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13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는 근심에 잠길지라도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16-20)
You will grieve,
but your grief will become joy."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성모님께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 하느님을 알고 체험할 수 있도록 언제나 우리를 이끄십니다. 또한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믿음을 고백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오늘은 1917년 5월 13일 포르투갈의 작은 마을 파티마에서 세 명의 어린 목동에게 발현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세 명의 어린 목동에게 발현하신 성모님께서는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충만하기를 바라셨고, 우리가 평화의 주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성인들보다 성모님을 신앙의 모범으로 더 깊이 공경하고 사랑을 드리는 것은 바로 성모님께서 오롯이 당신의 생애를 주님께 바치셨고 우리를 특별히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 목동 프란치스코는 “제가 무엇보다 좋아한 것은 성모님께서 우리 마음에 밝혀 주신 그 빛을 통하여 우리 주님을 뵙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하느님을 너무도 사랑합니다.”(『루치아 수녀의 회고록』)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의 고백은 하느님의 빛이 우리 안에 머물고 우리를 보호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하느님을 소홀히하고, 그분의 창조물을 훼손하며 점점 사랑에 무감각해져 가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 있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님의 현존을 알리시며 그분을 사랑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남을 위하여 기도하며 도울 수 있도록 우리의 차가운 마음을 뜨거운 열정과 사랑으로 채우게 이끌어 주십니다. 아름다운 계절 5월 성모 성월에 다른 이들, 특히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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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한 번도 결혼해보지 못한 저로서는 부부 생활이 어떤지를 잘 모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많은 부부가 아주 사소한 일로 다툰다고 하더군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남편이 직장에 다녀온 뒤 곧바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갑니다. 왜 그럴까요? 생리현상이 급해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남편은 자신의 양말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졌습니다. 이 모습을 본 아내가 화가 났는지 이렇게 말합니다.
“양말을 똑바로 벗으면 안 돼? 아무 데나 벗어놓고, 정말로 더러워 죽겠어!”
화장실로 들어가던 남편은 아내를 째려보면서 “그러는 너는 얼마나 깨끗하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남편이 화장실에서 나온 뒤에 상대방 탓을 하면서 대판 싸웠다고 하더군요.
나의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으로 바라보면 별것이 아닙니다. 화장실이 급한 남편의 입장, 깨끗한 것을 원하는 아내의 입장으로 바라본다면 어떠했을까요? 사실 나의 입장을 내세워 잘 되었던 적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방 입장에 인정하고 지지해주면 관계가 좋아집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내 입장도 상대방이 적극적으로 들어주게 됩니다. 굳이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긴 시간이 필요 없게 됩니다.
“이런 생각이었구나. 힘들었겠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해. 그런데 내 생각도 한번 들어주면 어떨까?”라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관찰과 경청이 잘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처럼,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관찰과 경청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나빠지는 관계의 모습처럼 잘 듣지 않고 잘 보려 하지 않는다면 주님과의 관계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조금 있으면’ 일어날 일에 제자들은 근심에 빠졌습니다. 그 일은 당신께서 배반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되어 묻히시는 일만 아니라 부활도 암시하는 것이지요. 결국 제자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말만 들으면서 근심에 빠집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것처럼, 슬픔이 있으면 곧이어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근심의 삶을 사느냐, 기쁨의 삶을 사느냐가 결정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잘 들어야 그분의 뜻을 알 수 있으며, 그분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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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본당신부로 발령받아 간 본당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살 것을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제힘 닫는 데까지 신자들에게 영적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유일하게 쉬는 월요일에도 본당을 지키면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습니다. 미사 대수도 늘렸고, 고해성사도 미사 전 1시간 동안 주었습니다. 여기에 가정방문까지…. 본당의 일만이 아니라, 평화방송과 외부 강의까지 하면서 늘 바쁜 일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제게 자주 했던 말은 “신부님, 피곤해 보여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는데, 오히려 신자들의 걱정거리가 된 것입니다. 피곤하니 강론 내용이 좋을 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바쁜 일상 가운데 우연히 해외 성지 순례를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본당을 열흘 넘게 비워놓고 성지순례를 다녀와도 될까 싶었지만, 다녀온 뒤에 신자들이 이런 말씀들을 하십니다.
“얼굴에 생기가 넘쳐 보여요. 강론에도 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강론이 좋아요.”
좋은 글을 쓰고, 좋은 강론을 할 수 있을 때는 바쁠 때가 아니었습니다. 푹 자고, 푹 쉬고, 스스로 편안함을 느낀 다음이었습니다. 그래야 남들에게도 좋은 것을 전해 줄 수 있습니다.
나 자신부터 챙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행복해야 남에게도 행복을 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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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기쁨을 얻는 방법: "조금만"을 이해하면!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알 듯 모를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당신을 보지 못하게 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만나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또 세상은 기뻐하겠지만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할 것이고 곧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를 어머니가 아기를 낳는 것에 비유하십니다. 아기를 가진 엄마는 세상의 모든 기쁨을 끊고 근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기를 낳으면 새로운 생명을 보며 기뻐합니다. 사실 아기를 낳는 것도 고통이지만 아기를 낳아야 하는데 낳지 못하는 것은 더 큰 고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셨다가 성령으로 우리에게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은 예수님의 발현을 보는 기쁨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만나게 되는 예수님 때문에 오는 기쁨입니다. 성령은 나를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모습을 내가 볼 수 있게 하고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세상이 기쁨이라 여기는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 먹기 위해 살아요.”라고 말하는 ‘로리 스트라이커’란 여자가 있습니다.
나이는 45세이고 몸무게는 107kg입니다. 그녀는 남편의 건강이 악화되기 3일 전에 결혼 서약을 했습니다. 남편과 나눈 마지막 대화에서 남편이 말했습니다.
“반드시 건강해지겠다고 약속해 줘!”
그녀는 남편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피트니스 트레이너인 에릭을 만나러 갔습니다. 에릭은 로리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 자신이 먼저 당신과 똑같이 살을 찌우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건강과 기분까지 망쳐가며 살을 찌웁니다.
자신은 그렇게 살을 찌우며 로리를 닮아가려고 하는데 로리는 술을 마시고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에 화가 납니다. 하지만 로리는 먹는 욕구를 절제하지 못합니다. 몇 주 뒤 망가져가는 자신의 몸을 보며 에릭은 지칠 대로 지치고 이 일을 포기하고 싶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몇 발짝만 뛰어도 숨이 차는 그런 몸이 되었습니다. 살을 21.5kg이나 찌워 106kg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제 둘이 함께 빼는 일만 남았습니다.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트레이너 에릭과 남편과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사력을 다하지만 또 무너지곤 합니다. 그러면 에릭은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에 화가 나 로리는 더 먹습니다. 그러다 점점 마음 안에서 남편과의 약속이 더 자신을 절제하게 만들면서 휴가 동안에도 몸무게가 줄었습니다. 결국 남편과의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그렇게 첫 8주 동안 약 30kg을 감량하였습니다.
그녀는 이제 산도 오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며 이렇게 말합니다.
“지난 몇 개월간 인생이 달라졌어요. 이 표현을 마지막으로 쓴 게 테드가 병을 진단받았을 때인데 부정적인 의미였죠. 지금은 긍정적인 표현이에요.
몸도 훨씬 가벼워졌고 정신적으로도 좋아졌어요. 개인적인 생활도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이 실험에 참여하는 이유가 달라졌어요. 여전히 테드를 위해서지만 저를 위해서이기도 해요. 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 본 적이 없거든요.
누굴 만날지도 모르죠. 그의 이름은 밥이고 좋은 남자예요. 절 행복하게 해주죠. 테드도 좋아할 거예요. 테드가 죽기 전에 대화가 가능할 때 저에게 새로운 삶을 살라고 분명히 얘기했어요. 짝을 찾으라고 말이죠.”
8개월 동안 목표는 79.5kg이었는데 75kg이 되었습니다. 8개월 만에 처음 그녀를 본 친구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출처: ‘32kg 감랑! 죽은 남편과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한 여정’, 유튜브 채널, ‘라이프타임’]
로리는 에릭과 함께 세상의 즐거움을 끊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죽은 남편 테드를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끊음을 통해 테드를 만났습니다. 자신의 몸에서 테드가 보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처럼 살라고 하시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처럼 살면서 그분을 만나게 됩니다. 바뀐 자신을 보면서 그분을 만나고 기뻐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가 세상과 죄를 이기고 당신께 나아오게 하는 방식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참되고 완전한 기쁨을 다른 이들로부터 멸시와 오해를 당할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흥분하지 않고 고통을 참아 견디며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통, 죽음, 병고, 그 밖의 다른 모든 어려움은 참 평화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도구라고 합니다.
그는 제자에게 참 행복에 대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가장 큰 행복이 무엇인지 아느냐? 내가 수많은 사람을 회개시키면 그것이 참 행복일까? 아니다. 더 큰 행복이 있다. 내가 어느 집에 문을 두드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먹을 것을 청할 때 심한 모욕을 당할 것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그러면 나는 지치지 않고 다시 문을 두드려 주님의 이름으로 도움을 청할 것이다. 그 사람은 욕을 하며 오물을 뿌리고 나를 두들겨 팰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왜 그것이 진정한 행복일까요? 자신 안에서 우리를 위해 박해받으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분을 닮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을까요?
세상의 행복을 거슬러봅시다. 남이 먹을 때 굶고, 남이 편안함을 찾을 때 깨어있고, 남이 일하지 않을 때 더 열심히 일하고, 남이 기도하지 않을 때 성당으로 가봅시다. 분명 그 모습 안에서 사랑하시는 분을 닮은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서 오는지 모를 기쁨이 샘솟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도 신학교에서 남이 밥을 먹을 때 굶었고, 남이 잘 때 기도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성체를 통해 저에게 말씀하셨고 그 기쁨은 지금도 마르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기쁨을 거스르지 않고 천상의 기쁨을 찾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천상의 기쁨을 얻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성령의 사랑 때문에 세상의 기쁨을 역행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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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제가 있는 부르클린 교구는 본당 신부의 임기가 6년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6년을 더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미국은 대통령의 임기가 4년인데 재선에서 당선되면 4년 더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제가 있던 서울대교구는 본당 신부의 임기가 5년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5년을 마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합니다. 한국은 대통령의 임기가 5년 단임제입니다. 교회의 인사이동은 사제들에게도, 교우들에게도 큰 관심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발전해서 오시는 신부님에 대해서 검색하기도 합니다. 신부님이 하였던 강의를 보기도 하고, 신부님이 있었던 본당에 대해서도 검색하곤 합니다. 사제들도 새로 가는 본당의 홈페이지를 검색하기도 합니다. 올해 서품 30년이 되는 저는 절반은 본당에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기관에 있었습니다. 사목국, 해외연수, 청소년국, 성소국 그리고 지금은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에 있습니다. 기관에 있을 때는 인사이동에 대한 느낌이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당에 있을 때는 인사이동에 대한 생각이 많습니다. 정이 들었고, 함께한 추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본당에서 인사이동은 오전 10시 미사를 마치고 전임 신부님이 교우들과 인사를 나누고 떠나게 됩니다. 교우들은 떠나는 신부님과 아쉬움의 이별을 합니다. 아쉬움과 슬픔은 잠시입니다. 신부님이 떠나면 곧 새로 오시는 신부님이 도착하기 때문입니다. 새 신부님은 먼저 성당 제단 앞으로 가서 기도를 합니다. 교우들은 신부님을 환영하면서 기쁨의 박수를 칩니다. 이렇게 아쉬움은 새로운 설렘으로 바뀝니다. 헤어짐의 슬픔은 새로운 만남의 기쁨으로 변합니다. 신부님이 떠나실 때 교우들이 부르는 성가가 두 가지 있을 것 같습니다. 인정이 많고, 어른들에게 예의가 밝으며, 강론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성사를 정성껏 집전하고, 병자성사는 어디든지 가고, 장례가 나면 교우들과 함께 연도하고, 미사시간 30분 전에는 고백소에서 교우들을 기다리고, 레지오 훈화도 꼬박 들어가고, 수단을 즐겨 입는 사제가 떠나면 성가 115번 ‘수난기약’을 부를 것 같습니다. 반면에 말을 함부로 하고, 준비 없는 강론을 길게 하고, 성당을 자주 비우고, 재정이 불투명하고, 권위적인 사제가 떠나면 성가 175번 ‘이보다 더 큰 은혜와’를 부를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박해를 받으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을 알면서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교리도 체계적이지 않았고, 조직도 없었고, 재정적인 지원도 없었습니다.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떠날 때면 공동체는 눈물로 환송했습니다. ‘수난기약’을 불렀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박해가 심했습니다. 사제가 다른 곳으로 갈 때면 신자들이 모시러 왔습니다. 박해를 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제를 모시는 기쁨이 컸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통이 지금도 남아서 사제가 이동할 때면 가는 곳의 본당에서 사제를 모시러 옵니다. 사제들도 초대교회의 사제들이 보였던 복음의 열정과 헌신을 배워야 합니다. 형식만 남는 것이 아니라, 정신도 같이 남아야 합니다. 부르클린 교구처럼 6년씩 12년을 있는 것도, 서울대교구처럼 5년만 있는 것도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처럼, 한국교회의 사제들처럼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열정이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가려는 헌신과 희생이 중요합니다.
교회와 사찰이 세상의 기준이 되고 세상을 이끌어야 하는데 세상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직 하느님 나라는 완성되지 못하였습니다. 헌신, 희생, 나눔, 봉사는 교회가 가졌던 소중한 보물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경쟁, 성과, 업적, 재물이라는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어느덧 대접받는 것에 익숙한 종교인들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망각하곤 합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와 함께 하지 못하고 아직 완성되지 못한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와 아직’의 사이에 있는 우리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여러분은 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조금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근심하겠지만 여러분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와 아직’의 사이에 있는 교회에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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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번만이라도 다시 얼굴을 볼 수 있다면....꿈에서라도 그 얼굴 한번만 볼 수 있다면!
-양승국신부-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복음 16장 16절)
다시 본다는 것, 단 한 번만이라도 꼭 보고 싶다는 것,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도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무엇이 그리도 급했던지,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황급히 떠나간,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배우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나 가족들이 생각날때 마다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딱 한번만이라도 다시 얼굴을 볼 수 있다면....꿈에서라도 그 얼굴 한번만 볼 수 있다면...’
그런데 오늘따라 스승님께서 작별을 예고하는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 마디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알쏭달쏭한 말씀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수가 없군.”
“조금 있으면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과 발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당혹해하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위로 말씀이 한없이 따뜻하고 희망적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을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복음 16장 20절)
제자들 입장에서 예수님의 부재 예고는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가족은 물론 재산, 청춘까지 포기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스승님은 제자들에게 삶의 의미요 희망, 전부였습니다. 그런 스승님이 떠나가신다니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고, 믿기조차 싫었던 것입니다.
아직 완전한 믿음과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안타까우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제자들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당신을 버릴지언정.
결국 제자들은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당신의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꿈에 그리던 부활 예수님의 얼굴을 뵙는 순간 제자들은 세상 그 어떤 힘도 억누를 수 없는 완전한 기쁨, 충만한 행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 기쁨은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솟아올라오는 기쁨, 이 세상 그 어떤 권력자도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 곧 영원한 기쁨이며 종말론적인 기쁨입니다. 그 기쁨으로 인해 우리가 그간 겪어온 모든 혼란과 유혹, 고통과 슬픔은 흘러간 과거지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의 임박설은 초세기 교회부터 지금까지 고민을 던져주는 하나의 도전이요 과제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이비 지도자들이 이 재림 임박설을 남용하며 선량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멸망으로 몰고 갔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재림, 그리고 그와 결부된 종말론적 미래는 언제나 개방적입니다. 활짝 열려있습니다. 예수님의 도래로 인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으며 현재 진행형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성령을 통해 지금 이 순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매일의 말씀과 전례, 성사(聖事)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재림은 지속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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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이영근신부-
이제 봄도 막바지에 이르렀고, 부활시기도 막바지에 이르러 갑니다. 오늘 <복음>도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막바지에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며, 우리의 길이 됩니다. 그분의 삶의 마감이 끝이 아니라 끝에서 오히려 길이 됩니다. 그분의 떠남은 떠남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길이 됨을 밝혀줍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앞 구절>의 “조금 있으면”이란 단어는 오늘 복음에서 일곱 번이나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짧은 시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때의 임박성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임박성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뒤 구절>의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단어는 부활하신 후에서 승천까지, 혹은 재림의 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곧 “다시 보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당신의 죽음을 준비시키고자 애쓰시건만, 정작 제자들은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근심과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이는 참으로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근심이나 슬픔이 지나가면 기쁨이 온다.’는 고진감래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혹은 ‘슬픔이나 근심 대신에 기쁨이 주어진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슬픔 그 자체가 기쁨으로 변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격고 있을 때는 아픔이었지만, 뒤돌아보니 그것이 은총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눈이 열리면, 신비롭게도 슬픔이 곧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슬픔인 예수님의 죽음이 사실은 기쁨이 될 것입니다. ‘슬픈 일 자체’가 기쁜 일로 바뀐다는 이 사실, 곧 슬픔은 슬픔이 아니라는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서 이미 기쁨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부활하셨고, 성령이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여전히 근심과 슬픔에 젖어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근심과 슬픔 속에 깃들어 있는 ‘이미 베풀어진 자비’를 관상하고, ‘여전히 베풀어지고 있는 사랑의 선사’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더 이상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 와 있는 “기쁨”을 덮어버리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그 어떤 근심과 슬픔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빼앗기지 않는 기쁨”(요한 16,22)이 있습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그렇습니다. 주님!
근심이 지나고 나야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근심, 바로 그것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바람은 근심도 기쁨도 떠나와, 떠남도 머물음도 떠나와,
불고 싶은 대로 불어 갑니다.
바람 속에서 열매는 싹으로 바뀌고, 죽음은 생명으로 바뀌고,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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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야 할 산이 많다
-반영억신부-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합니다. 평생 이별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사랑하고 좋아한다 해도 때가 되면 이별을 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사랑의 관계가 참되었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잠시 잠깐의 만남을 기뻐하고 어떤 이는 좀 더 오랜 만남을 기대하고 희망합니다. 기왕이면 떠날 때 떠나더라도 가슴에 남는 만남을 이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16,16. 20). 하고 말씀하시며 세상을 떠나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게 됨을 제자들에게 거듭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자들은 십자가에 무참하게 처형된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직접 겪은 후에야 그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을 체험케 되었습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면, “조금 있으면...‘보지’ 못하고...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앞의 ‘보다’는 ‘테오레오’라는 단어로 구경거리를 보는 일차적 의미를 지니고 뒤의 ‘보다’는 ‘호라오’라는 단어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본다는 이차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시선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보고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모든 것을 다 이해한 다음에 수용하겠다는 것도 꼭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머리가 아니라 먼저 가슴으로 따르고 비로소 논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지금 알아듣지 못해도 때가 되면 알게 됩니다. 그때 아는 것은 이미 있었던 진리를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오기까지 제자들은 함께 해산의 진통을 겪어야 합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우리 앞에 놓인 힘든 일은 그만큼 큰 기쁨이 숨겨져 있음을 확신하게 합니다.
스승과 깊은 신뢰를 쌓고 스승의 모든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스승이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때 참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스승은 많이 알아서 스승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어서 스승입니다. 지금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동행하여 주심을 믿고 여기서 기쁨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진통이 끝난 뒤 반드시 새로운 기쁨이 올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매 순간 그분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선택하게 될 때 주님의 뜻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모든 희망을 잃고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부활의 기쁨과 평화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신앙여정도 한결같이 좋기만 할 수도 없고, 한결같이 힘들고 어려운 것만도 아닙니다. 기쁨을 희망하는 만큼 아픔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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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송영진신부-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슬픔은 이별에 대한 슬픔입니다.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허무함에 대한 슬픔’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곧 닥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지금 이 말씀은 최후의 만찬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무력화시키는 일이고, 이별의 슬픔을 완전히 없애는 일입니다.
여기서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계시는 시간이 짧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금요일 오후에 돌아가셨고,
주일 새벽 이전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무덤에 계신 시간은 ‘만 이틀’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서 부활 사이의 시간’을 사흘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유대식 날짜 계산법을 따른 것입니다.)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말을
우리가 지상에서 겪는 고난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여러분의 형제들도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시 고난을 겪고 나면, 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1베드 5,9-10).”
여기서 ‘잠시 고난을 겪고 나면’이라는 말은,
우리가 지상에서 겪는 고난은 ‘잠깐 동안의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또 고난의 종류에 따라서
너무 긴 시간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영광을 누리게 되는 ‘영원’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지상에서 겪는 고난의 시간은 ‘찰나’일 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 1,23-25).”
지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든지 고난을 겪으면서 힘들게 살든지 간에
사람의 인생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어버리는 풀꽃과 같은 것입니다.
신앙인은 현세의 허무한 인생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만을 희망하고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이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 때문에 제자들(신앙인들)이 크게 슬퍼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탄의 지배를 받는 세상은 예수님의 죽음을 좋아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묵시록에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나의 두 증인을 내세워 천이백육십 일 동안 자루옷을 걸치고 예언하게
할 것이다.’ ... 그들이 증언을 끝내면, 지하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서는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 땅의 주민들은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 두 예언자가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묵시 11,3.7.10).”
회개하라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예언자들이 한 일이었는데,
죄 속에서 살고 있는 ‘땅의 주민들’은 그 말씀을 듣기 싫어했고, 회개를 거부했고,
예언자들을 박해했고, 그러다가 그 예언자들이 순교하자 좋아하면서,
서로 선물을 보내고 축하를 합니다.>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인 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적어도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고 안심했을 것이고,
여러 가지로 불편했던 존재를 제거했다고 만족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시는 말씀으로서 제자들의 큰 슬픔이
큰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크게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그 슬픔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큰 기쁨으로 바뀌었고,
부활의 기쁨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큰 슬픔이 큰 기쁨으로 바뀔 때, 예수님의 죽음을 좋아했던
세상의 기쁨은 슬픔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 말씀이 없습니다.
실제 상황을 보면, 예수님 부활 후에 ‘세상의 기쁨’은 슬픔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인 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실까봐
두려워했습니다(마태 27,62-66).
그랬다가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기 시작하자 몹시 불쾌히
여겼고(사도 4,2), 사도들이 일으키는 표징들을 두려워했습니다(사도 2,43).
그들의 두려움은 죄의식에서 비롯된 ‘심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반면에, 제자들의 기쁨은 그 두려움이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완성’은 곧 ‘신앙생활의 완성’입니다.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지 않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제대로 기뻐하지 못합니다.
의식을 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죄와 심판과 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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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요한 16,16-20: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조욱현신부-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16절)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붙잡히셨고, 다음 날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십자가에서 내려진 다음 무덤에 모셔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그들은 다시 그분을 보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시어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17절) 하셨다. 이 말씀은 위로의 말씀이다. 그분의 죽음은 하나의 과정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돌아오시리라는 것, 당신이 그들을 떠나는 것은 잠시뿐이며 영원히 그들과 함께 계시리라는 것을 알려주신다. 그분은 아버지께 가시며 어둠에 갇혀있던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20절) 주님을 사랑한 이들은 주님께서 잡혀 결박당한 채 최고 의회로 끌려가 사형선고를 받고, 채찍질을 당하고, 조롱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리시고 묻히시는 것을 보고 울며 애통해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한 자들은 보기만 해도 거슬리던 자가 수치스러운 죽음에 처하자 기뻐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죽음에 처했을 때는 슬퍼했지만 주님의 부활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20절)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슬퍼했으나 세상은 기뻐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셨을 때 제자들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으나 세상을 사랑한 이들에게는 기쁨이 슬픔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과 함께 기뻐한다면 세상과 함께 슬퍼하게 되겠지만, 세상이 즐거워할 때 슬퍼한다면 나중에 세상이 슬퍼할 때 기뻐하게 될 것이다.
이 기쁨은 내가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내가 죽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낸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기쁨이다. 즉 자기 자신을 죽인 후에 얻는 기쁨이므로 부활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기쁨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기쁨은 그리스도인들의 옷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이 옷을 입지 못한다면, 기쁨이 없다면 어떻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겠는가? 내가 우선 기쁨을 가져야 기쁨을 행복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얻은 기쁨은 절대 빼앗기지 않는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세상이 변하면 쉽게 변할 수 있으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그분이 변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그 어떤 세상의 힘도 빼앗을 수 없다. 그분은 완전하신 분으로서 그 기쁨을 주시기 때문이며, 그분은 영원한 분이시기에 우리의 기쁨도 완전한 기쁨이 되어 없어지지 않는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쁨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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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인과 세상의 관계성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요한 16,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떠남을 말씀하시자 그들이 동요합니다. 궁금한 것은 많은데 직접 여쭙지도 못하고 자기들끼리 서로 묻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묻고 싶어한다는 사실과, 왜 자신있게 묻지도 못하는지 잘 아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한 16,17)
"'조금 있으면' ...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한 16,18)
제자들이 궁금한 것은 이 두 가지로 모아집니다. 예수님께서 대체 어디로 가신다는 것인지, 그리고 그게 언제인지 의문스러운 것 같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늘 말씀하시는 "아버지"가 세상 권력자가 아닌 이상 하늘에 계신 분이 맞을 터인데, 그렇다면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스승의 현존을 잃어버리고 홀로 남게 될지도 모릅니다. 또 그 시간이 과연 언제 올 것인지 알아야 뭐라도 대비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께 여쭙기조차 두려운 듯 보입니다. 아직 직면하기 어려운 진실이기 때문일까요? 때로는 무지가 오히려 더 안전하다고 느끼는 순간도 있는 법이니까요.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예수님은 당신의 떠남에 대해 제자들과 세상이 정반대로 반응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지금 제자들이 느끼는 미세한 불안과 두려움이 실제 이루어지는 날, 세상은 기뻐할 것이라고요.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상실의 고통 앞에서 마냥 울며 애통한 상태로 우울과 어둠에 싸여 지낸다면 그 모습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성정과 거리가 멉니다. 스승의 수난과 죽음, 동족의 거부와 배척, 박해와 공격은 분명 고통과 시련이 되겠지만,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은 부활과 새 생명의 희망을 살아가는 존재니까요. 성령께 축성받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겪는 신앙 체험의 역동성을 비춰줍니다.
"그러나 그들이 반대하며 모독하는 말을 퍼붓자 바오로는 옷의 먼지를 털고 나서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들에게로 갑니다.'"(사도 18,6)
말씀 전파에 전념해 유다인들에게 선교하던 바오로는 또 다시 배척을 마주합니다. 동족에 대한 사랑으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려는 사도에게는 참 아픈 현실이지만, 그는 당당히 직면하고 끗꿋이 그 고통을 넘어섭니다.
"아퀼라, 프리스킬라, 실라스, 티모테오, 티티우스 유스투스, 회당장 크리스포스"
이들이 바로 오늘의 제1독서 대목 안에 등장하는 바오로의 협력자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바오로의 이방인 선교 소명을 적극 지원하며 보호와 지지를 아끼지 않는 이들이지요.
오늘 복음 속 제자들이 아직 고통이나 시련을 직면하지 못하고 막연한 두려움과 근심에 갇혀 있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은, 어쩌면 아직 그들 내면에 출세의 야망이 정화되지 못하였기에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성령을 체험하고 부활의 희망으로 무장하면 사도 바오로처럼 당당히 자신의 소명에 투신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거부와 실패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해 자신의 소명을 완성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님께서 수많은 협력자들을 보내시어 당신의 현존을 체험하게 해 주실 것이고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욕정과 탐욕의 물살을 거슬러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가르침이지요. 하는 일마다 세상이 환호하고 입이 마르게 칭찬하며 자기 편으로 삼으려 한다면 오히려 자신이 진실로 그리스도인인지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는 버림받음과 고독과 실패 속에서도 부활의 기쁨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부와 성공과 출세가 아닌 수난과 죽음과 떠남을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귀 기울이며 그분의 마음을 알아듣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고통의 산도 용기내어 직면하다 보면 넘어설 만한 언덕인 경우가 있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두려움과 근심을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니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말고 각자의 소명을 채워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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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나누기 - 부활 6주 목요일-바람처럼 성령처럼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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