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0일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스콜라스티카 성녀는 480년 무렵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성 베네딕토 아빠스의 누이동생인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성인이 세워 그녀에게 맡긴 여자 수도원의 첫 번째 수녀이자 초대 원장이었다. 성녀는 베네딕토 성인과의 영적 담화를 통하여 수도 생활에 대한 많은 격려와 도움을 받았다
☆☆☆
예수께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희는 내 말을 새겨들어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마르7,14-23)
Jesus summoned the crowd again and said to them,
“Hear me, all of you, and understand.
Nothing that enters on e from outside can defile that person;
but the things that come out from within are what defil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오늘 독서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우리가 ‘선악과’라고 알고 있는 나무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으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맙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유일한 금지 명령을 어겼습니다.
선악과 이야기를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의문이 생깁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이 그것을 먹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셨을까?’ ‘그 사실을 알고 계시면서도 선악과를 준비하신 것인가?’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좋으신 하느님이 아니시라, 인간을 악에 빠지게 만드시는 하느님이 아니신가?’
그러나 창세기의 저자는 우리가 의혹을 제기하기보다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옆에는 생명나무도 함께 있었지만, 아담과 하와는 그 나무를 바라보거나 그 나무에 손을 대지도 않았습니다. 선과 악을 아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하느님의 영역이므로, 생명에 머물고자 한다면 생명나무를 선택하고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걸었기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생명나무”보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더 먹음직스럽고, 우리를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창세 3,6 참조). 모든 나무 열매가 다 우리의 것이지만, 단 하나의 나무만은 하느님의 것으로 남겨 드려야 함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양보는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주고,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경외심의 작은 표현이 될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취업준비생은 “취업하고 싶다.”라고 말하지만, 직장인은 “퇴사하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학생은 “빨리 성인이 되고 싶다.”라고 말하고, 성인은 “학생일 때가 좋았어.”라고 말합니다. 솔로는 “연애하고 싶다.”라고 하고, 커플은 “혼자가 편하다.”라고 말합니다. 결혼 전에는 “올해는 꼭 결혼하고 싶어요.”라고 말하지만, 결혼 후에는 “시간을 돌이킬 수만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합니다.
공감이 가지 않습니까? 그만큼 우리는 지금을 사는 나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미래의 시간에 분명히 그리워하고 부러워할 수 있는 시간을 지금 살고 있으면서도, 그 시간이 제일 나쁜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후회만을 남기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후회를 남기는 삶을 결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제일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과거에 연연하는 삶이 아닌, 또 미래를 걱정만 하는 삶이 아닌, 지금을 충실하게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을 잘 사는 나를 발견하고, 더 나아지는 나도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많은 사람은 과거에 연연했던 것 같습니다. 과거의 율법이 소중하기는 했지만, 율법의 정신보다는 율법의 문자에만 얽매여 있었지요. 그래서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서 말하고 있는 정결하고 부정한 음식에 관한 규정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마르 7,19)라고 분명히 밝히십니다. 음식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나쁜 것들이 가장 큰 문제임을 말씀하시지요.
몸에 좋은 음식과 몸에 나쁜 음식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사람에게서 나오는 나쁜 것은 어떻습니까?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등의 악한 것들이 사람에게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히고 있습니다(마르 7,21-23 참조).
과거의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를 문자 그 자체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정신을 지금 이 순간과 지금 이 자리에 펼치는 삶을 주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런 삶이 후회를 남기지 않는 삶이 됩니다. 그토록 원하는 행복의 길로 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갈 때만 해도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군대에 가지 않으면 신의 아들이고, 군대에 가면 어둠의 자식이다.”
부모를 잘 만나서 소위 돈 많고 빽 좋은 사람들은 군대에 가지 않아서 ‘신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에 반해서 부모의 혜택도 없고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을 경우 무조건 군대에 가기 때문에 ‘어둠의 자식’이라고 했던 것이지요. 물론 지금이야 이런 병역 비리가 완전히 사라졌겠지만, 예전에는 심심찮게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나오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군대를 꺼리는 ‘신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주역은 늘 어둠의 자식들이었습니다. 배경 없고 힘없는 서민이지만 어렵고 힘들 때는 두 팔 걷어 젖히고 나섰습니다. 이는 우리나라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경 없고 힘없는 서민들이 뭉쳐서 늘 나라를 구했습니다.
세상 안에서 필요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배경 없고 힘없다고 억울해 할 것이 아니라, 더 큰 가치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어둠임을 알 때 빛을 찾게 된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의 뒷부분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 몇 사람이 조상들의 전통을 어기고 손을 씻지 않은 채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해 따집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남의 잘못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라 율법의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요? 우선 인간 안에서는 좋은 것이 나올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자를 찾게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으면 구원자가 필요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에서 악한 것들이 나온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정말 사람 안에서 좋은 것이 절대 나올 수 없는 것일까요? 마태오 복음에서는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라고 하십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깨달아서 성불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은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명상을 통해 인간임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인간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무리 명상을 하더라도 자신이 인간인 줄 모르고, 자신이 인간인 줄 모르면 절대 인간의 말과 행동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선이시고 진리이시고 빛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사람 안으로 들어오시기 전까지는 인간 안에 선이고, 진리고, 빛이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적어도 하느님께 향하게 만드는 작은 등불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순교복자수녀회 이영숙 베드로 수녀님이 인천 성모자애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병동을 방문할 때마다 이상하게 한 자매가 수녀님만 들어오면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종교적인 문제라 여겼는데 함께 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 자매는 자신 같은 죄인이 수녀님같이 거룩한 분 곁에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은 수녀님이 그 자매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앞을 가로막으며 “죄인 잡았다! 나랑 자매님이랑 누가 더 죄가 큰가 우리 내기해 볼래요?”라고 말했습니다. 자매는 처음에 좀 당황하는가 싶더니 이내 수녀님을 안고 목놓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억울하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은 다 잘살고 있는데 자신만 죽어야 한다는 게 억울했던 것입니다. 자매는 시댁 식구들을 다 죽이고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자매는 서른아홉이었고 췌장암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자매는 홀어머니와 여동생을 위해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우연히 출근길에 만났던 남편이 오랜 시간 자매를 쫓아다녔습니다. 남편은 학벌도 좋았고 시댁도 잘 사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남편을 거부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월세살이부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시댁에서는 그 자매를 며느리로 받아들여 주지 않았습니다. 시댁 식구들과 겸상하지 못하고 일꾼 대하듯이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이 쓰러져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꼬박 3년을 간호하고 나니 남편도 미워졌습니다. 똥오줌 받아내며 남편을 구박하고는 또 미안해서 안고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구박이 심해졌습니다. 남편만 믿고 살아온 것이 억울해졌고 남편 수발은 시부모에게 맡기고 자신은 아이들 핑계를 대며 구청 봉사를 다니며 밖으로 나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나마 칭찬을 받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자신도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수녀님은 시댁 식구들을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시댁 식구들은 며느리가 손자들을 안겨 주었을 때 결혼식을 시켜주려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가졌을 때 아들이 식물인간이 되었고 며느리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니,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사실 누워있는 아들과 며느리의 모든 병시중을 들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전에 당한 설움과 지금의 상태 때문에 시댁 식구들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던 것은 그 자매였습니다.
며칠 뒤 자매의 생일이었는데 시부모는 커다란 과일바구니에 많은 돈이 든 저금통장을 넣어 며느리에게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미안했고 재산 다 팔아서라도 고쳐줄 테니 빨리 나으라고만 했습니다. 시부모가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청하자 자매도 그 용서를 받아들이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러자 얼굴이 한결 밝아졌습니다.
“수녀님,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저보고 사랑하는 며느리래요! 그리고 처음으로 제 생일도 챙겨주셨어요!”
자매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0년만, 1년만, 한 달만 더 살며 남편에게 잘하고 성당에서 봉사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싶었으나, 얼마 뒤 죽음이 임박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단 하루라도 남편 품에서 머물며 죽고 싶다고 구급차를 타고 집으로 갔습니다. 모든 것을 성당 레지오 단원들이 챙겼습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남편의 품에 안겨 미안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식물인간이라 못 알아듣는 줄 알았던 남편도 있는 힘을 다해 “사... 랑….”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두가 놀랐습니다. 혼인식을 올리는 것이 꿈이었는데 이렇게 간단하게나마 마지막 혼인식을 올리고 행복한 눈물 속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비움]
고 임언기 신부가 신자들의 간청으로 간암 말기 환자를 찾았을 때 그는 끝까지 고해성사를 거부했습니다. 도저히 안 되어 밖으로 나가는 신부님의 머리 뒤에서 “나 죄 없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죄인인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두 부류로 나뉩니다. 자신에게서 무언가 좋은 게 나올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끝까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 안에서 좋은 게 나올 수 없다고 믿는 이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들입니다. 자신 안에서 좋은 게 나올 수 있다고 믿으면 자신이 자신의 구원자가 되기에 더는 외부에서 구원자를 찾을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것이 가장 저주받은 삶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 외에 아무도 선하지 않다.”(『가르멜의 산길』, 4,4)라고 하고, “상반되는 둘이 한 주체에 공존할 수 없다.”, “빛과 어둠이 어떻게 어울리겠느냐?”(4,2)라고 말하며, “하느님과의 합일에 들려면 영혼 안에 사는 모든 것, 적거나 많거나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든 것이 죽어야 한다.”(11,8)라고 말합니다.
인간 안에서 선이 나올 수 있다고 말하는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이 더욱더 주님을 필요 없게 만들고 저주로 이끌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빛은 자신이 어둠임을 깨달은 이에게만 의미를 가집니다. 빛은 어둠만을 구원합니다.

-조재셩신부-
요즘 매튜 켈리의 ‘가톨릭신앙의 재발견’을 읽고 있습니다. 책에서 저자는 신앙이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거룩해야 합니다.” 저자는 거룩한 삶을 살았던 신앙인으로 ‘프란치스코, 마더 데레사, 요한 마리아 비안네, 토마스 모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소개하였습니다. 이들 성인은 하느님께로부터 특별히 선택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평범한 삶을 시작했지만 거룩한 삶으로 성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 성인은 특별한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거룩한 삶으로 성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거룩한 삶을 산다면 밤하늘을 비추는 별처럼, 천국에서 빛나는 신앙의 별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거룩한 삶은 인내와 고통을 수반하는 것일 수 있지만 거룩한 삶은 습관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합니다. 좋은 습관은 좋은 성격을 만들어내고, 좋은 성격은 거룩한 삶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나쁜 습관은 나쁜 성격을 만들어내고, 나쁜 성격은 하느님과 멀어지는 삶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습관을 정확이 안다면 앞으로의 삶을 예측할 수 있다고 합니다. 좋은 성격은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있습니다. 나쁜 성격은 어두운 미래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매일, 매주, 매월 내가하는 일들을 적어보면 습관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 매일 적당히 운동하는 사람,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 매일 일기를 쓰는 사람, 매일 선행을 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매일 불평하는 사람, 매일 험담하는 사람, 매일 시기하는 사람, 매일 술을 마시는 사람, 매일 늦잠을 자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되기 어렵습니다.
저자는 시간을 내서 습관을 적어보라고 제안합니다. 사제생활 30년을 하면서 제게도 습관이 된 것들이 있습니다. 가장 감사하고, 대견한 일은 25년 전에 담배를 끊은 것입니다. 저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강론을 쓰는 것입니다. 매일 특별한 일이 없으면 3시간은 걷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운전은 천천히 하는 것입니다. 아쉽고, 마음에 들지 않는 습관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조급한 편입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부담을 주기도 합니다. 꼼꼼하게 살피지 않고 대충 넘어가는 편입니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정확하게 입력하지 않아서 낭패를 볼 때도 있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걱정 때문에 지금의 기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음주를 하기도 합니다. 좋은 습관은 계속 지키고, 나쁜 습관을 고친다면 저의 앞날에도 좋은 미래가 주어질 것입니다. 나의 습관을 한번 적어보면 어떨까요?
오늘 우리는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세상은 모두 성지였습니다. 모두 하느님의 발자취가 가득담긴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도 아무런 흠이 없이 ‘원죄 없이’ 창조해 주셨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하느님의 창조계획과 질서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질서가 흔들리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교만함입니다. 교만함이 원죄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다니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교만함으로 일그러졌던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고, 이 세상이 다시금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으로 가득한 ‘에덴동산’이 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을 오염시키는 것은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셨던 인간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 때문입니다. ‘시기, 질투, 교만, 인색, 탐욕, 욕망, 미움, 원망’과 같은 것들은 이 아름다운 세상을 무질서하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악한 것들이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은 밖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들 내면의 갈등과 우리들 내면에서 나오는 악한 것들의 뿌리를 자를 때 비로소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잘 다스릴 줄 알면 우리는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악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우리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욕심, 시기, 질투, 탐욕, 인색, 게으름은 모두 내 안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 용서, 인내, 나눔, 성실함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시작된 ‘정결예법’에 대한 결론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사람의 전통’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폐기하고 있음을 꾸짖으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마르 7,14-15)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것이 마치 밖에 있는 양, 막상 속은 은폐하면서 겉의 정결예법에만 치중하는 위선적인 정결예법을 부정하십니다. 이는 베드로가 요빠에서 이방인 코르넬리오를 방문했을 때의 환시체험에서도 말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사도 10,15)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은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럽습니다.”(로마 14,14-16)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1-15장>이 명하는 부정과 정결에 대한 새로운 해석, 곧 영적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더럽히는 것들은 밖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정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존자 베다는 말합니다.
“마귀라 할지라도 우리의 나쁜 생각들에 힘을 보태어 부추길 수는 있지만,
그 생각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이처럼, 정결이란 가시적인 겉을 깨끗이 닦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과 인격 전체에 걸려 있기에, 우리의 내면의 변혁, 곧 전 인격적인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악이 차 있으면 악취가 되어 터져 나오고, 선이 차 있으면 선의 향기가 되어 뿜어져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선하시니, 박해하는 이에게도, 상처 입히는 이에게도, 오로지 선을 베푸십니다. 곧 예수님의 마음 안에는 온전한 사랑이 가득 찼기에 항상 사랑이 흘러나오고, 우리들 마음에는 미움이나 화가 있기에, 그것들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러니, 타인을 탓하거나 처지나 환경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 안의 어둠과 악을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저희 마음이 빛과 선으로 빛나는 예수님 마음으로 차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주님!
저를 부수소서. 고정관념의 틀을 깨소서.
겉만 아니라 속도 부수고, 당신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제 생각을 바로 세우시고, 당신을 모욕하지 않게 하소서.
위선 부리지 않게 하시고, 제 안을 선으로 가득 채우소서.
당신 모상을 새롭게 하시고, 사랑의 향기 뿜게 하소서. 아멘.

속이 중요하다
-반영억신부-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이 그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보시니 좋더라.”, “보시니 참 좋더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조된 모든 것은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더럽히고, 안 더럽히는 것은 사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사실 좋고 나쁨은 사람들이 서로 비교하여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더 좋고, 어떤 것은 나쁘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좋게 창조된 것이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 쓰려고 하면 더러움을 만들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 안에 품은 육의 욕망들은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을 밖으로 표출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자주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정작 문제는 외적인 것에 있지 않고 내적인데, 외적인 것에 연연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니 내면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짱’ ‘몸짱’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외면을 중시하는 말입니다. 어떤이는 성형수술을 하고 겉모양을 가꾸는 데 온갖 노력을 다 쏟아붓습니다. 반면, 속을 가꾸는 데에는 소홀히 해서 내면을 황폐하게 버려둡니다. 심지어 ‘감정에 충실하자.’ ‘감정에 솔직한 것이 좋지 않으냐?’ 하면서 자신의 악한 생각을 합리화하고 행동으로 옮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 많이 무뎌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겉뿐만 아니라 속까지도 보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16,7). 그러니 내면을 더 깨끗하게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마음 짱'이 소중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닮아 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내 마음속 욕망을 살펴야 합니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나오는 글입니다.
“당신의 행동에 있어서는 활달하며 당신의 대화에 있어서는 조리를 지키며 당신의 사상에 있어서는 방황하지 말고 당신의 영혼에 있어서는 내적인 분란과 외적인 혼란을 없애고 실생활에 있어서는 여가가 없을 정도로 분주한 생활을 하지 말라.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고 당신을 갈기갈기 찢고 당신을 저주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다고 이러한 것들이 순결하고 현명하고 건전하고 올바르게 머물려고 하는 당신의 영혼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투명하고 맑은 샘물가에서 샘물을 저주한다 하더라도 샘물은 결코 식수를 제공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진흙이나 오물을 집어넣었다 하더라도 샘물은 이것들을 흘려보내고 씻어내어 전혀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평범한 우물이 아니라 영원한 마음의 샘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그것은 만족과 단순과 겸손으로 결합된 자유를 스스로 끊임없이 누리면 된다”(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진정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을 닮은 사람을 만들어 숨, 영, 얼을 불어 넣어주셨으니 그 본래의 아름다움을 잘 지키고 가꾸며 하느님의 좋은 작품인 만물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죄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4-15)”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
또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19ㄴ-23)”
예수님 말씀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죄는 각 개인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짓는 것이다. 그러니 죄를 짓고 나서
‘남 탓’ 하지 마라. 또 누구(무엇)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변명하지도 마라.”
1)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것은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창세 3,4-6).
그 욕심은 그들의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선악과라는 열매가 나쁜 것이어서 죄가 그들에게로 들어간 것도 아니고,
그 열매를 만들어 놓으신 하느님 때문에 죄를 지은 것도 아닙니다.
물론 사탄의 유혹이 계기가 되긴 했습니다.
그러나 열매를 따 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따 먹어도 된다는 사탄의 유혹에 귀를 기울인 것은 그들 자신들이 한 일이고,
그 열매를 따 먹은 것도 그들 자신들이 자유의지로 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일에 대해서는 사탄을 처벌하셨고,
아담과 하와에게는 그들 자신들이 지은 죄의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2) 고해성사를 볼 때에 ‘누구 때문에’, 또는 ‘어떤 일 때문에’
죄를 짓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지은 죄의 책임을
그 ‘누구’에게, 또는 그 ‘어떤 일’에게 떠넘기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제대로 회개를 하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죄는 ‘내가’ 짓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또는 ‘어떤 일 때문에’ 죄를 짓게 된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자기가 그 유혹이나 압박을 물리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 때문에’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아담은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아담은 자기 죄를 ‘여자 탓’으로 돌렸고,
또 그 여자를 주신 ‘하느님 탓’으로도 돌렸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와는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뱀 탓’으로 돌렸습니다(창세 3,13).
(하와도 자기가 잘못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3) 카인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세 4,3-7)”
아벨이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는 말은,
‘가장 좋은 것’을 바쳤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카인은 ‘가장 좋은 것’을 바친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물을 받아들이시지 않은 것의 원인은
바로 카인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아벨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물을 바쳤지만,
카인은 그런 마음 없이 형식적으로 제물을 바쳤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니 카인이 화를 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마음과 태도를 먼저 반성했어야 합니다.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하느님 말씀은,
마음속에 있는 죄를 없애려고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카인의 죄는 아벨 탓도 아니고, 하느님 탓도 아니고,
자기 마음 안에서 나온 것이니 자기 탓입니다.
그런데도 카인은 반성하지 않았고, 회개하지도 않았고, 아벨 탓만 했고,
결국 살인죄를 지었습니다(창세 4,8).
4) 예수님께서는 마음에서 악한 것이 나와서 죄짓게 만든다고 말씀하셨는데,
마음에서 악한 것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선한 것도 나옵니다.
내가 내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것을 선택하면 죄를 짓는 것이고,
선한 것을 선택하면 선을 실천하게 됩니다.
(죄도 내가 짓는 것이고, 선도 내가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 선택은 각 개인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는데,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도,
나의 이성과 의지대로 되지 않고 죄를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일이 그저 의지가 약해서 그런 것일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 7,15).”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2-25ㄱ).”
이성과 의지만으로는 죄를 피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바오로 사도 같은 위대한 사도가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라고 고백할 정도이니......
바오로 사도가 제시한 해결책은 ‘기도’입니다.
주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

복음: 마르 7,14-23: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조욱현신부-
예수님은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15절) 하시며 금기 식품은 없다고 하신다.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란 음식을 말하는데, 어떠한 음식을 어떻게 먹든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 그 사람을 죄로 더럽힌다는 것이다. 즉 자연의 음식물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결단이 사람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시면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배 속으로 들어가서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라고 하셨다(마태 15,11.17 참조). 그리고 주님께서는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19절) 밝히셨다. 율법에 얽매인 자들이 부정하다고 선언한 것들을 먹는다고 해서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입술이 앞뒤 가리지 않고 지껄이고 끼어들면서 우리가 더러워질 수 있다.
그런데 레위 11장에 보면 부정한 음식물의 종류가 나오고 있다. 그것은 유다인들의 전통에서 신앙처럼 지켜오는 먹지 말아야 할 음식 중에 대표적인 것이 돼지고기가 있다. 2마카 6장에서는 안티오쿠스 에페파네스는 유대교를 근절시키려고 유다인들로 하여금 돼지고기를 먹게 하였고, 그것을 안 먹는 유다인들은 왕명을 거스른 죄로 수백 명이 죽임을 당했다는 역사적인 사건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런 유다인들에게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15절) 하셨는데 그 말씀은 그들에게는 깜짝 놀랄 말이었다. 즉 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음으로써 사람이 부정하게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지내왔고 죽어가면서도 지켜온 그들의 율법을 무시하는 듯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을 당황하게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본뜻은 무엇인가? 물건, 음식이란 그 어떤 것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측면에서 볼 때 “부정한 것이다.” “깨끗한 것이다.”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데 믿음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이라는 창고 안에 무엇을 쌓아 놓고 있으며, 그 안에서 무엇을 내어놓으며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악한 생각들이란 마귀가 나에게 불어넣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의 나쁜 생각에 힘을 보태고 부추길 수는 있지만 그러한 생각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것은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며 이러한 생각이 일어날 때, 마귀가 그것을 정당화시키고 그렇게 행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느냐에 믿음의 근본 의미가 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물건이나 음식이 아니라 사람 자신에서 나오는 생각과 행위이다. 바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이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과 이웃을 향하여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 15)
-한상우신부-
청소와
설거지를
하듯
우리 마음도
새로워져야
한다.
케케묵은
옛 마음들이
너무 많다.
버려야
할 것과
비워야
할 것으로
가득차 있다.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도
추악해지고
추잡해진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언제나
우리들
마음이다.
내 것으로
가득차 있기에
소란스럽고
사악하다.
하느님의
것이 아닌
내 것이 되면
뒤죽박죽이
되고
복잡해진다.
교만으로는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
거짓 자아의
눈이 아닌
하느님의
눈으로
마음을
만나야
한다.
하느님의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들은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마음의 중심은
하느님이시다.
우리를
창조하시는
하느님안에
우리가
살고있다.
마음도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우리 내면을
비추어 주는
빛이 있다.
하느님의
빛으로 다시
시작한다.
마음을
더럽히고
사람을
오염시키는
많은 것들을
봉헌한다.
시작이며
끝이신
하느님께서
평화롭게
하신다.
마음의 평화는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가장
아름다운
마음의 생명이다.
하느님께로
흘러가야 할
우리마음이다.
참된 사랑은
서로를
정화한다.
하느님을
비춘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마음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마음을 돌아보게 해 주십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당시 종교 기득권층인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부정함과 불결함의 원인을 불결한 존재와의 접촉 등 외부 요인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손 씻는 예식 등 정결례를 그토록 강조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 원인이 사람 마음 속에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살펴야 할 것은 음식이나 물건,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인 것이지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느님을 보게 되니까요(마태 5,8 참조).
제1독서에서는 인간이 하느님께 처음으로 범한 죄의 복선이 언급됩니다.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6)
사람은 흙의 먼지에서 왔습니다. 발 밑에 밟히며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오히려 더럽다고까지 생각되는 흔한 물질이 흙이고 먼지일 것입니다. 그런 보잘것없는 존재가 하느님의 숨을 받아 생명체가 됩니다. 놀랍지요. 사람이 쉬는 숨은 하느님에게서 왔지요. 사람이 숨을 쉬며 사랑하고 헌신하는 자체가 곧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숨 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미해야 합니다(시편 150,6 참조).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7)
이렇게 사람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신 주 하느님께서 자애롭게도 에덴 동산을 아름답게 꾸미시고 사람이 살게 해 주십니다. 사람은 에덴 동산의 풍요를 누리면서 자기 근원인 땅을 일구고 돌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따 먹으면 안 되는" 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바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여기서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은 육신의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죄가 사람을 얼마나 시들게 만드는지, 죄의 결과로 영혼을 얼마나 병드는지 우리는 알지요. 죄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차단하고 거부하는 악이니까요.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마르 7,21-23)
우리가 처음 하느님께 받았던 그 아름다운 생명의 자리에 다른 것들이 채워지고 맙니다. 우리는 원래 하느님께서 불어 넣어주신 숨으로 거룩했는데,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탐하고, 그로 인해 하느님의 지혜를 넘보고, 또 실제로 범하면서 슬프게도 사람에게는 원죄의 상흔이 짙게 배어들고 말았지요. 그래서 마음 안에 움트는 악한 생각과 어둠들에 종종 주도권을 넘기고 자신과 공동체를 불결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탓을 외부로 돌려 죄에 죄를 더하지요.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복음 환호송)
바로 이런 이유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우리를 다시 거룩하게 해 주실 "말씀"이시고 "진리"이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뜻을 어긴 결과로 죄의 사슬에 묶여 살아가는 인류를 다시 거룩하게 해 주시려고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그토록 신비하고 거룩한 숨을 회복하는 길은 그분께서 들려 주시는 말씀을 존재 안에 받아 들이고, 진리이신 그분을 흡수하여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거룩함을 회복하여 창조 때 받은 충만함과 존재적 평화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숨으로 숨쉬고 살아가는 존재로 활짝 피어나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빚으신 뒤 사랑스럽게 불어넣어 주신 숨이 여전히 우리 안에서 생명의 기운을 생생히 내뿜고 있는지 각자의 마음을 잘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이신 말씀을 듣고 품고 머물러 정결함과 거룩함을 회복하며 살아가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하느님의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새로운 생명력을 느끼는 복된 오늘 되소서. 아멘

들숨, 날숨의 기도
-김찬선신부-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오늘 독서는 창세기 2장의 천지 창조 얘기인데
그 창조 얘기가 1장의 것과 사뭇 다릅니다.
그런데 왜 다릅니까?
어떤 것이 진짜 천지 창조 얘기입니까?
성경을 글자그대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혼란일 텐데
구약은 왜 두 가지 다른 창조 얘기를 그대로 전해주고 있는 겁니까?
이에 대해 성서학자들은 엘로이스트와 야휘이스트가 각기
자기들의 전통에 따라 기술한 거라고 설명을 하고 있고 그것에 타당성이
있겠지만 저는 오늘 프란치스코의 글에 기초하여 이 점을 보고자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권고 5번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오, 사람이여, 주 하느님께서 육신으로는 사랑하시는 당신 아들의 모습대로,
그리고 영(靈)으로는 당신과 “비슷하게” 그대를 창조하시고 지어내셨으니,
주 하느님께서 그대를 얼마나 높이셨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나름대로
자신의 창조주를 그대보다 더 잘 섬기고 인식하고 순종합니다."
저는 프란치스코의 이 글에 근거하여 창세기 1장은 말씀 곧 성자의 창조,
2장은 숨 곧 성령의 창조를 얘기하는 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1장의 말씀의 창조는 초월적 하느님의 창조요,
2장 숨의 창조는 내재적이고 육화적인 하느님의 창조라고,
그리고 1장의 창조는 하느님의 전능을 더 드러내고
2장의 창조는 하느님의 사랑을 더 드러낸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1장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거리, 천지 차이를 드러내고,
2장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일치를 드러낸다고 또한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창세기 2장을 묵상하면서 땅에까지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실 뿐 아니라 우리 코에 숨을 불어 넣어주시는 하느님을
사랑으로 만나는 우리가 되고 그분의 숨을 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숨을 쉽니다.
그리고 숨을 쉬면 목숨이 붙어 있고
숨을 쉬지 않으면 몇 분도 못 가서 목숨이 끊어집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는 이렇게 목숨을 유지하는데 영적으로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차피 숨을 쉬는데 숨을 쉬면서 그저 공기를 들이킵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숨을 들이킵니까?
우리는 어차피 숨을 쉬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들이키는 기도를 합니까?
아니면, 호흡법에 따라 명상과 좌선을 하는 것에 머뭅니까?
우리는 나쁜 공기를 마시지 않기 위해 공기 청정기를 설치하고,
좋은 공기를 마시러 숲으로 가는데 영적으로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미움과 분노와 욕망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마시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고 어떤 노력을 합니까?
미움과 분노와 욕망은 날숨으로 내보내고
하느님 사랑은 들숨으로 들이키는 기도를 잘하고 있습니까?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수께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희는 내 말을 새겨들어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마르7,14-23)
---
창세기의 저자는 우리가 의혹을 제기하기보다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옆에는 생명나무도 함께 있었지만, 아담과 하와는 그 나무를 바라보거나 그 나무에 손을 대지도 않았습니다. 선과 악을 아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하느님의 영역이므로, 생명에 머물고자 한다면 생명나무를 선택하고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걸었기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모든 나무 열매가 다 우리의 것이지만, 단 하나의 나무만은 하느님의 것으로 남겨 드려야 함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박형순신부-
---
예수님은 그들이 남의 잘못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라 율법의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선이시고 진리이시고 빛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사람 안으로 들어오시기 전까지는 인간 안에 선이고, 진리고, 빛이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적어도 하느님께 향하게 만드는 작은 등불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빛은 자신이 어둠임을 깨달은 이에게만 의미를 가집니다. 빛은 어둠만을 구원합니다.
-전삼용신부-
---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자주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정작 문제는 외적인 것에 있지 않고 내적인데, 외적인 것에 연연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니 내면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반영억신부-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년 2월 12일 금요일 설 (0) | 2021.02.12 |
---|---|
2021년 2월 11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 (0) | 2021.02.11 |
2021년 2월 9일 연중 제5주간 화요일 (0) | 2021.02.09 |
2021년 2월 8일 연중 제5주간 월요일 (0) | 2021.02.08 |
2021년 2월 7일 연중 제5주일 (0) | 2021.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