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1월 13일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0. 11. 12. 06:27

2020 11 13일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들어 두어라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누워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
루가 17,26-37)

 

I tell you, 
on that night there will be two people in one bed;
one will be taken, the other left.
And there will be two women grinding meal together;
one will be taken, the other lef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구약 성경이 전하는 노아의 방주나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는 모두 죄에 따른 심판으로 재앙을 묘사합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생각과 일만을 일삼았고, 이에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창조물을 없애 버리시기로 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노아 때에 물로, 소돔에는 불로 그들의 죄를 심판하십니다.
두 이야기에 공통점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심판을 위하여 재앙을 내리시지만 노아와 롯을 구원하신다는 점입니다. 재앙 가운데서도 의로운 이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오늘 복음도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 가운데에 예고 없이 심판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제자들은 ‘어디’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지 예수님께 여쭙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죄와 악이 가득한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사람들의 모습을 반복하여 묘사하는 오늘 말씀은 일상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에서 죄와 악을 피하고 선과 정의를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루카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고해성사 보속이 아주 특이한 어느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신부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보속을 주신다고 합니다.

“시장에 한 시간 동안 있으십시오. 병원에 1시간 동안 돌아보고 오십시오. 공동묘지에 한 시간만 앉았다 오세요.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서 1시간만 봉사해 보세요. 장애인 집에 가서 1시간 동안 봉사하십시오.” 등등의 보속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모두에게 이런 보속을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움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 주는 보속이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자리에서 만족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가장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불공평한 것만은 아닙니다. 힘든 삶 안에서도 커다란 행복으로 기쁨을 외치는 사람도 얼마나 많습니까?

이를 위해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앞선 신부님의 보속 의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만을 바라보면 힘듦의 기준을 제대로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이웃을 먼저 바라보고 또 사랑을 실천하면서 나를 다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때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심판이 갑작스럽게 나타난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십니다. 그때를 위해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길을 제시해주십니다. 노아의 홍수,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이야기하시면서 심판 날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옥상에 있는 이는 아래로 내려가지 말라는 것은 영적인 삶에서 육적인 삶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뜻입니다(집 안에 있는 세간을 챙기러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두지 말라는 것). 들에 있는 이들은 그곳에 계속 머물러야 합니다. 그들은 지금 하느님의 말씀을 씨 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계속하며 손에서 쟁기를 놓지 말아야 합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고 뒤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 여자는 자기 재산이 다 타 버린 소돔을 돌아다보았다가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영적인 삶에 집중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라는 것, 그리고 세상 것에 미련을 두고 뒤돌아보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만을 기준으로 내세우면 그 말씀이 와닿을 수가 없습니다.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 사건, 그 밖에 성경에서 언급된 모든 말씀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에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최후의 심판이 그렇게 두렵지만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한 것과 생각해야 할 것이 길이 되어 주었다(천양희).


시대의 흐름 따라가기

현재 대기업의 임원으로 있는 친구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퇴직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제 겨우 50이 넘었는데, 벌써 퇴직 준비를 해?”

“요즘에는 40대 말이나, 50대 초가 되면 눈치껏 퇴직을 해야 해. 그래서 ‘사오정’이라는 말도 있잖아.”

그래도 아직 퇴직하기에는 너무 젊지 않냐고 묻자, 세상이 너무 빨리 바뀌어서 나이가 들수록 따라갈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제 ‘노땅’소리를 듣는다고 하더군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면 은퇴할 수밖에 없는 이 사회를 보면서, 교회 역시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하셨지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시대에 딱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주님도 이렇게 시대에 맞게 활동하시는데 교회 안에서 우리는 어떤가요? 더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시대의 흐름에 맞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살아있는 '시체'가 안 되려면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심판, 혹은 죽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나 세상의 심판을 ‘사람의 아들의 날’이라고 칭하십니다. 아마 당신께서 ‘심판관’으로 우리 각자 앞에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일이 어디에서 일어날 것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여기서 ‘시체’는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가리키지 않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시체의 삶과 생명의 삶과의 차이점을 알고 결코 시체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체에게 독수리가 언제 내려와도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죽음 앞에서 시체의 삶을 살아왔던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고 당황스러워할 것입니다.

      1977년 4월 20일 대낮에 쇠망치로 장정 4명을 죽인 사건이 광주 무등산에서 일어났습니다. 살인자는 무등산 타잔이라 불리던 ‘박흥숙’이었습니다. 박흥숙은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형도 안타까운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박흥숙은 중학교 수석 입학을 했지만, 외할머니, 어머니, 여동생, 남동생 둘을 책임져야 했던 작은 가장으로서 공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흥숙은 무등산 중턱에 작은 움막을 짓고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구청 철거 일용직 7명이 들이닥쳐 집을 부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까지 지르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다시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박흥숙은 당시 23세였고 고학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한 상태였습니다. 오갈 데 없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 제발 불만은 지르지 말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집을 짓지 말고 땅속으로 들어가 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불을 질렀고 3년 동안 가정부를 하며 모아둔 어머니의 돈 30만 원까지 타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실신하였고 여동생은 반항했습니다. 박흥숙은 저들도 자신들처럼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며 어머니와 여동생을 위로하였습니다.

 

      박흥숙은 아프신 할머니들이 사시는 다른 움막들엔 불을 지르지 말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차 없이 모든 움막에 불을 질렀습니다. 가난한 이웃이었던 노인들이 그렇게 당하는 것을 보고 그는 육박전으로 그들을 막았습니다. 박흥숙은 철거반원들보고 노인들에게 사과하라고 했습니다. 철거반원들은 “법대로 하는데 사과는 무슨 사과야!”라며 그들을 무시하였습니다. 박흥숙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들이 들고 온 쇠망치로 범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철거를 지시했던 정부는 불을 지르도록 지시한 사실을 일절 밝히지 않게 하고 박흥숙을 남의 돈을 빼앗아 광주에 집을 세 채나 소유한 깡패로 묘사하도록 언론을 조작하였습니다. 박흥숙은 자신에게 피해를 본 이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하고, 잠잘 곳이 없어서 남의 집 화장실이나 처마 밑을 찾아본 사람만이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할 것이라 말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참조: ‘망치로 성인 4명을 때려 눕힌 무등산 타잔 박흥숙’, SBS NOW; 꼬꼬무 7화]


      사실 그날 사망한 철거반원들도 박흥숙도 모두 시대의 피해자라 할 수 있습니다. 철거 반원들도 살기 위해 한 행위였습니다. 처음 박흥숙은 박해받는 사람으로서 죽어 있었으나 자신이 살아나서 그런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끝까지 죽어있었다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나면 ‘시체’가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시체가 되면 살아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 눈에 살아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고, 세상에서 산 사람은 하느님 눈에는 시체입니다.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이란 것 자체가 세상에서 죽는 유일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살아있는 사람은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죽음이 갑자기 다가오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체의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구약의 두 사례를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노아의 홍수’이고 하나는 ‘소돔의 멸망’입니다.

      노아는 홍수 때 홍수가 나자 노아는 침착했고 다른 이들은 당황했습니다. 노아는 어떻게 침착할 수 있었을까요? 이미 죽어있었기 때문입니다. 홍수가 언젠가 닥칠 것으로 예상하여 세상에서 죽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며 홍수가 들이닥칠 때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습니다.

 

      또 하나는 소돔의 멸망 때입니다.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은 두 천사의 도움으로 소돔이 곧 멸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돔 땅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 위에 유황불이 불타고 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롯의 아내처럼 세상 것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나 세상 것을 섬기는 사람이 시체입니다. 시체에겐 심판이 도둑처럼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오늘이 절대 마지막 날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체에게 독수리라는 죽음이 갑자기 내려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세상에서 죽읍시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라고 말합니다. 남들이 보기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죽음으로 보이나 우리에겐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하루에도 “나는 죽었습니다”를 수없이 반복해보십시오. 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비로소 시체의 삶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미주 가톨릭평화신문에 전영준 바오로 신부님의 영성신학에 대한 글이 10회에 걸쳐 연재되고 있습니다영성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글을 보내주신 전영준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10월 18일 지면에는 정화조명일치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정화조명일치를 성서의 말씀으로 해석하였습니다정화조명일치는 영성의 과정입니다. “악을 피하고선을 행하고평화를 찾고 또 추구하여라.”(시편 34,15) 정화의 단계에서 악을 피하고조명의 단계에서 선을 행하고일치의 단계에서 평화를 찾게 된다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정화의 단계에서 자신을 버리고조명의 단계에서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하며일치의 단계에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합니다향주삼덕(向主三德)을 통해서 이해하기도 하였습니다정화의 단계에서 믿음으로 악을 멀리하고조명의 단계에서 희망으로 덕행을 실천하며일치의 단계에서 사랑으로 선을 실천하다고 말합니다정화의 단계에서 믿음으로 악을 행하면 벌을 받을 것을 생각하여 악을 피하고조명의 단계에서 희망으로 선을 행하면 상을 받게 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육신과 세상의 쾌락을 피할 것이며일치의 단계에서 사랑으로 자신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열정을 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정화조명일치의 단계를 운전면허 시험을 통해서 해석해 보았습니다정화는 필기시험과 같습니다교통법규를 이해해야 합니다교통신호를 이해해야 합니다교통법규와 신호를 모르고 운전하면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자동차는 사용법을 알면 편리한 이동 수단이 되지만사용법을 모르면 사람을 해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조명은 실기시험과 같습니다수영은 이론만 알아서는 수영을 잘 할 수 없습니다직접 물속에 들어가서 해봐야 합니다직접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감독관으로부터 검증을 받습니다신호의 준수법규의 준수주차능력을 인정받아야 합니다필기시험을 합격했어도 실기시험에서는 떨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치는 운전면허증과 같습니다실기시험에 합격하면 운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운전면허증은 자격을 주지만책임도 요구합니다교통법규를 어기거나신호를 어기면 벌점을 받을 수 있습니다심각한 위반이면 운전면허가 취소될 수도 있습니다그러기에 운전면허증을 가진 사람은 늘 준법운전안전운전양보운전을 해야 합니다신앙 안에서 계명을 잘 지키는 분들은 준법운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교회에서 권하는 교육피정에 열심히 참석하고 선을 행하는 분들은 안전운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하고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분들은 양보운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가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이야기합니다깨달음을 얻은 후 수행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깨달았으면 더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이 돈오돈수입니다깨달았지만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더 이어가는 것이 돈오점수입니다정화조명일치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사람도 있지만어느 날 일치의 단계를 체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저는 개인적으로 돈오점수의 삶이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주여당신 위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 마음이 주님 안에서 쉬기까지는 안식이 없나이다그러므로 내게는 내가 주님 안에 거함이 좋사오니 내가 그 안에 있지 아니하면 잠깐이라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앙의 여정은 끝날 때까지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닙니다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일치의 삶을 사는 길을 말해주고 있습니다돈오점수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그 계명은 그대들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주라는 광대한 에 하느님께서는 보물을 숨겨 놓으셨습니다그 보물은 바로 지구라는 별입니다지구라는 넓은 밭에도 보물을 숨겨 놓으셨습니다그 보물은 바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사람과 사랑은 같은 말 같습니다사람은 사랑해야 합니다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날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다가올 것입니다. 그날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양승국신부-

 

해루질을 해보니 은근 중독성이 있습니다. 쏟아져내리는 별들을 등에 이고, 광활한 밤바다 이곳저곳을 샅샅이 훑어 다니다보면, 여기저기서 게나 물고기, 골뱅이나 소라가 갑자기 나타나는데, 손에 넣기라도 하면 로또라도 당첨된듯 기분이 좋아집니다.

  

성공적인 해루질의 관건은 뭐니뭐니해도 강력한 밝기의 랜턴에 달려있습니다. 평소 쓰던 랜턴이 빈약해서 새로 하나 장만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랜턴을 켜면 대낮처럼 밝아졌습니다. 희미한 바닷물 속도 시원시원하게 보이니 수확량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강력한 밝기의 랜턴이었는데, 동녁에 해가 떠오르니, 즉시 별 것 아닌 초라한 존재로 전락해버리더군요. 강렬한 태양빛 앞에 가로등이나 랜턴 등 모든 빛이 존재감이나 가치를 상실해버렸습니다.

  

언젠가 사람의 아들이 영광 중에 나타나셔서 세상과 인간을 심판하실 때, 가장 중요하고 영속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날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오시는 주님! 그분 자체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그분의 등장 앞에 다른 모든 존재나 대상들은 즉시 그 가치를 상실하고 맙니다. 마치 강렬한 태양 앞에 촛불 한 자루처럼 말입니다.

  

그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날 유일한 의미요 가치인 주님을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얼마나 잘 경청하고 실천했는가? 우리가 그분을 얼마나 빼닮았는가? 우리가 그분의 삶과 죽음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가? 바로 그것이겠습니다.

  

유다인들은 메시아께서 과월절 날 밤에 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밤은 심판이 시작되는 날, 그 밤에 주님께서 첫 단계로 하실 일이 악인들로부터 의인들을 분리시키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의인들은 하느님께 봉헌될 것이며, 악인들은 영원한 지옥에 버려질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천국과 지옥, 갈림길의 기준에 대해서 루카 복음 사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복음 17장 34~35절)

  

무시무시한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묵상해봅니다. 예수님 말씀은 일종의 강력한 경고입니다. 그저 하루하루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는 사람들, 영적인 삶, 하느님 중심의 삶은 뒷전인채, 오로지 은행 잔고 늘이는데만 전념하는 사람들을 향한 애끓는 경고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심을 늘 염두에 두고, 현세의 삶도 최선을 다하지만, 또 다른 삶, 영적인 삶, 하느님 안에서의 삶에도 소홀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분 나라에서의 영원한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날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다가올 것입니다. 그날 우리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빨리 사라질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쌓아올린 명예와 재산, 한평생 추구했던 자리와 학벌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마지막 날 우리 앞에 남게 될 것은 그간 우리가 쌓아왔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작은 선행, 따뜻한 마음일 것입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이영근신부-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한 때와 장소와 방식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재림을 맞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때에 벌어질 일을 물과 불에 의해 멸망하게 된 구약의 두 사건, 곧 노아(창세 6-7장)와 롯(창세 19장)때와 같을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재림의 준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노아와 롯의 시대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노아 때에 대해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갔음을 말하고 있을 뿐, 특별한 죄나 부패를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은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사랑에 소극적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이 장차 일어날 일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오직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들처럼, 비록 죄를 짓지 않는다하더라도 자신들의 인간적인 세속의 삶에 빠져 주님을 알려하지도, 하느님을 경외하지도, 하느님의 의로움을 구하지도 않고,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놓은 사랑을 실현하지 않으면, 멸망을 당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의 25장의 ‘심판의 비유’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이 사랑하지 않았음이 문제였음을 말해줍니다(마태 25,31-47).

한편, 롯의 때에는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하였습니다. 롯도 노아와 마찬가지로 장차 닥쳐올 재앙을 미리 알고서 소돔을 떠나는 조처를 취하고 구원받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집안에 있는 세간 곧 소유물에 대한 애착으로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결국, 이 두 이야기는 ‘사람의 아들의 날’을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먹고 마심과 자신의 소유와 목숨의 보존에 매이지 말고, 그 때를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의 삶이 어디를 향하고, 누구를 향하여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곧 죽음을 향하여 있는지, 생명을 향하여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 17,37)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주님!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썩어 부패한 시체의 삶이 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살아 팔딱거리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자신의 보존을 향한 죽음의 삶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


언제 어디에서나 반드시  

-반영억신부-


언제 어디에서나 반드시 이른 아침 까치를 보면 반가운 손님이 오려나? 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를 보면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까마귀 색깔이 검은 탓도 있지만, 그놈이 심하게 울어버리면 영락없이 동네의 앓던 어르신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까마귀가 흉한 일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분이 떠날 것을 사람보다 미리 안 것일 뿐인데 까마귀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까마귀가 길조로 환영받습니다. 어린 까마귀는 어미의 극진한 도움을 받고, 커서는 제 어미를 철저히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 샌디에고에 있을 때는 매일같이 까마귀를 보았습니다. 까치는 보지 못했습니다. 까마귀를 흉조로 생각했으면 아마도 매일의 기분이 언짢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17,37).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국 정서로 말하면 ‘주검이 있는 곳에 까마귀가 모여든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썩은 고기는 독수리를 끌어들이듯이 죄인들은 자신의 삶에 심판을 불러들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심판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회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준비하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심판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 에 초점을 맞추었고, 제자들은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어디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들 듯이” 반드시 그날이 온다는 것을 전합니다. 언제, 어디에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모든 곳에서’ 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지금 여기서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들여다보듯 비춰보아야 합니다. 심판은 외부에서 오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이미 내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깨어있는 믿는 이들은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야고2,12). 는 것을 알기에 결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그런 절망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하느님의 자비는 어떤 죄라도 용서하실 것이며, 이미 용서하셨습니다”(성 예로니모).

우리는 까마귀를 보고 기분 나빠할 것이 아니라 까마귀가 왜 몰려왔는가를 생각해야 할 시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그분에게는 늘 더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며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영혼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미련을 갖지 않고 앞을 보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희망을 당신의 자비에 맡기게 하소서. 자비하신 하느님! 우리의 잘못을 기억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악대로 우리를 벌하지 마소서!” (최양업토마스).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의 크신 자비뿐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용서하여 주십시오. 아멘.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람의 의 

-송영진신부-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루카 17,26-30).”

 

이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 테살로니카 전서에 나옵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2-6).”

노아 때의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했던 모습들은,

또 소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했던 모습들은,

‘평화롭다, 안전하다.’ 하면서 일상생활을 했던 모습들인데,

그 일상생활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을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것은 죄입니다.

(노아 때 사람들이나 소돔 사람들이 일상생활 때문에 멸망을 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죄 속에서 살면서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을 당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대홍수를 일으키시기 전에

그 일을 미리 예고하셨습니다(창세 7,4).

그때 하느님께서는 “이레가 지나면”이라고 예고하셨는데,

그 7일은 회개하라고 주신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에 관해서 여러 가지를 지시하실 때에

이미 대홍수를 예고하셨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방주를 만드는 모습도 대홍수를 예고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모든 예고를 무시했고, 회개하지 않았고,

무사태평하게 일상생활을 하다가 모두 멸망을 당했습니다.)

또 소돔의 멸망 이야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미리 아브라함에게

예고하셨는데(창세 18,16-33), 아브라함이 소돔의 멸망을 막으려고 애쓴 것을

생각하면, 하느님의 예고를 소돔 쪽에 전달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소돔 멸망 전날 밤에 롯을 찾아온 천사들은 소돔의 멸망을 롯에게

알려 주었고, 롯은 다시 그 일을 사위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창세 19,12-14).

그때 롯의 사위들은 롯이 우스갯소리를 한다고 생각했고, 롯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태도는 곧 소돔 사람들의 태도였을 것입니다.

어떻든 소돔의 멸망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미리 예고된 일이었고, 그 예고는 회개하라고 기회를 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돔 사람들은 멸망 예고를 무시했고,

죄 속에서 살던 대로 살다가 모두 멸망을 당했습니다.

 

(평범한 일상생활의 소중함을 말하는 이들이 많은데,

신앙인은 ‘일상생활의 소중함’이 아니라 ‘회개의 중요함’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회개’는 ‘근본적인 삶의 변화’입니다.

일상생활의 소중함만 생각하고 ‘삶의 변화’는 생각하지 않는 것은,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는 것’은,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구원을 향해서 능동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1-33).”

 

이 말씀은, “세속의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만 집중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은 ‘그날’이 된 뒤에 실행해도 되는 가르침이 아니라,

‘그날’이 닥치기 전에, 즉 ‘지금’ 바로 실행해야 하는 가르침입니다.

세속의 재물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지 말고,

그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이 말씀은, “심판은 개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회개는 각자 스스로 해야 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심판은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공평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일’입니다.

동시에 각 개인의 구원과 멸망은

각 개인별로 따로 심판함으로써 결정된다는 점에서 ‘개별적인 일’입니다.

심판이 보편적이라는 것은, 아무도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고, 어떤 특혜도 없고,

어떤 특권도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심판이 개별적이라는 것은,

각 개인의 죄는 각 개인에게 물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 멸망을 당할 때, 그 죄인 곁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죄인과 함께 멸망을 당하는 억울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회개한 의인이 구원을 받을 때, 그 의인 곁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의인과 함께 구원을 얻는 불공평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죄’는 ‘나의 책임’입니다.

물론 어떤 죄에 대해서 ‘연대책임’을 묻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 경우에도, 내가 짓지 않은 죄인데도 나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죄’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선과 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은 죄’입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헤로데와 헤로디아,

그리고 헤로디아의 딸에게 그 살인죄를 물으시겠지만,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고관들, 무관들, 유지들에게도(마르 6,21) 죄를 물으실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저희는 아무 일도 안 했습니다.” 라고 항의할 텐데,

그들이 헤로데와 공범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살인이 행해지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일도 안 한 것’ 자체가 그들의 죄입니다.


복음: 루카 17,26-37: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알지 못할 때 나타나시리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옛날 노아와 롯의 때에 그랬던 것처럼 세상 끝 날도 갑자기 닥칠 것이라고 하신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으며,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27-28절), 노아 때에는 홍수가 닥쳐 한 가족 말고는 모두를 멸망시켰고, 롯 때에는 불과 유황이 쏟아져 모두 멸망하였다. 이는 늘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다.

 

노아 시대 사람들에게는 이런 설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방주를 짓는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을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방주를 짓는 일 자체가 설교였다. 그들은 산꼭대기에 방주를 짓는 노아를 비웃었다. 오늘날도 그들을 본받는 자들은 믿지 않는다. 구원의 방주인 교회가 세워지고 있지만, 그들은 역시 비웃고 있다. 홍수와 같은 심판이 그들을 위협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27절) 이 홍수는 믿는 이들에게는 세례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도 돌로 비유하고 있다. 그 돌은 믿는 이들에게는 주춧돌이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걸림돌이라고 하였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려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31절) 우리는 어떤 시련을 겪더라도 거기에 굴복하여 영적인 삶에서 육적인 삶으로 내려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간 사람은 지난날을 뒤돌아보거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떠한 시련에도 마찬가지이다.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돌아서지 마라.”(31절) 하느님의 말씀이 씨 뿌려져 영적인 열매를 갈망하고 덕성스러운 수고의 열매를 거두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변치 말고 부지런히 열매를 거두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쟁기를 손에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하셨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32절) 롯의 아내는 뒤를 보는 바람에 소금기둥이 되었다. 남편이 도와주었지만 뒤돌아보는 바람에 결국 산에 이르지 못했다.

 

이러한 삶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어야 그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며, 하느님의 심판이 임하게 될 때 두 사람이 전 생애를 함께 지내왔다 하더라도 하나는 선택을 받고 하나는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선한 사람과 친하게 지냈다 해도 그 자신에게 과오가 있다면 버림을 받는다는 경고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결과가 다르다는 것이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37절) 믿음이 있는 곳에는 성체성사가 있고 거룩함이 머문다. 교회 안에서 세례의 은총으로 우리의 영이 새로워진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루카 17, 32)

-한상우신부-

낙엽도
길을 떠나고
있다.

그 어떤 것도
붙잡을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떠나는 길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떠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묻게된다.

하느님을
향해
있어야 할
우리 마음이

다른 것들에
많이 빼앗겨
있다.

내려놓지
못하기에
떠날 수 없는
우리들이다.

버려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우리들이다.

떠나는 길에서
사는 법을
배운다.

무엇을 섬기며
살고 있는 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생명의 주인께
돌아가야 할
우리들 여정이다.

롯의 아내같이
무너져내리는

소돔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임을
기억하는 은총의
위령성월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사람의 아들의 날"을 맞는 우리의 자세를 이야기하십니다.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17,26)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17,28)

예수님께서 그날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누구도 그 때와 그 시간을 모른다는 전제에서 말씀하시지요. 노아 때, 그리고 롯 때에 세상에는 극소수의 의인이, 악에게 휩쓸린 대다수의 사람들 틈에서 제 방향을 고수한 채 분투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노아나 롯은 어려움 중에서도 그 경외심을 부여잡고 살았지요. 악을 일삼는 이들은 제 멋대로 욕망에 이끌려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멸망이 닥친 것입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 내려가지 말고, ... 들에 있는 이도 뒤를 돌아서지 마라."(루카 17,31)

예수님께서 당부하십니다. 두고 온 재산이나 뒤에 남은 것들에 미련을 두지 말라는 의미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동안 살아온 지향과 방향성, 품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라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진작부터 살아온 그 모습 그대로 그날을 맞이할 테니까요.

제1독서에서 요한 서간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적들이 흘리는 교설에 흔들리지 않도록 당부합니다.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2요한 5)

이미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인 이들에게는 새로운 무엇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셨고, 행하라 명하신 사랑의 계명, 그것으로 충분하지요. 주님께서 떠나시고, 박해가 닥치고, 반대자와 이단 교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힘은 오직 "사랑"입니다. 이는 "처음부터" 들어서 알게 되었고, 지금 이 순간까지 지속해서 간직해 온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2요한 9)

신앙은 연속성 안에서 성장합니다. 영혼은 처음 불리웠을 때 받은 그 사랑을 간직하면서 더 깊고 풍부하게 자라나지요. 악은 한 영혼이 하느님과 더 친밀히 결속되는 것을 방해하려 속이는 자들을 앞세웁니다. 아직 어리고 여린 이들의 빈틈을 파고들어 복음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들은 그대로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이들은 어떤 파도가 닥쳐도 헷갈리지 않습니다. 설령 "그날"이 닥친다 해도 마찬가지지요. 우리는 그 날, 그 때가 닥친 순간까지 살아온 모습 그대로 구원의 길로 들어설 것입니다. 지상에서 구원을 앞당겨 살아온 이는 거대한 연속성 안에서 진정한 구원으로 유연히 건너갈 것입니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우리는 서로 참 다릅니다. 태생과 역사와 배경, 취향과 흥미와 성향 등등, 그리스도인이라는 공통점 안에서조차 엄청나게 다양한 층위가 존재하지요. 주님은 분명 자비하시지만 우리 각자가 맞이할 구원은 개별적이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각자  삶에서 자신이 고수하고 머무른 모습이 연속성을 타고 구원으로 넘어갈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맘껏 탐하고 즐기며 살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겠다는 욕심은 말 그대로 허욕이 되겠지요. 살아서 주님을 기쁘게 찬미한 이는 그 기쁨과 찬미의 완성을 누릴 것입니다. 살아서 베풀고 나눈 이는 그 나눔과 베풂의 절정 안에서 더없이 행복하겠지요. 이처럼 여한없이 사랑한 이는 마지막 때에 내려갈 필요도, 뒤로 돌아설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여태까지 걸온 그대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면 되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주님의 날"인듯 미련이 남지 않게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 모습을 주님께서 아시니, 그분은 한눈에 우리를 알아보시고 기뻐 뛰며 맞아 주실 겁니다. 그날이 우리에게 최고의 날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멘.

흥청망청    

-김찬선신부-

 

연중 32주 금요일 - 2018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날에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흥청망청興淸亡淸

연산군 시대 흥청興淸이 있었지요.
얼굴이 예쁘고 춤과 노래가 뛰어나 연산군의 흥을 돋우어주는 여인들을
흥청이라고 불렀는데 연산군이 이 흥청들과 놀다가 망했고,
흥청들도 위세를 부리다 연산군과 함께 망했다고 해서
흥청을 망청이라고 부른 데서부터 이 말이 생겨났다지요.

그런데 연산군과 흥청만 망합니까?
인간에겐 망자와 망할 자가 있을 뿐 모두가 망할 것이며
망할 것을 아는 자와 몰라서 흥청대다 망하는 자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흥하고 흥청흥청 살기만을 바라며,
흥할 때는 망할 것이라는 것을 도무지 생각지 않기에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Memento Mori!메멘또 모리라는 말이 있지요.
말 자체는 라틴말로 죽을 것, 망할 것을 기억하라!는 뜻이지만
여기에도 역사적인 교훈이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여러 설 중에 로마 장군의 개선식과 관련한 얘기가 귀담을 만합니다.
그것은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장군에게 하루 동안 개선 행진을 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고 이 하루 동안은 신과 같은 대접을 받게 되는데
이 개선 정군 뒤에 반드시 노예가 따라가며 이것을 외치게 했다는 거지요.

네가 지금은 개선장군이 되어 신과 같은 대접을 받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을 인간이요 망할 존재임을 기억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듭 말하지만 우리 인간은 이렇게 메멘또 모리를
염두에 두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 다 죽고 다 망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늘 염두에 두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뭡니까?
알고 살건 모르고 살건 망하기는 마찬가지인데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어차피 다 죽고, 죽을 때 싸 가지고 갈 수 없으니 재물을 모으려고
아등바등하지도 움켜쥐지도 말고 흥청망청 쓰면서 즐기자고
늙어지면 못 노니 노세 노세 젊어서 놀자고 할 수 있지요.

실제로 메멘또 모리에는 젊어서 놀자, 즐기며 살자는 뜻도 있지요.
그래서 메멘또 모리는 시간은 금세 지나가니 지금 이 날을
놓치지 말고 잡으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의 뜻으로도 쓰입니다.

사실 요즘도 이렇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젊은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나이든 사람 중에도 이런 사람이 꽤 많습니다.
더 늙기 전에 많이 놀러 다니고
다리 성하고 움직일 수 있을 때 성지순례, 해외여행 하자는 거지요.

그런데 죽음 이후가 없거나
죽음을 이후를 생각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현명함입니다.
죽을 건데 뭣 하러 아등바등하고, 집착하고, 애착하고, 움켜쥐고 그럽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도 없고 죽음 이후의 영생이 없다면
우리에게 시간이란 죽기 전까지 남은 시간이고, 아까운 시간이지만
신앙인에게는 죽은 뒤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시간이며
그래서 신앙인은 죽음 이후를 생각하며 메멘또 모리를 해야 합니다.

인디언 나바호 족은 이렇게 얘기한다지요.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어떤 시간입니까?
즐겨야 할 시간입니까, 준비해야 할 시간입니까?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1월 16일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들어 두어라.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누워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루가 17,2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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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정화의 단계에서 자신을 버리고조명의 단계에서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하며일치의 단계에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일치는 운전면허증과 같습니다실기시험에 합격하면 운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운전면허증은 자격을 주지만책임도 요구합니다교통법규를 어기거나신호를 어기면 벌점을 받을 수 있습니다심각한 위반이면 운전면허가 취소될 수도 있습니다그러기에 운전면허증을 가진 사람은 늘 준법운전안전운전양보운전을 해야 합니다신앙 안에서 계명을 잘 지키는 분들은 준법운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교회에서 권하는 교육피정에 열심히 참석하고 선을 행하는 분들은 안전운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하고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분들은 양보운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가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이야기합니다깨달음을 얻은 후 수행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깨달았으면 더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이 돈오돈수입니다깨달았지만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더 이어가는 것이 돈오점수입니다정화조명일치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사람도 있지만어느 날 일치의 단계를 체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저는 개인적으로 돈오점수의 삶이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주여당신 위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 마음이 주님 안에서 쉬기까지는 안식이 없나이다그러므로 내게는 내가 주님 안에 거함이 좋사오니 내가 그 안에 있지 아니하면 잠깐이라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앙의 여정은 끝날 때까지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닙니다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일치의 삶을 사는 길을 말해주고 있습니다돈오점수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그 계명은 그대들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주라는 광대한 에 하느님께서는 보물을 숨겨 놓으셨습니다그 보물은 바로 지구라는 별입니다지구라는 넓은 밭에도 보물을 숨겨 놓으셨습니다그 보물은 바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사람과 사랑은 같은 말 같습니다사람은 사랑해야 합니다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