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5월 30일 삼위일체 대축일

Margaret K 2021. 5. 30. 07:11

2021 5 30일 삼위일체 대축일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
마태오 28,16-20)


Go, therefore,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teaching them to observe all that I have commanded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오늘 제1독서는 구원의 역사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사랑은 바로 하느님 당신께서 누구이신지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오늘 제2독서가 언급하듯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례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기도하거나 식사를 할 때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시작하며 십자 성호를 긋습니다. 십자 성호를 긋는 것은 사랑으로 하나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삼위일체 신앙은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며 신비입니다.
사실 그 어떤 비유와 설명으로도 삼위일체 신비를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의 믿음과 하느님의 계시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심오하고 놀라운 신비인 삼위일체 하느님의 교리를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통이 되지 않을 때 ‘먹통이다’ 또는 ‘불통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내적으로 소통하시듯 우리와 소통하시고, 우리는 세상에 그분의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모든 사랑의 시작

-키엣 대주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삼위일체 하느님은 인간의 사유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위대하고 심오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는 그 어떤 말로도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가톨릭 교부들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연구하였고 그 중 하나가 ‘십자 성호경’입니다. 거룩한 십자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고 하는 간단하면서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도문입니다.

십자 성호경은 그리스도인이 표하는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표시이며 축복과 기도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수없이 많이 성호경을 바칩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잠들때, 성당에 들어설때, 성체성사를 할 때, 식사 전후, 십자가 앞을 지날 때, 어려움에 처했을 때 등. 이마에 손을 얹어 전능하신 하느님을 찬양하고 가슴에 손을 얹으며 아드님이신 주님의 사랑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왼쪽 오른쪽에 손을 대며 성령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처럼 성호경을 바치며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봉헌합니다. 십자 성호경은 세례받은자 곧 나의 영육이 주님 안에 있음을 표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십자 성호를 그리며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 사랑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리고 매일 수도없이 많이 성호경을 바치며 주님과 같이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게해달라고 기도드립니다.

모든 사랑의 시작은 삼위일체로부터 시작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과 같이 완벽한 하나됨의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속에 있을 때 느끼는 행복만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세례로써 세상의 원한과 죄를 없애는 사랑을 전하고 전쟁과 분열의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출 수 있는 사랑의 불꽃을 전해야 합니다. 또한 용서와 사랑이 사라지는 메말라가는 사회에 사랑의 비를 전해야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고귀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성호경을 바치며 우리 마음 깊은 곳에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주님의 무한하고 충만한 사랑 속에 살수 있게 도와주소서.

주님 사랑의 용광로 속의 불꽃이 되어 주님의 사람을 전하는 도구가 되게 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세례를 받으며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2.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 안에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3.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한다면 나에게 형제 자매는 어떤 존재입니까?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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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이맘때 저는 지독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한 달이 넘었을 시점이었지요. 이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히 어머니 잃은 슬픔을 이겨내리라 생각했습니다. 사실 장례식장에서 또 장례미사 때도 웃으면서 손님들을 맞이하는 저의 모습을 보고서 동창 신부들은 저를 걱정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밤에 또 새벽에 혼자 있는 시간은 솔직히 힘들었습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듣고 싶고, 어머니가 보고 싶었습니다.


저와 50년 이상을 함께 해주셨으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인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좋은 곳’에 가셨을 것이라고 믿지만, 어머니와 떨어져 있는 저 자신은 참 힘들었습니다.

슬픔은 사람을 고립시킵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까 싶어 가족조차도 만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기도했고,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비로소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과의 만남은 감정을 다치게 할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는 제가 어떤 감정 표현을 해도 다 받아주셨습니다. 저의 감정에 상대방도 흔들리는데, 주님께서는 전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큰 위안이 되었고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침묵이 얼마나 큰 은총이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내 감정을 받아주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흔들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각기 다른 위격을 가지고 있지만 한 몸을 이룬다’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해하기 힘든 교리입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세 위격이 하나의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묵상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일치의 모범을 보여주시면서 우리 역시 당신의 일치 안으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향한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세례를 주고, 모든 것을 가르치라는 사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우리는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고 사람에게서 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더 큰 분이 있습니다.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위로를 받고 그 안에서 길을 찾아보십시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전혀 흔들리지 않으시면서 우리에게 힘과 위로는 물론이고 해결의 길까지 열어주실 것입니다.
실수는 삶과 정신의 여백에 해당한다. 그 여백마저 없다면 이 각박한 세상에서 어떻게 숨을 돌리며 살 수 있겠는가(나희덕).

실수도 사랑하세요.

신학교에 입학하고 첫 번째 여름 방학 때였습니다. 방학을 맞이해서 지방에 사는 선배님을 찾아갔습니다. 방학하면 꼭 놀러 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지요. 먼저 선배 신부님의 본당 신부님을 만나 인사했습니다. 그랬더니 잘 왔다면서 밥 먹으러 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배님은 다른 차를 타고, 저는 신부님과 함께 신부님 자가용을 타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때까지 어른이 운전하는 차를 타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당 신부님 운전하시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때 신부님께서는 저를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내가 네 운전사니?”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뒷자리는 사장님 자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한 번도 어른이 운전하는 자가용을 타본 적이 없으니 이렇게 실수한 것입니다.

모르면 당연히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수 자체에 집착하고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수할 수도 있는 것을 하지 않아야 할 것처럼 부끄러워합니다.

의연하게 사는 것은 실수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요? 훨씬 더 살기 쉬워집니다.

 삼위일체와 영원한 생명

-전삼용신부-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와 영생(영원한 생명)의 관계에 대해서 묵상해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당신께서 교회와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시며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세례받은 사람 안에서 삼위일체의 신비가 실현되게 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실현하는 사람이고 그래야만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플라나리아’란 동물이 있습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류, 하천, 강 등에서 서식하는 편형 동물입니다. 플라나리아는 뇌, 눈, 신경관, 창자, 입, 정소, 난소, 생식선 등을 갖춘 하나의 완전한 생명체입니다.
    그런데 플라나리아는 어느 부위를 잘라도 다시 온전한 플라나리아가 됩니다. 몸통을 다섯 부분으로 자르면 다섯 마리의 플라나리아가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한 대학교에서는 한 마리의 플라나리아를 잘라서 2만 마리까지 늘리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플라나리아는 영원히 사는 동물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플라나리아는 자신의 몸을 자손에게 이어주며 개체 수도 늘어날 뿐 아니라 누군가 일부러 멸종시키지 않으면 영원히 삽니다. 몸을 자른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어떤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고 그저 하나의 개체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도 영원히 사는 법칙을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일단 플라나리아는 세포마다 눈과 머리, 창자 등을 생성할 수 있는 설계도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자르더라도 다시 온전한 모습으로 재생할 수 있습니다.
    만약 플라나리아를 믹서기에 갈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잘게 잘리면 재생을 할 수 없습니다. 다시 ‘원형’을 회복할 능력을 잃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길이로 자르면 플라나리아는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회복합니다.

    이 말은 플라나리아를 자르면 그와 비슷한 거머리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플라나리아가 된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플라나리아만 이런 능력을 지니는 것입니다. 플라나리아처럼 영원히 살려면 끊임없이 플라나리아로 재생하여야 합니다.

    두 번째는 잘리지 않거나 혹은 생식하지 않으면 그 플라나리아의 생명은 거기서 끝난다는 것입니다. 잘리거나 자신의 몸을 떼어 나누어주는 생식을 멈추면 그 플라나리아는 영생할 수 없습니다.

    나의 살과 피를 떼어 나누어주는 것, 이것을 통해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는 것, 이것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릅니다.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사랑도 없고 사랑으로 태어나지 않는 생명체도 없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부모의 피 흘림으로 탄생합니다.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피 흘림이 사랑입니다. 사랑 없이는 영생이 불가능합니다. 사랑만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다 사라져도 남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사는 생명체를 보며 적어도 두 개는 자신 안에 품고 있어야 함을 봅니다.
    그 첫 번째는 정체성과 원형, 혹은 설계도이고 그 다음은 자기 자신을 복제하거나 자신과 같은 개체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하는 생식능력, 혹은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플라나리아는 원형과 생식능력을 담는 하나의 그릇인 것입니다. 플라나리아가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원형과 생식능력, 이 둘과 하나가 된 삼위일체의 모습을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본성적으로 영원한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영원하실 수 있는 원리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삼위일체 신비를 품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의 ‘계시’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을까요?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예수님은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십니다. 만약 위 플라나리아의 예와 비교하자면(물론 하느님을 동물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죄송하기는 하지만) 은총과 진리는 무엇일까요? 바로 ‘원형’과 ‘생식력’입니다. 아버지와 성령을 담으시는 그릇과 같으신 분이신 것입니다.

    

    자동차를 만들 때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분명 ‘설계도’와 ‘피땀’이 필요합니다. 자동차가 고장 나면 설계도대로 다시 재생시킬 수 있습니다. 설계도대로 누군가가 땀을 쏟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은총은 ‘피땀’, 즉 ‘사랑’의 에너지를 의미하고, 진리는 ‘설계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이 아니면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의 외아드님으로서 아버지에게서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원형’인 ‘진리’를 품고 계신 것이고, 성령께서 주시는 ‘사랑’의 에너지를 지니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행동하고 말하고 듣고 사십니다. 아버지의 모습대로 되려는 의지가 있으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는 진리이시고 원형이십니다.
    또 성령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자녀의 탄생을 위해 피를 흘리라고 종용하십니다. 세례 때 성령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더는 당신 자신을 위해 사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탄생시키시기 위해 피를 흘리셔야 하셨습니다.

    

    플라나리아가 플라나리아로서의 ‘원형’, 즉 ‘설계도’나 ‘진리’를 자신 안에 품고 끊임없이 그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또 자기의 살과 피를 떼어 나누어주며 자손을 낳으려고 하는 ‘사랑’을 지녔기에 영원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비록 인간이 되셨지만, 하느님처럼 영원히 살려면 하느님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려 해야 하고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어 자신과 같은 자녀를 탄생시켜야 함을 보여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부모들이나 믿음을 위해 피를 흘리신 순교자들을 볼 때 그런 희생이 생명의 끝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세상에서 삼위일체의 모습을 살기 위해 죽는 자만이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플라나리아라는 한 작은 생명체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란 바로 자신 안에 은총과 진리를 담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은총과 진리를 품고 있다면 말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려 하고 살과 피를 내어주어 새로운 그리스도인을 탄생시키려 할 때 우리 안에 삼위일체를 실현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도 당신 삼위일체의 신비를 받아들여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영원히 살기 위해 그리스도의 원형을 우리 안에 간직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갑시다.
    그리스도를 닮아 하느님의 자녀를 탄생시키기 위해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살려고 하면 죽겠지만, 이렇게 죽으려고 하면 영원한 삶을 살 것입니다. 영생의 비밀은 삼위일체 사랑에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5대양 6대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주가 할아버지에게 질문했습니다. ‘할아버지 5대양 6대주가 머예요?’ 학교에서 숙제를 내 주었습니다할아버지는 손주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5대양은 이양김양박양최양조양이란다. 6대주는 소주맥주양주과일주청주막걸리란다.’ 손주는 학교에 다녀와서 할아버지에게 말하였습니다. ‘틀렸다는데요.’ 할아버지는 이렇게 다시 말하였습니다. ‘소주맥주양주과일주청주탁주란다.’ 우리가 아는 5대양은 태평양대서양인도양북극해남극해입니다우리가 아는 6대주는 아시아유럽아프리카남아메리카북아메리카입니다.’ 할아버지는 일상에서 만나는 5대양과 6대주를 말하였고선생님은 지리학에서 보는 5대양과 6대주를 말하였습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위격은 다르지만한분이신 하느님이라는 신앙의 고백입니다이를 논리적으로신학적으로이성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교회의 위대한 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 성인도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그러던 어느 날 바닷가에서 작은 웅덩이에 바닷물을 담으려는 아이를 보았습니다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무얼 하는 거니?’ 아이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바닷물을 이 웅덩이에 담으려고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습니다그러자 아이도 대답하였습니다. ‘바닷물을 작은 웅덩이에 담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사람의 머리로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제야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성이 아닌 신앙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말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습니다걷는 법도 배우지 않았습니다먹는 법도 배우지 않았습니다아이는 부모님의 말을 따라하면서 말하게 됩니다수도 없이 많이 말을 하면서 엄마아빠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그리고 원하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문법이 먼저 있지 않았습니다먼저 말을 하였습니다아이는 뒤집고기다가 어느 순간 바로 서게 됩니다넘어지고또 넘어지면서 한걸음 걷게 됩니다그리고 원하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아이는 엄마의 젖을 먹으면서 이가 납니다분유도 먹고밥도 먹게 됩니다어느 순간 먹어야 하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그리고 원하는 것을 먹게 됩니다아이가 말하고걷고먹을 수 있는 것은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아이는 부모님을 믿기에 말하고걷고먹을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있었습니다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우리에게 내어주시는 분입니다성부이신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셨습니다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십계명을 주셨습니다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우리가 머무는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될 것입니다성부이신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입니다비록 우리가 잘못을 했어도 뉘우치면 언제나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우리가 그릇된 길을 갈 때면 예언자를 보내 주시어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성자이신 하느님은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와 기쁜 소식을 주셨습니다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들이 머무는 나라입니다하느님 나라는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기쁜 소식을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그것은 온 마음을 다하고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다시 살아나셨습니다우리 또한 주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신 하느님은 은사를 주셨습니다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고 그것에 맛 들일 수 있는 슬기로움을 주는 은사교리의 어려운 점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은사어떤 일이 옳고 그른 일인지 더욱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게 해 주는 은사하느님을 열렬히 섬기게 하며죄악과 악마를 거슬러 용감히 싸울 수 있는 능력이며 순교까지 하면서 신앙을 증거 할 수 있는 은사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믿어야 할 것과 믿어서는 안 될 것을 분별케 하는 은사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자녀다운 사랑과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사람을 예수님 안에서 형제자매로 사랑하게 해 주는 은사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섬기게 하며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취하게 하며죄를 피하게 하며 영생에 대한 희망을 주는 은사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성부성자 그리고 성령의 하느님께서는 어떤 관계일까요끊임없이 서로에게 내어주는 관계입니다성부는 성자에게 모든 권한과 능력을 주셨습니다성자는 성부에게 모든 영광과 기쁨을 드렸습니다성자는 성령에게 십자가와 죽음으로 세운 교회를 맡겨 드렸습니다성령은 모든 은사를 교회에 주셨습니다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하지만 삼위일체의 신비는 내어줌의 눈으로겸손의 눈으로 보면 이해 할 수 있습니다우리는 삼위이신 하느님께서 한 몸을 이룬다고 생각하지만하느님께서는 만위일체억위일체이신 분이십니다사랑의 하느님위로의 하느님용서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서로 사랑하십시오서로 위로하십시오서로 용서하십시오. 

 구원 역사는 성부로부터 유래하고, 성자에 의해서 실현되며, 성령에 의해서 충만히 성취됩니다!

 -양승국신부-

 

또 다시 저희 사제들에게 늘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삼위일체대축일이 돌아왔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삼위일체대축일만 돌아오면 마음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곤 했습니다. 

 

‘제발 이번 주일 미사가 내 차례가 아니었으면...다른 형제가 주례하면 편안히 앉아서, 어떻게 강론을 풀어가나 흥미진진하게 들으면 좋을텐데...’

  

지난 시절 돌아보니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해서 얼토당토않은 ‘이단’으로 빠진 적도 참 많았습니다. 그냥 솔직히 잘 모르겠다며, 삼위일체와 관련된 교부들의 가르침이라도 소개해드렸으면 좋을텐데, 나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한다며 별의별 논리들을 다 동원해서 신자들을 햇갈리게 만든 죄, 어찌 보속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삼위일체와 관련된 이레네우스 교부의 가르침이 참으로 설득력 있습니다.

  

“모든 구원 역사는 성부로부터 유래하고, 성자에 의해서 실현되며, 성령에 의해서 충만히 성취됩니다. 성자와 성령은 성부이신 ‘하느님의 두 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교부의 해석도 신선합니다.

  

“성부께서는 ‘낳으시는 분’이시고, 성자께서는 ‘나시는 분’이시며, 성령께서는 ‘발(發)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는 그 자체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며,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사랑의 관계로 부터 사랑의 성령께서 발출하셨습니다.” 

 

성삼위에 관한 윤주현 신부님의 설명 역시 은혜롭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삼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세 위격께서 우리 영혼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성부께서는 우리가 당신 자녀로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인도해주시며, 성자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성부께서 어떤 분인지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를 더 깊이 사랑하고 그분들의 뜻에 따라 살아가도록 사랑을 부어주시며 우리를 내적으로 이끄십니다. 이렇게 세분과 더불어 사랑의 삶을 완성해 가는 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이렇게 성삼위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성부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구체화된 자비와 연민의 성자와, 감미로움과 은은함과 섬세함의 근원이신 성령께서, 온전히 한 몸이 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성삼위께서는 상호 온전히 하나로 결속되어 완벽한 일치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성삼위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소통하시고 상호 증여하시며 한 마음 한 몸이 어떤 것인지를 모델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언제나 자기 본위의 자세를 탈피해서 서로 낮추시고 서로 순명하시며 사랑하십니다. 성삼위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통합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발밑을 한번 내려다봅니다. 이리 갈라지고 저리 찢겨지고 사분오열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더 자주 바라볼 순간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 사이, 우리 공동체 사이, 국가와 민족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높은 장벽을 당장 허물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나와 너무 다른’ 너를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 떨리는 신비입니다.

알아듣기에는 어려워도 참으로 벅찬 사랑의 신비입니다.

너무 깊어 헤아려지지 않아도오히려 다 헤아려지지 않기에 더 깊이 매료당하는 신비입니다.

흔히들 삼위일체를 알아듣기 힘든 신비라고들 여깁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신비의 내용을 알아듣는 데는 한계와 어려움이 있다손 치더라도중요한 것은 삼위일체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듣는 일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삼위일체라는 이 사실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그 신학적 의미를 알아듣는 일입니다.

우선 하느님께서 삼위로서 일체이신 분이시라는 것은 단지 하느님의 신비를 말해주는 것을 넘어서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신비입니다.

곧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축복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가운데 나타났는지를 말해주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드러냅니다.

이 신비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아드님을 보내시어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축복을 말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참사랑의 신비입니다.

                          그러니, “삼위일체의 신비”는 곧 참사랑의 신비이다.

 

이 참사랑을 단적으로 표현해 본다면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당신 생명의 진리가 나타나게 하시고당신의 숨결인 성령께서 그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그 깨달음과 실천으로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사랑입니다.

따라서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시라는 의미는 “하느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살아계시고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지금 바로 이 자리에 현존하신다.”는 사실지금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함께 한다”는 것은 복음적 의미로는 “사랑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사랑으로 속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함께 있음”이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항상 삼위로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그 이름마저도 항상 함께 계시는 분’, ‘임마누엘이시듯이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에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참사랑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함께 있음”, 그 자체가 이미 사랑입니다.

함께 있는 것그것은 유대와 연대의 관계 맺음이요관계 맺는 것그것은 함께 만나고 사귀고 친교를 나누는 일입니다.

곧 벗이 되는 일이요우정을 나누는 일이요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이토록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의 동행자로 삼으시고벗이 되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사랑으로 함께 있음사랑으로 서로 속해 있음사랑으로 서로의 것이 됨이는 참으로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오늘 이처럼우리가 “함께 있음”도 사랑입니다.

이 “함께 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은총인지참으로 큰 행복인지함께 있지 못하게 될 때라야 이를 더 잘 알기도 합니다.

그러기에우리는 “함께 있음”에 참으로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우리가 이처럼, “함께” 여기에서 만나 한 분이신 주님을 찬미하는 일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함께 서로 사랑하는 일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토록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얼마나 밀접하게 얽혀계시는 지를 말해줍니다.

하느님과 우리는 결코 분리될 수가 없는깊이 관계 지어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친교가 우리와 함께 하시고동행하심을 드러내줍니다 ‘동행하시는 하느님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우리에게는 생명을 나누는 일에 적극적으로 함께 해야 하고생명이 침탈당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함께 막아야 하는 소명이 있습니다.

이토록“함께 있음”, 바로 이것이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은 이토록 아름다운 일입니다이토록 거룩한 일입니다참으로 축복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

 

주님!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가르침을 배워 익히고 지키는 자 되게 하소서!

당신께 뿌리박고 살아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게 하소서!

어디에 있더라도 당신께 눈을 떼지 않고 당신께 속한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되고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아멘.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사랑으로 우리를 빚어 만드셨고,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도 당신의 사랑으로 살기를 기대하며 또 살 수 있도록 일깨워 주십니다.

이 시간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으로 계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기쁨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성그레고리오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어떻게 한 분이십니까? 하는 질문에 ‘세 개의 등불이 가까이 있다면, 그 사이에는 빛이 하나로 섞여 세 개의 빛이 뭉쳐졌다고 하지 않고 빛이 밝다고 하듯이 신성(神性)도 그렇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태양자체를 성부로, 지구까지 오는 빛을 성자로 그 빛이 따뜻하게 하고 자라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성령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 다 부족합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아버지는 우리 앞에 계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곧 생명을 주신 모든 것의 근원이시고 목표이시며 시작이요 마침이십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위해 아들을 넘겨주신 분입니다.

 

아들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바치신 분으로 존경과 순명을 가르치신 분입니다. 죄인의 대변자요, 억압받고 소외받는 이들의 변호자이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 머물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며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 주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며 우리를 대신해서 탄식해 주시고 새로움을 더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각기 역할이 구별되면서도 하나이신 하느님을 사랑 안에서 만나시길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16). 그래서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까롤로 까레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세상 끝날까지”함께 계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더욱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분으로서 함께 계신다니 가슴 벅찬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에게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레미야가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미야1,6)하며 예언자 직무를 거절할 때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미야1,8)고 하셨고, 모세도 “저는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딥니다”(탈출4,10)하고 직무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내가 너희를 도와 주겠다”(탈출4,15)고 하셨습니다. 에제키엘서 2-3장에 보면 에제키엘이 소명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도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하셨고 에제키엘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는 약속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사실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저절로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침을 지키게 하라는 할 일을 주시고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한 사람은 믿음의 눈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사도행전이 바로 그것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도행전을 꼭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더욱 다져지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커지길 원하는 사람은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사십시오. 큰 믿음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은 사랑하십시오.

 

우리는 흔히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합니다. 물론 동상이몽(同床異夢)인 분도 계시겠지만 일심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면 한마음(일심)이 되고 한마음이 되면 두 몸은 이미 한 몸(동체)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한마음, 한 몸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극복할 힘이 있습니다. 가난해도 풍요로울 수 있고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더욱, 의지하고 더욱 일치합니다. 힘들면 힘이 들수록 더 큰 사랑이 요구됨을 압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멋진 집에 살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높은 지위에 있어도 외롭고 쓸쓸하게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어느 것으로도 일치할 수가 없습니다. 이 관계는 부부사이의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관계가 그렇습니다. 부자관계도 사제관계도 우리 이웃과의 관계도 사랑으로 일치하지 않으면 혼란과 많은 상처가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주님께서 명하신 가장 큰 계명이 사랑입니다.

 

서로간의 관계에 이해타산이 끼어들면 힘들어집니다. 나도 피곤하고 상대도 피곤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사랑으로 하나이듯 우리도 서로 사랑하여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그곳에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사랑하십시오. 많이 행하게 될 것이고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만약 내가 아직 주님이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분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데 있지 않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결단을 내리는데 있습니다”(소화 데레사).

 

아무리 좋은 가전제품도 전기 코드를 빼어 놓으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많은 은총을 주시고자 해도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코드를 빼놓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먼저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사랑할 수 있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힘들고 지쳤을 때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고 약속하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연세 많은 할아버지께서 외출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손자, 손녀들이 집으로 오시는 길에 H.O.T 음반을 사다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손바닥에 H.O.T 라고 쓰고 외출을 하셨습니다. 집으로 급히 돌아오다가 손주들하고 약속한 것이 생각나 손바닥을 봤습니다. H.O.T,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H=호떡, 0=오뎅, T=튀김을 사가지고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날 할아버지께서 몹시 고독하셨답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면의 일치, 마음의 하나가 됨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인지요? 더욱이 주님의 마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고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나해

 -조욱현신부-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이다. 부활시기가 부활의 가장 큰 결실인 성령강림 대축일을 지내면서 끝났다. 이렇게 부활시기가 끝난 후 바로 삼위일체 축일을 지내는 것은 모든 구원질서의 원천은 삼위일체이며, 세상의 구원업적은 바로 삼위일체의 업적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와 역사를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강생과 파스카 신비, 그리고 성령강림의 신비가 발하는 빛들이 삼위일체에서 구원의 업적이 이루어졌음을 이해할 수 있다. 시인 단테는 “신곡” 천국 편 제33곡 85-87에서 내세에서의 상징적인 모험 여행의 결론으로 모든 것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에 귀결시키고 있다: “그 깊이 속에서 나는 보았노라. 조각조각 우주에 흩어져 있는 것들이 사랑으로 한 권에 엮어져 있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신학적인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신비를 전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신명 4,39). 주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랑의 책임을 충만히 지고 계신 분으로 나타난다.

 

사도 바오로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즉 우리가 ‘하느님의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라 부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함께 하므로 하느님의 생명에 함께 참여한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의 생명에 신비롭게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에 아들의 차원으로 우리가 들어갔고, 그 때문에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즉 아버지의 자녀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서 부르고 계신 그 이름, “아빠!”를 우리도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 신비에 참여하고 있다면, 이제는 그 때문에도 “삼위일체”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거처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우리가 “새로운 인간”(갈라 6,15; 2코린 5,17 참조)으로 “변화”하고 우리의 생활이 윤리적, 영적으로 변화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삶 속에서 항구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노력에 성령의 이끄심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을 것이며,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기쁨을 언제나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그분께 우리 마음을 열어놓는 자세가 필요하다.

 

복음: 마태 28,16-20: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

 

복음에서는 명확하게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19절)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세례성사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과 함께 그 신비를 기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께 종속되는 그런 멍에와 같은 것이 아니라, 성 삼위께로 가는, 그 신비에 참여하는 움직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개인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이 신비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을 예수께서는 하시고 계시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가르쳐라!”(19-20절). 이렇게 이루어진 공동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봉헌된 믿음의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하여 그 생명을 누리는 이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알리고 생활의 증거로써 온 세상에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우리의 삶이 그러해야 한다. 영광을 받으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20절)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로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성령 안에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에게 베풀어진 구원의 은총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자기 확산적 사랑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사랑은 하나가 되어, 서로가 주고받는 사랑이 완전한 모습이며, 그 사랑은 당신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창조와 구원의 역사로, 그리고 아들의 강생과 파스카 신비로, 그리고 성령강림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 이 구원의 신비를 다시 한번 묵상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날이다.

 

이제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 진정한 친교를 나누려면, 우리의 삶이 삼위일체적인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여러 식구로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있다. 분명하게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고, 아들은 아버지가 아닌데,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이시다. 즉, 사랑 안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의 가정에도 우리 가족 사이에도 진정한 사랑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여럿이라도 사랑 안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는 것이며, 그 신비를 체험할 수 있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다. 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의 삶 속에서 깨달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말씀은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을 드러내 주십니다.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신명 4,39)

모세는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 새겨진 두 사건을 들어 하느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명확히 제시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시러 직접 시나이산에서 당신을 드러내신 분이시고(신명 4,33 참조), 종살이하는 당신 백성을 이집트에서 손수 이끌고 나오신 해방자"(신명 4,34)시라는 것이지요. 당신 백성에게 행하신 하느님의 이 두 업적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정립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 이방신들을 섬기는 이민족들의 풍요와 쾌락을 접하기 전에 반드시 이 관계성을 새기고 또 새겨야 합니다. 그저 염두에 두고 참고하는 차원을 넘어서 골수까지 새겨넣어야 하는 뿌리의식일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이 지상에 남아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는 대목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태 28,20)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느님의 사랑의 현현이십니다. 육화한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당신 의지를 합쳐 이 지상에서 오로지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고, 아버지의 일을 행하셨지요. 그리고 이제 세상을 떠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시면서 성령을 보내시어 세상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준비시키십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제자들이 만나게 될 모든 민족들이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제자들은 모든 이에게 이스라엘 역사 안에 개입하심으로써 온 세상 구원의 문을 여신 성부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인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성자 예수님, 그리고 영원히 남아 진리를 일깨워주실 사랑의 성령을 알려 주고, 삼위 하느님과 관계를 맺도록 도울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들려 줍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14)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5)
"우리는 ...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17)

세례로 축성된 이는 자기가 받은 성령께 인도되어 하느님과 맺어집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이라 할 수 없고(1코린 12,3) 참조) 또 성령에 힘입어야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 예수님의 형제로 모든 은총의 공동 상속자가 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지닌 한계와 죄악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이토록 친밀히, 밀접히 엮이기를 꺼리지 않으시지요. 아니, 오히려 우리보다 더 간절히 바라시고 갈망하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느님 안에 숨 쉬고 존재하며 살아갑니다. 그분 안에 깊고 친밀히 머무르기 위해 필요한 건 지식이나 타이틀, 소유가 아니라 사랑이지요. 사랑만이 하느님과 우리를 강하게 결속시켜 줍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이미 우리는 삼위이신 하느님 안에 있으며 그분과 하나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죄인이어도, 이 미소하기 짝이 없는 사랑에 목마르신 주님께서 두 팔을 활짝 펼쳐 당신 품을 열어 놓으시니, 그 안으로 달아들어 사랑에 잠기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그렇게 사랑을 닮아 사랑이 되어가는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삼위일체의 교리가 아니라 삼위일체의 사랑을

 -김찬선신부-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기 힘들고 그래서 믿기도 힘들다고 많이 얘기합니다.

저도 그랬던 적이 오래전에 그러니까 삼사십 년 전에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삼위일체 신비를 이해하고 믿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고,

삼위일체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느끼는 것이 어렵다면 어렵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 어렵지 않고,

폭포수처럼 쏟아부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것과 느끼는 것이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알겠는데

너무 엄하고 무뚝뚝하셔서 좀처럼 사랑을 겉으로 표현하시지 않아서

그 사랑을 느낄 수 없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것과 같은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육신의 아버지처럼 하느님 아버지께서 표현을

잘 안 하시거나 못하셔서 우리가 사랑을 느끼는 것이 어려운 건가요?

 

비슷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물론 하느님은 사랑을 표현하지 않거나 못하시는 분이 아니지만

하느님의 사랑 표현은 육신 아버지의 사랑처럼,

아니, 육신 아버지의 사랑보다 훨씬 더 우리가 느끼기 어렵습니다.

 

우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은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것으로

표현하셨는데 그 사랑이 이천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여기의

내게도 보내시는 사랑이라고 느끼는 것이 어렵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하셨지만

시간과 공간의 존재인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이 사랑을 느끼는 것이 힘든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또는 "성령의 힘으로"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요.

 

성령만이 천상과 지상의 차이를 초월하게 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우리어야 한다는 점이고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성령을 받는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이 말은 악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에서 이탈한다는

뜻도 되지만, 악령의 인도를 받지 않더라도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모르고 세상의 자녀로 산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예수가 우리의 그리스도라는 것도,

그리스도가 우리의 형제라는 것도,

우리 신분이 종이 아니라 주님처럼 자녀라는 것도 모르고 산다는 뜻이지요.

 

관건은 이 성령의 인도를 우리가 받느냐 받지 않느냐 그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삼위일체로 사랑하시는 하느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이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형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데

성령은 우리의 영에게 증언한다고 오늘 바오로 사도는 얘기합니다.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성령의 상대자인 우리의 영이 성령을 잘 상대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이 성령을 외면하고 악령과 상대할 수도 있고,

우리의 영이 복음의 더러운 영처럼 세상에 더럽게 집착하는

육의 영이 될 수도 있는데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말처럼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야겠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사랑을 받고 느끼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5월 27일 삼위일체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