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5월 28일 연중 제8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1. 5. 28. 07:20

2021년 5월 28일 연중 제8주간 금요일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하느님을 믿어라

 (마르코 11,11-25)


My house shall be called

 a house of prayer for all peoples

Have faith in G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마르코 복음사가는 무화과나무와 성전을 ‘무화과나무의 말라 버림’과 ‘성전의 정화’라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로 연관시킵니다. 곧 무화과나무의 운명이 성전의 운명을 예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전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하느님의 집’(탈출 25,8 참조)이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드리는 “기도하는 집”(이사 56,7)으로 참으로 거룩한 장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1코린 3,16)으로 하느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먼저 신앙을 통하여 자신이 변화하고, 이 변화는 가족과 이웃들에게 더 많은 사랑이라는 열매를 내어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신앙을 가졌지만 어떤 변화도, 어떤 사랑도 실천하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열매 맺지 못하고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와 다를 것이 없으며 정화가 필요한 성전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앞서 먼저 “하느님을 믿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믿는다’는 말은 ‘행한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능동적인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사랑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지 못하다면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먼저 미워하는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참된 길이며 많은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로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방법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딸이 엄마에게 대듭니다. 엄마가 보여주는 이제까지의 강압적인 분위기가 너무 싫다면서 큰소리를 지릅니다. 그때 엄마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들도 다 이렇게 살아.”

우리는 남들과 비교를 참 많이 합니다. 남들이 하는데 왜 못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남들도 다 똑같이 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다르게 살고 있으며, 다르게 살아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그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그런 생각 자체를 틀렸다고 말합니다.

남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의 다름 역시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르게 다가오시는 주님 역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 다양한 모습의 주님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매 순간 기쁨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기도 안에서 만나는 주님, 일 안에서 만나는 주님, 여가 활동 중에 만나는 주님, 요리할 때 만나는 주님, 아플 때 만나는 주님. 모두 다른 모습입니다.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꼭 필요한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이기에 우리는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다른 모습은 이렇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모습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변화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성전 안에 있는 상인들과 환전상들은 대사제를 비롯한 종교지도자들과 결탁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많은 이익을 남겼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장사를 해서 가난한 이웃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강도들의 소굴로 만든 것입니다. 이 모습에 성전 안의 상인과 그들의 뒤를 봐주고 있었던 종교지도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우리가 잘못했구나. 진심으로 뉘우치고 다시 새롭게 태어나도록 하자.’라고 생각하면서 변화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들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변화를 부정하니 예수님을 없앨 방법만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하지 못하는 모습은 어떻게 될까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죽는 것처럼,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주님의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 말은 곧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 자신이 변화를 가져와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특히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변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구태의연한 옛날 모습에 안주하면서 변화하려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랑 빼놓고는 모두 바꿔라(볼테르).

보이지 않는 가치를 선택하세요.

유명한 이야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아마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보시라는 의미로 적어봅니다.

평소 아주 친한 두 친구가 여행하다가 외진 산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친구가 수풀 사이에서 반짝이는 돌을 발견한 것입니다. 금덩어리였습니다. 이 친구가 금덩어리를 친구에게 보여주자, 친구는 너무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거 금이 아닌가? 우리 정말로 횡재했네.”

그러자 금덩어리를 주운 친구가 정색하면서, “왜 우리인가? 금을 주운 사람은 날세.”라고 말합니다. 이 말로 둘의 관계는 아주 어색해졌습니다.

잠시 뒤, 금을 잃어버린 산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금을 가지고 있던 친구는 다른 친구에게 다급하게 말합니다.

“이걸 어쩌지? 저 산적들이 금을 발견하면 우리는 정말 죽을걸세.”

그러자 이 친구는 아무런 표정 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라고 말하지 말게. 금덩어리를 주운 사람은 자네가 아닌가?”

욕심으로 인해 관계가 깨어지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봅니다. 사실 ‘보이는 가치’보다 보이지 않는 사랑, 믿음, 평화, 우정 등이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순간적인 만족을 위해 보이는 가치를 선택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이 열매가 맺힐 때까지 기도를 멈춰서는 안 됩니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십니다.
그 이유는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집과 강도들의 소굴의 차이점은 ‘믿음의 열매가 맺히느냐, 맺히지 않느냐’로 분별이 됩니다.

 

    강도들의 소굴은 오늘 복음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비유됩니다. 그런 전례나 성전은 파괴됩니다. 예수님은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며 우리는 믿음을 맺는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내가 청하면 하느님은 들어주실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어떻게 산보고 명령하는데 그것이 바다에 빠질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자신이 하느님이라도 됐다고 믿어야 할까요? 맞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청하면 부모가 무엇이든 들어줄 것을 믿습니다.
    기도하고 나면 이런 자존감의 회복이 일어나야 합니다. 만약 기도하고 났는데도, “난 안 돼. 난 못해.” 등의 생각이 남는다면 아직 기도가 덜된 것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입니다.

 

    기도하고 나서 나에게 이런 자신감과 믿음이 생겼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미사를 하고 기도를 하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기도한 대로 이미 이뤄졌다는 기쁨과 평화의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이뤄진 줄 믿으면 마음이 평화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의 열매는 그래서 ‘믿음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이 열매가 맺힐 때까지 기도를 멈춰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처럼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부족할수록 마음의 평화가 깨집니다. 이 평화를 얻기 위해 불안해하는 자기를 기도 안에서 봉헌해야 합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아깝게 은메달에 그쳤던 유도선수 김재범은 그다음 올림픽인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땁니다. 은메달에서 금메달로 가는 그 과정이 얼마나 혹독했겠습니까? 그리고 결국엔 모든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죽기 살기’가 아닌, 그냥 ‘죽기’로 연습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이와 같습니다.
 

    그는 배고팠던 어린 시절을 살았습니다. 빵과 우유를 준다는 말에 유도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승부 근성이 있어서 죽기 살기로 했습니다.
    한 번은 아버지와 새벽 운동을 나갔는데 아버지는 뒤에서 차로 빛을 비춰주며 따라오고 김 선수는 뛰다가 넘어졌습니다. 뒤에서 빵빵 소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차가 자신을 갈릴 것처럼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이러다 죽겠구나 싶어서 벌떡 일어나 “저게 뭐 아빠야!”하고 다시 뛰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김재범이 있게 한 분이 아버지였다고 이제는 말합니다. 그때부터 ‘죽기 살기의 정신’으로 운동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남들과 똑같이 운동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 이건 미친 짓입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올레 비쇼프 선수에게 져서 은메달에 그칩니다. 하지만 아쉬움이 없었습니다. 죽기 살기로 했기때문입니다.

 

    올림픽을 마치고 새로운 감독님이 김재범 선수를 보자마자 한 한 마디는 “또 질래?”였다고 합니다. 자신은 잘했다고 믿었는데 감독님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며 런던 올림픽은 ‘죽기 살기’가 아닌 ‘죽기’의 정신으로 해야겠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인데, 11시 11분이면 꼭 기도했다고 합니다. 1등 아니면 안 된다는 의지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 어깨부상으로 런던 올림픽에 출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수술을 하지 않고 죽기로 훈련합니다. 시간을 바꿔 10시 04분에 기도를 했는데(1004: 천사) 감독님은 하루 100개도 하기 힘든 튜브 당기기를 1004번을 하자고 합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런던 올림픽에 나갔고 결승까지 갑니다.
    그는 다시 기도합니다. 전에 자신이 졌던 올레 비쇼프 선수가 결승에 올라오기를. 그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이전의 자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를 이기고 금메달을 따고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랜드슬램을 도전하게 된 것입니다.
 

[출처: 강연쇼 60분의 기적, 김재범: ‘죽기 살기’가 아닌 ‘죽기’의 정신으로]
 

    기도는 쉬운 일일까요? 김재범 선수가 한 것처럼 자신을 죽이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마치 밀떡과 포도주처럼 자기를 봉헌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되는 과정입니다.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써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 기도를 마치면 이제 내가 죽고 새로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게 됩니다. 그러면 불가능이 없어집니다. 그때가 되면 마음에 평화가 오고 이전에 졌던 선수를 자신 있게 부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승리합니다. 이때까지 해야 합니다.
 

    영화 ‘트루먼 쇼’(1998)는 전 세계 사람이 트루먼이란 한 사람을 속여먹는 내용입니다.
    트루먼은 자신만 모르는 커다란 TV 세트장에서 모두가 배우인 사람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누구도 트루먼을 진정으로 사랑해주지 않았지만, 실비아만이 트루먼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직장을 잃어가면서까지 트루먼에게 진실을 이야기해 줍니다.
이때 바닷가에서 둘이 ‘키스’를 하는데, 그 키스는 트루먼에게 세상 모든 사람과 싸워 이길 힘과 두려움의 바다를 건널 용기를 줍니다.

    트루먼은 처음엔 그 말을 잘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그 키스의 달콤함이 생각날 때마다 실비아의 말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조금씩 실비아의 말을 믿게 되고 모든 의심스러운 것들과 싸움을 시작합니다. 키스는 한 번이었지만 그 한 번의 진실한 키스와 눈빛은 트루먼의 삶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 한 번의 진정한 키스가 세상과 싸움을 일으켰기 때문에 참 효과를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싸우게 하지 않는 기도는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나면 주님께서는 당신의 키스로 우리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용기와 믿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기만 하면 결국엔 해내고 맙니다.
    기도하면 이 마음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배를 타고 두려움의 바다를 건널 자신감, 물 위를 걸을 자신감을 가질 때까지 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죄의 유혹 두려움을 이기고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겨 하느님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기에 평화로운 마음이 생길 때까지 해야 합니다.
    이길 자신이 있으면 싸움을 앞두고도 평화롭습니다. 그러기 위해 불안한 나 자신을 바치고 내가 그분이 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조재형신부-


자고 일어났는데 눈이 불편했습니다. 샤워하면서 눈을 만졌습니다. 그랬더니 눈이 더 불편했습니다. 잠시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눈에서 눈물이 나오면서 눈이 편해졌습니다. 눈이 불편하다고 눈 주위를 자꾸 만지면 오히려 안 좋았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편하게 누워있으니 눈물이 나면서 좋아지는 것을 보면서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과 자유를 사람은 스스로를 망치고,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곳에 사용하곤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존재의 삶을 살도록 하셨는데 우리는 소유의 삶을 살면서 욕망의 덫에 빠지곤 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 국가는 전쟁을 벌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 개인은 힘으로 빼앗고, 양심을 속였습니다. 같은 사람을 노예로 만들었고, 신분을 만들어서 차별하였습니다.

 

인간이 세운 문명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연을 파괴하였고, 환경을 오염시켰습니다. 많은 생명들이 우리의 욕망 때문에 죽어야 했습니다. 세계에서 4번째로 큰 호수였던 아랄해는 인간의 욕심 때문에 불과 30년 만에 사라질 위기에 있다고 합니다. 태평양에는 커다란 쓰레기 섬이 생겼다고 합니다. 수많은 바다의 생명이 잘게 부서진 플라스틱을 먹이로 알고 먹는다고 합니다. 결국 사람도 잘게 부서진 플라스틱을 먹게 된다고 합니다. 최근에 발생하는 이상기후, 강력한 태풍, 심각한 가뭄은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킨 인류의 탓이 크다고 합니다. 문제는 인구의 수는 점점 늘어날 것이고, 우리는 아직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인간,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지만 소유라는 덫에 갇혀서 여전히 자업자득, 자승자박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코로나19와 1년을 넘게 지내면서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산업이 잠시 멈추니 대기의 오염이 줄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여행이 잠시 멈추니 생태계의 복원이 조금씩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소유의 삶을 계속한다면, 욕망의 삶을 계속한다면 또 다른 바이러스가 우리를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파괴된 자연과, 오염된 환경은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엄청난 재앙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진화의 과정에서 우리의 뇌는 먼 앞날을 예견하고, 대책을 세우는 방향으로 진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눈앞의 위험을 피하고, 종족을 번식하는 방향으로 진화하였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생명들이 살아가는 존재의 삶입니다. 그 길은 분명 멀고도 힘든 여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이 아름다운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선택을 말하고 있습니다. 소유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이렇게 된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고 존재한 적이 없었던 듯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태어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되었으며 그 뒤를 이은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존재의 삶을 선택한 사람은 이렇게 된다고 합니다. “그들의 재산은 자손과 함께 머물고 그들의 유산은 후손과 함께 머물리라. 그들의 자손은 계약을 충실하게 지키고 그들 때문에 그 자녀들도 그러하리라. 그들의 자손은 영원히 존속하고 그들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예수님께서도 소유의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삶은 무소유의 가르침이었고, 존재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우리를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

 오늘 우리가 사랑하는 성전은 어떠한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수뇌부가 예수님을 체포하기로 마음먹은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으니, 예루살렘 성전 정화 작업이었습니다.

  

말이 성전 정화 작업이지,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한판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장사꾼들을 채찍질하며 쫓아내셨습니다.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의 의자도 둘러엎으셨습니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르코 복음 11장 17절)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 앞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즉시 대책 회의를 개최한 후 그분을 없애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우리나라로 치면 한국 가톨릭의 자부심이라고 할 수 있는 명동 성당과 비슷했습니다. 각 교구의 주교좌 성당 역할도 했습니다. 그만큼 유다인들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는 대단했습니다.

  

나라가 멸망해서 초토화되고, 굴욕적인 로마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도,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며 힘과 용기를 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 예루살렘 성전은 심장이요 영혼, 자랑이요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성전의 화려함은 더해갔지만, 규모는 점점 더 확장되어 갔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알맹이는 사라져 갔습니다. 성전의 봉사자들은 고생하는 백성들을 위로하기는커녕, 이런저런 명목으로 헌금을 강요하며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마당을 요란한 장터 같았습니다. 속죄 죄물로 바칠 동물 판매인, 환전상, 소매업자, 도매업자, 흥정꾼, 야바위꾼으로 넘쳐났습니다. 성전은 약삭빠른 사람들의 좋은 먹잇감이 된 것입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성전 마당에서의 거래를 허락해주는 댓가로 두둑한 뒷돈을 챙겼습니다.

  

이렇게 속화되고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신 예수님께서 초강경 모드로 성전을 정화하신 것입니다.

  

어디 가나 주님과 교회를, 성모님과 성인성녀들을 신앙의 대상,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뱃속을 채우는 도구로 활용하는 이리떼들이 있습니다.

  

늘 유심히 바라보고 식별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어떤 강의를 들으러 갔었는데, 틈만 나면 외치는 것이 치유요 기적이라면 일단 의심해봐야 합니다.

  

어떤 신심 모임에 초대받아 갔었는데, 상습적으로 고가의 물건을 강매한다든지, 은근히 고액의 헌금을 강요한다면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신다면 불같이 진노하시며 정화하실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랑하는 성전은 어떠한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겠습니다. 혹시라도 그 옛날 예수님께서 보시고 진노하신 시장터같은 교회는 아닌지요? 성전이 지녀야 할 거룩함과 충만한 사랑, 개방성과 친교의 정신은 온데 간데 없고 장사꾼들만 판을 치는 교회는 아닌지요?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맨 먼저 찾아가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셨습니다.

그곳은 당신이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잃은 아들을 찾아 온 부모에게 “저는 저의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했던 바로 그 성전입니다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마르 11,17)

 

여기서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당신의 집으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전을 당신이 머무는 곳이요당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곳으로 말씀하십니다사실성전은 하느님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1열왕 8,29)라고 말씀하신 곳이니당신 이름과 함께 현존하신 그분을 만나고 대면하고 마주하는 기도의 집인 것입니다그런데이런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장사와 환전이 행해지는 불결하고 부정한 곳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새롭게 정화하시는 일을 맨 먼저 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성전정화는 교회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곧 교회는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에 응답할 때 교회다워진다는 말씀입니다.

한편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쪼개시고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주의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뿐만 아니라우리를 당신의 지체로서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그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1코린 3,16-17)

 

참으로 그렇습니다우리의 몸은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실 뿐만 아니라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주인은 집을 어찌할 수 있으되결코 집이 주인을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

주인이 집을 소유한 것이지집이 주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그러기에우리는 자신을 기꺼이 주님의 소유로 내어드려야 할 일입니다주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1코린 6,20)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말합니다자신을 타인을 위해 내어놓을 때비로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교회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때곧 우리 자신을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성전인 우리는 기도의 집이 되고우리 안에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마르 11,17)

 

주님!

기도하게 하소서

제 몸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 행실로 당신의 성전임을 증거 하게 하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가 당신이 거주하시는 당신의 집인 까닭입니다아멘.

 하느님의 아름다운 성전

 -반영억신부-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평상시의 삶을 볼 때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한마디 던지는 소리가 영 비위에 거슬릴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속에 무슨 의미를 담고 그런 소리를 하였을까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하여 숨은 뜻을 찾아내면 오해와 속상함을 넘어 기쁨을 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았으나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11,13).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말라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일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였단 말입니까?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로 존중되었습니다. 평화와 안정, 번영의 표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꽃 피고 수많은 열매를 맺음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축복해 주는 것으로(요엘2,22 ; 하깨 2,19), 반면에 메마르고 열매 맺지 못함은 하느님의 심판으로 간주되었습니다(예레5,17. 8,13 ; 호세2,14 ; 아모4,9 ; 요엘1,7.12). 예언자들의 예언이 무화과의 열매를 통한 비유를 통하여 주어졌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렇듯이 이제 예수님의 말씀도 그대로 이루어짐을 말해줍니다. 결국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는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당신 뜻을 드러내고자 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무화과나무는 곧 이스라엘을 상징하며 구체적으로는 성전과 율법학자나 수석 사제, 백성의 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잎은 무성하여 열매가 풍성할 것 같은 기대를 하게 되나 실제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사라지듯이, 자리만 차지하고 세상과 타협한 종교 지도자들도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허우대는 멀쩡하나 껍데기만 남아있는 하느님의 경신례와 각종 행사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사실 성전의 겉은 화려하게 꾸몄으나 하느님의 의로움과 현존을 보여주지 못하는 성전은 이미 성전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 엎으셨습니다(마르11,15). 미사봉헌은 항상 장엄합니다. 혼자 봉헌하든 많은 사람이 함께하든 주체는 주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수석 사제, 율법학자들은 스스로 권위를 내세우고 힘이 있는 듯이 행동하였지만. 하느님보다 돈을 먼저 생각하였으니 그가 몸을 담고 있는 곳이 성전이라 해도, 비록 그가 하는 일이 합법적이라 해도 예수님의 눈에는 강도일 뿐입니다. 여기서 ‘강도’는 칼을 든 개인 강도라기보다는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억압과 착취, 특히 성전체제를 중심으로 한 지배 권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강도의 소굴을 다시 ‘기도의 집’으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분의 뜻을 잘 헤아리고 우리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성전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그분의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새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이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새롭게 해 주신 하느님의 계명이 우리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면 거기가 바로 성전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 그러기에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의 성전을 어떻게 정화할 것인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송영진신부-


“이튿날 그들이 베타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다.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멀리서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셨지만,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르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마르 11,12-14).”

 

이 이야기는 ‘상징’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시장하셨다는 말은, 사람들이 당신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아서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셨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는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잘하는 척 하고,

실제로는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위선자들을 상징합니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당시의 실제 계절을 나타내는

말이긴 한데, 만일에 이 이야기를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로 생각하면,

무화과 철이 아닌데도 열매가 없는 것을 탓하면서 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아주 많이 잘못하신 일이 되어버리고,

나무 입장에서는 아주 크게 억울한 일이 됩니다.

(그래서 ‘상징’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다는 말은, “지금은 신앙생활을 안 해도 되는 때이다.” 라고

위선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주장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됩니다.

 

<위선자들은 주일에만 신앙인 행세를 하고,

교회에 있을 때에만 신앙생활을 하는 척 합니다.

그러면서 주일이 아닌 날에는, 또 교회 밖에 있을 때에는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진실한 신앙인들은 주일만이 아니라 모든 날에, 즉 언제나 항상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 안에 있든지 밖에 있든지 간에, 또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이 신앙인답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신앙생활은 해야 하는 시간과 안 해도 되는 시간이 따로 구분되어 있는

생활도 아니고, 해야 하는 장소와 안 해도 되는 장소가

따로 구분되어 있는 생활도 아닙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한 순간도 중단하는 일 없이,

그리고 언제나 변함없이 성실하게 해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라는 말씀의 뜻은, “너는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한다.”인데,

“위선자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라는 경고입니다.

<이 말씀은,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요한 15,2)” 라는 경고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위선자라고 해도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지만 ‘나중’이 아니라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엎으셨다. 또한 아무도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르 11,15-17)”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유대인들의 생활 모습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느님을 열성적으로 섬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겉모습만 그렇게 보였을 뿐이고,

속으로는 그렇지 않은 ‘위선’이었던 것입니다.

환전상들은 외국 돈을 이스라엘 돈으로 바꿔 주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일은 하느님께 헌금을 하려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또 성전에서 팔았던 소, 양, 비둘기는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기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일은, 겉으로만 보면 하느님을 위한 일이었는데,

실제로는 하느님을 섬긴다는 핑계로 터무니없이 비싼 값으로 물건을 팔면서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운 일이었기 때문에,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든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성전을 모독하는 일이었고,

하느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는 예수님 말씀이 더 있습니다(요한 2,19).

‘강도들의 소굴’은 허무는 것이 마땅합니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예배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성전을 허물어라.” 라는 말씀은 무화과나무를 향해서 하신 말씀에 연결됩니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14절).”

‘강도들의 소굴’에서는 어느 누구도 ‘구원의 열매’를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마르 11,22-25)”

 

성전에서의 장사로 폭리를 취하면서 강도짓을 한 자들이나 그들에게서 뇌물을

받고 장사를 허락해 준 사제들은 모두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돈을 섬긴 자들이고,

믿음 없이 믿는 척만 한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의 힘’을 강조하신 것은, ‘하느님의 힘’을 강조하신 것이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 없이 믿는 척만 하면서 돈을 섬기는 자들의 말로는

허무하고 비참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믿기만 하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라는 말씀은,

“먼저 용서부터 하고 나서 기도하여라.” 라는 가르침인데,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만 채우려는 기도를 하지 말고,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복음: 마르 11,11-25: 하느님을 믿어라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정화하신다. 성전에서 나와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았을 때 제자들은 놀랐을 것이다. 무화과나무는 수분을 듬뿍 머금고 있어서 잘라 낸 다음에도 완전히 마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무화과나무는 다른 나무들보다 훨씬 먼저 물이 오르고 부드러워진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들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이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마태 24,32; 마르 13,28; 루카 21,30)

 

주님께서 찾으셨던 무화과는 율법의 잎은 달고 있지만, 실천의 열매가 없는 회당의 열매였다. 주님께서는 그때가 무화과 철이 아님을 잘 알고 계셨다. 시장하신 주님께서 나무에서 무언가를 찾으셨을 때, 그분은 무엇인가에 굶주리시면서 다른 어떤 것을 찾고 계셨다.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나무를 저주하셨고 즉시 말라버렸다. 율법이라는 잎은 무성하지만, 실천이 없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결국 말라버리고 말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세속적인 사업이 벌어지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야바위꾼들을 내쫓으시고, 장사하기 위해 나르던 물건들과 함께 그들을 모두 내쫓으셨다.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17절). 이 말씀은 “하이에나가 나의 소유를 탐욕스레 바라보느냐?”(예레 12,9)는 말씀과 같다. 하이에나는 밤에만 나타나는 동물로 피를 먹고 썩은 고기를 청소하는 짐승이다.

 

성전을 정화하시고 나서 제자들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있는 것을 보았다.”(20절) 우리는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의 종말을 겪지 않도록 포도 줄기와 굳건히 연결되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언젠가 우리가 그분을 만났을 때, 이렇게 외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하느님 집에 있는 푸른 올리브 나무 같아라. 영영세세 나는 하느님의 자애에 의지하네.”(시편 52,10)

 

주님께서는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믿는”(23절) 이의 기도는 열린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 부서진 마음의 열매이며(참조: 시편 34,19; 이사 66,2) 뉘우치는 마음의 결실을 말한다. 기도는 헤아릴 수 없는 선의 뿌리요 샘이며 무수한 축복의 어머니이다. 우리는 기도의 힘으로 우리가 청하는 것을 이미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알아주시고 청하는 바를 즐겨 들어 주시리라 믿는 그만큼 청하는 바도 얻고 응답도 받게 된다. 진정한 믿음을 갖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그러면서 용서를 통한 사랑의 기도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여야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이러한 삶으로, 이러한 기도로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25절) 우리의 삶이 항상 용서를 통하여 사랑의 기도를 주님께 바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 24)

-한상우신부-

아무 것도
감추지 않는
하느님의
빛이다.

생명의 빛은
기도의 빛이다.

기도의 빛이란
우리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기도하는 삶을
우리가
사는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하느님께
구하는 것이
기도이다.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이다.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를
도와주신다.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의
기쁨이다.

들으시고
응답하여
주신다.

기도로 우리는
하느님께
나가게된다.

삶과 기도는
분리될 수 없다.

삶을 사랑하게
하는 기도이다.

예수님을
닮는 삶이
기도의 삶이며
용서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우리의 기도에
있다.

하느님을 향한
기도의 여정을
우리는
걸어간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기도로
형성된다.

이 모든 것이
은총임을
알게하는
기도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사람이
되어오시고
십자가에서
부활을 그대로
이루어 내시는

기도의
하느님이시다.

기도의
한 방울이
필요한
눈물의
자녀들이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그대로 이루어 질
기도가 있다.

하느님의 빛은
기도로 우리를
가르쳐준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에서 우리는 성전이 제 정체성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지 엄중히 경고하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것을 둘러보신 다음"(마르 11,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먼저 성전을 둘러보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 현존의 장소로서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담긴 심장부라 할 수 있지요. 오늘 예수님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개입하지 않으시고 그저 둘러보신 뒤 베타니아로 떠나십니다.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가까이 가 보셨지만"(마르 11,13)

이튿날 베타니아를 떠나실 때 예수님께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다가가십니다. "잎이 무성한 나무"는 바로 어제 둘러보신 예루살렘 성전을 떠올리게 해줍니다. 외적인 화려함, 형식에 치중한 율법주의, 부와 권력이 집중된 성직주의는 겉보기에 뭔가 있는 것처럼 그 위용을 자랑하나 실은 정체성을 잃은 채 속이 비어가는 신기루일 따름입니다.

나무를 살피시는 예수님을 관상합니다. 그분은 시장하십니다. 우리의 사랑과 기도와 정의에 너무도 허기가 지셔서 우리 주변을 맴돌며 열매 하나라도 발견해 보려 찾고 계십니다. 기대의 눈길을 쉬이 접지 않으시고 우리를 이리저리 살피시는 건, 사실 당신 허기를 채우시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진정 우리다운지 보고 싶으신 까닭입니다. 그분은 우리다움의 열매를 진심으로 갈구하십니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마르 11,17)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 성전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우선 성전은 예수님의 "나의 집"입니다. 아버지께서 계시는 집이 바로 아드님의 거처이며, 우리 또한 주님을 모신 성전입니다.

또 성전은 특정한 어떤 민족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위한 곳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와 축복을 독점하려는 이스라엘의 배타적 선민의식은 온 세상 모든 민족을 향해 열려야 하지요.

그리고 성전은 기도의 집입니다. 기도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입니다. 성전에서 인간은 말과 노래, 머무름과 행동 등 자신이 받은 모든 것으로 기도하며 하느님과 친밀히 연결됩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기도의 뿌리는 믿음입니다. 기도는 믿는 이가 하는 겁니다. 믿지 않으면서 하는 기도는 기도를 가장한 주술이나 흥정, 거래에 불과하지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실망과 질타에 뿌리째 말라버렸음은 의미심장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영혼, 기도의 정신을 잃어버린 공동체, 기도가 아닌 데서 성장 동력을 찾는 제도는 아무리 겉으로 승승장구 팽창하는 듯 보여도 "강도의 소굴"로 전락하기 십상입니다. 주님에게서 수액과 양분을 받는뿌리, 곧 믿음이 말라버렸으니 사실상 주님과 연결이 끊긴 것과 다음 없지요.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마르 11,25)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이에게 먼저 용서하라고 권고하십니다. 기도가 인격적 만남인만큼, 지고지선하신 주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의 통교와 소통, 일치가 가능하려면 우리 쪽에서의 통회와 주님 편에서의 용서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주님은 용서하는 이를 용서하십니다. 주님의 자비가 조건적이거나 한정적이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아무리 용서하신들, 용서를 모르는 이는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모든 일은 그저 자기 능력이거나 우연, 또는 행운 정도일 뿐이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그처럼 뿌리째 말라버린 존재들 사이에서 영원히 기억에 남는 이들을 칭송합니다.   

"그러나 저 사람들은 자비로워, 그들의 의로운 행적은 잊히지 않았다."(집회 44,10)

집회서 저자는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구약 선조들의 업적을 노래합니다. 그들에게서  가장 탁월한 점으로 꼽은 것이 바로 "자비"와 "의로움"입니다.

"자비"는 하느님을 닮은 마음이고, "의로움"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자비와 의로움을 지닌 이들은 하느님 약속의 수혜자가 되어 영원히 존속하며 그 영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다움이고 그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말씀들이지요. 기득권 유지를 위해 율법주의와 성직주의로 탑을 쌓기 전의 이스라엘,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던 이스라엘의 영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성령을 모신 주님의 성전입니다. 우리가 믿고 기도하는 자비로운 의인으로 존재하며 살아갈 때 가장 우리다우며, 주님과 이어진 우리의 정체성도 충만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주님의 성전이며 기도하는 영혼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각자의 성전다움으로 주님 목을 축이고 허기를 채워드릴 열매를 맺는 우리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사람이 없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김찬선신부-


어제 집회서 말씀에 이어 오늘 복음의 주님도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은 자못 폭력적이시어서

주님께서 진정 이렇게 하셨을까? 또는 이것이 진정 주님의 모습일까?

의구심을 품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폭력을 행사하시고

나무에 열매가 달리지 않았다고 폭력을 행사하십니다.

 

그런데 성전의 폭력은 성전 정화를 위한 거였으니 그래도 이해할 만 하지만

당신의 시장함을 달래주길 바란 무화과나무가 아직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말라비틀어져 죽으라고 저주를 내리신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더욱이 아직 무화과 철이 아니어서 열매를 맺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런 죄없는 나무에게 저주를 퍼부은 것은 하느님 나라의 정의나

사회 정의를 위한 것이 아닌, 순전히 개인적인 분풀이밖에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맥 그대로 합리적인 해석을 한다면 이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지만

주님이 그럴 분이 아니라는 믿음으로 이해를 한다면

여기서 개인적인 분풀이가 아닌 다른 역설적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역설적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통해서 뭔가 메시지를 던지시고자 하신 거지요.

오늘 마르코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화려하게 입성하신 다음

먼저 성전에 가시어 성전을 둘러보시는데 날이 이미 저물었기에

첫날은 일단 성밖으로 나가 베타니아서 머무십니다.

 

복음에는 그런 묘사가 나와 있지 않지만 이때 이미 성전의 난장판을 보시고 

이미 주님의 심사는 불편하셨을 터이지만 날이 저물어 

다음날 성전 정화를 하시기로 작정을 하고 참으신 것입니다.

 

마침내 다음날이 밝아 성전 정화를 위해 가시면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나무를 보고 저주를 퍼부으시고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그리고 성전 정화를 마치고 나오면서 그 나무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보니 이미 말라비틀어져 죽은 상태인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의 전개는

성전 둘러보심-무화과나무 저주-성전 정화-죽은 나무의 확인 순서인데,

이런 전개를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와 같음을 얘기하고자 하신 것이고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도

이 무화과나무처럼 폐허가 될 것임을 예고하고자 하신 것일 겁니다.

 

잎만 무성한 나무는 겉만 화려하고 건물만 화려한 교회,

곧 성전 안에 하느님은 안 계시고 장사치만 있는 교회이며,

그래서 열매 없는 나무는 이 성전에서 아무리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하여도 아무런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왜 망하는가?

수도회 성소가 왜 줄어드는가?

떠나는 이는 있지만 찾아오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떠나는 사람만 있고 왜 찾아오는 사람은 없는가?

사람이 없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 안에 하느님이 안 계시고 하느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프란치스코가 무너져가는 교회 쇄신을 위해

교회 안으로 복음을 들고 들어간 이유임을 묵상하며

아울러 우리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인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하느님을 믿어라 (마르코 1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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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집과 강도들의 소굴의 차이점은 ‘믿음의 열매가 맺히느냐, 맺히지 않느냐’로 분별이 됩니다.

 강도들의 소굴은 오늘 복음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비유됩니다. 그런 전례나 성전은 파괴됩니다. 예수님은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며 우리는 믿음을 맺는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내가 청하면 하느님은 들어주실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자녀는 부모에게 청하면 부모가 무엇이든 들어줄 것을 믿습니다.
    기도의 열매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입니다.

기도한 대로 이미 이뤄졌다는 기쁨과 평화의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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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삶은 무소유의 가르침이었고, 존재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우리를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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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성전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그분의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새롭게 해 주신 하느님의 계명이 우리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면 거기가 바로 성전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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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시장하셨다는 말은, 사람들이 당신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아서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셨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는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잘하는 척 하고,

실제로는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위선자들을 상징합니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당시의 실제 계절을 나타내는

말이긴 한데, 만일에 이 이야기를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로 생각하면,

무화과 철이 아닌데도 열매가 없는 것을 탓하면서 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아주 많이 잘못하신 일이 되어버리고,

나무 입장에서는 아주 크게 억울한 일이 됩니다.

(그래서 ‘상징’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다는 말은, “지금은 신앙생활을 안 해도 되는 때이다.” 라고

위선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주장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됩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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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께서는 그때가 무화과 철이 아님을 잘 알고 계셨다. 시장하신 주님께서 나무에서 무언가를 찾으셨을 때, 그분은 무엇인가에 굶주리시면서 다른 어떤 것을 찾고 계셨다.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나무를 저주하셨고 즉시 말라버렸다. 율법이라는 잎은 무성하지만, 실천이 없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결국 말라버리고 말 것이다.

성전을 정화하시고 나서 제자들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있는 것을 보았다.”(20절) 우리는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의 종말을 겪지 않도록 포도 줄기와 굳건히 연결되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언젠가 우리가 그분을 만났을 때, 이렇게 외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하느님 집에 있는 푸른 올리브 나무 같아라. 영영세세 나는 하느님의 자애에 의지하네.”(시편 52,10)

-조욱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