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18일 부활 제7주간 화요일
“나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다 하여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요한 17,1-11ㄴ)
I glorified you on earth
by accomplishing the work
that you gave me to do.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오늘 복음은 성자께서 자신의 전 존재를 성부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왔음을 아시고 그 시각을 향하여 나아가십니다. 이 ‘때’는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순종과 겸손으로 이루어진, 영광스럽게 되는 때이며(마태 25,31 참조), 성자께서 성부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때입니다. 또한 성자를 보내신 성부께서 이끌어 주시어(요한 6,44 참조)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거저 선물로 받는 때입니다.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히브 9,14)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날마다 성찬례를 통하여 당신의 생명에 동참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미사 안에서 믿음으로 주님을 알아봅니다. 미사 때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라고 말하는 순간은 얼마나 오묘하고 신비스러운 시간입니까?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라고 말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신비하고 거룩하며 기쁨으로 가득 찬 부르심에 동참하기로 다짐하며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라고 응답합니다. 이 응답에는 십자가와 부활로 길이 영광받으시는 주님을 찬미하며, 우리가 이 신비로운 ‘때’의 증인으로 살겠다는 다짐이 들어 있습니다. 단 한 번의 희생으로 우리의 죄를 씻으신(히브 7,27 참조) 주님을 따라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입니다.
우리는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매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미사에 참례하기도, 성체를 모시기도 어려운 시기입니다. 그렇기에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성체를 모시는 것이 소원이었던 순교자들의 신앙심을 배우게 됩니다. 여러 어려움으로 성체를 모시기 어렵더라도 우리의 삶에서 사랑을 실천하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모실 수 있는 미사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을 적극적으로 찾아, 신앙의 신비에 참여하도록 노력합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학생 때가 생각납니다. 거의 30년 전의 일인 것 같습니다. 당시에 어떤 신부님께서는 늘 저하고만 탁구를 하려고 했습니다. 저와 함께 치는 탁구가 제일 재미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탁구 실력이 남들보다 좋았기 때문에, 어떤 공이든 잘 받아서 딱 치기 좋게 넘겨줄 수 있었습니다. 상대방이 스매싱하고 날카로운 드라이브를 걸어 넘겨도 아마추어의 볼이기에 어렵지 않게 상대방이 계속 공격할 수 있도록 넘겨주니, 저랑 탁구 하는 것이 재미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를 떠올리며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떤 사람의 말과 행동으로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에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너무 힘들어하십니다. 그분의 공격을 제대로 막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공격을 제대로 막아내면서 랠리를 계속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맞습니다. 자신의 수준을 높여야만 합니다. 상대방보다 훨씬 성숙한 존재가 되면, 상대방의 공격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쉽게 받아넘기는 것은 물론이고 또 상대방이 쉽게 받을 수 있도록 딱 좋은 곳으로 다시 그 공격의 공을 넘겨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가 된다면 서로 재미를 느끼며 큰 기쁨을 갖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먼저의 나의 성숙도를 점검해보면 어떨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의 내용을 보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힘쓰신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자신의 앞날을 모두 알고 계신 주님이십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닌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느님이신 주님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의 모든 모습은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신 모범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과 같이 성숙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나의 영적 성숙도를 높이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기도와 묵상, 성경 읽기, 자선과 희생 등의 모습을 통해 주님과 닮아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책을 많이 읽습니다. 거의 1일 1책 수준으로 읽고 있습니다. 읽기 쉬운 책만 읽는 것도 아닙니다. 역사, 사회, 정치, 경제, 심리 등의 인문학 서적을 즐겨 읽고 있습니다. 이렇게 책을 많이 읽었다고 사람들은 저의 지식이 대단한 줄 압니다. 그러나 읽을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읽을 책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읽을수록 제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대화가 되지 않는 사람은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책을 읽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단편적인 지식이 세상의 지혜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과 대화하기가 제일 힘듭니다.
주님도 그렇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 기도가 부족해요.”
하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왜 하느님께서는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거예요? 저도 나름으로 열심히 기도하면서 살고 있다고요.”라면서 불평불만을 말합니다.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진짜 앎이 아닐까요?

자녀에게도 남편에게도 사랑받는 엄마가 되려면?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부터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마지막 기도를 드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오늘 기도 내용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영광’을 청하는 것입니다. 당신을 영광스럽게 했으니 이제 당신이 나를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영광’은 ‘이름을 빛나게 하는 일’입니다. ‘이름’은 ‘본성’을 의미하기에 ‘사랑해 달라!’고 하시는 말씀과 같습니다. 사랑받는 것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으시는 근거는 자녀들에게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아버지를 사랑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신 모든 것들이 아버지에게서 온 것임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을 알려주었다고 하시며 그래서 제자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도 하지만 수고했다고 칭찬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가족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시는 듯 보입니다. 남편으로부터 받은 것들로 자녀들을 키우며 자녀들에게 아버지를 알려주어 아버지를 공경하게 한 것입니다.
아버지를 알려주지 않고 자신 혼자 자녀를 키우려는 어머니는 분명 자녀를 자기 행복을 위해 이용하게 됩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자녀에게 원망을 듣는 날이 옵니다. 자녀가 찾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입니다.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알려줄 수 있는 대상은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전국 1등을 하라고 골프채로 아들을 때려 아들이 결국엔 어머니에게 칼을 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엄마가 자녀에게 사랑받으려면 그렇게 하라고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어야 합니다. 자녀가 엄마 혼자 탄생할 수 없는 것처럼 자녀의 정체성도 엄마 혼자 알려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신비의 일부입니다. 내 뜻으로 자녀를 키우려다가는 항상 양쪽으로부터 칼을 맞게 되어 있습니다.
얼어 죽어가면서도 아기를 살리려고 자신의 겉옷으로 아이를 감싸고 죽은 어머니에게 아이를 맡아 키운 미군이 다 성장한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그때 아이는 어머니 무덤에 자신의 겉옷을 벗어 덮으며 “어머니 그때 얼마나 추우셨어요!”라고 말하게 하였습니다. 미군이 아이를 어머니에게 소개해주지 않고 어머니의 사랑을 일깨워주지 않았다면 아이는 정체성의 혼란으로 아무리 사랑하며 살라고 양아버지가 가르쳐도 그 말을 따르지 못합니다. 왜 자신을 미국까지 데려왔느냐며 원망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양아버지가 사랑받는 길은 아이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사랑의 소명을 일깨우기 위해 아이의 어머니께로 이끌어주는 중재자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양쪽으로부터 다 사랑받는 길입니다.
티베트 고원에 우뚝 솟은 카일라스산은 시바 신이 산다고 믿어온 만년설이 덮인 신비의 산입니다. 시바 신은 주로 명상과 고행으로 지내기 때문에 그의 아내 파르바티는 늘 춥고 무료했습니다.
하루는 무척 심심해진 파르바티가 시바 신에게 졸랐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만 해 줘요. 나만을 위한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줘요. 이 세상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여야만 해요.”
그러자 시바 신이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은 파르바티만이 아니었습니다. 때마침 긴급 보고할 것이 있어서 문 앞에 있었던 신관도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너무 재미있어서 신관은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내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마치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인 양 들려주었습니다.
아내는 또한 파르바티의 시녀이기도 했습니다. 아내는 파르바티의 머리를 빗겨주며 자신이 남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파르바티는 폭풍을 일으키며 시바 신에게 달려가 화를 냈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를 해준다고 약속했잖아요. 내 시녀까지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해 주셨더군요!”
시바 신은 시녀에게 그 이야기를 누가 들려주었느냐고 물었고 시녀는 겁에 질려 남편인 신관에게 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신관이 호출되어 사정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네가 몰래 들은 이야기인 것을 솔직히 아내에게 말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에게 받은 이야기를 인간의 것으로 여겨 전한 것은 큰 벌을 받아 마땅하다. 너는 온 세상을 다니며 네가 들은 이야기를 다 전하여라. 그리고 그 이야기가 나에게서 왔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기 전에는 나에게 돌아올 수 없다.”
[참조: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더숲]
자녀가 찾는 이야기는 ‘나는 누구인가?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해답을 줄 진리입니다.
그것을 아버지와 상관없이 어머니가 자신만이 아이의 원천인 듯이 말해준다면 아이는 혼동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고 결국 삶이 힘들어질 때는 그 탓을 어머니에게 할 것입니다.
어머니는 혼자 아이를 낳은 것이 아님을 고백하고 아버지의 존재와 아버지가 자녀에게 원하는 것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아버지를 향하게 하고 아버지를 닮게 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아버지가 닮아서는 안 되는 모습이라면 하느님 아버지께로 이끌면 됩니다.
자신이 하느님인 양 아이에게 정체성을 부여하고 소명을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머리카락 하나도 만들어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창조자인 양 자녀에게 삶의 방향을 정해주겠다고 한다면 그것이 모두에게 원망을 사는 길이 됩니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거든 예수님처럼 자녀에게 아버지를 알려주고 영광스럽게 하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그래야 남편에게도 자녀에게도 사랑받습니다.

-조재형신부-
마당에 심은 채소들은 땅을 고르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어야 합니다. 지지대를 세워주고, 잡초도 뽑아 주어야 합니다.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뜨거운 햇살에 말라버리곤 합니다. 바람에 줄기가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당에는 자갈밭에도, 물을 주지 않아도, 거름을 주지 않아도 잘 자라는 잡초가 있습니다. 벌써 주차장의 자갈밭을 차지하고 자라고 있습니다. 잡초는 생명력이 참 강합니다. 자르고 뽑아도 조금 있으면 다시 자랍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채소는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고추, 가지, 오이, 깻잎, 토마토, 상추는 식탁을 풍성하게 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결실이 있는 채소는 정성이 들어가야 합니다. 결실이 없는 잡초는 씨앗이 머물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햇빛만 있으면 뿌리를 내리고 자랍니다. 올해에도 채소에는 물과 거름을 주고, 잡초는 뽑아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비슷합니다.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웃에게 덕을 베풀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고, 세상의 이치를 알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돌보고, 책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도 아주 쉽게 잡초와 같은 것들이 들어와서 자리를 잡습니다. 교회는 그것을 일곱 가지 죄의 뿌리라고 하였습니다.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입니다. 원하지 않는데도 들어와서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오랜 동안 사제생활을 했어도, 수도자로 살았어도 죄의 뿌리는 어김없이 다가와 자리를 잡습니다. 존경받는 사람들도,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도 죄의 뿌리는 다가와 자리를 잡습니다. 죄의 뿌리를 뽑아내는 방법은 겸손과 비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죽지 않고 계속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부와 명예와 권력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자연을 파괴하고 우리만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삶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교회는 그것을 정결, 청빈, 순명의 복음삼덕이라고 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의 향주삼덕이라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영원한 생명을 알았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다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내가 가는 고을에서마다 일러 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이제, 내가 두루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여러분 가운데에서 아무도 다시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마당에 심은 채소가 풍성한 열매를 맺듯이 우리들의 신앙도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충실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다마스쿠스 사건 이후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운명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바오로 사도께서는 예수님을 구세주요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 그 결과 복음을 이웃들에게 전하는 사람들, 결국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아주 비장한 어조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용하신 문장 하나 하나, 단어 하나 하나가 얼마나 감동적이고 비장한지, 2천년 세월을 건너와 오늘 우리의 마음까지 크게 흔들어 놓습니다.
복음선포의 최일선에 서 있어야 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물이 물탄듯 술에 술탄듯, 굳은 결의도 없이 흐지부지하게 살아가는 오늘 제게 큰 경종의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나는 유다인들의 음모로 여러 시련을 겪고 눈물을 흘리며 아주 겸손히 주님을 섬겼습니다.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내가 가는 고을에서마다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 아깝지 않습니다.”(사도행전 20장 19절, 22~24절)
이제 시대가 바뀌고 바뀌어 더 이상 사도들의 시대처럼 모진 박해도 생명의 위협도 없습니다. 투옥이나 환난도 없습니다. 시련이나 눈물도 없습니다. 참으로 복음 선포하기 좋은 환경입니다.
그러나 이런 좋은 분위기 속에 살아가면서도 복음선포를 위해 전력질주하지 않는 우리를 보시는 바오로 사도의 마음이 참으로 안타깝겠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복음 때문에 시련을 겪은 적이 있습니까? 복음 정신 때문에 눈물 흘려본 적은요?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다가 투옥된 적이 있습니까? 복음 선포를 위해 목숨까지 바쳐본적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동족 유다인들의 음모와 집요한 공격으로 바오로 사도는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겸손했습니다. 언제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자처했습니다. 기쁨 속에 모든 고통을 견뎌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던 예수님의 모습과 예루살렘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바오로 사도의 모습은 싱크로율 100퍼센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바오로 사도도 성령에 이끌려 천천히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 이후 한 가지 깊고 중요한 깨달음에 도달했습니다. 자신의 운명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이제 자신의 운명 뿐만 아니라 일거수일투족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의 성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처럼 바오로 사도 역시 복음 때문에, 아버지 때문에, 하늘 나라 때문에 자신이 앞으로 걸어야 할 고통과 십자가의 길을 잘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운명, 자신의 미래, 자신의 삶과 죽음 모두를 주님의 성령께 맡겨드리고, 의연하고 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바오로 사도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이영근신부-
오늘부터 3일 동안은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행하신 고별사에 이어지는 고별기도를 듣게 됩니다. 흔히 이를 “대사제의 기도”라 부르는데, 비록 이 기 기도에서 ‘예수님이 천상성소의 대사제이자 희생제물자체가 되셨다’는 언급은 없으나, 본디 사제의 임무가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을 잇는 중재라 할 때,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믿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간청하고 있기에 ‘대사제의 기도’라 부를 수 있으며, 특히 17장 19절의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라는 구절을 바탕으로 그렇게 부를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앞의 고별사의 중심 주제였던 ‘사랑’과 ‘영광’이 기도 형식으로 반복되는데, 세 가지 청원을 담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17,1-5)와 ‘제자들을 위한 기도’(17,6-19)와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17,20-26)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1-5절)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아들의 영광을 청하는 기도인데, 앞의 13장 31-35절의 내용과 상통합니다. 오늘은 앞부분만 보고,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 포함되는 뒷부분(6-11절)은 내일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고 말씀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고별사’의 시작인 13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또한, 사막에서 사탄이 “세상의 나라와 그 영광”을 주겠다고 할 때 거부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시기를” 간청하십니다. 이제 당신의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란, <성경>에서 하느님의 존엄함과 거룩함의 광채가 현재적으로 나타나는 위업과 현현을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간청하는 것은 지금까지 그렇게 영광이 드러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의 공생활을 통해서 이미 아버지를 드러내셨고, 또한 아버지께서도 당신을 아들로 드러내셨지만, 이제 그 절정의 때가 왔으니, 아들의 실체가 드러날 때, 아버지의 실체도 함께 드러내시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분과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는 그 때가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때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영광”은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권한인 “영원한 생명”을 모든 이에게 주심으로써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이 올 것입니다. 곧 “홀로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한 17,3)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와 예수님을 아는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 곧 사랑과 실천을 포함하는 앎을 뜻합니다.
결국, 이 기도는 그 실현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 곧 영광이 드러나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기를 간청하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맡겨주신 근본적인 소명의 완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주님!
당신께서는 영광을 드러내시되, 굴욕 받음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굴욕을 발아래에 두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어, 썩는 것을 썩지 않는 것으로 바꾸셨습니다.
아버지를 알게 하시고, 당신을 알게 하소서.
그 어떤 굴욕과 수난에서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안다는 것은 통교하는 것입니다
-반영억신부-
많은 분이 성체조배나 묵주기도, 9일기도, 15기도, 자비의 기도, 십자가의 길 등 열심히 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끔 “9일기도를 하면 소망을 꼭 들어주신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하는 질문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기도하는 만큼 주님과의 일치를 이룬다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삶의 변화나 주님과의 사랑의 일치를 이루지 못한 채 기도문만 외운다고 그렇게 이루어지겠습니까? 횟수나 형식에 매이지 말고 정성 어린 마음으로 그 기도가 지향하는 바대로 삶의 쇄신을 이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기도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과의 속 깊은 만남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에 앞서 당신 자신과 제자들, 그리고 앞으로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권한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나, 당신의 죽음을 통해 사랑을 보여주신 것은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주신 이들과 앞으로 당신을 믿게 될 이들을 위하여 기도 하셨는데 기본핵심은 사랑의 일치에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들, 그리고 제자들의 증언을 통하여 믿게 되는 이들, 바로 우리와의 사랑의 관계를 완성하길 바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권한을 받았기에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과(요한6,32이하) 생명의 물(요한4,10이하)을 주시며 풍부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란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요, 안다는 것은 결국 통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단순히 겉모양을 아는 것이 아니라 깊은 일치에서 나오는 앎이요, 알기 때문에 삶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한 몸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과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에 촛점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온전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사랑하면서 사랑의 친교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라고 하였습니다. 작업시간에는 일로써, 기도 시간에는 기도로써 우리는 일치를 이뤄야 합니다. 기도를 말, 생각, 장소, 시간에 국한 시키지 말고 그 한계를 넘어서서 언제 어디서든지 현존하시는 주님과 친교를 나누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다. 부디 삶이 기도이기를 갈망합니다. 사랑으로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행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웃을 향해 열려있기를 희망하며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송영진신부-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2-3).”
여기서 ‘알다.’ 라는 말은 ‘결합’과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인식’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하느님, 예수님의 생명력과
영원성을 받게 되고, 하느님, 예수님처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알다.’의 반대말인 ‘모르다.’는 ‘관계없음’, 또는 ‘관계의 단절’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실 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사도가
그때 했던 말은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였습니다(마태 26,72.74).
이 말은, “나는 그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즉 “나는 예수의 제자도 아니고 신앙인도 아니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끊어버린 말입니다.
“겁에 질려서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말만 그렇게 했을 뿐이고,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라고 베드로 사도를 대신해서 변명할 수도 있는데,
우리는 ‘말의 힘’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모른다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그 전에 자신이 했던 신앙고백의 반대쪽에 있는 말,
즉 자신의 신앙고백을 부정하는 선언입니다.
그 상황에서 그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는 변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부인함으로써 예수님과 단절된 상태에 있었는데,
곧바로 뉘우치고 통회했기 때문에
단절되어 있었던 시간은 아주 짧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교 박해 때에 박해자들이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예수를 안 믿는다는 말을 한 번이라도 하면 풀어주겠다.” 라고
신앙인들을 회유한 일이 많았습니다.
그때 신앙인들은 “거짓말이라도 예수님을 안 믿는다는 말은 할 수 없다.” 라고
말하면서 기꺼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순교자들이 융통성이 없어서 순교한 것은 아닙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는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박해를 받을 때, 안 믿는 척 하면 육신의 목숨은 구할 수 있겠지만,
영혼은 죽게 됩니다.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언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3).”
여기서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나는 너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즉 “너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하나도 없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결합과 일치는 일방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하느님, 예수님과 하나가 되려면, 하느님, 예수님께서 우리를
알아주셔야 하고, 우리 쪽에서도 하느님,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주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하고,
우리의 삶이 주님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삶’입니다(마태 7,21).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놀라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3).”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나자렛 사람들이나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믿지 않으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잘 알기를 바란다면 우선 먼저 믿어야 합니다.
또 믿음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요한 17,9-10).”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고,
동시에 우리를 위해서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이라는 최종 목표에 도달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라는 말씀은,
‘세상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겠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예수님을 알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즉 하느님, 예수님과 하나로 결합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기도해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할 자격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이 하느님의 뜻이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애를 쓰시는 분이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또는 죄 속에서 살면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일을 헛일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미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된 사람이라도 자만심에 빠지거나 방심하면,
또 유혹에 넘어가서 한눈을 팔거나 딴 생각을 하고 딴 마음을 품으면,
끝까지 갈 수 있는 힘을 잃게 되고,
그러면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끝까지’ 한 마음으로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복음: 요한 17,1-11: 아버지, 당신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 주십시오.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을 위해 하신 주님의 사제적 기도이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1절) 아들의 영광이란 십자가의 죽음이며 죽음을 통한 부활이다. 십자가의 신비는 이미 영광으로 요한복음은 말하고 있다. 십자가와 “높이 들리심”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로써 더욱 영광스럽게 되셨다. 부활하시어 영광을 받으신 주님께서는 부활로써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심으로써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아버지께 대한 사랑은 십자가 위의 죽음으로 표현되었으며, 그것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래서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5절) 하고 기도하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를 계시하셨고 그들은 또한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켰다고 하신다. 그 말씀이 바로 스승이신 그리스도이셨고, 그분의 말씀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통하여 아들이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승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그 말씀을 따르며 살아가면서 신비를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믿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아들이 참으로 아버지에게서 오셨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하신다. 그래서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9절) 대사제요 중개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인간으로서 기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뽑힌 이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9절) 라고 하신 것이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10절)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고 찬미를 드리는 동시에 그리스도를 닮게 되기 때문에 아들도 영광스럽게 하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더는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아직 세상에 남아있어야 하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하는 누룩의 역할을 하도록 용기를 주신다. 그들을 미워하는 세상을 사랑하며 하느님의 뜻으로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존재들이다. 영적 생명은 시련과 고통을 통해 성숙한다. 그리스도인들도 박해받을 때마다 늘어난다. 이것도 하느님께서 주신 훌륭한 지위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주님의 영광이 더 드러나도록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의 영광은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났으며,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 영광이 나타날 수 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두 개의 절절한 고별사가 나옵니다. 둘 다 "때"를 맞이하는 비장함과 남는 이들에 대한 연민의 사랑이 가득하지요.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요한 17,1)
대사제의 기도라고 불리는 요한복음 17장의 내용은 수난과 죽음으로 마련된 영광의 때를 맞이하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올리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때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이 시간을 통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며, 아버지께서도 아드님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요한 17,4)
예수님은 온 생애를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셨고, 아버지의 사랑을 실천하셨으며,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으셨지요. 앞으로 닥칠 죽음의 순종을 포함해 이 모든 것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이제 떠남을 준비하시면서 제자들(우리들)을 위해 아버지께 청하시지요.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이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요한 17,11)
예수님의 기도에서 성령께서 오셔야 하는 정황이 명백해집니다. 이 세상에 남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약하디 약한 제자들(우리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랑을 기억하고 꿋꿋이 신앙의 길을 걸으며 지상 순례 여정을 완수하도록 보호해 주시려는 겁니다. 남은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연민의 사랑이 성령을 통한 현존으로 실체화될 겁니다.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대목의 앞 부분입니다.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사도 20,22)
사도 바오로 역시 자신의 "때"를 맞이하여 이 말을 합니다. 세속적 영광이 아닌, 스승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영광을 맞이할 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참 예언자들이 죽음을 맞이했던 도성 예루살렘이 "투옥과 환난"으로 사도 바오로를 맞이해 주님의 영광을 완수하도록 해 줄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모든 뜻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사도 20,27)
사도는 온 힘을 다해 복음 선포에 매진하였습니다. 늘 그들 곁에 머무를 수 없었기에, 함께 있는 동안에는 열정적 가르침으로, 떨어져 있을 때에는 섬세하고 지혜에 찬 서신으로 자신이 받은 주님의 계시를 남김없이 전해주려 애썼지요.
이제 사도는 남은 이들을 성령께 맡기고 떠나야 합니다. 사도가 남긴 주님의 말씀이 그들을 양육하고 성령께서 그들이 들은 진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나는 죽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알렐루야."(입당송)
떠남은 이별로 이어지지만 영적 관계에서는 "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의 세계에서는 죽음조차도 소멸이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영원히 제자들과(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면서 제자들을(우리를) 위로하시고 복돋우시며 동행하시듯, 눈물의 배웅을 받으며 에페소를 떠난 사도 역시 남은 이들의 영의 벗으로 남아 그들의 신앙의 길을 도와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의 승천을 기념하고 성령께서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오늘의 두 고별사는 위로와 격려를 줍니다. 주님은 우리를 결코 떠나시지 않으실 것이고 그분에게서 받은 은총이 나날이 더욱 우리를 견고하게 해 줄 것이니까요. 주님과 우리의 만남은 끝을 모르는 영원이기에 우리는 잠시 지날 환난고초의 세상에서 더욱 찬란히 피어날 것입니다. "우리 짐을 지시는 하느님이 우리 구원"(화답송)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소서 성령님! 벗님들 마음에 임하소서! 아멘.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김찬선신부-
“유익한 것이면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알려 주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의 모든 뜻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얘기 중에 두 번이나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알려주고 가르쳐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 저에게는 떠오르는데
이것이 저의 지나친 비약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지나친 비약이 아니라는 가정하에
오늘 저는 최선을 다함에 대해 성찰코자 합니다.
우선 최선이라는 말을 생각해봅니다.
최선은 한자말로 最善이고 풀이하면 최고의 선이라는 뜻일 겁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에 의하면 최선은 하느님이시고,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최선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였다.”고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이 주님의 영역입니다.
인간은 바오로라고 할지라도 최선을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최선을 다한다는 말의 정확한 뜻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는 뜻일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고로 잘한 것이지요.
그런데 제가 여러 차례 얘기한 바 있듯이
잘한 것과 열심히 한 것은 다른 것이지요.
환갑과 사제서품 30주년이 겹치는 해에 제 인생을 돌아보며
저는 열심히 살았지만 잘 산 것은 아니라는 뼈아픈 성찰을 했지요.
열심히 살았고 최선을 다했는데 잘 산 것 같지 않으니 얼마나 뼈아픕니까?
인간의 힘으로 최선을 다한 것만으로는 최선의 결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악의 없이 선의로 무엇을 해도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한의 최선일 뿐 하느님의 최선이 아닙니다.
그리고 신앙인의 관점에서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최선이신 하느님께 도달하지 못하면 그것은 아무리
최선을 다했어도 열심히 한 것일 뿐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 바오로가 얘기하는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더더군다나 "하느님의 모든 뜻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는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눈치채셨겠지만 그것은 '성령의 힘으로'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는 "성령께 사로잡혀“
"성령께서 일러 주셨습니다."라는 표현을 하는데 바로 이것입니다.
사실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와 같은 표현은
너무 자신만만하거나 심지어 교만하게도 들릴 수 있는 표현인데
바오로가 그런 표현을 자신 있게 쓸 수 있었음은
자기가 성령에 이끌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곳곳에 어느 지방으로 가는 것을 성령께서 막으셨다는 표현과
성령께서 일러주셔서 어디로 갔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바로 그런 거지요.
다가오는 주일이 성령강림 대축일인데
성령께서 우리에게 강림하시어 우리가 성령에 충만하고 이끌릴 수 있도록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권고대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말아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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