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월 28일 연중 제3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1. 1. 28. 08:08

2021 1 28일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1225년 무렵 이탈리아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몬테카시노 수도원과 나폴리 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대 알베르토 성인의 제자가 되었다. 1245년부터 파리에서 공부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3년 뒤 독일 쾰른에서 사제품을 받고 그곳 신학교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철학과 신학에 관한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겼는데, 특히 ??신학 대전??은 그의 기념비적인 저술로 꼽힌다. 1274년에 선종하였으며, 1323년에 시성되었다.

☆☆☆ 

등불은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는다

내 말을 마음에 새겨들어라
(마르 4,21-25)

 

 "Is a lamp brought in to be placed under a bushel basket
or under a bed, and not to be placed on a lampstand?

"Take care what you hea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히브리서에는 “확고한 믿음”과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하는 것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 곧 신앙이 희망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우리 신앙의 내용인 하느님 없이 사는 것은 계속 어두운 세계 안에 머물고 우울한 미래를 마주하는 것과(「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2항 참조) 같다고 하십니다. 오늘 독서인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진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간직하며 살아가고자 서로 도와주며 격려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당신의 백성이 될 것을 약속하시고 우리 또한 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구원으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가 우리에게 권고하듯이 서로 격려하고 염려해 주어야 합니다. 믿음과 희망을 온전히 간직하려면 우리는 사랑과 선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혹시 다른 이들을 위한 애덕의 실천 없이 신앙생활을 통한 개인적인 구원만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를 구원하시고자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며, 또한 교회 안에서 당신 백성의 한 사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서로 연결되고 일치를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만을 위한 구원을 생각하지 않으시듯이 우리 또한 나만을 위한 예수님으로 차지하려 하지 말고, 다른 이들과 함께 주님 구원의 초대에 응답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애덕을 올바르게 실천하며 이웃에게 다가간다면 마치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오늘 복음 말씀처럼 우리의 올바른 신앙과 희망은 다른 이들을 환히 비추는 등불과 같고, 우리는 주님의 은총을 더욱 풍요롭게 받아 기쁘게 살아갈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금은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 장한나는 어린 시절부터 ‘첼로의 신동’으로 불렸었습니다. 특히 1994년 세계 3대 콩쿠르로 꼽히는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하여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의 나이가 12살. 어린 장한나에게 첼로의 거장 로스트로포비치가 이런 메모를 건넸다고 합니다.


“한 달에 네 번 이상 연주하지 말기. 음악 안 하는 친구들이랑 열심히 놀기. 학교 열심히 다니기.”

장한나는 거장의 말을 충실하게 따랐습니다. 사실 이해 안 되는 말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더 열심히 연주하고, 같은 공감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음악 안 하는 사람 만나는 것보다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놀 수 있겠습니까? 학교도 다니지 않으면서 연주 연습에 매진하는데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만약 이렇게 했다가는 그녀는 어느 순간 첼로에 흥미를 잃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일로 첼로를 만나서 늘 커다란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거장의 메모는 그녀를 계속해서 음악을 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첼로 거장의 말이 장한나를 더 성장시켰듯이, 우리를 성장시켜주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오히려 세상을 사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등경 위에 올려놓는 등불처럼, 감추어진 것을 환하게 드러나게 합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게 되면, 그냥 그 자리에 머물지 않게 됩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4)

이 말씀처럼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른다면 더 많은 은총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입니다. 영원한 만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만족만을 찾고 있습니다. 세상에 밝게 드러내야 할 주님의 말씀을 함지나 침상 밑에 놓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성장시켜주는 말씀이며, 더 보태주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라야 합니다. 결코 손해 보지 않습니다. 주님 말씀에 기쁨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조급히 굴지 마라. 행운이나 명성도 일순간에 생기고 일순간에 사라진다. 그대 앞에 놓은 장애물을 달게 받아라. 싸워 이겨 나가는 데서 기쁨을 느껴라(앙드레 모로아).


지금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하루에 5km 이상을 걷습니다. 묵주기도를 하며 걷는 시간인데 제게는 너무나 유익한 시간입니다. 분명히 누워있거나 의자에 앉아 있는 것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걷기이지만, 집에 돌아와 샤워하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최고의 휴식이 산책이라고 했나 봅니다. 또 어떤 이는 ‘앉은 곳을 벗어나는 것이 휴식이다.’라는 말도 했습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휴식 같지만 사실 가만히 있으면 더 피곤함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움직여야 진정한 휴식 체험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의 문제도 그렇지 않을까요? 아무런 문제도 없고, 어떤 어려움도 없다면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더 힘들어질 것입니다. 오히려 행복함을 느끼는 사람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어느 공동체든 각자가 가진 진리의 한계가 있다

-전삼용신부-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빛’은 구원의 진리입니다. 만약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네 명의 친구들이 구원의 진리가 없었다면 중풍 병자를 잘못된 곳으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진리는 분명 죄의 용서로 이끄는 이정표와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진리를 찾으려고만 하면 언제든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예수님은 당신 구원의 진리를 감추시지 않고 원하는 누구에게나 알려주십니다.

다만 ‘공동체’에 묶여 있는 것이 이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 공동체는 유리벽이 있어서 그 진리의 빛이 통과하는 양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신천지라는 공동체에 속해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이만희 총재가 그리스도의 진리를 하도 많이 가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아무리 똑똑해도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이만희 씨가 강대상에서 똥을 싸고 내려와도 사람들은 그 엄청난 진리를 주제로 토론하고 무언가 깨우치려고 노력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혹은 개신교에 있다면 성체성사나 고해성사와 같은 진리를 깨우칠 수가 없습니다. 그 진리를 믿는 즉시 공동체를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각 공동체는 그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둥이 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와 멀수록 빛을 감소하게 만듭니다.

 

      개신교 목사로서 33세에 최연소 광주지역 노회장(천주교로 치면 주교님과 비슷한 위치)이 되었다가 지금은 천주교로 개종한 김재중 요셉 형제가 있습니다. 그분이 노회장을 할 때는 죽었던 사람까지 되살아날 정도로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연봉이 박정희 대통령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그는 원래 천주교를 마리아 숭배교라 부르며 싫어했습니다. 성당에 성모상이 있는 것은 마치 성전에 바알 우상이 세워진 것처럼 끔찍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는 그러던 중 병이 들어 잠시 노회장 일을 쉬게 되었습니다.

 

      이때 삼위일체 신비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성모송을 듣고는 그만 까무러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렇게나 끔찍하게 여기던 성모님을 향한 천주교의 그 짧은 기도 안에 삼위일체 신비가 다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성모송은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도문입니다. 그래서 믿을 수 있습니다.

 

“은총이 가득 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삼위일체 신비를 공부하던 중이라 당연히 ‘은총’은 인간의 죄로 끊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께 그 은총이 가득하다고 인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수백 번 읽었지만 성모님이 그래서 원죄가 없으시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니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가 없는데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께서 하느님과 함께 계신다고 말해줍니다. 이것은 성모님께서 원죄가 없으시다는 확실한 증거지만 개신교 공동체 안에서는 이 진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아버지와 함께 계시면서도 성령으로 성자를 잉태하셨으니 자신이 그렇게 저주하고 돌을 던지던 성모님 안에 삼위일체 하느님이 다 존재하고 계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느님을 모신 성모님께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닫고 나니 뒤집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진리를 받아들이려면 개신교 공동체를 떠나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받고 있던 모든 명예와 재물과 편안한 삶까지 다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냈습니다. 그랬더니 교회에서 받는 모든 지원이 끊겼고 곧바로 실업자가 되었으며 이젠 개신교 신자들에게 미움과 질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가톨릭교회에서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며칠을 굶고 난 뒤 너무 허기가 져 남의 집 개밥을 훔쳐 먹다가 개에게 손을 물려 고생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개종에 성공하였고 파티마 성모의 푸른 군대 회장직을 맡을 정도로 충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성 바오로 성당에 가면 유리가 얇은 대리석으로 되어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리 대리석을 얇게 잘라서 창문을 했더라도 일반 유리보다는 빛이 들어오는 양이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당 안은 컴컴합니다.

공동체는 이런 벽들로 둘러쳐진 집과 같습니다. 어떤 공동체는 더 두꺼운 창문으로 둘러쳐져 있어서 진리의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눈이 있어도 장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그런 공동체에서 노력하는 것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바꾸는 것이 우선입니다.

      로버트 기요사키 씨는 아빠를 바꿔서 성공했습니다. 가족도 공동체입니다. 그의 책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서는 그의 두 아버지가 나옵니다. 친아버지는 공무원으로 열심히 일하는데 항상 가난했고, 친구의 아버지는 배운 것이 없는데도 돈의 원리를 알아 부자였습니다. 그는 친아버지가 공부 열심히 해야 잘 살 수 있다는 진리를 버리고 돈이 돈을 벌게 만들라는 친구 아버지의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랬더니 부자가 되었고 그래서 이런 책을 쓴 것입니다.

 

      공동체마다 품고 있는 진리가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공동체에 속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깨닫게 되는 구원의 진리의 정도도 달라집니다. 좋은 공동체를 가지면 더 좋은 진리를 깨우칠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먼저 좋은 공동체를 갖기 위해 나 자신을 내어줄 수 있다면 더 많은 진리를 깨우치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이 말씀을 인용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공동체, 반드시 그 공동체에 속해야 더 많은 진리를 깨우치게 됩니다.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여러 작은 공동체들이 있고 그 공동체가 품고 있는 진리의 양이 각기 다릅니다. 내가 어느 공동체에 속해있는지 잘 살피고,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조재형신부-


오늘은 제가 들었던 강론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지난 1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의 강론입니다. “한해를 시작하면서 성모님께 봉헌하고 싶은 분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코로나19의 현장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의료진들 봉헌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그분들의 수고와 노력이 있기에 많은 분들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어려운 여건에서도 신앙생활을 하는 교우들을 봉헌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체온을 재고마스크를 쓰고거리두기를 하면서도 영상으로 미사에 참례하고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주는 교우들이 있었습니다불편함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코로나19의 희생자들을 봉헌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성모님께서는 수고한 모든 이들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을 안아주셨던 것처럼 희생된 모든 분들을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해 주실 거라고 하였습니다강론을 마치면서 2020년에 돌아가신 교우들의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저도 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며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첫 번째는 희망입니다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는 이유는 가을에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어두운 밤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것은 다음날 태양이 다시 떠오른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희망은 어딘가로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희망은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희망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입니다두 번째는 사랑과 선행입니다예수님께서는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같은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원수까지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수난과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랑입니다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열정적으로 하는 사랑입니다세 번째는 격려입니다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매일 칭찬받는 꽃은 더 아름답게 핀다고 합니다매일 칭찬받는 소는 더 많은 우유를 만든다고 합니다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다는 자캐오를 칭찬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망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낮기를 원하느냐?, 믿느냐구하여라얻을 것이다두드려라열릴 것이다찾아라줄 것이다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찾고 구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신앙은 결단이고신앙은 갈망을 통해서 성장합니다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로 나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하느님께서는 넘치도록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그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얻으리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이영근신부-


어제 <복음>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는 말씀이 ‘씨앗’에 비유되었다면, 오늘 <복음>인 ‘등불의 비유’에서는 말씀이 ‘등불’에 비유됩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 4,21)

 

여기에서, ‘등불’은 하느님 말씀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곧 ‘말씀’이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함지’는 영혼의 능력을, ‘침상’은 몸을, ‘등경’은 거룩한 교회를 표현한다고 해설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은 세상 만민을 비추고, 진리의 빛으로 집 안에 있는 이들을 밝히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거룩한 지식으로 채우게 된다.”

 

말씀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아두지 말라는 말씀은 “함지”(루카; 그릇)인 우리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덮거나, “침상”인 우리의 몸으로 말씀을 가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을 자기의 능력이나 몸으로 가두지 말고, 오히려 드높이라는 말씀입니다.

‘산상설교’에서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의 사명을 ‘세상의 빛’ ‘산위의 마을’(5,14)에 비유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세상의 빛이 되고 산 위의 마을이 되어 비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마르 4,22)

 

물론, 빛 아래서는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되므로 거짓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빛이 되어 우리를 비추고 하늘나라의 신비는 드러날 것입니다. 세상을 환히 비추고, 빛과 진리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깊이 새겨듣도록 촉구하십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3)

 

이 말씀은 중요한 말이니, 그 의미를 깊이 새겨들으라는 각성의 촉구와 경고입니다(마태 11,15;13,9;루카14,35). 또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5)

 

사실, 우리는 그릇만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릇이 비워진 만큼 받게 됩니다. 사실은 나누는 만큼 비워지는 것이니, 결국은 나누는 만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나누어주면 나누는 것보다 더 보태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마르 4,25)

 

이는 나누는 것이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결국 베푸는 사람은 베풀수록 더 많이 받고 덤까지 받지만, 베풀지 않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잃게 될 것입니다(마태 13,12;25,29;루카 19,26). 그처럼, 말씀을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씀의 등불은 거룩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진정, 말씀의 비추임을 받은 영혼은 더욱 더 많은 열매를 맺고, 더 밝게 빛날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마르 4,21)

 

주님!

말씀을 제 안에 가두어 두거나 제 발 아래에 두지 않게 하소서.

제 한량한 능력으로 당신 말씀의 권능을 덮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보다 아무 것도 낫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의 빛으로 살고, 빛에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소서. 아멘

 어둠을 탓하기보다 등불이 되어라

 -반영억신부-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야 제대로 비출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는 사실을 제대로 활용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이 빛나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이 깊을수록 우리의 소명은 더 커집니다. 그러나 어둠을 탓하며 절망하는 이도 있습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등불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말씀으로 준비하는 이가 참 신앙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4.16).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면 그 기운이 이웃에게 전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기운이 감싸면 악한 기운은 서서히 떠나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히브10,22).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빛’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령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4,25)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말씀을 믿고 행하는 사람은 풍요로워지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믿음을 잃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간수 하지 않는 것은 곧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우울해하며 남을 비판하고 불평불만 하면서 아무런 생산적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움켜쥐면 빼앗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먼저 주면 빼앗길 것이 없습니다.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무엇이든 먼저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고, 주지 않는 사람은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쌓아 놓았다 할지라도 이웃과 나누지 못하면 그것은 있으면서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부유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부자가 되어서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차고 넘치도록 받으시고 이웃과도 잘 나눌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것 하나를 장만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통해 우리의 삶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추기경으로 서임 받을 때의 일입니다. 로마에서 있었던 서임식에 참석하여 축하하기 위해 로마로 가려고 한 지인에게 “비싼 돈 들여 나를 보러 오지 말고, 그 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해 주세요.”하였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히브10,24). 마무리하겠습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4,24).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등불의 비유

 -송영진신부-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 4,21)”

 

이 말씀은, “자신의 신앙을 감추지 말고, 적극적으로 증언하고 고백하여라.”

라는 계명입니다.

신앙을 감추는 것은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는 것은 ‘배교’입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자신의 신앙을 말과 ‘삶’으로 증언하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증언하고 고백함으로써 더욱 단단해지고 깊어집니다.

그러나 감추면, 점점 희미해지다가 사라집니다.

결국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여기서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피난처’, 또는 ‘안식처’를 뜻합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라는 말씀은,

교회는 세상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안식처)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그 피난처(안식처)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 피난처는 신자들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곳입니다.

여기서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착한 행실’이라는 말은,

믿음, 희망,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신앙생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떤 고난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희망,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주는 사랑.)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해 주는 신호등 같은,

또는 등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라는 계명입니다.

혹시라도, “그냥 나 혼자서 죄 안 짓고 조용히 신앙생활 하면 안 되나?”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답은 “안 된다.”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1코린 13,2).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사랑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1요한 4,8) 믿는 신앙에서 사랑이 빠지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 아니면 대체 뭐냐?”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텐데,

그것은 그냥 머리로만 생각하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고, 그 생각이 믿음인 것은 아닙니다.)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2).”

 

이 말씀은 다음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복음을 숨기지도 말고, 감추지도 마라. 적극적으로 선포하여라.”

마태오복음을 보면, 이 말씀 뒤에 다음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

그리고 이 말씀은 다시,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복음 선포는 모든 신앙인의 기본 사명입니다.

 

2) “너희가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온 세상에 전해지는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복음 선포에 동참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자기 몫을 차지하겠지만,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은 차지할 몫이 없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진행되다가

언젠가는 완성될 것입니다.

그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다면, 지금 동참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8-29).”

이 말씀을, 현세에서 누리지 못한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는 약속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런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얻어 누리기를 바란다면,

적극적으로, 또 능동적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라는 말씀은,

“흘려듣지 말고 ‘온 삶으로’ 실천하여라.”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4).”

 

이 말씀은, “뿌린 대로 거둔다.” 라는 속담을 조금 바꿔서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공평하고(차별이 없고), 무한하고, 영원합니다.

그러나 능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만 그 은총을 자기 것으로 만듭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은총을 주시는데도 자기가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고,

사랑을 실천하고,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고,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하고,

...... 이런 일들은 주시는 은총을 잘 받아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 4,25).”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더욱 풍성하게 은총을 받겠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받은 은총도 잃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무슨 앙갚음을 하듯이 그렇게 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각자 자기 자신이 그런 결과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복음: 마르 4,21-25: 등불은 등경 위에 둔다

 -조욱현신부-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21절) 지혜의 등불은 감춰두지 않고, 사용하여 보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아무리 좋은 우물이라도 물을 퍼주어야 맑은 물이 솟아나지만, 아무도 물을 긷지 않으면 우물은 더러워진다. 쇠도 사용하면 빛이 나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슨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훈련을 통해 거룩한 옷을 입게 된다고 하겠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산 위의 마을이라고 하셨다(마태 5,14 참조).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고, 구렁텅이에 빠진 이들을 위하여 우뚝 서도록 부름을 받았다. 등불을 함지 속에 숨겨 둔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 있게 되고 사람들이 와서 부딪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등불의 구실을 제대로 못 하게 된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선행이다. 선은 참되고 충만한 것으로 어둠을 사랑하지는 않는다(요한 3,21 참조). 선은 드러나는 것을 즐거워하고 눈에 띄는 것을 기뻐한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나서지 않는 것을 좋아하지만,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선은 그 자체로 확산성이 있기 때문이다. 선은 그냥 퍼져 나간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24절) 내가 하느님께 받은 만큼 청하는 이에게 자비를 되돌려 주는 것만큼 정당한 일은 없다. 가난한 형제에게 베풀어야 한다. 그 형제는 그리스도이시다. 형제에게 주는 것은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며, 영원히 찬미 받으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는데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겠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주신 것을 우리가 베풀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베푼다고 하는 것 가운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지닌 것 가운데 하느님께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인가를 줄 때, 그것이 우리의 것인가? 우리는 우리에게 주라고 명령하시는 분의 것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착취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5절) 우리가 들은 말씀을 온갖 노력을 다하여 기억하고 연구하고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말씀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지력이 주어지겠지만,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타고난 재능이나 학문을 통하여 그 뜻을 이해하는 것 같이 보이더라도, 참된 지혜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가졌는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겨도 무엇을 빼앗겼는지 알지를 못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마르 4, 21)

-한상우신부-


빛을 밝히는
등불이 있다.

등불은
등불의
길이 있다.

등불의 소명은
서로를 밝히는
사랑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이 어둠을
빛으로
바꿀 수 없다.

사랑이
미치지 않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사랑 아닌 것이
없다.

사랑이
빛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기까지
사랑이 필요했다.

하느님 사랑은
기다림의
빛이었다.

그 사랑을
믿지 않았다.

사랑의 등불은
사랑을 담을
믿음의 등경을
필요로한다.

하느님
사랑 안에
너와 내가
살고 있다.

사랑은
아프고
사랑은
기쁘다.

이걸 모르고
살았다.

환하게
밝히는
사랑 앞에서
회개의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우리가
잃어버리고
우리가
감춘 것이

희생하는
사랑이었음을
다시 깨닫는다.

이것이
우리의
길이다.

등불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복음이다.

타오르는 삶이
십자가의 삶이다.

등불의 삶으로
사랑의 발자국을
남기신
예수님이시다.

뜨거운 사랑이
겨울과 봄을
이어주고
나와 너를
공동체로
살게한다.

참된 사랑은
어디에 있어도
사랑이 된다.

사랑이
오늘을 다시
환하게
밝히고 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에 확신을 가지라고 우리를 격려합니다.

"주님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저의 길을 밝히는 빛이옵니다."(복음 환호송)

시편 119편의 한 구절이 복음 말씀을 듣는 우리 마음을 준비시켜 줍니다. 어두운 밤, 먼 길을 나선 우리는 오로지 손에 들고 있는 등불에 의지해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순례길을 걷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말씀은 우리 발이 어느 지점을 디뎌야할지, 어느 길을 따라 걸어야할지 밝혀주는 등불입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겠느냐?"(마르 4,21)

어둠이 오면 집 주인은 등불을 켜서 집안을 두루 비추는 자리에 놓고 꺼지지 않게 마음을 씁니다. 등불은 어둠을 밝히기에 가장 효율적인 위치에 놓이게 마련이지요.

심지를 정돈하고 기름까지 채워서 불을 붙인 등불을 숨길 이유는 없습니다. 게다가 등불이 설령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여도 일렁이는 빛까지 막을 수는 없지요. 어둠이 짙을수록 빛의 존재감은 더 강렬해집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4)

주님께서 주신 말씀은 자기 혼자만을 위해 간직하는 사유물이 아닙니다. 말씀을 자기 안에 가둬두는 것은 등불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는 것과 다를 바 없지요. 말씀에 머물러 기도하고 사유하는 이에게는 말씀의 빛이 새어나옵니다. 말씀의 속성이 등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리라.' 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저 묻어만 둘 수 없는 말씀의 속성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빛처럼, 향기처럼, 때로는 천둥처럼 세상을 향해 울리고 퍼져 나가야 합니다. 말씀 안에는 구원을 위한 생명력과 역동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가오신 말씀을 기도 안에 녹여내어 이웃과 나누고, 또 그 말씀을 실천으로 옮겨 사랑과 자선으로 나눕니다. 말씀이 우리를 통해 육화되어 자신과 타인에게 구원이 되는 원리입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마르 4,25)

이 또한 말씀에 머물러 사는 영적 삶의 속성입니다. 나에게서 자라 열매를 맺은 말씀은 누군가를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물이 되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족해도 말씀은 우리와 함께 자라납니다. 우리 존재 안에서, 관계 안에서 순환하고 성장시키고 완성시킵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 구원에 확신을 가지리고 격려합니다.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히브 10,20)

주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소에 들어가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 우리에게 열린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이심을 선포하셨지요.(요한 14,6 참조)

그분은 당신의 몸과 피로 길이 되어 주시고, 길을 걷는 우리를 말씀의 등불로 비추어 주십니다. 그분은 구원의 길에 들어선 우리를 온통 감싸 안고 함께 가십니다.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히브 10,22)

말씀은 우리 존재의 구석구석을 비추는 빛이십니다. 그분 앞에 감추어진 것은 하나도 없지요. 우리 안의 가장 미소하고 나약한 부분까지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 동행하시니 우리는 구원에 확신을 가져도 좋습니다. 
"약속해 주신 분은 성실하신 분"(히브 10,23)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말씀으로 초대 받아, 매일 말씀을 접하고, 말씀 안에 머물러, 말씀을 사랑하며, 말씀을 나누고 실천하는 우리 모두는 복됩니다. 막을 수 없는 세월 속에서 언젠가 건강도 재물도 관계도 사라질 터이지만, 말씀은 더 깊고 더 짙고 더 찬란히 우리 영혼에 남아 아름답게 빛날 것입니다. 우리가 간직한 말씀의 빛이 곧 주님의 빛이니, 구원은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습니다.

말씀과 함께 구원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말씀의 빛 속을 거니는 행복한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나?

-김찬선신부-

말씀 나누기 - 연중 3주 목요일-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나? (ofmkorea.org)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월 31일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