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1월 10일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0. 11. 9. 06:08

2020 11 10일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레오 교황은 400년 무렵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440년 식스토 3세 교황의 뒤를 이은 그는 행정 능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깊이 있는 설교로도 유명하였다. 레오 교황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일치와 정통 신앙을 수호하고자 이단을 물리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재임 중인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는 에우티게스, 네스토리우스 등의 이단을 단죄하고 정통 교회를 수호하였다. 461년에 선종한 레오 교황을 1754년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가 17,7-10)


When you have done all you have been commanded, say,
‘We are unprofitable servants;
we have done what we were obliged to do.’”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대부분의 고대 사회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시대에도 이스라엘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는 종속적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심히 일을 끝내고 돌아온 종에게 주인 자신이 먹을 음식을 먼저 준비하라는 주인의 모습은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또 모든 일을 마친 뒤에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복음서는 지금 우리가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주인과 종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 당시 주님을 위하여, 주님 뜻에 따라 사는 삶을 나타내는 적절한 비유가 주인과 종의 관계였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일하며 ‘누구를 위하여’ 행동할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종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일하거나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는 주인을 위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할 뿐입니다.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본다면, 신앙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입니다. 세상의 화려함과 자기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하느님께 더욱 다가서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느님을 ‘주님’으로 표현합니다. 겸손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런 삶의 태도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의 선택으로 결정됩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종의 겸손과 순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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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신부들과 함께 오랜만에 만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식당에 올해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들이 들어온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합석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식사가 거의 끝났을 때, 우리 일행 중의 한 명이 제일 어린 신부에게 “너 올해 몇 살이니?”라고 묻습니다. “올해 서른입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러자 그 신부가 젊은 신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참 좋을 때다.”

종종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봅니다. 어린 사람의 나이를 묻고 몇 살이라고 말하면 “참 좋은 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신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는 서른 살 때 정말로 좋았어?”

이 질문에 말을 흐립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로 좋았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그냥 막연하게 젊으면 ‘좋은 때’라고 생각할 뿐일 것입니다.

어쩌면 남의 시간을 막연히 부러워하는 것은 아닐까요? 60대에는 50대를 향해 ‘좋을 때’라며 부러워하고, 50대에는 40대를 향해 ‘좋을 때’라고 부러워합니다. 이는 지금을 사는 이 시간을 부러워할 미래의 순간이 곧 다가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부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지금을 충실히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제일 좋을 때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종과 주인의 모습을 이야기하십니다.

주인은 종에게 ‘식탁에 앉아라’ 하지 않고 일을 시키며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한다고 종이 불평을 하고, 다시는 시킨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종은 복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떠올려 보십시오. 종과 주인의 모습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누가 종이고, 누가 주인일까요? 당연히 주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이 종의 모습에 부합하는지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종과 주인의 모습이 바뀐 것 같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오히려 ‘이것 해라, 저것 해라.’라고 요구하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불평불만으로 가득했던 것이 아닐까요?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불평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이 가장 충실해야 할 시간임을 기억하면 불평불만보다는 자신이 할 일을 먼저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남의 자리를 탐내고, 남의 시간을 탐냅니다. 끊임없는 욕심과 이기심 안에서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못하고, 종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종’인데도 불구하고 ‘주인’행세를 하는 종을 주인은 어떻게 할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요?
바깥쪽부터 채워야 행복해질 것 같지만 사실 정말 중요한 것은 안쪽에 있다. 행복은 저너머 어딘가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다카시마 다이).


스트레스를 어떻게 할 것인가?

500mL 물병이 있습니다. 이 물병을 지금부터 어깨높이로 들고 있을 것입니다. 처음 물병을 들었을 때는 전혀 무겁지가 않습니다. 겨울 500mL니까요. 하지만 들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힘들어질 것입니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별 것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손은 저절로 내려가고, 땀이 쏟아질 것입니다.

아무리 가벼운 것이라 해도, 오랜 시간을 들고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을 들고 있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우리가 들고 있는 스트레스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스트레스를 가지고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트레스를 당연히 풀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알면서 실제로 풀기가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책에서 아주 작은 것이지만 큰 효과를 볼 방법을 제시하더군요.

첫째, 크게 심호흡을 하십시오. 효과를 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때는 두 번째 방법입니다. 둘째, 케겔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항문에 힘을 주는 것입니다. 몰래 할 수 있습니다.

이 작은 자극을 통해 스트레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스트레스 말고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얼른 풀어야 합니다.

봉사에 대한 보상은 하느님 자신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는 사도들의 청에 예수님께서 해 주신 비유입니다.

    ​어떤 종이 밭에서 일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또 저녁을 준비하고 자신이 식사하는 동안 시중을 들라고 말합니다. 이때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믿음이 있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마도 당신을 따라다니며 어떠한 보상을 바라는 믿음이 부족한 사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라고 하시며 이런 믿음을 가졌던 분이 성모 마리아이심을 암시하십니다.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하여 마라라는 쓴 물이 나오는 샘에 나무 하나를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쓴 물이 단물이 되어 사람들이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상징의 체계상 모세가 쓴 물에 던진 나무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돌무화과나무라 볼 수 있습니다.

    돌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먹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관을 만드는 나무였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인간이 개미가 된다면 그것이 죽음과 다를바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는 것도 하나의 죽음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쓴 물의 본성을 가진 인간이었지만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많은 이들을 살리는 단물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모 마리아가 돌무화과나무인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잉태하심에 대해 다른 보상을 청해야 할까요? 물론 천상모후의 관을 쓰시기는 하지만 당신 태중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또 그 아드님을 길러내신 것으로도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이 아닐까요? 물론 그리스도를 잉태하심으로써 당해야 했던 많은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하시며, 주님의 종이 된 것만으로도 만족하여 ‘마니피캇’으로 주님을 찬미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런 성모 마리아의 모범이 곧 믿음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그래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 드리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보상을 청한다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의 소명을 따름이 곧 행복인 이유는 하느님은 ‘당신의 소명’과 ‘당신 자신’을 동시에 주십니다. 존재가 곧 뜻입니다. 내가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면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    다시 말해 당신의 소명을 입으면 하느님을 입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가지는 것만큼 큰 보상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일도 시키시지만, 당신께서 함께하시기 위해 성령도 주십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주시는 열매가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 곧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겪어야 하는 작은 고난들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얻게 되는 그 큰 행복을 잃기도 합니다.

    금실이 아주 좋은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몹시 가난했던 젊은 시절 그들의 식사는 늘 한 조각의 빵을 나누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을 사랑과 이해로 극복한 뒤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자 그들은 결혼 50주년에 금혼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부부는 무척 행복했습니다. 손님들이 돌아간 뒤 부부는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식탁에 마주 앉았습니다. 온종일 손님을 맞이하느라 지쳐있었으므로 그들은 간단하게 구운 빵 한 조각에 잼을 발라 나누어 먹기로 했습니다.

“빵 한 조각을 앞에 두고 마주 앉으니 가난했던 시절이 생각나는구려.”

할아버지의 말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지난 50년 동안 늘 그래왔듯이 할머니에게 노릇노릇하고 고소한 빵의 껍질을 잘라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할머니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몹시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역시 당신은 오늘 같은 날에도 부드러운 빵 속은 당신이 먹고 내게는 딱딱한 빵 껍질을 주는군요. 50년을 함께 살아오는 동안 난 날마다 당신이 내미는 빵 껍질을 먹어 왔어요. 그동안 당신에게 늘 그것이 불만이었지만 섭섭한 마음을 애써 참아왔는데, 하지만 오늘같이 특별한 날에도 당신이 이럴 줄은 몰랐어요. 당신은 내 기분이 어떨지 조금도 헤아릴 줄 모르는군요.”

할머니는 마침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할아버지는 몹시 놀란 듯 한동안 머뭇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할머니가 울음을 그친 뒤에야 할아버지는 더듬더듬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후유! 난, 부인을 위한 일심밖에는 없었소. 당신이 진작 이야기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난 몰랐소. 하지만 여보, 바삭바삭한 빵 껍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소!”

할아버지는 50년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할머니에게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봉사하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면 나에게 안 좋은 것만을 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봉사는 믿음이 없는 봉사입니다. 봉사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발견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무신론자가 한 봉쇄수도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장상에게 비꼬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생 수도원에 갇혀 일과 기도만 하다 죽었는데 하느님이 없으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수도원 원장이 말했습니다.

“누구도 강요해서 봉쇄수도 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들은 기도하고 일하는 가운데 이미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행복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어서 하느님이 없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하느님이 계신다면 진짜 놀라게 될 사람은 당신이 될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란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면서 다른 보상을 바랄 것 없이 그 뜻을 따름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하느님께서 함께 계셔서 하느님이 그 사람의 보상이 되어주십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종은 일하면서도 주인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하고 감사해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봉사한다고 여기는 이들이 만약 다른 보상을 바라고 있다면 믿음이 없는 헛된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 “I Have a Dream"을 들었습니다. 1963년에 한 연설입니다그해에 저는 태어났습니다연설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선언에 서명을 하고 100년이 지났어도흑인들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100년이 지났어도흑인의 삶은 여전히 격리의 족쇄와 차별의 사슬로 인해 몹시 부자유스럽습니다. 100년이 지났어도흑인은 물질의 번영이라는 광대한 대양의 한가운데 있는 어느 한 고립된 빈곤의 섬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100년이 지났어도흑인은 여전히 미국의 후미진 곳에서 고통 받고 있으며비록 자신들의 땅에 있지만 마치 유배자인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흑인은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습니다버스에서 흑인은 자리에 앉을 수 없었습니다백인 전용의 자리에는 갈 수 없었습니다이동의 자유에 제한이 있었습니다여행의 피곤으로 몸이 무거울 때 고속도로의 모텔과 시내의 호텔에서 잠자리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그때는 꿈과 같은 일이었습니다그래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언젠가는이 나라가 일어나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라는 진실의 강령대로 살아가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언젠가는조지아주의 붉은 언덕 위에서 노예들의 후손들과 노예 소유주들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서 함께 자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부정과 억압의 열기로 찌는 듯한 미시시피주 조차도 언젠가는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바뀔 것이라는 꿈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정당한 지위를 얻는 과정에서 우리는 불법행위에 따른 범법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비통과 증오의 잔에서 흘러내린 물로써 자유를 향한 우리의 갈증을 풀려고 하지 맙시다우리의 창조적인 저항이 육체적인 소동으로 타락하지 않게 해야만 합니다.” 이런 꿈이 이루어질 때 미국은 진정으로 자유의 국가가 될 것이고미국은 진정으로 위대한 국가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자유를 향한 꿈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대 자신을 모든 면에서 선행의 본보기로 보여 주십시오가르칠 때에는 고결하고 품위 있게 하고 트집 잡을 데가 없는 건전한 말을 하여적대자가 우리를 걸고 나쁘게 말할 것이 하나도 없어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하십시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성서의 말씀을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였습니다그의 꿈은 이루어졌습니다흑인이 대통령이 되었고흑인 여성이 부통령이 되었습니다미국으로 이민 온지 54년이 되신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낯선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신앙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았다고 합니다선행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사목자도 많았지만 공동체에 아픔을 주고갈등을 일으키는 사목자도 있었다고 합니다착한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목자도 많았지만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던 사목자도 있었다고 합니다지금 생각하면 한국과 미국의 문화의 차이가 있었다고 합니다만났던 모든 사목자들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합니다특히 힘들고 어렵게 있다가 돌아간 사목자들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5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은 대부분의 공동체가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눈 덮인 길을 갈 때는 발걸음을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오늘 걷는 발걸음이 뒷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신앙 안에서 사제는 봉사자여야 하고성사를 집전해야 합니다봉사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가장 큰 사명이고성사의 집전은 사제에게 주어진 고유한 직무이기 때문입니다사제는 특별히 가난한 사람아픈 사람외로운 사람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찾아야 합니다미사와 고백성사를 정성껏 집전해야 합니다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은 더욱 겸손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마치 종이 주인을 위해서 일하듯이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영광은 주님께로 돌려야 한다고 하십니다그러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서 갚아 주신다고 하십니다주님께서는 지혜의 열매를 말씀하십니다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해야 할 일  

-반영억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적은 노력에도 남이 칭찬해 주고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기대를 잔뜩 해 놓고 채워지지 않으면 섭섭해하고 화를 내며 다투기도 합니다. 때로는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에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주님 눈에 들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주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는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언젠가 ‘아름다운 손’이라는 제목으로 한 시민이 거액의 돈을 주워 경찰에 맡김으로써 주인이 잃은 돈을 찾을 수 있었다는 기사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순간적인 유혹도 있었겠지만, 주인에게 돌려준 귀한 마음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 마음 항상 지켜지길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돈은 분명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런데 너무도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보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17,10). 하는 사람이 미련한 사람,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런 바보라면 얼마든지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부 실루스는 “모든 일이 당신의 생각에 가장 좋은 방향으로 되기를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라. 그러면 혼란에서 벗어나 기도중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하고 말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하는 사람이 그리운 세상입니다. 여러분은 공을 이루고 물릴 줄 아는 사람,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참된 노고는 남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남의 눈에 띄는 노고는 허영심만 키울 뿐입니다.”당연히 해야 할 것을 했으면서도 생색내려고 하는 이나,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데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여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필리피서 1장 29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사실 세상이 보기에는 쓸모없이 보이는 그 일이 주님보시기에는 꼭 필요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우선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잘 알아주지 않는 일이라도 주님께서 기억해 주실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손하게 겨라.

-송영진신부-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7-10).”

 

이 말씀은, 주님이신 하느님에 대한 묘사나 설명이 아니라,

신앙인의 마음가짐과 신앙생활의 기본자세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비유 속의 주인은 표현만 보면, 인정도 없고 아주 차가운,

나쁜 주인처럼 보이는데, 하느님이 그런 분이라는 뜻이 아니고,

가르침을 좀 더 생생하게 주기 위한 과장된 표현일 뿐입니다.

1) 우리는 하느님의 노예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2) 신앙생활은 주인을 위해서 종으로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3) 하느님의 명령(계명)들은 당신을 위해서 정해 놓으신 강제 규정들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한 당부이고 호소입니다.

4) 우리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하느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고 고마워하십니다.

5) 우리는 쓸모없는 종이 아니고,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쓸모없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우리 자신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는 일이고,

우리에게, 또 우리가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에게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 말씀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감사’와 ‘겸손’입니다.

신앙인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우리 모두가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또 신앙생활의 기본자세는 ‘겸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뭔가 잘난 점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잘난 체 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에페 1,3-8ㄱ).”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베풀어주신 ‘은총’이고 ‘사랑’입니다.

‘계명들’도 당연히 은총이고 사랑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계명들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

그 은총과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1베드 1,3-5).”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노예로서 주인을 위해서 하는 강제 노동이 아니라,

자녀로서 아버지로부터 상속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서 하는

‘나의 일’이고, ‘기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 상속 재산을 주시는 일은 ‘자비’입니다.

우리가 어떤 권한이나 권리로 요구해서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마땅히 겸손해야 합니다.

 

‘감사’와 ‘겸손’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큰 계명’에 관한 가르침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처럼(루카 15,29)

‘사랑 없이’ 억지로 일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고마워하라고,

또 일에 대한 대가를 내놓으라고 하느님께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기쁨으로 일하는 사람은,

일하는 것 자체를 기뻐하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생색내지도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런 생활입니다.

하느님께서 불러 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아무것도 아닌 나를 사랑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에 감사드리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에 감사드리는 생활입니다.

 

‘겸손’에 대해서 생각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기가 겸손하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행하는 겸손입니다.

마음속으로는 다르게 생각하면서도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행동하라고 하시니까 마지못해서

겉으로만 자기를 낮추는 것은 진정한 겸손도 아니고 낮춤도 아닙니다.

그것은 위선이고 거짓 겸손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겸손하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를 낮춘다는 의식 없이 자기를 낮춥니다.

만일에 자기가 실천한 겸손을(낮춤을) 기억하고 있거나 의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라는 가르침은,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겉으로만 겸손하게 말하고 행동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

“마치 무슨 큰일이나 한 것처럼 하느님 앞에서 생색내거나 대가를 요구하지 마라.

온 마음으로 기뻐하고 감사드리는 신앙생활을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겸손은 기쁨과 감사와 사랑에서 나옵니다.


복음: 루카 17,7-10: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송영진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주인과 종 사이의 관계에서 종이 주인의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9절)고 하신다. 그저 주님의 말씀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10절) 가르치신다. 한 마디로 우리가 무엇을 하고 나서 겸손할 줄 아는 자세를 가지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가지 일만을 시키지 않으신다. 살면서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참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앞자리에 내세워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섬기는 일을 제법 잘했다 하더라도 할 일을 했을 뿐이니 뽐내지 않아야 한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모습, 그것이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다.

 

우리는 때때로 웃어른의 정당한 지시에 대하여 머리 숙여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을 싫어하는가 하면, 심하게는 낳으시고 기르셨으며 평생을 그 자녀들만을 위해서 염려하시며 애태우시는 부모님들의 간곡한 권고까지도 겸손하게 받아들이기를 외면하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가 어느 조그마한 권력이나 지위에 앉게 되면 더더욱 수하 사람이나 타인이 마치 자기 생각, 자기 원의, 자기 취미만을 채워주기 위해 있는 양 뒤흔드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존중할 줄도 알고 자기 직분과 위치가 주는 권위를 드러내야 할 때 분에 넘치는 충동도 꺾을 줄 안다. 교만하지 않으며 만용을 부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기가 노력하여 얻은 영광이나 명예와 권세도 자기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인 다른 이들의 도움이 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위해 사용할 줄도 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여라.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10절) 이 말씀은 제자들이 파괴적인 욕정을 멀리하도록 만드시려는 뜻이었다. 입으로 영광을 떠드는 자들은 덕행을 실천하여도 그것으로는 아무런 은총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온갖 덕을 실천하더라도 그것을 자랑삼는 사람은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고 말며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또한, 주님 앞에 자신을 무로 돌릴 줄 아는 자세도 가져야 하겠다. 우리는 마당을 쓸 때 빗자루를 이용하고 쓸고 난 뒤에는 그 빗자루를 좋은 자리에 고이 모셔두는 것이 아니라, 문 뒤 한적한 곳에 세워 둔다. 즉, “주인이 필요하여 나를 쓰셨고 이제는 내가 할 바를 했으니 내가 차지할 곳은 이곳입니다.” 하는 것과 같다. 주님 앞에 그리고 우리의 이웃 앞에 또한 겸손한 봉사자의 모습을 가지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스승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삶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 10)

-한상우신부-

만나고
헤어지는
조락(凋落)의
서글픈
계절이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과
착각은 우리의
눈까지 멀게한다.

쓸모없는
우리의
자아이며

온전하지 못한
우리들
자아이다.

해야 할 일조차
하지 않는
고집스런
우리들 삶이다.

일을 하면
할수록 깨닫게
되는 우리의
모순된
현실이다.

다시금
부족함과
한계점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힘을 주시는 분도
생기를 주시는 분도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하느님의
사랑 없이는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없다.

그야말로
쓸모없는
우리들이며

더 깊이
작아져야 할
우리들 교만이다.

해야할 일을
하도록 힘이
되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봉사의 일꾼으로
변화시키시는
분또한 사랑의
그분이시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단순하고
겸손된
믿음의 길이다.

헛되고
쓸모없는 것을
비우고 버리는
믿음 말이다.

나뭇잎을
떨어뜨린
나뭇가지가
맑은 교훈을
건넨다.

가볍게
더욱 가볍게
자아를 맡기라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될 때 까지
맡기는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께 대해 우리가 지녀야 할 자세를 일깨워 주십니다.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루카 17,9)

인간의 가치를 왜곡하는 노예 제도는 인류 역사 안에 상처로 새겨진 부끄러운 민낯입니다. 피부색이나 출신 때문에, 패전국 백성이라서, 빚과 채무로 인해 등등,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인 또 다른 인격을 차별하고 억압하고 착취해온 죄악의 전형이지요.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이 차별에서 해방되기 위한 투쟁이 도처에서 인권 회복이라는 열매를 차츰 맺어 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어마어마한 차이와 간극을 표현하기 위해 성경 저자들은 주인과 종의 표상을 곧잘 사용합니다. 한 인격에 대해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이와 그에 종속된 이와의 관계에 비추어 창조주와 피조물,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가늠하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은 대부분의 주인이 종을 대하는 통상적인 태도를 묘사하십니다. 종이 아무리 고된 노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어도 당장 주인을 위해 상을 차리고 시중을 든 뒤에야 밥 한 술을 뜨는 거라고요. 그래도 주인은 종에게 굳이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그런데, 우리 주인은 어떤 분이신지 잠시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인간들 가운데 오신 분이십니다. 
또 당신 스스로 "섬기러" 오셨다고 선언하셨고요. 그 뿐입니까? 실제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써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실제로 가르치시고 보여 주신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관상할 때, 반드시 인간들 사이의 주종 관계를 대입하여 하느님을 인색하고 권위주의적인 주인으로 오해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니 그저 오늘의 마지막 말씀을 기억하면 되겠습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실 수 있는 이유는, 당신께서 아버지께 늘 그러시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은 주인을 대신해 몸값을 치르고 벌을 받는 노예처럼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쳐 우리를 속량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존감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저의 주님은 지칠 정도까지 고생하지도 않은 제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시고는 당신 살을 내어 주는 분이십니다. 당신 뜻을 아주 조금이라도 행하면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곁으로 오셔서 시중을 들어 주시는 분"이지요. 그리고 오늘 복음 속 주인과는 달리, 당신 분부대로 당신 곁을 떠나지 않는 제게 무척 고마워하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주인이 이처럼 속없이 착하고, 사랑 때문에 한없이 나약하다고 우리 태도가 바뀌어서는 곤란하겠지요. 종의 자리에서 힘으로 억압하고 혹사시키는 주인에게 겸손히 응답하듯, 대체 누가 주인인지 모를 만큼 관대하고 친절한 사랑꾼 그런 주인에게도 우리는 같은 응답을 드려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더 깊은 경외와 감사, 사랑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 모두에게 제 위치에 걸맞는 덕행을 촉구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그대는 건전한 가르침에 부합하는 말을 하십시오"(티토 2,1)

이어지는 사도의 권고는 나이 많은 남자, 나이 많은 여자, 젊은 여자, 그리고 젊은 남자를 대상으로 구체화되는데, 이 모든 세부적 지침들의 근간은 바로 "건전한 가르침에 부합"하는 언행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가르침들은 사람을 숨막히게 억압하는 멍에가 아니라, 사랑과 자애로 우리를 품어 주시는 주님께 우리 편에서 바치는 응답입니다. 다양한 표현들로 풀어서 권고하고 있지만, 결국 '사랑 받고 섬김 받는 종으로서 해야 할 일들'인 셈이지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티토 2,14)

하느님께서는 종인 우리를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고, 거기에 더해 당신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부족하고 부정한 우리는 은총 덕분에 그리스도의 형제요 신부, 성령의 성전이 되었지요.

이제 우리 편에서 겸손히 기꺼운 응답을 드릴 차례입니다. 쓸모없는 종인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란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것이지요. 주님처럼 누군가를 조건없이 섬기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자격이나 위치를 따지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에게 주님께서 내게 하신 그 섬김을 베푸는 것, 이것이 곧 주인의 사랑 받는 종의 다음 걸음일 것입니다.

영원하신 주인께 사랑받는 벗님! 인간 주인이 아니라 영원한 주인이신 주님만 바라봅시다. 인간 주인들과 달리 주님은 우리를 섬기려고 종이 되시어 애간장이 끊어질 듯 사랑해 주는 분이십니다. 서로 다투어 섬기며 주님께서 쏟아 주신 사랑을 완성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런 벗님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서 와서 식탁에 앉아라." 아멘.

나는 어떤 사람인가?   

-김찬선신부-

 

연중 32주 화요일-2016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하느님이 시키신 대로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없는 종으로서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너무 심한 말처럼 느껴지고
더 나아가 잘못된 말씀처럼도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시키신 일을 하고 나서
수고했다거나 잘했다는 칭찬을 들으려고 하지 말아야 하고,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쓸모없는 종이라고까지 말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말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교만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제가 교만하기에 그런 것도 있지만
내가 쓸모없는 종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께도 욕되는 거라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쓸모없는 존재라면 하느님께서 나를 그렇게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종종 왜 나를 이리 쓸모없는 존재로 만드셨냐고 따지기도 하잖아요?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쓸모없는 종은 다른 뜻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뜻으로 하신 말씀일까요?

우리는 종종 하느님께서 쓸모 있게 만드셨음에도
왜 나를 이렇게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만드셨냐고 하면서
스스로 자기를 평가절하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핑계를 댑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쓸모없는 종이고 해야 할 바를 했을 뿐이라고 얘기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우선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사명을 맡기신 하느님의 신뢰와 사랑을 받기에는
자신이 너무나 쓸모없고 부족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를 느끼는 사람이고
그 사랑 받기에 턱없이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다음으로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코자 하는 열망이 큰 사람입니다.
맡겨진 사명이 막중하다고 생각하고 열망도 큰 만큼 내가 더 많은 일을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열망만큼 하지는 못했다 생각하는 거지요.

프란치스코는 생을 마치면서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니 이제 다시 시작합시다!

어찌 성 프란치스코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까?
우리가 보기에 그처럼 대단한 일을 한 사람 없지만
그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성녀 글라라도 자신을 쓸모없는 시녀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당한 몸종이자 다미아노 수도원의 쓸모없는 시녀”라고
글라라는 프라하의 성녀 아녜스에게 편지를 쓰며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인들이라야 주님의 가르침대로 자신을 쓸모없는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쓸모없는 종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만이 스스로 쓸모 있다고 하지요.
자기가 쓸모없다고 생각되면, 특히 다른 사람이 너는 쓸모없다고 하면
무너져버릴 사람만이 쓸모 있다고 강변을 하는 것입니다.
무너져 버리지 않기 위해서.

나는, 우리는 어떤 사람일까?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1월 13일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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