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2월 6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1. 2. 6. 07:37

2021 2 6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바오로 미키 성인은 1564년 무렵 일본 오사카 인근의 도쿠시마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수회 소속의 대학을 졸업한 뒤 수사가 된 그는 열정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여 대단한 결실을 거두었다. 그러나 바오로 미키 수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박해 때 25명의 동료들과 함께 붙잡혀 1597년 나가사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 1862년 그를 비롯한 동료 순교자들이 시성되었다.


★★★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
(마르 6,30-34)

 

His heart was moved with pity for them,
for they were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and he began to teach them many thing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예수님께서 군중을 바라보시는 눈, 그 시선을 느껴 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언가 바라고 갈망하는 눈빛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눈과 군중의 눈이 만납니다. 그 만남 속에서 참된 목자, 착한 목자를 기다리는 그들의 마음이 예수님께 전해집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오늘 화답송에서도 강조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라고 다윗 임금은 노래합니다. 다윗은 이 노래에서, 주님께서 목자로 자신에게 행하시는 모든 것이 은총과 자애로 다가옴을 아름답게 읊어 냅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또 어떤 상황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이렇게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말씀을 마주하게 됩니다. 좋은 말씀, 위로의 말씀, 힘이 되는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체적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마주하였을 때, 항상 일치되는 신앙을 체험하고 있는지 조심스레 물어봅니다. 주님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쉬게 하시는가? 잔잔하고 고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는가? 이 질문에 우리는 “예!”라고 확신하기보다, 말씀과 삶 사이의 거리를 마주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느끼는 거리는 우리 신앙의 자존감을 떨어뜨려, 스스로를 신앙심이 부족한 사람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마주하셨던 군중,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고백한 다윗 임금. 주님을 향한 갈망을 지닌 공통점을 가진 이들은 우리의 눈과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중요함을 알려 줍니다. 우리의 일상은, 우리의 삶의 자리는 어둠의 깊은 골짜기를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과 마음이 주님을 향할 수 있다면 깊은 골짜기는 두려움의 자리가 아니라 구원의 자리로 변화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참된 의미입니다. 나의 눈과 마음이 향하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요? 당신께서 목자이심을 알려 주시는 그분께 우리의 방향을 정해 봅시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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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지순례나 여행을 가게 되면 많은 사진을 찍습니다. 제가 방문한 곳에 대한 기억을 위한 것이지요. 사실 너무나 좋았던 곳을 찍기도 하지만, 반대로 최악의 장소 역시 기억하기 위해서 사진으로 찍습니다.


언젠가 글을 쓰기 위해 충청도의 어느 펜션에 2박 3일 동안 묵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펜션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가격은 저렴했지만, 너무 작았고 또 지저분했습니다. 여기에 계속 비가 멈추지 않고 와서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방안에만 머물러야 했지요.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또 이렇게 방에만 있으니 사진 한 장 찍어놓지도 못했습니다.

둘째 날 밤이었습니다. 창밖을 보니 비가 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펜션의 조명에 아주 멋져 보였습니다. 사진기를 들고 나가서 야경을 찍었습니다.

며칠 뒤, 인터넷에 올린 이 사진을 본 어떤 지인이 장소를 묻습니다. 자신도 가 보고 싶다면서 말이지요. 2박 3일 동안 최악의 시간을 보낸 곳인데, 누구는 사진 몇 장만을 보고서는 가 보고 싶어 합니다.

사진 몇 장만으로 그 장소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의 단편적인 지식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과 살아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을 보고서 하느님을 판단하고 때로는 불평불만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 곁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놀라운 기적과 힘이 되는 말씀으로 인해서 예수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고 복음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어려움은 조금도 헤아리지 않습니다. 마치 맡겨둔 것을 찾아가는 사람처럼 예수님을 찾아왔고, 심지어 어디를 갈 것 같으면 미리 가서 기다릴 정도였습니다. 개인의 사생활은 전혀 보장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안 다면 또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이들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해도 해도 너무하네.”라면서 화를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가엾은 마음이 들어서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이기적인 우리의 사랑과 달리, 무조건적인 주님의 사랑이 크게 비교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나 자신의 말과 행동만을 드러내면서 욕심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제는 주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랑의 품 안에서 참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인생이란 결코 공평하지 않다. 이 사실에 익숙해져라(빌 게이츠).


공감의 마음

중학생 딸이 펑펑 울고 있습니다. 아빠는 다가가서 왜 우는지를 물었지요. 딸은 아빠에게 남자친구가 그만 만나자는 통보를 했다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자기는 그만 만날 생각이 전혀 없는데, 여전히 남자친구를 좋아하는데 이별 통보를 받으니 너무나 화가 나고 슬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아빠는 어떻게 말해줘야 딸이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이 아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나쁜 놈이 있나. 울지마. 네가 아까워. 그냥 훌훌 털어버려.”

아빠 말처럼 훌훌 털어 버리기가 쉬울까요? 불가능한 말은 오히려 거리감만 줄 것입니다. 딸이 자신의 슬픔을 아빠에게 말했다는 것은 그만큼 아빠가 공감해주길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한 심리학 연구에 의하면 친밀한 사이일수록 상대방이 공감을 더 많이, 더 강하게, 더 정확하게 해주길 기대한다고 합니다.

아빠는 딸의 슬픔에 공감해주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러나 해결책을 이야기하니 거리감만 더 생겼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이웃의 말에 해결책을 먼저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공감인데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바로 ‘공감의 마음’이었습니다.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그런 공동체는 만들지 말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파견되었던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 자신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보고 드립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하십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따로 외딴곳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사람들은 육로를 따라 먼저 그곳에 다다랐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들 같은 그들을 당신께서 직접 가르치십니다. 이런 공동체가 가장 건전한 공동체입니다. 공동체가 형성되면 이를 위해 일한 이들은 쉬고 그리스도께서 직접 가르치시고 먹이십니다.

 

      만약 집에서 아버지나 어머니가 “이 집은 내가 없으면 돌아가지를 않아.”라고 말하면 훌륭한 공동체의 리더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없어도 잘 돌아가지 않게 만든 잘못된 리더입니다. “넌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라고 자녀에게 말하며 자녀를 자신에게 종속시키려는 부모와도 같습니다. 훌륭한 부모라면 자신들이 없어도 하느님께 직접 힘을 얻어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리더들은 자신들에게로 사람을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들도 쉴 수 있고 자신들이 더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어도 공동체가 잘 유지됩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승천하신 후에도 교회가 점점 성장하게 만들어놓으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열두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교하여 하늘에서 쉬어도 교회는 점점 성장하였습니다.

 

      장예모 감독‘인생’(1995)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 ‘인생’은 국공내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남편 푸구이와 아내 자전 부부의 한 생애를 그리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일명 부잣집의 아들 도련님이었던 푸구이는 아내 자전과 부모님의 말씀을 무시한 채 매일같이 도박했습니다. 결국, 도박으로 룽얼이란 사람에게 집까지 빼앗기게 됩니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아내 자전과 자식들은 친정으로 떠나 버립니다.

      푸구이는 자신의 집을 빼앗은 룽얼에게 그림자극 도구를 빌려, 그림자극으로 생을 연명합니다. 도박에서 손을 떼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 자전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남편 푸구이 곁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내전으로 푸구이는 전쟁터에 난데없이 끌려갑니다. 공산당에게 잡혀 포로가 된 푸구이는 그림자극으로 그들을 즐겁게 해주며 잘 버팁니다. 그리고 고생 끝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사이 큰딸 평샤는 열병으로 벙어리가 됩니다.

 

      공산당이 집권하게 된 이 시기 자신의 집을 도박으로 빼앗은 룽얼은 지주로 지목되어 인민재판을 받아 사형에 처하게 됩니다. 자신이 도박으로 집을 빼앗기지 않았으면 자신이 죽었어야 함을 안 푸구이는 공산당이 정의를 실현해 준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후 대약진 운동으로 마을에서 철을 제련해 무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촌장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후 모든 철을 수집해 제련하게 되는데 푸구이는 이런 철 제련 현장 속에서 다시금 그림자극을 통해 재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좋은 시절도 잠깐이었습니다. 아들 유칭은 잠이 많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꼭 학교에 가야 한다면서 졸린 아들을 등에 업고 학교까지 데려다줍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해줍니다.

 

“잘 들어봐. 우리 집은 아직 병아리야. 병아리가 자라면 거위가 되고, 거위가 자라면 양이 되는 거야. 양이 자라면 소가 되는 거야.”

“그다음엔 뭐야?”

“그다음엔 공산주의 사회가 이루어지는 거야!”

      이는 푸구이의 기승전결 식의 직선적이고 목적 지향적 리더십을 잘 말해주는 대화입니다. 하지만 그날 잠이 모자랐던 유칭은 트럭 뒤에서 자고 있다가 사고로 인해 죽게 됩니다. 범인은 다름 아닌 전쟁터를 함께 누볐던 오랜 아우 춘성이었습니다.

 

      이후 어른이 된 딸 펑샤의 혼처를 알아보게 되고 모택동의 문화대혁명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온 집안은 마오쩌둥의 초상화와 명언들로 가득하고 펑샤의 남편마저 노동자 계급으로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 중 하나였습니다. 발을 절기는 했으나 착실한 청년이었습니다.

 

      펑샤는 완얼시와 결혼 후 아이를 낳습니다. 병원엔 학생들뿐이었고 의사들은 자아비판을 위해 밖에 끌려나가 있었습니다. 푸구이는 만약을 대비해서 자아비판 중인 한 의사를 데려와 찐빵을 먹으라고 줍니다. 역시나 펑샤에게서 갑작스러운 출혈이 발생합니다. 학생들은 의사를 찾지만, 의사는 갑자기 찐빵을 먹다 목이 막혀 쓰러진 상태입니다. 이렇게 딸 펑샤도 죽습니다.

 

      푸구이 부부는 아들 유칭을 꼭 닮은 손자 ‘찐빵’을 키웁니다. 푸구이는 손자가 병아리를 가져오자 자신의 그림자극 소품이 있던 상자에서 병아리를 키우게 하며 이렇게 말해줍니다.

 

“병아리가 다 크면 거위가 되고 거위가 다 크면 양이 되지. 양이 다 크면 소가 되고 ...”

“그다음은요?”

“그다음은….”

할머니인 자전이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다음엔 만두가 다 자랐겠구나.”

“전 소 등에 탈래요.”

“그래! 만두는 소 등에 타거라!”

푸구이가 말합니다.

“만두가 자라면 소가 아니라 기차, 비행기를 타야지! 그때가 되면 점점 더 살기 좋아질 거야.”

      이 마지막 대화가 감독이 말하려던 메시지일 것입니다. 푸구이는 한 인생을 거치며 인생관의 병화를 겪었습니다. 인간 주도적 리더십에서 섭리에 맡기는 리더십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푸구이는 처음에 가정을 자신의 손으로 지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집을 빼앗기게 만들어 자신의 생명을 지켜 준 것은 시대의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푸구이는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 가정을 지키려 하지만 시대의 힘이 딸 펑샤가 벙어리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잠이 많은 아들 유칭을 자신이 그날 깨우지 않았더라면 유칭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의사에게 찐빵을 주지 않았어도 딸은 살았을 것입니다.

 

      푸구이의 인생관은 자기 주도적이었고 목적 지향형입니다. 기승전결로 가며 공산주의가 자신들을 참으로 행복하게 해줄 것으로 여겼습니다. 당시 중국의 인생관이었고 이것은 모택동과 같은 생각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없음을 마지막 때에서야 깨닫고 시대의 힘에 자신을 내어 맡깁니다.

 

      교회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들도 이런 생각의 변화를 겪어야 합니다. 자신이 공동체를 이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처음엔 자신의 힘으로 그 공동체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다 그 공동체의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카리스마보다는 주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은 뒤로 빠집니다. 공동체는 기승전결이 없습니다. 공동체의 봉사자들은 물이 흐르고 싶은 방향을 잘 찾아 길만 내어주면 됩니다. 그것을 계곡으로 만들고 시내가 되게 하고 강이 되게 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공동체 리더들은 나의 목적지가 아닌 주님이 원하시는 목적지로 길만 내주고 쉬면 됩니다. 내가 쉬어도 더 잘 돌아가는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입니다. 자신이 사라지면 공동체도 사라질 수밖에 없는 그런 단체를 만들면 안 됩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게 인생입니다.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조재형신부-


1975년에 발표된 가수 이종용의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멜로디는 빠르고 경쾌한데 가사는 학생들의 감성을 울리는 내용이었습니다. “낙엽 지던 그 숲속에 하얀 모래밭에 떨리는 손 잡아주던 너별빛 같은 눈망울로 영원을 약속하며 나를 위해 기도하던 너바람에 실려 가고 빗소리에 몰리는 잃어버린 너의 목소리부서지는 머리 결을 은빛처럼 날리우고 되돌아선 너의 옛 모습웃음 지며 눈감은 너/내 곁을 떠난 뒤 외로운 집시처럼 밤을 태워버린 숱한 나날들오늘도 추억 속에 맴돌다 지쳐버린 창백한 너의 넋” 이 노래는 학생들이 응원가로도 많이 불렸습니다교내 체육대회에서 응원가로 불렀던 기억이 있습니다대부분의 학생들이 아는 노래였고가사의 내용과는 달리 박자가 빨랐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연히 이종용 씨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그는 75년도에 를 발표하고 인기절정의 가수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그러나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교도소에서 절망 중에 있을 때 사형수를 만나게 되었고사형수를 통해서 신앙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사형수는 나는 곧 죽겠지만 당신은 곧 밖으로 나갈 겁니다나가면 예수님을 믿고 기쁘게 사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던 그는 가수가 되면서 세상의 기쁨에 빠져서 신앙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다시금 신앙을 찾은 그는 가수로 얻을 수 없는 기쁨을 찾았다고 합니다가수로 느낄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고 합니다예수님을 찬양하는 복음성가 가수가 되었고, ‘Jesus Christ Super Star'이라는 뮤지컬에서 예수님 역할을 236회가 하였다고 합니다지금은 미국에서 목회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소년의 집으로 알려진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을 기억하는 영상을 보았습니다신부님께서는 1957년 사제서품을 받았고그해에 한국으로 왔습니다부산에서 가난한 사람을 보았고특히 전쟁고아들을 보았습니다신부님은 고아들을 위한 소년의 집을 마련하였습니다가난한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음식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아이들이 배울 수 있는 학교를 세웠습니다신부님은 협조들이 필요했고수녀회와 수도회를 설립하였습니다가장 가난한 아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교육 받을 수 있도록 소년소녀의 집을 만들었습니다신부님은 안타깝게도 1989년 루게릭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1992년 선종할 때까지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서 헌신하였습니다신부님의 꿈은 멕시코과테말라필리핀에서도 꽃이 피었습니다신부님의 영상을 보면서 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렸습니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조금만 불편해도 짜증내던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많이 아는 것보다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좋고 서로 사랑하는 것 보다는 함께 즐기는 것이 더 좋다.’ 이제 곧 봄이 옵니다봄이 되면 많은 꽃들이 필 것입니다그런 꽃들 모두는 추운 겨울을 온 몸으로 견디어냈습니다눈의 무게에 가지들이 꺾이기도 했고매서운 겨울바람을 피하지 못하였습니다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꽃은 피는 것입니다그래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우리의 삶도 그만큼 상처와 아픔이 있기 마련입니다중요한 것은 넘어진 일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다시 일어서서 앞을 바라보는 용기입니다오늘은 어제 세상을 떠난 이들이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날입니다.’ 언젠가 들은 말입니다매일 주어지는 날들이 어떠신지요그렇게 간절하게 원하는 날인지요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날들인지요물과 공기는 주변에 많기 때문에 소중한 가치를 모르고 지내기 마련입니다하지만 우리는 물과 공기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서 살기에도 너무나 짧은 것이 인생입니다감사하면서 살기에도 부족한 것이 인생입니다나누면서 살기에도 빠듯한 것이 인생입니다하지만 우리는 원망과 분노시기와 질투미움과 좌절로 하루를 채우면서 지낼 때가 많습니다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악의 세력에게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가족끼리 왜이래!’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이제 생이 3달 정도 남은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원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자식들은 늘 바쁘다는 이유로아버지는 늘 곁에 있다는 이유로 하지 못했던 일들입니다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원하는 것은 하루에 한번 전화하는 것이었습니다아침은 식구들이 함께 먹는 것이었습니다정말 쉬운 일입니다그런데 자식들은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가족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주말입니다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화한번 해 보시면 어떨까요?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향한 ‘배려의 마음’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향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았던 사도들이 돌아오자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건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창세기>의 울림을 듣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세기 2,3)

 

그렇습니다. 이 “쉼”은 하느님께서 창조된 모든 것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음’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쉬게 하고, 그들이 한 모든 일에 복을 내리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쉼’ 안에서 당신이 바로 ‘주님’임을 알게 하시는 일입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또한,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외딴 곳으로 가서”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호세아서>의 울림을 듣습니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 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6-22 참조)

 

“외딴 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입니다.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주님’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마르 6,34).

이는 <민수기>(27,15-17)의 표현을 연상시켜줍니다. 거기서 모세는 하느님 백성이 “목자 없는 양처럼” 되지 않도록 한 사람을 세워달라고 간청합니다(1열왕 22,17).

목자의 주요업무 중 하나는 양떼를 위한 음식을 마련하는 것이고, 모세는 광야에서 만나를 공급하고(탈출 16장), 엘리사는 백 명을 먹이기 위해 빵의 양을 늘렸듯이(2열왕 4,42-44), 예수님께서도 이제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먹을 음식을 마련하기에 앞서, 먼저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6,34).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말랐던 것은 바로 ‘진리’인 생명의 말씀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에로 인도하는 이가 바로 참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양’이어야 합니다.

오늘 진정,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진리’인 말씀의 양식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 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 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시고,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외딴곳을 찾아라

 -반영억신부-


사람은 때때로 편히 쉬고 싶어 합니다. 지금 하는 일과 환경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맘먹고 쉬려고 하면 꼭 일이 생깁니다. 그러니 때로는 지금 자리를 떠나는 것이 필요하고,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여 쉬는 것보다, 일상 안에서 쉬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 하는 일을 즐기는 법을 터득해야 오래도록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20세기 위대한 별이었던 슈바이처는 “현대인이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밤하늘을 쳐다보며 우주를 생각한다면 현대 문명이 이렇게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일상에 외딴곳을 만들어 삶의 질을 높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외딴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그리고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니(창세2,2-3) 휴식은 재충전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곳에 이미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배를 타고 이동하였는데 모든 고을 사람들이 육로를 통해 이동하였다는 것은 어떤 어려움도 기꺼이 감당하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을에서 나왔다는 것은 자기들의 삶의 현장을 떠났다는 것을 말해 주는데 그만큼 예수님께는 인기가 좋았습니다. 스스로 내 세워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을 둘러쌌습니다. 바깥에 있으려 해도 사람들이 그분을 중심에 모셨습니다. 오늘날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기를 잡아 일시적으로 먹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통해서 영적인 갈증을 채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지내시는 분이 많은 데 사실은 이제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또 부족한 것은 다시 배우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셔야 할 것도 많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많습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는 법입니다. 강의는 교실에서 끝날 수 있지만, 교육은 삶의 현장에서 일생 계속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너무 고달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이 크시기에 모든 수고로움을 수고로움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측은한 백성과 함께할 수 있음이 오히려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외딴곳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셨고(루가6,21), 이른 새벽, 동트기 전 외딴곳에서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을 결코 소홀히 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셨던 주님을 바라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휴식은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내 일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 마르 6,30-34: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

 -조욱현신부-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31절) 제자들은 예수님께 파견을 받고 나갔다가(6,6-13) 돌아와서 그들이 한 일을 보고하고 있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조용하게 쉬면서 그 보고를 듣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조용히 쉴 시간이 없었다. 군중들이 많아서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 주님 안에서는 항상 휴식이란 없음을 보여준다.

 

이 모습을 보면 가르치는 사도들의 수고와 배우는 사람들의 열성이 만들어낸 그 당시의 커다란 행복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이런 행복이 오늘날에도 다시 돌아온다면 참으로 좋을 것 같다. 말씀의 봉사자들이 제 몸을 돌볼 겨를조차 없이 신자들과 청중에 둘러싸여 지내는 그런 행복을 말한다. 사제들이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때는 신자들이 가정에서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볼 때이다.

 

하여간에 사도들은 다시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나지만(32절), 군중들은 그 배가 이미 어디로 갈 것을 알고는 육로로 예수님의 일행을 앞질러 그곳으로 갔다(33절).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면서 그 군중들을 보시고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34절).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은’(34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신앙인의 삶이란 조용한 곳에서 하느님 앞에 머무르는 것과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서로 엇갈리는 삶을 조화롭게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이 잘못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조용히 쉬며 머무르는 시간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님과 함께 휴식하며 받을 힘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가끔 하느님 아버지와의 조용한 시간, 즉 기도의 시간을 자주 가지셨던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기도를 통하여 더욱 아버지와 하나임을 확인하시고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사명을 더 잘 완수하실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분과의 일치를 체험함으로써 더욱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살이 바쁜 속에 그럴만한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성당에 와서 성체 앞에 경건히 무릎 꿇고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어디서나 몸과 마음의 휴식을 주님 앞에 가질 수 있는 여유는 가져야 한다. 우리가 기도를 게을리한다면 활동의 의미를 잃을 수 있다. 이때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있으며 주님은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힘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나눔도 가능할 것이다. 바로 영적인 갈망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지혜를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마르 6, 34)

-한상우신부-


목자를
만난 양들의
기쁨이다.

양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목자이시다.

보시니
참 좋은
목자와 양들의
관계이다.

목자의
소명은
양들은 함께
살아가는
사랑의 삶이다.

산다는 것은
예수님같이
사랑하는
삶이다.

사랑하는 삶이란
양들을 위해
죽는 삶이다.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양들과 함께
아파하시는
사랑이다.

구체적인
우리의
삶속에서
만나게되는
목자의 지극한
사랑이다.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사랑이다.

용서의 넉넉한
품으로 양들을
모으신다.

어둠을 비추는
희망으로
삶의 한복판에
계신다.

우리의 목자는
삶의 참맛을
되찾아주신다.

사람됨을
당신의 삶으로
들어높이신다.

목자의 사랑은
각별하다.

일그러진
인격을
온전하게
하신다.

욕망의 자리를
인격의 자리로
바꾸어주셨다.

우리에게는
끝까지 믿고
신뢰할

예수
그리스도라는
목자가 계신다.

가장 큰
은총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공감하시고
치유시켜
주시는 사랑이

양들을
지켜주시는
참빛이다.

목자는
어둠을
밝히는
빛이심을
믿는다.

목자의 길이
생명의 길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보여주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예수님께서는 선교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쉼이 필요함을 아십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복음 선포와 치유와 구마의 권한으로 사람들에게 봉사하면서 많이 지치고 또 들뜨기도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력을 회복하고, 또 차분히 지난 시간을 성찰하면서 그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하도록 안내하시는 겁니다. 혹여 실패와 거부의 상처가 패였다면 어루만져 주실 것이지요. 번잡함을 벗어난 외딴곳의 고요한 시간은 그래서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 모두의 목자이시기도 하지만 지금은 제자들의 필요를 살피시는 자상한 목자이십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마르 6,34)

그런데 군중은 예수님 일행보다 먼저 외딴곳으로 달려와서 그분을 기다립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힘이 놀랍고, 또 그 힘이 간절히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외딴곳은 더 이상 외딴곳이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

제자들은 기대했던 쉼을 포기하고 또다시 군중을 마주해야 하지만, 자기들의 필요를 먼저 살피고 돌봐 주시려고 했던 예수님의 의향을 이미 확인했으니 크게 실망하지는 않을 겁니다. 군중을 향한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사랑의 가르침, 자비로운 돌봄, 그리고 당신의 뜻을 돌이키는 희생과 인내는 제자들에게 확실한 시청각교재이니, 이곳은 그야말로 산 교육의 현장인 셈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목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원한 계약의 피로,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히브 13,20)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목자 정체성을 위와 같이 서술합니다. 예수님의 목자 직분은 "계약의 피"로써 완성된 영광입니다. 진정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가장 큰 사랑의 증거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화답송)

화답송은 목자와 우리의 관계를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목자이시니 우리는 결핍과 아쉬움, 부족함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양들에게는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도 흡족하거니와, 막대와 지팡이를 들고 자기들을 보호하며 이끄는 목자의 현존이 더없이 든든하고 행복합니다. 양들의 충만한 평화와 위안이 곧 목자의 행복이기도 하지요.

주님은 우리의 크고 작은 불편함과 시련, 고통을 모른 체하실 수 없으십니다. 우리 존재를 마주하는 순간 그분 마음에서 자동으로 연민의 사랑이 분출하기 때문이지요.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감지하시면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이 제대로 쉬시지도 못하고 다시 몸을 일으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어쩔 때는 염치 없고 죄송해서 그분께 심려를 끼쳐드리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지요.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은 물론이고 우리를 둘러 싼 세상의 도전들이 전방위적이고 상당부분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목자의 눈길과 손길, 마음길이 필요한 작은 양들입니다.
 

"제 한평생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화답송)

"은총과 자애!" 목자와 함께하는 우리에게 보장되는 선물입니다. 이밖에 무엇이 더 필요할지요! 우리 곁을 떠나시지 않고 사랑으로 돌보시는 목자가 계신데 더 기웃거릴 세상 유혹이 무엇이겠는지요!

사랑하는 벗님!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마음에 평화로이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나"를 향한 그분의 연민 안을 헤엄치는 작은 양이 되어도 좋겠지요.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목자를 소유한 벗님은 참으로 복되십니다. 아멘.

 불쌍함의 순

 -김찬선신부-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오늘 복음은 짧지만 주님의 따듯하고 세심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은 파견되었던 제자들이 돌아와 보고를 드린 것으로 시작되는데

보고를 들으신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수조차

없게 된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의 활동과 쉼이 조화를 이루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저의 짧지 않은 인생에서 잘못을 하거나 잘못된 경우는

저 아닌 다른 누구 때문이거나 어떤 힘든 상황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제가 맡은 많은 책임과 어려운 일들 때문인 것 같지만

오늘 제자들처럼 책임과 일들에서 물러나 저만의 시간을 갖는 것,

다시 말해서 피정을 제대로 가지지 못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청원장을 할 때는 이것을 철저히 실천했습니다.

그러니까 매주 하루는 공동체를 떠나 양로원에 가서

말하자면 양로원 피정을 했는데 저도 할머니들께 사랑을 드렸지만

할머니들의 사랑과 주님 사랑에 제가 오히려 치유 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인생을 잘사는 것이 거창한 것에 있지 않고 이 작은 것들의 성실한

실천에 있는데 그런데 저는 관구장 책임과 이후 많은 책임을 맡으면서

이 실천을 소홀히 해서 잘못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게으름이 필요합니다.

삶과 활동을 영적으로 이끌기 위해서 일들을 게으름피우는 시간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일에서 떨어지고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있음으로써 우리는

객관적으로 그 일을 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안에서 그 일을 봅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이

뒤바뀌지 않고, 해야 할 일과 안 해도 될 일을 잘 식별하게 됩니다.

 

주님의 따듯한 사랑은 제자들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쉬려고 떠났는데 거기까지 사람들이 따라옵니다.

 

사랑이 부족한 저 같으면 쉴 틈을 주지 않는 그들이 징글맞고

짜증이 났을 텐데 주님 마음 안에서는 짜증이 나지 않고 연민이 올라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연민하시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병고나 굶주림이나 가난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목자 없는 것이 가엾고,

그래서 병을 고쳐주거나 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들이 주님께 몰려든 이유였을까요?

제 생각에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주님의 연민 사이에 차이가 있었을 겁니다.

상당수는 영육의 병을 고쳐주거나 고통의 치유를 바라고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마 이렇게 생각하셨을 겁니다.

얼마나 목자가 없으면 사람들이 이렇게 나에게 몰려들까!

 

그러므로 우리도 불쌍함의 순서랄까, 연민의 순서를 다시 매겨야 할 겁니다.

우선 불쌍함의 기준부터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불쌍한 것은 가난하고, 병 들고, 장애가 있는,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얘기해서 불행한 사람이 불쌍한 사람이고,

가난 때문에 불쌍한 것이 아니라 가난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장애 때문에 불쌍한 것이 아니라 장애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방끈이 짧아서 불쌍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행복의 길인지 모르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사랑이 제일 중요함을 모르는 사람이 불행하고 불쌍합니다.

 

그러니 제일 불쌍한 사람은 사랑할 줄 모르고 사랑할 사람도 없는 사람이요,

인생의 목자가 없는 사람, 참 목자이신 주님이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며,

그러니 제일 행복한 사람도 당연히 참 목자이신 주님의 가르침과

사랑을 받는 사람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2월 9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