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5월 19일 부활 제7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1. 5. 19. 06:57

2021 5 19일 부활 제7주간 수요일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요한 17,11ㄷ-19)


"Holy Father,

keep them in your name
that you have given me,
so that they may be one

just as we are on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고 성부께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기쁨을 충만히 누린 이들로 이 세상은 변화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것처럼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회칙 「복음의 기쁨」에서 ‘세상의 소비주의와 자기만족의 탐욕스러운 마음과 가벼운 쾌락에 대한 무절제한 추구, 무뎌진 양심은 우리에게 세상의 만족만을 찾게 하고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기쁨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한다.’(2항 참조)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것만 찾으려는 마음을 지닌다면 더 이상 충만한 기쁨의 삶을 살지 못하고 성령 안에서 사는 삶도 살 수 없습니다. 충만한 주님의 기쁨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언제나 새로운 기쁨을 누립니다. 이 기쁨은 주님께서 누구에게나 주시는 기쁨으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얻어집니다. 주님과 인격적 만남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다면, 기도의 깊은 기쁨 속에서 주님을 체험하기 어렵다면, 먼저 내 주변의 이웃이나 가까운 가족과 지인에게 나눔을 통하여 다가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고 전합니다.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나 누구도 빼앗아가지 못하는 충만한 기쁨으로 살아갑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웃에게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린 자녀는 부모의 품을 너무나 좋아하고 편안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부모의 품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 아이는 펑펑 울게 됩니다. 이런 아이를 가리켜서 낯을 가린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아이가 안전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그 안에서 안전하고 편안하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한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자신의 실수를 나누는 것입니다. 실수를 말할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커다란 편안함과 안전감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실수를 나누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사실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여기에 이 실수를 받아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도저히 지금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즉, 나의 실수를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미 이 땅에 온 하느님 나라를 묵상합니다. 그 나라는 실수를 나눌 수 있는 사랑 가득한 곳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것 같습니까? 실수를 받아들입니까? 조금의 실수에도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물어뜯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모습은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지워나가는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무엇일까요? 타인의 실수도 받아들이고 또 나 자신의 실수도 편안함을 느끼고 드러낼 수 있는 관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하느님 안에서 하나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위해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당신 스스로 이 세상을 떠나실 일을 내다보시면서,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주님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더군다나 세상은 이들을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을 미워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활동하셨지만, 세상과 절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의 정반대 편에 서 있는 사랑만을 말씀하셨고 또 당신의 몸으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의 뜻을 따르면 편하고 쉬운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참 행복에 이르기를 원한다면 세상의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거룩해지기를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일치를 이루기를 기도하십니다. 이 기도에 맞게 우리도 그런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지길 바라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커다란 편안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살다 보면 우리의 삶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가 그것을 피하고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파울로 코엘료).


질문을 던지세요.

두 사람이 싸우고 있습니다. 서로 레몬을 갖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레몬은 딱 한 개. 이 레몬을 원하는 사람은 두 사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한 명이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둘 다 레몬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 둘의 모습을 본 어떤 분이 그들에게 왜 레몬이 필요한지를 묻습니다. 한 명은 레몬 향수를 만들려 했다고 말합니다. 다른 한 명은 레모네이드를 만들겠다고 합니다.

이 질문으로 인해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향수는 레몬 껍질로 만들고, 레모네이드는 껍질을 뺀 알맹이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요구를 제대로 질문하지 않는 우리입니다. 지레짐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법이 없다며 단정을 짓습니다.

주님께도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 안에서 질문을 던져 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언제라도 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뿐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도 역시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시고 아버지께 교회를 위해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가신다고 하면서도 제자들이 거룩해지기를 원하십니다.

​    무엇이든 ‘성령’으로만 거룩해집니다. 성령, 사랑, 생명, 신성, 영광 등과 오늘 복음의 ‘이름’은 다 같은 의미입니다.

​    우리도 성령을 받으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거룩해집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를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의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세상의 고통 속에서도 기쁠 수 있을까요?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면 그럴 수 있습니다.

​    요한복음에서의 ‘세상’은 마치 지옥과 같은 뜻입니다. 이 지옥으로 예수님께서 먼저 뛰어드셔서 우리를 구하러 오셨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다면 동시에 기쁠 수 있을까요? 언젠가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다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감옥생활이 삶의 전부라면 그 속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지만 오히려 그것은 타인을 괴롭히고 자신을 파괴하는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전에 ‘프리즌 브레이크’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을 받아 갇혀 있는 형을 구하기 위해 동생이 죄를 짓고 감옥으로 들어간다는 내용입니다.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동생은 온몸에 자신만이 해석할 수 있는 문신을 새깁니다. 그 문신 안에는 감옥의 지도와 탈출할 모든 방법이 들어있습니다.

    감옥 안에서는 권력의 다툼이 치열하고 이러나저러나 고통뿐입니다. 모두가 탈출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고통입니다. 어디든 원하는 때에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라면 그곳이 지옥입니다.

​    만약 물에 빠졌다고 합시다. 그런데 언제든 나올 수 있다면 그것은 수영하는 것이고, 나올 수 없다면 익사 직전입니다. 세상도 그렇고 감옥도 마찬가지입니다.

​    언제든 나올 수 있다면 간수이고 그렇지 못하면 수인입니다. 수인인 상태에서는 아무리 행복을 찾으려 하더라도 자신도 고통이고 남도 고통스럽게 할 뿐입니다.

    여기서 ‘쇼생크 탈출’도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직 주인공만이 탈출할 구멍을 팠습니다. 그 주인공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지만, 주인공은 자신도 음악을 듣고 수인들도 음악을 듣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아프지만 한 번만 맞고 독방에 며칠 머무르면 그만입니다. 아무도 그런 고통을 감내하려 하지 않았지만, 주인공은 즐겁게 음악을 들으며 마당의 수인들에게 스피커로 음악을 들려줍니다.

    이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은 감옥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뿐입니다.

​    그러나 이 감옥에서 나가는 법을 모른다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조금 더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찍어누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복이라 여깁니다.

​    하지만 언제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수영선수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수영을 즐기다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조금 힘이 들지만, 그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왜 예수님께서 그토록 ‘기쁨’을 강조하시는지 그 이유를 말해 줍니다.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도 역시 감옥에서 생활하면서도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갈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도 목숨을 잃을 두려움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자신도 행복하지 못하고 누구도 도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길이 몸에 새겨져 있는 사람들처럼 세상의 모든 시련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기뻐야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면 신학생들이 제일 걱정하는 것이 공부를 못 하거나 아니면 사고를 쳐서 신학교에서 쫓겨나는 일입니다. 규율이 매우 엄격합니다. 그런데 저는 1학년 때부터 몰래 술을 마셨고 불법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이 자랑은 아닙니다. 다만 쫓겨나도 성 프란치스코처럼 살면 된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와 함께 술을 마신 동기가 방에서 토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술도 마셨겠다 그 친구의 토한 것을 치워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제가 세면실에서 소리를 좀 크게 질러서 학생 지도 신부님까지 들이닥쳤습니다. 사실 그 신학생이 저 때문에도 많이 마신 이유가 있는데, 그리고 소리를 지른 것도 저인데, 그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신 소공동체는 1달간 외출 금지를 당했고 저는 친구가 토한 것을 치워주는 약간 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잘했다는 말이 아니라, 만약 제가 술을 마신 것 때문에 찍혀서 쫓겨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면 그 토한 것을 치우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것입니다. 만약 신학교가 나갈 수도 없고 나가면 큰일 나는 감옥과 같은 곳이라고 여겼다면 남을 도울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은 세상에서 죽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탈출할 수 있는 구멍은 십자가입니다.

​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탈출해 그리스도처럼 아버지께 가는 길을 알고 있다면, 세상이 아무리 큰 시련을 주더라도 잘 견뎌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타인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세상의 시련 가운데서도 구원의 확신으로 항상 기쁘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    먼저 행복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조재형신부-


와인을 마실 때입니다대부분의 와인은 코르크로 마개가 되어 있습니다와인 따개가 있어야만 코르크를 빼낼 수 있습니다아무리 좋은 와인이 있어도 와인 따개가 없으면 곤혹스러울 때가 있습니다도서관에는 책이 많습니다그러나 원하는 책을 찾으려면 분류법을 알아야 합니다분류법을 모르면 쉽게 책을 찾기 어렵습니다인터넷의 검색 엔진은 수많은 정보 중에서 원하는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비슷한 말과 주제를 입력하면 관련된 많은 정보들을 검색할 수 있습니다정보의 바다에서 유익한 정보필요한 정보원하는 정보를 찾는 능력이 중요합니다비대면이 일상이 된 요즘에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는 신부님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놀랍기도 합니다책을 주문하는 것은 할 수 있지만 아직 다른 것들에 도전하기에는 부담이 됩니다.

 

한국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인터넷에 접속하기 어려우신 어르신들을 위해서 만 명의 봉사자들을 양성했다고 합니다봉사자들은 어르신들의 가정에 방문해서 어르신들이 물건을 익숙하게 주문할 수 있을 때까지 알려주었다고 합니다어르신들은 음식을 주문할 수 있었고원하는 물건을 주문할 수 있었습니다아무런 비용을 받지 않고 무료로 알려드렸다고 합니다다만 어르신들이 물건을 주문하면 그 중에서 소정의 수수료를 봉사자들이 받았다고 합니다인터넷에 익숙하지 않는 어르신들을 위한 신선한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봉사자들은 어르신을 도와서 좋고기업은 이익이 생겨서 좋고어르신들은 비대면 시대에 원하는 것을 구해서 좋습니다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였습니다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였습니다코로나19의 비대면 시대에도 신앙의 길을 충실하게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오히려 영적인 성숙의 기회를 만드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의 원로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바로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진리를 왜곡하는 말을 하며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꾀어내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그러니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도 갈등과 분열이 있었습니다열심한 사람에 대한 질투와 모함이 있었습니다하느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세상의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사람이 살지 않는 집에는 먼지가 쌓이듯이 공동체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악의 유혹이 자리 잡기 마련입니다바오로 사도는 늘 깨어 있으라고 당부합니다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고 당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제자들에게 닥쳐올 박해와 시련을 예견하셨습니다유대인 공동체와 이방인 공동체의 갈등과 분열도 예견하셨습니다교회가 커지고 조직화 되면서 소외되는 사람이 생기는 것도 예견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두 가지 청원을 하셨습니다제자들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청하셨습니다진리로 거룩하게 되기를 청하셨습니다그 진리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듯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갈등과 아픔을 만나게 됩니다산을 넘으면 또 산이 나오듯이 우리는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그런 가운데 기쁨도 찾아오고슬픔도 찾아오고즐거움과 분노도 찾아옵니다모든 갈등과 아픔을 벗어나서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은 없습니다중요한 것은 그런 고통과 아픔을 이겨 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 여정, 엄청 긴 것 같지만, 사실 찰라요 순간입니다!

 -양승국신부-

 

바오로 사도께서 정말이지 대단한 분이시라는 것을 요즘 새삼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열심히 복음 선포에 매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동료들의 생계를 위해, 신자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직접 일을 하셨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사도행전 20장 33~35절) 

 

바오로 사도께서 스스로 밝히신 바처럼, 그는 틈만 나면 천막 짜는 일을 하면서 자신과 동료들의 의식주를 책임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언제나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고 거칠 것 없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저 역시 요즘 바오로 사도 비슷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복음 선포를 위해서도 노력하지만, 눈 뜰때 부터 눈 붙일 때 까지, 하루 온종일 청소부로, 세탁부로, 잡부로 관리인으로 이리 저리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하루 온종일 잠시도 앉아 있을 틈도 없이 뛰어 다니다보니, 몸은 고달프지만 좋은 점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저녁먹고 나면 벌써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자리에 눕자마자 몇분도 지나지 않아 초스피드로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그렇게 빠지지 않던 뱃살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더 좋은 일이 있습니다. 아마도 육체 노동이 주는 은총인가 봅니다. 내 손으로 뭔가 이웃과 세상을 위해 작은 기여지만 하고 있다는 생각에, 무척 보람되고 마음이 뿌뜻해집니다. 하루 온종일 사무실 컴퓨터 앞에서, CEO로 일하던 시절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일입니다.

  

아마 바오로 사도 역시 그러셨을 것입니다. 복음 선포도 열정적으로 하셨지만, 그에 못지 않게 자신과 동료들의 하루 삼시 세끼 해결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동료 인간들이 세상 안에서 겪는 우여곡절과 구체적인 삶에 더욱 공감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사도행전 말씀은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 교회 교우들에게 남기는 고별사인데, 분위기가 꽤나 숙연합니다. 무척이나 감동적입니다.

 

이제 달릴 곳을 다 달린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앞으로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은 스승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그대로 걷는 것 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분위기가 숙연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흐느껴 울면서 바오로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오로의 말에 마음이 매우 아팠던 것이다. 그들은 바오로를 배 안까지 배웅하였다.”(사도행전 20장 36~38절)

  

우리네 인생 여정, 엄청 긴 것 같지만, 사실 찰라요 순간입니다. 매번의 만남들이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그 어떤 만남, 그 어떤 사람과의 만남이라 할지라도 오늘의 만남을 내 생애 마지막 만남으로 여기고 정성과 사랑을 다해 만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이번 만남이 내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마지막 만남으로 생각하고, 정성껏 상대를 위해 기도하고, 최대한의 품위와 예의를 갖추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아버지의 영광의 현현을 위한 기도에 이어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이 아버지께 속한 이들임을 재확인하면서 제자들을 세상의 악에서 지켜주시고그들이 하나 되고 거룩해지기를 간청합니다.

여기서유의할 점은 “아버지의 이름”입니다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6절),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11절),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12절),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었고, 앞으로도 알려주겠습니다.”(26절)

 

“아버지”라는 이름은 하느님보다 그분의 속성을 더 정확하게 드러냅니다여기서“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낸다는 것은 아버지의 실체에 관한 모든 것곧 그분의 존재와 본성그분의 거룩함과 정의와 사랑그분의 능력과 보호와 신실하심을 드러냅니다.

사실, <성경>에서 기도에 대한 가장 처음 언급된 곳이라 할 수 있는 <창세기>에서도 그 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곧 아담의 셋째 아들인 셋에게서 에노스가 태어나자“그때부터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창세 4,26)또한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바칠 때도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1열왕 8,29)하신 분께 기도를 바쳤고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루카 11,2)라고 가르치셨으며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필립 2,9)을 주셔서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립 2,10)라고 말합니다.

 

이제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공적 소명을 끝내시면서그 소명을 이어가게 될 제자들이 “하나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신적일치에 ‘하나’ 되도록 기도하십니다곧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보호받고아버지와 당신의 하나 됨을 체험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그러니 ‘하나 됨’은 그리스도란 이름을 통하여그리스도 안에서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룬 것을 말합니다그러나 이처럼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과 말씀을 주셨고 성령으로 제자들이 아버지께 속하게 되었지만(아우구스티누스)세상은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미워할 것입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그들을 지켜주시기를 청하면서 기도하십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7)

 

그렇습니다“아버지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진리이십니다사실당신께서는 “나는 진리이다”(요한 14,6)라고 스스로 계시하셨습니다그러니 우리는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얻고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됩니다그러니 진리이신 말씀을 행함으로서 우리 안에 거룩함은 더욱 자라게 됩니다아멘.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송영진신부-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요한 17,14-15).”

 

1)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주었는데’ 라는 말은, 뜻으로는 ‘주었기 때문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뜻에 따라서, “제가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기 때문에

세상이 이들을 미워합니다.”로 바꿔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말씀을 주다.’ 라는 말은,

“제자로(신앙인으로) 특별히 선택해서 뽑다.” 라는 뜻입니다.

세상이 신앙인들을 미워하는 일은,

‘뽑히지 못한 사람들이 뽑힌 사람들을 미워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불공평하게 사람들을 차별대우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뽑히지 못한 사람들은 실제로는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부르신 일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뽑힌 사람’이 되고,

복음을 외면하고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뽑히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뽑히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안 뽑으신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뽑히기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2)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은,

‘신앙인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다.’ 라는 말은 ‘세상과 다르다.’ 라는 뜻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신앙인들의 삶’은 ‘구원받기 위해서 회개하는 삶’이고,

‘세상 사람들의 삶’은 ‘구원받는 일에는 관심 갖지 않고

죄 속에 머물러 있는 삶’입니다.

“삶의 방식이 다르면 다른 대로 그냥 다르게 살지 왜 미워하고 박해할까?”

미움과 박해를 받는 신앙인들 입장에서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지만,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사람들 자신들도

자기들이 왜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심이 작용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열등감이 작용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본능적으로 죄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의 율법에 ‘그들은 까닭 없이 저를 미워하였습니다.’ 라고

기록된 말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15,25).”

(이 말씀은 박해자들의 미움과 박해에는 정당한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들의 미움과 박해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3)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산다는 이유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에 ‘다르지 않게’ 산다면

미움과 박해도 멈추게 됩니다(요한 15,19ㄱ).

그러나 신앙인이 비신자들과 ‘다르지 않게’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ㄱ).”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처지는

이리 떼 가운데에 있는 양들과 같은 처지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양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이리 떼를 양들로 변화시키는 것.

(만일에 양들이 이리로 바뀐다면, 몸은 살겠지만 영혼은 죽게 됩니다.

그것은 이리로서 ‘몸만’ 사는 것이고 양으로서는 죽는 것입니다.)

 

4)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신앙인들)에게는 세상에서 할 일이 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악을 물리침으로써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기를 희망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에는,

신앙인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과 박해를 받을 때,

예수님께서 신앙인들을 지켜 주시기는 하지만,

그 고난과 박해 자체를 없애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를 예고하신 예수님 말씀을 보면,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라는 약속만 있고,

박해 자체를 없애 주겠다는 약속은 없습니다.

(‘끝까지’는 ‘죽을 때까지’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는 그가 겪은 온갖 고난들과

박해들이 기록되어 있는데(2코린 11,23-33),

그 일들을 겉으로만 보면, 주님의 도움과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고생만 한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겪은 그 많은 고난들과 박해들에 대해서,

“나는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다.” 라고 말합니다(2코린 12,10).

이 말은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과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기준으로 보면 진리입니다.

만일에 바오로 사도가 돈이 아주 많은 부자여서

‘돈의 힘’으로 어려움들을 모두 극복하고, 편안하게 선교활동을 하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면, 그것은 ‘주님의 힘’으로 한 ‘주님의 일’이 아니라,

‘돈의 힘’으로 한 ‘세속의 일’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건강하지도 않은 몸으로, 돈도 없이, 끊임없이 모진 고난과 박해를

겪으면서 쉬지 않고 선교활동을 해서 큰 성과를 거둔 것은 분명히 사람의 힘으로

한 일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한 일이라는 것을 잘 드러냅니다.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다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5)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이 말씀은, 신앙인들이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신앙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라고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만일에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그렇게 사는 것을 포기하고 중단하면, 몸은 편안해지겠지만,

영혼은 구원의 반대쪽을 향해서, 즉 멸망을 향해서 가게 됩니다.

그렇게 힘들 때에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끝까지 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복음: 요한 17,11-19: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조욱현신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11절) 예수께서는 당신이 지켜주셨던 이들을 이제 아버지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지켜주시기를 기도하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하신다. 하나라는 말은 ‘어떤 조화를 이룬 상태’로 서로 다른 것들이 모여 조화, 일치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제자들이 주님의 사랑 안에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지켜오셨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께서 주신 것을 하나도 잃지 않을 것(요한 6,39 참조)이라고 하셨다. 그들이 잊은 사람이 되는 것은 그분이 버리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떠나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다. 당신이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선택의 결과이다. 그래서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12절) 하신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13절). 이 기쁨은 바로 일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다. 그들이 참으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기쁨은 충만해지고 이것이 장차 올 세상의 평화와 행복이다. 그것을 차지하려면 이 현세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충실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 주셨는데,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했다. 그것은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14절) 세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 때문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2코린 4,18)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를 미워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을 악에서 지켜주십사고 빕니다.”(15절) 기도하신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18절) 예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신 것은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이며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아버지의 말씀은 바로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아드님께서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제물로 바치셨듯이 제자들도 자신의 삶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 그리하여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19절) 라는 기도를 이루어야 한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로마 12,1)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이 거룩하게 되도록 언제나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는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질 것이다. 진리는 한 처음부터 계시던 하느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육안에서 하느님에 의해 거룩해지는 동시에 당신의 신성으로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그분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요한 17,14)
이것이 바로 세상과 말씀의 상관관계입니다. 세상은 말씀을 달가워하지 않지요. 영혼을 어둠과 절망과 악으로 끌어내리려는 세상의 힘은 말씀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주님이신 말씀께서 영혼을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으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요한 17,15)
예수님은 당신이 떠나신 후에 이 세상에 남아, 혼탁하고 거친 물살을 역행하며 복음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제자들이(우리가)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기를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두 하늘 나라로 데려가시지도 않고 그렇다고 악을 싹 다 없애버리시지도 않으시지요. 이 세상에서 악과의 동행. 그것이 제자인 우리에게 펼쳐진 길입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7)
이 기도에는 죄악과 어둠으로 손짓하는 세상에서 주님의 길을 벗어나지 않고 영혼의 순수성과 거룩함을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이 들어 있습니다. 곧 진리이신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소금에 절여지지만 살아 있는 물고기는 소금기 짙은 바닷물 속에서도 펄펄 살아 움직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말씀으로 깨어있는 영혼은 세상 유혹과 악에게 점령되지 않고 오히려 말씀의 빛으로 어둠을 밀어내며 영혼을 지켜냅니다. 자기의 영혼만이 아니라 공동체와 세상도 정화하는 힘이 바로 말씀의 힘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 역시 남은 이들을 염려하며 해법을 제시합니다.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 양 떼를 해칠 것임을 나는 압니다."(사도 20,29)
사실 악은 너무나 일반화되어서 마치 세상에 악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미화합니다만, 세상에 악은 분명 존재합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함께 식별하고 길을 명확히 제시해 줄 스승이 부재한다는 사실은, 아직 약하고 여리고 미숙한 영혼에게 큰 어려움이 되지요.

"이제 나는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굳건히 세울 수 있고, 또 거룩하게 된 모든 이와 함께 상속 재산을 차지하도록 여러분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사도 20,32)
스승이 떠난 자리에 남아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제자들(우리)에게 말씀은 영혼의 골수와 같아서 버팀목도 되고 지지대도 됩니다. 시시각각 방법을 바꾸어 다가오는 온갖 도전과 유혹 앞에서 성령의 영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말씀은 이를 극복하는 강력한 방패요 무기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실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가 아버지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으로 정화되어 거룩해지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아무리 악습에 물든 나약한 죄인이어도 말씀을 듣고 머물고 실행하는 우리의 숨은 노력을 가벼이 넘기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당신 말씀으로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시려 지치지 않고 중단 없이 매일 매순간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말씀이 우리 모두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어 순수함과 순결함을 되찾고 그분께 맞갖는 거룩한 영혼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은총의 말씀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어맡기며 살아가는, 말씀의 사람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김찬선신부-


오늘 바오로는 에페소를 떠나면서 교회의 원로들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원로들에게 하는 첫 말이 자신을 잘 보살피라는 말인 겁니다.

전에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양 떼를 잘 보살피라는 말만 보고,

자신을 잘 보살피라는 말은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 이 구절도

눈에 들어와 새삼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왜 전에는 이 구절을 보지 못했을까?

그리고 이번에는 이 구절이 어찌 눈에 들어왔을까?

 

전에 이 구절을 보지 못한 것은 제가 삶을 잘 못 살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너무 양 떼를 보살피는 것 또는 너무 남을 돌보는 것에

신경 쓰느라 정작 자신을 돌보거나 보살피지 못했던 거지요.

 

그러다 작년 하나의 계기가 제게 있었습니다.

대상포진과 자율신경 이상이 같이 제게 온 것인데

마라톤을 뛸 정도의 건강에 자신하고 있던 저에게

'어? 나도 아프네!' 하는 큰 것은 아니지만 놀라움이랄까 충격이 왔지요.

 

의사의 말이 둘 다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하는 거였습니다.

그때 제가 피식 웃으면서 '스트레스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그리고 '나는 요즘 큰 책임을 다 놔서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다고.' 하니

 

의사가 하는 말이 이런 분들이 더 문제라고 하면서

축적된 스트레스가 젊었을 때는 견딜 힘이 있어서 나타나지 않다가

나이 먹어 그러니까 힘이 전보다 떨어져서 나타나는 것인데

이제 자기 몸을 보살필 때가, 내 몸과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아주고 적절히 돌봐야 할 때가 왔음을 몸이 신호보낸 거라는 거였습니다.

 

감기몸살이라는 것이 몸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 때

자기 몸을 돌보라고 신체가 자구책으로 반응하는 것이듯

우리의 많은 병이 평소에 잘 보살피지 않아서 오는 것이지요.

 

보살피라는 말이 보고+살피라는 말인데 우리는 사랑 때문에

그러니까 내가 돌봐야 할 사람을 신경 쓰느라 그럴 수도 있고,

사랑 때문이 아니라 괜히 눈치를 보거나 정신없이 살다 보니

나는 안 보고 남만 보는, 그래서 자기를 살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 바오로가 자신을 보살피라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거나 몸뚱어리를 보살피라는 것 이상의 얘기지요.

 

자신이 하느님 말씀에 늘 깨어있는지,

바오로가 삼 년 동안 애써 가르친 말에 깨어있는지,

금이나 은이나 옷과 같은 것들에 욕심을 부리고 있지는 않은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주님 말씀에 깨어있는지

원로들이 돌아보고 잘 살펴야 한다는 말이고

그래야 양 떼도 잘 보살필 수 있다는 거지요.

 

이렇게 자신을 보살피는 것은 마치 피정과 같이 모든 것을 떠나서

자신과 진실하게 대면하는 것이니 결코 이기적이지 않고,

설사 이기적이라고 할지라도 영적인 이기주의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바오로도 분명 자신과 양 떼를 잘 보살피라고 얘기했잖습니까?

그러니 이웃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도

자신을 잘 보살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이고,

자신과 대면하는 피정의 시간을 가져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 주십시오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11ㄷ-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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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서의 ‘세상’은 마치 지옥과 같은 뜻입니다. 이 지옥으로 예수님께서 먼저 뛰어드셔서 우리를 구하러 오셨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다면 동시에 기쁠 수 있을까요? 언젠가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다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 세상은 감옥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뿐입니다.

목숨을 잃을 두려움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자신도 행복하지 못하고 누구도 도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길이 몸에 새겨져 있는 사람들처럼 세상의 모든 시련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기뻐야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행복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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