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월 31일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Margaret K 2021. 1. 31. 07:27

2021년 1월 31일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마르 1,21ㄴ-28) )

 

 Then Jesus faced him and said with authority,

"Be silent and come out of this man!"

The evil spirit shook the man violently and,

with a loud shriek, came out of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신학자 발터 카스퍼 추기경이 말하듯 ‘예수 그리스도’에서 예수가 이름이고 그리스도가 성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시다.’라는 초세기 신자들의 오래된 신앙 고백입니다. 이 신앙 고백은 성경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라고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에 대답한 베드로의 고백을 통하여 전해졌고, 박해 때 많은 순교자들과 증거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고,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안다고 말합니다. 이 더러운 영의 소리는 우리의 신앙 고백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 더러운 영은 주님과 어떤 관계도 맺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어 한 사람을 자유롭게 하십니다. 이 가르침은 세례성사 때 ‘마귀를 끊어 버리는 예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예식에서 우리의 고백은 앞으로 악의 모든 것을 끊어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겠다는 결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신앙 고백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 주시고 병자를 낫게 하시는 이적들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과 행동으로 당신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압니다. 더 이상 세속의 많은 것에 의지하여 죄의 노예가 되지 말고,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 그 사랑을 실천하여 참된 신앙인, 자유인이 됩시다.

악의 영

-키엣 대주교-


"주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그분의 입김으로 그 모든 군대가 만들어졌네"

전능하신 하느님은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동정녀에게 당신의 외아드님을 주시고 자식이 없는 한나에게 사무엘이라는 훌륭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신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우리 인간처럼 고통 당하고 죽음을 맞이하신 후에야 당신의 과업을 완성하심으로써 인류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그분의 말에는 권위가 있었고 행동은 아주 단호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나오신 분이시기에 하느님을 온전히 아시는 오직 한분이시고, 당신의 권위 또한 아버지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받으신 하느님의 권능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으로 병자를 일으켜세우시고 죽은 자를 부활시키셨으며 악의 영까지도 지배하셨습니다.

그 옛날 사람들은 병은 죄에 기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병자의 몸에 있는 악마를 쫓아내는 것은 오직 주술적인 방법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주술이 아니라 말씀의 권위로 악의 영을 물러나게 하시고 그를 해방시켜주었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용서란 외형적인 용서와 함께 내면적 반성과 변화가 있을 때만이 진정한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설교를 떠날 때 하느님의 영도 함께 하도록 하셨습니다. 세상의 약자 안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악의 형체를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으며 더러운 영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악이 존재합니다. 세상이 변하면서 악의 모습도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악을 구분 못하는 이유입니다. 때로는 지적이며 아름답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우리옆 가까이에 존재합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돈과 쾌락을 약속하고 유혹합니다. 미움과 증오, 갈등, 오만과 이기심의 길로 유인합니다. 자기 보호라는 명분으로 이웃의 어려움을 회피하고 극한적인 이기심을 갖게합니다. 심지어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죄의식을 망각시키기도 합니다.

세상은 점점 더 어렵습니다.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 모두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길이 좋은 길인지요. 주님만이 아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하신 것처럼 악을 물리치고 주님의 길을 따라야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총만이 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나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에 순명하는 겸손함으로 금식과 간절한 기도를 통해 주님의 힘을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그 바른 길을 걸어보십시오. 우리 모두 바른 길을 걷는다면 세상의 악도 점점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 사랑이신 주님,

저희가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믿게하여주소서. 주님 희생의 길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알게하여 오늘도 내일도 저희가 주님 자비의 길을 따라 가야함을 알게하여주소서.
함께 묵상해 봅시다.

1.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무엇입니까?

2.어떤 유혹을 받고있습니까?

3.어떤 일의 시작은 좋았으나 점점 불화와 질투로 그 일을 망쳐버린 경험이 있습니까? 무엇이 문제였다고 생각합니까?

4.내 영혼의 더러운 영으로부터 멀어지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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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인생은 계속해서 되풀이된다고 합니다. 이 말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하게 됩니다. 완전히 똑같은 삶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비슷하게 삶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반복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이 계속해서 되풀이되기를 원하십니까? 좋은 삶? 아니면 나쁜 삶?


악순환 그래프는 ‘나는 나빠진다.’, ‘내 인생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를 놓아버린다.’ 등의 반복입니다. 그에 반해서, 선순환 그래프도 있습니다. ‘나는 좋아진다.’, ‘내 인생을 귀하게 여긴다.’, ‘나를 힘껏 달리게 한다.’ 등의 반복입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선순환 그래프보다 악순환 그래프를 따르는 사람이 실제로 많다고 합니다. 부정적 마음이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 때문인데, 외부에서 부정의 원인을 찾아서 결국 스스로 행복할 수 없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순환 그래프와 악순환 그래프는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악에 기울어지는 사람은 악순환 그래프를 반복합니다. 죄를 지을 때 단 한 번의 죄로 끝날까요? 아닙니다. 이 죄가 또 다른 죄를 낳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죄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악을 과감하게 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순환 그래프에서 벗어나 선순환 그래프를 반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십니다. 이 권위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도 꼼짝하지 못하지요. 그런데 이 영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하지 않는 말을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악마가 거짓만을 이야기할 것 같습니까? 악마는 죄를 불러일으키는 구체적인 유혹만을 할까요? 아닙니다. 악마의 이 말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고, 우리가 실제로 고백하며 해야 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 없는 고백으로 단순히 지금 순간을 모면하기 위함이고, 사람들의 혼란을 가져올 뿐이지요.

정답을 이야기했지만, 악으로 기울어질 수 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단호한 말씀을 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주님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을 통해서만 악을 과감하게 끊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주님과 함께 할 때, 선순환 그래프의 삶이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결점 없는 사람을 고르다간 끝내 벗을 얻을 수 없다(프랑스 속담).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지금 우리나라 중고등학교는 대부분 교복을 입습니다. 이 교복의 역사는 1898년 배재학당에서 최초 시작되었으니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복 자율화가 이루어진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얼마 못 가서 다시 교복을 입게 되었지만, 교복 자율화로 단 한 번도 교복을 입지 못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로 ‘저’입니다. 중학교 1학년 입학하면서 교복 자율화가 시작되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학교장 재량으로 교복을 입거나 자유복을 입도록 했지요. 그래서 단 한 번도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교복 자율화로 옷에 대한 부담이 컸었습니다. 남자 학교였지만, 똑같은 옷을 매일 입고 다니면 친구들이 냄새난다고 놀렸거든요. 그래서 몇 벌의 옷을 돌려 입어야 하는데, 그때는 다들 어려워서 그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 후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때, 스티브 잡스의 매번 똑같은 의상을 보면서 학생 때 제 모습에 후회가 되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만의 교복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했다면 옷에 대한 부담감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남을 따라 하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나만의 삶 그러나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훌륭한 교사는 제자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사람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는데 “권위 있는 교사”로서 율법을 가르치고 계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권위’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라고 말합니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가 있으셨다는 근거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그 영을 쫓아주시는 것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람은 육-혼(머리)-영(마음)의 구조로 되어 있는데,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나쁜 영을 쫓아낼 수 있어야 참다운 율법 교사일 수 있는 것입니다.

 

      나쁜 영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마음에서 나오는 세속-육신-마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돈에 대한 욕심, 육욕을 채우려는 마음, 교만함을 쫓아주는 교사가 참된 율법 교사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가르쳐도 그러한 욕심들을 더 크게 만드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권위 없는 율법 교사가 됩니다.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는 한 범죄집단이 아이를 납치해 돈을 받아내려 했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아이를 키우게 된다는 설정으로 시작됩니다.

이 5명의 범죄자 집단은 각자가 좋은 아버지가 되려 합니다. 한 사람은 엄격하고, 한 사람은 무섭고, 한 사람은 이상하고, 한 사람은 자상하고, 한 사람은 이해심이 깊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모습은 결국 우리가 보고 자란 아버지에게 다 있는 성격입니다.

      아이는 순수한 마음을 지키고 싶습니다. 자신을 좋아하는 한 여학생을 사랑하고 싶은. 그런데 그런 아버지들 사이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잔혹한 킬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삶을 살려고 할 때마다 지하에 가둡니다. 그곳에는 보이지 않는 괴물이 있고 그 괴물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워합니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괴물은 환상이지만 무척 자신을 괴롭힙니다.

 

      그 괴물은 실상 자신을 키우는 아버지들이었습니다. 아버지들은 아이가 자신들과 같은 인간이 되도록 교육합니다. 그런데 무자비한 아버지 석태가 그 괴물을 없애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 괴물과 하나가 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무서운 아버지들의 범죄집단과 하나가 되어 괴물이 되어버리면 그 괴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석태의 경험이었습니다. 괴물이 되면 괴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그리고 그 경험대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화이는 자신의 친부모까지도 죽이려 하는 그 엄청난 괴물을 죽이고 자신의 순수함을 지키기로 합니다. 아버지들을 모조리 죽입니다. 괴물과 싸워 괴물을 죽인 것입니다. 아이는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을 알아준 한 학생을 멀리서 사랑할 수 있는 순수한 소년으로.

 

      우리는 누군가의 교사들입니다. 특별히 자녀에게 그렇습니다. 자신이 세속-육신-마귀의 나쁜 영에 사로잡혀서 더는 그것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자녀도 그렇게 키워서는 안 됩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싸우게 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아이도 그 괴물에 사로잡혀 비록 그것을 괴물로 보는 고통에서는 벗어나겠지만, 그 괴물의 하수인이 되어 또 다른 괴물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악령에 들리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참다운 교사가 되어 아이 심장에서 그 괴물을 태워버려야 합니다.

 

      이런 교사가 되려면 먼저 자기 심장이 성령으로 불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그 불이 제자의 심장에서 괴물을 태웁니다. 이것이 마귀를 쫓아내신 그리스도의 교육법입니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학생 하나가 졸업을 앞두고 학업에서의 해방감을 누리기 위해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조그마한 산장 숙소에서 어떤 노신사를 만났습니다. 여러 가지 대화가 오고 가던 중에 노신사가 그에게 묻습니다.

 

“학생은 무엇을 공부하고 있소?”

“방금 수학을 다 마스터했습니다. 끝을 내버렸습니다.”

      노인이 한참을 웃었습니다. 처음엔 기분이 나쁘다가 뭔가 범상치 않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님은 무엇을 하시는 분입니까?”

노신사가 웃으며 대답을 합니다.

“나는 방금 수학 공부하기를 시작했소.”

학생은 조심스럽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화이트 헤드라고 하오.”

      화이트 헤드는 영국 대학교수로 하버드 대학에서도 강의한 적이 있는 유명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였습니다.

 

“보통 교사는 지껄인다. 좋은 교사는 잘 가르친다. 훌륭한 교사는 스스로 모범을 보인다. 하지만 위대한 교사는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화이트 헤드가 한 말입니다. 화이트 헤드는 이 짧은 대화로 수학 전공자의 심장에 불을 지폈습니다. 그리고 그의 교만한 마음을 태워버렸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사의 모습입니다.

      저는 화이트 헤드의 말을 이렇게 종교적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보통 교사’는 자신도 모르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런 교사는 대부분 남이 써 놓은 것을 읽는 수준에 그칩니다. 학생들은 무슨 말인지 통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교수법은 학생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만듭니다.

      ‘좋은 교사’는 자신이 이해한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학생들의 수준이 아닌 자신의 수준으로 가르칩니다. 학생들은 여전히 어렵다고 느낍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자랑하는 수준에 머물며 학생들이 자신을 존경해주기를 바랍니다.

 

      ‘훌륭한 교사’는 자신이 이해한 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 가르칩니다. 그러니 많은 경험과 사례들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가르침을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지만 ‘위대한 교사’는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지핍니다. 그 불은 이전에 추구하던 모든 욕망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태워버립니다. 그 불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악령을 몰아냅니다. 학생들의 마음 안에는 세속-육신-마귀의 악령이 있습니다. 그 어떤 교사든 그 악령을 몰아낼 수 없다면 그 교사는 권위 있는 교사가 될 수 없습니다. 내 가슴에 지펴진 불로 제자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는 교사가 권위 있는 그리스도를 닮은 교사입니다.

 -조재형신부-


지금은 추억의 한 장면이 되었지만 어릴 때 국민 교육 헌장을 외워야 했습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이에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의미를 잘 모르고 외웠지만 조상의 빛난 얼이 지금도 생각납니다우리가 조상의 빛난 얼을 물려받은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후손에게 조상의 빛난 얼을 되돌려주는 것도 중요합니다미국 원주민 중에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면 100년 후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합니다지금 내가 하는 행동생각이 100년 후의 후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생각한다면 우리는 환경을 보존하고서로 연대하며어려운 이웃을 도와 줄 것입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합니다교회는 우리가 물려받은 전통과 역사이기도 하지만 교회는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가치와 전통입니다유럽과 미국의 교회는 비어가고 있습니다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성직자들의 추문은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에 대한 실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사제의 성소가 감소하고 있으며문을 닫아야 하는 교회가 생기고 있습니다카페로 변한 교회가 있습니다순교자들의 피위에 세워진 한국교회도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주일 미사 참례자의 비율이 계속 감소하고 있습니다교우들의 고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사제성소가 감소하고 있습니다코로나19로 사목의 패러다임도 변화를 요구 받고 있습니다교회의 역사에서 문제가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박해의 시기가 있었고이단으로 분열되기도 했고종교개혁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후손들에게 복음의 기쁨을 전해주기 위해서 문제를 직면하고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복음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복음으로 변화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념하는 것들에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속담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라고 합니다나와 내 가족이 기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면 좋겠습니다내 주변에 나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적어보면 좋겠습니다내 아이들의 책상에 무엇이 있는지 보면 좋겠습니다물질과 자본의 커다란 힘이 어느덧 내가 기념하는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성공이라는 기차에 올라타지 못하면 걱정하고야단치지만 희생이라는 기차에 타지 않는 것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요친교와 나눔에는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기도와 자선에는 시간내가기 어려운가요정치현안은 평론가 수준이면서경제현안은 꼼꼼히 살펴보면서 교회의 가르침과 교회의 신문을 배우고 읽는 데는 인색하지 않은지요잠시 스치듯 머무는 이 세상의 것들에는 지나친 열정과 관심을 보이면서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의 식탁에는 머물지 않는 것은 아닌지요?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 23항 원리와 기초에서 우리가 기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원리와 기초입니다원리와 기초는 4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태어난 목적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났다.’라고 말을 합니다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듯이종은 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듯이사람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둘째는 세상의 재물입니다. ‘이 재물은 모두 하느님께서 만드셨고 사람들은 이 재물을 사용할 수 있다하지만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쓸 것이고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지 않으면 버릴 것이다.’라고 말을 합니다세상의 모든 재물은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사용하면 된다고 합니다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남을 해치기 위해서양심을 속이면서 사용하면 안 된다고 말을 합니다.

셋째는 삶의 기준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장수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다.’라고 말을 합니다신앙생활을 하는 분들도 이 부분에서는 자신 없어 합니다극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고 말을 합니다자는 것도사는 것도먹는 것도사람을 만나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이와 같은 단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피정을 하는 것이고이와 같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길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도 바로 이런 원리와 기초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혼인을 한 사람도혼인을 하지 않은 사람도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혼자 사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면 내세울 것도 아닙니다혼인 생활을 해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아름다운 것입니다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에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비행기로 가는 길기차로 가는 길자동차로 가는 길걸어서 가는 길이 있습니다어떤 길로 가든지중요한 것은 부산이라는 목적지입니다비행기로 가도 목적지가 다르면 소용이 없습니다걸어간다 하더라도 목적지가 같으면 언젠가는 도착하게 돼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가르침을 보여 주셨습니다그것은 바로 원리와 기초를 중심으로 한 가르침입니다환자를 치유하는 것도기적을 행하는 것도악령을 내쫓는 것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거짓 예언자는 자신의 권위와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말을 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사람은 마음을 잡아야 합니다. 마음을 잡으면 모든 것을 다 잡는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떠도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토끼를 잡을 때는 귀를 잡아야 하고, 닭을 잡을 때는 날개를 잡아야 하고, 고양이를 잡을 때는 목덜미를 잡아야 합니다.”

  

갑자기 의문꺼리가 한 가지 생기더군요. ‘그럼 개는 어딜 잡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저희집 ‘바둑이’꼬리를 잡았더니 엄청 두려워하더군요. 덩치 큰‘누리’ 꼬리를 잡았더니, 으르렁 대면서 벼락같이 화를 내더군요. ^^ 

 

그렇다면 사람은 어디를 잡아야 할까요? 귀나 목덜미나 어깨? 괜히 잡았다가 폭행죄로 고소 당할 수도 있으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은 마음을 잡아야 합니다. 마음을 잡으면 모든 것을 다 잡는 것입니다. 마음을 잡으면 평생을 잡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저희 살레시오회와 살레시오 가족 창립자 돈보스코(1815~1888)는 사람 마음을 잡는데, 특히 청소년들의 마음을 잡는데 탁월했습니다. 

 

돈보스코는 자신의 교육 체험을 바탕으로 살레시오 회원들과 교육자들을 향해 틈만나면 이렇게 외쳤습니다. “교육은 마음의 일입니다!” 그의 교육이 성공했던 비결은 바로 이것, 청소년들 마음을 잡은 것이었습니다.

  

돈보스코와 함께 오라토리오 안에서 동고동락했던 청소년들은 이런 표현을 서슴치 않고 사용했습니다. “돈보스코는 도둑 중에서 큰 도둑이세요. 제 마음을 송두리째 다 훔쳐가셨다니까요.” 

 

돈보스코의 비결은 청소년들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느끼게 하는 사랑,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도록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일방통행식 사랑,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아니라 쌍방통행식 사랑, 주고 받은 사랑, 움직이는 사랑, 사심없는 사랑, 공평한 사랑, 큰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는 이웃 사랑, 자녀 사랑과 관련해서 깊은 성찰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자녀들은 내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까? 우리는 자녀들과 사랑을 주고 받고 있습니까? 우리도 자녀들을 사랑하지만 그들도 우리를 사랑하게 만들어야 그게 참 사랑입니다. 결국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때 까지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티비 리모컨을 과감히 내려놓고 서점에 자주 들를 필요가 있습니다. 자녀교육, 인간의 심리, 사랑의 본질을 주제로 한 책들을 읽고, 또 연구를 해야겠습니다. 사랑의 기술을 배워야겠습니다.

  

또 한 가지 돈보스코의 특별한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가까운 인간 존재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존중, 배려였습니다.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돈보스코는 길거리를 방황하는 한 아이를 만났을 때나, 토리노 대교구 대주교님을 만났을 때나, 대하는 태도은 언제나 똑같았습니다. 글자도 못깨우친 열살 짜리 코흘리개 꼬마가 찾아와도, 국왕에게 대하는 것과 똑같은 존경심을 지녔습니다.

 

자신은 작고 불편한 의자에 앉으면서, 남루하고 냄새나는 복장을 한 아이에게, 안락한 상석 의자를 권했습니다. 별로 의미도 없고, 그리 중요해 보이지도 않은 그들의 이야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인듯 최대한 주의를 집중해서 경청했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돈보스코께서 불세출의 성인(聖人)이 된 비결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내 가장 가까운 인간 존재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배려!’ 그것이 그를 역사에 길이 남을 별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돈보스코가 아이들로부터 사랑받은 비결이었고, 동시에 돈보스코가 아이들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까지 사랑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 돈보스코로부터 배울 점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한 인간 존재를 향한 끝도없는 인내와 동반은 눈여겨볼만 합니다. 우리 역시 인간이라면 그 어떤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으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라고 확신하며, 그에 합당한 배려와 예의를 갖추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청소년들을 극진히 사랑하심을 굳게 믿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상처입고 방황하는 청소년들 안에 살아숨쉬고 현존하심을 굳게 믿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여러 형태의 중독과 위험에 노출된 청소년들을 당신 생명에로 초대하고 계심을 굳게 믿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낙담하고 좌절하는 청소년들을 일으켜세우시고, 끝까지 동반해주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의 신앙 여정 안에, 언제나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천주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이영근신부-


연중 4 주일입니다.

<제1독서>에서 모세는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예언자가 오실 것을 예고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 등장하는 많은 예언자 가운데 한 예언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한 예언자”(요한 1,21), 곧 메시아를 말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갈림이 없이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길 것’을 권고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드러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잡히신 뒤에 갈릴래아에서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시며,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어서, 가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을 첫 행적으로 보여주십니다.

곧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한 다음, ‘악마의 추방을 통해 하늘나라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혀로 하와를 속인 악마의 ‘혀 놀림’을 중지시킵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그러자 악마는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그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로써, “때가 차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하늘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사실, 인간은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악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악마가 혀로 하와를 속인 것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였던 악마의 그 혀 놀림을 중지시키며, 그에게서 쫓아내십니다.

곧 당신의 현존에로 회복시키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첫 번째 기적’으로 행하신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치유는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원의 표징입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구마사들도 그러한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것은 그분의 권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며 말하였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

 

그렇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그분의 “권위”였습니다. “권위”를 나타내는 ‘exusia’라는 단어는 ‘힘’이란 뜻으로, 하느님께만 사용되는 단어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악령을 쫓아내시면서 당신 스스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우리는 구마할 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엄의 영은 주 예수께로 가라”고 명함으로써, 예수님의 힘과 권위를 빌어 행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모습은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죽이거나 제거해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귀는 언제든지 또 다시 침범하고 괴롭힐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어쩌면, 우리는 완전한 문제 해결을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물러가게 할 뿐입니다.

마귀는 또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이는 단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당신의 권능에 의탁하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 안’에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과의 관계맺음을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악령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그러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마귀를 쫓아내는 데에 있기보다, 그분과 친교와 유대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음을 말해줍니다.

곧 빛이신 당신의 권능 안에 머무는 일입니다.

그러면 더러운 영은 더 이상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내몰아내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빛이신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그분의 힘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 안에서 우리 주님의 빛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주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거룩함 안에서 제가 새로 나게 하소서.

주님이신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3-24)”

 

1) 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은,

마귀가 회당에 들어와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들어가지 못하는 장소도 없고, 건드리지 못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성전이나 회당이라고 해서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또 성직자나 수도자라고 해서 못 건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건드린다는 말은, 사로잡아서 마귀 들린 상태로 만드는 것과,

어떤 유혹을 해서 죄 짓게 만드는 것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거룩한 장소에 있다고 해서 방심해도 안 되고,

자신이 거룩한 직책을 맡고 있다고 해서 자만해도 안 됩니다.

방심하고 자만하는 것은 마귀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2) 귀는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면서 사람에게 접근했고, 유혹했습니다.

그래서 마귀를 ‘속이는 자’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면서 말하는 것은,

실제로는 마귀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마귀가 예수님에 대해서 하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진실처럼 보이도록 교묘하게 꾸민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고 부른 것은,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사용한 호칭을 빌린 것인데,

‘사람’이라는 것을 부각시킴으로써 교묘하게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부정하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말도 거짓말입니다.

(자기들을 내버려두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니 세상 모든 존재와 상관이 있는 분,

즉 지배하고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라는 말은, 자기들을 멸망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위협하는 말이고, 그래서 이 말도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이 구원 사업에는 마귀의 세력을 쫓아내고 멸망시키는 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라는 말도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분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믿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라는 말은, 겉으로는 진실처럼 보이지만,

이 말도 교묘하게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말이고, 그래서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고 말해야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마르 1,25-26).”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두 가지를 명령하십니다.

1) “조용히 하여라.”

마귀는 거짓말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말씀’이신(진리 자체이신) 분인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거짓을 말할 자유도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거짓을 말할 자유는 없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아무 말이나 마음대로 막 하는 자유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그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표현의 자유’는 ‘진실을 말할 자유’이지 ‘거짓을 말할 자유’가 아닙니다.

거짓을 말하는 것은 십계명을 위반하는 대죄입니다.)

2)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귀에게는 사람을 지배하고 억압할 권한이 없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마귀가 사람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모독죄입니다.

마귀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만일에 복종하지 않으면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마귀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는 말은,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마지막 발악을 했다는 뜻입니다.

 

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마르 1,27).”

 

람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서 그 가르침이 ‘권위 있는’,

즉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느끼고 놀랐었습니다(마르 1,22).

그랬다가 마귀가 쫓겨나는 일을 통해서, 그 ‘하느님의 힘’이 실제로 작용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고, 그래서 더욱 놀라게 됩니다.

(사람들이 놀란 것은, 예수님을 ‘사람 가운데 하나로만’ 생각하고 있었고,

아직은 ‘하느님이신 분’으로는 믿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분’으로 믿고 있었다면 놀라지 않고, 당연한 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새롭다.’ 라는 말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권위 있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하느님(예수님)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마귀를 쫓아내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려면 우선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말은, 마귀를 쫓아낼 때뿐만 아니라,

넓은 뜻으로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울 때에도 항상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해서

마귀를 쫓아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죄,

즉 십계명 제2계명을 위반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마귀로부터 역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사도 19,13-16).

 

(수님에 대한 믿음도 없이

십자고상과 성모상과 성수 같은 성물을 사용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런 물건 자체에 무슨 힘이 들어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서,

마치 부적을 사용하듯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신을 믿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참 신앙’과 ‘헛된 미신’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성물’은 신앙을 도와주기 위한 보조 수단일 뿐입니다.

보조 수단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연중 제4주일: 나해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의 주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담긴 '새로움'과 '권위'에 관한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께서는 권위 있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신다.'라는 사실이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신명기에서 약속된 모세의 뒤를 이어 봉사할 예언자(신명 18,18)와 연결되고 있다. 신약시대 초기에는 세례자 요한도 회개와 엄격한 참회의 태도로 그 예언자에 대해 기대를 하게 하였다. 어쨌든 예수께서 이 예언 사상의 대표적인 인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빵의 기적 후에 군중들이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요한 6,14)라고 하고 있다.

 

복음: 마르 1,21-28: 예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복음에서 군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행동을 통해 놀라운 체험을 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동'과 '말씀'이다.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르치고 계신다는 사실과 그 가르치시는 방법에서 시작된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22절) 예수님은 정상적으로 랍비 학교에 다니지 않았는데도 권위 있게 말한다는 사실 때문이다(참조: 요한 7,15). 예수님께 느끼는 권위는 예수님의 마음 깊은 곳에서 불처럼 타올라 사람들에게 제시되는 '새로운' 요구에 근거한다. 그 새로운 것은 당신의 말씀과 행동이 일치되어 있으며, 우리 신앙인들에게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가 있다는 또 다른 이유는 그분의 말이 즉시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 내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며, 또한 사탄의 세력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회당에서 악령 들린 사람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다."(24-26절).

 

이것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사탄의 세력과 격렬하게 맞서신 사건의 내용이다. 여기서 사탄은 예수님의 말씀 위력에 눌려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사탄은 즉시 예수를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며 소리쳐 알린다. 이 칭호는 후에 베드로 사도에 의해 고백 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요한 6,69).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인간 생활에 들어오심은 인간에게 인간 자신의 죄스러움을 알게 하고,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케 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탄의 고백을 허락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으신다. 왜냐하면,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고백하지만, 예수님과 자신 사이에 장벽을 쌓기 때문이다. 사탄은 예수님을 자신의 왕국을 파괴하러 오는 '원수'로만 느낄 뿐이지, 사랑으로 자신을 기쁘게 복종시켜야 할 '주님'으로는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사탄에게 나가라고 명령하신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다."(25절)

 

예수님은 당신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악령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신다. 그 사람은 완전히 자신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사탄이 그 사람의 인격을 분열시켰다. 사탄에게 매여 있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다는 것이고, 이 때문에 그 사람과 같이 인격이 분열된 것과 같다. 이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과 실천을 통해 치유되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제 군중들은 깜짝 놀란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27절). 이는 그리스도가 누구냐는 데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사건으로 예수님께 대한 관심이 점점 증대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28절).

 

사도 바오로는 제2 독서에서 '새 교훈'으로 동정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순전히 영성적인 것이다. 결혼한다면 마음이 갈라질 수 있지만, 동정을 지키면 마음이 갈라지거나 정신이 흐트러짐 없이 자신의 모든 것과 전 존재를, 사랑을 온전히 주님께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정을 지키는 것은 아내나 남편이나 자기 형제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형제에게 베풀어야 할 더 큰 사랑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다. 때문에 동정성은 마음을 더 넓게 해 주는 것이지 결코 더 좁게 해 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말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 19,12) 가르치셨다. 동정성에 관한 제안은 더욱더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던져지는 생명의 제안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 안에서 새로움을 느끼고, 그분의 권위 앞에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대변자이며 선포자의 역할을 지상과제로 삼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권위가 있게 말씀을 증거해야 한다. 그 권위는 다양한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한 가운데 참된 봉사를 통하여 나오는 것임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말씀과 업적으로 당신의 가르침을,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을 따라 권위 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하겠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 27)

-한상우신부-


참된 권위는
참된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을
깨닫게
하여주신다.

새롭고
권위 있는
우리 삶의
가르침이다.

참된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예수님의
인격안에
참된
권위가 있다.

우리를
찾아오신
사랑의 참된
권위이시다.

삶을
바꾸어 놓는
강력한
말씀이시다.

인격의
존엄함을
다시금
일깨워주신다.

구원하시는
권위 앞에
우리모두는
무릎을
꿇게된다.

권위는
받아들임으로
복음이 된다.

참된 권위와
참된 가르침은
인위적이지 않다.

참된 권위는
흩어진
자녀들을
한 곳으로
모아들이는
사랑의
일치이다.

참사랑이시기에
분열과 오류를
배척한다.

십자가를
지시는
참된 권위 안에
우리의
참된 회개도
있다.

기도와
순명의 삶으로
권위에
응답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는 뜨거운
사랑과 용서의
현존(現存)이다.

과거에
묶여있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하는
해방과 구원의
참된 권위이다.

진리를
선포하시는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
오늘을 다시
살게한다.

그 권위를
믿고 따르는
은총가득한
주일이다.

그 권위에
순명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왜 새롭고 권위 있는지 보여 주십니다.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마르 1,24)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마주치십니다. 그 사람 안에 깃든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발을 일으키며 대들지요. 예수님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심을 잘 아는 더러운 영은, 그분의 능력으로 자신이 세상에 기생할 수 있는 거점을 잃을까 두려운 듯합니다.

"멸망시키러"
사실 더러운 영, 그 자신이 어떤 가련한 사람을 멸망으로 끌어가고 있는 중이지요. 악은 먹잇감처럼 누군가를 골라 그 안에 자리를 잡고서, 그의 인격을 훼손하는 동시에 세상을 좀먹어 갑니다. 저마다 귀하고 소중한 하느님 모상의 존엄함을 함부로 무너뜨리면서 그렇게 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공격하는 더러운 영의 말마디에 댓거리하시는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악의 도구가 된 가련한 이를 구해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더러운 영과 입씨름해서 그가 틀렸음을 입증하는 것에 있지 않고, 그동안 시달려온 한 영혼의 회복과 안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27)‥

예수님께서 명령하시니 더러운 영이 쫓겨나고 그는 구원됩니다. 이에 회당에 모인 군중이 놀라지요. 사람 힘으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어둠의 세력까지 복종하는 "권위"도 놀랍거니와, 그저 상대할 필요 없는 미친 사람으로 치부해 무시해 버리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새롭고" 신선합니다.

어쩌면 그동안 이렇게 고통받는 사람들의 치유나 구마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의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을 겁니다. 율법 안의 문자적 의미는 가르쳤을지 몰라도 율법의 정신을 실제 삶 안에서 구현해 주지는 못했을 테니까요. 더러운 영의 항변에서처럼, 기존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가르침이 고통받는 이들과 그다지 "상관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 같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원이 군중에게는 더욱 새롭고 권위 있게 다가옵니다.

제1독서는 모세를 이을 새로운 예언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신명 18,18)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자랑스러워 마지않고 고대하던 새로운 모세이십니다. 모세는 하느님에게서 율법을 가져다 주었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율법이 모세를 통해 왔다면, 은총과 진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왔으니(요한 1,17 참조), 이제 종교적 가르침은 문자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삶 안으로 들어와 생생히 움직입니다. 그래서 새롭고 권위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사심 없이 하느님을 섬기는 조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일"(1코린 7,32.34)
"세상일"(1코린 7,33.34)
 

사도는 "주님의 일"과 "세상일"을 대비시키기 위해 혼인 여부를 기준 해서 혼인한 사람과 혼인하지 않은 사람, 두 부류로 나눕니다. 하지만 혼인의 가치를 훼손하거나 혼인한 이들의 신앙을 폄훼하기 위함이 아니지요.


아무래도 배우자나 가족, 재산 등이 생기면 직접적인 경제활동은 물론이고 당장 코앞에 닥친 그들의 안위와 기쁨을 하느님보다 우선시하게 되겠지요. 어쩌면 그건 생활인으로서 당연한 책임감과 충실성일 겁니다. 다만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지향하며 주님의 일을 하려면, 선택과 집중에 있어 갈등 요소가 없지 않을 겁니다.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도 '주님의 일을 위해 혼인하지 않은 사람'의 전형으로 보입니다. 회당 안에 여러 사람들이 있었지만, 고통 받는 그

 사람에게 각별히 관심을 가지고 악에서 그를 구하셨지요. 그의 회복이 하느님의 기쁨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안식일이었어도 아무 사심 없이, 아무 두려움 없이 그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영혼이 병든 어떤 이에게 보여 주신 너그럽고 관대한 사랑이 이제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치유와 구원이 그분께 어떤 이득이나 혜택이 되지 않더라도, 아니 오히려 누가 될지라도 그분은 사심 없이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십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릴까, 어떻게 하면 나의 신부를 행복하게 해 줄까"를 늘 염두에 두고 계시는 분이시니까요.  

사랑하는 빗님! 세상과 신앙의 경계를 걷는 우리에게 악의 세력은 구체적 삶의 현실이 주님과 상관 없다고 속삭입니다. 마음껏 세상일을 걱정하며 올인해도 된다고, 그게 정상이라고 유혹하며 신앙을 부끄럽고 하찮은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지요. 오늘 더러운 영의 목소리는 지금 여기에서도 곳곳에서 재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살고 있건 삐걱대고 있건 우리 모두는 주님과 상관이 있습니다. 잘 살면 그분께 기쁨과 영광이 되고, 행여 못 살아도 그분 자비와 연민의 대상이니까요. 나 외에 다른 관심사가 없는 듯 나에게 올인해 사랑을 바치시는 주님께, 그분의 정결한 신부로서 맞갖는 사랑을 바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주님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우리는 더욱 충만하고 생기 넘칠 것입니다.

 순종과 복종 중에서 나는?

 -김찬선신부-


오늘 주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놀라는데 이런 반응을 보며

저는 율법 학자와 다른 주님의 권위가 무얼까 자연적으로 생각게 됩니다.

 

저도 그런 권위를 가지고 싶기 때문인데

그것은 권위주의 때문이 아니라 저도 본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제가 억울할 때가 있는데 교황님의 말은 모두 경청을 하고

대단하다고 하는데 제가 똑같은 말을 했을 때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습니다.

가끔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가 명사들의 말이라고 걸려있는 것을 보게

되면 더 그러한데 별 의미도 없는 말을 명언이라고 걸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명언이나 말의 권위란 것이 본래 말 자체보다는

그 말을 한 사람의 존재와 삶에 딸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말이란 그 말을 듣고 따르고 싶고 따르게 할 때 권위가 있는 것인데

어떤 사람의 말은 듣고 말만 번지르르하다며 금세 내팽겨쳐지잖아요?

 

그렇습니다. 권위란 순종 또는 복종하게 하는 힘입니다.

그렇기에 깡패 두목일지라도 똘마니들을 복종케 하니

그들 세계에서는 그의 말이 권위가 있다고 할 수 있고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도 말의 권위가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힘에는 폭력적인 힘이나 직위적인 힘만 있지 않습니다.

그런 힘보다 훨씬 센 힘 그래서 복종이 아니라 순종케 하는 힘들이 있지요.

 

진리와 정의의 힘, 겸손과 사랑의 힘이 있고,

이런 힘에서 나오는 권위가 진정한 권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 학자들과 다른 주님의 권위가 이런 것일 뿐일까요?

 

오늘 독서와 복음이 얘기하는 것은 고작 이런 권위가 아닙니다.

이런 권위도 대단하긴 하여도 인류의 성현들도 가질 수 있는

인격적인 권위일 뿐이고, 오늘 신명기가 얘기하는

예언자의 권위나 오늘 복음이 얘기하는 영적인 권위는 아니지요.

 

예언자란 당신 말씀을 전하라고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예언자의 권위는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권위이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동족 가운데에서 너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그가 내 이름으로

이르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내가 직접 추궁할 것이다."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하느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기에

하느님께서 친히 추궁하시겠다는 말씀이고, 반면에 예언자도 하느님

말씀만 해야지 자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한, 내가 말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은 것을 주제넘게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가 있으면 그 예언자는 죽어야 한다."

 

그런데 예언자의 권위는 영적이긴 하지만 주님의 권위와 비할 바 아니지요.

예언자의 권위가 인간 그것도 신앙인에게 미치는 힘이라면 주님의 권위는

복음에서 볼 수 있듯 영적 존재에게까지 힘이 미치는 권위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긴 하지만 오늘 복음의 더러운 영은 주님과 자기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할 뿐 아니라 자기를 멸망케 하는 존재로 주님을 여깁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의 힘에 억지로 쫓겨나기는 하지만 끝내 구원을 거부하고,

자기 말대로 멸망의 길을 선택하고 맙니다.

그러니까 힘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하지만, 말씀에 순종은 하지 않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 성찰해야 하고,

복종할 것인지 순종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게 얼마나 권위가 있습니까?

복종이나 하지 순종은 할 줄 모르는 나입니까?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마르 1,21ㄴ-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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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륭한 교사’는 자신이 이해한 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 가르칩니다. 그러니 많은 경험과 사례들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가르침을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지만 ‘위대한 교사’는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지핍니다. 그 불은 이전에 추구하던 모든 욕망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태워버립니다. 그 불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악령을 몰아냅니다. 학생들의 마음 안에는 세속-육신-마귀의 악령이 있습니다. 그 어떤 교사든 그 악령을 몰아낼 수 없다면 그 교사는 권위 있는 교사가 될 수 없습니다. 내 가슴에 지펴진 불로 제자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는 교사가 권위 있는 그리스도를 닮은 교사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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