은 미워하는 사람을 자신도 모르게 닮아간다고 하는데 귀를 자르던 날 밤에도 동거하던 고갱과 싸운 끝에 귀를 잘라 고갱의 단골 창녀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생겨난 분노와 죄책감, 자학성과 보복의 마음에 순종한 것뿐입니다.    

 

    고흐를 도와준 사람은 그와 네 살 터울인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림 매매업자였는데 고흐에게 생활비를 대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생마저 결혼해 아들을 낳게 되었고 사업도 잘 안 되어 수입도 시원치 않게 되자 형이 부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귀를 자르고 자살한 이유는 친구와 동생에게까지 부담이 되어버려 누구도 그의 기를 살려줄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며칠 전에 소개해 드렸던 쓰레기로 가득 찬 이층집 가장은 아들에게 마치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아들이 요구하는 것을 가져다 바쳤습니다. 아들이 자신에게 의존하게 한 것입니다. 이는 아들의 자존감을 끌어내리는 행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가 없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부터 그림의 꽃을 피웠습니다. 아버지의 영향력이 그만큼 컸던 것입니다.

    자녀는 어쩌면 부모가 사라져주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 혼자의 힘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은 지도 모를 일입니다. 부모의 존재 자체가 자녀의 기를 꺾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를 세워줄 목자는 반드시 존재해야 합니다. 고흐에게 고갱도 동생도 사라졌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기를 세워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믿어줄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고흐는 850여 점 그림 가운데 단 1점밖에 팔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기를 살려줄 만한 목자를 만나지 못한 고흐는 그렇게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들의 리더로서 어서빨리 자녀들에게 자신들이 없어도 충분히 잘 살아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어야 합니다. 아니면 영원한 아이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로서 자신에게 의존하는 아이가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아이는 영원히 어른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공동체를 만들 때도 그 공동체를 만든 사람은 예수님처럼 반드시 빠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공동체를 만든 이가 빠졌을 때 더 잘 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지 그가 빠졌을 때 무너지는 공동체는 그 구성원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공동체를 만들었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구성원들도 평소에 기가 꺾여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모든 게 잘 돌아가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 기를 살리는 리더의 모습입니다.

    훌륭한 리더는 양들 안에서 기를 죽여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악령을 믿음으로 쫓아내어 자기의 말을 하게 만드는 목자입니다. 만약 양들이 해야 할 말을 목자에게 막 할 수 있다면 그 목자는 기를 살리는 목자입니다.

 -조재형신부-


사제 모임에 갔다가 안경을 잃어버렸습니다집에 여분의 안경은 있지만 모임 중에 안경 없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습니다다행히 차에는 다촛점 선글라스가 있어서 운전에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돌아보니 잃어버린 물건들이 있었습니다지갑을 3번 잃어버렸습니다지갑을 잃어버리면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을 새로 발급 받아야 합니다신용카드는 정지시키고 새로운 카드를 신청해야 합니다자동차 키도 2번 잃어버렸습니다열쇠 전문점에 가서 키를 새롭게 만들었습니다안경도 2번 잃어버렸습니다자주 가는 안경점에 저의 시력이 기록되어 있어서 새롭게 안경을 만들었습니다눈에 보이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깝기도 하고새로 만들려면 번거롭기도 합니다그러나 다시 구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잃어버리면 회복하기 어렵고다시 구하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건강입니다나쁜 생활 습관과 과도한 음주흡연은 우리의 몸을 조금씩 상하게 합니다지나친 걱정과 근심도 우리의 몸을 병들게 합니다많은 분들이 대사증후군을 겪고 있습니다대사증후군은 비만좌식 생활불규칙한 식사스트레스 등으로 생긴다고 합니다당뇨고혈압고지혈증동맥경화가 생길 수 있습니다미국 성인의 60%가 대사증후군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한국인의 대사증후군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대사증후군을 예방하고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운동긍정적인 생각올바른 식습관이 있어야 합니다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가족들을 사랑하고이웃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것도 커다란 축복이고 은총입니다.

 

자본주의와 능력주의는 경쟁과 성과를 이야기합니다성공명예권력을 추구합니다그것이 풍요로운 삶을 주기 때문입니다이윤을 위해서는 양심을 속이기고 합니다이웃에게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사랑해야 할 가족들마저 외면하기도 합니다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어디로 가야하는지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엉킨 매듭을 풀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저는 성격이 급해서 엉킨 매듭을 천천히 풀지 못하는 편입니다종교란신앙이란 무엇일까요그것은 우리들의 삶에서 생기는 엉킨 매듭을 풀어주는 것입니다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은 외면한다고 해서덮어버린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진지하게 내면을 들여다보고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야곱이 하느님과 씨름을 하는 것은 어쩌면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전하고 있습니다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이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그것을 기쁘게 사용하고하느님을 찬미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교회는 옷에 흙이 묻을지라도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지금의 시대에도 자아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일구어가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느끼신 연민의 마음은 잠시 스쳐지나가는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가장 근원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었습니다!

 

 

우리 인간 각자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생각해봅니다. 그 마음은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던 군중을 향해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이 아닐까요? ‘가엾은 마음’ ‘측은지심’ ‘연민의 마음’

  

복음서에서 가끔 발견되는 ‘하느님 마음’과 관련된 단어가 있습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와 같은 구절이 그렇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그냥 평범한 마음이 아니라, ‘뱃속’ ‘창자’ ‘내장’ ‘오장육부’를 지칭합니다. 

 

'뱃속‘ 그곳은 어떤 곳입니까? 이곳은 가장 친밀하고도 강렬한 감정이 자리 잡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강렬한 사랑과 강렬한 미움이 커가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이 느끼신 연민의 마음은 피상적인 것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잠시 스쳐지나가는 감정도 아니었습니다. 존재의 가장 근원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이셨다는 것은 모든 삶의 근원이 떨리고, 모든 사랑의 근거가 활짝 열리며, 거대한 사랑의 물줄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마음은 부족한 인간의 머리로 측량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당신 존재 전체로, 혼신의 마음을 다해 우리 각자를 향해 연민의 마음을 보내시는 주님께 그저 송구스런 마음으로 감사드릴 뿐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아마도 중병에 걸려 죽어가는 어린 자녀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는 부모의 마음, 그야말로 찢어지는 마음,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슬픔의 마음, 어떻게 해서든 되살려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일 것입니다. 

 

사흘 동안이나 굶주린 군중을 위해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는 기적 역시 그 발로는 우리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이었습니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 기적 역시 출발점은 우리를 향한 연민의 마음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지독한 마귀의 횡포에 시달려온 사람의 말문을 열어주심 역시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측은지심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예수님의 마음에 군중을 크게 환호하고 감격하는데, 오직 한 그룹 바리사이들만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삐딱하고 부정적인 시선으로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봤습니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마태오 복음 9장 34절) 

 

세상에 반역도 이런 반역이 없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하고 해방시키러 오신 예수님께, 수많은 치유와 기적을 통해 자신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계신 예수님의 능력 앞에 감사와 찬미를 드려도 부족한데, 그분을 마귀 두목 친구쯤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신성 모독이 어디 있겠습니까? 

 

유다 사회 안에서 나름 잘 나간다고 자부하던 그룹이 바리사이였습니다. 속된 사람들, 죄인들과는 철저하게 스스로를 분리시키고 상종도 하지 않던 자칭 거룩한 집단이 바리사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한 가지 있었으니, 지나친 우월감과 자만심으로 인해 자신들만의 틀 안에 갇혀 쇄신과 성장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역시 쇄신과 성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규모가 엄청난 국립도서관에서만 10년 세월을 산 생쥐가 한 마리 있다고 칩시다. 도서관에 근무 중인 그 어떤 직원도 생쥐보다 더 많은 경력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생쥐가 10년간 도서관에 살았다고 해서 박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가 수도회에 입회를 하고 수도자로 오랜 세월 수도원 안에서 살았다고 해서 그가 자동으로 대 영성가나 성인(聖人)이 되지는 않습니다. 신앙의 쇄신과 성장을 위해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항구하게, 지속적으로 각고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생쥐 한 마리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이영근신부-


마태오복음사가는 5~7장의 산상설교에 이어, 8~9장에서 10개의 기적 이야기를 모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마지막 이야기로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이를 치유하신 이야기와 추수할 일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 못한 이를 치유하신 다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6)
착한 목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음”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를 그냥 둘 수 없는 당신의 마음입니다. 꺼져가는 불씨를 보고 마음이 상해서 못 견디시는 마음입니다. 가만 두고는 차마 못 베기는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온몸으로 몸서리치게 겪고 있으면서도 놓쳐버리지는 말아야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에 안달이 나신 그분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그 길은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에게서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음”을 놓치지 않는 일입니다. 그를 못 본 척 하지 않고, 모른 척 하지 않는 일입니다. 무관심하지 않는 일입니다.
사실, 그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중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함은 우리가 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달리는 이들”,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무능해서 시달리고, 고통과 슬픔, 질병과 가난, 근심과 절망에 시달리는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의 모습입니다. “기가 꺾여있는 이들”, 인정해주지 않아서 고용해주지 않아서 거리에서 집에도 못 들어가는 기 꺾인 이들, 돈이 없어 자녀들에게도 기 꺾여 사는 이들, 고국을 떠나와 이방인이 되어 기가 꺾여 살아가는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의 모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은 적다.”(마태 9,38)
어쩌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꾼이 적어서가 아니라, 일꾼들이 제 할 일을 안 하는 데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느 날, 한 수도자가 벌거벗고 굶주린 채로 길거리에서 벌벌 떨고 있는 소녀를 보았습니다. 그는 화가 치밀어서 하느님을 성토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왜 두고만 보십니까? 왜 아무 것도 안 하시는 겁니까?” 하느님께서는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불현듯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안 했다니, 너를 만들었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시어 우리 안에 이미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굶주린 소녀,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는 이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우리가 일꾼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주님!

당신께서는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절망과 슬픔에 기가 꺾인 이들의

바람막이로 저를 보내셨습니다.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제 마음에 심으소서.

제 손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게 하소서제 말이 꺼져가는 불씨를 끄지 않게 하소서제가 그들을 어루만지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있는 그들을 더 이상은 못 본 척 무시하지 않게 하소서.

모르는 척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아멘.

 가엾이 여기는 마음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9,38).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이 많다는 것은 돌봐줘야 할 사람이 많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보는 일을 할 사람이 적다니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 희생 봉사하는 사람보다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거두는 날 진정한 봉사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확을 한다는 것은 일을 마무리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마태3,12) 분으로 선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수확한다는 것은 우리인생 마지막 날의 심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정 심판의 날에 알곡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라는 곳간을 차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준비시킬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 일꾼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입니다. 주님의 도구요, 연장으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추수 날에 곳간에 모아들일 알곡이 된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성장되는 것입니다. 씨앗을 뿌렸으면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내며 관리를 해야 합니다. 햇볕을 쬐어야 하고 비바람을 맞으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아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뿌려졌다면 그 영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하고 영의 비추임을 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사실 매 순간이 마지막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 안에서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천국을 살지 못하는데 훗날 어찌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고 또 우리의 이웃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꾼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일꾼으로 복음의 선포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 주셨듯이 교육사업과 선교, 병원 사목과 복지사업에 헌신할 일꾼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헌신을 통해 구원사업이 완성되는데 한 몫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측은지심,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희망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엾은 마음!', 다시 말하면 애간장이 녹아나는 아픔으로 함께하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본다면 바로 그 자리가 기적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송영진신부-


“그들이 나간 뒤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마태 9,32-34).”

 

‘마귀 들려서 말을 못하는 상태’는 ‘마귀의 억압 때문에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는 장애를 갖게 된 상태’인데,

그런 경우에는 마귀를 쫓아내면 그 장애를 고칠 수 있습니다.

마귀 들린 상태를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마귀의 힘에 눌려서

진리를 말하지 못하는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군사독재 정권에게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빼앗긴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마귀는 원래 거짓말만 하는 존재이고,

사람들이 진리를 말하는 것을 방해하는 존재입니다.

특히 ‘구원의 진리’인 예수님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것을 방해합니다.

(복음 전하는 일을 방해당한다면,

그 방해는 마귀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귀 들린 상태는 마귀에게 자유의지를 빼앗긴 상태입니다.

그 경우에 저항력이 약한 것을 탓할 수는 있지만,

마귀 들린 일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유의지로 마귀 편에 서는 것은 명백하게 ‘죄’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정하지 않고,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라고 비방한 것은,

예수님의 일을 방해한 짓이고, 마귀 편에 선 일입니다.

마귀 들려서 말을 못하는 사람은 장애자일 뿐이지만,

그 바리사이들은 마귀 편에 서서 진리를 왜곡하고 모독한 범죄자들입니다.

(마귀 들려서 말을 못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상태, 즉 ‘악한 상태’입니다.)

 

물론 바리사이들 자신들은

자기들이 마귀 편에 섰다는 것을 강력하게 부인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귀들은 적이다.” 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분을 모독하고, 그 일을 부정하는 것은,

마귀들이 바라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일 뿐이고,

결과적으로 마귀들 편에 서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마태 12,30).”

세속 일에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 상태가 있을 수 있고,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서는,

즉 인류 구원 사업에서는 중간도 없고 중립도 없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지 않는 것은 마귀들 편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이분법적 논리’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의 성격이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

그 나라의 ‘안’이 아닌 곳은 모두 ‘밖’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하면 모두 멸망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구원도 아니고 멸망도 아닌 중간 상태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5-38)”

 

여기서 ‘병자들’은 육체적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로, ‘허약한 이들’은

영적으로 허약한(병든)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도 ‘허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영육간의 건강’을 주셨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혼의 병’, 즉 ‘죄’를 치유하는 방법은 ‘용서’입니다.

물론 죄인 자신의 회개도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던’ 것은,

여기서는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의

인류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인생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하루살이처럼 방황하는 인생을 살다가

허무하게 생을 마치는 인간들의 모습을 뜻하는 말입니다.

시달린다는 말은, 힘없는 사람들이 힘 있는 자들에게 시달린다는 뜻이기도 하고,

인생고에 시달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기가 꺾여 있다는 말은,

희망도 없이 생명력도 없이 정처 없이 방황하는 모습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인간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인간들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려고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살고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목자이신 분’이고, 인생의 의미와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려 주려고 오신 ‘빛이신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으면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한 인생을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생명이신 분’입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그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기도 하고,

그 생명을 누리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은 전부 다

우리 쪽에서 잘 받으려고 능동적으로 노력해야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는 말씀을,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복음 선포에 응답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해

주십사고 청하여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복음: 마태 9,32-38: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조욱현신부-


사람들은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다. 그는 말을 못 했으므로 자신을 위해 청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데려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귀는 그의 혀를 묶어 놓았고, 영혼도 차꼬를 채워 놓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곧바로 그의 장애를 해결해 주셨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 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33절)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33절) 군중이 이렇게 놀라워하니까, 바리사이들이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33절) 비방을 한다. 군중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 못 하는 사람이 말을 하고 한때 그가 거부했던 분께 영광을 드릴 수 있도록 혀가 풀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하며 예수님을 헐뜯는다. 이 말은 그들의 사악함에서 나온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헐뜯는 자들을 꾸짖지도 않으시고, 오직 선을 행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두루 다니셨다. 하늘나라의 복음과 병 치유라는 두 가지 축복을 하고 그들을 직접 찾아다니셨다. 그것을 주시기 위해 작은 마을도 지나치지 않으시고 온갖 곳을 두루 다니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왜 가엾은 마음이 들었을까? 주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더러운 영의 손아귀에 든 데다 율법의 짐까지 지고 있어서 가엾이 여기신 것이 틀림없다. 그들이 다시 성령의 보호 아래로 돌아가도록 도와줄 목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선물의 열매는 풍성히 준비되어 있는데 그것을 거둘 일꾼들이 필요하였다. 영의 선물은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줄지 않는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37-38절) 주님은 하느님께서 수확하는 일꾼들을 넉넉히 보내시어 성령의 선물이 준비하고 있는 것을 거두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신다. 기도와 훈계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선물을 쏟아부어 주신다. 풍성한 수확은 모든 믿는 이를 의미하고, 적은 일꾼은 수확을 위해 파견된 사도들과 그들을 본받는 사람들을 말한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 선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려준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권한을 지니고 계심을 드러내신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이 청도 기도도 하기 전에 제자들을 사도로 지명하시며, 타작마당을 키질하여 알곡은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버리는 분에 관한 요한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그분 자신이 농부이며, 수확할 밭의 주인님임이 드러난다. 그분이 그들을 수확할 일꾼으로 파견하셨다면 수확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일꾼으로 사는 삶을.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보는지 물으십니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9,33)
예수님께서 말못하는 이에게서 마귀를 쫓아주시자 군중이 놀라서 탄복합니다. 신체적 결핍으로 참 고통스러웠을 한 형제가 온전함을 회복한 놀라운 순간이니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지요.

그들은 이 기적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입고 오신 메시아를 봅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예수님의 현존을, 이제 이스라엘을 이민족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실 메시아의 도래처럼 받아들입니다. 메시아를 통해 다가온 하느님의 권능을 바로 그 현장에서 자기들의 눈으로 확인한 것이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지요.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태 9,34)
그런데 다른 시각도 존재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이 기적을 냉혹한 시선으로 보며 비판합니다. 선하고 복된 일에서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귀를 떠올릴 수도 있나 봅니다. 마귀의 힘이 회복이 아닌 훼손과 파괴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보고 싶은 대로 보기 때문일 겁니다. 군중이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을 경외의 눈으로 보았다면 바리사이들은 혐오와 비하의 시선으로 경계하는 겁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6)
가엾은 마음. 이것이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으로 사람을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저마다 약하고 아프고 슬픈 사연을 짊어진 채 나름 애쓰며 살아가는 실존들이 그저 안타깝고 또 소중하십니다. "왜 그것밖에 안 돼냐? 뭐가 그리 힘들다고. 다 네가 잘못해서 그런 거지. 넌 가망이 없다. ..."는 등의 혹독한 비난은 그분의 언어가 아닙니다.       

제1독서에서는 야곱의 귀향 장면이 펼쳐집니다.

"그 무렵 야곱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야뽁 건널목을 건넜다."(창세 32,23)
아버지의 복을 가로챈 야곱이 형 에사우의 분노를 피해 도망갔던 길을 지금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강을 건너는 이 상징적인 순간은 형제에게 해를 입히고 홀로 떠났던 죄스런 과거를 정화하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하는 시공간입니다.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창세 32,27)
야곱은 신원을 알 수 없는 누군가와 밤새 씨름을 합니다. 형 에사우를 만나는 일처럼 이 또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과정입니다. 성경 저자는 야곱과 씨름을 한 이가 하느님, 또 그분의 천사라고 해석합니다. 실제로 야곱은 목숨을 건 이 투쟁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지요.

아울러 이 씨름은 야곱 자신이 내면에 스스로 거짓 우상처럼 박아둔 에사우의 허상과의 싸움일 수도 있습니다. 또 야곱 안에 짙게 드리운 비겁하고 약삭빠르고 탐욕스런 거짓말쟁이 사기꾼적 면모를 떼어내는 혹독한 작별의 싸움이기도 할 겁니다. 도망올 때는 그런그런 습성을 주렁주렁 달고 건넜을지 몰라도, (미래의 벤야민까지)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될 열두 아들을 거느리고 고향을 향하는 지금은 온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프니엘을 지날 때 해가 그의 위로 떠올랐다. 그는 엉덩이뼈 때문에 절뚝거렸다."(창세 32,32)
하느님과 목숨을 건, 끈질기고 격렬한 씨름이 끝난 후, 그의 위로 "해"가 떠오릅니다. 앞으로 이스라엘에게 펼쳐질 밝고 영광스런 약속의 실현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이 씨름으로 얻은 상처는 그로 하여금 자신(이스라엘)이 원래 어떤 사람(존재)이었고 어떤 과정으로 하느님의 사람(백성)이 되었는지를 제 안에 영원히 각인하는 표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사람, 어지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는 자조적인 말 많이들 듣지요?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라는 우스갯소리도 회자되고요. 하지만 육적인 생명에서 영적인 생명으로 건너온 우리 그리스도인은 변화와 쇄신, 초월의 동력을 뼛속까지 품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니까요.

물론 쉽지 않습니다. 사사건건 티나 흠, 잘못된 것, 틀린 것, 허점과 흉만 보는 사람이 자기 시선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이상 바꿀 생각조차 하지 못하니까요. 운 좋게 애정 깊은 조언자를 만나 굴절되고 왜곡된 자기 시선을 알게 되더라도, 그 구습을 떼어내기 위해서는 오늘의 야곱처럼 '변화될 때까지는 당신을 놓아드리지 않겠다'는 진지하고 결연한 각오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바리사이의 왜곡된 시선에서 군중의 경외의 시선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연민의 시선을 얻기까지, '당신과 연민의 사랑을 공유하는 축복을 받기 전에는 당신 곁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않겠다'고 끈질기게 그분께 매달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처럼 바라보게 해달라고, 주님을 닮게 해 달라고 매달리는 비장한 씨름이 곧  뜨거운 사랑의 기도일 것입니다. 주님 사랑의 축복에 목숨을 건 여러분 모두를 응원합니다. 오늘도 힘내십시오!

 욕심은 잘못을, 사랑은 고통을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군중을 가엾이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남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바로 사랑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있을 때는 늘 상대의 고통이 보이고,

욕심이 있을 때는 늘 상대의 잘못이 보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물건에 욕심이 있을 때는 물건에 좀 흠이 있어도

그것을 그렇게 나쁘게 보지 않거나 적어도 미워하지 않는데

인간에 대한 욕심이 있을 때는 욕심이 클수록 단점과 잘못이 보이고

그로 인해 미움도 생기고 분노도 생깁니다.

 

그런데 그렇게 미워하던 그 인간이 어떤 때 불쌍하게도 보이는 것이

또한 인간이요 인간 관계이기도 합니다.

 

물건은 욕심의 대상일 뿐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에

미워하면서까지 소유할 필요 없고 그래서 싫어할지언정 미워하지 않으며,

그래서 싫어지면 버려버리고 말지 싫은 것이 미워질 때까지 가지고 있지 않지요.

 

그러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랑을 하고 부수적으로 욕심도 부리기에

미워할지언정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붙잡고 미워하고 심지어 분노하기까지 하는데

그러다가도 욕심에서 한걸음 물러나 보면 그 인간도 사느라 이 고생 저 고생,

고생이 많고 또 나를 만나서 고생이 많은 불쌍한 인간이라 연민이 갑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의 연민도 이런 우리의 연민과 비슷한가요?

물론 연민이라는 것이 불쌍함을 보고 느끼는 것이니 비슷하지만

그 불쌍히 여김이 우리의 불쌍히 여김과 다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불쌍히 여기는 것은 가난하고 힘 없고 병든 자의 고통이라면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것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우리의 고통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여러 활동 그러니까 가르치심, 치유하심, 악령을 쫓아내심을

요약하고 나열한 다음 군중을 가엾이 보셨다고 하는데,

그 가엾음의 이유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병들고 가난해서 불쌍할 뿐 아니라

특히 목자 없는 양이기에 가여워하셨다는 뜻이고,

또 목자가 없는 양이 왜 가엽냐 하면 시달리며 기가 꺽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마귀를 쫓아내주시는 주님을 보고 사람들이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며 감탄하는데 같은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시비나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지 고통을 덜어주고 없애주려고 하는 좋으신 목자인 주님에 비해

바리사이들은 사람들의 고통은 못 보고 이러저러한 것들을 가지고 시비나 가리기에 

다시 말해서 옳다 그르다만 따지기에 이런 바리사이들 밑에서

사람들이 시달리고 기가 꺾인 것입니다.

 

양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기를 살리는 것이 목자인데 바리사이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아니, 그 반대였다는 것인데 이런 바리사이들을 보면서

양들의 아픔은 헤아리지 못하고 옳고 그름만 따지는 저는 아닌지

저를 반성하는 오늘 이 아침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