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1. 7. 21. 07:27

2021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다. 
(마태오 13,1-9);


"A sower went out to sow.
And as he sowed, 
some seed fell on the path,
and birds came and ate it up.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삶 속의 성경.” 오랫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성서 사도직의 소임을 맡으면서 언제나 마음에 품고 사는 표현입니다. 성경을 머리로만 배우고 익혔던 저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지식으로 받아들이기만 할 뿐, 가슴으로 삶으로 느끼고 다가가지 못하였습니다. 성서 사도직 소임을 하면서 성경을 통하여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삶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성경, 나와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며 나에게 말을 건네시는 하느님에 대하여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통해서 또 다른 그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각자가 저마다의 삶 속에서 성경을 읽고 하느님을 만나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태오 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하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철학적 사유가 담긴 단어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어렵고 난해한 신학적 단어나, 율법에 나와 있는 개념적 지식으로도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씨 뿌리는 일, 수확하는 일, 빵 만드는 일, 고기 잡는 일, 물건 파는 일 등 그들이 살아가는 일상을 통해서 하늘 나라가 어떤 곳인지, 어떻게 하면 하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할 수 있는지 알려 주십니다.
이러한 비유 말씀은 어쩌면 사람들의 언어를 통하여 하느님의 언어를 듣게 하시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삶 속에서 쉬이 지나치고, 또 잊고 살았던 하늘 나라를 찾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는 어려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것을 자신의 삶에 어떻게 비추어 보고 또한 어떻게 그 깨달음대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 고민은 우리의 몫입니다. 땅을 갈아엎고 돌을 골라낸 뒤 흙을 부드럽게 하고, 가시덤불을 걷어 내어 햇볕이 잘 드는 땅으로 만들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말씀의 신비를 실현하기를, 나의 마음과 삶을 햇볕이 잘 드는 비옥한 밭으로 가꾸기를 기도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넷플릭스 창업자 마크 랜돌프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밝힌 자신의 아버지가 적어준 8가지 성공지침이 있습니다.


1) 시키는 일보다 최소 10% 이상은 더 해라.
2) 네가 모르는 것에 대해 사실처럼 말하지 마라.
3)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예의를 갖춰라.
4) 트집 잡거나 불평하지 마라. 진지하게 건설적으로 비판하는 자세를 유지하라.
5) 결정을 두려워하지 마라.
6) 가능하다면 숫자로 표현하라.
7) 마음을 열어두되 끊임없이 의심하라.
8) 시간을 엄수하라.

모두가 우리에게 와닿는 지침입니다. 사실 이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지침들이 크게 와 닿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알면서도 실천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한 노력을 쉽게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성공을 바라는 요행만을 주님께 청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농부는 11월 초순 무렵에 단비가 내리면 먼저 밭에 밀이나 보리를 훌훌 뿌리고서 밭을 갈게 됩니다. 먼저 밭을 갈고서 이랑에 씨앗을 뿌리는 우리 농사법과는 정반대이지요. 그런데 씨앗이 길에 떨어질 수 있을까요? 있습니다. 4월부터 10월 사이의 건조기에 사람들이 밭 가운데를 가로질러 다니다 보면 길이 날 수도 있고, 밭 가에 길이 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이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갈릴래아 평원을 빼고 이스라엘 전체가 온통 석회석투성이 돌밭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쟁기는 돌과 돌 사이를 갈아야 하니까 우리나라보다 쟁기의 날이 훨씬 좁습니다. 씨앗이 가시나무 속에 떨어졌다는 것은 이스라엘 들판에 가득한 가시 돋친 잡초를 연상할 수 있게 합니다.

이런 이유를 생각하면,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비유였습니다. 당시는 적대자들이 반대하고 심지어 제자 중에도 반대자가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이 길가, 돌밭, 가시나무의 상황에서도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며 씨를 뿌린다고 말이지요.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른다면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모험은 바로 여러분이 꿈꿔오던 삶을 사는 것입니다(오프라 윈프리).

본다.

병아리의 부화 직후, 병아리의 항문과 날개만 보고서 그 암수를 구별하는 사람을 ‘병아리 감별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정확도가 (6개월 이상 감별하면) 98% 이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구별하는 시간은 한 마리당 1초도 걸리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초보 감별사는 이를 어떻게 배우는 것일까요? 사실 별거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고 명령한답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보다 보면 암수를 자연스럽게 구별하게 된다고 하더군요.

‘본다’라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해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주님을 봐야 주님을 알 수 있습니다. 딱 한 번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또 보고…. 계속해서 봐야 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주님을 보고 있습니까?

 빛은 어둠 속에서, 앎은 모름 속에서만 보인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씨는 말씀이고 진리입니다. 이 진리가 우리 안에 뿌려지지만 어떤 사람들은 ‘들을 귀’가 없어서 씨가 뿌려져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비유를 깨달아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데 마음이 무디고 눈은 감겼고 귀는 닫아버렸기에 말씀이 그 사람 안에서 변화를 일으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들을 귀’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열린 마음으로 들을 수 있을까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검사 출신의 변호사인 금태섭 씨가 쓴 『확신의 함정』 책의 머리말 소제목은 “누구나 틀릴 수 있다.”입니다.

     법을 집행하면서 확신을 하지 않으면 재판에서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랜 법조인 생활을 한 끝에 누구나 틀릴 수 있다는 진리에 도달했습니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 그는 검사 초년 시절 자신 앞에서 한없이 울던 막 12년의 복역을 마치고 나온 서른 살의 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그랜저를 훔쳐서 잡힌 사람이었는데, 큰 죄도 아닌 작은 범죄를 여러 번 저질러서 결국엔 12년을 살다가 이제야 출소한 것입니다. 만약 법대로 하면 그를 다시 7년 이상은 집어넣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변호사도 와서 사정하고 자신도 그 사람을 장발장으로 만들 수 없어 결국 그 사람은 집행유예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는 차를 상습적으로 탈취하고 그 안에 탄 사람들을 폭행하며 돈을 빼앗는 등의 중범죄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그 사람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검사는 다시 범죄 기록과 그랜저를 훔친 정황을 살펴보았습니다. 분명 놓친 것이 많았습니다. 그는 검사 앞에서 연기하고 있었고 검사는 자신의 판단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누구나 틀릴 수 있다. 사건을 수사하거나 변론을 하다 보면, 분명히 내 판단이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질 때가 있다. 의뢰인이 가장 억울하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나도 너무 분해서 잠이 안 올 때가 있다.

그러나 누구라도, 자신의 판단이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저 사건을 처리할 때 나는 내가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는데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틀렸고, 또 틀렸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면 신중해집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확신으로 가득 찬 사람은 자신이 안다고 믿는 것 때문에 많은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은 ‘양자역학’이라 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심지어 양자컴퓨터까지 개발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 머리가 좋다는 아인슈타인도 양자역학이 처음 나왔을 때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며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과학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양자역학은 ‘불확정성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양자역학에서 보어는 상보성 원리를 주장하며 전자는 입자로 존재할 때는 특정 위치에 존재할 수 있지만, 파동으로 존재할 때는 중첩 현상으로 명확히 어디에 존재하는지 규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니 물어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입자나 파동도 관찰자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다르게 측정됩니다. 관찰자가 있다면 빛이 입자로 보이다가 관찰자가 보지 않으면 파동으로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미시세계로 갈수록 도대체 인간의 능력으로는 무언가를 확정할 수 없다는 내용이 양자역학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물리학의 입장에서는 세상은 숫자로 이루어져 있기에 인과응보가 정확한 계산으로 예상할 수 있지만, 양자역학의 세상에서는 그것으로 측정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만약 아인슈타인처럼 인간이 다 알 수 있다고 말한다면 양자역학의 세계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입니다. 닐스 보어는 말합니다.

    “아인슈타인 씨, 신이 무엇을 할지 당신이 결정하지 마시오.”    

 

    제가 초등학교 때 복사를 했기에 방학 때는 성당에 매일 나가야 했습니다.

중간에 가게 하나를 지나쳐야 했는데 그렇게 매일 성당에 출근하는 저를 보며 가게 사장님은 제게 왜 신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신을 믿으려면 태양을 믿으라고 합니다. 자신은 태양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태양이 없으면 누구도 살 수 없으니 태양이 곧 신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태양을 만드신 분을 믿어야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그냥 웃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분은 아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모르는 사람이 되었고 저는 아는 어린이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진리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받아들여지려면 우리는 ‘비진리’, 곧 진리가 아님을 고백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만큼 진리는 내 안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복음 묵상을 할 때도 이전에는 ‘다 했던 것인데 또 뭐 새로운 묵상이 나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볼수록 더 깊은 내용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다 안다고 규정해 놓는다면 더 깊은 진리는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영성에서는 『무지의 구름』과 같은 책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지의 구름이란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 계명 판을 받기까지 40일간 구름 속에서 있었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때 주님 앞에서 모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누구보다도 몰랐기 때문에 전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나훈아 씨는 인생 막바지에 와서 ‘소크라테스’를 찾으며 인생도 사랑도 모르겠다고 고백합니다. 드디어 조금 알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모른다고 고백해야 그분께서 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받을 귀가 열립니다.

    내일도 모르고 한 시간 앞도 모릅니다. 그러니 대화할 때 결론을 내며 대화를 끊어서는 안 됩니다. 모른다고 생각할 때 귀가 열리고 대화가 흘러갑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알려주십니다. 모든 것에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겸손이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의 말씀 앞에서 귀를 여는 방법입니다.

 -조재형신부-


보좌 신부로 지내면서 사제는 돈 문제에 신경 쓰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그런데 어느 날 본당 신부님께서 사제는 본당 재정을 잘 관리해야 한다.”라고 말하셨습니다신자들이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 헌금한 돈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신부님께서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 시설 공사도 거뜬히 하셨습니다꼭 필요한 비용은 지출하지만 알뜰하게 재정 관리를 하셨기 때문입니다당시 우리나라는 ‘IMF’로 기억되는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IMF는 저의 가족에게도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을 주었습니다저는 신부님의 말을 귀담아 들었고지금까지 금전출납부를 쓰고 있습니다금전출납부를 보면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고 하셨습니다도박에 쓰는 돈은 어쩌면 길가에 떨어진 씨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돌밭에 떨어진 씨는 싹은 트지만 해가 나면 말라버린다고 하셨습니다위험 부담이 큰 투기가 돌밭에 떨어진 씨가 아닐까 생각합니다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버렸다고 하셨습니다돈 때문에 친한 친구가 갈라지기도 하고돈 때문에 형제간이 다투기도 하는 경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차라리 돈이 없었으면 다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맺는데 백 배예순 배서른 배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가톨릭평화신문은 매주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라는 사연을 전하고 있습니다많은 분들이 정성껏 헌금해 주셨습니다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사용되는 돈이 좋은 땅에 떨어진 씨라고 생각합니다그런 돈은 열매를 맺어서 하늘에 쌓는 보화가 될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생각합니다좋은 씨앗은 비록 땅이 거친 황무지라도 꽃을 피우는 것을 봅니다나쁜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졌어도 싹이 트지 않는 것도 봅니다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거친 땅으로 오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는데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좋은 땅으로만 가서 선교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땅 끝까지 복음의 씨앗을 뿌리라고 하셨습니다교회의 역사를 보면 대부분은 거친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제자들에게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전대에 돈을 지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겉옷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지팡이만 가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하느님께서 무엇을 먹을지무엇을 입을지무엇을 마실지 알려주신다고 하셨습니다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알려주신다고 하셨습니다.

 

1784년 조선에 떨어진 복음의 씨앗은 분명 좋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100년이 넘는 박해가 있었습니다많은 순교자가 있었습니다신앙 때문에 벼슬을 포기했습니다신앙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신앙 때문에 가족과 헤어져야 했습니다신앙을 갖는 다는 것은 생명까지도 포기한다는 의미였습니다그럼에도 씨앗은 힘들게 뿌리를 내렸고싹이 텄습니다. 200년이 되는 1984년에는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한국에 오셔서 103위 순교자들을 성인품에 올렸습니다. 230년이 되는 2014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오셔서 124위 순교자들을 복자품에 올렸습니다. 2021년 한국은 분명 좋은 땅입니다박해도 없습니다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원하면 언제든지 미사에 참례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지금 우리의 씨앗은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세상의 유혹이라는 가시덤불에 막혀서 활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좋은 땅을 찾습니다그런 곳을 블루오션(Blue Ocean)이라고 합니다좋은 땅에서 생산성을 높이고좋은 땅에서 많은 이익을 창출하는 것을 축복이라고 합니다그러나 신앙은 척박한 땅이라도 그곳을 옥토로 만들어야 합니다시련과 박해와 죽음이 있을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결실을 맺도록 해야 합니다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보았습니다성인들에게서 보았습니다지금 내가 있는 곳이 좋은 땅이라면 감사하면서 좋은 열매를 맺으면 좋겠습니다지금 내가 있는 곳이 가시밭길이라면 그곳을 옥토로 만들도록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좋은 땅은 선택이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한 인간 존재는 수많은 가능성과 폭발적인 에너지를 소유한 씨앗입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르치시는 방식을 보면 저절로 깊은 감사의 정이 솟아납니다. 가르침의 방식이 종래 지도자들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절대 잘난 체 하지 않으십니다. 자기 자랑도 하지 않으십니다. 졸린다든지 짜증나지도 않습니다.

  

대신 내용이 귀에 쏙쏙 들어올 정도로 재미있고 감동적입니다. 역동적이면서도 따뜻합니다. 율법을 배우지 못한 가난한 백성들도 듣고 무릎을 칠 정도로 쉽고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청중의 상태를 고려한 눈높이 교육이 바로 예수님의 교육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비유’라는 설교 방식을 자주 애용하셨습니다. 비유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가르침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는 이스라엘 지혜교사들이나 랍비들의 비유와는 결을 달리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극히 짧고 단순했습니다. 그러나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의 신비를 설명하는 비유였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는데, 엄청난 학식이나 지식이 요구되지 않았으며,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결했습니다.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모호한 본질을 설명하는데 아주 적절한 수단입니다. 왜냐하면 비유는 직접적인 진술이 아니라 상상의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비유는 거의 농부나 어부 등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삶 속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비유들이 의도하는 실재는 언제나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런 포인트를 염두에 두고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듣고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분을 마음 깊이 신뢰하고, 그분의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비유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비유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그 비유들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런 전제를 염두에 두고 오늘 복음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천천히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오 복음 13장 3~9절) 

 

팔레스티나 지방 농부는 씨앗 자루를 손에 들고 작년 추수 이후로 한번도 손대지 않은 채 널려 있는 들판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씨앗을 뿌립니다. 다음에 쟁기질을 합니다.

  

씨앗의 운명은 쟁기질이 끝난 후에 결정됩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에서는 아무런 수확을 얻을 수 없습니다. 굶주린 새들이 즉시 날아와서 쪼아먹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 역시 해가 떠오르면서 오래 가지 않아 메말라 죽어버립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가시덤불이 훨씬 더 빨리 자라면서 연약한 싹을 질식시켜 버리기에 성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라는 놀라운 수확을 거두게 됩니다.

  

씨앗 한 알을 유심히 살펴보면 참으로 보잘 것 없습니다. 우선 작습니다. 기대할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씨앗 안에는 엄청난 생명력과 폭발적인 에너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한 인간 존재는 수많은 가능성과 폭발적인 에너지를 소유한 씨앗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작은 씨앗 하나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원형 그대로 남아있기보다는 발아되기를, 풍요로운 결실을 맺기 위해 스스로를 내려놓기를, 썩어 없어지기를, 그래서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되고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이영근신부-


<마태오복음> 13장에서예수님서는 하늘나라의 대한 일곱 가지의 비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그 첫 번째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는 세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요,

<둘째>는 뿌려진 씨에 대한 이야기곧 열매인 결실에 대한 이야기요,

<셋째>로는 씨가 뿌려진 땅에 대한 이야기곧 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우선 이 이야기는 <첫째>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서 밭을 구별하지 않고 씨를 뿌리는 구원의 보편성을 말해주며,

<둘째>로는 그 씨앗은 열매를 맺고 실현되고 성취된다는 사실을 밝혀주며(이사 55,11),

<셋째>로는 씨가 뿌려진 밭을 잘 가꾸어야 할 하느님 자녀의 소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마지막 구절에서결론처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8)

 

그렇다면분명 나에게도 말씀의 씨앗이 뿌려졌을 터인데지금 나에는 몇 배의 열매가 맺혀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내가 좋은 땅인가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씨앗이 떨어질 때 그 땅이 좋은 땅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따라 열매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씨앗이 뿌려지면 그 땅은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좋은 땅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땅’은 씨앗과 함께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씨앗으로 말미암아 밭이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씨앗이 뿌려지기 전의 땅의 상태가 좋은 땅인지 아닌지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씨앗이 뿌려진 후에 땅을 갈고 가꾸는 것에 의해 그 땅의 성질이 결정지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의 씨를 가꾸는 농사법은 먼저 밭을 잘 쟁기질 한 다음에 씨가 뿌려진 것이 아니라어느 땅이든 상관없이 먼저 씨가 뿌려진 다음에 그 밭이 쟁기질되기 때문입니다.

사실그 땅은 씨앗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땅이라 할지라도 쓸모없는 땅인 것입니다황무지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니 밭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씨앗이 거룩하고 씨앗으로 말미암아 밭이 거룩해지는 일입니다.

그러기에중요한 것은 밭에 씨앗이 선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 씨앗의 존재를그 가치를 깨닫는 일입니다.

그리고 베풀어진 씨앗을 맞아들이는 일입니다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9)

그러니 씨앗이 내 안에 뿌려진 채 여전히 묻혀 있지 않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아를르의 체사리오는 말한다.

“만일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먹지’ 않는다면,

(먹지 않고 저장된) 말씀은 만나에 구더기가 끓었듯이 구더기가 끓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땅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그것은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자신 안에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요 뿌려진 씨와 함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소명을 짊어지는 사람입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밭에서 일할 줄 알며 땅의 노래를 하늘과 함께 부르는 사람이요하늘의 노래를 땅과 함께 부를 줄 아는 사람입니다땅을 매만지며 피땀 흘려 자신의 지문을 새기며 사랑할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요 그 열매로 자신의 배를 채우기보다 타인에게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 13,4)

 

주님!

당신 말씀의 씨앗을 품고 살게 하소서!

씨앗의 모시고 살고씨앗을 기르며 살게 하소서.

오늘 제가 당신 말씀의 씨앗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소서아멘.

 수고와 땀으로 최선을 다하고  

 -반영억신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씨앗이 튼실해야 하고 땅도 좋아야 합니다. 그리고 알맞은 기후가 필수입니다. 그러나 기후는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힘을 다하고 그다음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오늘은 씨앗의 비유입니다.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졌고, 어떤 씨앗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땅이 중요합니다. 좋은 땅에서 좋은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좋은 씨앗이 아니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좋은 씨앗과 좋은 땅은 함께 어울려야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알맞은 기후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니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삼박자가 맞아야 합니다.

 

좋은 땅이 아니라면 땅을 일구고 거름을 하여 좋은 땅으로 만들 수 있는 수고와 땀이 필요합니다. 또한 좋은 씨앗을 구하려면 그만한 경륜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후를 맞추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달려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환경을 얼마나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마음의 밭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좋은 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의 수고와 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한 후 열매는 하느님께 맡겨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좋은 씨앗인 말씀이 있어도 무관심하면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좋은 밭인 마음이 있어도 전해주는 말씀이 없으면 또한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마음을 열어주시면 서른 배, 예순 배, 백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부드럽고 우리의 마음은 단단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듣게 되면 마음이 열려 하느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교부푀멘). 그리고 말씀은 귀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겨들어야만 참된 이익을 거둘 것입니다. 더더구나 말씀대로 실천하게 되면 그 말씀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이러저러한 일에 접하게 되고 서운함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길바닥, 돌 밭,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것도 있지만 좋은 땅에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을 뿌리는 일은 적잖은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결실은 내 생각대로 쉽게 거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고와 땀으로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뜻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씨앗의 법칙

1. 먼저 뿌리고 나중에 거둔다.

2. 뿌리기 전에 밭을 갈아야 한다.

3. 시간이 지나야 거둘 수 있다.

4. 뿌린 씨 전 부가 열매가 될 수는 없다.

5. 뿌린 것 보다는 더 많이 거둔다.

6.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7. 종자는 남겨두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송영진신부-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3-9).”

 

1) ‘길,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은,

심판 때에 심판을 받는 사람의 최종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처음부터 ‘길, 돌밭, 가시덤불’에 씨를 뿌린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냥 ‘백지 상태’ 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제외하고, 태어날 때부터 ‘좋은 땅’인 사람은 없고,

또 태어날 때부터 ‘나쁜 땅’인 사람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백지 상태인 갓난아기로 태어나서, 누구는 끊임없이 노력해서

성인이 되고, 누구는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악인이 됩니다.

성모 마리아의 경우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지만,

즉 처음부터 ‘좋은 땅’이었던 분이지만, 그래도 평생 꾸준히 노력해서

그 ‘좋은 땅’의 상태를 유지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저절로 승천하신 것은 아닙니다.)

 

2) ‘길,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이 심판을 받을 때의 최종 상태이기 때문에,

‘지금’ 좋은 땅이라고 해도 방심하거나 자만하면 안 되고,

또 ‘지금’ 길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이라고 해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사는 동안에는 성인이었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타락할 수도 있고,

도저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막 살았더라도

회개해서 그 나라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구원 문제를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고,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런 점과 관련해서 마태오복음 12장에 있는 말씀이 자주 인용됩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부러진 갈대’는 이미 부러져서 다시 살아날 희망이 안 보이는 갈대이고,

‘연기 나는 심지’는 이미 불이 꺼진 상태의 심지입니다.

이 말은,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어떻게든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 분입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도 잘 가꾸고 관리하면 ‘좋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당사자 자신이 예수님의 노력에 응답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포기해 버리면, 그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3) 신앙생활은 백지 상태로 시작해서 ‘좋은 땅’이 되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잘한 사람은 ‘좋은 땅’이 되어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고, 여러 가지 이유로 끝까지 가지 못한 사람은,

또는 끝까지 가지 않은 사람은 ‘나쁜 땅’이 되어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가지 못한(가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 대하여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

이 말씀은 “좋은 땅이 될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마라.” 라는 말씀이 아니라,

“좋은 땅이 되겠다고 작정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때까지 전력을 다하여라.” 라는 말씀입니다.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은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말씀의 씨’를 뿌려 주신 것은

‘내가’ 좋은 땅이 되어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힘든 일도 생기고, 유혹도 많이 받고,

위험한 고비도 많이 겪게 됩니다.

그런 때에는 바로 예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씨만 뿌리고 우리를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좋은 땅’이 되는 것은 ‘나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해야 하는 일이고, 공동체가 함께 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혼자서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2티모 4,6-8).”

이 말은, “나는 순교를 각오하고 있고, 기꺼이 순교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사도 직무를 수행했고, 복음 선포 활동을 했고,

신앙인으로서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 이제 주님께서 나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주실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모두

그 월계관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좋은 땅’으로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자만심에서 나온 ‘잘난 체’가 아니라, 생의 마지막 시점에서

솔직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생을 회상하는 말이라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시점이 되면, 후회하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바오로 사도처럼 “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렸다. 나는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 라고

말하면서 생을 마무리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5) 실제 농사에서는 척박한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는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시간이 적용됩니다.

남은 생이 얼마 안 된다 하더라도 ‘지금이라도’ 회개하면 됩니다.

평생 아무렇게나 막 살다가 죽기 직전에야 회개해서 구원받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라고 투덜거릴 사람이 있겠지만,

‘진심으로’ 회개하기만 한다면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주실 것입니다.

(마태오복음 20장에 있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가 바로 그런 가르침입니다.)

 복음: 마태 13,1-9: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농부가 뿌린 씨앗을 새들이 쪼아 먹고 햇빛으로 타버리고 가시덤불이 숨을 막아 죽여 버리지만 많은 씨앗이 결국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씨앗을 뿌리는 농부가 바라는 것은 결국 풍성한 수확을 바라보고 씨앗을 뿌리는 것이지, 얼마 되지 않는 수확을 위해 씨앗을 뿌리는 농부는 없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 씨앗은 많은 열매를 맺고 풍성한 결실을 가져다준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4절) 여기서 길이란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께로 가는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나그넷길 세상이다. 이 길에는 하느님의 것은 조금도 모르고 세상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길은 단단하여 씨앗을 덮을 만큼 충분한 흙이 없다. 악의 세력이라고 하는 새가 그 씨앗을 먹어버리고 만다. 그들은 자기 신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5-6절) 돌밭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들은 지나가는 악마들에게 채여 간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시련의 겨울이라고는 없는 날씨가 맑고 편할 때만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고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어려운 시기나 박해가 닥치면 쉽게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이다.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7절) 신앙인은 가치관이 올바로 서 있어야 한다. 이 가시덤불은 하느님보다도 재물을 추구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 위험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신앙의 진리를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한다. 재물에 관한 관심과 욕망이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의 씨를 고이 보존하고 가꾸는 사람은 30배, 60배, 100배의 엄청난 결실을 보장받고 있다. 이렇게 말씀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큰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또 실천하여야 한다. 여기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씨앗은 금방 효과를 내어 싹을 틔우고 잎을 내고 열매 맺지 않는다. 오랜 기간을 꾸준히 참고 기다려야 한다.

 

우리에게 뿌려진 씨앗이 어떻게 자라야 할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 말씀을 잘 간직하고 싹을 틔워 백 배의 열매를 맺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라는 밭에 있는 온갖 장애물들을 치워야 한다. 돌을 골라내고, 잡초와 가시덤불을 걷어내어 좋은 땅이 되도록 하는 수고를 기꺼이 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향한 삶이라고 살 수 있도록 매일 매 순간 노력하자.

 ."열매는 백배가 되었다."(마태 13, 8)

-한상우신부-


열매 앞에서
겸손을 배운다.

그냥 이루어지는
열매란 없다.

열매는
여정을
필요로 한다.

열매로
새로운 세상을
우리는
보게된다.

익숙해져 있던
길가와
돌밭과
가시덤불의 삶을
이제는 버리는
것이다.

기존의 것을
버리지 않고서는
새로움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씨앗이
죽지 않고서는
백배, 천배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씨앗은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결국
씨앗과 열매는
하나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이다.

씨앗 없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참된 기쁨이다.

씨앗은
숨겨두는 것이
아니라 땅에
과감히
뿌리는 것이다.

삶이란 밭에
씨를 뿌리는
실천이 바로
살아있는
우리들
신앙이다.

그래서
신앙은
도전이며
모험이다.

확실하지 않기에
희망하고
두려워하기에
간절히 기도한다.

말씀의 씨앗은
깨달음의
열매로
결실을 맺는다.

씨앗은
간절하기에
열매를 맺는다.

씨앗의
엄청난 신비는
우리를
좋은 땅이
되게한다.

좋은 열매를
맺게하시는
주님이시다.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씨앗이
이미 뿌려졌다.

간절함과
부서짐과
십자가의
죽음이
필요할 뿐이다.

씨앗은
십자가의
좋은 땅에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씨앗의 여정은
십자가의
여정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영육의 양식을 어떻게 얻는지 보여 주십니다.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탈출 16,3)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굶주림에 직면하자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합니다. 파스카의 지향과 목적까지 왜곡한, 도를 넘긴 원망이긴 한데, 극한의 배고픔을 아는 이라면 그들의 절규를 그저 불평으로만 치부할 수 없을 겁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탈출 16,15)
그들의 굶주림이 탐욕이 아닌 생존의 문제이기에 주님께서 기꺼이 해결해 주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진영에 메추라기 떼가 날아들게 하시고 광야 위에 아침마다 이슬과 함께 만나를 뿌려 주시지요.

이스라엘 백성의 육적 생명을 지탱하는 양식, 만나와 메추라기는 그들이 머무르는 광야 도처에 내립니다. 백성이 있는 곳에 만나가 있으니 경쟁하지 않아도 모두가 거둬들여 양식을 삼을 수 있습니다. 만나는 욕심껏 많이 거두어도 쌓아둘 수 없고, 적은 듯 거두어도 모자라지 않는 신비의 양식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일용할 양식을 이런식으로 주신 건 아닐까요?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 먹으면 누구에게도 넘치지 않고 또 아무도 굶주리지 않는 충분한 양으로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일부 탐욕스런 이들이 공공의 양식을 약탈하고 축재하여 힘과 무기로 삼아 부를 누리면서 훨씬 더 많은 대다수의 다른 한 쪽이 굶주리게 되어 버린 것이지요.

복음에서 예수님은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씨앗에 비유하십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
예수님은 말씀의 씨가 뿌려지는 땅을 네 상태로 나누십니다. 만나가 광야 도처에 깔리듯 말씀의 씨도 땅을 가리지 않고 뿌려지지요. 그런데 여기서 '과연 나는 길바닥인가, 돌밭인가' 고민하고 자책에 빠지는 순간 묵상을 길을 잃어버립니다. 주님의 마음을 만나는 기도가 아니라 성찰과 반성, 실망으로 끝나버릴 소지가 다분하니까요.

누구는 길바닥이고 누구는 좋은 땅이 아니라, 한 존재 안에도 길,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이 혼재할 수 있습니다. 영혼의 상태에 따라 이런 조건들이 번갈아 위세를 떨치며 존재를 장악하기도 하지요. 우리의 육신은 물론 이성과 믿음, 감정 등이 완전하지 못해서 늘 최상의 상태, 가장 좋은 조건에만 머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태가 어떠하든 말씀은 일단 뿌려집니다. 씨 뿌리는 분, 주님께서 조건을 붙이지 않고 당신을 우리에게 무상으로 던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내게 거부당해 튕겨나가지 않도록, 영혼이 척박한 상태든 비옥한 상태든 일단 어떻게든 심겨지도록, 적어도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을 향해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 영혼이 좋은 땅의 상태일 때 심겨진 말씀이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을 겁니다. 그러면 그동안 싹 튀우지 못한 씨앗의 실패와 유실을 만회하고도 남겠지요. 이 또한 주님께서 주시는 영적 양식의 신비입니다.

사실 육적 양식이나 영적 양식이나 모두에게 주어진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그런데 물리적 양식인 재화를 신비의 양식 만나처럼 모두가 균등히 누릴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한 쪽은 독점으로 쌓아둔 채 썩고 과용과 남용으로 병드는 반면 다른 한 쪽은 굶주려서 스러져가니 말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양식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뿌려진 말씀은 귀를 활짝 열어 경청하고 마음을 활짝 열어 머무르며 손을 활짝 열어 실천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이들에게서 열매를 맺지요.

영의 원리도 육의 원리처럼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긴"(마태 13,12) 하지만, 영혼의 성장과 풍요가 타인을 빈곤하게 만들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명백히 다릅니다. 오히려 영적 양식에 대한 열성으로 맺은 열매를 통해 교회와 세상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모두 영원히 살리라."(복음 환호송)
오늘도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십니다. 말씀이신 분이 말씀을 전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얼마만한 사랑과 경외심으로 말씀을 품는가에 따라 결과는 많이 달라지겠지요. 주님께서 우리 존재를 채워주시려 뿌리시는 영육의 양식을 겸손히, 은혜로이, 감사히 받아 풍성한 열매 맺으기를 기원합니다. 이 양식은 우리만이 아니라 형제와 이웃과 모든 피조물을 영원히 살게 할 귀한 선물입니다.

 불평할 시간에 기도하라

 -김찬선신부-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가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였다."

 

오늘 탈출기는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불평을 하는 얘기이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불평을 들어주시는 얘기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온 공동체가 들고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온 공동체를 들고일어나게한 것입니까?

 

먹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고작 먹는 문제로 온 공동체가 들고일어났냐며

이스라엘 공동체가 참으로 천박하다고 폄훼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같은 인간으로서 겸허하게 자신을 성찰한다면

우리도 그렇게 고상한 척 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먹는 것 때문에 불평을 하는 것을 누가 천박하다고 깔본다면

그는 대단히 성인 경지에 오른 사람이거나 굶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고

그의 태도는 매우 철부지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일 뿐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먹는 것 때문에 불만이 있고 불평도 하는 것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를 크게 문제 삼기보다는

다른 것 때문에 오늘 문제 삼고 싶습니다.

 

첫째는 배고픈 것 때문에 이집트가 오히려 좋았다고 하고

더 나아가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점입니다.

배만 부를 수 있다면 노예도 좋다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배고픈 문제만 해결하면 되는 것을

배고프지 않기 위해 노예가 되겠다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는 욕망을 위해 인간의 고귀함을 포기하는 것과 비슷하게

먹고 사는 것에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불평을 하느님이 아닌 모세와 아론에게 터트리는 점입니다.

배고프니 배고프다고 아우성칠 수 있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우성과 불평이 같은 인간에게 향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너무 잔인할 뿐 아니라

신앙적으로 너무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이 잘못하거나 죄를 지어서 고통을 받게 된다면

그것에 대해 누구를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좋지만

그런 것이 아닌데도 신이 아닌 인간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은

잔인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과녁이 잘못된 거라는 말입니다.

 

제가 관구장을 할 때 미성숙한 형제들은 어떤 문제의 책임과 해결을

다 저에게 넘기는데 저도 신이 아닌 같은 인간으로서

모든 문제를 다 예방할 수 없고 다 해결할 수 없지요.

 

반면에 성숙한 형제들은 저의 한계를 인정해줍니다.

아니, 저나 자신들의 인간 공통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 성숙에서 더 나아가 신앙적으로도 성숙한 형제들은 그렇기에

같은 인간에게 화살을 돌리고 인간에게서 해결책을 찾지 않고

하느님께로 시선을 돌리고 해결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인간에게 불평하지 않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불평만 하는 것은 전향적으로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닐뿐더러

하느님에게서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며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하면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인간에서 하느님께로 시선을 돌리고,

불평할 시간에 기도를 함을 오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7월 24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