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12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마태 10, 34~11,1)
"Whoever loves father
or moth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d whoever loves son or daught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d whoever does not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after me is not worthy of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아침에 눈을 뜨며 ‘5분만 더 잘까?’ 하는 고민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성경을 보고 강론을 준비하면서 어떻게 쓸까 고민합니다.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토론하고 고민합니다. 온종일 우리는 고민과 갈등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고민은 대개 나 자신이 좀 더 편하려는, 더 쉽게 살아가려는,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는 싸움이며, 곧 유혹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더 많이 희생하고, 더 많은 것을 내놓기 위한, 남들보다 더 힘들어지는 고민과 갈등은 대부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과 평화를 위한 이기적인 고민을 먼저 하다 보면 예수님의 가치와 시선에 대한 고민은 뒷전으로 밀려나 버립니다. 그래서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고민 없이,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깁니다. 나아가 그러한 고민이 없는 삶을 평화라 여기며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평화는 버리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을 짓밟고 힘으로 누르는 평화를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거대한 힘 앞에서 두렵고 무서워 타협이라는 명목으로 도망치고 비굴해지는 평화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고 고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고민은 우리에게 ‘칼’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을 날카롭게 찌르며 고통을 줍니다. 때로는 그 고민의 칼 때문에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도 하고, 의견이 달라 대립하며 갈라서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칼 때문에 우리를 원망하며 우리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무겁고 감당하기 힘들지만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그 끝에 더 큰 두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우리의 몫인 것입니다. 때로 그 십자가의 무게가 고민의 칼로 다가올 때는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신 길의 끝이 죽음이 아닌 부활이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더 고민하고 더 노력해야 하는 쉽지 않은 길이지만, 오늘도 묵묵히 걸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한나라 고조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제패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백전백승의 명장 한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략이 대단하고 용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그가 젊었을 때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젊었을 때, 동네 건달이 “내 가랑이 밑으로 지나가라.”라면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때 한신은 어떻게 했을까요? 가랑이 밑을 지나가는 것을 치욕으로 받아들이면서 거절하고 싸웠을 것 같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엎드려서 가랑이 밑을 지나갔습니다. 이 순간 한신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금 큰일을 도모하고 있는데, 이런 사소한 일에 마음을 쓸 필요가 없다.’
가랑이 밑으로 지나간 것을 본 사람들은 한신을 향해 ‘겁쟁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대로 이 일은 별것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한신이 수모를 겪으면서도 뒷날의 큰일을 위해 당장의 분함을 참았던 것이 ‘과하지욕(袴下之辱)’이라는 고사성어로 남게 되었습니다.
큰일을 위해 작은 희생은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작은 희생을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큰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제대로 판단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왔다는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집안 식구끼리 서로 원수가 된다고 하시지요. 사랑을 강조하셨던 분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큰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주님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한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주님 따르는 것을 제일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웃 사랑보다도 가족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 채우는 것이 큰일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기도 합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가족, 여기서 더 나아가 자기 자신까지도 주님을 따르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하게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랑하는 가족과도 맞설 수가 있는 것이며,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큰일을 다시 정리해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일은 큰일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과 관계된 모든 것만 진정한 큰일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제 심정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마음과 다른 행동을 하고 있는 저였습니다. 그만큼 부족하다는 증거가 되겠지요. 더 열심히 주님을 바라보면서 사랑하며 살겠다는 다짐을 하게 하는 문정희 시인의 시였습니다.

내 마음 그릇의 크기는 어떻게 성장하는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만약 대학에서 강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교수들만큼이나 클 수밖에 없습니다. 교수들을 다 담을 그릇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보석을 감정할 수 있다면 보석의 가치를 넘어선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없다면 그 보석은 그냥 돌덩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릇의 크기입니다. 각자는 각자의 그릇 크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다섯 탈렌트 받은 사람인지, 두 탈렌트 받은 사람인지 혹은 한 탈렌트 받은 사람인지가 내 그릇 크기에 달린 것이고 그만큼 주님께 받는 상의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나의 그릇 크기는 어떻게 정해지는 것일까요?
BTS 신곡 ‘버터’(Butter)가 발표되자마자 미국 빌보드 싱글 순위 6주 연속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BTS가 속한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방시혁이란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박진영과 함께 JYP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으나 왠지 그와 잘 맞지는 않았었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박진영이 ‘원더걸스’를 미국에서 성공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과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가수들을 고생시키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2019년 서울대 졸업 축사에서 보면 그는 가수들을 매우 사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수들이 자신들이 속한 회사를 위해 그렇게 혹사당하는 것이 매우 부당하게 여겨졌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그가 ‘분노’로 성공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이 분노는 왜 생기는 것일까요? 나의 밥그릇에 밥알이 하나나 두 개만 담기면 화가 나지 않을까요? 그는 무언지는 모르지만 큰 그릇이었기 때문에 분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노의 목적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가수들이 처한 현실이 너무나도 불만이었던 것인지 그의 멤버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만들기를 권했습니다. 남이 만들어 그대로 그 틀에 맞추는 음악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야기와 리듬, 퍼포먼스를 최대한 살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는 특별히 ‘알엠’(RM)이란 리더를 알아보았고 그를 중심으로 멤버를 모았으며 ‘뷔’(V)라는 멤버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일부러 데뷔 직전까지 그의 존재를 숨기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들을 모으고 키운 데는 방시혁이 재능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었음을 무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듯 자신이 성장하려면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눈과 그 사람들을 한 데에 모아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재료를 잘 고를 줄 아는 사람이 요리도 잘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요리는 재료를 잘 고를 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의 가치는 이렇게 내가 받아들이는 것들로 좋은 요리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제가 평가하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BTS를 통해 방시혁이란 인물의 가치가 세계에서도 인정받게 된 원인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방시혁 씨가 요리사라면 그는 그 요리를 통해 많은 이가 행복하기를 원했습니다.
재료도 행복하고 그것을 먹는 이들도 행복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함의 기대치가 커서 그것에 미치지 못하면 분노하였습니다. 내가 만드는 요리가 더 맛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기쁘게 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분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재료로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행복도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는 꿈이 없고 그날그날 그냥 살았다고 합니다. 만약에 그가 꿈이 있었다면 요리는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것으로 다른 이들도 행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꿈은 그저 행복이었습니다. 내가 만든 요리가 잘 되어 요리 자체도 행복해하고 또 그것을 먹는 이들도 행복해하는 것을 보며 자신도 행복하고 싶은 마음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 행복의 욕망이 컸기 때문에 그는 그릇도 큰 사람이 된 것입니다.
행복을 목표로 삼으면 분명 분노가 생겨납니다. 분명 지금의 시스템이 그 목표를 방해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면 서로가 다 행복하고 승리할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한 현실에 분노가 생기는 것입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분노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만들어진 음식과 그것을 먹을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데도 그것을 하지 못하는 시스템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을 만들어 성전의 사람들을 내쫓은 것이 그런 분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의 그릇의 크기는 내가 얼마만큼 그 받아들인 것으로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싶은가에 달려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만들어줄 더 큰 예언자들을 내 그릇에 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예언자들이 받을 상도 받게 될 것입니다. BTS는 방시혁의 예언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는 상을 함께 누립니다. BTS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하지만 우리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 주는 일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보다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영화 ‘식객’에서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순종에게 대령숙수가 음식을 해 바쳤고 그 음식을 먹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주제로 합니다. 그 음식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그 대령숙수의 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음식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서민들의 음식인 ‘육개장’이었습니다.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이 탕에는 조선의 모든 것이 담겨있습니다. 평생 묵묵히 밭을 가는 소는 조선의 민초요, 고추기름에는 맵고 강한 조선인의 기세가, 어떤 병충해도 이겨내는 토란대에는 외세의 시련에도 굴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고사리에는 들풀처럼 번지는 생명력이 담겨있습니다. 나라를 잃고 상심한 임금에게 대령숙수는 조선의 정신을 아뢰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받아들이는 강론이나 유튜브 강의 등은 여러분들이 받아들이는 예언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은 그것들로 요리를 해서 누군가를 구원하여 행복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려고 더 좋은 요리들을 만들려고 더 좋은 예언자들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그 예언자들이 받을 상을 여러분들이 다 받게 될 것입니다.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할 꿈을 꿉시다. 그것이 분노하게 만들겠지만 결국 그 분노가 여러분 행복의 그릇을 성장시킬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신부님들과 함께 ‘포코노’에 다녀왔습니다. 아름다운 폭포와 계곡이 있는 곳입니다. 저는 자전거도 가지고 갔습니다. 저녁을 먹고 운동 삼아 자전거를 탔습니다. 그런데 실수로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일어나서 자전거를 끌고 돌아오는데 안경이 없었습니다. 저는 넘어지면서 안경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가서 안경을 찾았는데 없었습니다. 다음 날에도 안경을 찾았는데 없었습니다. 한국에 안경을 주문하였고, 뉴욕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숙소의 주인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청소하다가 안경을 보았다고 합니다. 저의 안경이었습니다. 주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택배로 보낼 수 있는지 부탁하였습니다. 주인은 뉴욕에도 집이 있으니 사무실로 가져다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주인에게 ‘당신은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해 준 예수님 같습니다.’라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처럼 안경을 잃어버렸는데 안경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비록 넘어졌지만 크게 다치지 않은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저는 안경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늘 그렇듯이 당연히 안경을 쓰고 밖으로 나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숙소에서 안경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넘어진 자리에서만 안경을 찾았습니다. 그곳이 밝은 곳이라고 해도 안경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안경은 숙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천사들이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왜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이 있는 곳에 찾습니까? 그분은 예전에 말씀하신대로 갈릴래아에 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셨고, 표징을 보여주셨던 갈릴래아에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가난한 이들 곁에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래아에 갔을 때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바뀌었습니다. 고통도, 시련도, 박해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영원한 생명을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에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를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이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병든 이,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명예와 권력을 통한 성공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희생을 통한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유했지만 나누지 않았던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가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했던 나자로가 아브라함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충분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제자들도 그렇게 발을 씻어 주라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길가에서는 안경을 찾을 수 없었던 것처럼 물질과 자본이 가득한 곳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소유와 욕심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찾을 수 없습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진리는 겸손과 섬김을 통해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이제 세상 모든 만물의 최고 정점이자 중심에 예수님께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양승국신부-
자신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전체적인 맥락은 완전 무시한 채 앞뒤로 꼬리를 자르고, 남의 문장을 악용하는 사악한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전체적인 맥락, 문제의 핵심과 본질을 먼저 파악한 후, 각 부분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역시 전체적인 맥락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메시지의 핵심이요 본질이 무엇인지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의 문장만 놓고 보면 다들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어찌 이리 심한 말씀을~’ 하는 느낌이 드실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오 복음 10장 34~35절)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찾고, 교회 공동체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폭풍우 속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잔잔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것일 것입니다. 또한 가족끼리의 화목과 사랑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족끼리 서로 갈라지고 원수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납득하기 힘든 예수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바로 다음 문장을 보시면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살짝 의구심이 풀릴 것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오 복음 10장 37~38절)
예수님의 이 세상 육화강생을 통해 이제 이 세상은 새로운 질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간 세상의 권력자들, 강대국의 황제나 왕들, 대통령이나 수상들이 온 세상을 좌지우지해왔습니다.
가정이나 사회 안에서도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한 어른들, 연장자들이나 상급자들이 위계질서 안에서 윗자리를 차지하며, 군림하고 지배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도래와 함께 새 하늘 새 땅이 펼쳐졌습니다. 세상 모든 만물의 최고 정점이자 중심에 예수님께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만물은 그분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예수님은 새로운 질서 안에 최고의 선이요 최고의 가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의 우선적인 선택은 명확해졌습니다. 세상 모든 존재, 세상 모든 만물에 앞서 가장 우선순위로 선택할 대상은 곧 예수님이 된 것입니다.
더 이상 부모님이나 아들딸들을 사랑하거나 존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 전혀 아닙니다. 이제 틈만 나면 부모님이나 자녀들과 날을 세워 싸우라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존경스러운 부모님에 대한 극진한 효심의 발휘나 사랑스런 자녀들을 향한 뜨거운 애정의 표현은 한 인간 존재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해야할 측면입니다.
강조점은 이것입니다. 부모님을 향한 효심, 자녀들을 향한 사랑, 그 이상의 마음으로 주님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가치보다도 더 우선적으로 주님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일진데, 어째서 평화에 칼이 필요한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병든 환자에게는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우리 심장에 꽂혀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을 도려내고, 세상에 꽂혀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절단하는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우리 가슴에 꽂혀 우리를 살리는 칼이요, 이 세상에 던져져 이 세상을 살리는 칼입니다. 죽이기 위한 칼(살인검)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활인검)입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십니다.
평화로운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마태 5,9) 곧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칼을 주십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에게 혁명을 요청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혀진 혁명가들입니다. 그리고 “참 행복선언”을 선언하는 진복팔단은 혁명선언서입니다. 그것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혁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강론(2013.11.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이 혁명은 진리의 말씀인 쌍날칼에 의해 실행되는 혁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히브 4,12)
‘내 칼을 받아라.’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의 칼’을 선사하십니다. 그것은 ‘타인에게’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던져라’고 주는 칼입니다. 자기 자신의 심장에 던지라고 주는 칼입니다. 사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그를 수술할 수 있는 칼인 것입니다. 병든 몸에다 금은보석으로 치장했다 해서 결코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듯, 병자는 칼로 병을 도려내는 수술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던지신 칼이야말로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칼이요, 말씀을 이루기 위한 쌍날칼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칼이 자신의 가슴에 꽂아야 할 일입니다. 사랑의 불화살인 이 칼에 기꺼이 찔림 당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 목에 칼을 견주시고,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이처럼, “제자의 길”은 그야말로 도전입니다. 결코 양다리를 걸칠 수도,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는, 아니 자신의 목숨마저 내 걸어야하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의 권고대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그 어느 것도, 제 자신마저도 결코 당신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심이오니,
오늘 제게 말씀의 칼을 꽂으소서! 그 칼로 저의 심장을 가르고 저를 수술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주님!
제게는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수술을 할 수 있는 예리한 칼이 필요합니다.
칼을 주소서, 진리의 말씀인 쌍날칼을 주소서!
어떤 칼날보다 날카로운 당신의 말씀을 주소서!
제 속을 꿰찔러 관절과 골수를 가르고,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가르소서!
오늘 제 심장에 당신의 칼을 꽂으시어 저를 살리소서! 아멘.

한눈팔지 마라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오직 당신께 의지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의지하는 만큼 주님의 사랑을 체험케 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면 실망하고 상처를 안고 살지만 주님께 의지하는 이는 하는 일마다 잘될 것입니다. 이 시간 각자에게 주어진 주님의 소명을 일깨우고 그분의 바람을 살 힘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먼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냥 빈손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능력을 담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자를 파견 하셨습니까? 사도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대로 “하늘의 온갖 영적인 축복을 주심”과 당신의 가르침, 즉 “하느님나라 건설”을 위해서입니다. 그 사명은 열두제자에게 국한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실 우리도 이미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고 마귀를 끊어버리고 허례허식을 끊어버리겠다고 약속했으며 그 기초 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주님의 능력을 입었고 파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온갖 유혹 앞에서 주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꿋꿋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파견하셨습니다. 짝을 지어 파견한 것은 증언 내용에 대한 진실성을 말해주는 관례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공동체성을 상기시켜 주며 복음의 선포는 개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래서 함께하면서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고 서로의 연약한 마음을 붙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이 함께하는 것은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가야할 길을 갈수 있도록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도 혼자 독불장군으로 일하지 말고 협력자와 함께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시편에서는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55,23)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함께 일하되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이웃과도 함께합니다.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과 함께하는 척 할 수는 있겠지만 진심으로 함께하지는 못합니다. 먼저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을 파견하기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한 눈 팔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옛 말에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것에 대한 애착을 아예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께 의지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먹을 것이 많고, 소유하는 것이 많으면 당연히 하느님께 가는데 소홀해지기 마련입니다.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입니다. 주님께 의지하여 도움을 청하고 주님의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모든 것(먹을 것, 입을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당에 나오면 뭐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하고 왔는데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런저런 일에 신부님으로부터 잔소리 듣고, 시간을 투자해야 하며 거기다 돈도 내야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정직하게 살려고 하니 손해 보는 느낌입니다. 좋은 마음으로 기도하러 왔는데 왜 그리 말이 많고 설치는 사람이 많은지…밖의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주님은 눈에 보이는 힘을 비울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채워주십니다. 더 큰 마음의 자유와 기쁨과 평화를 주십니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준다”(이사41,10). 그러므로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을 전하는 가장 큰 몫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의로움을 선택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 접하기도 합니다. 고지식한 사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세상의 것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답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돌아보면 은총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당장의 결과에 얽매이지 말고 삶의 자리에서 충직하시기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면 열매는 주님이 주십니다. 주님의 뜻을 행했으면 결과에 연연해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내가 흘린 수고와 땀은 주님께서 차고 넘치도록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근본을 얻으면 일의 결과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따라서 농부가 온종일 땀 흘리며 고랑을 파듯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생명의 길을 파는 농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열심히 일해 어떤 좋은 결과를 이루었을지라도 가까운 이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면 낙담과 실망에 빠져서 일할 의욕을 잃고 손을 놓아 버리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고, 사람들은 음모를 꾸미고 심지어 죽이려고도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 안에서도 당신의 일을 한결같이 행하셨습니다. 우리도 누가 무어라 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사도들을 파견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의 일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에 매이지 말고 천상 것을 추구하는 의로움을 통해 주님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정에서 주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기쁨을 주며 힘을 주시는 분입니까? 아니면 그렇게 만드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지켜줄 힘과 능력을 지닌 분입니다. 성경은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하고 선언합니다.
우리 가정은 하느님의 말씀과 더불어 사랑의 생활을 하는가? 아니면 출세와 물질에 치중하고 있는가? 점검하고 사랑의 삶을 증가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가? 데리고 사는가? 자문하며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영적축복을 전하며 또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한 어린이가 어머니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엄마, 도둑질 하는 것과 거짓말 하는 것 중에 어는 것이 더 나쁜 거예요?” 엄마는 이이에게 “그야. 도둑질 하는 것이 더 나쁘지”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엄마, 아니예요, 거짓말이 훨씬 더 나빠요. 왜냐하면 도둑질 한 것은 돌려 줄 수 있지만 거짓말은 돌려줄 수 없잖아요!” @@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약속과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지키지 못할 때 본이 아니게 거짓말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주님께 한 약속에 충실하고 이웃에게 한 약속을 꼭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버림과 따름>
-송영진신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이 말씀은,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왔는데,
내가 주는 평화를 거부하고 칼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천사 군대가 나타나서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예수님은 이 세상에 ‘참 평화’를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 ‘참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믿음’과 ‘회개’와 ‘용서’는 ‘참 평화’를 얻는 길입니다.)
그런데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지도 않고,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참 평화’를 거부하는 것은 ‘칼’을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칼’은 ‘참 평화가 없는 상황’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칼’을 선택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지옥에서 사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 10,35-36).”
예수님은 이 세상을 ‘원수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세상으로
변화시키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요한 3,19)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과 평화를 거부하고,
살던 대로 그냥 살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가정 안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사이에 분열이 생기고,
마치 원수처럼 되어서, 믿는 사람이 박해받는 일이 생깁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예수님 때문에’ 생기는 일이 아니라,
일치와 사랑과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생긴 분열과 갈등을 ‘예수님 탓’으로 돌리면 안 됩니다.
<그런데 만일에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 선교활동을 할 때에
슬기롭고 순박하게(마태 10,16) 하지 않고,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또 어리석고 거칠게 한다면, 박해를 자초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분열과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항상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선교활동은 전투가 아니라 ‘사랑의 봉사’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가족 제도와 가족에 대한 사랑을 부정하는 말씀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여기서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은 실제 가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세속적인 인간관계를 뜻하는 말입니다.
(넓은 뜻으로 신앙의 반대쪽에 있는 ‘세속’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세속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주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가족은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사람이고,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 할 ‘영적 동반자’입니다.
하느님(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사랑은 모두 하나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이 말씀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누구에게나 각자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고,
아무도 그 십자가를 면제받지 못한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물론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거부하거나 회피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왜 꼭 십자가가 필요한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통해서 더욱 강하게 단련되고
더욱 깨끗하게 정화되기를 바라신다.”가 대답입니다(1베드 1,7).>
어떻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십자가를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다른 사람보다 더 무겁고 힘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지고 갈 수 있는 십자가만 주십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은 순전히 개인의 힘만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고, 공동체가 함께 하는 일입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이 말씀은, “‘현세의 삶’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그 집착을 버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허무하게 사라질 것만 추구하고 그것을 가지려고 욕심내는 사람은
그것을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간에 그것과 함께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얻기를 바란다면,
그 생명과 행복만을 희망하면서 그것만을 목표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은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삶’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삶’은 죽은 다음에나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어서, 그곳에서 완성됩니다.
신앙생활은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복음: 마태 10,34-11,1: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조욱현신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할 때, 우리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34절) 하신다. 주님께서는 말씀이라는 칼을 통하여 하느님을 따르는 일치 곧, 참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말씀의 힘을 통해 세례의 물로 새롭게 될 때, 우리는 죄와 죄의 근원으로부터 갈라서게 된다. 그리고 죄를 많이 짓고 불성실했던 과거의 나를 벗고 몸과 마음이 성령으로 새로워지면 우리는 죄스러운 옛 삶의 습관들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가족들 간의 분열이란 바로 내 마음 안에 일어나는 갈등이라 하겠다. 선포된 복음은 평화를 끌어내기 위해 분열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 때문에 서로 갈라져 있다. 어떤 집안에는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다. 여기에서 갈등은 악한 평화를 깨뜨리기 위한 필연적이다.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7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모님을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나 자식들은 그분 안에서 함께 할 것이라는 뜻이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8절)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스러운 버릇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39절)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옛 악습을 끊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 즉 완전히 변화된 내가 된다는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41절) 예언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 안에 계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의인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이 같은 상을 받는다. 그는 바로 그들 안에 계시며 그들을 파견하신 그들을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와 의인에 합당한 영예를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작은 행위라고 하더라도, 즉 그들 신앙의 겉모습만 보고서 그에 마땅한 친절을 베풀었다 해도 희망을 품은 데 대한 상을 빼앗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시원한 물 한 잔”(42절)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베푼 사람의 믿음에 상을 주시는 것이지, 사랑을 받은 사람의 위선에 상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원한 물 한 잔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줄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지시하신 뒤, 그들이 당신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할 기회를 주시고자 그들을 떠나셨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을 잘 묵상하고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하는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의 관계성을 하느님 중심으로 개편하라고 촉구하십니다.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마태 10,34-35)
예수님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만 들으면 마치 그분이 이 세상에 불화를 조장하고 가족 관계를 파괴하러 오신 것 같습니다. 사회의 기본이 되는 가정 공동체의 구성원인 아버지와 아들이, 딸과 어머니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맞서고 원수가 되어 갈라서면 세상은 함께 흔들리고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이어지는 말씀이 앞의 알쏭달쏭한 말씀을 이해하게 도와줍니다. 즉 관계의 우선이 혈연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가족을 우선하고 챙기게 마련이지요. 태초에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맺어주실 때부터 서로 끌리고 보완하는 사랑이 매개가 되어 가족이 형성되었으니까요.
그런데 남녀의 사랑이나 부모 자식 간의 사랑보다 우선하는 진정한 사랑이 있으니, 바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지으시고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대신 죽으시면서 사랑하십니다. 신앙인이라면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가 우선이지요.
하느님과의 사랑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려면 자기와 가족의 안위만 추구하는 육적인 애착에서 한걸음 나와야 합니다. 시야를 확장한다고 해서 가정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공고히 성숙한 사랑으로 결속될 수 있지요.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 10,41)
육적인 사랑이 성장하고 승화해 하느님과의 사랑 관계로 들어가게 되면 그와 동시에 하느님의 사람들이 눈에 보이게 됩니다.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하느님의 사람들, 즉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믿음이 끌리는 일에 투신하는 이들, 하느님의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여기에 이르면 이제 우리는 스스로 예언자나 의인이 아니어도 예언자와 의인이 받을 상을 받게 됩니다. 그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예수님을, 그리고 종래에는 하느님을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와 의인이 받을 상이란, 성삼위 하느님의 거처가 되어 사랑의 존재로 변모되어 가는 것입니다.
제1독서는 이집트에 몸붙여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닥친 위기 상황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탈출 1,10)
요셉의 치적을 모르는 새 임금이 등극하면서 이스라엘은 경계과 압박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사백삼십 년 전, 일흔 명으로 이집트에 들어간 이스라엘 자손이 이제는 이집트인들을 넘어설 만큼 더 많고 강인하게 번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탈출 1,12)
이집트인들에게 강제 노역으로 시달리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더욱 번성합니다. 이는 그들의 생명이 육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기인하기 때문이지요. 일찌기 하느님은 이집트로 떠나는 야곱에게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창세 46,3)고 약속하셨으니 지금의 번성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강제 노역과 사내아기를 죽이라는 말살 정책이 구체화되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큰 어려움 없이 잘 정착하고 번성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느님의 백성에게 결별의 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오랜 기간 이방 민족 안에서 누렸던 안락한 평화을 박차고 떠나야 하는 때가 무르익은 것이지요. 바야흐로 "칼"의 시간이 된 것입니다. 이 갈라섬, 떠남은 이스라엘이 하느님 백성으로 우뚝 서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할 단계입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칼을 주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인간적으로 익숙한 혈연, 지연, 학연은 물론 서로 영광과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 안에 파묻혀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고, 그 안에서 '우리만' 안락하고 평온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정도면 평화라고 여기며 안주하고 싶었을 수도 있지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좋은 게 좋은' 그런 관계가 하느님과의 사랑을 가리우고, 하느님의 사람들을 경시하고 무관심하게 만든다면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촉구하십니다. 육적인 차원을 넘어서 영과 육의 통합을 이루어 가라고 부르심 받은 신앙인이라면 우리의 모든 관계성은 하느님 중심의 관계성으로 재편성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화답송)
이 노래가 우리 관계성의 기준이고 평화의 바탕입니다. 내 근친, 지인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형제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평화가 옵니다. 평화는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존재하고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강물처럼 온 세상을 감싸며 아우르고 퍼져나가는 하느님의 충만함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사랑의 질서를 새로이 수립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느님이 첫째이시고, 모든 것은 그 관계에서 파생됨을 깨닫는 지혜와, 이를 실제 삶에 적용하는 용기와 결단을 주시길 함께 기도합니다

우리는 칼을 잘 써야 한다.
-김찬선신부-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칼을 주고 싸움을 붙이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물론 주님께서 주시는 칼이 나쁜 칼이 아니고,
붙이시는 싸움이 나쁜 싸움이 아니라고 알고 또 믿습니다.
그렇기에 또 아무튼, 주님께서 우리에게 칼을 주시니
우리는 칼을 잘 써야 하고, 싸움도 잘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주님이 주시는 칼은 찌르라는 칼이 아니라 자르라는 칼입니다.
사람을 찌르라는 칼이 아니라 잘라내야 할 것을 자르라는 칼입니다.
우리는 같은 칼이라도 어떤 사람의 손에 들려있고 어떻게 쓰이느냐,
그에 따라 칼이 사랑의 도구일 수도 범행의 도구일 수 있음을 알지요.
의사의 손에 있는 칼은 종기를 짤라내고 치유하는 사랑의 칼이고
강도의 손에 있는 칼은 사람을 찌르고 돈을 빼앗는 범행의 칼이지요.
주님께서 주시는 칼도 주시는 뜻대로 쓰면 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칼인데,
앞서 얘기했듯이 찌르는 것이 아니라 끊고 자르라는 것이 주님 뜻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자르면 되겠습니까?
첫째 불의의 고리는 끊어야겠습니다.
불의와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그런 접근은 초장에 끊습니다.
서로 좋은 게 좋지 않냐는 말은 서로에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관계의 악화와 단절을 두려워합니다.
지금까지 나에게 잘해준 사람과 좋았던 관계를 끊은 것은
나에게 소중한 사람과 관계를 잃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인데
그렇게 다가오는 사람과 그런 관계는 결코 좋은 사람도 관계도 아닙니다.
다음으로 집착과 애착의 관계를 끊어야겠습니다.
집착과 애착은 주님을 보지 못하게 하고
무엇보다도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눈을 멀게 하고 사랑이 눈을 멀게 한다고 하잖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고도 하시고
당신을 위해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도 버려야 한다고 하시지요.
프란치스코가 법정에 갈 정도로 아버지와 관계가 나빠지고
마침내 아버지와의 연을 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하지 않아서입니까?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하느님 아버지를 따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아버지와 관계를 끊은 다음 "이제부터 나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자유스럽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외치고 선언한 것이지요.
그리고 마침내 자기를 끊어야겠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역시 찌르면 안 되고 끊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일치하는 자기에서 하느님을
거부하는 나를 끊어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라고 하신 다음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내가 죽어야 하느님과 일치하는 내가 산다는 뜻이지요.
이는 마치 그래야지 내가 살기에 종기를 내게서 도려내거나
썪어가는 내 발을 잘라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도 나의 한 부분이기에 잘라내는 것은 너무도 아픈 것이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듯이 내가 주님을 따라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서는 그리고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서는 나를 버림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칼잽이이고, 칼을 들어야 하며,
칼을 잘 써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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