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14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마티아 사도는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배신자 유다의 자리를 메우려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사도로 뽑힌 인물이다(사도 1,21-26 참조). 그는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부터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목격한 이로 예수님의 일흔두 제자(루카 10,1-2 참조)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마티아 사도의 활동과 죽음에 관해서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으나, 예루살렘에서 선교 활동을 펼친 데 이어 이방인 지역, 특히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하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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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요한 15,9-17)
This is my commandment:
love one another as I love you.
No one has greater love than this,
to lay down one’s life
for one’s friends.
You are my friends
if you do what I command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주님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사도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들의 첫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뜨거운 무엇인가를 느꼈고 이분이야말로 구세주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자신들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고,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였으며, 나중에 자신들에게 돌아올 부와 명예에 대한 자리싸움(마르 10,37 참조)을 하기도 하고, 마침내는 죽을 상황에 있는 스승을 버리고 달아나기도(마태 26,56 참조) 하였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나의 생각을 예수님의 생각이라 밀어붙이며 행동하고, 때로는 신앙이 부담스럽고 힘들다고 느껴지면 달아나기도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던 첫 마음은 어디에 갔나요? 정채봉 시인은 ‘첫 마음’이라는 시에서 “세례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가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라고 자신의 신앙 체험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첫 마음을 유지하고 간직하기에 우리는 너무 나약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잘 아시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하십니다.
첫 마음을 되찾는 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고 또 다른 이들이 용서를 청하면 그것을 받아 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참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한때 일만 시간의 법칙이 사람들 사이에 퍼졌던 적이 있습니다. 1993년 미국 심리학자 앤더슨 에릭슨이 주장한 이론으로 무슨 일에서든지 일만 시간을 사용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사람들의 의문을 품게 했습니다.
일곱 시간 공부한 사람보다 한두 시간 공부한 사람이 더 높은 점수를 얻고,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아주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앤더슨 에릭슨은 자신의 이론을 수정했습니다. 시간보다 발전에 신경 써야 한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무조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어제보다 나아질까?’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숫자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방법과 질’을 의식적으로 생각하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예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꾸준히 기도와 묵상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만 시간이 지나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하느님과 같아져서 자기 자신도 전능한 모습을 가질 수 있을까요?
단순히 습관적으로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어제보다 더 나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인가?’이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방법과 질’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사랑의 삶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하며, 그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가장 큰 사랑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라고 하시면서, 주님께서 먼저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으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런 사랑을 보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종종 방송에서 살신성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훌륭한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쓸데없는 행동을 하고 있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면서 우리도 그러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몸으로 보여주신 것은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어제보다 더 나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요? 사랑의 길을 가는 것뿐, 다른 정답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작은 슈퍼마켓에서 갑자기 정전으로 불이 꺼진 것입니다. 지하에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력 회사에서는 언제 복구될지 모른다는 말만 할 뿐이었습니다. 보이지 않으니 물건을 훔쳐 가도 누군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바로 그때, 슈퍼마켓 직원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정전으로 불편하게 해 죄송합니다. 전기가 언제 들어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니, 바구니 안에 담은 물건은 그냥 집으로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그 값은 여러분이 원하는 자선단체에 기부해 주세요.”
아무도 물건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은 물건값을 자선단체에 기부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슈퍼마켓은 큰 손해를 보았을까요?
그날 나간 상품 금액은 4,000달러였습니다. 그런데 이 해프닝이 언론에 알려졌고, 일주일간 언론에 노출된 회사의 긍정적인 이미지로 얻은 광고 효과는 자그마치 40만 달러였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손해일까요? 이득일까요? 나눌수록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행복한 자녀로 키우고 싶은가, 성공한 자녀로 키우고 싶은가?
-전삼용신부-
오늘은 성 마티아 사도 축일입니다. 성 마티아는 가리옷 유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사도입니다. 그리고 성 마티아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사도의 자리를 교회가 스스로 다시 채울 수 있음을 보여준 인물입니다. 교회의 권위가 곧 그리스도의 권위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도인 것입니다.
성 마티아 사도는 또한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특권을 잃게 된다는 것도 보여줍니다.
가리옷 유다는 사도의 위치에 있었지만,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그리스도를 배신하며 사도의 권위를 잃었습니다. 어떠한 자리에 있든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자리가 요구하는 소명을 채워야 합니다.
끔찍한 상상이겠지만 만약 영화 ‘에일리언’에서처럼, 태중에 있는 아기가 부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하게 된다면 부모는 그 아기를 더는 키울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러나 자녀로서의 해야 할 일만 할 수 있다면 그 자녀는 부모의 모든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모든 것을 해 줄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부모도 자녀에게 사랑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만약 우리가 당신의 ‘계명’(뜻)을 지키기만 한다면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기 때문에 당신께 청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시려는 이유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자녀의 행복은 부모로부터 사랑받는 것에 있습니다. 자녀가 사랑스럽기만 하면 부모는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줍니다. 하느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가 사랑만 하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기 때문에 마치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느낀 것처럼 그런 천상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아버지로서 우리의 모든 청을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뉴스를 보다보니 이번 어린이날 어떤 아이가 1억 원이 넘는 작품 위에서 놀다가 작품을 훼손한 일이 있었습니다.
전시물은 한국화의 거장인 박대성 화백의 작품이었습니다. ‘김생 임서’라는 작품인데, 김생의 글씨를 따라 쓴 작품입니다. 뒤늦게 도착한 아버지는 아이가 노는 것을 보고는 말리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사진까지 찍어줍니다. 박대성 화백이 어린이는 다 그런 것이라며 이해했기에 망정이지 아버지는 큰돈을 물을 뻔하였습니다.
부모는 왜 아이를 말리지 못했을까요? 아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그렇게 계속 잘못 나가면 결국 아이는 자신을 그렇게 키운 부모를 원망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게 만들기 위해 부모는 아이에게 벌을 줄 수도 있습니다. 자녀 이기는 부모 없다고는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존중의 법을 어긴다면 부모도 자녀의 모든 청을 다 들어줄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그러면 자녀는 슬퍼질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하늘의 부모인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해 주시고 싶으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한다면 모든 청을 들어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결국 원하는 일을 하나도 이룰 수 없게 되고 그러면 기쁘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사랑-기쁨-평화’로 나가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으면 기쁨도 평화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자산어보’(2021)는 천주교 박해로 흑산도로 유배 온 ‘정약전’과 청년 어부 ‘창대’의 갈등과 우정이 그려집니다.
정약전은 바다 생물에 관한 책을 써서 세상에 유익한 일을 하려 하고 창대는 글을 배워 세상에서 출세하려 합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란 책을 내고 세상을 하직합니다. 12년간의 노력으로 탄생한 자산어보는 세계 최초로 수산 동식물을 나름의 기준으로 분류한 책이고 많은 이들에게 도움과 영감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창대는 과거에 급제하여 탐관오리들의 악행을 보며 가슴 아파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물론 그런 신물이 나는 세상을 등지고 다시 흑산도로 돌아오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정약전이 마티아 사도로 비유된다면 세상 출세를 쫓으려 했던 창대는 유다의 모습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기쁜 삶일까요? 이웃에게 도움을 주려는 마음으로 사는 삶일까요, 아니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삶일까요? 같은 이슬이라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소는 세상에 어떠한 이익을 줄 것인지만을 생각하는 사람을 상징하고 독사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이익을 챙길 것인지만을 생각하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소와 같은 인물이 마티아였다면 반대로 뱀과 같은 인물은 가리옷 유다였습니다. 세상은 사랑으로 창조되었기에 사랑으로 살아야 사랑받고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더 말하자면, 사실 사랑으로 사는 사람들이 더 성공합니다.
일본 최고 부자인 손정희 회장이 첫 딸을 낳았을 때 길어야 1년밖에 못 산다는 병을 앓게 됩니다. 그런데 그 첫 딸이 그가 세상 사람을 사랑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첫 딸의 미소를 보고는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도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먼 나라의 아이에게서도 자기 딸 아이의 미소가 생기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랑이 생긴 것입니다. 그랬더니 딸의 병이 나았고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국 최고 부자였던 록펠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만 알 때는 병을 얻어 1년밖에 못 산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한 여자아이의 수술비를 지원하고 그 아이의 감사 편지를 받고는 삶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자선재단도 만들고 나누는 일에 기꺼이 참여하게 됩니다. 병도 나았고 장수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책에 보면 성공하려면 자신의 이익이 아닌 타인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새로운 좋은 아이디어나 발명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이 생각만 하게 된다면 하느님은 실수를 통해서라도 그 바람을 들어주십니다. 그러면 기쁘게 됩니다.
우리는 자녀를 소가 되게 키울 것입니까, 아니면 뱀이 되게 키울 것입니까?
자녀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나 결국 행복한 사람이 성공합니다.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넷플렉스에서 ‘시지프스’라는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예전에 ‘터미네이터’라는 영화처럼 미래에서 사람이 현재로 온다는 설정입니다. 터미네이터와 같이 시지프스에서도 미래는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삶은 현재보다 궁핍합니다. 자연은 파괴되었고, 문명도 파괴되었으며, 먹을 것도 없는 미래입니다. 그런 미래에서 성공확률이 5%도 안 되는 위험을 감수하고 현재로 사람들이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미래의 삶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미래에서 온 사람 중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에 와서 풍족하게 사는 것입니다. 미래에서 온 사람은 정보를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잘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주식, 복권은 미리 결과를 알면 엄청난 수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난의 현장도 미리 피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현재를 통해서 미래의 고통을 없애려는 사람입니다. 전쟁의 원인을 없애려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현재에서의 풍요와 안락함은 가치가 없습니다. 전쟁을 피할 수 만 있다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면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드라마에서 몇 가지 질문이 나옵니다. ‘어디에서 왔습니까?’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언제 왔습니까?’라는 질문도 있습니다. 어디에서라는 말은 공간의 문제입니다. 언제라는 말은 시간의 문제입니다. 공간과 시간은 우리의 존재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어디에서 왔든지. 언제 왔든지 우리에게 주어지는 질문이 하나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무엇하러 왔습니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오셨는지 잘 모릅니다. 가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셨는지 잘 모릅니다. 아직 가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부활로 꽃이 핀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으셨고,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전에 박도식 신부님께서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라는 제목으로 교리서를 출판하였습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현대인에게 가뭄의 단비와 같은 책이었습니다. 신앙인들에게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려주는 이정표와 같은 책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과거와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느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를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으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난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사도를 선출하자고 제의를 했습니다. 사도들은 기도를 하였고, 마티아가 유다의 자리를 대신 할 사도로 선출되었습니다. 마티아 사도는 교회 공동체에서 하느님을 위한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시는 일이 있다면 마티아 사도처럼 우리들도 충실하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받아 들여야 하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권고나 부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니 겸손하게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았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알렐루야.”

내 기쁨은 주님, 나는 그 길을 따라 주님께 달려가네!
-양승국신부-
기쁨의 종류가 참 다양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일차적 욕구 충족에서 오는 인간적이고 세상적 기쁨,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기쁨도 충분히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기쁨입니다.
개인적으로 언제 진정으로 참 기쁨을 느꼈던가 돌아봅니다. 즐기는 운동이나 취미활동에 몰입할 때의 기쁨도 컸습니다. 목표했던 바를 성취한 것에 대한 기쁨도 컸습니다.
그런데 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약점이나 한계를 조금씩 극복해 나가는데서 오는 기쁨, 좀 더 쉽게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 있게 된 데서 오는 기쁨, 손톱만한 봉사지만 이웃들에게 작은 기쁨을 선물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기쁨, 사목적 헌신과 그 결과에 따른 보람에서 오는 기쁨...
결국 참된 기쁨은 육체적인 기쁨, 세상적인 기쁨을 넘어서는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재의 심연에서 느끼는 기쁨,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기쁨, 영혼과 정신의 기쁨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최종적으로 추구해야 할 기쁨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기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복음 15장 11절)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란 표현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 존재 자체가 주님께 기쁨이랍니다. 그분께서 간절히 바라시는 바가 기쁨 충만한 우리의 삶이랍니다.
성경 전반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는 기쁨과 환희입니다. 한 인간이 구원과 자유를 선물로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을까요?
구원과 사랑이 선포되고 체험되는 곳에서는 기쁨이 샘솟습니다. 우리는 교회 전례 주년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축제를 지냅니다. 예수님 관련 축일들, 성모님 축일들, 여러 성인들의 축일...이런 축일들은 우리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기쁨이 얼마나 본질적인 측면인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기쁨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은총이며, 성령의 열매이며, 주님의 현존과 다스림이 가져다주는 행복입니다. 기쁨은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는 동시에 충만케 해줍니다. 인간을 고무시키고 치유시킵니다. 인간 스스로를 완성시켜나가게 합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어떠한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공동체 안에 기쁨이 있습니까? 구성원들은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그 기쁨은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며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 자체로 기쁨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까?
“내 기쁨은 주님, 나는 그 길을 따라 주님께 달려가네. 기쁨은 주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나를 돕기 때문에, 그 길은 아름답다네.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아무 주저없이 내게 당신을 계시하시네. 그분은 친구처럼 자신을 낮추시네. 내가 그분께 기댈 수 있도록 그분은 나와 같은 존재 되시네. 그분은 나의 자비시므로 그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네.”(솔로몬의 찬미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라
-이영근신부-
오늘은 사도 마티아 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가리옷 유다의 빈자리를 마티아가 채우게 되는 선출과정을 보여줍니다. 곧 하느님께서 뽑으신 이를 받아들여 ‘사도단’이 채워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가 부활의 증인으로 직무를 맡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삼으십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불렀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5-16)
예수님께서는 오늘, 인간을 당신의 친구로 만드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총입니다. ‘친구’란 ‘깊은 친교’를 공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모세가 하느님과 친구처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였듯이, ‘깊은 관계’의 친교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으로 맺는 친교입니다. 하느님과의 영으로 맺는 깊은 친교는 우리 사이의 깊은 친교를 이끕니다. 곧 우리를 서로 친구가 되게 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영으로 맺는 ‘깊은 친교’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로 삼은 이유를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그러면,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무엇인가? 곧 당신이 주신 ‘친구’라는 은총의 영으로 맺어야 하는 열매는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그것은 ‘사랑’이라는 열매입니다. 곧 ‘사랑’은 친교의 영이 맺는 열매입니다(갈라 5,22-23,사랑,기쁨,평화,인내,호의,선의,성실,온유,절제).
그렇습니다. 바로 이 ‘사랑’이라는 열매만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는 열매입니다. ‘사랑’은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1코린 13,8.13.).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이토록, 신비롭게 당신과의 영원한 사랑 안에 우리를 가두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7)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되고, 친구라는 은총이 실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4)
이는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이토록 더불어 살아야 하는 까닭도 서로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타인은 경쟁자이이거나 적이거나 자신을 채우는 이해관계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헐뜯고 비난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어서라도 위해주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 온전한 모습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봅니다. 그것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입니다.”(요한 15,13).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주님!
저는 분명, 이미 사랑을 먹었습니다.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당신의 호의를 입었습니다.
먹고서도 먹은 줄을 모르는 무지를 깨우치소서.
더 이상은 그 사랑을 내팽개치거나 무시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제 삶이 온전히 당신의 사랑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송영진신부-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1)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고 제자가 된 일은
예수님께서 주신 은총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그 은총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 은총은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에게도 해당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은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4-5).”
그런데 자기가 종교와 신앙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생각은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를, 또 여러 주님들 가운데 한 분을
자기 권한으로 자기가 골라서 선택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참 종교는 하나뿐이며 참 주님은 한 분뿐이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지 않으면 우리가 주님을 만날 수도 없고,
또 우리가 주님을 알 길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기준으로 하면 그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사람에게는 주님을 고르고 선택할 권한이 없습니다.)
또 그 생각은 “내가 선택한 것이니 버리는 것도 내가 한다.” 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도 ‘틀린 생각’입니다.
(사람에게는 자기 마음대로 주님을 버릴 권한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셨다는 말은,
어떤 사람은 부르시고, 어떤 사람은 부르시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집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지만,
응답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처음부터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처럼 되어버립니다.
부르심을 안 주셔서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주시는데도 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실 사람을 처음부터 따로 정하셨다면,
그것은 구원할 사람과 구원하지 않을 사람을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이고,
그렇다면 신앙생활을 할 이유가 없게 됩니다.
만일에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면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고,
멸망이 예정되어 있다면 신앙생활을 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에 응답하고 신앙인이 되었더라도 이 응답은 한 번 하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평생 날마다 계속해야 하는 일입니다.)
2)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제자들은 임무 수행을 통해서 ‘구원’이라는 열매를 얻게 됩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복음을 전해 듣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이기도 하고,
전해 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 자신들을 구원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도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구원’이라는 열매를 얻기 위한 생활입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신앙생활의 일부입니다.
그냥 일부가 아니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기서 ‘언제나’ 라는 말은, ‘구원’이라는 열매의 ‘영원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하고,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라는 명령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맺는 열매의 영원함이 강조되어 있는 것은, 즉 우리가 얻는 구원과
생명의 영원함이 강조되어 있는 것은, 신앙생활이 헛일로 끝나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3)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앞의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약속을 반복하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요한복음 15장 7절,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라는 약속을 반복하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1) 우리가 가장 먼저 원해야 할 것과 청해야 할 것은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은 바로 그것을 얻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이유도 없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이유도 없습니다.)
7절의 “무엇이든지” 라는 말은, “아무거나” 라는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은 구원과 생명,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들,
즉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들, 인내심, 의지력, 용기 등입니다.
(2) 아버지께 청하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생활을 하면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 예수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뜻도 우리의 구원입니다.)
7절의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이라는 말씀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라는 말씀을 풀어서 표현하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바치면,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기도하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기도는 언제나 들어 주십니다(요한 11,42).
(3)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너희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다.” 라는 약속이고,
7절의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라는 약속을 반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전체 뜻을 생각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라는 말씀만 따로 떼어서 “누구든지 믿음을 갖고 간절하게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다 얻을 수 있다.”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해야 하고, 그 뜻을 이루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생각해야 하고,
그 뜻을 충실하게 ‘삶으로’ 실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복음: 요한 15,9-17: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조욱현신부-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라고 하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우리가 사랑의 관계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없이는 은총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그분과 튼튼히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 위에 돌아가셨듯이 우리의 사랑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계명이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스러운 자녀'로, '친구'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을 늘 새롭게 의식하려는 삶 속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계명을 잘 지키려 할 때 다른 계명들도 잘 지킬 수 있다. 이 사랑의 계명 안에 다른 모든 계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 이것은 사랑의 의무에 대한 완벽한 표현이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보여 주신 사랑으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심으로 아버지께 사랑을 드렸다. 이 사랑을 우리도 형제들에게로 향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14절) 하셨다. 우리가 그분의 친구라면, 우리도 그분과 같은 사랑을 하여야 한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의 본보기를 보여 주셨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16절) 그러므로 이런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내야 한다. 참된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칭송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심 없이 주고 또 아무런 대가도 없이 베풀 줄 아는 것이다. 이 사랑은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우리의 사랑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화시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시키며 모두를 그리스도화로 이끄는 사랑이다.
오늘 복음은 '선교'에 관한 말씀으로 마치고 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16절). '열매를 맺는다.'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사람 가운데 선포되고 널리 퍼져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끼리 주고받는 사랑으로는 족하지 않다. 우리의 사랑이 보편적인 표지가 되어, 마침내 모든 사람이 말로만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형제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끔 하여야 한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남아있어 하느님 아버지와 깊이 일치되고, 주님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과 은총을 받으며,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에게 열린 신앙인으로 썩지 않을 열매를 맺는 삶이 되어야 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인간의 노력이 드러납니다.
"그 자리에는 백스무 명가량 되는 무리가 모여 있었다."(사도 1,15)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마티아 사도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뽑힌 열세 번째 사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죽음의 길을 간 유다 이스카리옷의 자리를 채웠지요.
사도들은 자기들 공동체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계승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믿기에 그 수를 채우고자 합니다. 당시 모인 사람들에 대해 성경 저자가 "백이십 명"가량이라고 구체적 수를 기술한 이유는, 완전한 수인 '열둘'을 '열 차례' 되풀이 더한 수로써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이 완전체에 가까웠음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었던 시대에, 스스로의 죄악으로 소멸 위기에 처했던 벤냐민 지파를 되살리기 위해 열한 지파가 모여 고민하고 결정했던 자구책이 떠오릅니다.(판관 21장 참조) 현대를 사는 우리의 눈에 이해나 용납이 불가한 방식이기는 하나, 그만큼 열두 지파의 존속과 유지가 중요했음을 보여 주지요.
"우리와 함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사도 1,22)
하지만 지금 사도들은 그 목적뿐만 아니라 방식에 있어서도 주님의 선하신 뜻을 추구하고 있기에 구약 판관시대의 사건과 명백히 결을 달리합니다. 무엇보다 "부활의 증인"을 간청한다는 사실이 중요하지요.
그들이 열둘을 채우려는 의지는 단지 숫자를 유지하고 존속시키는 의미를 넘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의 선포 사명을 더욱 충만히 수행하려는 의지가 엿보입니다. 아울러 실제 예수님의 시대를 살지도 않았고 열둘에 끼지도 못한 우리에게도 열세 번째 자리가 열려 있다는 영적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하지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사도 1,24)
사도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았던 것처럼 이 추가적 선출에서도 주님께서 친히 주도권을 행사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사람의 손을 통해 당신 뜻을 이루시도록 내어 맡기는 겁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이 말씀이야말로 주님 곁에 머무르는 특권의 원리입니다. 주님의 선택! 교회 안에 여러 신분과 제도 안으로 부르심 받은 우리가 자기 스스로의 힘을 자랑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모든 부르심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생성되고 움직이며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하며 죄인이기까지 한 우리 역시 그렇게 불리워 감히 주님의 곁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갑니다. 인간적인 모자람을 오히려 부활의 증인이 될 자질과 가능성으로 보아주신 주님 덕분에 가능한 기적이었지요.
사랑하는 벗님! 부활의 증인으로 새롭게 부르심 받은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어느 자리건 거기에 우리까지 있어야 교회가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좀 더 근접해 나간답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이니 주저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부르심의 길을 걸어 갑시다.

뽑히든 뽑히지 않든
-김찬선신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
강론을 오래 하다 보니 마티아 사도 축일 강론도 이제 새로운 강론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아 끙끙대고 있는데
문득 이런 성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티아는 뽑혔는데 둘 중 뽑히지 못한 요셉은 행복에서 미끄러진 존재인가?
마티아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고 요셉은 주님 사랑에서 제외된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마티아가 뽑힌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제가 누누이 얘기하지만 이런 경우 우리가 흔들리지 말아야 할 믿음은
하느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똑같다는 것이고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티아를 더 사랑해서 뽑으시고
요셉은 덜 사랑해서 뽑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마티아가 사도로 뽑힌 것이 그에게
영광스러운 것일 수 있지만 꼭 더 사랑받은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느님은 마리아나 마티아나 우리나 더 사랑해서 뽑으시는 것이 아니라
직무에 쓰시려고 뽑으시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 직분을 다하도록,
마티아는 주님의 사도직 직분을 다하도록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어떤 직분을 다하도록 뽑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직무에 뽑히는 것을 싫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단체장에 뽑히는 것을 싫어하지요.
돈과 시간만 뺏길 뿐 아니라 애는 애대로 쓰고
사람들로부터 욕만 먹는 것이 싫은 겁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사람의 칭찬이나 인정이나 사랑을
받으려는 사람이 이런 직무와 책임을 좋아할 리 없습니다.
그러니 뽑히는 것의 의미 여부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 사랑 여부가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우리 사랑 여부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직무에 뽑히는 것이 영광스러울 것이고,
사랑치 않으면 앞서 봤듯이 귀찮기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의심치 않고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직무 수행자로 뽑혀도 좋고 안 뽑혀도 좋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저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왜냐면 저는 제가 사제직에 뽑힌 것에 감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자랑처럼 하는 이유는 며칠 전 어떤 신자로부터
미사 드리는 것을 싫어하고 가톨릭 교리와도 충돌하는 사제,
그래서 사제생활 내내 신자들과 충돌하는 사제 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사제라면 당연한 것이지만 미사 봉헌하는 것을 기뻐하고,
특히 코로나 상황 때문에 미사에 참여할 수 없는 신자분들이 원할 때
하루에도 몇 번 기꺼이 미사를 드려드리는데 이것은 제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는 분명한 표시일 것입니다.
아무튼, 마티아 사도는 처음부터 사도로 뽑히지 않았지만
줄곧 주님과 동행했다는 것을 보면 사도의 직무를 받지 않았을 때나
직무를 받았을 때나 주님을 떠나지 않고 기쁘게 직무를 수행한 우리의
본보기인데 이런 사도를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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