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2월 8일 연중 제5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1. 2. 8. 07:33

2021년 2 8일 연중 제5주간 월요일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마르코 6,53-56)


Whatever villages or towns or countryside he entered,
they laid the sick in the marketplaces
and begged him that they might touch

only the tassel on his cloak;
and as many as touched it were heal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하느님 말씀이 담긴 성경. 그 성경의 첫 시작을 우리는 오늘 만납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나온 세상과 인류의 기원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비교하자면 조금은 황당하고 비이성적으로 다가오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는 창세기의 저자가 세상이 창조되는 그 순간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기록하거나, 과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증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신앙의 언어로 기록한 신앙 고백문입니다. 그리고 신앙 고백의 정점에는 ‘창조’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창조’는 무에서 유를 이끌어 내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힘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구약 성경 전체에서 하느님께서만이 ‘창조하다.’라는 동사의 주어가 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창조하시는 힘은 ‘말씀’으로 실현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는 것이지요. 창조의 재료는 오로지 ‘말씀’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말씀이 지닌 힘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첫 장면부터 하느님 창조의 힘과 그분 말씀의 힘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창조하신 이 세상에 대하여 하느님 당신께서 보시니 좋으셨다고 평가하십니다. 창조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말씀이 창조한 ‘세상’과 세상을 창조한 ‘말씀’을 마주합니다. 말씀이 창조한 세상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한 말씀은 우리를 좋은 세상으로 초대합니다. 오늘 화답송과 같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이루신 일을 기뻐하셨습니다. 보시니 좋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마주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세상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긍정심리학에서는 행복의 정의를 타고난 ‘고정요인’과 ‘삶의 상황’, 그리고 ‘의지적 활동’의 종합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고정요인’은 유전적으로 정해진 개인의 특성을 가리키고, ‘삶의 상황’은 나이, 성별, 교육 수준은, 수입 등 외부적 요건을 일컫습니다. 마지막으로 ‘의지적 활동’이란 개인의 동기와 의지에 의한 자발적인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행복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일까요? 개인의 ‘고정요인’은 자그마치 50%를 가리킵니다. 2등은 외부적인 요인인 ‘삶의 상황’ 같지만, 이는 10%의 영향만 미칠 뿐이라고 합니다. 40%의 영향을 미치는 2등은 개인의 ‘의지적 활동’이었습니다.

사실 행복에 있어서 60%의 조건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60%에 따라서 행복이 무조건 결정될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40%를 통해 우리는 얼마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10%의 외부적 요인인 ‘삶의 상황’이 행복을 결정하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0%의 ‘의지적 활동’을 간과합니다.

자신을 스스로 행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나의 의지를 깎아내려서 불행의 길로 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세우는 의지가 나의 행복을 결정할 것입니다.

복음을 보면 많은 사람이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언제 어디로 데려오라고 하셨을까요? 배를 타고서 언제 도착할 테니 배가 도착할 때 맞춰서 오라고 하셨을까요? 치유를 위해서 어떤 약을 준비하라고 하셨나요?

모두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를 세워서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워낙 많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의 치유를 위해 자신의 의지를 내세워서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개 해 주십시오.’라는 청도 합니다. 그 결과는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 ‘고정요인’만을 찾고 있었다면, 또 ‘삶의 상황’만을 따지고 있었다면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놀라운 구원의 결과를 얻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무조건 우리의 의지대로 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의지적 활동이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할 일이란 얼마나 작은 것인가(아모스 오즈).


비폭력대화

사소한 것으로 말다툼을 하던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살 거면 이혼하자.”

이 말을 들은 아내는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뭐? 당신 말 다 했어? 그래 이혼해!!”

사실 말다툼하게 될 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폭력적인 말이 툭 튀어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비폭력 대화로 바꿔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관찰, 느낌 표현, 욕구 전달, 부탁의 4단계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요.

관찰: 당신이 “내가 미쳤지. 저런 인간과 결혼하다니” 하면서 내 옷을 던졌을 때.
느낌: 나는 서운했어.
욕구: 우리가 서로 존중하고 고마워하면서 행복하게 살면 좋겠는데.
부탁: 당신이 뭐가 힘든지 얘기해 줄 수 있을까?

이렇게 4단계의 비폭력 대화를 하면 완전히 다른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요? 나의 대화 모습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까요?

 우리 자신도 공동체의 힘을 모른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께 데려오는 모든 병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사람들은 병자들을 들것에 눕혀 데려옵니다. 이 장면은 다시 네 명의 친구가 한 명의 중풍 병자를 데려와 치유를 받고 죄의 용서를 받는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힘을 지니고 있었는지 알았던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 전에 나오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물 위를 걸으신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가라앉히십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제자들은 아직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 안에 어떤 힘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니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할 때,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겐 그리스도께서 나누어주라고 주시는 빵이 있습니다. 빵은 에너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님께로 나아올 힘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들이 먹을 빵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언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결단하는 것도 큰 에너지가 소비되는데 그 결단을 따를 에너지는 이미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에서만 주어집니다. 인간은 생존 본능과 그것과 반대되는 율법 간의 선택 사이에서 이미 지쳐있습니다.

      로이 바우마이스터는 1998년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 참여자를 두 그룹으로 나눕니다. 그리고 똑같은 비디오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룹 ‘A’에게는 동영상을 보고 난 후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를 표현하게 했고, 그룹 ‘B’에게는 자신의 정서를 드러내지 않고 억누르도록 했습니다. 그런 다음 이들의 악력을 측정했는데, 자기감정을 억눌렀던 그룹 ‘B’의 사람들이 악력이 더 약해진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룹 ‘B’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서를 억누르기 위해 이미 의지력이 소모되었다는 뜻입니다.

 

      초콜릿을 이용한 또 다른 실험도 있습니다. 대학생 한 그룹에는 초콜릿을 다른 그룹에는 무를 주어 그 맛을 기록하도록 한 것입니다. 무를 먹는 그룹은 초콜릿을 먹는 그룹을 보며 먹고 싶은 의지를 억눌러야 했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문제를 내거나 어려운 퍼즐을 맞추라고 했을 때 초콜릿을 먹은 그룹이 훨씬 오래 인내심을 발휘해 문제를 풀었다는 것입니다. 무를 먹는 그룹은 그것을 먹는 동안 의지력을 많이 소진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렇게 판단을 하는데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기 때문에 스티브 잡스는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소진되는 에너지를 줄이기 위해 같은 옷과 신발만을 입고 신습니다. 판단을 위해 에너지가 소비된다는 것은 분명 인간은 자유의지로 이것과 저것 중 하나를 판단하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지쳐있으면서도 지친 줄 모릅니다.

 

      헤로데와 같이 아예 결정을 자신을 섬기는 것으로 내린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회 공동체는 주저하는 누구에게나 결단의 힘을 줄 빵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옷자락 술에 손을 댑니다. 옷자락 술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로부터 힘을 얻은 이들의 공동체가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와 율법을 지키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마르코는 이미 5장에서 예수님께 에너지가 나와 악령을 몰아내고 하혈병 걸린 여인을 치유하며 죽은 야이로의 딸까지 살리신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으로부터 모든 에너지가 솟구친다는 것을 믿었다면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그렇게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코에게 예수님은 에너지의 근원이고 그 힘이 주는 결과는 평화입니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그 자체로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에 모든 이들에게 나눠줄 빵을 지녔습니다.

 

      저도 사제가 되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주저할 때, 저의 어릴 적 두 친구가 신학교 먼저 들어가 있었던 것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저와 두 친구가 성당에 다녔는데, 그중 처음 한 친구가 들어갈 때는 아주 잠깐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친구마저 들어가니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셋 중 둘만 한쪽으로 가도 그쪽으로 갈 힘을 얻게 됩니다.

 

      주님을 전하는 이들이 의지력이 약해진 이들, 그래서 좋은 것을 선택할 줄 모르는 이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로 나아올 힘입니다. 좋은 것을 선택할 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라 그 선택을 할 힘이 없어서 못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를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초콜릿을 먹고 싶어도 자신들의 선택을 넘어설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써 에너지가 충만합니다. 초콜릿을 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도 모르고 우리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를 일깨우기 위해 당신이 물 위를 걸어 배 위에 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모신 공동체로서 그 자체로 가진 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누구든 들것에 들고 주님께로 데려갈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제가 처음으로 찍었던 사진을 2장 기억합니다. 4살 때입니다형들과 함께 장화를 신고 집 뒤뜰에서 나란히 앉아 찍었던 사진입니다. 6살 때입니다여동생과 집 앞에서 기르던 고양이와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어머니는 그 두 장의 사진을 소중하게 간직하셨습니다의미 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1990년 부제서품 때의 사진과 1991년 사제서품 때의 사진입니다사진에 관심이 많았던 큰 형님이 앨범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어머니께서는 그 앨범도 자주 보시고기도하셨습니다사제가 되어서는 가는 본당마다 사진을 찍으면 앨범을 만들었습니다요즘은 스마트 폰으로 사진을 찍기에 사진을 인화해서 앨범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사진이 너무 많아서 정리하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한 장의 사진은 역사의 기록이고인생의 기억이 됩니다.

 

사진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한 젊은이가 미국에서 사진을 공부하였습니다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왜 사진을 공부합니까?” 사진으로 돈을 벌수도 있습니다사진으로 예술을 할 수 있습니다사진은 역사의 기록입니다교수님의 말을 들었던 젊은이는 한 가지 결심을 하였습니다. 6.25 참전국의 군인들을 만나서 사진을 찍는 것이었습니다역사의 기록을 남기고 싶어 했습니다참전국을 찾아다니면서 참전용사와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찍어드렸습니다참전용사들은 모두 기뻐하였다고 합니다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싸웠던 젊은 날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합니다사진을 인화해서 액자로 만들어 드렸다고 합니다사진을 주제로 달력을 만들어 드렸다고 합니다모든 비용은 본인이 벌어서 부담했다고 합니다.

 

밤하늘에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프란치스코 성인은 꿈속에서 쓰러져가는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프란치스코 성인은 교회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마더 데레사 성녀는 기차 안에서 부르심 속에 부르심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평생 가난한 이들과 함께 지냈습니다마더 데레사 성녀는 물질과 자본의 바벨탑이 아니라 가난과 정결의 사랑탑을 쌓았습니다꽃동네의 오웅진 요한 신부님은 버려진 아이아픈 사람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잠잘 곳을 마련해 주었고치료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하느님께 기도드리면서 해야 할 일을 깨닫고깨달은 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모두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길가에 떨어진 휴지를 줍는 것도길을 물어오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는 것도길을 먼저 건너도록 양보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상상과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빛을 만들고땅을 만들고하늘을 만들고물을 만들고해와 달별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하느님께서는 그 정도는 되셔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그 정도는 되셔야지 만물의 주인이시고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예수님의 옷깃만 스쳐도 병이 낫는 것을 보여주십니다정말 장난이 아니십니다어디가 아픈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언제부터 아픈지 말을 하지 않아도그냥 예수님 곁에서 옷만 만져도 모든 병이 저절로 치유됩니다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그 정도는 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하느님과 예수님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넘치는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우리는 작은 것들을 하고도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자신의 업적과 명예가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입니다그리고 그것이 큰 잘못도 아닙니다하지만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들의 업적과 자랑도 아닙니다그저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웬만한 잘못들은 다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너희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하얗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뉘우치고하느님께예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지난 모든 것은 덮어주고 당신의 나라에 다시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오늘우리가 신앙 안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가슴이 따뜻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계산하고 따지기 보다는 순수한 삶을 살아야 갰습니다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병들고 오염된 세상을 정화시키는 치료제이자 야전 응급병원으로서의 교회!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자 마자 그분임을 알아본 사람들이 즉시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마을 이장님께서는 마이크 크게 틀고목이 터져라 외쳤겠지요.

  

“아아! 이장입니다. 오늘 우리 마을에 아주 기쁜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최근 전국민적 대 스타로 떠오르신 분, 손만 대면 불치병을 낳게 하시는 예수님께서 갑자기 우리 마을을 방문하셨습니다.

  

불치병 환자들 모시고 계시는 가정에서는 단 한분도 빠지지 말고, 지금 당장 환자를 모시고 마을 회관 앞으로 모시고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기회는 다시 없습니다. 지금 당장 마을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방송을 들은 가족들은 급한 마음에 대충 얼기설기 만든 들것에 환자를 눕혀 초스피드로 예수님을 향해 달려왔을 것입니다. 그날 갈릴래아 호수가에는 그야말로 진풍경 펼쳐졌을 것입니다. 

 

사방에서 몰려온 환자들과 가족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 몰려온 군중들, 기적을 보기 위해 몰려온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구름처럼 몰려온 사람들을 바라보며 제자들은 덩달아 신명이 났을 것입니다. 무질서하게 몰려온 환자와 가족들들에게 대기표를 나눠주며, 질서 유지에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환자 한명 한명을 환한 얼굴로 기쁘게 환대하셨을 것입니다. ‘그래 그간 얼마나 고생 많았냐?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며’격려해주셨을 것입니다. 정성껏 기도하고 위로하며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셨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병마에 사로잡혀 있던 환자와 가족들은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평생 소원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광경에 눈물을 흘리며 환호하고 박수를 쳤을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 샘솟듯이 흘러나왔겠지요. 예수님의 치유활동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입에서는 놀라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찬미하고 흠숭하는 탄성이 터져나왔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는 순식간에 야전 응급병원으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존재 이유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마치도 그 옛날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가 그랬듯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세상 사람들, 상처입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야전 응급병원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 사회, 그리고 우리 사회를 이끄는 지배적인 논리는 세상을 치유시키고 생명을 주는 논리라고 볼수 없을 듯 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듯 합니다.

  

천박한 자본주의, 비인간적인 경제지상주의에 기초한 부의 극단적 불균등은 이 시대 수많은 청년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평생토록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미처 노후준비에 여력이 없었던 수많은 노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외모지상주의, 출세지상주의, 그리고 저출산 풍조는 갓난아기들의 반가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게 만들고, 이 세상에서 새 생명이 주는 생기와 그로 인한 기쁨을 거두어가고 있습니다.

 

성공지상주의, 극단적 자기중심주의와 떼놓을 수 없는 입시위주의 교육은 이 땅의 새싹들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죽음의 문화가 이 땅 위에 팽배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이러한 암담한 현실을 좌시하지 않는 파수꾼으로 거듭 나야겠습니다. 병들고 오염된 세상을 정화시키는 치료제로서의 교회로 재탄생해야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표현대로 ‘야전병원’같은 교회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일행이 호수를 건너 온 곳, 곧 겐네사렛 땅에서 생긴 ‘새로운 창조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도 새롭게 창조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열 두 해 동안 하혈증을 앓고 있던 여인’(마르 5,5-25)처럼, 믿음으로 예수님께 접근해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이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너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요한 20,27)

 

사실, 손을 댄 이는 우리지만, 만지신 분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우리를 매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더듬은 것입니다.

당신 손으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쪼물딱거리시고,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낫게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손을 대었을 뿐, 우리를 붙잡으시는 분은 그분이셨습니다.

우리를 당신 심장으로 끌어당기신 분은 그분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이들’이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이 계신 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그들은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분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 주셨고, 과연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중재하는 이가 되어야 하고, 또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그들을 위해 간청하고, 또한 직접 예수님을 만지며 그분 사랑의 손길을 반겨 맞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만지듯, <복음>을 통하여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져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민수 15,37-41 참조)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그렇습니다. ‘말씀’이 구원이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옷자락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표현처럼, 우리는 전선줄이고 하느님께서는 전류이십니다.

전선줄에 전류가 통해야만 전등을 밝힐 수 있듯이, 우리는 언제나 말씀에 접속되어 있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옷자락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몸을 받아먹습니다.

그러니 사랑의 전류가 만땅 충전된 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주님! 저희가 당신께 접속되고, 저희에게 당신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주님!

당신은 옷자락뿐만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십니다.

손을 내미는 이는 제가 아니라 당신이며

저를 붙드신 분도 당신이십니다.

손을 대기만 하면 먼저 어루만지시고

찾기만 하면 먼저 찾아오시는 분도 당신이십니다.

제 마음이 항상 당신께 있게 하소서. 아멘.

 구원을 받았음을 확신하라

 -반영억신부-


신부는 고향 본당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셨듯이(마르6,4). 고향에서 환영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이 고향성당으로 인사발령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고향 분들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할머니께서는 그 신부님의 옛날얘기를 꺼내셨습니다. 오줌을 싸서 체를 뒤집어쓰고 동네를 돌던 얘기며 똥을 싸고……, 고집통이고, 어머니 젖이 모자라 당신 젖을 먹고 컸다는 둥…정말이지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자꾸 자랑삼아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고민 끝에 하루는 할머니의 가슴을 풀어 제치는 흉내를 내며 옛날에 내가 먹던 젖인지 확인 좀 해야겠다고 진피를 떨었답니다. 그 이후 할머니 입에서 다시는 신부의 옛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답니다.

 

고향에서 예수님께서 환영을 받지 못했는데 하물며 감히 누가 환영을 받겠습니까? 옛날에 얽매이지 말고 인정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인다면 더 큰 혜택을 입을 것인데 그렇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옛날이 아무렴 어떻습니까? 지금이 중요하고 또 앞으로 다가올 날이 더 소중한 것이지요. 새로워진 사실을, 구원을 받은 사실을 함께 기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도착하셨을 때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마르6,54). 그리고 주변 마을까지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마르6,56). 그 동네는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었습니다. 시골의 순박한 마음이 큰 은총을 입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5,15).하고 선언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병을 치료받은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소중한 마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도 확인받은 것입니다. 굽어진 마음, 오그라든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은 일반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안에서만이 온전하게 치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줄 능력이 있는 분이시지만 육신의 치유자로만 보면 부분을 전체로 보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는 중병이 있다면 예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듯이(마르6,56). 오늘 우리가 구원을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주셨듯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의 능력과 더불어 우리의 간절함이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받고 열이 가신 부인은 곧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마르1,31).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용서를 받아 구원을 얻은 우리도 주님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시중을 든다는 것은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지를 알고 그에 맞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동네에도 가야 한다’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마땅히 시중을 들어야 한다’하고 고백할 만큼 내가‘구원을 받았음'을 확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복음선포는 양보할 수 없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송영진신부-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3-56).”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순서대로 생각하면,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어서

병이 나았다는(마르 5,25-29) 소문이 널리 퍼졌을 것이고,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병자들을 데려왔을 것입니다.

여기서 ‘두루 뛰어다니며’ 라는 말은,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서로 전하면서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의 ‘믿음의 수준’이 어찌되었든지 간에

‘병을 잘 고치시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은 그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고,

그들은 그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두루 뛰어다녔습니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고, 그들 자신들의 마음이 움직여서 한 일입니다.

(‘기쁜 소식’은 그렇게 전파됩니다.)

혼자서 움직일 수 있는 병자들은 자기 발로 걸어서 예수님께 왔겠지만,

그럴 수 없는 병자들은 사람들이 들것에 눕혀서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라는 말은,

병자들과 병자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의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믿은 것은 아니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 병자들을 고쳐 주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는 뜻입니다.

 

옷자락 술을 만질 수 없을 정도로 중병에 걸린 사람들,

즉 손도 못 움직이는 병자들은 어떻게 했을까?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병자들도 모두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옷자락 술을 만지는 행위 자체는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께 간절하게 청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았다.’ 라는 말은 ‘병이 나았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병이 나음으로써 ‘구원의 은총’을 체험했음을 뜻하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병이 나은 일 자체가 구원은 아니지만,

치유의 은총을 받음으로써 구원을 체험하게 되고, 희망하게 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치유됨으로써

“나는 구원을 받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치유의 은총’은 ‘구원의 시작’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구원의 완성’은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도행전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오로를 통하여 비범한 기적들을 일으키셨다.

그의 살갗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그들에게서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다(사도 19,11-12).”

이 일에서,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이 말씀에서 ‘더 큰 일’이라는 말은 ‘더 위대한 일’이라는 뜻은 아니고,

‘더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더 많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보다 더 위대한 기적을 일으킨 것은 아닙니다.

또 기적의 힘이 바오로 사도에게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1) 성경은 ‘옛날이야기 책’이 아니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기적 이야기들은, 특히 ‘치유의 은총’에 관한 이야기들은

전설 같은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 오늘 나에게 하시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치유의 은총’이 내리는 일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지금의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믿음을 갖고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내가 행복과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2) 우리는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옷자락 술’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우리에게 내리는 통로,

또는 도구일 뿐입니다.

<어떤 병에 걸렸을 때, 처음에는 주님께 간절하게 기도했다가,

병이 나은 다음에는 자기를 치료해 준 의사에게만 고마워하고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은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이 아니라 의사가 나를 고쳐 주었다.” 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사는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내려 주실 때 사용하는 통로,

또는 도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생명의 주인은 주님이시지 의사가 아닙니다.>

 

3) 복음서의 이야기에 나오는 병자들은 예수님께 간청하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가 좋은 예입니다(마르 5,26).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의학과 의술이 어느 정도는 발전한 시대에 살고 있고,

예수님께 간청하는 일 외에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도 안 하면서, 즉 아무것도 안 하면서

기도만 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병에 걸렸다면 병원에 가는 것은 당연히 할 일입니다.

수술을 하든지 투약을 하든지 간에,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고,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치병에 걸렸을 때에만 기도하고,

의학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경우에는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도는 어떤 경우에도 중단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했는데도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때에도 실망하지 말고, “주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마태 7,11)”이라는 믿음을 버리면 안 됩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인생 전부와 목숨까지도 주님께 맡긴 사람입니다.>

 복음: 마르 6,53-56: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조욱현신부-


예수께서 겐네사렛 땅으로 가셨을 때 수많은 사람이 예수께로 몰려왔다. 예수께 한결같이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찾아왔다. 수많은 병자가 자기의 병을 치유 받기 위해서 모여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을 얻으려고 사람들이 예수께 모여들었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모습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인간의 절박한 요구, 사람이 줄 수 없는 무엇을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 그러한 은혜를 받고도 결국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동조한 그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는 그들이었지만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인 것이다. 결국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이 군중 중에는 예수님을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분으로 이용한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복음에서와같이 수많은 군중이 자기 필요성에 의해 예수님을 찾는 것을 결코 비웃을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이 그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그분을 섬기고 따른다고 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만들어 놓은 우상일 수 있다. 그 우상은 나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듯이 우리 안에 잘못 가지고 있는 하느님 상이 무너지게 되면 많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신앙을 버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은 신앙을 올바로 받아들인 모습이 아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나의 편의를 위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그 기계적인 하느님은 버림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하느님은 진정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우리는 가정에 대해서는 어떠한 자세인가? 또 친구와 친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가? 이용하고 또 도움만 받기 위해서 이러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나 않는지?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당에 다니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해서는 어떤가이다.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참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지는 않는지 반성하면서, 우리 자신은 이제 예수님이 필요하고 찾으면서도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성소인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기복적인 신앙이 아닌, 신앙으로 인해 자신이 변화하고 또 세상이 변화될 수 있는 조그마한 실천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거기에서 참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나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삶이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우리 가운데 조금씩 실천되도록 끊임없이 나 자신과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 세상이 변화된다는 것은 먼저 나 자신의 조그마한 것이라도 변화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마르 1, 34)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뜨겁게
보게된다.

진정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묻게된다.

고통과 함께
살고있는
우리들 삶의
모습이다.

우리의 삶이란
고통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닌 십자가에서
주님을 만나는
여정이다.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다.

고통이 있기에
치유가 있다.

생명은
치유를
필요로 한다.

고통을 통해
연약한
우리자신을
만나게된다.

하느님의
보살핌을
애타게
바라는
우리들
시간이다.

고통은
우리의 삶을
깨운다.

새로운 삶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고쳐 주시는
치유는 새로운
삶의 기쁨이다.

창조하신
피조물을
다시
치유하여
주신다.

우리가
나약한
사람임을
깨닫는다.

갖가지 질병보다
더 강력한 당신
사랑을
보여주신다.

사랑의
사람들이다.

우리의 고통에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다.

고통을
치유하시고
고통을 통해
삶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뜻은 끝까지
우리를 돌보시는
사랑이시다.

사람은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치유가 필요한
사랑 한가운데에
주님과 함께 있다.

치유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여 주십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마르 6,54)

예수님 일행이 배를 타고 겐넷사렛 땅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봅니다. 알아본다는 것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분을 체험했다는 뜻이지요. 자신이 치유를 받은 당사지거나, 기적의 현장을 목도한 이들이겠지요. 지인이나 친척을 통해 전해 전해 듣기도 했을 거고요.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 데려오기 시작하였다."(마르 6,55)

예수님을 알아본 이들의 행동이 놀랍지요!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자기가 아는 병자와 허약한 이들,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 계신 곳에 데려옵니다. 누가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구원에 협력하는 보람과 기쁨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들이야말로 기쁜 소식, 복음을 듣고 보고 체험하여 변화된 이들입니다.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마르 6,56)

그들이 병자들을 데려다 눕혀 놓은 장터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시는 장면을 관상합니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기라고 명하시자, 빛이 생겨나 어둠을 가르고 스며드는 오늘 제1독서의 장면이 떠오르지요.
 

"어둠을 심연이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 1,2-3)

장터에 가득한 병자들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 위에 짙게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 한줄기 빛이 관통합니다. 그 빛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사실 위생이 중요한 환자를 장터까지 데려왔다는 묘사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절박한 상태였나를 짐작하고도 남지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이 그들을 휘감고 있던 어둠 사이로 희망의 빛이 새어든 것입니다.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마르 6,56)

그분을 직접 만지지 못해도, 그분 옷자락 술 끝에라도 닿고자 손을 뻗는 이들의 모습을 관상합니다. 이 얼마나 간절한 겸손인지요! 얼마나 단순한 믿음인지요! 그분과 버젓이 독대하거나 잠시라도 그분을 차지할 유력자 신분이 못되지만, 희망을 놓지 않고 힘껏 손을 뻗습니다. 그분께 닿음이 곧 치유이고 구원입니다.        

빛을 향해 활짝 연 마음, 빛을 갈망하는 마음 안으로 빛이 들어옵니다. 하느님께서 "빛과 어둠을 가르"신 것처럼 믿는 이와, 냉소하는 무심한 이의 구원이 갈립니다. 자기 존재에 빛이 스며들길 바라는 이들에게 주님은 스스로 빛이 되어 주십니다.

창조의 넷째 날까지 보여 준 제1독서의 창세기 대목 안에는 생명의 기운이 넘실거립니다. 마치 오늘 복음 속 장터와도 같지요. 치유받고, 마귀가 떨어져 나가 온전해지고, 그토록 바라던 건강을 회복한 이들의 기쁨, 그들을 데려오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은 이들의 보람, 긴긴 돌봄으로 지친 가족의 경탄과 감사, 그들의 기쁨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행복, 제자들의 뿌듯함... 창조 때 하느님께서 이렇게 흡족하고 기쁘셨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새창조 앞에 섭니다. 주님은 묵은 우리를 늘 새롭게 해 주는 분이시지요. 우리가 지고 있는 영육의 병고와 결핍, 상처와 고통은 창조의 말씀과 빛을 기다리는 어둠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을 덥썩 안을 수는 없어도, 손을 힘껏 뻗어 그분 옷자락의 술만이라고 건드릴 수 있다면, 그런 간절한 열망과 바람이 있다면 빛은 담박에 우리를 뚫고 들어와 가득 채워줄 것입니다. 치유하시고 구원하실 겁니다.

우리 삶의 장터를 가르며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며, 어둠 속에 계속 서 있을지, 빛 한가운데로 나아올지는 우리의 선택이고 응답이 되겠지요. 사랑하는 벗님! 빛이신 주님을 만지고, 큰 빛 안에 스며들어 함께 빛이 되어 보시지 않을래요?

"과연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마르 6,56 참조)

새 창조의 말씀에 온 존재를 내어맡긴 벗님을 축복합니다.

 3장(三章)

 -김찬선신부-


"그때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오늘 복음은 구원을 받는 사람들 얘기를 들려줍니다.

오늘 병자들은 병을 치유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구원까지 받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이 발생하기까지의 과정과 요소들을 오늘 짧은 복음이

단순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시작 곧 초장初章은 어쨌거나 구원자와 우리가 만나야 하는데

구원자를 만나러 우리가 하늘에 올라갈 수 없기에 구원자가 오셔야 하고

그래서 로마서 10장은 그리스도를 모셔오기 위해 누가 저 높은 하늘로

올라야 하는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왜냐면 고맙게도 주님께서 스스로

오셨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이 구원자가 오심을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배를 대신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을 뒤집으면 주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배를 대신 것은

주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것이요 우리 사는 곳까지 찾아오심입니다.

 

구원의 다음 단계 곧 중장中章은 병자를 나르는 사람들의 선행입니다.

병자는 병이 치유되기를 바라지만 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많은 병자가 병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장애도 있습니다.

반대로 장애가 있는 사람이 병이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장애는 몸의 장애만이 아니라 마음의 장애도 있습니다.

 

병을 치유코자 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누군가 도와줘야만 합니다.

복음의 다른 곳에서 지붕을 뚫고 들것에 실려 주님께 간 사람의 경우나

물이 움직일 때 그 물에 잠겨야 하는데 스스로 움직일 수 없었던 사람의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이에 비해 몸의 장애는 없지만 마음의 장애나 신앙의 장애가 있어서

구원자에게 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는 나을 수 없겠다고 비관하고 미리 치유를 포기한 사람도 있고,

아무도 믿지 못하는 것이 발전하여 주님조차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요.

 

이 경우는 몸의 장애보다 돕기가 더 어렵지만 아무튼 이들에게도

그들을 구원자 주님께 데려다 줄 이웃들과 그들의 선행이 필요합니다.

 

이제 구원의 종장終章입니다.

구원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병자 자신이

주님의 구원의 손을 잡는 그 마지막 행위가 중요합니다.

병의 치유도 그렇지만 특히 구원은 본인이 바라지 않고 믿지 않으면

이웃이 그를 데려다 주고 주님이 아무리 손을 대어도 발생치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 손을 댄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서 주님께 손을 댄 사람들의 사람들의

그 순간의 감정과 느낌을 상상해 봅니다.

특히 옷 자락 술이라도 만져보려던 사람의 감정과 느낌을.

 

매우 긴장되고,

매우 조심스럽고,

매우 설레고,

매우 두렵고.

 

이는 사랑하는 이가 사랑하는 이의 손을 처음 잡을 때

'손을 잡아도 되나? 뿌리치지는 않을까?'하는 그 느낌과 같고,

그것보다 더한 또는 그것에다 경외심이 더하는 그런 느낌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손을 대면 그러니까 사랑과 경외심과 거기에 더하여

믿음으로 손을 대면 치유는 물론 하느님과 구원이 발생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2월 11일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코 6,5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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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말씀이 창조한 ‘세상’과 세상을 창조한 ‘말씀’을 마주합니다. 말씀이 창조한 세상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었습니다.

-박형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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