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마르5,1-20)
"What do you want with me, Jesus,
son of the Most High God?
For God's sake I beg you, do not torment me."
He said this because Jesus had commanded,
"Come out of the man, evil spir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을 향한 두 가지 상반된 태도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라고 외치는 모습과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청하며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을 향하여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외치는 이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군대’라는 이름을 가진 ‘더러운 영’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모였던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 청을 드립니다.
‘군대’라는 악령은 무덤에서 살면서 족쇄와 쇠사슬도 무력하게 만드는 엄청난 힘을 지녔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사람들은 그 ‘군대’를 몰아낸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에 거부감을 표시합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왜 떠나 달라는 청을 드렸는지 명확하게 밝혀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예수님께 떠나 주십사고 청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 이유의 중심에는 이천 마리의 돼지 떼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게라사인들에게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예수님의 신원보다, 그분께서 행하신 기적보다, 돼지 이천 마리가 더 중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큰 피해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들은 자신들을 향하여 다가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어떤 태도로 예수님을 마주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혹시 우리 마음에도 돼지 떼가 있어 그분의 다가오심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 질문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떤 분의 고민을 듣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어려웠을 때 함께 해줬던 친구인데 지금 너무 힘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사건건 간섭하고, 없었던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해서 곤란할 때가 자주 생긴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거리를 두려고 하면, “네가 힘들 때 내가 함께 해줬는데,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라고 말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입니다. 물론 힘들 때 함께 해줬던 것은 너무나 고맙지만, 이것을 이유로 계속 간섭하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이럴 때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어려울 때 도와준 그분을 외면하면 대역죄인이 된 기분까지 들 것입니다.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욕을 먹어도 충분한 상황에 들어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려웠을 때를 이야기하면서 지금 자신과 당연히 함께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아무런 이유 없이 주는 것에 그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관계는 어렵고 힘들 때 있었던 나 자신과의 관계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보다 가장 좋았을 때의 관계로, 일상의 삶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어렵고 힘들 때도 진짜 사랑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만 주님을 찾을 것이 아니라, 지금 평범한 일상 삶 안에서 먼저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어렵고 힘들 때도 주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과 만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향해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신원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원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끊임없이 반대했던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달리 신원을 정확하게 알면서 예수님 편인 것처럼 말했던 이 사람에게 고마움을 가질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의 부탁대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지 않고, “그래, 나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니 내가 한 번 봐줄게.”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편인 것처럼 말했지만, 그 말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칭찬도 하지 않고 타협도 하지 않으십니다. 혹시 사람에게 들어가 영향을 미칠까 봐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부탁을 허락합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재산에 손해를 끼쳤다는 생각에 예수님께 자기 고장에서 떠나달라고 청을 합니다. 이들 역시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과 매 순간 사랑의 관계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쁨과 행복의 시간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한 달에 몇 차례, 국내 성지순례를 다닙니다. 그런데 종종 저를 알아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빠다킹 신부님이시죠? 평화방송 통해서 신부님 봤어요. 그리고 매일 묵상 글도 잘 보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전라도 지역으로 순례를 떠났습니다. 이번에도 알아보시는 분이 있을 것 같았고, 저를 기억해 주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가 쓴 책을 드리고자 차에 싣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저를 알아보는 분이 단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알고도 모른 척을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로만칼라를 하고 있음에도 말이지요.
저녁에 숙소에 들어와 거울을 보는 순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마스크를 반드시 써야 하는 상황에서, 하얀 마스크가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어야 그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마스크로 제가 누군지 알아보기 힘든 것처럼, 다른 사람의 한 부분만으로는 제대로 알 수가 없음은 분명합니다.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인내와 정성이 우리 삶에 너무나 필요합니다.

왜 악령의 문제를 인간의 나약함 때문이라고만 하는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치유해주시는 내용입니다. 그 사람은 게라사 지방의 무덤에서 살던 이었습니다. 악령이 살게 만드는 곳이 무덤입니다. 악령은 예수님께 달려와 이렇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이 사람은 말로만 들으면 분명 교회 안에 머무는 사람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신지 명확히 알고, 또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습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솔직히 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수치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힘에 눌린 마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고장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고 하며 자신들을 돼지들 안에 들여보내 달라고 청합니다. 그 고장 사람들에게 아직도 할 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그들을 돼지들 안으로 들여보내십니다. 게라사 사람들이 돼지를 쳤다는 말은 그들도 ‘사실상’ 악령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돼지들이 호수에 빠져 죽자,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 고장에서 떠나 달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마귀들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그 많던 악령들이 지금은 왜 잘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돼지들 안에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섬기는 것이 돼지지 악령이 아니라고 믿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악령은 더 깊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성당에 다니면서도 마귀들, 혹은 마귀들이 들어있는 악습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 악습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려 하지만 그들은 악습을 벗어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악습의 이름을 솔직히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악습이 악령 때문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본인이 악령에 들렸음을 솔직히 시인하면 참 편합니다. 악령을 선택할 것인지,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인지 본인이 결정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매하게 자신의 죄를 인간의 본성적인 부족함 때문이라고 치부해버리고 만다면 그 사람은 점점 자신도 모르게 무덤 속으로 끌려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
성당에 다니면서도 재산을 자랑하고, 먹고 노는 것을 자랑하고, 남보다 인정받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그런 악령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그 이름을 솔직히 고백할 수 있을 때야만 예수님을 ‘실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악령의 영향을 제거하러 오셨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만드는 내 안의 것이 ‘뱀’이라고 고백할 수는 있어야 합니다. 뱀이 결국은 나를 사탄으로 만드는 것이니 그놈이 그놈입니다. 에덴동산의 뱀은 우리 안에 있으며 사탄의 힘과 결합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인간의 나약함으로 포장하면 돼지 안에서 악령을 보지 못하여 예수님을 내쫓는 게라사인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영화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는 ‘아넬리제 미켈’이란 독일 여자 청년이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에밀리 로즈에게 악령이 드는 것을 허락하시고 에밀리 로즈는 세상에 악령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악령에 시달리는 지옥의 고통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사실일 수 있다면 에밀리 로즈는 악령이 들렸어도 성녀와도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어쨌건 그 교구 주교는 구마 신부에게서 에밀리 로즈를 통해서 하는 악령의 말들을 녹음시켰고 과실치사로 재판을 하는 중에 증거자료로 제출되었습니다. 악령은 여러 언어로 말을 하고 있었고 자신이 어떻게 교회 안에 침투하여 인간의 이성을 흐리게 만드는지 어쩔 수 없이 실토하고 있었습니다.
사제는 끊임없이 악령의 이름을 묻습니다. 악령은 결국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나는 카인과 함께했었고, 나는 네로 안에도 있었다. 한때 유다와도 함께 했으며, 내가 바로 군단이며, 내가 벨리알이다. 그리고 나는 루시퍼이며, 육신의 악마다.”
죄는 항상 악령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마귀들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악습과 죄를 즐김으로써 마귀들과 함께 주님을 못 박았으며, 지금도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CCC 598)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죄를 통해 우리가 악마와 결탁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돼지를 악령과 하나 되게 만드셨습니다. 게라사인들이 해오던 악습이 곧 마귀 들린 것을 섬겨오는 것이나 다름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율법을 어기고 있는 것이라 핑계를 대겠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그 돼지의 이름이 솔직히 무엇인지 대답할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돼지는 돼지지 악령과 상관없는 것처럼 무덤에 살던 사람만 악령에 들렸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본인이 악령에 들렸다고 알았던 사람은 구원을 받았고, 자신들이 하는 일이 악령과 상관없다고 믿었던 이들은 예수님을 몰아냈습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죄짓게 만드는 자아의 모습은 뱀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에덴동산의 뱀을 사탄이라 불러도 될 것입니다. 그래야 사탄에게 유혹받으신 예수님도 쉽게 이해됩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누구나 사탄에게 유혹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나약함 때문이라고 포장되면 결국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고 지고 맙니다. 내 안에서 악령과 결탁하여 나를 죄짓게 만드는 자아라는 돼지 속에 숨어있는 것이 뱀의 모습임을 명확히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인간의 나약함은 인간이 치료할 수 있지만, 악령은 주님만이 물리쳐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스페인에서 제작된 드라마 ‘종이의 집(La Casa de Papel)’이 있습니다. 스페인에서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세계적인 영상 제공 업체인 ‘넷플렉스’가 종이의 집을 다시 방영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넷플렉스의 후원으로 후속작도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유쾌하고,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종이의 집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가면’이고 다른 하나는 ‘벨라차오(Bella Ciao)’라는 노래입니다. 가면과 노래는 기존의 권위와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과 자유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심각한 철학과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명의 천재와 8명의 전문가가 모여서 스페인의 조폐국으로 들어가서 돈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경찰과 천재가 마치 게임을 하는 것 같습니다. 시간 되시는 분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드라마입니다.
갈릴래아의 호숫가에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 운동은 예루살렘을 넘어 소아시아를 거쳐 당시 가장 강대한 로마에까지 전해졌습니다. 로마의 길을 따라서 교회는 유럽으로 전해졌습니다. 중국, 일본, 한국에까지 복음은 전해졌고, 대서양 바다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까지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과 12명의 제자가 시작한 하느님 나라 운동이 이렇게 2000년 역사를 이어온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저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초대교회의 많은 신자들은 십자가를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부활’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던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부활하였습니다.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고,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환상입니다. 씨를 뿌리지 않고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공부하지 않고 좋은 성적을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활은 깨어지는 아픔이 있습니다. 깨어지지 않는 달걀은 결코 병아리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재물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조직이 잘못되어서가 아닙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하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외면하는 교회는 언제나 위기를 겪었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고통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셨습니다. 모세를 보내셔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혈하던 여인, 눈먼 소경, 듣지 못하는 사람, 중풍병자, 나병환자와 같이 고통 중에 있던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서 치유되었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아픔에 함께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라자로를 무덤에서 부르셨습니다. 라자로와 그의 동생들을 사랑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묻혀있던 라자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사람들은 돌로 막았던 무덤을 열었고 라자로는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죽으셨고 묻히셨지만 무덤에서 나오셨고 제자들은 ‘빈 무덤’만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언젠가 늙고, 병들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믿으면 살아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으면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마치 무덤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더러운 영을 내보내고 성령이 함께 하면 주님과 함께 있지 않아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삶의 한 부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있는 더러운 영들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며칠 지나면 방 안에 먼지가 쌓이듯이 우리가 성령과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도 더러운 영들이 들어옵니다. ‘시기, 질투, 분노, 미움, 교만, 게으름, 욕망’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몸은 살아 있어도 무덤과 같은 것입니다.

돈보스코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직 한 가지,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이었습니다!
-양승국신부-
보스코 대축일을 맞아 간단하게나마 성당 장식을 했습니다. 창립자 대축일인데 밋밋하게 보내기가 송구스러웠기에. 상황이 상황인지라 30여년전 지원자, 수련자때나 해봤던 장식을 정말 오랜만에 하게 되었습니다.
돈보스코 얼굴 액자도 준비하고, 틀도 마련하고, 등경도 제작하고...제대 앞에 적당히 차려놓으니 봐줄만 했습니다. 등경 속 초에 불까지 붙이니 나름 근사했습니다.
성당에 앉아 돈보스코의 얼굴을 천천히 들여다보면서 한 가지 크게 느낀 바가 있습니다. 얼굴은 상습 피로에 시달리신 흔적이 역력합니다. 머리도 헝클어질데로 헝클어져, 참빗으로 싹싹 빗겨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저희 살레시안들은 참으로 큰 행운아들입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나 로욜라의 이냐시오, 베네딕토나 도미니코...다들 그림으로만 창립자 성인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반면, 은혜롭게도 저희 창립자 돈보스코(1815~1888)는 살아계실 때 사진기가 발명되어, 수많은 창립자의 사진들이 저희 손에 소중한 유품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많은 돈보스코의 사진들 가운데 제대로 된 사진, 그럴싸한 사진이 드믑니다. 하나같이 과로와 중노동에 찌든 사진, 수면부족과 스트레스에 쩌든 사진, 멋이라고는 단1도 내지 않은 사진들이 대부분입니다.
깔끔하지 않고 부스스한 돈보스코의 사진들, 이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묵상해봤습니다. 그에게 있어 꾸민다거나, 멋부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세상의 좋은 것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돈보스코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직 한 가지,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모든 에너지들을 청소년들을 위해 200퍼센트 쏟아부었습니다. 눈을 떠도 청소년, 눈을 감아도 청소년이었습니다. 세상의 다른 좋은 것들로 눈길을 돌리거나 신경 쓸 여유나 관심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단 1분이라도 시간이 나면 아이들을 찾아갔고, 아이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그 시간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을 위한 투자를 할 시간이 조금도 없었던 것입니다.
아르스의 성자 비안네 신부님 못지 않게 돈보스코 역시 위대한 고백성사의 성인으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돈보스코는 하루 일과중 많은 시간을 청소년들은 물론 신자들의 고백성사에 할애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막 전세계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는 살레시오회의 창립자로서 방문이며, 집필이며, 회의며 신경쓸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미사도 집전해야 했습니다. 강론 준비도 해야 했습니다.
그 바쁜 와중에도 돈보스코는 개구장이 청소년들을 한명 한명, 일대일로 만났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마음으로 경청했습니다. 나중에는 얼마나 바빴던지 식사 중에도 살레시오 회원들이나 청소년들과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돈보스코는 외모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쓰지 않은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목에 전념하느라, 영혼 구원에 시간을 바치느라 자신의 외모에 신경 쓸 시간이 도무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매일 특급 연예인 못지 않은 스케줄을 소화하며 하루 온종일 격무에 시달려야했기 때문에 외모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돈보스코는 보다 가치 있는 대상, 보다 본질적인 대상에 더 깊이 집중하기 위해 부차적인 것들에 대한 과감한 가지치기를 단행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오직 영적인 것,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 하느님, 영성생활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 결과가 자연스럽게 극단적 청빈생활로 연결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게라사인 지역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첫 이방인지역 나들입니다.
거센 돌풍을 잠재우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호수를 건너왔지만,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만나게 됩니다. 마치 모세가 갈대바다를 건너왔지만 여전히 사막에서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마주했듯이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바다에 부는 돌풍이 아니라, 인간에게 부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십니다. 곧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나 쇠사슬로 묶어둘 수 없을 만큼 거센 돌풍에 휘둘려 밤낮으로 소리 지르며 무덤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께 마주 왔다.”(마르 5,2)
이제 마귀 들렸던 사람에게서 마귀들은 나가고, 그는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마르 5,15) 있었습니다. ‘옷을 입고 앉아 있는 것’은 더러운 영에 들렸던 왜곡된 인간성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다”(갈라 3,27)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제정신이 들었다’는 것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와 같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루카 15,17-20)곧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사람으로 되었다.’(에페 4,21-24)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마귀를 내쫓는 이 이야기는 병을 고치는 다른 이야기들의 범위를 넘어서, 사탄의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돼지 떼들의 익사는 이 고장에 대한 마귀들의 권세가 끝났음을, 곧 그곳이 더러움에서 해방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어둠은 빛을 반기기보다 오히려 배척하고 저항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렸던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
,19)
이렇게 그는 첫 이방인 선교사로 파견됩니다. 그리스도의 자비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20)
오늘,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알려야 할 일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푸신 일”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주님께서 하신 일과 자비를 베풀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죽은 이들의 무덤 가운데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의 사랑 가운데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제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먼저 베풀어지고 선사되는 하느님의 사랑’을 수락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마르 5,17)
주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돼지 떼가 판치지 않게 하소서.
본래부터 주님의 거처이니, 제 안에 빛을 밝히소서.
죽은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 아멘.

예수님을 만나면
-반영억신부-
그 날의 기분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음에 둔 사람을 만나면 기쁨이 크고,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아픕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 훌륭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못된 사람 만나서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만나면 운명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만남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만남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시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나왔습니다. 그것은 큰 은총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무덤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무덤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는데 사랑이 없는 미움과 시기, 질투, 분노, 적개심, 무관심 등으로 지옥같이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는 것은 무질서와 혼란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는 것은 분노와 자학으로 괴로워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 어둠에서 나왔으니 복이 있습니다. 그는 결국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마르5,15).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새 삶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로마12,2).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고 예수님 곁에 같이 있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고향에서 떠나주기를 바랬습니다. 심지어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루카4,28).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도 처음에는“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마르5,6). 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악령의 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악령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인정하지만, 그분과 소통하고 친교를 나누는 일은 거부합니다. 이렇게 악의 세력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잘 알면서도 그릇된 삶에 고집스레 집착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극도로 싫어합니다(손희송). 그런데 제정신이 들자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5,18). 하고 청하였습니다. 이 청은 제정신이 들기 전과는 전혀 다른 청원입니다. “이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난 것”(2코린 5,17).입니다.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청은 곧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정신이 들어 청원한 기도이니 우리는 기도를 할 때 제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턱대고 청하지 않고 효과적인 기도, 꼭 이루어지는 기도를 할 수 있으며 주님의 뜻에 의합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거절하신 것으로 믿고 때를 기다리며 주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 새 생활을 시작하였듯이 우리도 주님을 만나 ‘새로 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상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만나서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날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마귀들과 돼지 떼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마르 5,2-5).”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죄와 악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를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둘 수 없었다는 것은, 인간 세상의 법으로는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는 글자 그대로 ‘무법자’입니다.)
밤낮으로 소리를 지른다는 말은, 그가(마귀들이)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과 증오심을
가득 품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또 돌로 자기 몸을 치는 것은
그의(마귀들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도 법과 상식을 무시하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말하면서, 자기들 안에 있는 적대감과 증오심을
사방에 퍼뜨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폭력적인 집회를 열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고,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그들의 적대감과 증오심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든 그들은 누군가를 증오하고 혐오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또 그들은 항상 남 탓만 하면서 자기반성이나 성찰은 하지 않고,
자기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은 늘 옳다고 주장하는 교만과 어리석음을 드러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 무덤이라는 것은, 그에게서(마귀들에게서)
절망과 죽음의 악취만 풍기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폭력적인 집회를 하면서 증오심과 적대감을 퍼뜨리는 자들은
절망과 죽음의 악취를 퍼뜨리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에 대해서 집회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오만은 주님을 저버리는 데서 시작되니, 인간의 마음이 그를 지으신
분에게서 멀어진 것이다. 오만의 시작은 죄악이고, 오만에 사로잡힌 자는
악취를 뿜어낸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큰 재앙을 불러들이시어,
그들을 완전히 파멸시키신다(집회 10,12-13).”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에게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향기’를 퍼뜨리는 사람입니다.
그 향기는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생명력이 되지만,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과 멸망의 예고’가 됩니다.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나 멸망할 사람들에게나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죽음의 향내고,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는
생명으로 이끄는 생명의 향내입니다(2코린 2,15-16).”>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마르 5,9-13).”
예수님께서 마귀들에게 이름을 물으신 것은, 주님으로서 주권을 행사하신 일이고,
마귀의 정체를 밝혀서 그것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일입니다.
그것들이 순순히 자기 이름을 말한 것은 예수님의 주권에 복종한 일입니다.
여기서 마귀들은 자기들의 수가 많아서 이름이 ‘군대’ 라고 대답하는데,
이 이름은 그것들의 폭력성과 단결력을 나타냅니다.
(군대라는 이름에서 군사독재 정권 시절의 폭력적인 지배와 억압이 연상됩니다.)
마귀들은 예수님께 저항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쫓겨날 생각은 없어서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사람 속에 있을 수 없다면 짐승들 속에라도 있게 해 달라는 것이
마귀들이 제시한 타협안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완전히 쫓겨나는 것은 피하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마귀들의 요청을 들어 주셨는지는 모릅니다.
어떻든 돼지들이 집단 자살을 하는 바람에 마귀들은 인간 세상에서 완전히
제거되었고, 아마도 지옥으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16-17).”
여기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라는 말은,
실제로는 “떠나라고 요구하였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지역에서 마귀들을 쫓아내셨는데,
그 지역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서 고마워하기는커녕 예수님을 쫓아냈습니다.
왜 그랬을까?
돼지 떼가 죽어서 재산 피해를 크게 보았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고,
마귀들보다 더 힘이 센 분이신 예수님을 두려워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에 그 지역 사람들은 마귀들과 함께 사는 것에 적응해서 살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가져다주신 새로운 변화를 싫어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 못하는 짐승들도 마귀들을 거부했는데, 사람들은 마귀들이 직접적으로
해치지만 않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도 억압에 적응해서 사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 가운데에는 그 시절이 살기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8-19)”
‘마귀 들렸다가 예수님 덕분에 해방된 이’가 예수님께 청한 것은
‘사도들’과 같은 급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청을 받아주지 않으신 것은,
그에게 다른 임무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주님께서 하신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임무를 주신 것은
사실상 그를 제자로 삼으신 일입니다.

복음: 마르 5,1-20: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는 게라사로 가셨다. 그런데 이 지방의 본이름은 게르게사인데 성경을 필사하면서 잘못 옮긴 이름이다. 게르게사는 ‘쫓아낸 자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구세주이신 주님을 대하는 주민들의 처신에 대한 예언적 암시를 담고 있는 듯하다. 그 지역 주민들은 예수님께 자기들 고장에서 떠나 달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이다(참조: 마태 8,34; 마르 5,17; 루카 8,37).
예수님은 마귀 들린 사람을 만나신다. 그 사람은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썩은 시체로 악취를 풍기는 무덤에서 산다. 이 세상의 영광을 약속받았던 자가 그곳에 살고 있다. 이러한 곳에서 또한 악령 들린 사람은 무덤에 거처하면서 쇠고랑과 쇠사슬로 묶여 있으면서 밤이나 낮이나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짓찧곤 했다는 것은 그가 더는 비참해질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마귀들은 그분이 하느님이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본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7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그 악령 들린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펴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8절) 하시자 마귀들은 그에게서 나와 돼지 떼들에게 들어갔고 돼지들은 물에 빠져 몰사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마귀들이 사람들에게 똑같은 짓을 해서 바다에 빠져 죽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귀들을 막으셨고,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마귀들이 인간들에게도 저지를 수 있었던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귀들이 돼지들을 소유할 힘이 있었다면 인간을 소유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마귀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은 성한 몸으로 예수님을 따르려고 한다. 마귀들의 군대가 자기에게서 쫓겨난 것을 알았다. 이제는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주님의 발치에서 마냥 쉬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의 뜻과는 달리 이렇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19절)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는 지금까지의 나의 생활에서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변화는 나의 희생과 노력의 결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못 알아들을 때, 우리도 그 주민들처럼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나 자신의 희생이 따를 때, 그 희생을 꺼려 예수님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하는 마음의 자세가 아니고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수용하고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자세를 갖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르 5, 8)
-한상우신부-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추방하여
주신다.
더러운 영과
마주하시며
파괴당한
진실을 말하게
하신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공동체의
사랑을
되찾아
주신다.
더러운 영은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한다.
모든 가치를
무너뜨린다.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에 대한
믿음을 다시금
회복시켜
주신다.
단절된 관계를
치유하여 주신다.
새로운 관계로
초대하신다.
새로운 관계란
억압과 속박
공포와 단절이
아닌 자유이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개인과 공동체를
사랑으로
이어준다.
평화를
주신다.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건강한 삶을
살길 바라신다.
개인과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더러운 영을
추방하여
주시며
고귀한 인격을
회복시켜 주신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의 역할또한
공동체를 위한
나눔과 감사
격려와
존중이길
기도한다.
허구의 삶이
아닌
진실된 삶을
되찾아 주시는
주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다.
빛 안에서
사람의 삶을
다시
살게하신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매우 극적인 구원의 현장을 보여 주십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5,8)
이방인 게라사인들의 지방에서 아주 거친 영에게 사로잡힌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 오자 그분께서 명하십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마르 5,5) 하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고 도와줄 수 없는 처참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뿐, 타인을 직접적으로 공격했다는 설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소리를 지르고 족쇄나 쇠사슬을 끊는 행위가 타인에게 공포를 조장하고 위협이 되기는 합니다만, 그 지방 사람들이 알아서 피하기만 하면 그런대로 함께 지낼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나 추측해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17)
그 사람 안에 들어 있던 '군대'라는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의 허락에 돼지 떼에게로 옮겨가자, 돼지들이 호수에 빠져 몰살됩니다. 고을 사람들이 얼떨결에 재산에 손실을 입은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 중에는 당장 생계가 곤란해진 이들도 있을 터이니 그들의 태도를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지금 같으면 손해배상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일이 벌어진 것이니까요.
고을 사람들의 반응은 우리를 성찰하게 합니다. 그들은 정상으로 돌아온 이를 보면서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기보다, 오히려 그가 온전해진 것에 겁을 내지요. 그리고 그에게 구원을 베푸신 예수님께 떠나가 달라고 청합니다. 더러운 영에 들렸던 이가 고을에는 성가신 존재였을망정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친 일이 없기에 그의 존재는 용인되었으나, 재산에 손실을 끼친 예수님과는 함께할 수 없다고 느낀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하느님의 뜻이나 선행, 정의와는 별개로 내 재산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적으로 간주하는 이 세상의 모습을 투영하는 듯하지요. 그들의 마음을 모르시지 않는 예수님은 그들의 요청대로 배에 오르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자기 삶에서 떠나보내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그분은 존중하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큰 기적을 체험한 그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고 싶어하지만 예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의 거친 과거가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그에게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방인들 사이에 남아 본인이 직접 겪은 은총을 나누고 증언하는 직무가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면서 당신 대신 그를 그곳에 남기신 것이지요. 이로써 오늘 복음 대목은 구마와 치유 기사일 뿐만 아니라 소명 기사로 확대됩니다.
제1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 시대를 살아간 선조들을 나열하면서 진정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정을 받기는 하였지만 약속된 것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에, 우리 없이 그들만 완전하게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히브 11,39-40)
완전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옵니다. 하느님과 함께 걸었던 구약의 거룩한 영혼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 저승에 오시어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시길 기다렸고, 그 구원은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마련하신 당신의 구원 계획을 아드님을 통해 완성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계약의 수혜자로서 "더 좋은 것"을 누리며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갑니다. 주님의 때를 맞이해 천상 혼인잔치에서 모두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릴 때까지 우리는 구원자 예수님께 의탁하고 그분께서 주신 소명을 지금 여기서 채워 나가야 합니다.
"이것"의 손실이 예수님의 부재보다 더 아픈 우상이 행여라도 나에게 있다면 진정으로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혹 내 안에 예수님보다 더 잃기 싫은 무엇은 없는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내가 얻은 구원의 지위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 구원에 초대된 벗님을 축복합니다.

나의 영혼은?
-김찬선신부-
오늘 히브리서는 예언자들이 겪었던 고초들을 거칠게 묘사하고 있는데
돌에 맞아 죽고, 칼에 찔려 죽고, 심지어 톱에 잘려 죽었다고까지 합니다.
하지만 오늘 히브리서가 정작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라
예언자들이 이 세상에서 떠돌이로 살았다는 점이며 그 이유가
그들에게 이 세상은 가치 없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으며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만 두른 채
돌아다녔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 우리는 혼란스럽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이 그렇게 무가치하다면
이 세상을 아름답게 꾸미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는지, 아무렇게나 살다 얼른 지구를 떠나면 되는 것은 아닌지.
또 이렇게 무가치한 세상을 하느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었다."라고 왜 요한복음은 얘기하는 것인지.
혼란스럽긴 하지만 우리 신앙은 세상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 선으로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성자께서 그토록 사랑한 세상을
우리도 아름답게 꾸미고 사랑해야 한다고. 그러나 떠날 줄 알아야 한다고.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먼저
주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세상을 사랑하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살라고 이 세상을 만들어 주셨고,
성자께서도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셨으니
이 세상을 사는 동안은 우리도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며 사는 것은 세상을 소유하고 애착하는 것과 다릅니다.
사실 소유와 애착은 미움보다 더 사랑의 반대입니다.
'아유 내 새끼!'하는 순간 사랑은 소유와 애착으로 바뀌는데
주님께서는 내 새끼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지요.
마찬가지로 세상을 내 세상으로 만들면 안 되고
성자께서 가르쳐 주신 그 하느님의 나라로,
그러니까 하느님 소유의 나라로 우리는 사랑하면 됩니다.
사람이든 세상이든 소유와 애착의 대상이 아니라
내어줌과 사랑의 대상이어야 하고 사실 내어주어야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인의 내어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주님처럼 나를 내어줌이 하나이고
그들을 하느님께로 내어드리고 돌려드리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내어줌으로써 나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하기도 하지만
그들을 내어줌으로써 나도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지게도 하는 것이고,
그래서 나로 하여금 자유롭게 훌훌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더러운 영들은 애착과 집착의 영들이고
그래서 지구를 떠날 수 없어서 천국에 갈 수 없었고,
게라사를 집착하여 돼지 속으로 들어가기까지 했습니다.
지저분하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더럽다는 것은 지저분함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지저분한 영은 뒷끝이 깔끔하지 못하고 쿨하지 못한 영이고,
있어야 할 때 있고 떠나야 할 때 떠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영이며,
싫다는데도 계속 집적대고 매달리고 끈적거리는 영일 것입니다.
나의 영혼은 어떤 영입니까? 사랑하면서도 자유롭습니까?
떠나야 할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맴돌고 있지 않습니까?
놔주어야 할 사람을 놓지 못하고 계속 붙잡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야 할 천국 가지 못하고 만나야 할 주님 만나지 못하는 그런 영?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르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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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항상 악령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마귀들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악습과 죄를 즐김으로써
마귀들과 함께 주님을 못 박았으며, 지금도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CCC 598)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죄를 통해 우리가 악마와 결탁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돼지는 돼지지 악령과 상관없는 것처럼 무덤에 살던 사람만 악령에 들렸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본인이 악령에 들렸다고 알았던 사람은 구원을 받았고, 자신들이 하는 일이 악령과 상관없다고 믿었던 이들은 예수님을 몰아냈습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죄짓게 만드는 자아의 모습은 뱀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에덴동산의 뱀을 사탄이라 불러도 될 것입니다. 그래야 사탄에게 유혹받으신 예수님도 쉽게 이해됩니다.
내 안에서 악령과 결탁하여 나를 죄짓게 만드는 자아라는 돼지 속에 숨어있는 것이 뱀의 모습임을 명확히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인간의 나약함은 인간이 치료할 수 있지만, 악령은 주님만이 물리쳐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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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없는 부활은 환상입니다. 씨를 뿌리지 않고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공부하지 않고 좋은 성적을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활은 깨어지는 아픔이 있습니다. 깨어지지 않는 달걀은 결코 병아리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재물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조직이 잘못되어서가 아닙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하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외면하는 교회는 언제나 위기를 겪었습니다.
며칠 지나면 방 안에 먼지가 쌓이듯이 우리가 성령과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도 더러운 영들이 들어옵니다. ‘시기, 질투, 분노, 미움, 교만, 게으름, 욕망’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몸은 살아 있어도 무덤과 같은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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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도 처음에는“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마르5,6). 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악령의 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악령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인정하지만, 그분과 소통하고 친교를 나누는 일은 거부합니다.
이렇게 악의 세력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잘 알면서도 그릇된 삶에 고집스레 집착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극도로 싫어합니다(손희송).
그런데 제정신이 들자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5,18). 하고 청하였습니다. 이 청은 제정신이 들기 전과는 전혀 다른 청원입니다. “이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난 것”(2코린 5,17).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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