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4일 연중 제9주간 금요일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마르코 12,35-37)
David himself, inspired by the Holy Spirit, said:
The Lord said to my lord,
‘Sit at my right hand
until I place your enemies under your feet.’
David himself calls him ‘lord’;
so how is he his so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6월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제1독서 말씀으로 토빗기를 만납니다. 토빗기의 중요한 신학은 주님의 가르침에 충실한 삶은 반드시 하느님의 보상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선을 베풀고 기도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함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내가 원하고 내가 편할 때 선택적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한결같은 모습으로 하느님을 섬겨야 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함을 알려 줍니다.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고 따른다면, 복을 받고 보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토빗기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가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도 알려 줍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선택이 가져올 수 있는 불편함과 어려움 또한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독서에서 만나는 장면은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아간 토빗이 다시 보상을 받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을 알고 믿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토빗이 살던 시절에 하느님을 알았던 사람은 토빗과 그의 아들 토비야만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살아갔지만, 그 고백을 삶으로 실천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바탕으로, 자신 앞에 다가오는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살아가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우리 마음 한 편에 자리 잡고 있지만, 동시에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이익이나 성공보다 손해를 입는다는 마음의 가난함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부족함을, 가난함을 인정하면서 주님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도 토빗과 토비야의 여정을 닮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내용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글쎄 우리나라에 예수님이 자그마치 20명 넘게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고 자세히 보니,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재림 예수라고 부르는 사람이 20명이 넘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가 정말로 대단합니다. 그만큼 20명 넘는 예수가 자기를 따르는 제자단을 꾸려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20명 모두가 진짜 예수님일까요? 아니라면 그중에 누가 진짜 예수님일까요?
단언하는데 이 중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일치의 하느님이시기에 여러 명으로 오시지 않습니다. 또 이천 년 전 교회를 만드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지금의 시대에 맞게 활동하시는 분이기에, 과거의 모습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리가 없습니다.
많은 성인 성녀들은 예수님과 똑같이 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은 가난과 겸손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소위 자칭 예수라고 하는 자들은 정반대의 모습을 취합니다. 교만하고 부유합니다. 세상과 더 가까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주님은 딱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분을 어떻게 믿고 따르고 있나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약성경의 말씀에 따라 사람들은 다윗의 후손으로부터 메시아가 나온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렇다면 다윗이 메시아보다 더 윗분이냐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실제로 다윗의 후손이기는 하지만, 이는 곧 인간적인 기준으로 주님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적인 기준을 늘 뛰어넘으십니다. 따라서 주님을 인간적인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조그마한 자기 뜻 안에 그 크신 주님을 담으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을 담지 못하고 엉뚱한 거짓과 모순만을 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낮춰서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감수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를 얼마나 낮추고 있을까요? 그리고 주님을 위해 내 십자가를 얼마나 잘 짊어지고 있을까요? 인간적인 기준보다는 주님의 기준을 내세우며 살아갈 때, 참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어렵고 힘든 상황이 찾아와도 주님과 함께하기에 기쁨을 간직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서 여행을 못 하는 상황이지만, 평소에 여행을 많이 가는 저입니다. 지금도 시간이 나면 동네라도 걸어 다니면서 경관을 즐겨 보고 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놓인다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사는데 필요한 것이 그다지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여행인 것 같습니다. 짐이 많으면 편할 것 같지만, 짐이 많아질수록 힘들어지게 됩니다. 여행 가기 전에는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할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없어야 오히려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군더더기를 덕지덕지 붙인 채로 복잡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많은 것을 가지려고 노력했고 지금 일상의 삶 안에서도 계속해서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행을 다녀오면, 많은 것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됩니다.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 삶입니다. 필요한 것만을 챙기며 사는 삶이 가장 여유를 느끼면서 가볍게 사는 삶입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으면서도 끊임없이 청하는 것, 자유!
-전삼용신부-
예수님께서는 오늘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일 수 없음을 밝히십니다.
그 이유는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내 주님’으로 불렀다는 성경 말씀 때문입니다. 당시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란 뜻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고 구원자시란 뜻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다윗의 후손이라고 부르는 명칭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 명칭을 통해 당신을 정서적 노예로 만들려는 세력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의 후손은 다윗처럼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들어야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다윗의 후손이 되면 사랑해 주겠다고 예수님을 꼬드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런 정서적 노예 생활에 매이지 않으십니다. 이를 위해 당신이 다윗의 후손이 아님을 밝히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자신들에게 필요가 없어진 예수님을 유다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예수님은 그들의 애정에 묶이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이 정서적 노예 생활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도 우리를 자신들의 노예로 삼으려 합니다. “당신은 내 남편이야!”, “너는 내 자녀야!”, “우리 가문은 그래서는 안 돼!” 등으로 우리를 노예로 만듭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그런 노예 생활하는 것을 즐깁니다. 이를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1973년 8월 23일부터 28일까지 6일간 스톡홀름에서 은행 강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강도들이 4명의 직원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하였습니다.
그런데 재판정에서 4명의 인질범은 모두 은행강도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심지어 강도들의 편을 들었습니다. 자신들을 해치지 않은 것에 오히려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강도들과 지내면서 애착 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이를 ‘스톡홀름 증후군’이라 합니다.
이런 현상은 꼭 인질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는 아내나 학대받은 아이들이 남편, 아버지를 옹호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이런 심리적 현상 때문에 독재자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히틀러는 깨끗한 ‘아리아인’으로 독일인들을 묶으며 자신의 권위를 공고히 했습니다.
영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1993)에서는 남자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여자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기 위해 팔다리를 자릅니다. 그런데 그녀의 애인이 이것을 알고 그 남자를 죽이려 할 때 여자는 자신의 팔다리를 자른 남자의 편을 듭니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심리이지만 사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심리가 있습니다. 이런 심리가 나타나는 이유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유를 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인간은 스스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소속되기로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혹은 어떤 공동체에 소속되어 그 공동체를 지배하는 법을 따르면 그만이라 자유로운 선택에 대한 부담이 줄어듭니다.
인간은 자유를 부담스러워서 해서 어떤 법이 지배하는 곳에 소속됩니다. 그러나 곧 자신의 팔다리를 다시 찾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벗어나 다른 무언가에 자신의 자유를 맡깁니다.
어떤 분이 부모가 하도 싸우고 해서 빨리 결혼하고 싶어서 결혼하였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사는 게 별반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부모처럼 남편과 똑같이 싸우고 자녀들에게 집착합니다. 이런 식의 도망은 참된 해방을 이룰 수 없습니다.
호주 시드니의 한 교도소에 탈옥을 계획하는 죄수가 있었습니다. 주방에서 일했던 그는 매일 빵을 납품하러 오는 지입차가 일정한 시간에 왔다 간다는 사실을 알고 그 차를 통해 탈옥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배식이 끝나기 전 간수들의 감시를 피해 몰래 짐 싣는 곳에 탄 죄수는 잠시 후 찾아올 자유를 꿈꾸며 차가 멈추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차는 멈추었고, 죄수는 운전사가 짐을 나르는 틈을 이용해 몰래 차에서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가 도착한 곳은 다른 지역에 있는 교도소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정서적 노예 생활로부터의 탈출은 이런 식입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으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고 이렇게 되뇌이며 걷습니다.
“그녀와 헤어졌다…. 그녀와 헤어졌다…. 그녀와 헤어졌다….”
정말 엽기적인 그녀와 헤어졌다는 생각에 그는 조금씩 얼굴이 밝아지며 이렇게 기쁨의 소리를 지릅니다.
“난 자유다!”
그렇게 자신을 옭아매던 여자와의 이별을 즐깁니다. 다른 여자를 만나 술을 진탕 마십니다. 너무 즐겁습니다. 그러나 남자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던 중 지금까지 자신과 이야기했던 여자가 치마를 걷어 올리고 소변을 보는 것입니다. 아직 수술하지 않은 성전환자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이 세상에서 자유를 찾는다는 것은 또 다른 내 자유를 봉헌할 누군가를 찾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쳇바퀴에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이런 식의 탈출은 안 됩니다. 아예 나의 자유를 나를 가장 사랑해 주시는 분께 봉헌하는 편이 낫습니다. 따라서 세상에 속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이 나를 지상의 모든 정서적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해 줍니다.
이영숙 수녀님의 책,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에서 형제들을 가문의 전통인 유교에 묶어놓으려 했던 분이 나옵니다.
교육감을 지낸 분으로서 자신의 동생들이 유교가 아닌 조상을 모르는 상것들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믿는 것을 절대적으로 거부하시던 분이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수녀님이 지나가시면 “저는 유교입니다.”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운명 직전에 대세를 받고는 다시 살아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 수녀님. 제가 유교에서 죽고, 천주교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셋째 동생은 형님이 깨어나셔서 깜짝 놀랍니다. 대세를 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전에 묶여있던 세속적인 집안의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사실 그조차도 조상들의 전통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형제들 안에서 자신의 권위를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자신도 노예 생활하지만, 형제들도 그렇게 노예 생활을 시키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며 산 것입니다. 이 올가미에서 벗어나는 길은 세례로 세상에서 죽고 하느님 자녀로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제자 중 어부들은 배와 그물만이 아니라 아버지를 버리고 따랐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이 세상의 전통이요, 나의 정서적 주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 어머니를 향하여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세상의 정서적 노예 생활을 청산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았을까요? 하느님의 자녀로서 더 수준 높은 사랑으로 부모를 사랑하였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애정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세상의 올가미에 엮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다윗의 후손이라는 멍에를 벗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유를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으셨던 이유는 아버지의 법에 당신 자유를 봉헌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모, 자신의 창조자에게 어차피 부담스러워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자유를 봉헌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조재형신부-
시간이 되면 자전거를 타고 있습니다. 조금 익숙해져서 편하게 다니고 있습니다.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있고, 20분만 가면 경치가 좋은 바닷가를 보면서 안전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습니다. 자전거는 달릴 때는 균형을 잡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멈추면서 균형을 잡으려면 발을 땅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집에 다 와서 긴장이 풀렸는지 실수해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집에 다 왔다는 안도감과 순간의 방심으로 균형을 잃어버렸습니다. 두 바퀴로 가는 자전거는 달리지 않으면 넘어지기 마련입니다. 외줄을 타는 곡예사도 줄을 건너면서 중심을 잡습니다. 줄 위에 서 있으면 중심을 잡기가 더 어렵습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도 비슷합니다. 하느님 품에서 쉬기까지 우리는 신앙의 폐달을 밟아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그 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심장은 당신 가운데 쉼을 얻을 때까지 편하지 않습니다. 주여! 저에게 앎과 헤아림을 주소서!(고백록 1장 1절)”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루카 11, 24-26)” 체중 조절에 실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전보다 체중이 늘어나기도 합니다. 금연에 실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전보다 많이 피기도 합니다. ‘요요 현상, 금단 현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경력과 업적을 가진 사람들이 정상에서 넘어지는 경우를 봅니다. 영적으로 메말랐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청중의 박수와 화려한 불빛은 무대의 조명이 꺼지면 어둠만 남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가문, 혈통, 율법, 안식일, 계명이라는 ‘틀’에 갇혀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손가락만 바라보면서 참된 진리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찾으려는 사람들까지도 손가락이라는 ‘틀’ 안에 가두어 두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손가락이 권력이 되었고, 손가락이 기득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을 율법이라는 작은 틀에 맞추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다윗이라는 혈통에 맞추려고 합니다. 작년에는 ‘흑인에게도 생명이 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고통 받는 일이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올해는 ‘아시안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미워하는 일이 없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에서 이민자라는 이유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한다면 이 또한 기득권이라는 ‘손가락’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토빗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자선을 베풀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었지만 눈이 멀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여정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토빗은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믿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토빗을 보시고 축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헤어졌던 아들을 다시 만났고, 며느리도 얻었으며 잃어버렸던 시력도 되찾았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계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틀’에 갇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면 찬미와 감사를 드릴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 중에 주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마음을 열어 찬미와 감사를 드릴 일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꽃이 피어나서 좋은 것은 보는 이들에게 아름다움을 전하기 때문이고, 우리가 태어나서 좋은 것은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합니다.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다윗도, 구약의 권위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보다 더 권위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하느님과 직접 소통하시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이영근신부-
오늘<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의 당신의 정체를 깨우쳐주시기 위해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십니다.
먼저 이렇게 묻습니다.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마르 12,35)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연구한 이들로서, 율법을 자신이 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해 왔던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할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쳤고,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강대국을 갖추고, 종교, 정치, 문화, 모든 면에서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약 4,000명으로 이루어진 합창단과 합주단을 조직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 다윗은 민족의 희망이었고, 민족 자긍심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특히,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서도 여전히 로마 통치 아래에 있던 당신의 그들은 메시아가 다윗 가문에서 나온다는 성경 말씀을 근거(2사무 7,12;이사 9,2-7;11,1;12,23;15,22 등)로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일 것이라 믿었습니다.
곧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 곧 새로운 다윗왕조, 새 예루살렘의 지상 왕국을 건설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인식 자아인식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곧 당신 자신을 스스로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님’이신 메시아로 밝히십니다.
이는 당신의 메시아적 신성을 계시하는 것으로,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라는 <시편 110,1>을 인용하시면서 선언하십니다.
이는 당신께서 혈육으로는 다윗 가문에 태어났지만, 실제로는 다윗을 능가하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오히려 ‘다윗의 주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인격은 다윗에 종속되지 않으며, 메시아로서의 구원사업도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상의 왕국을 꿈꾸며, 자신의 건강과 번영, 안정과 보전을 꿈꾸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여인을 통하여 오셨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그분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갈라 4,4) 놓이셨고,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로마 1,3).
그러나 그분께서는 마리아의 아들이시면서 마리아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으면서도 마리아의 창조자이십니다.
육신으로는 마리아의 아들이시되 위엄으로는 마리아의 주님이시고,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시되 신성으로는 “다윗의 주님”이시며, 세상과 하늘과 땅의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장면에서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습니다.”(마르 12,27).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이 참된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
주님!
다윗을 만드셨듯이, 저를 만드소서.
다윗을 통로로 오셨듯이, 저를 통로로 삼으소서.
다윗에게서와 같이,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소서!
당신께서는 다윗의 주님이시듯,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고정관념을 넘어
-반영억신부-
우리는 자기의 고유성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다른 것을 잘 인정하지 못하고 그렇게 되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기만의 독특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문을 열어 놓아야 더 풍요로워집니다. 특히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갇혀 있는 사람은 그 유식한 무지를 속히 버려야 합니다.
유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곧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성으로서는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님, 곧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다윗 가문의 출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었고, 하느님과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로서 일치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다윗 가문의 출신으로만 국한하여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성, 그리고 사명을 올바로 파악하려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인정해야만 합니다.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놓을 때까지”(마르12,36).하고 말하였는데 첫 번의 ‘주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야훼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내 주님께’의 ‘내’는 다윗을 말합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주님’은 예수님시대의 율법학자뿐 아니라 유다교의 각 종파에서는 모두 메시아, 곧 왕으로 오실 다윗의 후손으로 이해하였습니다(2사무7,12-16. 22,51; 호세3,5; 예레30,9).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다윗의 메시아인 예수님께 당신의 오른쪽에 앉게 하여 모든 권능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에게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하고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는 메시아는 ‘위대한 다윗보다도 더 위대한 자손’ 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핏줄과 족보에 따른 메시아, 다윗의 왕정이념에 따른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그를 뛰어넘어선 권위 있는 메시아이십니다. 참된 메시아는 유다인들이 기대하고 갈망하던 잘 먹고 잘사는 평화로운 세상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는 마침내 수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십시오. 율법학자들이 망신을 당해서? 아니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시고 새로운 눈을 열어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끌려서? 아니면 미래에 대한 새 비전을 갖게 되어서?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바람뿐 아니라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원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예수님, 하느님에 대한 상을 살펴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한 것이 무엇일까요? 메시아의 사명과 왕조의 연결고리, 다시 말하면 아버지와 아들로 세습되는 식, 소위 낙하산식의 고리를 끊으려는 것입니다. 특권내지 권력과 결부시켜 메시아를 인식하려는 ‘전통’을 비판하십니다. 메시아는 단순히 다윗의 후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권력의 상층부와 연결되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낙하산, 부자세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나보다 먼저 태어났느냐 나중에 태어났느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깨달음 안에 있느냐 아니냐가 문제입니다. 참된 깨달음 안에는 나이의 앞뒤가 없습니다. 인생은 살아온 햇수로 계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느냐? 로 기억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길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마르 12,35-37)>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로마 제국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다윗 왕국을 재건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메시아를 뜻하는 말로 사용했던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에는,
다윗 왕의 후손이라는 뜻도 들어 있었고, 다윗 왕국을 재건할 왕이라는
뜻도 들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
“메시아가 혈통으로는 다윗의 자손이 맞지만,
다윗 왕국을 재건하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다윗의 예언’은 시편 110편 1절입니다.
‘주님께서’의 ‘주님’은 하느님이고, ‘내 주님께’의 ‘주님’은 메시아입니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는
“메시아는 하느님 오른쪽 자리에 앉아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메시아는 하느님과 같은 위치에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는 “메시아는 적대자들을
굴복시키고 온 세상의 통치권을 장악하실 분”이라는 예언입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만을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고,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시편을 인용하신 것은, 메시아는 지상의 왕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메시아 왕국은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즉 다윗 왕국이 아니라 ‘영원한 하느님 나라’ 라는 것을
이미 다윗 자신이 예언했음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라는 말씀은,
“메시아는 다윗보다 더 높은 분, 다윗의 주님이신 분,
하느님과 같은 위치에 계시는 초월적인 분”이라는 뜻입니다.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한 것은,
그들이 정말로 바라고 있었던 것은 다윗 왕국의 재건이 아니었음을 나타냅니다.
(백성들은 겉으로는 제대로 표현을 못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지배 계급도 피지배 계급도 없는 나라,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는 나라,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는 나라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정말로 바라고 있었던 것은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는 해방이었습니다.)
만일에 메시아가 오셔서 하시는 일이 다윗 왕국의 재건이라면,
그것은 왕족이나 귀족 같은 기득권층 사람들에게나 좋은 일이 되고,
일반 서민들에게는 별로 좋은 일이 아닙니다.
물론 일반 서민들도 로마 제국의 지배에서 해방되기를 바라긴 했습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의 삶이 바뀌지 않는 채로 지배자가 로마 황제에서
다윗 왕실로 바뀔 뿐인 해방과 독립을 희망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지배자가 바뀌어도
일반 서민들은 여전히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생활을 했고,
기득권층 사람들은 계속 기득권을 누렸습니다.
그러니 로마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서 다윗 왕실의 지배를 받게 된다고 해도
서민들의 삶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묵시록에서는 종말의 ‘하느님 나라’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3-4).”
하느님의 거처가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는 말을, 그 나라에는 특권층도 없고
기득권층도 없고 지배 계급도 없다는 것을 뜻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는 말을,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던 것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에 관한 말씀의 바로 뒤에,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들을 비판하고 꾸짖으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38-40).”
이 말씀은, 종교가 권력이 되어 있는 모습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종교가 사람들을 섬기지는 않고 지배하고 억압한다면,
그 종교는 종교의 탈을 쓴 사이비 종교입니다.)
이 말씀을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율법학자들이라는 특정인들만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종교 권력, 정치 권력, 경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기득권층 전체를 꾸짖으시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부들’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메시아 나라는(하느님 나라는) 힘없는 사람들을 등쳐먹는 자들이
전혀 없는 나라, 그런 자들은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루카 22,25-26ㄱ).”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과 힘 있는 자들이 힘없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이 세속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라고 엄하게 말씀하신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도 죄를 짓는 일이고, 사람들에게도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라는 말씀에는,
“세속 사람들은 그렇게 해도 된다.” 라는 뜻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죄를 지어도 되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세속’도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는 곳,
즉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하는 곳입니다.
누구든지 메시아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 기득권, 세속의 힘, 물질적인 힘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버리지 못한다면 바늘구멍을 통과하지 못하는 낙타가 될 뿐입니다.

복음: 마르 12,35-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조욱현신부-
다윗은 시편 110에서 장차 자신의 후손으로 나타나실 분을 ‘나의 주님’이라고 했는데 만일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면 어찌하여 다윗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라고 부를 수 있었겠는가? 하는 질문이 나온다. 예수님은 무엇을 가르치시고자 했는가? 예수님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으며 당신 자신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다윗의 자손인 동시에 다윗의 주시라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담고 있는 시대적 의미이다. 이 호칭 속에는 이스라엘을 회복할 정치적, 민족적 정복자로서의 왕의 의미가 가득히 들어있다. 왜냐하면, 정복당해 고통을 겪고 있던 그들은 지상 왕국의 건설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기대했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지상 왕국의 건설자, 정복자로서의 메시아의 개념을 빼버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참모습을 알리고 그분의 사랑을 전해주며 사람들을 천상 아버지께 인도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알려주기 위하여 그랬다.
그분은 다윗의 자손이시며 다윗의 주님이시다. 하느님이시며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분이 어머니이신 여인을 통하여 오셨다. 세상의 주님이시며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니 마리아의 주님이시다.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시니 마리아의 창조자이시기도 하다. 그분은 마리아의 주님이시며 마리아의 아들이시며, 마리아의 창조자이시고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 그분은 마리아의 아들이셨기에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린 것이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며, 신성으로는 다윗의 주님이시다.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를 육에 따라 다윗의 후손으로 여길 뿐, 다윗의 주님이신 하느님이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예수께서는 그들의 가르침을 올바로 고쳐주고 계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메시아를 찾는 우리의 믿음의 자세는 어떤가? 당시의 유대인들이 정복자들에 의해 시달리고 고통당하는 속에서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을 해방해 주고 지상 천국을 건설해 줄 구원자, 그리스도를 기다리듯이 나는 내 생활 속에서 나의 현세적인 편안함과 바라는 일의 성취 또는 자기 생활의 안락만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찾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진정 자신에게 구원과 하느님의 사랑을 가져다주시는 그리스도를 더 잘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는지? 나는 내 생활에서 현세적인 것과 하느님의 뜻, 어느 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생활하는지? 우리 각자 자신의 신앙의 자세에 대해서 살펴보고, 올바른 신앙의 길로 나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이러한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하자.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육의 시력을 넘어 영의 눈을 뜨라고 촉구합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마르 12,35)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믿음은 하느님께서 "너의 집안과 너의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2사무 7,16) 하고 예언자 나탄을 통해 다윗에게 전하신 축복에 기인합니다.
"그곳에서 내가 다윗의 뿔을 돋게 하고 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등불을 갖추어 주리라."(시편 132,17)
이처럼 다윗의 후손에서 기름부음받은이, 곧 메시아가 나오리라는 대목은 말씀 곳곳에 등장하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성경을 연구하는 이들이 가르치는 대로 자신들이 겪는 외세의 압제와 가난, 고통에서 자신들을 구해 줄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임금, 정치적인 메시아가 다윗 집안에서 나오길 고대하며 그 희망으로 연명했습니다.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
예수님께서 엄청난 반전을 제시하십니다. 시편 다른 곳에서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이라 고백하였음을 들어 그 고정관념에 균열을 일으키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나온 대로 다윗 가문의 족보 안에 당신을 두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인간적 계보로 세상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셨으나 강생하신 하느님으로서 육적인 질서를 초월하는 분이시지요. 문제는 육적인 시야에 고착되어 구원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토빗이 눈을 뜨는 극적인 장면을 보여줍니다.
"물고기 쓸개를 손에 든 토비야는 아버지를 붙들고 그 눈에 입김을 불고 나서, '아버지, 용기를 내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그 약을 아버지에게 바르고서는 ..."(토빗 11,11)
가바엘에게 맡겨 두었던 돈도 찾고 친족 누이인 사라를 아내로 맞아들이기까지 한 토비야가 긴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아버지 앞에 섭니다. 그리고 라파엘이 가르쳐준 대로 물고기 쓸개로 아버지를 치유하지요.
토비야의 모습을 찬찬히 관상합니다. 누가 떠오르십니까? 도움이 필요한 상대를 따뜻이 어루만지고, 입김(성령)을 불어 넣어 주며, 말씀으로 위로와 격려를 건네고 또 친히 치료의 행위를 하는 모습에서 누가 보이시나요?
하느님께서 인간 토비야를 통해 당신 뜻을 행하시고 이루십니다. 우리가 토비야에게서 숨으로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말씀으로 기를 살리시며 구체적으로 돌보시는 예수님을 보고, 또 아버지를 본다면, 우리는 영의 눈을 뜬 사람입니다.
"얘야, 네가 보이는구나, 내 눈에 빛인 네가!"(토빗 11,14)
토빗은 아들을 통해 움직이신 하느님의 힘으로 빛을 얻어 자기 아들이 '내 눈에 빛'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눈이 열리면 우리에게 다가와 주님의 뜻을 행하는 모든 형제 자매 이웃에게서 주님의 빛을 볼 것이고, 그가 곧 빛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토빗 11,14)
토비야는 눈을 뜨자 곧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그는 아들이 일으킨 이 기적이 하느님의 권능이고 능력임을 즉각 알아차리지요 그리고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얘야, 잘 왔다. 얘야, 너를 우리에게 인도하여 주신 너의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빈다."(토빗 11,17)
이처럼 타인을 환대하는 모습은 현상에 매여 경계하고 불신하고 탐욕하는 육의 눈을 넘어 영의 눈이 열린 이의 전형입니다. 나에게, 우리에게 오는 상대방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또 하나의 우주이며, 그를 인도하신 분 또한 하느님이심을 알기에 함께 더불어 찬미를 드리고자 합니다.
아들 토빗을 통해 하느님의 손길과 구원을 깨달은 토빗처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사람의 아들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현존, 권능, 힘을 깨닫고, 그분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곧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지요.
관습과 고정관념 안에서 메뉴얼대로 살아가는 삶은 쉽고 편할지 몰라도 본질을 제대로 보기 어렵습니다. 빛을 각성하기란 더욱 요원하지요. 영의 눈을 뜨려면 그동안 스스로 눈먼 이였음을 인정하고 답답함을 느끼며 봄을 갈망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초대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말씀과 전례에서, 사람과 사건에서, 관계와 존재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뜨이길 간절히 청합시다. 그렇게 열린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 속에서 주님께 찬미와 영광과 흠숭을 올려드리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주님과 우리가 서로를 알아보며 환성을 올리고 기쁨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아멘.

행복의 모든 요소들
-김찬선신부-
오늘 토빗기는 그렇게 선행을 했건만 고통 속에 살았던 토빗이
하느님으로부터 온갖 복을 받아 말년에 행복해지는
행복으로 끝나는 얘기Happy Ending Story입니다.
말년의 그는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는
그 모든 요소를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행복의 모든 요소를 보고자 합니다.
단 오늘 얘기에서는 재물의 복에 대한 얘기는 없습니다.
이것을 놓고 볼 때 토빗에게 재물은 행복의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던 듯하고
내일 마지막 얘기에서 라파엘에게 품삯을 주며 토비아가 돌아올 때 가져온
재물의 절반에다 더 얹어 주라는 걸 보면 재물이 없었던 건 아닌 듯합니다.
그러니까 재물을 벌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리 중시하지 않은 것이고,
재물은 행복에 있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거라는 입장 같습니다.
아무튼, 그는 재물 외에 이 세상 행복의
아주 중요한 요소인 건강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건강의 회복과 함께 시력을 회복하고 이렇게 외칩니다.
곧 제일 사랑하는 사람인 아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이
얼마나 큰지를 그는 아주 시적으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얘야, 네가 보이는구나, 내 눈에 빛인 네가!"
언젠가 눈먼 엄마가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희노애락을 소개하는
티비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데 그는 자기가 그렇게 힘들게 키우는 만큼
사랑하는 아이를 꼭 한 번 눈으로 보고 싶은데 손으로 만져 그 모습을
가늠할 뿐 얼마나 예쁜지 눈으로 볼 수 없는 아픔을 얘기하지요.
두 번째로 그는 모든 관계를 회복합니다.
건강못지 않게 우리 행복의 중요한 요소는 관계의 행복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화목은 평안과 함께 평화를 이루는 것이지요.
평화란 평안과 화목이 합쳐진 말인데 토비아는 오늘 가족과의
관계는 물론 동네 사람들이 모두 그의 시력과 건강의 회복을
기뻐할 정도로 모든 사람과의 관계도 회복하여 진정 평화롭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도 회복되었습니다.
아니, 토빗이 한 번도 하느님과 관계가 나빴던 적은 없지만
자기가 그렇게 계명에서 어긋나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뿐 아니라
선행을 하였는데 왜 이렇게 고통이 있는지, 자기가 하느님으로부터 벌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의구심으로 마음 불편하였는데 그것이 풀린 것입니다.
그런데 토빗이 이렇게 행복의 모든 중요한 요소를 갖추게 되었지만
인생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 그러니까 행복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말년의 행복이라는 것인데 토빗은 말년에 행복을 이룬 것입니다.
경기에서 99분을 이기고 있다가 마지막 1분에 역전되어도
그 경기는 진 것이고 그만큼 패배의 고통이 크듯이
인생에서 아무리 일생 부귀영화를 누렸어도 말년에
재산과 건강 다 잃고 자식마저 다 떠나고 찾아오지 않으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고 그 고통은 너무도 클 것입니다.
그러니 그 반대의 경우는 얼마나 기쁘고 그 인생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토빗은 인생 마지막 역전 홈런을 친 것입니다.
Happy Ending이 진짜 행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Happy Ending은 영원한 행복이고,
영원한 행복이 진짜 행복이고 Happy Ending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지요.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얘기하는 철학이나 다른 종교와
우리 그리스도교가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모두 토빗처럼 인생 마지막 역전 홈런을 치는 사람이 되십시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년 6월 6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0) | 2021.06.06 |
---|---|
2021년 6월 5일 연중 제9주간 토요일 (0) | 2021.06.05 |
2021년 6월 3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0) | 2021.06.03 |
2021년 6월 2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0) | 2021.06.02 |
2021년 6월 1일 연중 제9주간 화요일 (0) | 2021.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