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복음서의 여러 군데에 나오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로 소개되어 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십자가 밑에(마태 27,56 참조), 예수님의 무덤 곁에 있었던 여인이다(마태 27,61 참조). 또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첫 번째 사람으로(요한 20,11-16 참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었다(요한 20,18 참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시신이나마 모셔 가려 했던(요한 20,15 참조) 그녀에게서 주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12세기부터 시작되어 널리 퍼졌다.
☆☆☆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요한 20,1-2,11-18)
Jesus said to her, "Mary!"
She turned and said to him in Hebrew,
"Rabbouni," which means Teac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리운 노랫소리에 까맣게 잊고 있던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이 노래를 함께 들으며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니, 그와 함께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갑니다. 그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아쉬움과 후회에서 한동안 벗어나질 못합니다. 지나치듯 들려온 노래 한 곡에 사랑을 주고받았던 추억이 밀려듭니다. 우리의 기억은 그렇습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사소한 어떤 계기에 수많은 기억이 소환되고는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분의 무덤을 찾습니다. 그분 곁에 가까이 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시고, 낯선 이들이 서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예수님께 받은 사랑의 기억을 잊지 않았습니다. 다른 상황 속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비록 처음에는 알아뵙지 못했지만, 그 사랑의 추억 때문에 자신을 부르시는 목소리에 곧바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의심하지 않습니다. 누구냐고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우리를 불러 주시고 우리와 함께 길을 걸어가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뜻을 삶 속에서 발견하며 의심 없이 그분의 음성에 응답하려면, 예수님과 나누었던 추억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 추억들을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 놓아야 합니다. 지나온 삶의 시간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한 기억을 잘 간직해 놓아야만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단번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과의 추억을, 그분에 대한 기억을 잘 간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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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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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체를 즐겨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처럼 쉬울까요? 며칠 전,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 어느 형제님을 만났습니다. 이 형제님은 제게 “신부님은 하고 싶은 것을 하니 얼마나 좋으십니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마지못해 회사에 다닌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은 입사 시험을 보고서 회사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회사에 들어오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분명히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소원이었고, 이를 이룬 것인데도 마지못해 다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분명 이 형제님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마음이 생기면서 하고 싶었던 일이라는 것 자체를 잊어버린 것이지요.
사실 일은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미로 하는 취미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가수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음악이 좋아서 가수가 되었는데, 가수가 된 후 음악을 즐기기가 쉽지 않다고 말이지요. 취미로 하는 음악에서 일로 하는 음악이 되다 보니 책임이 동반되고 이로 인해 부담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나의 마음이 좋아했던 것을 싫어하게 만들기도 있고, 간절히 원하는 것이 가장 벗어나고 싶은 것이 되게도 합니다. 어떤 마음을 간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을 지냅니다. 축일에 맞춰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통해 회개한 뒤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던 그녀였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컸기에 무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던 바처럼,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때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요?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님인데도 불구하고 가까이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정원지기로 생각합니다.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라는 고정된 마음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니 가장 기뻐해야 할 순간에, 예수님 시신이 없어졌다고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아닌 긍정적인 마음으로, 미움의 마음보다는 사랑의 마음으로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곁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으며, 내 이름을 부르는 예수님을 향해 “라뿌니!”하며 기쁨의 응답을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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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의 한 방송에서 ‘부탁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 준 적이 있습니다.
어느 자매님이 사람 많은 공원에서 짐을 놔두고 아이와 화장실을 갔습니다. 그때 한 도둑이 짐을 유유히 가져갈 때 주변 사람들은 관심을 전혀 두지 않습니다. 훔쳐 가는 것을 보고도 모른 척하는, 완전히 방관자 상태였습니다.
이번에는 주변 사람에게 “아이가 급하다고 해서 잠시 화장실에 가야 하는데, 혹시 제 짐을 잠시 봐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부탁했고, 사람들은 이 부탁을 받아들였습니다. 잠시 뒤, 도둑이 와서 짐을 가져가자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둑을 제압했습니다.
부탁 한 마디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부탁도 하지 않으면서, 도둑이 짐을 가져가는데도 사람들이 방관만 하고 있다고 탓만 합니다.
주님께도 제대로 부탁하고 있을까요? 그냥 알아서 해 달라는 식은 아닐까요? 물론 주님께서는 가장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우리와 함께하시기란 쉽지 않습니다.
청원 기도가 무조건 나쁠까요? 아닙니다. 당연히 계속해야 하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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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사랑하면 '라뿌니! 하고 부른다
-전삼용신부-
오늘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가장 큰 죄인 중 하나였다가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완전한 사랑에 반하여 부활한 당신 자신을 당신 제자들보다 마리아에게 먼저 보여 주셨습니다.
본래 복음은 사랑이 높은 사람에게서 낮은 사람에게로 흘러야 하는데, 이런 면에서는 마리아가 사도들을 앞섰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가장 완전히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시신이 사라졌는데도 끝까지 그 시신을 찾으려 하고 그분을 만났을 때 ‘라뿌니!’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라뿌니는 스승님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스승님으로 찾고 있었다는 것이 왜 막달레나가 위대한 제자일까요?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갑자기 보았다면 무엇이라 불렀을까요?
“예수님?”, “주님?”, “오마이 갓?” 뭐 이런 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찾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계속 자신이 변화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시신을 통해서도 발전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배워서 죄에서 벗어나 더 그리스도다워지기 위해 주님을 찾는 마음, 이것이 마리아의 영성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갑자기 만났을 때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킹콩을 들다’(2009)는 전북 순창고 여자 역도부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전북 순창고’ 여자 역도부 선수들은 정인영 감독 아래서 실제로 전국체전에 출전해, 5명의 선수가 15개 부문 중 14개의 금메달을 휩쓰는 대기록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전국체전이 있은 1년 후 정인영 선생님은 49세의 나이로 과로로 인한 뇌출혈로 근무중 사망하게 됩니다.
조금 각색된 영화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시골 여중에 88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이지봉 선생이 부임합니다. 그는 부상으로 인해 역도를 그만두고 나이트클럽 웨이터로 일하던 중 은사의 도움으로 시골 여중부 역도 코치로 부임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역도로 남는 것은 우락부락한 근육과 부상뿐이라며 역도를 권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도부에 지원자가 하나둘 생깁니다. 시골에서 낫질로 다져진 튼튼한 어깨와 통짜 허리를 가진 영자, 훌륭한 체격을 가진 현정과 보영, 아픈 엄마를 위해 역도선수로 성공하고 싶은 여순, 역도복의 섹시함에 빠진 사차원 소녀 민희.
지봉은 그들의 진심을 보고 역도를 가르쳐보기로 합니다. 그러는 중 과로로 그의 심장질환은 점점 심각해지기만 합니다. 목숨을 걸고 그들을 가르친 덕에 그들은 체전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며 지봉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지도하게 된 것은 지봉의 후배이자 지봉에게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던 코치였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폭력으로 가르치고 지봉의 제자들이었기에 더욱 폭력을 가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지봉은 그들에게 힘을 주려고 편지를 써서 그들에게 가던 중 길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합니다. 이때 아이들은 시합 중이었고 지봉의 부고 소식을 듣고는 시합에 집중하지 못하고 슬퍼합니다.
하지만 코치는 선배 지봉의 부고 소식에도 아무런 내색도 없이 오히려 시합에 집중하지 않는 아이들을 폭력으로 몰아세웁니다. 더는 지봉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한 역도부 학생들은 자신의 여고 마크를 떼어버린 후, 매직으로 유니폼에 ‘이지봉’ 세 글자를 쓰고 시합에 출전합니다. 그들은 스승의 바람답게 좋은 결과를 내고 장례식장으로 돌아와 자신 선생님의 관을 역기처럼 들며 선생님을 추모합니다.
선생님은 죽어도 그 가르침은 계속됩니다. 선생님 때문에 삶이 변한 사람은, 그래서 행복한 사람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 시체라도 찾으려 합니다. 선생님의 유일한 바람은 제자들이 잘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유일한 희망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스도를 진정한 스승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자마자 ‘스승님’이라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갑자기 만났을 때 어떤 이름으로 부를까요?
현재 코로나 상황으로 지역에 따라서는 또 미사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성체를 영하지 못하는 것은 큰 고통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분의 시신이 있습니다. 성경도 있고 영성 서적도 있고 유튜브 강의도 있습니다. 찾으려고만 하면 그분에게서 배울 아주 많은 그분의 자취가 있습니다.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무덤에서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배워야 할 것이 태산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스승’으로 여긴다면 말입니다.
이런 것도 찾지 않으면서 성체만 영하지 못하는 것에 슬퍼한다면 예수님께서 그리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배우려고 하는 마음만 있다면 미사에 참례하지 못해도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릴 무수히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스승으로 여겨주는 이를 가장 사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통해 변하는, 즉 죄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을 가장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완전히 같아지기 전에는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스승이셔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라뿌니!’라고 부를 때, 그분은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불러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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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알라스카를 여행하면서 경비행기를 이용하였습니다. 경비행기의 장점은 수속이 간편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택시 같았습니다. 그러나 경비행기의 단점도 있습니다. 안개가 끼거나, 바람이 심하게 불면 운항 할 수 없습니다. 이번 여행에서도 짙은 안개와 비 때문에 2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책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책에 나온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김사인)” 경비행기가 결항되어서 여행 일정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비용도 추가 되었습니다. 마냥 기다리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시를 읽으면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책을 읽었고, 친절한 민박집 주인은 공항까지 데리러 왔고, 맥주도 주었습니다. 낙엽하나에 고마움을 느낄 수 있다면 좋은 사람을 만난 것은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생각합니다. 믿었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유다는 은전 30닢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베드로는 3번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 3번이나 넘어지셨습니다. 얼마나 힘드셨으면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탄식하셨습니다. 갈증과 괴로움에 ‘목마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 곁에 가까이 다가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잠시지만 예수님께서는 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베로니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습니다. 교회의 전승은 베로니카는 12년 동안 하혈하던 여인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면서 하혈이 멈추었던 여인입니다. 자캐오의 아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자캐오와 가족이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키레네 사람 시몬과 베로니카를 통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축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레나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이유는 오늘 우리가 복음에서 읽었던 것처럼 막달레나가 주님을 가장 애타게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릇은 뒤집어 놓으면 비가와도 물이 고이지 않습니다. 그릇은 바로 놓아야 빗물이 고일 수 있습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으로 오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묵시록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언제나 너의 집 앞에 있단다. 문을 열기만 하면 내가 너의 집으로 들어 갈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비로운 마음으로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마음이 마리아에게 전해 졌고, 마리아는 이제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쁜 소식을 다른 제자들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연도를 할 때, 성인호칭기도를 합니다. 천상의 성인들의 도움으로 세상을 떠난 영혼이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을 떠나 낯선 곳으로 먼 여행을 떠나는 영혼에게 천상의 모든 성인들이 먼 여정의 길동무가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노, 미움, 멸시, 조롱, 저주의 마음으로 부르면 우리들 또한 그렇게 변화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용서, 사랑, 자비, 이해의 마음으로 부르면 우리들 또한 그렇게 변화 될 것입니다. 나는 내가 만나는 이웃들을 어떤 마음으로 부르고 있는지 생각했으면 합니다. 사랑은 결심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을 찾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사랑을 가족들에게, 이웃들에게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그들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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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롭게도 주님께서 찾아와주시고, 손 내밀어주셨습니다!
-양승국신부-
시골 살다보니 참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읍에 볼일이 있어 나가는 길에 크게 내걸린 현수막을 보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자제분의 성공이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으셨던가 봅니다. ‘경축! ○○○옹 장남 ○○○ 박사학위 취득’, ‘○○○ 선생 차남 ○○○ 서기관 진급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요즘은 그런 케이스가 드물지만, 과거 경제 개발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인생 역전을 이룬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 청운의 꿈을 품고 가난한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향했지요.
그야말로 주경야독(晝耕夜讀), 형설지공(螢雪之功)의 노력 끝에 큰 성공을 이룬 사람들, 이른바 인생 대박 난 사람들은 가난하고 척박한 고향의 자랑꺼리요 자부심이었습니다. 성공한 자녀들이 한번 씩 고향을 방문하면 부모님들은 너무 기뻐 덩실덩실 춤을 추셨고, 마을 잔치도 열곤 했습니다.
따지고 보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 역시 엄청난 인생의 대반전, 인생 초대박을 일궈낸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마리아의 인생은 더 이상 손 써볼 수 없는 인생, 더 이상 밑으로 내려갈 수 없는 가장 밑바닥 인생이었습니다.
마리아를 소개할 때 마다 단골로 사용되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한때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인’이란 표현입니다. 유다 문학 안에서 7, 12 등의 숫자는 ‘완전한’ ‘꽉 찬’이란 의미입니다.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도 있지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도 있습니다.
일곱 마귀가 들린 마리아란 표현을 통해서 그녀가 앓고 있던 병고가 얼마나 심각했던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적당히 마귀가 들린 것이 아니라 완전 마귀가 들렸던 것입니다.
하루에 한 두 시간 마귀에 횡포에 시달리다가 나머지 시간은 잠잠해지는 그런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일곱 마귀가 번갈아가며 난리를 치니 그녀의 하루 온종일은 그야말로 전쟁터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죽음보다 못한 삶,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더 낫겠다.’는 심정으로 마리아는 혹독한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였는데, 은혜롭게도 인생 역전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꿈에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발버둥 치다가 죽겠구나, 했었는데, 기적처럼 그분께서 다가오셨습니다.
한없는 자비와 연민의 시선을 지니신 분께서 능력과 사랑으로 가득 찬 당신의 손길을 마리아에게 펼치셨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꽁꽁 얼어붙었던 겨울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세상 화사하고 따뜻한 인생의 봄날이 마리아에게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새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 마리아였기에, 이제 더 이상 여한이 없었습니다. 세상 좋은 것들에 대한 미련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주님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 시간, 재산, 능력, 마음, 영혼, 결국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쳐 예수님을 추종하고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관심사는 예수님뿐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마리아의 인생 역전이 제 삶의 여정 안에 똑같이 반복되었음이 확실합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비참한 제 인생이었는데, 너무나 삶이 혹독해서 다 때려치우고 포기하고 싶었는데, 은혜롭게도 주님께서 찾아와주시고, 손 내밀어주셨습니다. 일으켜 세워주시고 힘내라고 등을 두드려주셨습니다.
이런 우리가 주님 앞에 취할 행동을 다른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죽음의 길에서 되살려 주신 주님의 크신 은총에 깊이 감사하고 행복해하면서, 비록 작고 미약하지만 그분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계획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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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이영근신부-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 뵌 분일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전한 사도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가리켜 ‘사도 중의 사도’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곧 새로운 각도에서 “복음”이 바뀐 것에 해당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복음’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파견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복음’이 선포된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새로운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의 시대의 “복음”은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이시다.’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이미 예수님께 교육을 받았던 것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이렇게 사도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요한 20,17)
이는 당신께서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밝혀 주신 것입니다. 곧 당신이 가시는 곳은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당신의 아버지이시면서 동시에, 바로 제자들의 아버지라는 사실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증언하는 진리입니다.
곧 부활이 가져온 선물입니다. 우리가 성자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가 아빠 아버지의 자녀가 된 사실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그렇습니다. 우리가 울음 울 때, 그분은 이미 우리 안에서 울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찾을 때, 그분은 이미 우리 안에서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아니, 우리보다 먼저 우시고 우리와 함께 울고 계시며,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와 함께 찾고 계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바로 그 어려움과 슬픔 속에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이미’ 바로 ‘지금 여기’, 우리의 일상이 벌어지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함께 살아계시며’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뵈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자신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지척에서 말씀을 건네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함은 우리 마음의 귀와 눈이 닫혀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곧 “마리아야!”(요한 20,16) 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자신의 생각과 편견에 빠져있던 마리아를 빠져나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이 ‘말씀은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 아니라, ‘모르는 낮선 분’으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주님!
이제는 당신을 놓게 하소서!
제가 붙들면 속박이 되지만 당신이 붙드시면 자유이오니,
제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제 마음일 뿐,
당신은 붙들 수도 붙들려지지도 않으시는 분이오니,
제가 만들어 놓은 제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은 멈춤이 없사오니,
사랑하는 일에 붙들리어 멈춤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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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송영진신부-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1-2)”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11-13)”
1) 신앙은 항상 ‘현재’의 일이고, 신앙생활은 ‘지금’ 하는 생활입니다.
‘오늘’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으면서
‘내일부터는’ 잘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간의 내일’이라는 시간은 하느님만의 권한에 속해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또 ‘지금’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으면서 ‘전에는’ 신앙생활을 잘했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일입니다.
“나도 전에는 예수님을 사랑했었다.”, 또는 “나도 전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다.” 라고 말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 말은 ‘지금은’ 안 하고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말이 될 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과거의 모습이 아니라 현재의 모습을 보시는 분입니다.)
바로 지금 이곳에 나와 함께 살아계시는 주님을, 지금 믿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지난 일을 ‘추억’하는 생활이 아니라,
‘지금’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2)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셔서 큰 슬픔에 빠졌고,
예수님의 시신을 잃어버려서 더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아직 부활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사실 부활 신앙이 없는 단계에서는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해도 인간적인 믿음과 사랑일 뿐이고,
신앙인의 참된 믿음과 사랑은 아닙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사랑했던 ‘기억’과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기억’은
그의 슬픔을 더욱 크고 깊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했습니다.
그 기억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힘으로 작용한 것은 아닙니다.)
‘부활 신앙’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날 베드로 사도의 첫 설교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사도 2,23-24).”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사도 2,32).”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 그것이 신앙의 첫 단계입니다.
3) 요한복음에는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라고
묻기만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공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려 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5-6).”
그래서 요한복음에 있는 “여인아, 왜 우느냐?” 라는 질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는데 왜 그분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울고 있느냐?”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울지 마라. 그분께서는 부활하셨다.”>
(요한복음서 저자가 “여인아, 왜 우느냐?” 라고 간단하게 기록한 것은 바로 뒤에
예수님과 마리아 막달레나가 만나는 장면을 적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15절에 있는 예수님의 질문,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도
천사들의 질문과 같은 뜻이라고 해석됩니다.
<“내가 부활해서 네 눈앞에 있는데 왜 우느냐? 왜 나를 찾느냐?”>
마리아 막달레나가 천사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 또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너무 큰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직 부활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의 예수님에 대한 기억,
또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겪었던 많은 일에 대한 기억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을 방해하는 힘으로 작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6-18).”
복음서에는 ‘마리아야!’ 라고 단순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뜻을 생각하면, “마리아야! 내가 여기 있다.”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눈과 마음을 열어 주시는 말씀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부활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고, 갑자기 알아보게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없었던 부활 신앙이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생겼을까?
마리아 막달레나 자신이 무슨 수행을 해서 얻은 깨달음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에게 은총을 주셨기 때문이고,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 은총에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 말씀을 뜻에 따라 정리하면,
“나를 붙잡지 말고, 내 형제들에게 가서 말하여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지만 곧 올라간다고.”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으로서
우리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사도들을 위한 사도’ 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왜 마리아 막달레나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사도들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인데,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를
간절하게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 신앙이 아직 없었던 상태에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간절하게 바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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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조욱현신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루카 복음에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자”(루카 8,2),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그 밑에 있던 부인 중의 하나로(참조: 요한 19,25),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알렸던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참조: 마르 16,9-11). 전승에 의하면,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로 보고, 통회와 관상의 이상적인 모델로 공경해 왔다. 성령강림 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과 함께 에페소로 가서 선교하다가 그곳에서 선종하였다고 한다.
복음: 요한 20,1-2.11-18: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마리아 막달레나는 복음을 통해서 진정한 부활의 증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녘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으로 가서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누군가 밤중에 주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생각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전한다(1-2절). 그런데 예수님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을 때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자기 위주의 눈물 때문이었고, 그녀의 눈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빈 무덤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것에만 그의 생각을 고정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참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하고 부르신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한 마디로 “선생님!”하고 기뻐한다.
이제 울고 있던 마리아는 왜 예수님을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을까? 막달레나는 완전히 자기 자신의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로밖에 보지 못하고 있다. 빈 무덤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기에, 즉 자기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자신의 판단이 옳은 줄로만 알았기에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흔히 그와 같은 태도를 보이면서 살아가기 일쑤라 하겠다. 그럴 때 우리도 차디찬 무덤, 땅에만 쏠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곳에서 눈을 돌려 승리를 거두시고 서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부활의 체험이란 것은 이제 막달레나가 체험하는 것 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는 것뿐 아니라, 그 체험을 전하는 것이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받는다. 그리고 달려가서 그 소식을 전하고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신앙인으로서 부활을 매일 체험하여야 하며, 그 부활체험을 기쁘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흔히 새로이 주님 안에 태어나는 삶의 모습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이때 진정으로 감사하며 살 수 있고 그것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주님을 애타게 찾았으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예수께서 먼저 다가가시고 마리아를 불러주시듯이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나를 먼저 부르고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나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내 옆에 계신 주님도 엉뚱한 동산지기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분을 뵙고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처럼 부활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용감히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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