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5일 연중 제9주간 토요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보니파시오 성인은 675년 무렵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수도회에 들어가 사제가 된 그는 수도회 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다. 성인은 특히 독일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마인츠의 교구장이 된 보니파시오 주교는 여러 지방에 교회를 세웠다. 성인은 선교 활동에 주력하다가 754년 이교도들에게 살해되었다. 1874년 비오 9세 교황은 보니파시오 주교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마르코12,38-44)
“Amen, I say to you, this poor widow put in more
than all the other contributors to the treasury.
For they have all contributed from their surplus wealth,
but she, from her poverty, has contributed all she had,
her whole liveliho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가난한 과부가 성전의 헌금함에 봉헌합니다. 렙톤 두 닢입니다. 렙톤은 한 데나리온의 1/144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러므로 편의상 하루 일당을 오늘날 10만 원으로 생각하면, 렙톤 두 닢은 약 1,388원 정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과부가 봉헌한 렙톤 두 닢은 천 원이 조금 넘는 금액입니다. 매우 가난한 과부입니다.
그녀의 궁핍한 일상이 조금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지요? 과부의 렙톤 두 닢이 내 주머니에 있는 돈의 전부라고 한다면, 그것이 나의 생활비라고 한다면, 그러한 삶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나의 가난을, 나의 어려움을, 나의 불편함을 호소하면서 불평과 투정으로 가득한 모습이 예상됩니다. 그러나 과부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이 묵묵히, 조심스레 성전으로 다가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봉헌합니다. 과부의 헌금은 우리에게 그녀의 삶의 자리가 지닌 불편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헌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하느님을 향한 마음은 부유하고 풍요로운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어떠한 모습의 삶을 살아가더라도,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함을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외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을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바라보십니다. 내 조건과 상황이 본질이 아닙니다. 내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더라도, 그것이 극심한 가난과 어려움이더라도, 하느님을 향한 부유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바라보시고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금은 종영되었지만, 장수 프로그램이었던 ‘무한도전’의 김태호 피디의 MBC 채용 면접 일화를 어느 책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면접 볼 때 떨리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면접 볼 때 앞에 방송국 국장님, 이사님, 사장님이 앉아 있지만 사실 제가 입사해야 국장님, 이사님, 사장님이지 떨어지면 제겐 그냥 동네 아저씨보다 못한 분이거든요. ‘그런데 내가 왜 굳이 여기서 떨고 있어야 하지?’라고 생각했어요. 또 ‘넌 복덕방에 와 있다. 이 아저씨들은 바둑 두던 아저씨들이다.’라는 생각을 했죠.”
우리는 이런 마음가짐을 잘 갖지 못하지요. 상대방의 지위와 부에 신경을 쓰고 주눅이 들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일 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누구의 모습이 더 대단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전지전능하신 그분 앞에서는 부족한 존재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이렇게 지위의 높고 낮음을 따지고, 재산의 많고 적음을 따지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의 기준 아래에서 사람을 평가하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많은 부자가 큰돈을 넣는 것을 보셨고, 또한 몹시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아주 적은 돈인 렙톤 두 닢을 넣은 장면도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이 가난한 과부는 주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는 데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궁핍한 가운데에서도 가진 것을 모두 주님께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은 이것저것 신경 쓸 것들이 많지요. 가난한 과부보다 훨씬 큰돈을 헌금하지만, 주님의 뜻에 맞추기보다는 보여주기 위한 헌금의 성격이 더 크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부자의 모습을 닮기보다는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는 마음을 가진 가난한 과부를 본받으라고 하십니다. 이 여자야말로 주님의 뜻에 맞게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에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기준 아래에서 충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장 좋은 선물을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자니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 같고, 하지 말자니 남들도 다 하는 것을 하지 않아 ‘바보’ 소리 들을 것만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 어떤 선택이 바른 선택일까요?
어느 책에서 이런 경우, 이렇게 생각하라고 하더군요.
“지금 하려는 일이 내일 아침 기사 1면에 나온다면 부끄러운가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다면 하지 마십시오. 이를 통해 잘 모르겠다면, 내 자녀가 지금 하려는 일을 안다면 어떨까요? 부끄러울까요? 부끄럽지 않을까요?”
어떻습니까? 자신의 행동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신문에 나올 때, 좋은 모습으로 나와야 합니다.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 나와야 합니다. 바로 주님의 뜻을 기억하고 또 그 뜻에 맞춰서 살아갈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 신앙의 수준은 내가 무언가 잃을 때 드러난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는 부자 율법 학자들을 비판하시며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해 주십니다.
가난한 과부는 가진 재산의 전부인 모든 생활비를 봉헌하였지만, 율법 학자들은 겉보기에 액수는 많아도 일부만 봉헌하였기 때문입니다.
봉헌으로 신앙인의 믿음을 측정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고 계시니 이것은 반박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랑하면, 믿으면 더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신앙은 참된 봉헌으로 측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봉헌은 무엇일까요? 나의 것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자신의 것이 사라지는 것이 매우 못마땅합니다. 그래서 과부의 가산을 등쳐 먹기까지 합니다. 다만 봉헌하거나 기도를 하는 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과부는 생활비 모두를 바칩니다.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나의 모든 것을 바치는데 아깝지 않을까요? 그만큼 신앙이 성숙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40년 된 부부의 외아들이 갑자기 사고로 죽자 앞으로 성당에 나오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 외아들을 빼앗아가는 그런 하느님은 믿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분은 40년 동안 신앙을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성장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라는 믿음입니다.
또 신앙생활이 1년 된 분이 외아들을 잃은 모습도 보았는데, 그분은 그 고통을 잘 참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미 이분은 신앙생활이 자기의 것이나 자기 자신을 바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함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발전을 하였느냐, 하지 않았느냐는 내가 어디까지 봉헌할 수 있느냐로 결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신앙을 증가시켜 왔다면 혹은 기도 생활을 했다면, 자녀를 잃어도 그동안 키울 수 있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자전거가 너무 타고 싶은 아이에게 자신의 자전거를 잠깐 빌려줬다가 다시 받으면 아이는 분명 조금이라도 태워준 친구에게 고마워할 것입니다.
우리도 본래 우리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빼앗겨도 항상 감사할 것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과부는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자신을 성장시켜 온 사람의 모델이고 율법 학자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믿음이 퇴보한 사람의 모델입니다. 우리는 항상 신앙이 발전하고 있는지 퇴보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봉헌은 ‘감사’와 직결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은 “기도는 길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에는 과부의 헌금에 들어있는 가장 중요한 봉헌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감사의 마음’입니다. 감사가 자라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김준호씨는 인하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과에 진학하여 공부하다가 군에 입대했습니다. 군복무 19개월이 되던 10월 어느 날 부대에서 관물대 위에 올라가 물건을 정리하다가 실수로 땅바닥에 떨어져 크게 다쳤습니다. 척추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경추를 크게 다쳐 전신 마비 환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인당이라는 화명으로 붓을 입에 물고 글씨나 그림을 그립니다.
그가 감사하는 것을 들어보겠습니다.
첫째는 내가 전신 마비 환자가 되었기 때문에 주님을 영접하고 믿게 된 것이 무엇보다 감사합니다.
둘째는, 군대에서 다쳤기 때문에 치료비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셋째는 원호병원에 입원하는 중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아내는 그때 병원의 실습생이었습니다.
넷째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구필 화가(입으로 그리는 화가)가 된 것이 감사합니다.
그는 우리나라의 첫 번째 구필 화가로서 이후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1981년도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항상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분이 하는 감사가 ‘과부의 헌금’과 같을 것입니다. 감사할 것이 전혀 없는데도 감사하고 주님께 영광을 드린다면 신앙이 성숙한 것입니다. 반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불만만 커진다면 이상한 율법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과부의 헌금이란 ‘모든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봉헌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도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학자들처럼 자신들의 재산이라 여기는 것으로 하느님과 거래하지 않습니다. 감사가 증가하지 않으면 신앙은 퇴보하는 것이고 기도도 의미가 없습니다. 기도의 가장 큰 목적이 감사의 마음을 증가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란 말도 있듯, 신앙도 끊임없이 감사를 찾지 않으면 늙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인 것만으로도, 신앙을 가진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작년보다 올해가 항상 더 감사할 줄 알고 행복할 수 있다면 신앙이 익어가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지난 4월 28일에 전임 서울대교구 교구장이셨던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1998년 청주교구장에서 서울대교구장으로 오셨습니다. 저는 1999년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께 본당 신부 임명장을 받고 적성 성당의 본당신부가 되었습니다. 추기경님을 가까이 뵙지는 못했습니다. 교구 인사이동으로 2002년 저는 교구청 사목국에서 교육담당 업무를 맡았습니다. 구역장, 반장 교육과 미사를 준비하면서 가끔씩 추기경님께 총구역장 피정미사를 부탁드렸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총구역장을 위한 파견미사에는 꼭 함께 해 주셨습니다. 복음화 학교 담당 사제로 있을 때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복음화 학교의 피정에도 함께 해 주셨고, 강의와 미사를 해 주셨습니다. 밖에서 돌아오면 어머니께서 자녀들을 위해서 맛있는 저녁을 준비해 주시듯이, 추기경님께서는 매일 저녁 교구청 마당에서 묵주기도를 하셨습니다. 기도가 부족한 젊은 신부들을 위해서 기도의 밥상을 차려주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1961년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9년 후인 1970년 청주교구 교구장이 되셨고 1998년까지 28년 동안 청주교구 교구장으로 사목하셨습니다. 1998년 서울대교구 교구장이 되셨고 2012년까지 14년 동안 서울대교구 교구장으로 사목하셨습니다. 2012년 은퇴하셔서 원로사목자가 되셨고 2021년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사제로 9년, 교구장으로 42년, 원로사목자로 9년을 지내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연도를 이야기하는 것은 추기경님의 정확한 기억력 때문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강의나 강론 중에 오랜 전의 일을 년도와 날짜까지 기억하셨습니다. 4월 28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으니 이제 하느님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신지 39일 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그리운 어머니도 만나시고, 전임 교구장이셨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도 만나시고, 존경하였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도 만나셔서 이 세상에서의 소풍이야기 나누시길 바랍니다.
추기경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철저하게 시간을 관리하셨기에 매년 책을 출판하실 수 있었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새해 선물로 구역장, 반장들에게 본인이 쓰신 책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언제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를 위해서, 신학생들의 부모님을 위해서, 구역장과 반장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가난한 이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청빈한 삶을 사셨습니다. 더운 여름에도 에어컨을 켜지 않고 선풍기를 사용하셨습니다. 글을 쓰실 때는 이면지를 사용하셨습니다. 같은 옷을 18년 동안 입으셨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실 때는 안구를 기증하셨습니다.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경청의 삶을 사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언제나 들어주시듯이, 추기경님께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셨습니다.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순교자들을 공경하셨습니다.
추기경님의 외적인 삶은 화려한 모습이었습니다. 교구장으로 42년을 지내셨고, 존경받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추기경님의 내적인 삶은 가난한 과부의 삶이었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하느님께 가진 모든 것을 봉헌하였듯이, 추기경님께서도 모든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이 되려하셨고, 하느님께 오롯한 마음으로 사랑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고,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고,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나눔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삶 또한 칭찬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을 베푸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가난하지만 선(善)을 쌓은 집안은 언젠가는 경사를 맞게 되고 비록 부자라 하더라도 불선(不善)을 쌓은 집안에는 언젠가는 재앙이 닥쳐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나의 마음에 무엇을 쌓아 놓을 것인지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를 지냈으면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금액의 크기보다는 마음을 보시는 주님, 겉으로 드러나는 것 보다는 내면을 중요시 여기시는 주님!
-양승국신부-
극단적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진 유다인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었던 바가 있었으니 헌금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은 헌금의 액수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깊이와 비례한다고 여겼습니다. 많은 헌금을 한 부자들은 그렇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의 보잘것 없는 헌금을 크게 업신여겼습니다.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헌금을 하는데, 금액이 고작 렙톤 두 닢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렙톤 두닢은 일생에 도움이 안되는 작은 금액입니다. 렙톤은 당대 통용되던 화폐들 가운데 가장 가치가 낮은 그리스 동전이었습니다.
한 렙톤은 당시 노동자들 하루 품삯의 144분의 1가치를 지닌다고 하니, 우리나라 돈으로 4~500원 정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세상에 한 렙톤으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겨우 자판기 커피 한잔 뽑아 마실 수 있는 금액입니다. 성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적어도 만원이나 5만원이나 10만원 짜리 수표 정도는 넣어줘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시는 예수님께서는 렙톤 두 닢이 과부가 지니고 있던 전재산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았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코 복음 12장 43~44절)
가난한 과부가 하느님께 드린 헌금은, 그 가치에 있어서 다른 어떤 사람들의 큰 헌금보다도 뛰어납니다. 그녀가 두 렙톤을 헌금하는 데에는 큰 희생이 뒤따랐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주님께 봉헌하기 위해 그날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쓰고 남는 것을 바쳤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는 마음이 담겨있었습니다. 진심이 담겨있었습니다. 지극한 정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삶 전체가 녹아들어가 있었습니다. 의무감에서 하는 봉헌, 보란 듯이 우쭐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봉헌, 쓸 것 안 쓸 것 다 쓰고 남는 것을 바치는 봉헌이 아니라 준비된 봉헌, 감사의 마음이 담긴 봉헌을 주님께서는 바라고 계십니다.
금액의 크기보다는 마음을 보시는 주님, 겉으로 드러나는 것 보다는 내면을 중요시 여기시는 주님이심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어 참으로 기쁩니다. 오늘 우리의 보잘 것 없는 헌금, 오늘 우리의 아주 작은 희생, 오늘 우리의 티끌만한 봉사도 크게 어여삐 여기시고, 기쁘게 받으시는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작더라도 마음과 정성이 담긴 봉헌을 준비해야겠습니다.
‘미드라쉬 랍바(랍비들의 가르침) Ⅲ’에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사제가 어느 가난한 여인이 봉헌한 한줌 밀가루 제물을 손에 받아들고는 너무 어이가 없어 거절했습니다. 그 사제는 즉시 하느님으로부터 경고를 받았습니다. 바로 그밤 꿈에 그는 이런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여인이 바친 것을 멸시하지 말아라.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은 것과 같으니라.”
봉헌과 관련해서 오늘 우리 역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합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우리의 예물이 보다 귀하고 값진 것이면 좋겠습니다. 보다 큰 액수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주어진 처지가 각자 다릅니다. 만원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만원이 하늘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액수보다는 마음과 정성을 더 높이 평가하십니다. 따라서 봉헌이나 자선 금액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해서는 절대 안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헌금 때문에 소외당하거나 상처받은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각종 헌금이나 기부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사목자들은 가난한 신자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더욱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곘습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엄하게 질타하십니다. 남에게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찾으며, 약한 자들의 재산을 등쳐먹으면서도 기도는 오래 바치는 위선의 삶을 질책하십니다.
<복음>의 “뒷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렙톤 두 개를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높이 칭송하십니다. 부자들은 나름대로 여분의 것에서 일부를 바쳤지만, 이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기에 가장 큰 봉헌을 한 것이라고 칭송하십니다. 과부의 헌금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내면적 헌신의 외적인 표시”였습니다.
이는 헌금의 의미가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봉헌과 나눔도 바로 이러한 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마지막 음식마저 내어주었던 사렙다의 과부처럼, 자신이 가진 동전 전부를 내어놓았던 이 가난한 과부처럼, 아니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다른 이들과 하느님을 위해 믿음과 사랑으로 마음으로 헌신하여야 할 일입니다.
이는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많이 해야 한다는 돈 모금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봉헌의 참뜻을 일깨워 주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곳곳에서 약한 자와 억울한 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과 관심을 강조하십니다. “참된 봉헌”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마침내는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참된 봉헌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사실, 이 과부는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그의 전부를 바쳤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하였을까?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고 싶은 이를 만났는가?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그분을 만났는가? 전부를 내어주고도 가지지 못한 것마저 만들어서라도 주고 싶은, 그런 이를 만났는가? 그렇게 소중하고, 그렇게 귀한 이를 만났는가? 진정, 우리가 그분을 만났다면,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비싸서 그 어떤 많은 돈으로도 결코 얻을 수가 없지만, 또한 너무도 싸서 ‘단 돈 두 닢’으로도 얻을 수가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순수한 마음의 지향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지향’이라는 보화가 있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는 그 ‘지향’을 보십니다. 마음 속 ‘지향’이 순수하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아무리 거대하고 큰 일리라도 마음 없이 한다면 결코 예수님 마음을 얻을 수 없지만,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이지라도 사랑으로 한다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혹은 크고 거창한 일을 하느냐 작고 미천한 일을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마음의 지향’에 얼마나 순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곧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 카시아누스가 수도승의 목표로 제시한 “마음의 순결”(puritas cordis)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순수한 마음의 지향으로 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주님!
제 마음의 지향을 깨끗하게 하소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하게 하소서.
전부를 내어놓은 가난한 과부처럼, 목숨을 내어놓은 당신처럼,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저의 전부이오니, 전부를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부분은 전부보다 클 수 없다
-반영억신부-
초등학교 2학년 학생들에게 숙제로 ‘우리 집 자랑거리’를 써오라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자랑거리를 보니 “아파트가 넓다, 차가 좋다. 대형스크린 텔레비전이 있다.”등 물질적인 것들을 적어오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정말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나 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큰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렙톤은 당시 통용되는 화폐단위의 최소단위 입니다. 그렇다면 금전적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하찮은 금액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십 원짜리 동전 두 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그 이유를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마르12,43-44). 하고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가진 것의 일부를 내었고 가난한 과부는 있는 것 전부를 내었습니다. 일부는 액수가 얼마든 전부보다는 많을 수 없습니다. 전부는 액수가 적어도 부분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마음과 사랑을 봉헌한 것과 생색내기로 봉헌한 것은 분명 차원이 다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8,9).
세상은 돈을 좋아합니다. 많은 돈을 가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좇아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나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초등학생들이 벌써 물질을 자랑거리로 삼는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우리 기성세대입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든 가운데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그리고 민첩하게 자선을 베푸는 삶을 살았더라면 그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사실 과부의 헌금이 소중한 것은 가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바쳤기 때문입니다. 남김없이 바칠 수 있는 마음을 언제나 간직할 수 있을지…… 무엇을 봉헌하든 사랑의 마음으로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생계야 어찌 되든 재산을 다 팔아 성당에 바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재물이든 시간이든 근심 걱정, 내면의 상처까지도 온전히 주님께 맡길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본당신부를 하면서 많은 선물을 받고 살았지만 기억되는 선물이 있습니다. 한 어르신으로부터 받은 네 잎 클로버입니다. 들에서 발견했는데 신부님께 복을 빌어주려고 가져오셨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물질적인 선물은 할 수 없지만 이것이라도 받아주십시오. 제 마음입니다." 하셨습니다. 저는 아가다 할머니의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사랑이 담긴 네 잎 클로버는 다른 무엇보다도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복음: 마르 12,38-44: 과부의 헌금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먼저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그들은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고 실천하지만, 외적인 것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은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잔칫집에서 윗자리에 앉는 것에 더 신경을 쓴다고 하시며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도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고 하신다. 내적인 것에 관심이 없고 껍데기에만 신경 쓰는 그들의 불행을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부인들을 위해 마련된 13개의 헌금 궤가 있다. 그것들은 매일 드리는 제물이나 성전의 비용을 위한 헌금 궤이다. 많은 사람이 상당한 액수의 헌금을 하였다. 그런데 한 과부는 동전 한 닢에 해당하는 렙톤을 헌금 궤에 넣었고, 예수께서는 그 과부를 칭찬하셨다. 그것은 그 과부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희생하고 바쳤다는 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더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부의 동전에 관한 이야기가 율법학자들에 대한 가혹한 표현과 직접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겉꾸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대우받기를 원하면서도 뒤로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40절). 이렇게 위선에 가득 찬 율법학자들과 단순하고도 충만한 과부의 믿음을 비교하고 있다. 그 과부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까지도 바쳤다.
과부의 헌금은 그 무게가 아니라 그것을 봉헌한 선한 마음으로 재어진다. 즉 예수께서는 과부가 봉헌한 돈의 양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시고, 그 여인의 아낌없는 마음만 보셨다. 얼마 안 되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여 충실히 응답하는 이들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귀퉁이만으로 응답하는 이들보다 더 깊은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다. 마르코는 은총에 호응하지 못하는 율법학자들과, 조건 없이 단순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응답하는 과부를 비교하고 있다.
자선을 베푸는 데 필요한 것은 마음가짐뿐이다. 비록 지독하게 가난한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면서도 동전 두 닢을 넣는다면 우리는 힘자라는 대로 모든 일을 다 한 것이다. 보리빵 한 조각밖에 없으면서도 그것을 나눈다면 우리는 자선 행위의 가장 중요한 것을 행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냉수 한 잔으로 하늘나라를 얻는 것과 같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오늘 헌금을 한 과부의 모습을 통하여 자비로운 마음과 믿는 마음을 즉 신앙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것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당신의 모든 것을 즉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는 삶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오늘의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비로운 마음과 신앙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청하여야 하겠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 43)
-한상우신부-
지금 여기에서
맛 보는 일치의
삶이다.
예수님의
삶이
복음이다.
복음은
서로를 위한
섬김과
봉헌으로
더욱 빛을
발한다.
복음은
봉헌의
삶이다.
봉헌은
생활의
새로운
창조이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사람을
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다.
복음은 먼저
가난하고
소외된 이를
사랑으로
끌어안으신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봉헌이 참된
봉헌이다.
봉헌은
자아에
갇혀 있지
않다.
자아에
갇혀 있지
않기에 일치를
이룰 수 있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자신의 생활
전부를
봉헌한다는
것이다.
삶의 생명력은
참된 봉헌에
있다.
우리 삶의
안전장치는
물질이 아닌
하느님의
사랑에 있다.
사랑을
회복하는
봉헌이다.
봉헌은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말씀을 실천하는
일상의 삶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닮아가는 방법을 일러 주십니다.
"남에게 보이려고"(마르 12,40)
예수님이 율법 학자들을 비난하시는 이유는 그들의 봉헌과 자선, 기도가 하느님이 아닌 남에게 보이려는 과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눈이 아닌 사람의 눈에 영광이 되고자 하는 선행은 비록 타인에게 유익을 주더라도 하느님께는 기만이 될 따름이지요. 자기 영광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는 것이니까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43)
예수님께서 어느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모습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때는 헌금함에 돈이 떨어지는 소리로 주위에서 그 가치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가난한 이들이 제 깜냥을 다해 무언가라도 소박하게 봉헌하려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주변의 업신여김까지 감당해야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시선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헌금함에 다가가는 가난한 이들은 어쩌면 사람의 눈이 아닌 하느님의 눈에 자신을 내던진 이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눈에 그들이 귀하고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녀의 봉헌을 "많이"라고 보신 예수님의 수량 계산법은 우리 인간의 도량형 척도와 상당히 다른 게 분명합니다.
사실 봉헌의 끝판왕은 주님이십니다. 아버지께서 당신과 같은 하느님이신 아드님을 세상에 주셨고(봉헌하셨고), 예수님은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셨으니까요. 그래서 사심없이 주는 행위는 하느님의 자기 증여와 닮았습니다. 잘 비우고 나누고 주는 이는 하느님을 많이 닮은 사람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라파엘 천사가 토빗과 토비야 부자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권고하는 대목입니다.
"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 ... 자선을 베푸는 이들은 충만한 삶을 누린다."(토빗 12,7.9)
토빗은 하느님 앞에 충실한 의인이었습니다. 그의 자선과 선행은 자기에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무엇을 선심쓰듯 내놓는 차원을 넘어 자기 목숨까지 건, 위험을 무릅쓴 헌신이었지요. 이것이 하느님께서 즐겨받으시는 봉헌입니다. 오늘 "생활비를 모두 다"(마르 12,44) 바친 복음 속 가난한 과부의 봉헌과 이어지지요.
"충만한 삶"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에게 허락하고 베푸시는 "충만함"이 물질적 풍요나 세속적 성공과 무관함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존재적 충만함, 영적 충만함은 물리적 수량의 많고 적음과 상관 없이, 사랑의 크기에 비례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 때문에 비운 만큼, 나눈 만큼이 충만함으로 채워지는 것이지요.
"이제 이 세상에서 주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을 찬양하여라."(토빗 12,20)
이것이 이 세상에 남아 순례의 남은 여정을 채워가야 하는 우리의 지상 과제입니다. 많건 적건 주님을 사랑하기에 그분께 바치는 모든 것, 이웃을 사랑하고 연민하기에 그들과 나누는 모든 것이 주님께는 진실된 찬미가 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행한 모든 것은 굳이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아도 주님께 아름답고 영롱한 찬양으로 올려지지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복음 환호송)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이 행복은 우리가 부자이건 가난한 이건, 누리는 것이 많건 적건, 지위가 높건 낮건, 어느 신분이건 상관없습니다.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분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는 기도와 헌신, 그리고 그분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가난한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자선과 선행이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합니다. 행복은 우리가 주님과 닮아갈수록 더 충만해집니다.
사랑하는 벗님! 내어줌의 끝판왕이신 주님의 거룩한 살과 피를 기리는 성체성혈 대축일을 준비하며, 주님 닮은 성체의 삶을 더 깊이 묵상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어렵고 팍팍한 삶 한가운데서 나날이 주님을 닮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 우리는 서로에게 라파엘이다.>
-김찬선신부-
오늘 얘기는 토빗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앞서 얘기드린 대로 토빗기는 선행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좋으신 분이신데 왜 착한 사람이 벌을 받고
왜 하느님을 믿고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이 고통을 받으며,
왜 악한 사람이 오히려 떵떵거리며 잘사느냐는 질문에 답을 주는 얘기지요.
이에 대해 오늘 토빗서는 이렇게 결론적으로 답을 줍니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
자선을 베푸는 이들은 충만한 삶을 누린다.
그러나 죄와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바로 저희 자신에게 원수가 된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전에 올린 저의 강론을 참고하시고
오늘은 전에 하지 않은 얘기에 집중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토빗기는 이런 얘기도 합니다.
"너와 사라가 기도할 때에 너희의 기도를 영광스러운 주님 앞으로 전해 드린
이가 바로 나다. 네가 죽은 이들을 묻어 줄 때에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네가
주저하지 않고 잔치 음식을 놓아둔 채 일어나 가서 죽은 이를 매장해 줄 때,
너를 시험하도록 파견된 자도 나였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파견하시어 너와 네 며느리 사라를 고쳐 주게 하셨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슬픔에, 즐거움과 괴로움에, 행복과 불행에,
그리고 모든 길흉화복에 하느님께서 늘 함께하셨다는 얘기입니다.
사람은 길조가 있느니 흉조가 있느니 하며 길흉을 따지고,
흉조는 들지 않고 길조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앞길에 화는 없고 복만 있기를 또한 바랍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동양의 지혜는 그럴 수 없고,
길과 흉, 화와 복은 서로 넘나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길흉회린吉凶悔吝하고, 전화위복轉禍爲福하며
일음일양一陰一陽이라고도 하고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도 합니다.
좋은 것(길)이나 나쁜 것(흉)이 영원하지 않고
길이 흉이 되고 흉이 길이 되며
화가 복으로 바뀌고 복이 화로 바뀌기도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길흉화복을 판단하며
길과 복만 자기 인생길에 있기를 바라지만
자연이나 도는 길흉화복을 아예 판단치 않는다고 합니다
동양의 지혜가 이렇게 얘기한다면
오늘 토빗서는 우리 인간이 판단하고 느끼는
선과 악,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 길흉화복이
하느님 손바닥 밖에서 일어나고 이루어진 것들이 아니며,
그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고, 함께하시며, 조종도 하신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안에서 길은 길이 아니고 흉은 흉이 아니며,
화는 화가 아니고 복도 복이 아닌, 단지 우리가 그렇게 체험하고
느끼는 것일 뿐이고 그래서 이것들에 우리는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최고의 재앙, 최고의 화는 하느님이 안 계심이고,
최고의 행운과 복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이요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음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그 모든 것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 함께 하실 때
하느님께서는 라파엘 곧 당신이 파견하신 자를 통해서
그리고 라파엘을 시켜서 하셨다고 토빗기는 얘기합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라파엘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은인이기도 원수이기도 하고,
유혹자 시험자이기도 인도자 격려자이기도 하며,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행운이기도 불운이기도 한 천사들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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