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7일 연중 제5주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마르코 1,29-39)
He told them, “Let us go on to the nearby villages
that I may preach there also.
For this purpose have I come.”
So he went into their synagogues,
preaching and driving out demons
throughout the whole of Galile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복음(福音). 바로 ‘기쁜 소식’입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정말 우리를 기쁘게 만들고 있나요?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는 ‘기쁜 소식’과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기쁜 소식’이 일치하나요? 성공하고 부자 되는 비법이 우리를 더욱 기쁘게 할 것 같습니다. 같은 ‘기쁜 소식’인 듯한데,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그 이유를 복음 말씀에 비추어서 다시 생각해 봅니다.
첫째,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마귀 들린 이들이요, 병든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건강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복음 말씀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려면 나의 욕심과 욕망이 아닌 아픔과 상처를 살펴보라는 의미입니다. 둘째, 아픈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 시간이나 장소가 아니라, 그 시간과 그곳에 예수님께서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중요합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복음을 다른 곳으로 전하시고자 찾아 나서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일을 하시려고 떠나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려면 이처럼 준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지닌 아픔과 상처를 인정하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찾아가야 하며, 우리를 찾아 나서시는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아프고 힘들어서 더 이상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 지친 우리의 마음, 그 누구도 위로해 주지 않는 그 마음을 안고 예수님을 만나러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욕심을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낫게 하시는 ‘기쁜 소식’의 선포자십니다.
기도와 실천
-키엣대주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회당에서 성경을 읽으시고 그 의미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회당에서 나오신 후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셨고 저녁에는 병든 이들과 마귀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마치 주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 옆에 일부러 다가가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고통받는 그들 옆, 그 곳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온 갈릴래아를 다니셨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가장 바른 진리의 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읽고 외우기만 한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복음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을 읽고 의미를 이해하고 실천을 통해 주님 말씀의 빛이되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빛으로 인도하는 빛이 되기 위해서는 진실되고 간절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선교는 복음의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직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신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침묵의 시간,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아버지의 뜻과 인도를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크고 작은 일은 모두 아버지 하느님의 인도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야합니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 안에서 주님과 만나고 주님의 인도로 힘을 얻어야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고 행동으로 실천하여야 합니다. 실천되지 않는 기도는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삶은 스스로 증거하여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의 힘을 얻으십시오. 복음과 묵상을 통해 설득력있는 복음을 전파할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주님을 증거하여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 있을 때 작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가 있을 때 세상의 가치가 되는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인의 길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희가 진정한 복음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1.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그 의미를 다시 한번 묵상해보십시오.
2. 그리스도와의 일치, 기도안에서의 만남은 무엇입니까?
3. 기도가 실천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되돌아봅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작가가 길을 걷다가 이런 상호가 붙은 간판을 보았다고 합니다.
‘민들레의 상실’
작가는 이 상호가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민들레입니다. 그런데 ‘이 민들레의 상실은 과연 무엇일까?’를 계속 생각하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평범한 잡초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다른 잡초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어서 상실감을 느낀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민들레 홀씨가 제대로 땅에 떨어지지 못해서 싹을 틔울 수 없게 된 상실일까요? 아무튼 계속해서 ‘민들레의 상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멋진 상호를 보게 된 작가가 다시 간판을 바라보고는 어이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글쎄 다시 보니 ‘민들레의 상실’이 아니라, ‘민들레 의상실’이었습니다. 진열장에는 여성복이 가득했습니다.
띄어쓰기 하나의 차이인데 느낌이 확 달라집니다. 그리고 바라보는 시선도 바뀌게 됩니다. 우리 인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평범함이 아닌 특별한 존재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잘 보아야 할 것입니다. 부정적인 시선 말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봐야 합니다. 미움을 담지 말고 사랑을 담아서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치유를 받기 위해서는 주님 앞으로 모여들어야 했습니다. 시몬의 장모도 주님의 손을 잡아서 치유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 주님 앞으로 가야 하며,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주님을 제대로 바라봐야 하고, 이로써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에서 홀로 기도하십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생각, 자기 뜻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중심을 맞추기 때문에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모습처럼 외딴곳에서 홀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세상, 고통과 시련이 가득한 세상 안에서도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사람은 복음을 선포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참으로 불행할 것이라고 말했지요.
우리는 이 불행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과 함께하면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십시오.


인터넷에서 ‘없다’ 시리즈라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10대, 철이 없다. 20대, 답이 없다. 30대, 집이 없다.
40대, 돈이 없다. 50대, 일이 없다. 60대, 낙이 없다.
70대, 이가 없다. 80대, 처가 없다. 90대, 시간이 없다.
100세 이후, “다 필요 없다.”
재미있는 ‘없다’ 시리즈입니다. 공감도 되고 생각할 것이 많은 글이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작은 것 하나 없는데도 신경이 많이 쓰이는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필요한 것이 줄어듭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세상의 것은 점점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하늘 나라에 머물 수 있기 위해 필요한 것만을 챙겨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기 위한 우리의 사랑만이 필요합니다.

결단력 있는 지도자가 되는 시간, "새벽 아직 캄감할 때"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다가 갑자기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결단을 내리시는 배경에는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 일어나 외딴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아버지의 뜻을 여쭙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분명 기도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을 것이고 그 뜻대로 결단을 내리셨을 것입니다.
살아가다 막막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때만큼 힘들 때가 있을까요? 막막한 상황에서 한 리더로서 결단을 내리는 것은 매우 힘이 듭니다. 그러나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리더만큼 위험한 존재도 없습니다. 우리는 매번 누군가를 우리의 리더로 뽑습니다. 이때 참으로 결단력 있는 사람을 뽑을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된 정치인들이 나라를 망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제가 문제를 낼 테니 한 번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같으면 공직에 출마한 이 세 사람의 후보 중 누구를 리더로 채택하겠습니까?
1번 후보: 젊어서부터 술, 담배, 마약을 했던 불량소년입니다. 숨겨둔 여자와 자식이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다리가 불편해서 휠체어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2번 후보: 어려서부터 말썽꾸러기 학생이었고, 낙제생이었으며, 사관학교도 3수 만에 들어갔습니다. 줄담배를 피우고, 술고래였으며, 괴팍한 성격이어서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렸습니다.
3번 후보: 자기 관리가 확실한 사람이고 채식주의자입니다. 술과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으며, 애국심이 강해서 전쟁에 나가 훈장도 받았습니다. 시간 날 때는 그림을 그리며 여가를 즐기기도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은 3번 후보를 선택할 것입니다. 1번은 루즈벨트, 2번은 처칠, 3번은 히틀러입니다. 2차 세계대전 동시대 리더로서 루즈벨트는 미국을 승리로 이끈 역사상 유일한 4선 대통령이고, 처칠은 히틀러보다 항상 한 수 앞서 그를 이긴 영국 총리였으며, 히틀러는 말을 안 해도 알 것입니다. 그는 독재자였고 그의 자기 확신 때문에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리더입니다.
이런 리더가 가장 위험합니다. 자기를 믿는 리더입니다. 사람은 유한하고 실수투성이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이뤄놓은 그동안의 업적에 취해서 언제라도 큰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리더의 대표적인 사례는 히틀러뿐 아니라 나폴레옹도 있습니다. 여러 경제적 어려움이 닥쳤을 때 나폴레옹은 이를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극복해보려 했습니다. 그동안의 승리에 심취해 있던 그는 러시아 원정을 계획하였습니다. 분명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독선적으로 자신만 믿었습니다.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정신으로 밀고 나갔습니다. 출발 당시 60만 대군이었지만 살아서 돌아온 숫자는 4만이었고 그중 전쟁을 할 수 있는 수준의 건강한 상태로 돌아온 사람은 천 명가량이었습니다. 물론 히틀러도 이런 역사적 사실이 있음에도 독선적인 성격으로 러시아 원정을 감행하며 독일 패망을 앞당겼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위험한 유형의 리더가 결정장애 리더입니다. 물론 자신의 결정이 틀릴 수 있음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리더의 자리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결정장해형 리더는 독선적인 리더만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립니다. “나쁜 결정이 무결정보다는 낫다.”는 말도 있습니다.
결정장애가 생기는 원인은 결정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지나치게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결정으로 손해 보는 것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짜장면을 먹자니 짬뽕일 못 먹는 게 안타깝고 짬뽕을 먹자니 짜장면이 아까운 것입니다. 짬짜를 먹자니 울면이 당기는 식입니다. 죽을 것이냐, 살 것이냐 고민했던 햄릿이 그 대명사입니다. 결단을 못 해서 온 가족이 다 죽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우리는 세월호 침몰 당시 이런 리더를 보았습니다. 세월호 선장입니다. 그는 침몰 직전 여러 이상 징후에도 전혀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살 궁리만 하며 자신은 빠져나오고 배에 타고 있던 나머지 아이들은 배에 머물라고만 했습니다. 그가 탈출하고 자신의 젖은 돈을 방바닥에서 말리던 장면은 많은 이들을 분노케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 애착이 많은 이들을 리더로 뽑을 때는 이렇게 자신 것을 잃지 않기 위해 타인을 희생하는 사람을 뽑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가장 훌륭한 리더는 누구일까요? 예수님처럼 결단력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으로 결단하는 사람이 아닌 새벽에 혼자 일어나 하늘의 뜻을 묻는 사람입니다. 리더는 무조건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독선적인 결단이 아닌 하늘의 뜻을 묻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잔 다르크’를 들 수 있겠습니다. 너무나 결단력이 있지만 정작 그녀는 한 소녀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리더는 항상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평상시에는 다른 이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만 어떠한 결정을 해야 할 때는 칼과 같습니다. 그리고 100년간의 긴 영국과의 전쟁을 끝내게 했습니다.
본당신부보다는 보좌신부가 속은 더 편합니다. 결정할 일이 적기 때문에 책임질 일도 적습니다. 그러나 보좌신부도 결정해야 할 자리가 분명히 있습니다. 적어도 주일학교 안에서는 결정을 내리는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리더십 공부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도 리더이고 친구들도 자기들 사이에서는 리더가 있습니다. 단 두 명만 모이면 리더가 생깁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결단력 있는 리더셨는지를 오늘 이 구절에서 명확히 깨달아야겠습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조재형신부-
신부님들과 며칠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에서 항상 중심에 있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전체적인 여행의 일정을 기획합니다. 마트에서 장을 봅니다. 매번 식사를 준비합니다. 산에 가는 신부님들을 위해서 도시락을 마련해 줍니다. 여행이 끝나면 전체 경비를 나누어서 개인들이 내야 할 경비를 알려줍니다. 1인 5역을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을 봅니다. 저는 주로 설거지를 하는데 그것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벽난로에 나무를 넣는 것도 잘 못합니다. 방이 부족한 것을 알고 기꺼이 침랑을 가져와서 거실에서 자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매번 사제들의 여행이 재미있고, 다음 여행이 기다려지는 것은 이렇게 남을 위해서 수고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목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 고민하기 때문입니다. 외국에서 생활하는 어려움을 함께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욥기’의 이야기입니다. 언제나 성실했던 욥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켰던 욥입니다. 이웃들의 어려움을 자기 일처럼 도와주었던 욥입니다. 그런 욥에게 삶의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욥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 1인 5역의 힘든 일을 하면서도 늘 넉넉한 웃음을 보여주었던 신부님처럼 욥 성인은 삶의 시련과 고통 중에서도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저의 잘못이 원인이었지만 억울하고, 화가 났던 때가 있었습니다. 성당에서 조용히 앉아서 성경책을 펼쳤는데 ‘욥기’의 말씀이었습니다. 제 안에 있던 원망과 억울함은 봄에 눈이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비가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듯이 당시의 일은 사제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입니다. 멀리 원양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에게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성격이 급한 고기들이 대부분 죽었습니다. 살아 있는 고기가 더 좋은 가격을 받지만 죽은 고기들은 제 값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실수로 상어를 물고기들이 있는 칸에 넣었습니다. 돌아와서 보니 대부분의 물고기가 살아 있었습니다. 상어를 피해 도망 다니면서 물고기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어부들은 물고기를 잡으면 상어를 한 마리 넣었다고 합니다. 코로나19에서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는 것이 있습니다. ‘손 씻기, 마스크 착용, 사회적 거리두기’입니다. 1년 넘게 지키려니 힘들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백신이 보급되고 있고, 치료제도 곧 나온다고 하니 조금만 더 참고 ‘손 씻기, 마스크 착용,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면 좋겠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지켜야 할 법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자 청년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입니다.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웃의 재물을 탐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의 아내를 탐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의 목숨을 빼앗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을 잘 지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법은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법은 우리를 구속하는 올가미가 아닙니다. 법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이정표입니다. 법은 우리를 악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는 백신과 치료제입니다. 바이러스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전파되듯이 악의 유혹도 직책과 능력을 가리지 않고 다가옵니다. 사제복을 입었어도 법을 지키지 않으면 악의 유혹에 넘어가기 마련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새로운 법을 이야기합니다. ‘복음과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부귀한 것 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죽음을 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성인과 성녀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입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언제나 잠시뿐, 돌아서고 나면
험난한 구비가 다시 펼쳐져 있는 이 인생의 길.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할 때,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거릴 때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나는 더욱 소망한다.
그것들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화사한 꽃밭을 일구어 낼 수 있기를.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언제나 기도 중에 하느님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그런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언제나 ‘모든 위를 위한 모든 것’이 되려했던 바오로 사도 역시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겪었습니다.

시련은 하느님을 더 자주 생각하고 더 인격적 관계를 맺으라고 초대하는 부르심입니다!
-양승국신부-
언젠가 한 대 영성가께서 끔찍한 호러 영화를 보시는 모습에서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유혈이 낭자하는 조폭 영화나 보기만 봐도 끔찍한 공포 영화는 아예 보지 않는 편입니다.
영화를 보더라도 마음 편안해지는 가족 영화나 멜로 영화를 즐겨보는 편입니다. 클래식이나, 내 마음 속의 풍금이나, 8월의 크리스마스 등등. 그러고보니 마음 편히 영화 한편 본지도 정말 오래 되었습니다.
뉴스를 보다가도 끔찍한 뉴스가 나오면 고개를 돌리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 너무 자주 고개를 돌리게 되는 화면이 잦다보니, 아예 뉴스조차 보기가 두려워집니다.
불행이 밀려오기 시작하면 한꺼번에 밀려온다더니, 코로나19 바이러스 여파로 갑작스레 사라진 직장, 그에 따른 생활고, 우울증세, 극단적 선택...힘겹게 하루 하루를 버티다가 더 이상 살아갈 이유나 희망, 동력을 상실한 이웃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 사회의 안전망이 더 활발히 발휘되어야 하겠습니다. 동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내 발밑만 바라보지 말고 시야를 좀 더 넓혀야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소리없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야겠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래서는 안된다고, 함께 가자고, 힘을 보태 이 어려움을 이겨내자고 외쳐야겠습니다.
일말의 위로가 되는 것은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 역시 다들 원치 않은 십자가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조금도 호의적이지 않은 삶과 매일 마주하며 비틀비틀 신앙의 여정을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특히 욥이라는 특별한 인물의 삶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신음하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의 인생은 정말이지 끔찍한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탄식과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인생이었습니다. 사는게 얼마나 괴로웠으면 이런 탄식을 남겼습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 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가는구려.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욥기 7장 1~4절, 6~7절)
사실 욥은 한때 아주 잘나가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극찬을 들은 보기 드믄 참 신앙인이었습니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와 같이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욥기 1장 8절)
이토록 하느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욥이었는데, ‘재미있는 하느님’ ‘때로 이해 못할 하느님’께서 잘 나가던 욥을 크게 내리치십니다. 그를 심연의 구렁텅이로 떨어트리며 시험에 빠지게 하십니다. 그것도 적당히 내리치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풍비박산이 나게 만드십니다.
그 많던 재산 모두를 약탈당하게 만드셨습니다. 그 많던 종들과 가축들이 모두 죽어나갔습니다. 결국 사랑하는 자녀들마저 모두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뿐만 아닙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욥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재를 온 몸에 둘러쓰고 사기그릇 조각으로 가려운 부위를 긁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어이없는 인생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욥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자신 앞에 펼쳐지는 정말 이해하지 못할 억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합니다. 하느님 앞에 완전히 벌거벗은 알몸으로 엎드려 외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토록 큰 불행 앞에서도 악담이나 저주, 투덜거림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도 주님 앞에 완전히 알몸으로 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난다 긴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도 강렬한 밑바닥 체험을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잔뜩 이렇게 저렇게 치장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을 하느님 앞에 드러낼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욥의 한결같은 신앙을 떠올려야겠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언제나 활짝 자신을 열어놓는 개방성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작아지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높은 곳에 있을수록 밑으로 떨어질 때 그 충격이 큽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노력을 되풀이해야겠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심연의 밑바닥 거기까지 내려가면 거기서 광대무변한 하느님의 얼굴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낮아지고 작아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욥은 나름대로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한 한 인간이 그분의 의지, 그분의 처신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그 자체가 천부당만부당한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욥은 자신에게 다가온 참혹한 시련 앞에서,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 시련을 통해 하느님을 더 깊이 생각하게 되고, 그분의 현존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결국 광대무변하신 하느님 앞에 자신은 한낱 티끌같은 피조물에 불과함을 깨닫습니다. 결국 자신의 인생사 모든 것, 성공도 실패도, 재산도 가족들도, 병고도 죽음도 그분 손길 안에 의탁해야 함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큰 시련이 다가올 때 우리는 더 자주 하느님을 찾아야겠습니다. 더 자주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추구해야곘습니다. 더 그분께 집중해야겠습니다.
또한 갑작스레 우리에게 다가오는 참혹한 고통은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하느님 측의, 징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시련은 하느님을 더 자주 생각하고 더 인격적 관계를 맺으라고 초대하는 부르심, 더 성장하고 더 큰 그릇이 되라는 부르심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이영근신부-
연중 5 주일입니다. 추위가 누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모두들 건강에 유의하시길 빕니다.
<제1 독서>에서, 욥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희망을 둡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오늘 <복음>에서 이루어집니다.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의 전달자로서,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1고린 9,19), “모든 사람의 모든 것이 되었음”(1고린 9,22)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 선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로 제시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해 줍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기도생활과 활동생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활동생활은 다시 말씀의 선포활동과 치유구마활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셋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를 우리는 예수님의 3중 직무 곧 예언직과 사제직과 봉사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 가지 내용을 다 담고 있습니다.
<첫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당신께서 빛이심을 드러내시는 장면이요, <둘째 장면>은 아버지 성부와 친교와 유대를 이루시며, 새벽에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신 장면이요, <셋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나서, 이웃 고을로 가시어 복음을 선포하시는 장면입니다.
<첫째 장면>은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시고 몰려든 많은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섬기는 장면입니다. 곧 섬김의 봉사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한 구절에만 주의를 기울여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마르 1,31)
이는 손을 잡자 열이 내려가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치유를 받아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으켜지자 치유가 일어났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우리는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악습이나 결함이 고쳐져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잡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잡아주시니 우리가 고쳐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치유 받으면 믿을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믿음이 치유를 불러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치유보다 먼저 앞서는 믿음입니다.
<둘째 장면>은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곧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에 당신 삶의 중심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토록, 당신의 삶은 아버지 성부와의 친교와 유대 안에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사제직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지상 삶의 두 가지 차원, 기도와 활동의 삶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결코 기도 없는 활동이나, 활동 없는 기도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곧 기도는 활동이 되어야 하고 활동은 기도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활동에 앞서 먼저 기도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는 곧 활동으로 나아갔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나서, “복음 선포”를 위해 다른 이웃 고을들로 찾아가시는 장면입니다. 곧 선포와 증거의 예언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 곁을 떠나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주신 사명이기도 합니다(마르 16,15).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고, 먼저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이는 당신 권능의 표시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사랑과 구원의 표시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은총, 이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이 사명을 우리의 사명으로 받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이 사명을 바로 우리의 소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곧 ‘먼저 하느님과의 유대와 친교를 앞세우는 기도의 삶’이요, ‘선포된 복음을 영접하고 그를 선포하고 증거 하는 삶’이요, ‘형제와 이웃에게 봉사하는 섬기는 삶’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그 일을 하도록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주님!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당신 뜻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알고 실행하는 것이 제 삶이 되게 하소서!
제 뼈 속에 갇힌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병을 지배하시는 예수님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갔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마르 1,29-3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으로서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분”
이라는 증언입니다.
여기서 ‘열이 가셨다.’ 라는 말은, ‘열이 떠났다.’,
즉 마귀가 쫓겨나는 것처럼 ‘열’이 떠나갔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루카복음에는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루카 4,39).>
예수님은 의술로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과 권한으로 ‘병이라는 것’을 쫓아내심으로써,
그 ‘병이라는 것’의 억압에서 병자들을 해방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마태오복음 8장과 루카복음 7장에 나오는 ‘어떤 백인대장’은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라는 믿음을 처음으로 고백한 사람입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루카 7,7).”
이 말은, 예수님께서 ‘병이라는 것’에게 떠나라고 명령만 하시면,
그 ‘병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떠나갈 것이고,
그러면 병자가 치유될 것이라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백인대장의 믿음에 대해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라고 감탄하시면서,
그를 칭찬하셨습니다(마태 8,10; 루카 7,9).
우리가 믿고 있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으로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과 권한도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는 힘’으로 변함없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10-11).”
그 어떤 병도, 그 어떤 바이러스도
예수님의 이름 앞에 굴복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4-16).”
“정말로 예수님께 기도만 하면 모든 병이 다 낫는가?”
이 질문이 ‘무조건, 자동적으로’ 병이 낫는 것이냐는 뜻으로 한 질문이라면,
‘그것은 아니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는 ‘권능’만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라,
모든 일에 대한 ‘권한’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권한’이란, 무엇인가를 할 권한과
무엇인가를 하지 않을 권한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인지, 거절하실 것인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결정하시는 일입니다.
따라서 ‘무조건, 자동적으로’ 기도를 들어 주셔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예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일이고, 그것은 올바른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간절하게 청했다가 거절당했습니다.
“......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2코린 12,7-9ㄴ).”
바오로 사도는 몸속에서 가시가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자주 겪는
어떤 병을 평생 앓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것이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했다는 말은,
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었고(사도 19,11-12),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도 일으켰습니다(사도 20,9-10).
그러나 자기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했고, 평생 병고에 시달렸습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라는 주님의 말씀은, 사도 직무 수행과
선교활동에 필요한 은총은 충분히 주셨기 때문에 다른 은총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뜻이고, 바오로 사도의 간청을 거절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라는 말씀은, 바오로 사도가
약한 상태에 있을수록 주님 은총의 힘을 더욱 잘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선교 여행과 활동을 생각해 보면,
그가 남들보다 더 건강했기 때문에 그 많은 여행과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병으로 허약한 상태인데도 해낸 일이고,
그것은 그만큼 주님의 힘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지금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프더라도 ‘주님의 뜻’으로 여기고,
그냥 참고 살아라.”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병에 걸리고, 고통을 겪는 것은 결코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영육 간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어떻든 끈질기게 기도해도 병이 낫지 않고 그냥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많고,
간절하게 기도해서 불치병이 낫는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고통은, 아직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에 속한 일이고, 주님께서 누구의 기도는 들어 주시고,
누구의 기도는 왜 들어 주지 않으시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니까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간에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주님의 자비를
믿어야 하고, 결과는 주님께 맡기되,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복음: 마르 1,29-39: 병자들의 치유와 예수님의 전도 사명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의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에 대한 것을 명백하게 밝히는 것 같다. 제1 독서는 병으로 인해 육체적 고통을 당한 욥의 체험을 묘사해주고 있으며, 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 사랑과 연민으로 다가가 치유해주시는 분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고생한다는 사실을 아시고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치유해주신다. 이 모습은 예수께서 생명과 구원을 베푸시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구원과 사랑의 표지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불행에서 건져주시기 위해 사람들 가운데 현존해 계신다는 사실과 이미 '하느님 나라'의 권능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징표이다.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31절) 그 시중은 봉사를 통한 따름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여기서 '시중들다'라는 것은 마르코 복음에서나(15,41) 루카 복음에서나(8,3) 자신들의 재산까지도 바치면서 부인들이 예수님을 '따름'을 표현하는 말이다. 즉 베드로 장모의 행동은 마음 상태의 표현으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봉헌된 사랑과 헌신의 행위이다. 참된 기적이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지 감정적이고 선동적인 것을 추구하는 유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두 번째 장면에서 즉시 나타나는데,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34절). 이 말씀은 당신이 베푸시는 기적을 통하여 이익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나타났고 선동적인 것을 추구하는 모습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하시고, 마귀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는데, 마귀들은 그분이 누구신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탄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현세적 메시아로 이끌려 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마르코의 '메시아의 비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은 군중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고통, 자아 포기,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그 비밀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는 함구령이 필요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오직 십자가 위에서만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가 가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모든 활동의 열쇠가 무엇인지를 제시해주고 있다. 그분은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시며 그것으로 힘을 얻으시고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신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35절). 이 기도의 자세는 예수님의 업적을 보고 그 업적을 현세적 정치적으로 이해하려는 데서 위험하고, 또 그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이다. 이 유혹은 공생활 시작에서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것이다. 외딴곳에서 기도하셨다는 것은 더 깊은 의미가 있다. 당신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힘을 얻고 빛을 구하기 위해서는 오직 성부와 더불어 머무셔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활동 계획을 하느님 아버지 앞에 다시 한번 점검하고 계획하기 위해 머무르심이다. 즉 그 기도는 당신의 활동과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기도이며, 도피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의무를 다하기 위한 기도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이 그분을 찾기 때문에 더 머물러 계셔달라고 청하는 시몬과 그 일행에게 예수께서는,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38절). 예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곳이 그분에 관한 호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카파르나움에 국한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더 큰 희생이 요구된다고 해도 다른 곳에도 구원의 복음을 선포해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이 예수께서 외딴곳에서 홀로 바치는 기도를 통해서 당신 자신을 되찾고 성부와 자신을 연결해주는 신비롭고도 유일한 관계 안에서 당신의 사명을 더 깊이 깨달았다. 그래서 그분은 제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사명을 계속 수행하실 수 있었다. 여기서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가 시작된다.
하여간에 예수님의 사명은 무엇보다도 복음선포이다. 구원이란 것은 하느님의 복음을 신앙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된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복음화 사명'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39절).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어떤 활동보다도 '복음화'가 우선적이어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께서 당신의 공생활 중 그렇게 많은 업적과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쳤어도 항상 기도로써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시며 모든 것을 이루어 나가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칫 행동주의에 잡혀서 기도를 게을리하며 자신의 모든 활동이 기도라고 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기도가 동반하지 않는 활동은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없어 오래가지 못하고 중단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활동에 있어서 예수님과 같이 기도로써 시작하고 기도로써 마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고 도우심을 구하여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열정적인 선교 활동의 비밀이 무엇인지 말한다. 바오로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중에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가 체험했던 무한한 빛과 구원에 대한 감사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 그러면서도 바오로 사도의 복음선포는 거창한 말로써 이루어지는 소리로써 보다는 자기의 생활 자체로써 하고 있음을 말한다. 우리의 복음선포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마르 1, 34)
-한상우신부-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뜨겁게
보게된다.
진정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묻게된다.
고통과 함께
살고있는
우리들 삶의
모습이다.
우리의 삶이란
고통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닌 십자가에서
주님을 만나는
여정이다.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다.
고통이 있기에
치유가 있다.
생명은
치유를
필요로 한다.
고통을 통해
연약한
우리자신을
만나게된다.
하느님의
보살핌을
애타게
바라는
우리들
시간이다.
고통은
우리의 삶을
깨운다.
새로운 삶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고쳐 주시는
치유는 새로운
삶의 기쁨이다.
창조하신
피조물을
다시
치유하여
주신다.
우리가
나약한
사람임을
깨닫는다.
갖가지 질병보다
더 강력한 당신
사랑을
보여주신다.
사랑의
사람들이다.
우리의 고통에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다.
고통을
치유하시고
고통을 통해
삶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뜻은 끝까지
우리를 돌보시는
사랑이시다.
사람은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치유가 필요한
사랑 한가운데에
주님과 함께 있다.
치유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복음 선포로 집중됩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는 사랑의 시간은 복음 선포의 원동력입니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활동을 이 기도 대목의 전후에 배치해, 기도가 복음 선포의 중심임을 보여줍니다.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곳"
예수님이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 선택한 시간과 장소는 명확합니다. 세상과 사물의 고요 한가운데서 자신의 내면 깊숙히 들어가 그곳에 계신 아버지의 현존에 잠길 수 있는 때와 장소입니다. 지금은 오로지 아버지를 위한 시간입니다. 여기에서 그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말씀을 전할 힘이 응집됩니다.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마르 1,38)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치유해 주시고 마귀를 쫓아 주시자 사람들이 그분을 붙들고 싶어합니다. 이방 세력에 나라를 빼앗겨 억압과 착취로 시달리는 외부적 폭력 상황과, 인간 육신을 파고드는 질병, 장애, 마귀, 죽음 등의 내부적 실존 모두 참 버거운 터였으니까요. 기쁜 소식이 전해져야 할 대상은 한 지역의 민족에 그치지 않고 모든 인류로 확대되어야 합니다. 고통은 모든 인간이 겪는 실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공생활 초기에 일어난 기적들은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제1독서는 욥의 탄식을 들려 줍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같지 않은가?"(욥 7,1)
욥은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던 때에는 자신이 이 말을 내뱉을 줄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겁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은 그들만의 것일 뿐, 자신은 하느님의 축복을 한껏 누리는 존재였으니까요.
이제 욥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의 끝에서 아내와 친구들의 다그침까지 받게 되자 그동안 마음속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어두운 생각들을 끄집어 냅니다. 모든 걸 누리고 살았을 때는 들춰보지 않았던 어둠입니다. 고통은 이처럼 자신의 내면을 밑바닥까지 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를 받아들이면 은총으로 변하는 마법이 곧 고통입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욥 7,7)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깨달음은 고통을 제대로 직면한 이에게 주어지는 지혜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느님의 숨으로 살아가는 존재지요. 그분께서 숨을 거두시면 어떤 항변이나 거절도 소용 없습니다. 생명의 주권은 오직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욥의 시대 뿐만 아니라, 예수님 시대에도,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에도 무수한 욥이 하느님과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허덕이며 지고 가는 이 짐을 대신 져주시고 또 없애주러 오신 분이시지요.
"그리스도 우리의 병고를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네."(복음 환호송)
예수님은 고통받는 인류를 친히 구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여느 의사나 구마자와 다른 점은 치유와 구마 행위로 어떤 이득도 취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직접 병고와 질병의 해악을 떠안아 죽음까지 불사하셨다는 점입니다. 내가 고쳐 준 이의 병을 대신 앓아야 하고, 내가 들은 죄의 상처를 대신 져야 한다면 쉽게 그 직업을 택할 사람은 거의 없겠지요. 이것이 직업과 사명의 차이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에게 복음 선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야기합니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9,16)
사도는 복음 선포를 자신의 운명이요 의무로 받아들입니다. 직업이 아니라 소명이라면 하느님 외에 그 누구도 그 삯을 지불할 이유가 없지요. 그래서 사도는 자신이 받는 삯이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1코린 9,18)이라고 밝힙니다. 교회 안의 모든 일도 노동력과 임금으로 환산되는 세상이니 얼핏 들으면 말장난 같지만, 아닙니다. 복음을 거저 전하는 직무는 예수님께서 함께하자고 손을 내미신 이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23)
사도 바오로의 모든 일은 복음 선포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의 가르침과 집필, 격려와 권고, 여행과 투옥, 죽음까지도 복음 선포입니다. 복음은 인간적 눈으로 가늠하는 행, 불행의 기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가련한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위로하시고 고쳐주시며 다독여 주시는 예수님을 관상합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을 다 당신에게 달라고 하십니다. 내가 다 지고 갈테니 여러분은 평화롭고 평안하라고, 다만 기쁘고 즐거우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인류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 그분의 삶 전체가 복음이고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 선포에 초대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삯으로 환산할 수 없는, 병든 세상을 향한 여러분의 기도가 진정한 복음 선포이고, 여러분의 봉사와 헌신, 나눔이 또한 그렇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 존재가 곧 기쁜 소식이니 맘껏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욥에게 예수님이
-김찬선신부-
오늘 첫째 독서는 욥기로 가장 고통받은 사람의 대표입니다.
그의 고통은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치는 고통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고통이 차례로 오는데 첫 번째는 그의 소와 나귀들이 약탈당하고
그의 머슴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양 떼와 머슴들이 벼락을 맞아 죽임을 당하였으며, 세 번째도
그의 낙타와 머슴들이 칼데아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정도만 해도 견딜 수 없는데 욥은 더 나아가서
아들딸들이 돌풍에 집이 무너져 한꺼번에 죽임을 당하는 참변을 당합니다.
돌풍에 의한 거라면 사람에 의한 게 아니니 하느님께서 죽이신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고 그래서 욥도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라는 그 유명한 말을 남기지요.
이 정도만 돼도 얼마나 대단합니까?
우리 입, 아니 저의 입에서는 이런 찬미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입에서도 몸에 종기나 나 밤낮으로 괴롭히니
신음이 나오고 마침내 절망의 소리가 나옵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욥에게 친구들이 찾아와 위로를 하는 것인지, 훈계를 하는 건지,
또는 책망을 하는 건지, 아무튼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는데
이 말들이 실은 다 아무 위로가 되지 못하고 염장을 지르는 말들입니다.
이에 비해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욥과 같은 병자들을 치유해주시는
얘기인데 말하자면 병자들은 예수님 시대의 욥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저는 오늘 주제를 <욥에게 예수님이>로 잡았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욥에게 어떻게 하셨을까? 이것이 주제인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론 찾아오는 욥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맞이하시는
분이시기도 하지만,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먼저 다가가실 겁니다
그러나 욥을 찾은 친구들과는 다르게 다가가십니다.
친구들은 귀와 마음을 가지고 가지 않고 입만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이 말하는 사정을 들을 귀를 가지고 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고통학 강의를 할 필요는 없고 그저 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아픔을 들어주고 얼마나 아픈지 공감해주는 것뿐입니다.
그러기에 환자의 고통을 충분히 들어주고 공감해주기 전에는 고통의
원인이나 이유를 의학적으로 얘기하는 것도 삼가야 하는데 신학적으로
고통의 이유와 원인을 설명하는 것, 그러니까 네가 잘못 살아서 그런
거라거나 죄를 하느님께서 벌하신 거라고 얘기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혹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자기의 고통이 죄의 벌인지 또는 하느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는지 혼란스러워할 때 말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때일지라도 말로 그것을 다 설명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대신하는 나의 사랑을 느끼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시몬의 장모에게 다가가시어 묵묵히 그러니까
아무 말씀 하지 않으시고 병자의 손을 잡아주시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다가가시는 분이시고,
시몬의 장모에게 다가가시기 위해 실은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능력의 주님이시기에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지만
모든 병자를 고쳐주신 건 아니며 다만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당하심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느끼게 되길 바라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임마누엘 주님께서 우리의 고통에 함께 계심을
느끼는 나날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코 1,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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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욥기 7장 1~4절, 6~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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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의 '메시아의 비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은 군중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고통, 자아 포기,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그 비밀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는 함구령이 필요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오직 십자가 위에서만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가 가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모든 활동의 열쇠가 무엇인지를 제시해주고 있다. 그분은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시며 그것으로 힘을 얻으시고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신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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