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1월 7일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0. 11. 6. 06:08

2020 11 7일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루가 16,9-15)


I tell you, make friends for yourselves

with dishonest wealth,
so that when it fails,

you will be welcomed into eternal dwelling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루카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와 비교하여 재물을 사용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부유함을 좇기보다 가난을 실천하고, 이웃들과 재물을 나누라고 권고합니다. 이렇게 가난과 나눔을 강조하는 것에서 당시 공동체 안에 그만큼 빈부 격차가, 부와 가난의 문제가 심각하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참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동체 안의 이런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현실적이고 실천을 강조하는 가르침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루카는 재물을 도구처럼 표현합니다. 신앙인들은 재물을 잘 다루어야 합니다. 재물을 많이 모으고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올바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눔은 재물을 사용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재물은 분명 삶의 목적이 아니라 도구입니다. 누구도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 삶의 목적이며 재물은 도구일 뿐입니다. 재물이 목적이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세상 안에서 재물을 다루며 살아가지만 어디에 목적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 알려 줍니다. 목적과 도구를 구분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방향을 잃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삶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일깨우며 언제나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청년을 대상을 했던 강의에서 어떤 청년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꿈이 뭐예요?”

곧바로 웃으면서 “성공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저는 “왜요?”라고 물어보았지요. 그러자 “성공해야 행복하니까요.”라고 말합니다. 이 청년의 말처럼 성공하면 행복할까요?

심리학자 소녀 류보머스키에 따르면 행복이 먼저 내 안에 자리할 때 성공이 찾아올 가능성도 커진다고 말합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이런 사람을 거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이렇게 사람을 좋아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과 함께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 과정 안에서 자연스럽게 도움을 서로 주고받게 됩니다. 도움을 받을 수가 있으니 어떤 어려움에서도 쉽게 좌절에 빠질 수 없게 됩니다. 늘 행복한 상태에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나만이 아닌, 모두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이 됩니다. 즉, 성공이 먼저가 아니라 행복이 먼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행복을 위해서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재물에 대한 욕심이 아닙니다. 그보다 나눔과 실천을 통해 사랑을 키워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물 자체는 욕심과 이기심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기에 불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재물을 슬기롭게 사용하는 것은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권고를 따라 대상을 가리지 않고 자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렇게 재물을 친구 만드는 도구로 사용하면 그 친구들을 통해서 영원한 거처를 얻을 수 있게 되어서 자신에게 커다란 이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재물이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 백 배로 보상받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빌려주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재물 자체가 행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생각으로는 재물 자체가 나의 주인이 되고 맙니다. 재물을 움켜잡고 놓지 않으려는 어리석은 모습만을 가질 뿐입니다.

재물은 참 행복을 위한 도구로 써야 하지, 재물이 곧 행복이라는 착각 안에서 우리는 행복을 결코 얻을 수가 없게 됩니다.
노력이 적다면 얻는 것도 그만큼 적다. 인간의 재산의 그의 노고에 달렸다(헤리크).


잠시 멈추기

어떤 종류든 위기는 우리 인생에 아주 특별한 기능을 합니다. 잠시 하던 것을 멈추고 이제까지 자신이 거쳐 온 인생을 되돌아보십시오.

.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이별한 순간이 있습니까?
. 직장을 구하지 못했거나 일을 하기는 하지만 불행한 순간이 있었습니까?
. 경제적으로 어려운 순간이 있었습니까?
. 사업에 실패했거나 도무지 해결 방법이 없는 문제는 만난 적이 있습니까?
. 심각한 질병을 얻은 적은 없습니까?

이 중에서 한두 가지는 경험한 적이 있거나, 또 지금 현재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위기가 자신의 인생에서 특별한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니었음을 깨닫기도 합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할 때, 잠시 멈추고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나의 영광을 주님께 돌린다고?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약삭빠른 청지기 비유’의 결론입니다. 약삭빠른 청지기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재물이 모두 하느님 것임을 알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의롭지 않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그들은 돈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으니 하나를 사랑하려면 하나를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돈과 명예나 육체적 만족을 좋아하는 것을 끊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 것들을 좋아하면서 주님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금송아지를 섬기며 십계명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하나는 깨어져야 합니다. 아니면 신앙이 위선이 됩니다.

 

      멕시코시티 근처에 아스테카 문명을 볼 수 있는 떼오띠우아칸이란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이집트 피라미드처럼 생긴 고대 달과 뱀의 신을 섬기는 커다란 제단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자신의 농사가 잘되게 해 달라고 자신들이 잡아 온 전쟁포로들을 산 채로 신에게 바치는 제사가 행해졌습니다.

 

      과연 이들이 정말 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신을 섬기는 예배를 올렸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농사가 잘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습니다. 농사가 잘되게 하는 것이 신을 섬기는 것보다 우선되었습니다.

 

      어떤 신학교 교수님이 방학을 맞아 즐겁게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에게 “지금 당장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천국에 가겠느냐, 집에 가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학생은 “천국에 가기 전에 아무래도 집에 먼저 들러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농사가 예배의 첫 번째 목적이었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것으로 자신들이 높이 평가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궁극적 목적은 ‘자기 영광’입니다. 궁극적인 우상숭배는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사이들이 돈을 좋아했던 이유는 의식주가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부자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떤 유명한 개신교 찬양 전도사가 어느 날 찬양 집회를 마치고 눈물을 흘리며 이런 고백을 대중들 앞에서 했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찬양 집회를 인도했지만, 집회 후 남은 것은 허무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오늘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 자신을 나타내려는 마음이 내 속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깊은 밤의 어둠처럼 가려왔던 것입니다.”

      저도 주님을 전하며 많은 강의를 했습니다. 사순 강의를 20차례 하고 마치는 마지막 날, 기뻐야 하는데 공허감이 찾아왔습니다.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주님만을 전하려는 마음으로 강의를 했지만, 신자들의 박수갈채에 나도 모르게 중독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독은 갈수록 심해져 큰 박수갈채를 받아도 성이 차지 않게 된 것입니다.

 

      자기를 섬기는 사람이 주님도 섬기겠다고 하니 주님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이용당하는 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의 욕구를 추구하는 사람은 위선적 신앙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위선적 신앙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유혹이라는 것 자체의 위험성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그저 영광을 주님께 돌리고 재물을 주님께 봉헌하면 된다고 믿습니다. 심지어 돈을 벌어야 교무금이라고 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자식이 성공해야 주님께 찬미라도 드릴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리사이들이 주님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그런 욕심 때문에 우상숭배에 중독될 가능성이 큽니다.

 

      ‘반지의 제왕’이란 영화에서 ‘반지’는 힘이고 권력이고 영광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작고 착한 인물이 하나 나오는데 호빗 ‘프로도’입니다. 문제는 반지를 끼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악을 쳐부술 수 있지만 계속 끼고 있으면 빼고 싶은 마음이 점점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착한 프로도까지 눈빛이 바뀌고 반지를 빼려 하지 않습니다. 반지를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 난 골룸이나 그 반지를 결국 내어주어야 하면서도 더 오래 갖고 싶어 하는 프로도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영광이란 이런 것입니다. 오래 만지고 있으면 중독됩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다가 영광에 중독되고 맙니다. 재물을 주님께 돌리려다가 재물에 중독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면서, 그런 유혹 거리를 내가 먼저 만져보고 즐기고 돌리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유혹 거리를 옆에 두려는 것부터가 교만입니다.

 

      내가 주님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공허하다면 분명 내가 주님께 바치고 있는 것들에 중독되었을 것입니다. 중독되면 분명 공허함이 찾아옵니다. 자기 영광을 추구하면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은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남들에게 성인 대접을 받게 되면서부터는 사람들을 떠났습니다. 성인들도 유혹을 이기려 한 것이 아니라 유혹을 피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혼자 외로이 죽는 것을 택했습니다. ‘나의 영광’을 주님께 돌리려 하지 마십시오. 내 것으로 생각할 때부터 영광에 중독됩니다. 어차피 나의 것은 없습니다. 주님께 바치는 영광에 중독되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예전에 엄마의 바다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1993년도에 제작되었으니 27년 전의 드라마입니다중견기업의 사장이었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가족들은 2층 양옥집에서 지하 단칸방에서 살게 되는 이야기입니다모든 것이 풍족하였던 가족들은 이제 모든 것을 어렵게 구해야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각자의 방에서 지내다가 식구들이 모두 한 방에서 지내야 했습니다학업을 포기하고 직장을 구해야 했습니다자가용으로 다니고택시를 타고 다녔는데 만원버스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다녀야 했습니다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지만 현실의 삶은 냉정하였습니다큰 딸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상황 속에서 길을 찾아 나서지만 둘째 딸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지냈습니다.

 

엄마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조금씩 채워가면서 가족들을 보살폈습니다그래서 제목이 엄마의 바다였습니다엄마는 오늘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한 것처럼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운 것 같았습니다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아는 것 같았습니다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아는 것 같았습니다그러나 엄마는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아무것도 할 줄 몰랐습니다그러기에 아버지의 사진을 보고 남몰래 눈물을 흘렸습니다엄마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모든 시련과 아픔을 가슴에 품을 수 있었던 것도 가족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본당 신부가 돼서 갔던 성당은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었습니다교우들의 수도 많지 않았습니다평일 미사에는 10명 미만이 참석하였습니다주일 미사에는 군인을 포함해도 100명이 넘지 않았습니다. 3년간 지내면서 제게는 가장 행복했던 사제 생활이었습니다교우들과 가족처럼 지낼 수 있었습니다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재정적으로도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가정 방문 중에 태권도 사범을 알게 되었습니다본당 주일학교 아이들을 위해서 태권도를 시작했습니다. 7명이 시작한 아이들은 100명이 넘었습니다아이들이 성당에 오면서 부모님들도 세례를 받았습니다당시에 유행하던 비디오 대여를 본당에서 하였습니다사람들이 성당에 와서 차를 마시고비디오를 빌려갔습니다차량 봉사단을 조직해서 멀리 있는 교우들을 주일이면 모셔왔습니다. 3년 동안 아무런 사고 없이 차량 봉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하느님의 도우심입니다.

 

지구장 신부님께서 사제성화의 날에 사목 체험을 할 수 있는지 제안을 하였습니다신부님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거절했습니다그냥 편안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자꾸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정말 편안하게 본당에서 지냈던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태권도 이야기도 했고차량봉사단 이야기도 했고비디오 이야기도 했고농산물 직거래 이야기도 했습니다몇 달이 지났을 때입니다교구 사목국에서 같이 일하면 좋겠다고 국장 신부님이 찾아왔습니다크게 내세울 것도 없는데 교구에서 저를 찾아오니 난망했습니다인사이동은 교구장님의 결정사항이니 인사이동이 나면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교구 인사이동으로 사목국에서서 3년 동안 교육담당 업무를 하였습니다. 10분 강론은 하였지만 2시간 강의를 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처음에는 무척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요령도 생기고여유도 생겼습니다. 20년 전의 일이지만 생각하면 모든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미국에서 신문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종이 신문을 보는 분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코로나19의 영향으로 1년 동안 홍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오늘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한 것처럼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뜻하지 않게 도움을 주시는 분들도 있습니다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다.’는 마음으로 지내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이영근신부-


오늘날에는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교육을 비롯하여 삶의 온 국면이 시장화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마저도 시장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돈이 종교화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돈이 우상화 되고 신격화 된 것입니다. 이를 교종 프란치스코의 문헌 <복음의 기쁨>에서는 이렇게 갈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고대의 금송아지에 대한 숭배가 돈에 대한 물신주의라는, 그리고 참다운 인간적 목적이 없는 비인간적인 경제 독재라는 새롭고도 무자비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55항)

 

그래서 교종께서는 현대 자본주의의 물신숭배 풍토를 강도 높게 질책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으로 모는, 소위 말하는 돈의 제국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돈은 악마의 배설물이다.”(바실리오)라고 말씀하시고, “돈을 신처럼 숭상하는 경제제도는 극도로 높은 소비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연을 착취하고 또 착취하려 한다.”(국제 민중운동 회의, 2014.10.28)고 지적하시며, “사람이 돈을 숭배하면 결국 돈의 노예가 될 것”(이탈리아 협동조합연합 회의)이라고 경고 하셨습니다. “돈에 대한 탐욕의 체계화가 단지 나쁜 것을 넘어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교묘한 독재”(볼리비아 방문)라고 질타하시고, “인간의 생명을 돈과 이윤의 제단에 갖다 바치는 정책을 철폐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인간 얼굴을 한 새로운 경제 모델을 추구하라.”(파라과이 방문에서 세계지도자들에게)고 주문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카 16,13)

 

그런데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루카 16,14). 혹 우리의 속마음도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돈에 지배당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사실, 돈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돈을 섬기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돈을 추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이신 하느님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선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진 꼴이 됩니다. 사실, 재물을 섬기는 자들은 재물의 노예로 자신을 옭아맬 뿐입니다. 결국, 주님을 섬길 것인지, 우상을 섬길 것인지는 누구에게 속한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누구도 하느님과 재물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는 이유는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돈에 매여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매여 있는 존재이며, 소유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소유된 존재입니다. 곧 우리 자신을 관리할 뿐 소유할 수 없듯이, 재물도 관리할 뿐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재물도 모두 그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실 사람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5)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카 16,13)

 

주님!

당신보다, 제 자신과 재물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보다, 당신의 선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관리할 뿐, 소유할 수 없음을 알게 하소서.

소유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소유된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


재물의 용도는 무엇인가?  

-반영억신부-


몇몇 분에게 돈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하느님께 먼저 봉헌을 해야 하는데 특별히 물질을 그렇게 해 보십시오. 상점이나 식당, 사업장에 오시는 첫 손님을 예수님으로 생각하고 그 몫이 얼마가 되었든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든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랬더니 기꺼이 하겠다는 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한 달을 모은 것이라고 가져오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혹 손해를 보지 않았느냐?”고 여쭤봤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신부님이 하라 하니까 순명으로 계속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아마도 지난달 매상이 좋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나 곧 알게 될 것입니다. 돈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받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재물의 축복도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축복을 주시는 분을 섬겨야지 주어진 선물 덩어리를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주시는 분은 외면한 채 주어진 선물을 가지고 더 많이 소유하려고 다툽니다. 재물의 용도는 하늘의 거처를 마련하는 도구일진대 그것을 알면서도 재물의 노예로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재물은 분명 이용해야 하는 도구이지 섬겨야 하는 주인은 아닙니다. 재물의 유혹에서 자유롭기를 기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현세에서 부자로 사는 이들에게는 오만해지지 말라고 지시하십시오. 또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어 그것을 누리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지시하십시오. 좋은 일을 하고 선행으로 부유해지고, 아낌없이 베풀고 기꺼이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시오. 그들은 이렇게 자기 미래를 위하여 훌륭한 기초가 되는 보물을 쌓아, 참 생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1티모6,17-18).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에 내 영혼을 비추어 그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고 했습니다. 혹여 물질이 우리의 보물, 주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구약성경 집회서는 재물의 유혹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황금을 좋아하는 자는 의롭게 되지 못하고 돈을 밝히는 자는 돈 때문에 그릇된 길로 들어서리라. 많은 이들이 황금 때문에 파멸하였고 멸망이 그들 앞에 닥쳤다. 황금은 그것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장애가 되고 어리석은 자는 모두 황금에 사로잡히리라. 아무 흠도 없고 황금을 밝히지도 않는 부자는 행복하다”(집회31,5-8).

이런 의미에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는 말씀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불의함조차도 거부하지 않고 만나 모두를 하느님의 충실성 안에 초대하라는 말입니다. 선과 악, 흑과 백의 이분법적 단죄와 판단으로 자꾸만 갈라놓고 제 선함과 의로움을 내세우는 세대 안에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과 한계를 보듬고 살펴 여유와 자비를 갖추라고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가르칩니다"(함께야). 물질은 함부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선을 만들어 내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아무리 잘못이 크더라도, 허물을 안고 사는 죄인이라도 친구로 만들 수 있는 삶의 자세가 신앙인의 기쁨입니다. 제 입맛에 맞는 이들만 찾는다면 신앙인과는 거리가 멉니다. 재화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 루카 16,9-15: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조욱현신부-


어제 복음의 불의한 집사는 주인에게 영리함을 칭찬받았다. 주인을 사기 친 그 집사가 칭찬을 들은 것은 자기 것이 아닌 것으로 자기 소유가 될 것들, 즉 친구와 지지자들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담은 자기 소유가 아닌 것으로 자기 것이 아닌 것, 곧 가시덤불과 고통(창세 3,17-19)을 얻었다. 아담의 후예들인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을 위해 없어질 것들로 없어지지 않을 것을 사도록 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9절)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선을 베풀 때에 우리가 상대를 골라서는 안 된다. 우리는 늘 너그러워야 한다. 늘 문을 열어 두고 나그네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은 잘 활용하라고 하느님께서 대출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 재물을 잘 사용하여 백 배, 즉 현재 대신 미래, 없어질 것 대신 영원한 것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필요한 사람이 쓸 수 있게끔 그것을 나누고, 장차 그들의 도움을 받기를 기대해야 한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 재물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어떻게 더 큰 재물, 영원한 재물을 우리에게 맡기시겠는가?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 몫을 내주겠느냐?”(12절) 여기서 ‘남의 것’이란 우리가 소유한 재물을 가리킨다. 우리는 재물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알몸으로 태어났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1티모 6,7)라는 말씀대로이다. 우리는 그 재물에 대해 관리인에 불과하다.

 

땅의 재물로 가난한 이들에게 마음을 열어야 한다. 하느님의 법에 충실히 따르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 것이 아닌 물질로 주님을 따르는 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인 당신과 닮은 모습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13절) 하느님과 함께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해이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26) 하셨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는 버려야 한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는 것은 주인은 오직 주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물을 섬기는 자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주인의 권리를 행사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재물이 그 사람을 노예로 옭아매고 있다. 재물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재물에 대해 주인이 되는 삶이 하느님 앞에 올바른 자녀의 모습이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에 맞게 재물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 13)

-한상우신부-

우리를
위하는 것이
실은 우리를
망치는 것이
된다.

끈질긴 욕망의
슬픈 현실이다.

재물의 욕심은
하느님의
존재까지 마구
헷갈리게 한다.

하느님과 재물
둘 사이에는
언제나 우리의
선택과 결심을
필요로 한다.

두 주인을
섬기며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삶이다.

이것이 우리의
정직한 실상이다.

우리가 믿는
재물이 우리를
구원하진 못한다.

하느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재물을 중심에
두고서는 결코
행복할 순 없는
우리들이다.

재물의 섬김은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죽음의 삶이며
거품의 삶이다.

우리를 죽이는
독이 된다.

자기 소외와
자기 분열을
부추기는
재물의 섬김이다.

위령성월은
썩어가는
신앙을
바로잡는
은총의 시간이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본래의 우리
모습이다.

창조때의
본래 우리
모습으로
돌아가자.

영혼의 치유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

올바른 자리로
되돌려 놓는
올바른 섬김이다.

우리를 섬기러
오신 우리의
주님이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믿는 이들에게 재물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루카 16,9)

재물이 불의한 재물과 의로운 재물로 나뉘는 걸까요, 아니면 모든 재물이 다 불의한 걸까요?  자칫 이원론이나 극단주의, 합리화로 빠질 수 있는 질문일 겁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주님의 애정이 짙게 깔린 루카 복음서에는 재물에 대한 복음사가의 다소 부정적인 견해가 드러나 있는 듯합니다.

본시 모든 재화의 원천은 하느님이시지요. 그분이 모두 창조하셨고 또 돌보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믿고 맡기신 인간들 사이에 탐욕이 불거지면서 재화의 분배와 소유의 균형이 깨지고 말았지요. 결국 하느님의 모상이라서 귀하디 귀한 사람들 사이에 계급이 생기고 격차가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니 사실, 엄밀히 말하면 더 가진 자의 잉여분 재물은 잃은 자가 원래 소유했어야 할 '제 몫'인 것입니다.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루카 16,11)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루카 16,12)

예수님은 불의한 집사 비유와 연결하여, 재물을 다룰 때 성실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재물은 비록 불의하지만 성실히 다루어 의롭게 사용할 수 있고, 재물이 원래 하느님의 것이지만 성실히 다루어 공정을 회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본주의 자유경제 체제에서는 재물의 소유를 인정합니다. 소유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소득에 부과되는 세금이겠지요. 세속의 사정이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 셈법은 어떨까요? 하느님께서도 재물의 소유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 정당성이 나눔과 희사를 통해 획득된다는 것이 세속과 다를 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희년의 정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복음 환호송)       

예수님께서 당신의 소유와 부유함을 주장하시지 않고 내려놓으심으로써 우리에게 그 모범이 되셨습니다. 하느님 주권에 대해 완전한 순종과, 소유에 대한 완전한 비움을 통해 예수님은 오히려 모든 만물 위로 드높여지셨지요.(필리 2,10 참조)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예수님은 재물과 하느님을 각각 다른 편에 놓으십니다. 대충 두 팔로 뭉뚱그려 한꺼번에 안고 갈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생각은 바리사이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됩니다. 그들 중 다수가 돈을 좋아하는 부자이면서 동시에 종교 권력까지 거머쥐고 있었으니까요. 아마 그들은 하느님과 재물, 둘 다를 소유하고 있다고 자부해 왔을 테지요.

그리스어로 재물을 가리키는 말이 우상을 뜻하는 "맘몬"에서 유래한다고 하네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재화가 결국 사람을 두루 이롭게 하는 도구 차원을 넘어서, 사람의 욕망을 쥐락펴락하는 우상의 자리에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재물이 불의하게 남용되기는 너무 쉽고, 또 재물을 의롭게 사용하기는 더 어려워진 현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5)

이상하게도 재물이 많은 이가 힘과 지식과 명예까지 움켜쥐는 세상입니다. 기회와 공정의 균형이 무너진 것이지요. 사람의 내면과 인격을 보기보다, 소유와 겉꾸밈에 열광하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폼 나게 더 가져보려고 이웃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전력질주 합니다. 가난을 무시하고 혐오하면서요. 그런데, 이 모든 노력은 하느님께 오히려 "혐오스럽다"고 하십니다. 사람에게 우러러보이고자 하느님을 잃어버리는 슬픈 결과를 얻는 셈이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재물이 축복이 되는 지혜를 전수합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 그러나 내가 겪는 환난에 여러분이 동참하는 것은 잘한 일입니다."(필리 4,12.14)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고, 누려도 교만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를 위한 필리피 신자들의 지원과 희사는 오로지 그들과 하느님 사이의 일이 됩니다. 사람을 통해 하느님께서 사랑과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고, 재물이 가치와 정당성을 입는 것입니다.

"그것은 향기로운 예물이며 하느님 마음에 드는 훌륭한 제물입니다."(필리 4,18)

주님에게서 받은 양심을 순수하고 진실되게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내 것이 아닌 것을 점유하고 있을 때 마음이 불편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가난하고 도움이 절실한 이들의 몫으로 제자리를 찾아간다면 결국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되니, 재물이 주는 이와 받는 이에게 동시에 축복으로 변모합니다.

그런데 재물은 한번 맛들이면 헤어나오기 어려운 우상입니다. 아무리 가져도 충만함을 느끼지 못하기에 끝없이 매달리다 결국 하느님도 영혼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소유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우상, 두 존재가 화합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 말씀 묵상을 통해 만나는 벗님 여러분 모두가 주님께서 우리 손에 쥐어 주신 것을 성실하고 의롭게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많건 적건 우리가 소유한 재물이 우상으로 돌변해 악취를 풍기기 전에, 고귀한 축복으로 만들어 버리는 마법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손에서 베풀어지는 사랑과 더불어 우리 자신까지 "향기로운 예물, 하느님 마음에 드는 훌륭한 제물"이 될 것이니 이만한 영광이 또 어디 있을까요! 끈질기게 달라붙는 탐욕 사이에서 신앙의 외줄타기를 하며 사랑의 소명을 붙잡고 살아가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연중 31주 토요일-2012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을 이해하기 쉽지 않아 제 나름으로 뜻풀이를 해봤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재물을 나를 위해 쓰면 탐욕과 착복이 되니 불의하다.
재물을 제물로 쓰면 봉헌이 되니 의롭기는 하지만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제물을 원치 않으시고 사랑을 원하신다.
그러니 재물을 이웃에게 쓰도록 하라.
그러면 그 사용이 의로울 뿐 아니라 이웃을 친구가 되게 한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성실이란 본래 작은 일에 성실한 것이다.
성실치 않은 사람도 큰일에는 성실하려고 한다.
아니, 정신을 차리고 잘 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을 먹지만 큰일도 작은 일로 이루어져 있기에
마음과 달리 잘 해낼 수 없고 성실할 수 없다.
작은 것에 소홀히 하여 큰일을 망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하냐?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재물은 사랑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이다.
그러니 돈이 탐욕과 착복이 되지 않도록 집착하지도 말아야 하지만
돈을 허투루 써도 아니 된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고 하였지만
요행(복권)이나 폭력과 사기로 돈을 벌지 않고 애써 일해 돈을 벌고,
사치와 방탕을 위해 돈을 쓰지 않고 사랑이 되게 돈을 쓰라는 말씀이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자기 몫은 누가 챙겨주지 않으니 스스로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움켜쥐고 있으면 자기 몫은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의 것을 내가 성심성의껏 챙겨줄 때
그도 나의 몫을 챙겨줄 것이다.
탐욕의 움켜쥠이 자기 것과 자기 몫을 지켜주지 않고
사랑의 나눔이 오히려 자기 것과 자기 몫을 지켜준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것의 뜻은
재물이 하느님이 되는 그 물신物神과 하느님은 양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물신주의物神主義를 경계하는 말씀이다.


몇 년 전에 쓴 강론을 보니 이에 대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물신주의物神主義는 무엇입니까?
하느님 대신 재물을 믿는 것입니다.
돈이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고
반대로 돈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 사람 안에서 돈이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무 영향력이 없고 돈이 더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 해도 돈을 벌게 하는 하느님만 믿을 뿐입니다.

돈이 없으면 마음이 불안한데
하느님은 없어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봉사하러 가라면 가지 않는데
돈을 벌 수 있다면 가는 것입니다.

기도로 무엇을 하려 하지 않고
돈으로 무엇을 하려 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1월 10일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