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2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마르코 12,18-27)
He is not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이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는 하느님께서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두가이들도 하느님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서 시작된 하느님을 향한 신앙을 그들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이름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전달되었는지, 또 성경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그 이름이 지닌 본질에는 머물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잘못된 출발점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마르 12,18)이라고 명확하게 언급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성경책에 기록된 죽은 하느님이 되고 맙니다. 그들은 하느님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는 있었지만,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인이 아닌, 자신들의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상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우리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과 같은 사람으로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어떻게 체험하고 만나고 있습니까? 하느님을 성경 속 등장 인물로만 생각하지는 않았는지요? 또는 전례 안에서만 찾으려고 하지 않았는지요? 기도할 때만 하느님을 찾지는 않았는지요? 하느님은 성경 속이나 전례 안에서만, 또는 기도할 때만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일상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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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미사가 너무 길어요.”
어느 신자가 찾아와서 말합니다.
“신부님, 성령 기도회를 하면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이 말을 듣고 본당에 성령 기도회를 만들고 자신도 열심히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이 역시 싫어하는 본당 신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신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께서 유머 감각이 있어야 신자들이 찾아옵니다.”
강론 때마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할 것인가를 생각했고, 각종 유머를 남발했습니다. 그런데도 신자들이 줄어듭니다.
이 신부님은 남의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정작 하느님의 말씀은 듣지 않은 것입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가이 사람들과 논쟁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을 하지요.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후세계의 일입니다.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의 편협된 사고를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로써 하느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크신지를 보여주시지요.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브라함에 맞게, 이사악 시대에는 이사악에 맞게, 야곱의 시대에는 야곱에게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 시대에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지금 내게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의 말만 들으면서 잘못된 길을 가게 되며,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대한 관심 안에만 머물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누구의 말을 듣고 있습니까? 우리가 들을 말은 세상의 말보다 하느님의 말씀이며, 세상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러시아의 소설가,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유명한 일화입니다.
산책하다가 광장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걸인을 발견했습니다. 한겨울임에도 아주 얇은 누더기만 걸치고 있었습니다. 푸시킨은 이 불쌍한 걸인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역시 가난해서 당신에게 줄 돈은 없소! 대신 글씨 몇 자를 써서 주겠소. 이를 몸에 붙이고 있으면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푸시킨의 말처럼 이 걸인의 깡통에는 그 뒤 많은 돈이 쌓였습니다. 푸시킨이 이 걸인에게 써 준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이렇게 써줬습니다.
“겨울이 왔으니, 봄도 멀지 않으리라.”
사람들은 이 걸인을 보면서, 그가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런 사람은 도와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을 보이면서 살고 있습니까?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자신이 보이는 모습을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요? 희망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만이 행복을 간직하면서 살게 됩니다

교만하면 보이는 대로 믿고, 겸손하면 믿는 대로 보이는 것을 안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사두가이들과의 논쟁을 다룹니다.
사두가이들은 모세오경만 정경으로 인정하고 부활이나 심판과 같은 내세의 교리들을 믿지는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부활에 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따지는 내용입니다.
이들은 만약 부활이 있다면 한 여자가 일곱 형제와 결혼해 살았다면 내세에서는 그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되겠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믿는 모세오경 중,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는 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느님께서 어떻게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는 저기 죽어서 썩어가는 개의 주인이다.”라고 말한다면 체면이 설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존중하는 살아 있는 성조들의 주님이시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두가이들은 성경을 그렇게 협소하게 해석하고 자신들의 해석이 옳다고 믿을까요?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은 자신들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믿게 합니다.
교만은 자기 자신을 진리를 판별하는 주체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진리 자체이십니다. 진리 자체이신 분만 모든 것 안에서 진리를 분별해 내실 수 있으십니다.
따라서 내가 진리를 판별할 수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성경이 본인이 해석하는 대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교만한 것입니다.
요즘 손정민 군의 사건이 식을 줄 모르고 연일 주요 뉴스로 나오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누군가가 저에게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저도 분명히 생각은 있지만, 일단은 판단을 보류하기 위해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전 국민이 둘로 나뉘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며 저도 어떤 쪽엔가 서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최대한 생각을 보류하려 합니다. 어차피 저의 생각이 이 사건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보이는 대로 믿으려 하지 않는 이유는 사실 모든 것은 믿는 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텍사스에서 한 젊은 남자가 애인에게 총구를 겨눈 일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구가 막혀 다행히 여자는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판사는 100만 달러의 보석금을 결정했지만 나중에는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고있고 평소에 모범생이었다는 근거로 4일 후에 보석금을 2만 5천 달러로 낮췄습니다. 낮춰진 보석으로 석방된 그는 얼마 후 여자친구를 살해하였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이 다가 아닐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히틀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히틀러를 만나고 온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그를 약속을 지킬 사람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였습니다. 아무리 판사라도, 아무리 고위 정치인이라도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류시화 시인이 인도에서 한 아이를 알았습니다.그 아이가 다 좋은데 숫자 계산을 못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나 세 개를 하나씩 주며 “내가 너에게 바나나를 하나, 하나, 하나 주었어. 그러면 너는 바나나를 몇 개 가지고 있니?”라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네 개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게 아니라고 하며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숫자 세는 법을 다시 알려주고는 바나나 세 개를 다시 주고는 몇 개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네 개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이가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 고집불통임을 깨닫고는 약간 화를 내며 “세 개 다 먹어라.”하고 바나나를 던져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울먹이며 바나나 세 개와 자기 주머니에 있는 바나나 하나를 꺼내 가방에 넣었습니다.
그 아이는 자기가 가진 바나나의 개수를 정확히 말한 것이지만 류시화 시인이 보이는 대로만 믿으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판단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 교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이 보이면 믿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진리 판단의 주체가 자신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만한 마음으로는 신이 앞에 나타나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신이 진리 판단의 기준, 즉 신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두가이들은 이런 오류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들이 만약 부활을 믿고 심판을 믿는다면 그들이 현실에서 비윤리적으로 권력과 재물을 추구하는 것을 계속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그들은 부활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여기고 그래서 부활이 없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믿게 되니 부활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 성경들은 빼버리고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합니다. 그 안에는 부활에 관한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부활을 이미 확신하고 계시는 예수님은 모세오경 안에서도 부활의 증거를 찾아냅니다.
제가 성경을 공부하다가 교의 신학으로 바꾼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신학을 할 때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그것에서 무언가 찾아내려는 시도가 조금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석사를 할 때 교수와 대립하고는 성서신학 대신 먼저 교리를 더 잘 알자는 마음으로 과목을 바꾼 것입니다.
그렇게 바꾸고 나니 자연적으로 성서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과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로마 성서대학(비블리꿈)에서 조교를 하는 포르투갈 신부와 식사할 때였습니다.그는 성경을 선입관을 가지고 해석하려고 드는 교의 신학자들이 제일 싫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문자를 통해서 어떤 진리에 도달하려고 하는 시도가 더 어리석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성경 말씀대로라면 이집트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었는데 그렇다면 지금도 이집트 사람들을 나쁘게 보아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만약 이집트 사람들을 좋게 보려고 한다면 성경에서 그 이후 이집트 사람들이 회개하는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나오지 않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이집트 사람들은 성경에서 하느님께 죽임을 당해야 하는 나쁜 사람들입니다. 이 얼마나 교만한 성경해석입니까?
유다인들은 심판과 연옥에 관한 내용이 많이 들어있는 예수님 탄생 이전 기원전 4세기까지의 모든 성경을 정경에서 빼버렸습니다. 그것들은 예수님 당시 정경으로 여겨지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연옥 교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루터는 교회 전통을 무시하고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유다인들이 정해놓은 정경을 따르기로 합니다.
이런 행위들은 그들이 성경을 해석해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대로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 그 믿음과 반대되는 내용이 있는 것들을 빼버리고 성경을 축소한 행위입니다. 사두가이들이 한 행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여기서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느님에 대해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성경을 모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 능력에 대한 믿음은 빼놓고 성경해석으로만 하느님 능력을 규정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느님의 능력을 믿어 부활을 믿고 계셨기 때문에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아내실 수 있으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안다는 말은 그 성경이 우리가 보이는 대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대로 해석된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성경을 아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 해석하지 못하는 성경 구절이 매우 많습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성모님의 말씀으로 기적이 행해지는 것이나 성모님께서 은총이 가득하셨다는 말 등은 해석이 불가합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용서해 주라고 제자들을 파견하는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은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는 장면도 그렇고, 진리의 기둥이 교회라고 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도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은 믿음이 먼저 있어야 제대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도 이제 성경공부를 하면서 성경을 읽으며 문자 안에서 진리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 방법 자체가 이단이나 사이비에서 하는 성경공부를 통해 그런 종교에 빠지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성경공부는 진리를 찾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이 지닌 교리를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하느님의 능력, 곧 교리를 믿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성경도 제대로 보이게 됩니다. 사두가이들이 아무리 모세오경을 외우다시피 해도 오늘 예수님의 해석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믿어야 보이고 믿는 대로 보이기에, 우리가 보이는 것들을 곧이곧대로 믿으려 하는 것은 곧 교만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시간이 햇빛을 받으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광명정대한 햇빛도 중요하지만, 은은한 달빛도 있어야 합니다. 서울대교구의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은 고인이 되신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의 장례미사 강론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이 아버지와 같았다면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은 어머니와 같았습니다. 자상하시고, 겸손하셨고, 검소하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면 찾아뵈었습니다. 이제 찾아갈 어르신이 안 계십니다.”라고 하면서 잠시 울컥하셨습니다. 저도 방송을 통해 강론을 들으면서 마음이 아렸습니다. 제가 복음화 학교의 담당사제로 있을 때입니다.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께 강의를 부탁드리면 흔쾌히 수락하셨습니다. ‘가상칠언(架上七言)’을 주제로 강의를 해 주셨고, ‘칠성사(七聖事)’를 주제로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 천상에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과 회포를 푸시면서 한국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달은 지구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 만일 달이 사라지면 지구는 지금과는 달리 생명이 사라진 행성이 될 거라고 합니다. 달은 인력을 통해서 지구의 자전을 지금과 같이 하루 24시간이 되도록 합니다. 그러나 달이 사라지면 지구의 자전은 지금보다 빨라져서 하루는 8시간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자전이 빨라지면 엄청난 크기의 태풍이 발생할 거라고 합니다. 달은 지구의 자기장에도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달이 사라지면 지구의 자기장은 더욱 강해져서 태양의 빛을 지금보다 많이 차단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지구는 생명이 살기 어려운 행성이 될 거라고 합니다. 달이 사라지면 조수간만의 차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갯벌도 사라지고, 바다의 생명에도 큰 영향을 줄 거라고 합니다. 달의 영향으로 지구의 자전축이 지금처럼 기울어져서 4계절이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달은 지구로 떨어지는 소행성의 충돌을 막아 준다고 합니다. 달이 지구를 대신해서 소행성을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달은 신화이면서 우리의 삶을 보듬어 주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입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안 계시다면 어떨까? 역사와 신화도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신앙 때문에 순교하신 분들의 죽음도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물음도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성모님의 순명도, 요셉 성인의 순명도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도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줄이 끊어진 연은 하늘을 날지 못하고 추락하기 마련입니다. 가련한 이와 고통 중에 있는 이와, 억울한 이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질 것입니다. 타인을 위한 희생과 나눔이 위로 받지 못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마치 하느님이 안 계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삶이 끝나면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이 시작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삶은 마치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전혀 새로운 차원이 삶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토빗과 사라’는 하느님께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두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라파엘이 두 사람의 고통을 치유하도록 파견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사두가이파 사람들처럼 현재와 순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간이 햇빛을 받으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되지만,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 하면 영원한 생명이 될 것입니다. “주님, 명령을 내리시어 제가 이 곤궁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제가 이곳에서 벗어나 영원한 곳으로 들게 하소서.”

신앙인의 선배로서 토빗이 우리에게 건네는 한 가지 탁월한 본보기가 있습니다. ‘한결같음’입니다!
-양승국신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씻을 수 없는 수모요 고통이었던 바빌론 유배 시기에 이스라엘 공동체가 낳은 걸출한 명작들이 있었으니, 토빗기, 유딧기, 에스테르기, 마카베오기 등입니다.
인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성인들이나 명사들 가운데 세상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 있듯이, 가장 혹독했던 시련의 시기를 보내던 이스라엘 역시 토빗기라는 명품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토빗기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바빌로니아 유배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민족의 자존심이 참담하게 구겨지고 짓밟히던 유배 기간에도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유다인들의 흔적이 토빗기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토빗은 납탈리 지파의 후손으로 아시리아 살만에세르 임금 시대에 티스베에서 포로로 끌려갔는데, 고향에서 살 때나 유배지에서 살때나 한결같이, 평생토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었습니다.
특히 토빗은 하느님께서 유다인들에게 선물로 주신 율법을 충실히 지키면서 틈만 나면 자선을 베풀고 의롭게 살았습니다. 오순절 명절을 맞아 축제 음식을 잘 차려놓고 먹기 직전에 토빗은 동포 한 사람이 살해당해 장터에 버려졌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토빗은 잔치 음식을 맛보지도 않은채 벌떡 일어나 주검을 수습했고, 해가 진 다음에 큰 슬픔에 잠겨 울면서 그를 잘 묻어주었습니다. 사실 시신을 함부로 손대면 절대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무릅쓰고 큰 자선을 베푼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착하고 신앙심 깊은 토빗이 갑작스레 큰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잠을 자던 중 뜨거운 참새똥을 두 눈에 맞게 되고 점차 시력이 약해지더니 마침내는 완전히 멀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네 해 동안 시력을 잃은 채 지냈습니다.
그로 인해 토빗의 아내 안나가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품팔이를 하게 됩니다. 그런 비참한 상황에서도 토빗은 한결같이 하느님만 바라보며 올곧고 정직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런 토빗의 모습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아내는 이렇게 비아냥댑니다.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토빗 2장 14절)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자신의 처지가 너무 비참했던 토빗은 마음이 너무 괴로웠던 나머지 탄식하며 울었습니다. 그러나 울고만 있지 않고 기도하며 울었습니다. 그의 기도가 얼마나 솔직하고 강렬했던지 하늘에 가 닿을 정도였습니다.
“명령을 내리시어 제 목숨을 앗아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이 땅에서 벗어나 흙이 되게 하소서. 저에게는 사는 것보다 죽은 것이 낫습니다. 제가 당치 않은 모욕의 말을 들어야 하고 슬픔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주님, 명령을 내리시어 제가 이 곤궁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제가 이곳에서 벗어나 영원한 곳으로 들게 하소서. 주님 저에게서 당신의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
토빗의 기도를 통해 당시 그가 얼마나 괴로웠던지를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토빗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힘겨웠던지 ‘이렇게 사느니 죽는게 더 낫다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토빗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의도로 바친 기도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토빗의 기도에는 진실성이 듬뿍 묻어있습니다. 현재 자신이 처해있는 힘겨운 처지를 아무런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주님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마치 바로 눈앞에 주님께서 계신 것 처럼, 친밀하면서도 격의 없는 기도를 열정적으로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선배로서 토빗이 우리에게 건네는 한 가지 탁월한 본보기가 있습니다. ‘한결같음’입니다. 주님을 향한 그의 신앙은 항구하고 충실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언제나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그토록 충실했고 한결같았던 토빗이었기에, 주님께서는 후에 그가 잃었던 모든 것을 되돌려주셨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축복과 은총을 흘러 넘치도록 베풀어주셨습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은 ‘불신의 페러다임’과 ‘믿음의 페러다임’의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사두가이들의 ‘영적무지’와 예수님의 ‘신적지혜’가 대조를 이룹니다.
곧 ‘영적무지’로 인한 구속과 속박을, ‘신적지혜’로 인한 자유와 해방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믿음’에 달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무지를 두 가지로 지적하십니다.
곧 ‘성경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로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에 있어서,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받아들였고, 인간의 합리적 사고의 범주로써 성경을 이해하려 했고, 내세와 부활과 영적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기고, <신명기> 25장 5-10절에 나오는 ‘수혼법’으로 부활에 대해 따지고 듭니다. 그들은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부활한 상태, 곧 초월적인 실재인 부활체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상태를 영적 존재로, 마치 천사와 같이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는 존재로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인 <탈출기> 3장 6절을 인용하시면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이미 죽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있으며 부활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들의 ‘하느님 능력에 대한 무지’를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느님의 권능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었습니다.
곧 인간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실 수 있으며 부활케 하시는 하느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했고, 고작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이 마치 죽은 사람을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되살아난다는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 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몸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51-53)
그렇습니다. 이러한 ‘영적 존재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 권능에 대한 불신’이 그들로 하여금 부활에 대한 믿음의 거부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믿으면, 신적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끝없이 속박할 뿐이며, 믿음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성경을 몰랐기에, 영적 무지에 빠지고 불신에 떨어졌습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들어 봅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주님!
제 안에 당신이 얼마나 생생히 살아 계신지를 알게 하소서!
영적 무지와 불신을 몰아내시고, 제 생각이 빗나가지 않게 하소서!
제 생각에 빠져 허상에 끌려 다니지 않게 하소서!
믿음으로 기뻐하고,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변화되고, 제 삶이 성화되게 하소서. 아멘.

진리는 언제나 살아있다
-반영억신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근본정신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시대에 사두가이들은 그 무리의 숫자는 적었으나 영향력은 무척 컸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을 권위 있는 경전으로 인정하고 예언서나 성문서는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오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계시로 믿을 필요가 없고, 믿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부귀와 영예를 누리는 이 세상으로 충분하다는 자기만족에 빠져있었는가 봅니다. 그리고 사후 세계를 현재 세상의 단순한 연장 또는 재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형제가 함께 사는’ 상황에서 ‘한 형제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신명25,5) 그 대를 이어 주어야 한다는 ‘수혼법’의 특수한 규정을 들어 ‘후사를 남기지 못하여 일곱 번이나 결혼한 여자는 부활한 후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것은 부활신앙의 허구성을 조롱하고 싶은 마음에서 한 질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마르12,25.2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세상은 지금의 세상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상, 새 생명이 주어지고 새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이 우리에게는 죽은 인물이지만 그분에게는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 충실하게 머무는 이들은 비록 죽었을지라도 ‘나는 너의 하느님이다.’라는 그분의 말씀과 능력에 의해 언제까지나 그분 안에서 살아있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부활 신앙을 지닌 이들의 관심사는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처럼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미 세상을 떠난 분이지만 가슴에 기억되는 분이 있고, 살아있는 사람이지만 기억되지 않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참으로 살아있는 사람인가요?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진리는 세월에 구애됨 없이 살아있습니다. 부활의 삶을 믿지 못하고 엉뚱한 질문을 한 사두가이들은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12,24) 는 예수님의 질문을 들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여전히 같은 질문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혹 우리도 고정관념과 틀에 매여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생각과 틀을 넘어서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 주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가능성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행복하시기를 바랍니까?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행복하시고 그것이 영생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언제나 하느님과의 관계, 곧 하늘이어야 합니다.
2코린4,16이하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우리의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이 천막집에서 우리는 탄식하며, 우리의 하늘 거처를 옷처럼 덧입기를 갈망합니다”(2코린4,16-5,3).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부활 논쟁
-조욱현신부-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마르 12,24-27).”
1)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여기서 ‘모른다.’ 라는 말은, ‘안 믿는다.’ 라는 뜻입니다.
모르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알려 주어도 안 믿는 것은 죄가 됩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너희가 부활을 안 믿거나 의심하는 것은
성경을 안 믿기 때문이고, 부활 후의 삶을 현세의 연장으로 잘못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의 능력을 안 믿기 때문이다.”입니다.
성경은 현세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방법을 알려 주는 책이 아니라,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책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은 현세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세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내세, 부활, 영원한 생명을 안 믿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세를 현세의 연장으로만, 또 ‘부활 후의 삶’을 ‘이승의 삶’의 연장으로만
생각해서, 이승에서의 사람들 사이의 복잡한 갈등이나 여러 가지 문제들이
내세에서도 반복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안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세상의 모든 복잡한 문제들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도 뜻합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만일에 지금 우리가 겪는 많은 고통들과 어려움들을
부활 후에도 또다시 겪어야 한다면, 그런 부활은 안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2)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이 말씀에는 ‘모든 사람’이 전부 다 자동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라는 말이 바로 그것을 암시합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이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루카 20,35).
지금 여기서 말하는 ‘부활’은
“죽음에서 완전히 해방되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을 뜻하는 말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에는 ‘모든 사람’이 심판받기 위해서 되살아나는데,
그것을 ‘부활’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심판 때에 구원을 선고받은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되고, 멸망을 선고받은 사람은 영원히 소멸됩니다(묵시 20,11-15).
그 자격은 어떻게 얻는가?
예수님의 다음 말씀들은 그 자격을 얻는 방법에 관한 말씀들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4-36).”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 자격을 얻는 방법입니다.
3)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부활 후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사는 그곳은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서 ‘참 평화’를 누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없고, 다툼이 없습니다.
오직 ‘참 사랑’만 있습니다.
(만일에 지금의 인간 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게 욕심 부리고 다툰다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면서 사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니라,
영원한 고통 속에서 사는 불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4)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이 말씀은, “나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살아 있을 때에 섬겼던 하느님이다.”
라는 뜻이 아니라, “나는 ‘지금’ 내 앞에 살아 있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지금’ 섬기고 있는 하느님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그들이 부활해서 살아 있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5)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이 말씀은,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죽음이라는 것’에게
빼앗기는 무력한 분이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을 영원히 살아 있게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만 영향력을 행사하시고,
죽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분이시라면,
그러면 전능하신 분이 아닌 것이고,
전능하신 분이 아니라면 하느님이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은(예수님도) 죽음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분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죽음이라는 것을 무력화시키신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0-22).”
예수님을 안 믿고, 부활도 안 믿는 사람은 “인생은 허무하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살다가 자기들이 말한 그대로 허무하게 인생을 마칠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다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될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인생은 결코 허무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부활을 믿는 그 순간부터 ‘허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복음: 마르 12,18-27: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
-조욱현신부-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구약의 모세 오경만을 성서로 인정하였고, 거기에 영생에 대한 언급도, 천사도 영혼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 때문에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오늘의 질문은 신명 25,5이하에 나오는 규정에 근거한 것으로서 아주 과장된 질문이다. 이 질문은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리석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사두가이들은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보지 못한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부인했지만, 주님께서는 부활을 인정하셨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24절) 하시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26절) 고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 확실하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 자체가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우리의 부활한 몸은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처럼 될 것이다. 이 세상을 떠난 뒤 부활하여 천사들과 같아질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된 것은 혼인이 지닌 육체적 요소들의 회복이 아니다. 혼인이라는 것은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명을 이 세상에서 계속 이어가는 방법이다. 그래서 자식을 낳는 것이 혼인의 목적이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장가를 들고 시집을 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25절) 부활한 다음에는 다시 죽는 일이 없어 혼인의 필요성이 천국에서는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모두가 천사들과 같아서 일곱 형제와 차례로 결혼한 그 여자도 부활한 다음에는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탈출 3,6의 말씀으로 증명하신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이렇게 성조들의 하느님이라면 그들은 다른 모습으로 살아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교부들은 ‘살아있는 인간이 하느님 최대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살아있다는 것은 목숨이 붙어있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 하느님의 뜻 안에 살아있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이들은 구원의 길을 모르고 하느님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한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살아있는 우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살아있는 우리들의 하느님이 되시지 않겠는가? 당신을 떠나 죽은 자들이 되지 말고 그분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면서 언제나 살아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르 12, 27)
-한상우신부-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
새로운 날의
시작이다.
하느님과 함께
함께 걸어가는
삶의 기쁨이다.
따뜻한
동행(同行)의
하느님이시다.
산 이들의
희망과
산 이들의
축제는
하느님께서 주신
오늘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산 이들의
생명 안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고
소중한
오늘이 있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
오늘을 맡긴다.
오늘은
왜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스승이다.
산 이들의
하느님과
하나되는
합일(合一)은
하느님과 우리의
살아있는
관계이다.
산 이들의
하느님이
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셨다.
살아 숨 쉬고
함께 호흡하는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한
선물임을
언제나 뒤늦게
알게된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는
살아있는 깊은
관계를 원하신다.
하느님의
깊은 사랑이
사람을
구원하신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관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살아있는
오늘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오늘의 빛 안에서
기도하고 나누며
사랑한다는 것이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우리자신의
사랑은 하나이다.
산 이들의 사랑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새롭게 빛나는
오늘
이 아침이다.
모든 것은
살아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죽음"이 여러 차례 언급됩니다. 죽음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인간에게 가장 민감한 이슈지요.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마르 12,23)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역연혼을 들어 묻습니다. 우리가 듣기에 상당히 황당하고 당혹스러운 이 혼인의 목적은 한 집안을 지속시키고 죽은 이에게 상속인을 마련해 주는 것이라고 하지요.
사두가이들은 세상에서 맺은 혼인의 제도적 결속이 죽음 이후에도, 그리고 다시 살아난 이후에도 지속된다면 혼란이 야기되지 않을지 묻습니다. 질문 의도 안에는 부활 사상을 마치 비합리적이고 우스꽝스러운 교설처럼 비하하려는 저의도 깔려 있었을 겁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르 12,25)
사람들 사이에서 죽음은 이별을 수반합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좋은 연으로 맺어져 서로를 극진히 사랑했다 하더라도 유한한 인간들 사이의 육적인 상호관계는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딱 거기까지일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꿈꾸는 죽음 이후의 삶,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부활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예수님은 이를 천사들과 같아지는 삶이라고 하십니다. 더 움켜쥐려고 피 터지게 싸우는 욕망과 소유에서 자유로운 상태, 더 이상 자아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격정과 자기중심성을 벗어난 평정, 평화의 상태입니다. 이는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보편적 사랑으로 충만한, 담백하고 순수한 모습일 듯합니다.
"그분께서는 ...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르 12,27)
지상의 여러 제도들이 그러하듯 혼인 역시 하느님께서 축복하시는 아름답고 유익한 제도지만, 혈연 관계의 유지와 종족의 보호를 위해 불가피하게 작동되어야만 하는 배타성이 존재하지요. 어쩌면 부활의 삶은 그마저도 해제된, 하느님 앞에 모든 인간이 너나 할것 없이 순수한 영으로 이어진 모습의 회복일 겁니다.
우리 모두는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서 숨 쉬고 존재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과거에 살다가 언제 죽은 누구 누구'라고 하는 것은 인간만의 표현일 겁니다. 하느님은 어느 시대를 살다가 세상을 떠난 이나 지금 숨 쉬고 살고 있는 이나, 모두를 사랑스럽고 귀한 자녀로 당신 앞에 두고 계시지요. 그래서 그분 앞에서 우리 모두는 살아있는 겁니다. 그분은 살아있는 이들의 주님이시지요.
제1독서에서는 죽음을 청하는 가련한 두 사람이 나옵니다.
삶의 나락에 떨어진 선한 사람 토빗과, 혼인날 번번이 신랑을 잃고 조롱을 당하는 사라는 주님께 간절히 자신들의 생명을 그만 거두어달라고 청하지요. 사람이 생명이신 하느님께 죽음을 간청할 때는, 생명을 지닌 채 견뎌야 하는 고통이 죽음의 두려움보다 더 위협적이고 모욕적일 때입니다.
구약의 백성은 죽음이 육체적 종말과 더불어 하느님과의 영원한 분리라고 여겼지만, 하느님은 의인들을 죽음에 넘기지 않으시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으며, 의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지혜서는 전하지요.(지혜 3,1.4 참조)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복음 환호송)
예수님은 이 희망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시고 또 몸소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부활의 희망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과 죽음은 하느님 눈 앞에서 연장선 안에 펼쳐져 있을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 현세에서 맺은 인연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면서 챙기고 돌보고 섬기는, 이리저리 엮인 우리들 말입니다. 그 중에는 너무 가깝고 잘 아는 것 같아서 예의와 존중을 잊고 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요.
무엇보다 그들은 나와의 인연에 앞서 하느님 앞에 자리한 소중한 존재임을 감탄과 존경의 마음으로 인정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려면 그가 영영 내 소유도 아니고, 그가 내 욕망을 대신하거나 채워줄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겠지요. 언젠가 함께 부활하여 하느님 앞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때, 참 고맙고 사랑스러운 형제자매요 벗으로 만날 테니까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1코린 7,30)라고 말합니다.
이는 종말의 가르침이지만 이미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희망이 시작되었으니 인간 실존을 지닌 채로 천사들처럼 깨어서 천상의 질서를 앞당겨 살아가라는 격려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 살아 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를 정도의 온갖 불행과 고통이 짓누르고 죽음이 우리를 덮쳐도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서 한때 살았고, 지금 살아가며, 앞으로 살아가게 될 모든 이들과 하나로 엮여 있습니다.
마땅히 사랑받고 존중받아야 하는 하느님 모상이며 귀한 인격체인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지상에서와 같이 천상에서도, 현세에서와 같이 부활의 삶에서도 좋은 인연을 이어가길 희망합니다. 우리를 이어 주시는 "산 이들의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고통의 증폭과 고통의 숙성
-김찬선신부-
토빗의 고통이 커져갑니다.
그래서 오늘은 고통의 증폭이랄까 확장에 대해 성찰해보고자 합니다.
고통의 증폭이나 확장은 꼭 고통이 많아지기 때문이고,
고통의 강도가 세지기 때문만일까요?
저도 나이를 먹어가다 보니 저의 육신의 형제들이나
저와 오랜 친분을 맺어온 분들도 편찮은 분들이 대부분이고,
그만큼 그분 하나하나를 기억하며 기도하는 저의 시간도 점점 길어집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의 증폭이나 확장에는 고통이 많아지고
커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그것은 이유 중의 하나일 뿐이고,
또 제일 큰 이유도 아닙니다.
고통이 왜 더 커지냐 하면 고통 의식 때문입니다.
같은 고통도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이유입니다.
고통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그 고통 그대로인데
고통을 크게 의식하고 크게 거부하는 사람은 그만큼 고통이 커집니다.
고통이란 크게 의식하면 커지고 작게 의식하면 작아지는 법이란 얘깁니다.
이는 목줄에 매인 개가 가만히 있으면 고통이 그리 크지 않은데
목이 줄에 매여있는 것을 의식하고 잡아빼려고 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조이는 고통을 겪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줄에 처음 매인 개가 목줄을 고통으로 의식하듯
고통의 애송이들은 고통을 계속 의식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이에 비해 고통에 성숙한 사람은 이 거부의식이 점차 사라지고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인생은 고해라고 그러니까 본래 인생은 그런 거라고 받아들입니다.
고통 없는 것이 본래가 아니고 고통 있는 것이 본래라고 여깁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고통의 숙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고통에 성숙한 사람은 고통의 숙성 기간을 거친 사람입니다.
오늘 토빗과 사라는 이런 사람들입니다.
토빗은 4년이나 눈이 멀고 그래서 물리적인 고통이 큰 데다가
자격지심에 아내에 대한 의처증까지 생겨 심리적인 고통이 더해집니다.
고통이 물리적인 것에서 심리적인 것으로 발전하자
자꾸 고통 속으로 더 빠져들고 이제 심리적인 고통에서
정신적인 고통과 영적인 고통으로 고통이 커집니다.
그리고 고통이 더 커져서 이제 자기 고통만이 아니라
인류의 고통과 자기 조상과 민족의 고통까지 떠 안고
왜 인간은 고통스럽고 왜 우리 민족은 고통을 겪냐고 하느님께 따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통이 커지고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자기 힘으로 고통을 소화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느님께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토빗은 마침내 울며 탄식을 하고 기도를 합니다.
"그 무렵 나 토빗은 마음이 몹시 괴로워 탄식하며 울었다.
그리고 탄식 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사라도 하녀까지 자기를 업신여기자 자살을 하려다가
생각을 고쳐 먹고 이렇게 독백을 합니다.
"목을 매는 것보다는 평생 모욕하는 말을 듣지 않도록
죽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낫겠다."
이렇게 고통에 괴로워하던 것이 기도하는 것으로 바뀔 때
고통은 하느님과 만나는 기도가 되고 구원의 도구가 되는데
이것을 토빗과 사라를 통해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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