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5월 17일 부활 제7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1. 5. 17. 08:15

2021 5 17일 부활 제7주간 월요일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29-33)

 

 

In the world you will have trouble,
but take courage,

I have conquered the worl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나약한 모습으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이 끝이 아님을 당신의 부활로 보여 주십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악과 그의 권세인 죽음에 대한 승리임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라는 사도 신경의 부활 신앙은, 빈 무덤이 주님의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아니더라도, 제자들이 체험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이며 역사를 초월하는 사건’이라고(『가톨릭 교회 교리서』, 639-647항 참조)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괜히 모든 것을 잃고 손해 보는 것’으로 여겨지는 예수님의 방법은 인간 세상의 방법과 전혀 다름을 알게 해 줍니다. 무조건적이며, 아낌없이 내어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통하여 세상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며, 사랑을 통하여 움츠려 있던 우리의 몸을 펴고 용기를 내어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렵고 힘들수록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는 자신의 것을 내어 주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삶에서 지치고 힘들 때마다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그리스도 안의 새 생활’(로마 12,1-21 참조)을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우리는 부활의 삶을 향하여 용기를 내어 나아가야 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대표 교향곡을 물으면 대부분 ‘운명 교향곡’을 이야기합니다. 그의 교향곡 제5번으로, 저 역시 무척 좋아하는 곡입니다. 그런데 이 교향곡을 작곡할 당시 베토벤은 큰 시련을 겪고 있었습니다.


삼십 대 중반밖에 되지 않았는데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음악가에게 귀는 생명과도 같지 않았을까요? 따라서 그의 생활은 경제적으로도 아주 힘들어졌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에서 허름한 아파트에 살았는데, 월세를 내지 못할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계속 밀리는 월세에 집주인이 집을 찾아와 문을 두르면서 월세 낼 것을 독촉했지요.

그날도 집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똑똑똑똑....”

집주인도 베토벤의 귀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얼마나 크게 문을 두드렸겠습니까? 이 리듬에서 베토벤은 특별한 영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운명 교향곡 시작 부분에 등장하는 “빠바바밤~ 빠바바밤~”입니다. 그에게 이 소리는 어떻게 들렸을까요? “월세내라~ 빨리내라~”로 들리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는 이를 음악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시련에 그리고 아픔에 좌절만 하기에는 나 자신의 삶이 아깝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방향으로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 주님과 함께하면서 그 안에서 길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필요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로써 유일하게 죽음을 이기신 분, 가장 힘센 분임을 세상에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힘 있는 분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 편이 되어 우리의 마음 안에 평화를 간직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이렇게 세상을 이기신 분이 우리 편이십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좌절과 절망도 주님 앞에서는 별것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다른 방향으로 마음을 바꿔서 주님께서 나를 인도해 주시는 길로 힘차게 걸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역시 주님과 함께 세상을 이길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작은 기쁨은 타인을 기쁘게 해 주는 데서 시작된다(라브뒤예르).

자세히 보고 오래 보기

나태주 시인의 시 중에서 아주 유명한 시가 있지요. 바로 ‘풀꽃 1’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가 비록 짧아도 워낙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이를 인용하는 사람도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풀꽃 1(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너도 그렇다’는 싯구 뒤에 하나의 문장을 더 넣어보면 어떨까요?

“나도 그렇다.”라고 말입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 예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은 그렇게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쁘다고 하지 않고 사랑스러워하지도 않습니다. 늘 부족해 보이기만 합니다.

이제 나도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 어떨까요?

 나 자신을 위해 싸우면 왜 항상 지는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말씀하지 않으시는데도 말씀을 모두 알아듣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그들의 믿음이 아직은 완전하지 않아 당신을 버리고 흩어질 때가 온다고 하십니다. 아직은 세상이 주는 두려움을 이길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힘을 잃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신께서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제자들도 이길 수 있다고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런데 혼자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버리고 도망쳐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만약 예수님께서 제자들로부터 힘을 얻거나 제자들을 위해 세상과 싸우셨다면 제자들이 도망칠 때 큰 실망과 함께 싸울 의욕을 잃으셨을 것입니다. 또는 당신 자신을 위해 싸우셔도 세상엔 누구도 당신에게 영광을 줄 사람이 없습니다. 결국, 세상과 싸우고 계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과 싸워 이기실 수 있으셨던 이유는 당신을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싸우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싸우는 사람은 패배할 것을 두려워하여 몸이 경직됩니다. 두려우면 어떤 싸움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은 자기 자신을 생각할 때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사랑해 준 분을 위해 싸운다면 두려움이 없어지고 그러면 승리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방식입니다. 

 

    ‘안젤리나 졸리’가 태어날 무렵 배우였던 아버지는 여배우들과 바람을 피웠습니다. 아버지는 1살 때 졸리를 버리고 떠납니다. 졸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고 경제적인 지원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남편과 똑 닮은 졸리를 볼 때마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졸리가 4살이 되었을 때 금발의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해 버립니다. 이후 졸리는 어머니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인지 갈색 머리를 지금까지 유지합니다.
 

 

    7살 때 졸리는 아버지와 함께 ‘라스베가스의 도박사들’이라는 영화에 출연합니다. 문제는 아버지와 불륜을 일으킨 여배우가 졸리의 어머니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도 함께 같은 영화에 출연합니다.
    이런 기이한 상황을 어린 졸리가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우울증과 불면증이 생겼고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껴졌습니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그녀의 방황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두꺼운 입술과 긴 팔다리 때문에 놀림을 받았고 3년간 집단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당시 학교폭력과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으로 “왜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라고 말합니다. 졸리는 점점 악마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항상 칼을 몸에 지니고 다녔고 자해하며 평온을 찾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급기야 13세 때 첫 자살 시도를 합니다. 결국, 자퇴한 그녀는 14살 학교에서 만난 남자친구를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삽니다.
  

    얼마 후 학교로 다시 돌아간 졸리는 그 누구와도 유대감을 형성할 수 없었습니다. 극심한 우울증만이 그녀를 따라다녔습니다. 여기저기 모델과 저예산 영화에 출연하지만 하나도 잘 되는 게 없었습니다.
    이후부터 그녀는 “날 망가뜨리기 위해 노력했다.”라고 할 정도로 본격적인 막장 인생을 시작합니다.
 

 

    19살 때부터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헤로인을 포함해 가능한 모든 약을 접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여러 번의 자살 시도를 했고 자신을 죽여달라고 살인 청부까지 합니다. 그러다 20세 때 영화를 통해 만난 배우와 결혼을 합니다. 식장에 가죽바지를 입고 나오고 남편의 이름을 자신의 피로 새긴 티셔츠를 입고 등장합니다. 밀러와의 결혼생활은 3년 만에 종지부를 찍었고 이후에 다른 영화에서 만난 사람과 혼인하게 되는데 그때는 서로의 피가 담긴 목걸이를 메고 등장합니다. 식을 올리기 3일 전에는 자살 충동에 휩싸여 정신병원에 스스로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1999년 TV 미니시리즈 ‘지아’에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받게 됩니다. 역할은 마약 중독자 주인공이었습니다. 이후엔 ‘처음 만나는 자유’(1999)에서 정신병원에서 지내는 역할을 맡아 잘 소화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삶이 반영된 역할을 통해 그녀는 유명해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역시 망가진 삶을 이어갔고 기괴한 행동을 하며 다녔습니다. 2000년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는 친오빠와 진한 키스를 해서 할리우드를 발칵 뒤집어 놓습니다. 그렇게 연일 기삿거리를 제공하는 헐리웃 문제아로 낙인찍히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26세가 되던 2001년, 그녀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툼 레이더’ 촬영으로 캄보디아에 간 졸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충격적인 세상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전쟁으로 삶을 송두리째 잃은 사람들, 총탄으로 부모들을 잃은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울증으로 허우적거리는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그곳에서 졸리는 부모를 잃은 매덕스란 아이를 입양했고 그녀는 맹세합니다.

    “다시는 나 자신을 파괴하는 엄마가 되지 않겠다."

    졸리는 매덕스를 입양하는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는 아버지와 남편과 결별하게 됩니다. 주위에서도 매덕스의 좋은 엄마가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매덕스는 졸리를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그녀는 캄보디아에서 맹세한 것처럼 “나를 배부르게 한 것들은 나를 파괴한다.”라고 말하며 술, 담배, 마약 등 몸에 해로운 것들은 모두 끊었습니다. 그녀는 매덕스를 위해 “쓸모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족을 잃은 아이들을 도우며 살기로 합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삶의 이유를 찾은 것입니다.    

 

    그러자 그녀에게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되었고 활력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와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한 졸리는 브레드 피트와 결혼하면서 두 명의 아이를 더 입양하고 자신들이 낳은 아이들도 함께 키우며 더욱 안정감을 찾게 됩니다. 피트의 중재로 아버지와도 화해합니다. 이때 졸리는 찍는 영화마다 흥행하며 가장 몸값이 비싼 배우가 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게 남들에게 쓸모 있는 인생을 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탁하신 말씀을 따르며 살겠습니다. 쓸모 있기 위해 지금 이 삶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졸리는 수입의 1/3은 꼭 기부한다는 신념을 10년간 지켜오고 있으며, 매년 100억 원 이상의 기부와 난민구호를 위한 봉사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출처: ‘방탕해서 유명해진 안젤리나 졸리’, 유튜브 채널, ‘씨야무비’]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는 안젤리나 졸리의 인생 역전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망가진 사람일지라도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힘은 나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 살 때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우리도 세속과 육신과 마귀와 싸움을 해나갑니다. 그런데 그 싸움의 목적이 자기 자신이라면 그 싸움은 이길 수 없습니다. 내가 나와의 싸움을 반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과의 싸움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이겨서 봉헌할 누군가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졸리에게는 사랑하는 아이 매덕스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사랑할 수 있는 아이들과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모두 자신을 배신한다면 어떨까요?    예수님은 그런 시련도 겪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다 배신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렇더라도 예수님은 세상과 싸워 이길 의미가 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나를 위해 싸우면 결코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결국 나와의 싸움이 세상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미워한다고 말해도 “나는 나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조재형신부-

 

인터넷을 통해서 태극기와 일장기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태극기와 일장기는 둥근 원을 중심에 두었습니다원은 충만을 의미합니다다만 일장기는 둥근 원에 하나의 색이 있습니다하나의 색은 통일된 의견을 의미합니다하나의 색은 일사불란한 행동을 의미합니다하나의 색은 다른 색을 허용하지 않습니다하나의 색이 가지는 장점이 있습니다집중할 수 있고단합할 수 있습니다집중과 단합이 강해지면 밖으로 힘을 표현합니다그것을 잘 드러낸 것이 욱일기입니다역사는 일본의 힘이 강했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하나의 색이 가지는 단점도 있습니다변화에 대한 대처가 쉽지 않습니다다른 의견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을 이야기했는데 이제는 잃어버린 30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태극기는 둥근 원에 두 개의 색이 있습니다두 개의 색은 대립과 조화를 의미합니다두 개의 색은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을 의미합니다두 개의 색은 다른 것을 받아들입니다두 개의 색이 가지는 단점이 있습니다갈등과 대립으로 통일된 의견을 만들기 어렵습니다우리는 지구촌에 남은 유일한 분단국입니다지역학연세대이념의 갈등이 있습니다그러나 두 개의 색이 가지는 장점도 있습니다변화와 위기 앞에서 새로운 방법을 찾습니다우리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습니다코로나19의 위기에서도 방역이라는 모델을 만들어 냈습니다대립하면서 조화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서로 대립하는 것이 조화로운 까닭은둘이 합쳐서 하나의 전체가 되기 때문입니다한쪽은 다른 한쪽 없이는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됩니다익숙하고 친숙한 것만 추구하면 영감이 오지 않습니다이질적이고 낯선 것뿐이면 소통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대립과 조화를 통해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여정입니다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형제요어머니입니까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내 형제요어머니입니다.” 비록 죄를 지었어도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하느님께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고 받아주십니다우리는 그것을 루가복음 15장의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 알 수 있습니다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어떤 이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어떤 이에게는 예언을 하는 은사가어떤 이에게는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가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교회는 공의회를 통해서 새로운 도전과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는 대립과 조화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여정이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예술가가 될 수도 있고소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삶의 소비자는 인생에서 아무것도 깨달을 필요가 없습니다그저 자기 삶을 우연에 맡기며 살아갑니다그러나 삶의 예술가는 아름다움의 내적 법칙에 관심을 둡니다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습니다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습니다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그러나 용기를 내어라내가 세상을 이겼다.”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짧은 지상 생활 여정을 걸어가시는 동안 당신의 의식 속에 언제나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확신이랄까, 신조가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낮에는 화사한 한송이 꽃처럼 미소짓다가도, 홀로 마주 앉는 밤이 되면 사무치는 외로움에 눈물 흘리는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마음가짐입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떠나간다 할지라도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이 세상 사는 내내 처절한 고독과 심연의 슬픔, 혹독한 고통과 시련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보다 더 큰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어디 있을까 생각합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언제든, 어디를 가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동행하신다.”

  

덧붙이는 예수님 말씀은 더 큰 위로로 다가옵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복음 16장 33절)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을 영위하시는 짧은 기간 내내 적대자들의 공격과 위협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은 호시탐탐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때 그들은 노골적 살의를 드러냈습니다. 합심해서 예수님을 벼랑끝까지 몰고가서 아래로 떨어트리려고 기를 썼습니다. 

 

그런 고초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그리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현존 의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머릿 속에는 ‘내가 어디를 가든, 어떤 어려운 순간에 처하든, 하느님 아버지께서 함께 하실 것이며, 나를 지켜주실 것이다.’라는 확신이 올곧게 서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공동체의 현실을 들여다봅니다. 함께 살아가지만 진정으로 함께 살지 않습니다. 한 지붕 아래 살아가지만 철저하게 외톨이로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없구나! 철저하게 나는 혼자로구나.’라며 절규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건네는 주님의 말씀이 참으로 큰 위로로 다가옵니다. “네 어미 네 아비가 너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나는 항상 너와 함께 걸을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니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너무 너무 외로워서 홀로 울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충만한 위로를 받는 우리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설 때입니다. 다가가서 크게 외쳐야겠습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 좋으신 주님께서 항상 그대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현존하시고 동행하신다는 진리가 와닿지 않는다면, 주님을 대신해서 내가 그대와 함께 하겠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영근신부

 

그동안 부활시기 내내우리는 예수님의 고별담화인 요한복음 13장 후반부부터 14, 15, 16장의 다락방에서의 유언말씀을 들었습니다오늘 복음은 그 마지막 장면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약해질 때가 올 것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혼자 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요한 16,32)

 

그렇습니다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좌절하고 절망할 것입니다의혹에 휩싸이고 혼동에 빠질 것입니다각자 제 갈 길로 가도 말 것입니다어쩌면우리의 믿음은 약하고 더듬거리고 무지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사실우리의 강함은 우리의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그 믿음의 대상이신 주님께 있을 뿐입니다그러니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우리에 대한 주님의 믿음이 우리를 지탱해 주고 있습니다또한 “우리가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지탱한다.”(루돌프 스테르텐브링크“하늘은 땅에서 열린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33)

 

그렇습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남겨 주시기 위해서우리의 연약함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평화그 어떤 곤란과 슬픔 속에서도 하느님께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을 말합니다. ‘평화란 단순히 갈등이나 시련이나 고통이 사라진 상태분열이나 전쟁이 없는 상태혹은 그 어떤 낙담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오히려 그러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을 말합니다분명예수님께서는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요한 16,33)이라고 말씀하십니다그러니당신이 주시는 평화를 말씀하시는 것이지우리가 만드는 평화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그 어떤 좋은 환경이나 자기만족에서 얻어지는 평화가 아니라오로지 ‘당신 안에서’ 얻게 되는 평화를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데서나 평화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특히 자신의 마음 안에서 찾는 마음의 평화가 아닙니다오로지‘그분 안에서’ 평화를 찾는 일입니다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주시고자 ‘당신 안에’ 마련한 평화를 찾는 일입니다사실당신이 주시는 평화는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우리에 대한 주님의 믿음이 주는 평화입니다.

오늘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2)

 

이제 그분이 주신 평화로우리도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주님!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옳고도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죄마저 뒤집어쓰고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지는 무능이 이기는 전능임을 알게 하소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힘이 없어서가 아니라사랑하기에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이 이기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자신을 이기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세상을 이기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아멘

 용기를 내어라

 -반영억신부-

 

사람의 약점 중 하나가 ‘따뜻하면 몰려들고 추우면 버리는 것’입니다. 안 그런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되는 것을 보면 인간은 분명 의지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소위 줄서기를 잘못하면 낭패를 봅니다. 굶주릴 때는 달라붙고 배부르면 떠나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인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고 신앙을 고백하자마자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믿음을 고백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이 흔들릴 것을 아셨기에 당신이 유다인들에게 체포될 때 제자들이 도망갈 것이라고 예고하신 것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여 감동을 주더라도 손발에 머물러 증거까지는 갈 길이 멀기만 합니다. 믿음은 아직도 더 무르익어야만 합니다.

 

이제 곧 모두가 다 각자의 유익한 곳으로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혼자가 아니십니다. 아버지께서 항상 그분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살며 아버지와 하나입니다. 요한 복음 10장38절에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이듯, 제자들과 예수님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 길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언젠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하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처럼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열매는 손발에서 맺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하시며 시련에 굴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정신을 잃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세상을 이긴 예수님을 바라보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용기를 내어라’고 하신 예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용기가 있는 곳에 희망이 있고, 희망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있고 하느님도 계십니다”(성 도미니꼬). 세상이 주는 승리와 주님께서 보시는 승리는 다릅니다. 춥다고 버리지도 말고 배부르다고 떠나지도 마십시오! 흔들림 없는 믿음과 소신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굳건한 믿음은 시련 속에서 빛납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속담의 의미를 헤아려보니다. “조금만 더 참고 이겨내면 하느님의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위로를 얻기 전에 하느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찾아 나서는 일부터 해야 할 때입니다”(박병규).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송영진신부-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2-33).”

 

1)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 때의 상황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마르 14,50).

그 모습은 예수님을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살 길을 찾아서 흩어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흩어진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모여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들은 처음에는 겁에 질려서 달아나고 흩어졌지만,

시간이 좀 지난 뒤에는 다시 모여서 함께 지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모여 있었던 장소는

아마도 최후의 만찬 때 사용했던 그 방이었을 것입니다.)

“이미 왔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제자들의 마음이 이미 흔들리고 흩어져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제자들이 달아났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루카복음에는 제자들이 달아났다는 말이 없고, 요한복음에는 그들이 달아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내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이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고

당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8,8-9).”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혼자 버려두고 달아난 것은 맞지만,

그 일은 제자들을 보호하려는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이라는 것이

복음서 저자의 해석입니다.>

 

2) 제자들이 흩어질 것이라는 말씀을, 신앙인들이 겪게 될 박해를

예고하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사도 8,1ㄴㄷ).”

스테파노 순교 후에 큰 박해가 시작되었고,

그 박해 때문에 신자들이 모두 흩어졌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박해자들이 보기에는) 신자들이 사도들을 예루살렘에 버려두고

저마다 제 살 길을 찾아서 달아난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또는 ‘신앙의 대상’인 예수님을 혼자 버려두고

모두 흩어진 것으로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박해 상황을 예고하신 말씀으로 생각한다면, “이미 왔다.” 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은 늘 박해와 환난을 겪는 생활이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떠나서 흩어진 신자들은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4).”

박해 때문에 신자들이 흩어졌지만, 그것은 예수님과 사도들을 버려두고

저마다 제 살 길을 찾아서 간 일이 아니었고,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 간 일이었습니다.

박해가 오히려 더 널리 복음이 선포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그 일도 역시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제자들(신자들)이 흩어진 일이 겉으로 보기에는(박해자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제자들한테 버림받은 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버림받은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역사의 한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계신다는 점에서도 혼자가 아니지만,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혼자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메시아’ 라는 예수님의 신원에는 변함이 없다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당신의 구원 사업은 차질 없이 진행된다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 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된다는 말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패배가 아니라 부활과 승리의 앞 단계입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라는 말씀은,

우리 자신의 ‘믿음의 말’로 삼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 라고 약속하셨고, 승천하시기 전에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떤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 혼자라는 생각, 또는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고, 그런 생각이 고난과 시련 자체보다 더 우리를 힘들게 만듭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신다.” 라고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4)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을 이길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세상을 이겼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승리는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승리를 향해서 가는 일입니다.

그 믿음과 희망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누구나 사는 동안 여러 가지 고난을 겪지만,

믿음과 희망으로 평화를 누리는 사람에게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됩니다.

물론 예수님의 승리처럼 우리의 승리도 확정되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끝까지’ 충실하게 살아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승리에

참여하게 되고,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끝나버립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믿음이 흔들리거나

주저앉아서 우는 것은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정말로 부끄러운 일은, 힘들다고 포기해 버리는 일입니다.)

 복음: 요한 16,29-33: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조욱현신부-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이해하지 못하였다.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30절)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께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분은 제자들이 묻기도 전에 그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님은 사람의 생각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30절) 한 것이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31절)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심으로써 제자들이 나약한 어린애라고 하시는 것이다. 앞에서 그들은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으며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제자들이 스승님께서 잡혀가시자 행동으로 그분을 버렸으며, 믿음마저도 버렸다. 제자들은 혼란에 빠졌고 지금 믿는 것조차 버렸다. 제자들은 완전히 절망에 빠져 자기들의 믿음이 죽게 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그분을 떠나게 되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만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32절)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33절) 제자들은 총독들과 임금들 앞으로 끌려가 온갖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그분의 이름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고백은 언제나 지배자들의 격노를 불러일으켰다.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어도 사악한 범죄자를 대하듯 그들에게 온갖 형벌과 고문을 가한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순교자들은 언제나 평화를 누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는 제자들이 그분 안에 머물며 평화를 누리게 된다. 그때 그들은 환난을 받으면서도 그분을 버리지 않았다. 이 고을 저 고을로 피해 다녔지만,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 않았다. 박해를 당하지만, 그분에게서 달아나는 도망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을 피난처로 삼고 그분 안에서 평화를 누렸다. 이 평화는 끝이 없을 것이고 모든 선행과 선의는 이 평화를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33절) 하신 덕분에 우리는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용기백배한다. 그리고 그분은 참으로 세상을 이기셨다. 그래서 우리는 살게 되었다. 우리가 말씀을 모른다는 것은 두려움 때문에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고 그분을 팔아넘기는 것은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덕을 위해 이겨낸 모든 환난의 결과는 기쁨이며, 모든 수고의 결과는 안식이며, 모든 치욕의 결과는 영광이다. 즉 덕을 위한 모든 고난의 결과는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영원히 그분과 함께 세상을 이기며 참된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33)

-한상우신부-


드디어 꽃을
피어내는
5월의
들꽃들에게서
용기를 새롭게
만난다.

날마다
생명을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생명은
사랑이다.

사랑의 길은
용기의 길이다.

돌보고 사랑할
용기가
필요한 우리들
삶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용기가 필요하다.

하느님께
있는 그대로의
마음으로
다가갈
용기말이다.

자아의 닫힌
문을 열고
나올 용기의
여정이 신앙의
여정이다.

신앙이란
무엇보다도
하느님 말씀에
귀기울이는
용기이다.

용기는
판단과 단죄가
아니라
이해하고
사랑하는
용서이다.

용기는 용서로
나가야한다.

용서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시다.

나를 용서하는
사람이 너도
용서할 수 있다.

세상을
용서로 이기신
주님이시다.

용서와 용기로
보듬어야 할
세상이다.

한 사람의
용기가
우리모두의
용기가 되었듯

우리모두를 위한
용기이다.

우리모두를
선(善)으로
이끄시는
용기이다.

들에 핀
들꽃들까지
돌보시는
하느님이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이야기하십니다.

복음 대목에는 "그러나"라는 표현이 세 번 나옵니다. 이제는 스승을 믿는다는 제자들에게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 둘 거라고 하시고, 그렇게 제자들이 떠나도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마지막으로는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겠지만, "그러나" 용기를 내라고 격려하시지요. 당신이 세상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에 담긴 반전의 의미에 주목합니다. 인간사 세상 눈에 좋다고 늘 좋을 수만도 없고, 힘들다고 영영 그렇게만 힘들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걸 좀 살아본 우리는 체험으로 알지요. 영적 세계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유혹이 선을 가장해 오기도 하고, 은총이 고통의 포장지에 싸여서 오기도 하니까요.

믿음을 고백한 제자들이 곧 스승을 버린다는 사실에 제자들도 적이 놀랐을 겁니다. 아마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강경하게 부인하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이는 곧 현실이 됩니다. 그만큼 인간은 약하고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주님을 떠나도 그분은 결코 혼자가 아니십니다. 성자 예수님은 늘 아버지의 현존 가운데를 거니셨으니까요.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에게 머물러 온전한 충만함 가운데 하나이십니다. 이 끊어낼 수 없고 희석될 수 없는 유대가 곧 사랑의 성령이시지요. 사람이 떠난 자리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이 단단한 결속을 더욱 확고히 느끼실 겁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의 길을 가셨듯이 제자들도 그러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주의를 둘러봐도 세상에 너무나 많은 고통이 널려 있음이 보입니다. 참 마음이 아프지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 미얀마의 군사 쿠데타, 테러, 강대국의 자국이기주의, 혐오 범죄, 직장과 길거리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고들, 가정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죽음, 생명 경시와 포기, 기아와 질병, 차별과 착취, 사기 등등 이루 다 나열할 수 없는 고통스런 현실이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더 슬픈 사실은 우리에게 전해지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른 채 덮이는 훨씬 더 많은 악이 존재하지요. 과연 악이 득세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통의 극한을 품으신 분의 말씀입니다. 우리 눈에는 악이 마치 세상을 점령하고 곳곳에서 어둠과 증오의 힘을 과시하며 세력을 넓히는 듯 보이지만, 결국 주님께서 승리하시고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것임을 힘주어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희망을 잃지 말라고요. 믿음에 희망을 더하고, 희망에 사랑을 더해 덮쳐오는 폭풍과 풍랑을 견디라고요. 당신께서 세상을 이기셨듯이 우리도 승리할 것이라고요.

제1독서에서는 사도들의 선교 활동이 펼쳐집니다.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사도 19,6)
에페소에서 요한의 세례를 받고 주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들이 바오로를 만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바오로의 안수로 그들은 그 자리에서 성령을 받게 되지요.

사도들이 비록 세계 각지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지만 성령은 시공간을 초월해 모든 이와 함께하시며 하느님의 일에 협력하십니다. 에페소에 간 바오로 사도뿐 아니라 코린토에 있는 아폴로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주님에게서 파견을 받아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 누구도 혼자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함께하시고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며 성령께서 함께하시니까요.

"그들은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사도 19,7)
사도행전 저자는 이처럼 에페소에서 성령의 안수를 받은 이들의 수를 언급합니다. 열둘은 이스라엘 지파의 숫자이며 예수님 제자의 수로써 완전함을 가리킵니다. 이제 세상 어디서나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주님께 선택된 새 이스라엘이 구성되고 확장될 것임을 시사하지요. 열둘은 구약의 하느님 백성으로 고착되어 화석이 되어버린 숫자가 아니라 온 세상의 복음화를 전망하는 가능성의 수입니다.

세상 곳곳에 복음의 빛이 스며들수록 악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자기 영역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힘을 과시할 겁니다. 영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은 분명 선과 악의 각축장이지요.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외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의 존재라도 미약하나마 이 세상에서 선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 서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결코 우리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니, 우리는 악에게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성부, 성자, 성령의 현존 안에서 희망을 품고 용기 내어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우리와 공동체와 세상의 평화를 위해, 약한 이들과 차별받는 이들의 안전을 위해,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주님의 기쁨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나아갑시다.    

 승천의 승리

 -김찬선신부-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이 승천하신 뒤 제자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겠지만

용기를 내라고 하시면서 당신이 세상을 이겼다고 하십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고 제자들도 고난을 겪는데도

당신이 세상을 이겼다고 하시는데 이 승리는 어떤 승리입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승천의 승리>입니다.

주님의 승천은 세상에서 패하고 하늘로 도망치신 것이 아니라

승천하심으로써 오히려 세상을 이기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말하자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의 승리라고 하는데

그런 뜻이 없지 않습니다.

 

어른이 애와 싸우면 그 자체로 지는 것이지요.

화를 내면 그것은 싸우기도 전에 진 것이지요.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으면 땅을 초월한 것이고,

세상이 아무리 붙잡고 얽어매어도 매이지 않고

하늘로 오르면 그것이 세상을 승리한 것이지요.

 

높이 나는 독수리는 강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말을

올해 들어서만 여러 차례 했는데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을 초월하여 하늘에 있을 때 그것이 세상 승리입니다.

 

한 가지 더. 세상에서 살지만 그리고 수난을 당하지만

평화로울 때 그것이 또한 세상 승리입니다.

 

그러니 미움과 모욕과 수난을 당할 때 

마음의 평화가 깨지면 세상에 지는 거겠지요?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5월 25일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