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29일 연중 제3주간 금요일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마르4,26-34)
"What is the kingdom of God like?
To what shall we compare it?
It is like a mustard seed which, when sown,
is the smallest of all the seeds scattered upon the soil.
But once sown, it grows up and becomes
the largest of the plants in the garden
and even grows branches so big
that the birds of the air can take shelter in its shad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마르코 복음서의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 자체를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인간의 욕심과 욕망, 이기적인 삶으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노력만으로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 온 것이라고 여겨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고, 겨자씨가 뿌려져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를 뻗듯 모든 민족들에게 퍼져 갑니다.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우리 모두 그 완성을 기다리듯이 그분의 나라를 위하여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비록 작고 보잘것없을지라도, 씨앗이 다 자란 뒤에는 그 어떤 나무와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 나라의 끝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통하여 활동하는 하느님 나라의 거역할 수 없는 힘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세상에 뿌려진 씨앗인 하느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우리 안에 뿌려지고, 모든 민족들에게 뿌려져 자라납니다. 이 씨앗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곧 모든 민족들이 어떻게 변화되고 성장하는지, 우리는 모르는 신비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려 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 나라를 믿고 희망하며, 애덕을 실천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독립생활을 하는 일부 생명체를 제외하고, 동물 대다수는 본능적으로 사회적 관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뇌가 본능적으로 원한다고 하네요. 특히 사람의 체취와 체온은 정서적 안정감을 가져다주고, 장기적으로 심혈관 질환과 면역 기능에 변화를 줘서 수명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해리 할로우(Harry Harlow)는 ‘가짜 원숭이 실험’을 했습니다. 새끼 원숭이의 우리 안에 먹이를 주는 ‘철사 엄마’와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헝겊 엄마’를 넣었습니다. 즉, 생존을 위한 먹이에 집착하는지 아니면 부드러운 감촉에 집착하는지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허기질 때만 철사 엄마에게 가서 우유를 먹을 뿐, 그 외의 시간은 헝겊 엄마에게 붙어 있었습니다. 본능적 욕구보다는 포근하고 따뜻한 품에 애착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더 하다고 합니다. 관계를 맺지 못하면 세상 안에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거리두기를 하면서 힘들어합니다. 코로나 블루 라는 신종 우울증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거리두기, 자가격리 등이 서로의 건강을 위해서 필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관계 맺기가 필요합니다. 사람과의 관계뿐만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이 관계를 맺지 않으면, 세상 삶이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고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데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매 순간 관계를 맺으십니다. 평범하고 아무런 특징이 없는 일상 같지만, 그 안에서도 당신의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런데 이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만을 바라봅니다. 세상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욕심과 이기심을 채울 수 있는 것만 바라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긍정적인 관계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뿌린 씨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가 채 느끼기도 전에 하느님 나라가 다가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겨자씨가 아주 작고 아주 사소해 보이지만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아주 작고 사소한 우리의 일상이지만 그 안에서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날이 올 때까지 막연하게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맺어가면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해야 합니다. ‘나중에’라는 뒤로 미루는 말을 통해서는 커다란 후회만 남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비극적인 간이 종종 등장하는데, 그중 한 명이 생각납니다. 바로 트로이의 왕자 티토누스입니다.
그를 사랑한 새벽의 여신 에오스는 티토누스에게 영생을 달라고 다른 신들에게 간청했고, 신들은 에오스 여신의 청을 기꺼이 들어줍니다.
그렇다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데, 왜 비극의 주인공일까요?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해 먹고, 자고, 또 운동도 하고, 아프면 병원을 찾아갑니다. 어르신에게 “오래 사세요.”라고 인사하는 것을 보면, 오래 장수를 누리는 것은 분명히 축복입니다. 그런데도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말합니다.
에오스는 깜빡하고 영원한 젊음도 함께 달라는 청을 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점점 늙고 쇠약해져서 꼼짝도 하지 못하지만, 영원히 사는 것, 이것이 티토누스에게 주어진 비극적인 삶이었던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자비로운 위안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 세상 삶을 마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죽음, 이 죽음을 위해 이 세상 삶을 잘 마치기 위한 노력이 왜 필요한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사람은 꼭 성장해야만 하는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등불’이 있는 공동체의 필요성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빛은 진리입니다. 공동체마다 진리를 품은 정도가 다릅니다. 그런데 그 진리는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따라서 어떠한 공동체에 어느 만큼의 진리가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장에도 차이가 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진리와 은총이 충만한 공동체에 머물면 저절로 성장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 말씀도 오직 당신의 제자들에게만 따로 풀이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머물면 그 충만한 진리로 사람이 성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왜 굳이 그런 공동체에 속해서 내가 자라나야 하는가? 그냥 살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반박합니다. 성장과 성숙이 의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장하지 않으면 자신과 이웃에게 해를 끼칩니다.
지하철은 우리 일상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년에 지하철에서 한 할머니가 한 아이의 머리를 만졌다고 아이의 엄마가 할머니에게 욕을 하며 폭행을 가한 적이 있습니다. 또 지하철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20대 청년이 80대 할아버지가 불편하다고 말을 하자, 할아버지에게 폭언을 퍼붓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며칠 전에는 중학생 아이들이 한 할머니에게 욕을 하며 목을 조르는 등의 폭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나이가 어려 처벌이 어렵다고 합니다.
이러한 예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물의를 일으키는 당사자들은 ‘내 맘대로 사는데 뭔 간섭?’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회에 피해를 주는 것은 둘째 치고 본인들은 행복할까요? 이들은 성장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이고 그 피해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의 몫이 됩니다.
영국의 한 TV 채널에서 ‘5일간의 격리’란 실험을 했습니다. 스마트폰 없이 독방에서 5일간 견뎌내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는 실험입니다. 실험에 5명이 참가했습니다. 그들이 들고 들어갈 수 있는 물건은 3개로 제한되었는데 전자제품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독방은 감옥 같지는 않고 웬만한 원룸 오피스텔 방보다 좋습니다. 제 때에 식사도 푸짐하게 제공되었습니다.
참 쉬워 보이는 도전인데 실상 다섯 명 중 끝까지 견뎌낸 사람은 단 세 명에 불과했습니다. 참가자 중 한 명인 28세의 샤르마인은 겨우 4시간 만에 독방 생활을 포기했습니다. 또 다른 참가자였던 TV 진행자 조지는 정확히 24시간 만에 포기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고독과 권태감, 그리고 불안감을 견뎌낼 수 없었습니다. 특히 고립된 상태에서 시간을 알 수 없다는 점이 매우 괴로웠다고 털어놨습니다.
실험의 최종단계에 진출한 사람은 로이드, 루시, 사라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상태도 그리 좋지는 않았습니다. 사라는 72시간이 지난 시점부터 환각을 보고 혼잣말을 시작했습니다. 로이드는 카메라와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군가가 아니면 적어도 어떤 것과도 소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루시는 이들과 달랐습니다. 그녀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혼잣말하거나 환각을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어렵지 않게 5일을 잘 견뎠고 방은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출처: ‘인터넷 없이 독방에 5일 동안 갇힌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 유튜브 채널 ‘모든 사람’]
독방도 사실 우리 인생의 축소판입니다. 인생이 지하철처럼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각자 자신의 독방에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스스로 만족할 수 없다면 삶은 지루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루가 왜 이리 기냐고 투정하면서 그 따분하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자극적인 일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그 자극은 점점 더 강해지지 않으면 소득이 없고 그래서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고 그렇게 자신과 사회를 죽이는 사람이 됩니다.
5일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간 사람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육체적 본능과 싸워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장은 땅에서 하늘로 오르는 과정입니다. 본래 있던 자리에서 탈출하여 자신에게 햇빛과 물을 주는 하늘로 향하는 과정이 성장입니다. 하지만 세속-육신-마귀의 본성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은 이들은 여전히 그것들을 주는 스마트폰에 머리를 들이박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유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도 각자의 독방에서 힘든 고독에 지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간신히 5일을 견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타인과의 관계 단절을 힘들어했습니다. 관계가 중요하긴 하지만 홀로 설 수 없는 사람은 관계를 통해 자신 인생의 따분함을 채워나갑니다. 자신의 심심함을 채우려고 타인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루시는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창조’하는 데 썼습니다. 그림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창작물입니다. 창작은 창조이고 창조는 하느님의 본성입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의 본성이 지배하는 공동체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 공동체에서 그녀는 성장하였고 성숙하였고 자신과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삶의 시간을 소중히 사용하고 자신과 이웃을 만족하게 하는 삶을 삽니다.
공동체 안에는 그 공동체를 유지하는 등불이 있습니다. 이 등불은 진리이고 뜻입니다. 그 뜻이 자기 자신을 이기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 공동체에 머무는 사람은 성장할 수 있습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자기 손해이고 세상의 피해입니다.
우리나라는 조상 대대로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이란 건국이념으로 살아왔습니다. 이 이념이 한 공동체의 빛이 되면 그 공동체에서 그 이념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견뎌낼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이념을 따르지 않는다고 크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여 사람에게 이롭지 않은 일을 했다면 고해성사를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머물면 성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장하지 못하면 스스로 공동체에서 퇴출당해야 합니다.
마더 데레사가 등불을 켜 놓고 간 집에 살고 있었던 청년은 그 등불 때문에 삶이 변했습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는 그리스도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진리의 등불이 있습니다. 그 등불 때문에 우리는 성장해야 하고 성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왜 꼭 성장하고 성숙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행복’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다면 할 말은 없지만, 행복해지고 싶다면 나를 성장시켜 줄 진리의 빛, 좋은 뜻이 지배하는 공동체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뜻은 ‘사랑’입니다. 인간 육체적 본성과 반대이기 때문에 올바른 성장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등불인 공동체에 머물면 자신도 저절로 성장하게 되고 행복도 함께 증가하고 주위 사람들도 함께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가장 완전한 공동체가 가톨릭교회입니다.

-조재형신부-
요즘 매튜 켈리의 ‘가톨릭신앙의 재발견(Rediscover Catholicism)’을 읽고 있습니다. 번역하신 분께서 보내 주셨습니다. 현대사회는 풍요 속의 빈곤을 살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물질과 자본은 우리의 삶을 편하게 하고, 풍요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과 정신은 ‘개인주의, 쾌락주의’에 의해서 점점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물의 온도가 뜨거우면 개구리는 빨리 물 밖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물의 온도가 조금씩 높아지면 개구리는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물속에서 죽는다고 합니다. 화려한 불빛 속으로 날아가는 나방은 불에 타서 죽게 됩니다.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는 개인주의,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쾌락주의는 현대인들의 생각과 정신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방송, 언론, 기업, 교회에도 이런 개인주의와 쾌락주의가 들어와 있습니다.
교황님은 2021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돌봄의 문화’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가 살 수 있도록 돌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가 동생을 돌보는 사람입니까?’라는 카인의 질문에 ‘그렇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율법학자에게 ‘당신도 가서 그렇게 하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과부와 고아를 돌보았습니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가진 것을 나누었습니다. 배고픈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백신과 치료제를 얻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도 백신과 치료제가 제공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난민들에게 잠자리와 음식이 제공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신앙은 영적으로 메마른 현대인에게 다시금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시간과 장소의 개념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곳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가치와 질서를 벗어나면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회개’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했던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체험했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회개했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성공, 명예,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복음이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과 표징입니다. 복음이란 죽음을 넘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것입니다.
어제에 이어서 바오로 사도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러기에 좀 더 인내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희망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어째서 박해의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의 시간에도 인내하며 참을 수 있는 것일까요? 출세, 성공, 권력, 명예, 욕망이라는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 희생하고, 양보하며, 나눌 수 있는 것일까요? 희망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표징입니다.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분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분은 겨자씨에 감추어진 희망을 보았습니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면 큰 나무가 되고, 거기에서 많은 새들이 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고통과 절망의 상징인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의 희망을 보았고, 부활은 바로 영원한 생명의 시작임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것들에서 희망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희망 때문에 감옥에서도 감사드릴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 희망 때문에 고통과 시련을 이겨 낼 수 있다고 위로합니다. 그 희망 때문에 율법과 계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희망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신앙 안에서 희망은 미래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현재의 삶과 실천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에서 희망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사건들이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크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위로가 한도 끝도 없이 흘러넘치는 곳이 아닐까요?
-양승국신부-
작년 봄 수도원 성당 옆, 손바닥만한 텃밭에다가 몇 가지 채소 씨앗을 뿌릴 때였습니다. 어떤 씨앗은 너무나 작아서 손에 제대로 쥘 수도 없었습니다. 어떤 씨앗은 너무나 가벼워서 후 불면 날아가 찾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솔직히 씨앗들을 땅에 파묻으면서도 반신반의했습니다. 이렇게 작고 볼품없는 씨앗들인데, 여기서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웬걸, 일주일이 가고, 이주일이 가고, 봄비가 한번 오고, 밭에 나가보니 기적 같은 일들이 생겨났습니다. 여기저기서 무수한 새싹들이 고개를 쳐들고 방긋방긋 웃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작고 하찮아보였던 씨앗 하나가 점점 자라나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을 만듭니다. 솎아먹고, 옮겨 심고, 따먹고 또 따먹고, 그래도 또 나오고... 바로 이 맛에 농부들께서는 농사를 계속하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씨앗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코 복음 4장 30~31절)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대체 어떤 곳일까? 과연 나란 존재도 거기 갈수 있을까? 어떤 광경이 펼쳐지고 있을까? 거기서는 하루 온종일 뭘할까?
은혜롭게도 예수님의 육화강생으로 인해 장막에 가려져 있던 신비스런 하느님 나라의 비밀이 밝혀졌습니다. 예수님 존재 자체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열 수 있는 결정적인 열쇠입니다. 어쩌면 예수님 그분과 함께 하는 이 세상, 그분의 손길이 닿은 이 세상이 곧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은 바로 하느님 자비의 풍성함, 하느님 사랑의 풍성함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하느님 나라는 크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위로가 한도 끝도 없이 흘러넘치는 곳이 아닐까요?
따뜻한 봄볕이 꽁꽁 얼어붙어있던 대지를 소리 없이 녹이듯이 그 숱한 우리의 죄악과 부족함, 실수와 과오들이 크신 하느님 자비 앞에 눈 녹듯이 사라지는 그런 곳이 아닐까요?
참혹하리만치 견디기 힘들었던 우리들의 고통이나 좌절, 분노, 끝도 없는 방황... 이 모든 괴로움들이 크신 그분의 위로 앞에 자취 없이 사라지는, 그래서 부드러운 그분의 손길만이 우리 영혼을 어루만지는 사랑으로 충만한 곳이 아닐까요?
어쩌면 그러한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이 땅에서부터 조금씩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가능하다면 이승에서부터 최대한 만끽해야 되지 않을까요? 언젠가 또 다른 세상에서 맞이하게 될 하느님 나라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누려야만 하는 하느님 나라 역시 중요합니다.
우리가 풍요로운 하느님의 자비 안에 살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와 닿는 현실이 아무리 팍팍하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하느님을 굳게 신뢰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결코 외부에서부터 이루어지는 변화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듣고 받아들여 안으로부터 오는 나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어떻게 건설되는 걸까?
오늘 <복음>은 이에 대한 해답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이 바로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 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씨앗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말씀)의 권능을 믿어야 합니다. 씨앗은 자신 안에 싹을 틔우고 잎으로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를 잘 맺기 위해서는 우리의 도움과 보살핌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을 잘 가꾸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잘 자라도록 응답하고 협조할 때라야 비로소 건설되는 나라인 까닭입니다. 곧 씨앗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서만 성장하고 자라나고 꽃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말합니다.
“성경(말씀, 하늘나라)은 읽는 이(응답하는 이) 안에서 자란다(성장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랍고 신비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씨가 우리 안에 뿌려지면,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키고 또 어떻게 성장시키는지를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매 순간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여 구원이 이루어지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우리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시는 분은 말씀이신 것입니다. 곧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에서 줄기가 나오고, 이삭이 나오고, 낟알이 맺히고, 하는 것은 말씀의 권능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됩니다. 마치 십자나무처럼, 모든 인류를 끌어안은 큰 나무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십자나무에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비록 작은 ‘겨자씨’지만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썩기만 하면, 바로 이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와서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로 자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이 씨앗을 정성껏 가꿀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저의 힘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으로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소서.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싹이 트고 자라나는 이 놀라운 신비에 순응하게 하소서.
가난하고 소외받고 외로운 이들이 찾아와 쉴 수 있는 큰 나무로 저희를 축복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주님!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형제들 앞에 작아지게 하소서!
십자나무에 인류의 거처를 마련하듯, 형제들의 거처가 되게 하소서! 아멘.

지금 순간을 살아야
-반영억신부-
한 유치원 원장님이 아이들에게 꽃씨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제일 예쁜 꽃을 피워온 아이에게는 멋진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이들은 서로 ‘내가 제일 예쁜 꽃을 피워야지!’하며 신이 났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아이들은 꽃이 활짝 핀 화분을 들고 왔습니다. 그러나 원장님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밝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아이가 빈 화분을 들고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저는 게을러서 꽃을 못 피웠어요!”원장님은 그제서 환하게 웃으시며 그 아이에게 멋진 선물을 주었습니다. 나누어준 씨앗은 싹이 나지 않는 가짜였던 것입니다.
정말 싹을 틔워야 할 것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입니다. 사실, 씨앗이 생명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아무리 기다려도 싹은 트지 않습니다. 또한 씨앗 자체의 신비로운 힘을 믿지 않는다면 씨앗에서 싹이 트고 새싹이 돋아나도록 땅을 가꿀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하면서도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먼 훗날을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순간을 살아야 합니다.
씨앗이 땅에 묻혀 모든 것이 끝나고 정지된 것처럼 보일 때 땅속에 있는 씨앗은 은밀하게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지금 당장 밝히 드러나지 않아도 그것은 싹을 틔우고 있는 것입니다. "씨앗은 풍성하게 되기 위해서 순응하고 씨앗으로서의 그 존재성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새로운 다른 것이 됩니다. 아주 커다란 다른 것이 됩니다. 변화됩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과정 중에 있으며 희망과 완성을 향한 과정에 있습니다...하느님 나라는 매일 이루어지고 성령께 대한 순응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그러므로 기회가 좋든 나쁘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수고와 땀, 희생 봉헌이 미약해 보일지라도 결코, 작지 않음을 기뻐해야 합니다. 겨자씨가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씨의 크기는 0.95-1.6밀리미터=보니까 아주 먼지 같아요!)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되듯이(마르 4,32), 우리의 정성도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와‘겨자씨의 비유’는‘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비록 작고 보잘것없이 보일지라도, 그 끝은 생각보다 크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무리는 작고 초라하게 시작되었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포함하는 교회공동체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선을 행하고 진리 안에 자유로워야 하겠습니다. 겨자씨 한 알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무한한 가능성이 들어있듯이 우리의 사랑과 희생도 무한한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참으로“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요한3,27). “누가 먼저 무엇을 드렸기에 주님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로마11,35-36).
불신이 가득한 이 세상에 빈 화분을 들고 눈물을 지을 수 있는 진실함으로 하늘나라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진실함이 있으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의 나라요, 불신과 거짓으로 서로를 경계하면 그곳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쑥쑥 자라길 기도합니다. 거짓은 100년이 지나도 진실이 될 수 없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송영진신부-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마르 4,26-29).”
여기서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라는 말씀은,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씨를 뿌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씨를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오순절 날의 성령 강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곧바로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를 했는데,
그들은 그 설교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사도 2,41).”
사도들이 설교를 아주 잘해서 그런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닙니다.
그 일은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사도들은 사람들 마음속에 ‘말씀의 씨’를 뿌렸습니다.
하느님(성령)께서는 사람들을 신앙인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만일에 그 성과에 대해서 사도들이 “우리가 설교를 잘해서 이런 결과를 얻었다.”
라고 교만해졌다면, 그 일은 그것으로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오순절 날 이후의 교회의 성장도 좋은 예가 됩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
“사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믿게 되어,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사도 4,4).”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사도 6,7).”
당시에 사도들과 신자들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해 주는 일도 열심히 했지만,
‘말씀 안에서의 삶’도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그 ‘삶’ 자체도 복음 선포입니다.)
‘복음적인 삶’을 통해서 사람들 마음속에 ‘복음의 씨’를 뿌린 것은
사도들과 신자들이 한 일이고, 그 ‘삶’에 감화된 사람들이
자기 발로 찾아와서 신자가 된 것은 하느님(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가
눈앞에서 생생하게 현실이 되는 것을 체험하면서
큰 기쁨과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과 힘은, 어떤 박해와 고난을 겪어도 굴하지 않는
용기와 인내의 바탕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은 하느님께 맡기고,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씨를 뿌리고, 그 씨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물을 주고,
가꾸고 보살피는 일 등은 사람이 할 일입니다.
그 씨에서 싹이 트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은 하느님께 맡기면 됩니다.
(농사짓기에 좋은 날씨도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맡겨야 합니다.)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 주고,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와 평화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고 ......
그런 일들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고, 사람이 해야 할 일입니다.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면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믿음과 희망을 절대로 저버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천재지변을 미리 예측하고 막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을 때가 많은데,
그런 일을 당할 때 피해자들을 돕고,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함께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
즉 아무것도 안 하면서 하늘만 쳐다본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반대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겠다고 덤벼드는 것은
교만한 것이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0-32).”
‘겨자씨의 비유’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라는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같은 비유입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처음과 마지막의 모습을 대조한 비유이고,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성장 과정’에 초점을 맞춘 비유입니다.)
우리는 ‘겨자씨의 비유’를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내가 지금 심는 씨가 겨자씨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
2) 무슨 씨인지 모르는 경우.
우리는 겨자씨를 심으면 겨자나무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심는 씨가 아무리 작다고 해도
그 씨가 겨자씨이니까 겨자나무가 되는 것에 대해서 놀라지 않습니다.
놀라기는커녕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경우는 예수님께서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생각하면, 무슨 씨인지도 모르고,
큰 나무로 자랄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어려운,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씨를 심는 경우로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어떤 결과가 될지 예상하지도 못했고,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위대한 결과를 얻었을 때, 그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라고 말합니다.
믿음이란, 모르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결과를 알고 있고, 알고 있는 그대로 되는 일이라면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고, 사람의 힘으로는 그 결과를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도 없을 때, 바로 그런 때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믿는다면,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을
망설이지 말고 바로 실행해야 합니다.
(내가 바치는 짧은 기도가, 내가 실천하는 작은 사랑이 큰 결과를 만들어낼지,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지, 인간적인 기준으로는 알 수 없지만,
‘믿음의 기준’으로는 결코 헛일이 아니라고 믿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있는 사람은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실천합니다.)

복음: 마르 4,26-34: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사람은 모른다.
-조욱현신부-
우리가 우리 마음에 좋은 뜻을 품는다면, 그것은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씨가 어떻게 싹이 터서 자라는지 자신은 알지 못한다. 즉 자기 안에 심어져 자라나고 있는 덕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아직 헤아릴 길이 없다. 땅이 은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열매를 맺듯이, 인간도 그렇게 스스로 선행의 열매를 맺는다.
땅이 처음에는 싹을 트게 하고 줄기를 내고 그다음에는 이삭을, 또 그다음에는 이삭에 가득 달린 낟알을 낸다. 아직 약한 싹이지만 좋은 시작이다. 우리 마음에 심어진 덕이 선행으로 발전할 때, 줄기에서 이삭이 패는 것이다. 덕에서 훌륭하고 완전한 행동이 나올 정도로 진보하면 마침내 이삭에 낟알이 가득 달리는 것이다. 그 낟알들이 영글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31절) 겨자씨는 아주 평범하고 하찮은 씨앗이다. 빻으면 그 힘을 드러낸다. 믿음도 처음에는 단순하지만, 역경으로 으깨어지면 그 힘을 발휘하여, 믿음에 관해 읽거나 듣는 사람들을 달콤한 향기로 가득 채운다. 하느님의 말씀은 분노의 쓸개즙을 가라앉히고, 교만의 불꽃을 억누른다. 말씀의 씨앗에서는 커다란 나무와 같이 자라났다. 이 나무는 바로 세상 곳곳에 세워진 교회이다. 이 교회에 하늘이 새들, 곧 하느님의 천사들과 사람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
주님은 겨자씨였다. 그분께서 상처 입지 않은 겨자씨였을 때, 백성들은 그분을 겨자씨로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들이 그분을 아직 눈여겨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려고 잘게 부서지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겨자씨처럼 동정녀의 태라는 정원에 뿌려지신 그분은 십자가 나무로 자라셨고, 그 가지들은 온 세상으로 뻗어 나갔다.
수난의 절구에 빻아진 그분의 열매는 그분과 관계를 맺는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이 맛을 지니고 보존될 수 있도록 넉넉한 양념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빻아짐으로써 당신 안에서 우리 모두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모든 것이 되셨다. 그분은 당신 정원 즉 교회에 씨를 뿌리셨다. 교회는 온 세상으로 퍼져가는 정원이다. 복음의 쟁기로 갈고, 가르침과 규율의 말뚝으로 울타리를 치고, 사도들의 노고로 온갖 해로운 잡초를 제거한 정원이다.
이 정원에 향기롭고 사랑스러운 영원한 꽃들인 동정녀들의 백합과 순교자들의 장미꽃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모든 이의 푸른 풀밭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의 부드러운 초목 가운데 자리 잡은 아름다운 정원이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정원에 뿌리신 겨자씨이다. 그분은 성조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셨고, 예언자들은 싹을 틔웠고, 사도들은 크게 자라게 하였다. 그 씨앗은 교회 안에서는 큰 나무가 되어, 선물 즉 은총을 실은 수많은 가지를 뻗었다. 우리에게 있는 씨는?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난다.(마르 4, 27)
-한상우신부-
어김없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사랑의
일이시다.
사랑은
새롭다.
이 모든 것이
은총이라는
것을 잊고산다.
기쁨은
서두르지
않는다.
의미있는
삶이란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맡기는 은총의
삶이다.
은총의 물살에
우리 삶을
내맡긴다.
맡기는 삶이
자연스러운
삶이다.
자연스러움은
언제나
하느님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자연스러우시고
자유로우시다.
저절로
자라나는
자연스러운
관계처럼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자연스러웠으면
좋겠다.
하느님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는 우리들
삶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라나게 하시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
새싹이
자란다.
시련을 딛고
성장한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시다.
하느님을
믿는다.
그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믿음은
단순하고
믿음의 힘은
강렬하다.
새싹도
열매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사랑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을 일러 줍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6-27)
사람은 씨를 뿌리고 조상 때부터 축적된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밭을 가꿉니다. 그는 자고 일어나고 먹고 마시는 일상을 유지하면서 어느새 쑥쑥 커가는 생명에 놀라고 감탄하며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조력자일 뿐이기에, 그의 앎은 거기까지입니다.
"저절로"(마르 4,28)
이 말씀은 사람 입장에서 보는 현상이고, 실상은 일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가리킵니다. 겸손하신 하느님은 만물 안에서, 만물의 뒤에서 묵묵히 숨어서 일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생명의 기적을 우연이라 치부하거나, 그 공로를 제 것인 양 가로채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생명의 근원에는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그저 주어진 씨를 뿌리고 생명을 돌보며 하느님 나라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커가는 것을 놀라고 감탄하고 감사하며 하느님께 협력하는 것으로 제 몫을 다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혼자 다 하실 수 있는 일임에도 이처럼 사람을 참여시키십니다. 홀로 전능하시고 완전하시면서도 사람 없이 하느님 나라를 이루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어느 씨앗보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고 나면 새들이 깃들 그늘을 드리울 만큼 커진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 형태로 안겨주지 않으시지요. 그 시작은 열매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미소하고 가난하며, 허약하고 초라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믿고 인내하며 기다리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제1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믿는 이들이 희망을 저버리지 않도록 독려합니다.
"여러분의그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상을 가져다줍니다."(히브 10,35)
이 서간을 읽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디어 낸" 이들입니다. 무수한 박해와 핍박, 모욕과 환난, 재산 몰수까지 겪으면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신앙을 지켜내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가는 이들이지요.
"그보다 더 좋고 또 길이 남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히브 10,34)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고초와, 잃은 것들보다 더 고귀하고 값진 것을 바라기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동시에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히브 10,39)
아직 작디작은 겨자씨밖에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미소하고 무가치해 보이는 것밖에 손에 잡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가난을 망연히 바라보자면, 결실 없어 보이는 노력에서 어서 발을 빼어 좀 더 확실해 보이는 길을 찾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까지 비죽비죽 올라올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형체가 없는 듯하고, 그분께서 약속하신 구원은 아직 땅 아래서 움을 틔우느라 몸살을 하는 중이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고 기다리는 우리에게는 믿음과 인내가 절실합니다.
우리는 지금 신앙이 요구하는 가치관과 그다지 화합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욕심에 맞서 주님의 길을 따르기가 때로는 버겁기도 하지요. 아마 이천 년 전 제자들도 그러했을 겁니다.
"당시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마르 4,34)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직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꿋꿋이 인내하고 살아가도록 당신의 말씀을 "따로 풀이해" 주심으로써 각별히 돌보십니다. 겨자씨 앞에서 초조하고 실망하는 마음이 원대한 하느님 나라의 꿈을 잃지 않도록 다정하고 섬세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매일 말씀을 읽고 듣고 머물고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또는 누군가를 통해 그 말씀을 풀이해 주시고, 그 말씀을 통해 당신을 알아듣도록 방향을 잡아주십니다. 작은 씨앗에서 하느님 나라를 보는 마음의 눈을 키우시는 동시에, 작은 씨앗에 불과한 우리가 하느님 나라가 되도록 일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성장에 기여하고 협력하면서, 우리 자신이 하느님 나라로 성장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가 비록 지금은 가난하고 미소하고 허약해도, 무수한 영혼에게 그늘을 드리워 주는 하느님 나라로 성장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분께서 지치지 않고 우리를 돌보시니, 희망을 놓지 말고 끝내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시길 축원합니다. 반드시 그리되리라 믿습니다. 아멘.

자신은 없어도 확신이 있는
-김찬선신부-
며칠 전 어떤 분과 영적 대화를 나눴습니다.
저를 찾아와 영적 대화를 청한 이유가 당신이 살아가면서 점점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있는 것이 자기기만이 아닌지 의심이 가고,
이렇게 살고있는 것이 잘살고 있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며
정말 행복하고 정말 기쁘냐고, 확신이 있냐고 물으시는 거였습니다.
정말 행복하고 기쁘냐고 묻는다면 자신이 없지만
분명 행복하고 기쁘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행복하고 기쁘다고 대답할 수 없다면
행복하지 않은 것 아니냐고 다시 질문하시는 거였습니다.
제가 그렇게 대답한 뜻은 지금까지의 나는 분명 행복하고 기쁘지만
지금처럼 계속 살아도 미래에 제가 행복할지 자신이 없다는 뜻이고,
미래 아무런 힘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병까지 들었을 때도
행복해야 정말 행복한 것인데 그것은 아직 자신이 없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자신은 없어도 확신은 있습니다.
내가 그럴 자신은 아직 없어도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행복할 거라는 확신은 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여러분은 또한 감옥에 갇힌 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재산을 빼앗기는 일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보다 더 좋고 또 길이
남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그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 말씀처럼 어떤 환난을 겪고, 가진 것을 다 잃고, 욥처럼
이제 몸마저 너무 괴롭게 되어도 그 어떤 것보다 더 좋고 길이 남는 것을
제가 가지고 있다면 행복할 거라는 확신은 제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지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이 참 행복의 길이라는 확신은 있다는 말인데
사실 이것이 정상이고 맞는 말입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가르침도 이런 뜻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나의 자신 없음 때문에 확신을 버리지 말라는 뜻 말입니다.
자신自信이라는 말이 말 그대로라면 자기에 대한 믿음이니
이런 자신이 없는 것은 마땅하다 할 것이고,
그러니 자신은 없고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으면 될 것이며,
이 믿음은 확고해야 하고 그래서 자신 없음 때문에
이 확신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4,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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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어제 ‘등불’이 있는 공동체의 필요성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빛은 진리입니다. 공동체마다 진리를 품은 정도가 다릅니다. 그런데 그 진리는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따라서 어떠한 공동체에 어느 만큼의 진리가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장에도 차이가 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진리와 은총이 충만한 공동체에 머물면 저절로 성장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 말씀도 오직 당신의 제자들에게만 따로 풀이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머물면 그 충만한 진리로 사람이 성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장은 땅에서 하늘로 오르는 과정입니다. 본래 있던 자리에서 탈출하여 자신에게 햇빛과 물을 주는 하늘로 향하는 과정이 성장입니다. 하지만 세속-육신-마귀의 본성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은 이들은 여전히 그것들을 주는 스마트폰에 머리를 들이박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유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도 각자의 독방에서 힘든 고독에 지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공동체 안에는 그 공동체를 유지하는 등불이 있습니다. 이 등불은 진리이고 뜻입니다. 그 뜻이 자기 자신을 이기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 공동체에 머무는 사람은 성장할 수 있습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자기 손해이고 세상의 피해입니다.
사람이 왜 꼭 성장하고 성숙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행복’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다면 할 말은 없지만, 행복해지고 싶다면 나를 성장시켜 줄 진리의 빛, 좋은 뜻이 지배하는 공동체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뜻은 ‘사랑’입니다. 인간 육체적 본성과 반대이기 때문에 올바른 성장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등불인 공동체에 머물면 자신도 저절로 성장하게 되고 행복도 함께 증가하고 주위 사람들도 함께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가장 완전한 공동체가 가톨릭교회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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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잘 자라도록 응답하고 협조할 때라야 비로소 건설되는 나라입니다. 곧 씨앗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서만 성장하고 자라나고 꽃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말합니다.
“성경(말씀, 하늘나라)은 읽는 이(응답하는 이) 안에서 자란다(성장한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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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는 과정 중에 있으며 희망과 완성을 향한 과정에 있습니다...하느님 나라는 매일 이루어지고 성령께 대한 순응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그러므로 기회가 좋든 나쁘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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