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자료

수도생활의 간추린 역사/오상선신부-

Margaret K 2021. 5. 6. 21:14

수도생활의 간추린 역사

1. 들어가며

2. 홀로 걸으며: 사막의 은수자들

3. 함께 걸으며: 베네딕도회

4. 도시 속으로: 탁발 수도회

5. 세상 한가운데에서: 예수회

6. 수도자는 누구인가?

1. 들어가며

왜 수도 생활을 하고 싶은가? 왜 수도 생활을 하기를 원하는가? 왜 수도 생활에 관심이 있는가? 밑바탕에는 오직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고자 하는 깊은 갈망이 있다. 이 갈망이 수도 생활을 통해 하느님을 섬기고 싶도록 우리를 충동한다. 그러나 이 갈망은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마치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가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갈망의 반영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 갈망은 하느님께로부터 먼저 온다. 그러한 이유로 이러한 충동이 단순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 갈망이 주는 충동에 이끌려 기꺼이 수도 생활을 통해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사람들이 교회 내에 역사적으로 존재해 왔다. 오늘 강의는 먼저 매우 간략하게 수도 생활의 역사를 살펴볼 것이고, 결론적으로 이 수도 생활을 통해서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으로 하겠다.

2. 홀로 걸으며: 사막의 은수자들



안토니오 성인 (251-356)

그리스도교는 초기에 박해를 받아왔다. 이 박해 시기에는 순교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최상의 가치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공식화되면서, 수도 생활은 순교의 다른 형태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안토니오 성인을 본격적인 수도 생활의 시작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안토니오 성인은 중부 이집트에서 홀로 은수 생활을 한 분으로서 “첫 수도승(the first monk)” 혹은 “수도승의 아버지(father of monasticism)”로 불렸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 19:21).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한 이 말씀을 안토니오 성인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사막으로 떠나서 홀로 살았다. 즉, 무소유의 정신 그리고 복음의 가치를 온전하게 실천할 수 있는 장소로 사막을 강조하였다. 사막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생활의 편리함을 누릴 수 없는 곳이기에 역설적으로 오직 하느님께만 의지하며 살아가기에 알맞은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막으로 간 것은 세속을 떠난 것이지, 세상을 도피한 것은 아니다. 안토니오 성인이 수덕 생활이 깊어지며, 그분의 덕이 높아지자, 사막에 있는 이 성인에게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사막에 도시가 생겼다고 말할 정도였다.

3. 함께 걸으며: 베네딕도회

독수자 형태의 수도 생활이 점차 공동생활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처음 알려진 공동생활 형태의 수도원은 “공주 수도회의 창설자(founder of cenobitic monasticism)”로 불리는 파코미우스(c. 290-346)가 세웠다.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회의 대표적인 경우는 베네딕도회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누르시아의 베네딕도(c. 480-543 또는 547)는 ‘베네딕도회 수도 규칙서’를 6세기에 저술하였는데, 이 규칙서는 6세기부터 10세기를 거치며 추후 서방 교회 수도 생활의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규칙서에 따르면 베네딕도는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승들을 “수도원 안에 살며, 규칙과 아빠스 밑에서 분투하는 이들이다”라고 정의한다. 이 세 가지가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살아가는 세 가지 뼈대를 이룬다. 수도원 안에서 살기 때문에, 정주 서원(stability)을 하며 형제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며 하느님을 찾아 나가는 여정을 걸어 나간다. 이 여정에서 규칙은 복음을 살아나가는 구체적 지침이 되고, 아빠스는 형제들과 함께 있으면서 또한 동시에 마치 ‘그리스도의 대리자’ 혹은 ‘목자’처럼 형제들을 보살핀다.

베네딕도 수도회는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라는 모토를 살고 있다. 수도원에서 정주하며(stability) 함께 기도하고 노동을 하며 살아간다. 또한 “콘베르사시오 모룸”(Conversatio Morum: 문자적 의미는 “관습의 회개”)을 살아감을 통해 지속적으로 쇄신의 삶을 살아간다.

4. 도시 속으로: 탁발 수도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탁발 수도회(mendicant, 또는 자선을 구걸)는 13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수도 공동체이다. 가난에 대한 특별한 강조와 예수님을 따르던 초기 제자들의 모습의 삶에 주안점을 둔다. 프란치스코회(1208/9년 창설), 도미니코회(1215년에 스페인 사람 도미니코가 프랑스에서 창설) 등이 탁발 수도회에 속한다. 탁발 수도회 수도자들은 특별히 마을 혹은 도시에서 살고 있는 평신도들에게 매우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영적인 생활과 사목적인 생활 이 양자를 통합시키는 데에 공헌을 하였다(예를 들면 제3회). 탁발 수도회는 그 당시 사회의 필요에 대해서, 기존에 내려오던 수도원(monasticism) 위주의 정주하는 수도 생활에서 벗어나 보다 더 자유롭게 마을과 도시를 다니며 설교, 영적 지도, 교육 등을 통해 사람들의 영적 요구에 응답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공동체 구조 또한 도시에 사는 일반 사람의 필요에 더 알맞게 응답하기 위해 지어지기도 하였다.

5. 세상 한가운데에서: 예수회

1540년에 이냐시오 로욜라와 그 동료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예수회(Compania de Jesus: Societastis Iesu; The Society of Jesus)가 창설되었다. 이냐시오와 그 동료들은 자신의 우두머리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기에 자신들이 창설하게 되는 수도회의 이름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들어가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기존의 수도회처럼 창설자의 이름이 수도회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예수회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예수회는 “하느님의 더 큰(magis) 영광을 위하여”라는 모토 아래 살아간다. 이 모토에 들어 있는 “더 큰” 곧 마지스( magis, more)는 이냐시오 영성을 특징짓는 말들 중의 하나이다. 예수회 제34차 총회 문헌에서는 마지스를 이렇게 정의한다. “성 이냐시오의 세계관 속에는 ‘평범’이 설자리가 없다. 예수회원들은 현재의 상태(status quo), 이미 알려진 것, 이미 시도해 본 것, 이미 존재하는 것에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magis”를 발견하고, 재규정하고, 도달하기 위해 달려 나간다. 우리에게 한계와 경계는 장애물이나 끝이 아니라 맞서야 할 새로운 도전이며, 반갑게 맞아야 할 새로운 기회이다. 과연 우리는 우리 행동 양식의 전형인 “일종의 사도적 적극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룩한 대담성을 가져야 한다”(GC. 34, n. 560-561).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라는 모토는 “영혼을 돕는 것”(helping souls)으로 구체화된다. 따라서 예수회의 영성은 매우 강생적이다. 이웃을 돕기 위해서 세상 속으로 더욱 투신하여, 세상 한가운데에서 다른 이의 영혼 구원을 위해 일을 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현대 세계에서 영혼을 돕는다는 것은 성 이냐시오의 영신 수련의 정신에 입각하여 인간이 맺고 있는 하느님-이웃-피조물과의 삼중적 관계를 바르게 세우는 일에 투신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예수회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는 곳이면 세상 그 어느 곳으로든 파견되는 사람들이다. 특히 다른 이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 세상의 최전선으로 파견되어 바로 그곳에서 불을 놓은 불씨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See GC. 35 D. 2). 나달 신부는 “교구 사제와 주교들이 있는데 왜 예수회원들이 있어야 하는가? 그는 필요가 충족되지 못한 곳에 파견되는 곳이 우리의 은사이며 진정한 존재 이유라고 간단히 대답한다”(GC. 34. n.556).

이 목적을 위해 예수회원들은 그 어디에라도 즉각 파견될 수 있는 기동성(mobility), 자기 자신을 언제든지 내어놓을 수 있는 준비성(availablity), 어떤 환경에서라도 살아갈 수 있는 적응성(adaptability)의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어느 곳으로든 파견되는 예수회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나달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회에는 네 가지 종류의 집 혹은 거주하는 장소가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하는 바, 그 집은 “시험기에 있는 집, 연학 수사들이 사는 집, 최종 서원을 마친 사람들이 사는 집, 그리고 여정이다. 바로 이 네 번째 집으로 인해 세계가 우리의 집이다.”

이러한 사도적 삶, 활동적 삶은 그들의 기도 생활에도 영향을 미쳐, 기존의 수도회에서 실천해 오던 기도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도 생활을 수행한다. 그 당시 수도회에서 모두 함께하는 공동 성무일도를 회원 각자가 개인적으로 하도록 하고, 특정한 수도복을 입지도 않았기에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회가 과연 수도회가 맞는가 하고 의구심을 가질 정도였다. 이와 반면에, 예수회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냐시오 성인이 말한 것처럼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려는 사람들이며, 이를 위해 나달이 이야기 한 것처럼 “활동 중에 관상”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그 당시 사고로 예수회의 출현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6. 수도자는 누구인가?

수도 생활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발전 과정은 그리스도교 초기의 수도 생활이 현대보다 못하다는 의미에서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수도 생활의 형태나 삶의 양식이 매우 다양해졌다는 면에서 발전이라고 말한 것이다. 즉 그만큼 풍성해졌다는 뜻이다. 이 다양함과 풍성함은 각기 다른 시대와 전통과 문화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들이 살고 있는 그 기대 안에서 복음의 초대를 더욱 라디칼하게 응답하는 과정 중에 형성되었다. 복음의 초대를 현대 세계 안에서 더욱 라디칼하게 응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간단히 말해서, 수도자는 누구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모든 세례 받은 이가 거룩하게 살도록 불림 받았다고 선언한다(LG. 39). 즉 Universal Call to Holiness- 모든 세례 받은 이가 거룩하게 살도록 불림 받았다. 어떤 이들은 수도 생활을 통하여 이 불림 받음에 응답하고자 한다. [[수도 생활로 불림 받은 이들 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관상 수도회로 또 어떤 이들은 활동 수도회로 입회하여 이 불림 받음에 응답하고자 한다. 물론 관상 생활과 활동 생활은 삶의 방식의 차이이지 각자가 추구하는 목표점은 같다. 예를 들어,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관상 생활의 정점에까지 올라가 다시 밑으로 내려오신 분이며, 이냐시오 성인의 경우는 바닥에서 시작해서 관상 생활의 정점으로 올라간 분.]]

수도자는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해 세속을 떠나 사는 사람이다. 현대적인 용어로 말하자자면, 그 삶을 통해 대항문화적 가치, 즉 복음적 가치를 더욱 라디칼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비단 수도자 뿐만 아니라 사실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삶의 형태는 구체적으로 복음 삼덕 즉, 청빈/정결/순명이라는 서원의 삶을 자발적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기 위해 복음적 포기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 내어줌은 단 한 번의 결정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닌, 긴 여정이다.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먼저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 우리를 끊임없이 충동하며 그분을 향한 우리의 갈망을 더욱 깊게 하는 하느님, 다른 모든 삶의 형태보다도 수도 생활만이 내게 있어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유일한 길임을 깊이 인식하며, 하느님만을 유일한 내적 기쁨의 원천으로 삼아 하느님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는 여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우선적으로는 예수님이라는 이 인물에 미쳐서 이 사람처럼 살지 않으면 내 삶에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더욱 철저히 닮아 예수님처럼 살아가고 싶은 충동과 갈망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다.

수도자가 인간적으로 강해서 이 여정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강할 때에는 내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할 공간이 줄어들기에, 수도 생활은 더 힘들어진다. 그러기에, 자신이 매우 약한 존재임을 더욱 깊이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자신의 약함 안에 하느님께서 더욱 힘차게 활동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며, 그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철저히 의지하여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다.

성찰 질문: “너 어디 있느냐?”

- 수도 생활은 매우 이상적인 생활 살아가기를 꿈꾸며 사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항상 현실에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그런 면에서 나의 현실은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하느님이 우리 각자 한 명 한 명에게 물으신다. “너 어디 있느냐?”

우리의 갈망이 이끄는 곳은 어디인가? 이 갈망이 하느님의 뜻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수도 생활은 흔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도피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적극적인 투신이다. 하느님께 나 자신을 더욱 radical 하게 투신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다. 바로 거기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더욱 깊이 깨닫는 삶이다.

-하느님을 향한 나의 갈망은 어느 형태의 삶으로 부르는가?

우리 각자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대하여, 수도 생활을 통해서 하느님의 이 초대에 응답하고자 하는가? 아니면 결혼 생활 혹은 독신 혹은 교구 사제의 삶을 통해서인가? 혹은 카르투시안? 트라피스트? 베네딕도회? 탁발 수도회? 예수회? 하느님을 향한 나의 갈망은 어느 삶의 형태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자 하는가?

7. 새로운 수도 생활 패러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