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3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가롤로 르왕가 성인과 그의 동료 성인들은 아프리카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다. 우간다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지역에는 19세기 말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 왕궁에서 일하던 가롤로 르왕가는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뒤, 자신의 신앙을 떳떳하게 고백하며 궁전의 다른 동료들에게도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왕조가 들어서면서 배교를 강요당하던 그와 동료들은, 끝까지 굽히지 않다가 1886년 6월에 살해되었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우간다 교회의 밑거름이 된 이들을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부르며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코 12,12,28ㄱㄷ-34)
"The first is th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Lord alone!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The second is this: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우리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을 따르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우리는 ‘계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십계명이 포함되고, 그 밖에 우리에게 신앙인의 의무로 주어진 것들이 포함됩니다. 많은 계명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우리는 이 계명을 잘 지키며 살아가고 있나요? “예.”라는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복음 말씀은 계명을 잘 지킬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마음, 목숨, 정신 그리고 힘’을 다할 줄 알아야 합니다. 타인의 것이 아닌, 나의 마음, 목숨, 정신과 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나의 모든 것을 사용할 줄 아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향한 나 자신의 온전한 몰입입니다. 다음으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가장 큰 두 가지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두 나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향한 열정을 지니고 있으며,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사랑받기 위하여 태어난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하느님께서 흙먼지로 손수 빚어 만드시고, 숨과 영을 불어넣어 주신 소중한 존재임을 알고 있습니까? 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데, 나에게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불타오를 수 있을까요?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출발점,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인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공무원 시험 대비학원의 한 강사가 합격생과 비합격생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공부하다가 힘들고 우울할 때 어떻게 하나요?’라는 질문을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합격생은 ‘울면서 공부한다.’라고 하고, 비합격생은 ‘그냥 운다’라고 합니다.”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가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미래를 보고 있는 사람은 지금 해야 할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딱 한 번만 오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일들이 계속 찾아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힘들다고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다가는 단 한 번도 일어설 일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도 지금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에 울면서도 공부했던 합격생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은 어렵고 힘들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울면서도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주님의 뜻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첫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답변하시면서,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사랑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613개의 유대교 율법 조항들을 단 하나로, 즉 ‘사랑’ 하나로 정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실천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 따로, 행동 따로의 모습을 통해서 제대로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또 사랑할 수 없는 각종 이유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 모든 말씀에 동의하는 율법학자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주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이 다가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느님 나라에 사는 사람입니다.


어렸을 때, 제가 살던 집에 늘 봄이 되면 제비가 날아와서 집을 지었습니다. 처음 제비 두 마리가 날아와 집을 짓는데, 정말로 힘들겠다 싶었습니다. 며칠을 쉬지 않고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진흙과 지푸라기로 집을 짓습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지은 집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새끼를 이곳에서 낳고 또 키운 집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6개월 정도 지나면 자신의 집을 버리고 남쪽 나라로 날아갑니다. 온 힘을 기울여 집을 지었고, 또 많은 기억이 있는 곳이지만 미련 없이 떠납니다.
책 읽다 보니, 누에고치도 딱 열흘만 살다가 버리는 집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1년을 살다가 버리는 집이 까치들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떨까요?
물질적인 것에 너무나 집착해서 버리지 못하는 우리는 아닐까요? 그래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의 노예가 되어 갑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에 집중하기보다, 세상에만 집중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점점 멀어지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을 찾아 나서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과감하게 벗어 던져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한계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한계와 같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지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사랑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가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관계가 있을까요? 당연합니다. 우리는 사랑받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나에게서 솟아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누군가를 최대한 사랑하면 그 사람을 완전히 사랑하여 그 사랑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대가 사랑이 아주 출중하지 못하다면 내가 그 사람을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나의 사랑은 그 상대의 사랑의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는 자신을 길러준 늑대 부모를 완전히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사랑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는 늑대 부모의 사랑의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그가 사랑을 더 증가시키고 싶었다면 늑대가 아니라 인간 부모를 찾아 사랑하려고 노력했어야 합니다.
또 똑같은 예화를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다른 예화를 찾을 수 없어 반복합니다. 락 토마스(Rock Thomas)는 캐나다 농촌에 살던 촌뜨기 꼬맹이였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을 ‘패배자, 노동자, 애정 결핍’으로 정의했습니다. 사실 이 정체성은 자신이 규정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입니다.
토마스의 어머니는 도망쳤고 아버지는 돈만 가져다 쓰는 아이를 비난했습니다. 아버지는 14살 때 놀자고 말하는 토마스를 돈이 땅 파서 나오는 줄 아느냐며 심하게 비난했습니다. 그후 토마스는 노동으로 돈을 벌어 열일곱 살이 되니 독립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성공의 척도는 돈이었고 돈을 버는 이유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독립한 이후에도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일을 했고 그 덕분에 어느 정도 부유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엄마로부터 아버지가 암으로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게 됩니다. 아버지는 입원비도, 세금도 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토마스는 지금까지 자신이 모아 놓은 돈으로 병원비와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아는 아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그런 돈을 줄 리가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도 못하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올 때 토마스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패배자이자 노동자이며 애정 결핍’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사랑이 부족하다면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면 됩니다.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많습니다. 사랑이 부족한 부모를 사랑해 봐야 그 수준밖에 안 됩니다. 더 큰 사랑을 지닌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역시 올바른 예화는 아니지만, 영화 ‘에비타’의 후안 페론의 삶을 보고 싶습니다. ‘에바 페론’, 에비타는 본래 작은 시골의 연극배우였습니다. 몸을 파는 여인이었다고도 합니다. 자신이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보기 위해 돈을 내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누군가를 사랑하려 해도 그 사랑의 한계는 그것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비타는 도시로 상경해서 그곳에서 고위층 남자와 사귑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넘어서 더 높은 수준의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을 사귀게 되었고 그렇게 사귀는 사람을 높여가다 결국 대통령이 될 사람을 사귀게 됩니다.
에비타는 영부인이 되어 이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시골 여인으로 살던 자신을 영부인으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장 완전한 사랑이신 분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지나친 포퓰리즘으로 국고를 탕진했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크지만, 에비타는 여전히 아르헨티나의 많은 사람에게서 거의 성녀처럼 추앙받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랑에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에비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돈 주고 이용하려는 사람에게 머물렀다면 그녀의 사랑은 그 사람의 사랑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의도했던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녀는 더 높은 단계의 사랑으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왜 먼저 하느님을, 그리고 그분께 가기 위해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어떤 신부님의 강론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 자매님이 남편의 도박과 외도, 폭력에 못 이겨 이혼을 앞두고 메주고리에로 성지순례를 하러 갔습니다.
밤낮없이 십자가 산을 맨발로 오르내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남편에 대한 미움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기를 유산시키고 자신에게 몸과 마음의 커다란 상처를 준 남편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 나왔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남편은 술과 도박을 끊고 묵주를 손에 쥐고 아내를 마중하러 나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그리스도는 사랑이 사람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그만큼이 곧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한계가 됩니다.
그분은 이미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묵상하며 그분을 더 사랑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소명이 있다면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한 길은 기도와 공부와 희생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사랑하기 위해 부모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야 하고 그 사랑을 묵상해야 하며 또 부모처럼 고생을 해 보면 더 사랑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로 그분의 사랑을 받고 공부로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희생으로 그분의 고통을 느껴본다면 결국 내가 사랑하기 어려운 이웃도 이미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웃을 더 사랑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 길밖에 없습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자녀를 사랑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부모를, 친구를, 미운 사람까지 사랑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의 사랑은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작년에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Parasite)’이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2021년 올해에는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Nomadland)’가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두 영화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에서 태어난 아시아 출신의 감독입니다. 아시아인의 정서와 감정이 유럽과 미국의 영화계에서도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영화가 주는 주된 시대정신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자본주의와 능력주의가 과연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는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온 도시와 문명이 주는 편리함과 풍요로움은 지속될 것인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행복은 내가 살고 있는 집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나의 능력과 업적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밤하늘의 별에서 사랑을 볼 수 있다면, 봄에 피는 꽃에서 희망을 볼 수 있다면, 낯선 이를 반갑게 맞이하는 이웃에게서 믿음을 볼 수 있다면 행복은 이미 우리 곁에 있습니다.
도시의 화려한 불빛 속에는 하루하루 삶을 걱정해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그늘이 있습니다.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의 좌절과 분노가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경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교만과 오만이 사회를 나누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라이언의 ‘문명의 역습’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추구하는 문명은 너무나 큰 희생 위에 세워진 모래성과 같습니다.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풍요로움을 위해서 버려지는 쓰레기는 환경을 오염시키고,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갈 터전을 쓰레기 더미로 만들고 있습니다. 두 영화는 과연 우리가 이대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컴퓨터, 인공지능, 자율 주행 자동차가 우리를 편리하게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행복은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공감할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코로나19에 대해서 우리는 경제적인 손실을 이야기합니다.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백신과 치료약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곧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어쩌면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지 모릅니다. 마스크 착용이 일상이 되면서 우리는 어쩌면 지나치게 타인에 대해서 비난과 비평을 일삼았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거리두기를 지키면서 어쩌면 우리는 말 못하는 생명을 괴롭히지 않았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힘없는 사람들 착취하지 않았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수시로 체온을 재면서 나의 사랑의 온도, 나눔의 온도, 희생의 온도는 너무나 식어버리지 않았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안전을 위해서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으면서 과연 내가 거처할 하느님 나라에 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능력주의와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타인과 자연을 희생하면서 세우는 바벨탑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없는 연민과 사랑입니다.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찾고, 종교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찾지만 사랑은 그 두 가지에 대한 해답입니다. 가장 미련한 것은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고 가장 슬픈 것은 사랑을 해보지 못하는 것이며 가장 불행한 것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있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자존심입니다. 깃대에 깃발이 없으면 무의미합니다. 깃발에 바람이 없으면 더 무의미합니다. 방황은 사랑의 깃발에 부는 바람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 교회 성장을 위한 씨앗이요 거름입니다!
-양승국신부-
유럽 대륙과 인접해있는 북 아프리카 지역과는 달리 동 아프리카 지역의 복음화는 꽤나 늦게 이루어졌습니다. 내전(內戰)으로 유명한 우간다의 경우 1879년 첫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는데, 가톨릭에 우호적이었던 므데시 추장이 세상을 뜨면서 교회는 크나큰 시련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무왕가가 후임 추장으로 등극하면서 피비린내나는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충신이라고 여겼던 부하 므카사가 가톨릭 신자인 것을 알게 되자, 배신감에 길길이 뛰면서 즉시 참수형에 처합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가를로 르왕가가 찬수당한 무카사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는데, 그 역시 이미 열심한 가톨릭 신자로서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추장 몰래 예비자 교리를 실시했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은밀하면서도 적극적인 선교 활동에 헌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반 가톨릭 노선을 확고히 한 무왕가였기에, 기를 쓰고 신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가를로 르왕가를 비롯한 모든 신자들이 체포하였습니다. 1886년 6월 3일 적대자들은 가를로 르왕가를 비롯한 신자들의 옷을 발가벗기고 온몸을 동아줄로 꽁꽁 묶었습니다,
사형 집행인들은 큰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새 그들 특유의 춤과 노래를 부르면서, 신자들을 조롱하고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동이 터올 무렵 한명 한명 참혹하게 처형했습니다.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순교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추장과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추장 관내에서 일하던 사람들, 추장의 수행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직속 상관 둘 사이에서 하느님을 선택한 것입니다.
추장 무왕가 입장에서 잘 아는 얼굴들이었고, 자신을 위해 봉사한 사람들이었기에 웬만하면 봐줬을 것입니다. 가톨릭 신앙을 끊겠다는 말 한 마디면 사형을 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하느님만을 최우선 순위로 선택했고, 왕의 불순한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사람은 참수형으로 어떤 사람은 화형으로 순교한 것입니다.
1920년 가를로 르왕가를 비롯한 우간다 순교자들은 영광스럽게 시복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 교회 성장을 위한 씨앗이요 거름’이라는 말처럼, 그들의 순교 직후 바간다 족들 가운데 5백명이 세례를 받았고, 3천 여명의 예비자들이 쇄도해, 오늘날 우간다 가톨릭 교회를 활짝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피비린내 나는 순교가 드믄 이 시대, 현대의 순교자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오늘날 순교란 순간순간 죽고 순간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순교란 죽은 사람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죽은 사람은 어떻게 처신합니까? 그저 묵묵부답입니다. 모욕을 줘도 침묵합니다. 멸시를 당해도 침묵합니다. 그저 하느님 자비와 은총만을 바랄 뿐입니다.
현대의 순교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한번 두 번이 아니라 열 번 스무 번, 끝도 없이 내어놓은 일입니다.
뭘 내어놓을 것입니까?
전혀 없을 것 같지만, 곰곰이 따지고 보면 얼마나 내어놓을 것이 많은지 모릅니다. 시간을 내어놓고, 재능을 봉헌하고, 재산을 나누고, 삶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마르 12,28)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먼저 ‘존재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행동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곧 그분이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심을 먼저 밝히십니다.
이는 단지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우리 주님’이심을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우리의 존재도 밝혀줍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분의 소유’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곧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시어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또한 그렇게 내 이웃도 사랑하시어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은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도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계명으로 주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여기에는 “새로운 관점”과 그에 따른 “변화”가 요구됩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이라고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곧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 한 자매”라는 관점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에페 1,10;1고린 1,30)일 뿐, “남”이란 애시 당초 없다는 뜻입니다.
‘한 몸’의 지체로 자신들의 일부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는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이 됩니다.
또한 “이웃 사랑”은 어떤 특별한 행동이 아니라,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표현을 빌리면(새천년기 24항), “이웃”은 나의 일부요, “나”는 “이웃”의 일부가 됩니다.
따라서 이웃의 아픔이 바로 자신의 아픔이 되고, 이웃에게 주어진 선물이 자신을 위한 선물이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사랑”은 곧 “이웃 사랑”이요, “이웃 사랑”은 곧 “하느님 사랑”이 됩니다.
결국, 이 “새로운 관점”은 “새로운 자기”를 살아가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탄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내 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요, 나아가서 이웃이 아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곧 ‘이웃을 내 몸같이’, ‘이웃을 하느님 같이’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이토록,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탄생, 새로운 자기”에로의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랑은 변화와 실천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어집니다.
바로 이 사랑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온몸으로 사랑하라
-반영억신부-
식물인간이 되어 혼수상태로 있던 사람이 열흘 만에, 어떤 사람은 2년 만에, 어떤 사람은 20년(폴란드의 철도 기술원 그르제프스키 씨(65))만에, 무려 28년 만에 의식을 회복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변을 보면 하나같이 누군가가 지극한 정성으로 그를 돌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의식은 없지만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사랑을 쏟았던 사람들은 결국 그 사랑의 헌신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무한한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31).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외적으로 강제되는 의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하느님을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관계의 기반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음과 목숨, 힘을 다한 존재 전체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하느님을 위해 손해 볼 작정을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구체적인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똑바로 인식하고 바르게 사랑해야 합니다. 내 자신에게 너그럽고 시간을 내고 관심을 쏟고 변명을 하고 행복한 생활을 바라는 것같이 이웃에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진정한 사랑은 결코 한가로울 수 없는 것, 한가로운 사랑은 벌써 잘못되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3,18)하는 그런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더 나은 이유는 번제물보다 더 큰 자기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막대한 경제적 손실로 생각할 수 있는 소나 양, 염소를 통째로 하느님께 바쳤던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많았습니다. 무려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계명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핵심정신을 보아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좋은 가르침을 주고 좋은 말씀을 하는 존재 그 이상입니다. 모두를 내어주는 행동을 통해 사랑이 드러났습니다.
머리로 아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그 앎이 온몸에 배어서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하느님나라에 온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많이 아는 것과 천국은 별개입니다. 천국은 사랑을 사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몸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더 큰 사랑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4,7-8).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는 오늘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가장 큰 계명>
-송영진신부-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1)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시기 전에 하느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을
먼저 강조하신 것은, ‘하느님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재물에 관한 가르침에 바로 연결됩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이 말씀에서 “함께 섬길 수 없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함께 섬기면 안 된다.”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나는 양쪽을 똑같이 사랑할 수 있다.” 라고
큰소리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양쪽을 똑같이 사랑할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가 아닙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동등한 위치에 놓는 것이나 재물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것은
모두 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큰 죄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핵심입니다.
재물을 하느님과 같은 위치에 놓고서 하느님 섬기듯이 섬기는 것은, 재물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큰 죄가 되고, 동시에 하느님을 재물 위치로
떨어뜨리는 짓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큰 죄가 됩니다.>
사탄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자기에게 경배하라고 유혹했을 때(마태 4,8-9),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라고 말씀하시면서 사탄을 물리치셨습니다.
사탄이 세속의 부귀영화와 권력과 영광으로 유혹했다는 것은,
그런 것들을 가지고 싶어 하는 욕망은 사탄에게서 온다는 것을 뜻합니다.
만일에 그 욕망에 사로잡혀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런 것들을
가지려고 한다면, 그것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사탄에게 경배하는 일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라는 예수님 말씀에는,
사탄에게 경배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과 세속의 부귀영화와 권력과
영광을 하느님처럼 섬기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좀 더 잘 살기를 바라는 것도 죄인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좀 더 잘 살기를 바라는 것과 남보다 더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면서 혼자서만 부귀영화를 누리기를 바라는 것은
이웃 사랑을 거스르는 죄와 사탄에게 경배하는 죄를 함께 짓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고 이웃 사랑 실천도 진실하게 하면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분명히 선이지만, 남들보다 더 부유한 부자가 되려고
하느님도 외면하고 이웃도 외면한다면 그것은 악입니다.)
2)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 말씀은,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면서 동시에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의 모든 사랑에도 적용됩니다.)
사랑이란, “목숨까지도 포함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거나,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사랑해서 자신의 목숨과 모든 것을 바친 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어떤 ‘가난한 과부’는 순교자는 아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내는 돈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온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칭찬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돈을 다 넣었기 때문에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부자들의 경우에는 마음의 일부만 바쳤다고,
즉 사랑이 부족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돈의 일부만 바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오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는
가난한 과부의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재산의 일부만 바치면서도 전 재산을 바치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사도 5,2.8).
그들은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고, 그러면서도
가진 것을 모두 바쳤다는 칭찬을 받고 싶은 명예욕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 재물욕과 명예욕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방해했습니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가 부유한 사람들이었는지,
가난한 사람들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그들은 하느님을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척’만 한 사람들로 성경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들이 전 재산을 바치지 않은 것을 꾸짖은 것이 아니라,
일부만 바치면서도 전부 바친다고 거짓말을 한 것을 꾸짖었습니다(사도 5,3-4).
어떤 사정이 있어서 일부만 바치거나
아니면 아예 못 바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거짓 사랑’은 사랑을 안 하는 것보다 더 죄가 큽니다.>
3)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완성하는 방법입니다.

복음: 마르 12,28-34: 첫째가는 계명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모든 계명 중에서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인가에 대한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있던 어느 율법학자와의 대화이다. 율법학자의 질문에 두 가지 큰 계명을 들어 그것을 하나로 만들어 대답하신다. 먼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라는 유대교 교리의 진수와 신앙의 기초를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라는 말씀을 하시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유일한 증명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실행함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말로서가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겸손하게 섬김으로써 하느님의 위엄을 가장 잘 찬미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가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신다. 사랑의 계명은 너무 많고 분명해서 어떻게든 선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을 가지고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1코린 13).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0절) “마음을 다하여”라는 표현은 조그마한 갈라짐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찮은 것에 사랑을 쏟아붓는다면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그 사랑이 그만큼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동정이라는 말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갈림 없는 사랑의 삶이라고 한다. 바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자세를 말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31절) 이웃 사랑은 최고의 덕이며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계명의 근본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이웃을 모른 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말씀하신 바를 기억하여 자비를 보여준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사랑은 함께가 아니면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다. 이웃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느님을 떠나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유일한 확증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랑을 베풀고 그들을 끊임없이 돌보아주는 일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율법학자는 그 대답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덧붙여 말한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33절) 이러한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 고 축복해주셨다. 나는 어떻게 이 계명을 살아가고 있는가?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최우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들려 주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모든 계명 중 첫째 가는 계명에 대해 묻는 율법 학자에게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첫째는 바로 하느님 사랑입니다!
물질주의적 세계관이 만연한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하느님을 삶의 최우선으로 삼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정 제도나 신분에 속하지 않은 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자칫 이상주의자나 현실 부적응자, 광신자로 치부될 위험까지도 있지요.
세상은 자기들이 자행하는 불의와 부정에 대해 양심을 압박하는 하느님과 그분 자녀들이, 세상 한구석에서 그저 조용히 자기들끼리 특정 양식을 공유하며 신앙생활을 문화 양식의 일환 정도로 꾸려나가길 원합니다. 세상이 하느님 대신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재물과 명예, 권력이 그리스도인에게는 한갓 우상일 뿐이니 불편하기 그지없겠지요.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하느님 사랑에 이어 그분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는 이웃 사랑입니다. 자신에게만 매몰되지 않고 타자에게 열려 있는 연민과 헌신의 마음이지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자연스럽게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이고 또 하느님을 중심으로 서로가 연결되어 있으니, 이미 자신과 타인이 별개가 아닌 까닭입니다. 오히려 사랑하지 않는 것이 더 힘이 들게 됩니다.
반면 세상이 첫째로 추구하는 우상에 매이게 되면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재물 앞에서는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들이 최대로 추구하는 이윤은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체제 안에서 누군가를 도구화하고 착취한 결과물일 때가 많습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안타까운 산업재해들이 그 단적인 증거지요.
권력이 최우선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를 딛고 올라서야 하는 힘의 원리에 편승하게 되면 사람은 자꾸 뒤로 밀리게 마련입니다. 또 평소 별볼일 없(어 무시해도 된다고 여기)는 가난한 이들의 지지를 실탄 삼아 누리는 영광은 사람을 그저 이용할 뿐이지요. 우상이 첫째인 사람에게 이웃 사랑은 더 많은 걸 얻기 위한 보여주기 이벤트일 뿐이지요.
제1독서 대목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놀라운 기적을 낳은 장면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내 친족 누이 사라를 나에게 주라고 라구엘에게 말씀드리시오."(토빗 6,9)
토비야는 일곱 명의 신랑이 혼인 신방에서 죽어 나간 사라의 일을 모르는 바가 아니어서 그녀와 혼인하기 두려웠지만, 라파엘의 권고의 말을 듣고 "그 여자를 매우 사랑하게 되고 그 여자에게 마음이 끌리게"(토빗 6,18) 됩니다.
"여보, 일어나구료. 우리 주님께 기도하며 우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십사고 간청합시다."(토빗 8,4)
사라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결심한 토비야는 장인이 될 라구엘의 만류에도 혼인을 결행하고 사라와 함께 이처럼 기도로써 부부의 삶을 시작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특별한 인연으로 서로 엮이는 순간, 인간적인 관심이나 욕정을 뒤로 하고, 모든 생명과 관계를 주관하시는 하느님 앞에 먼저 무릎을 끓는 모습은 의미심장합니다.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저의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토빗 8,7)
토비야의 기도는 자신이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뜻을 우선하여 선택하고 실행했음을 그분께 엄숙히 고백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에게 첫째는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사랑이었고, 그 사랑이 사라를 향한 연민과 헌신의 사랑으로 이어진 것이지요. 이 사랑은 서로에 대한 구원으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의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웃과의 사랑이 깊어지면 하느님을 향한 사랑도 더욱 친밀해지지요. 그러면 무엇이 먼저랄 것 없이 사랑이 사랑을 더 두텁고 진실되게 합니다. 이제는 억지로 힘 들이지 않아도 사랑이 알아서 사랑을 낳고 키우는 경지가 될 것이고, 그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데려갈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길에 동반자인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지치지 말고, 그치지 말고 사랑의 길을 걸어 사랑을 완성해 나가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운 슬기로움
-김찬선신부-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오늘 복음의 율법 학자는 율법 학자들 중에서 드물게
슬기롭다는 주님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며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는 말씀도 들은 사람입니다.
이 두 말씀을 엮어서 이해하면 슬기로운 사람이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이 되고,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아야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말도 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많이 보게 되는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은 이와 다릅니다.
이익과 손해의 관점에서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을 논합니다.
손해보는 줄 뻔히 알면서도 남을 돕는 사람을 멍청이라고 하는데
오늘 토비트서의 토비아는 아버지 토빗과 마찬가지로 멍청합니다.
아버지 토빗이 남에게 선행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선행을 하는데도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역경을 허락하시는데
그런 아버지를 보고도 토비아는 불쌍한 사라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제 성무일도
아침 기도 성경 소구에도 나오듯 토빗은 아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지요.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행하지 말아라.
굶주린 사람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고
필요 이상의 물건이 너에게 있거든 그것으로 남을 구제하여라.
언제나 주 하느님을 찬양하고 네 가는 길을 평탄케 해주시기를 간구하여라.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성공할 것이다."
이 가르침대로만 살아도 충분히 착하고 하느님 나라에서 멀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토빗은 이 가르침 정도를 넘어 사라,
결혼한 일곱 남자를 초야에 죽게 한 사라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어찌 결혼을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앞의 일곱 남자처럼 자기가 죽을 지도 모르고,
설사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혼을 동정심으로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이런 토비아와 비교하면 저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입니다.
모두를 사랑하기 위해서 한 여자만 사랑치 않는다고 하지만
모두를 사랑한다면서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일 수도 있고,
천국의 자유를 살겠다지만 실은 한 여자에게 매이기 싫어서
결혼하지 않은 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정심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사랑입니다.
너의 고통과 불행을 나의 고통과 불행으로 여기고,
너의 고통과 불행이 너의 고통과 불행일 뿐이라고 하지 않는 동정심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오늘 주님 가르침과 같은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소인의 슬기로움은 목전의 이익을 얻는 데 힘쓰지만
천국의 슬기로움은 하느님 나라의 사랑 잃지 않으려고 힘쓰며,
아무의 간섭이나 방해를 받지 않고 홀로 편하고 자유롭게 사는 데
희망을 두지 않고 좀 멀더라도 천국의 사랑에 희망을 두고 같이 갑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사랑과 희망은 천국의 사랑에서 얼마나 가깝습니까?
저와 같은 이기주의자가 요즘의 비혼 젊은이들에게 말할 자격이 없지만
요즘 의식 조사에서 결혼을 안 하겠다는 젊은이의 비율이 50%를 넘고,
결혼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돈이 없어서라고 하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돈이 없어서 결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혹 사랑이 없어서 결혼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토비아는 욕정 때문에 사라를 아내로 맞이하지 않고,
진정 사랑으로 그리고 기도로 사라를 아내로 맞이하는데
이럴 수만 있다면 우리도 진정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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