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1월 6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0. 11. 5. 06:44

2020 11 6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 
(
루가 16 1-8)

 

 The master commended that 
dishonest steward for acting prudently.

 For the children of this world
are more prudent in dealing with their own generation
than the children of ligh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많은 사람이 오늘 복음의 비유를 읽으면서 의문을 가질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의해 보이는 집사를 칭찬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비유 속의 집사처럼 자신을 내쫓는 주인에게, 자신에게 불이익을 주는 사람에게 집사처럼 행동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불의한 집사의 비유는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세상 안에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을 찾습니다. 불의한 집사는 그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자기 자리를 잃게 된 집사는 ― 그 원인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표현되지는 않지만 ― 세상의 셈법대로 자신을 위하여 행동합니다.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행동은 정의에 따른 것도 사람들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주인과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줍니다. 그런 집사는 칭찬을 받습니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집사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그의 행동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찾아가는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을 찾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신앙인들 또한 믿음 안에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찾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세상 안에도 영리한 사람들이 있듯이 우리도 신앙 안에서 영리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도 줄 수 없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영리함보다 더 영리하게 우리의 구원을 찾고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중년 이상의 나이에도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중년을 넘어서면서부터 몸의 근력이 줄어들고, 심혈관 질환도 생기고, 여기저기서 아프다고 아우성을 칠 것입니다. 그래서 “무병장수하세요.”라는 말이 얼마나 대단한 말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유병장수는 많아도, 무병장수는 도저히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50년 넘게 사용을 했으니 예전 같지 않은 것이 더 당연한 결과입니다. 따라서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보다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왜 내가 아파야 해?”, “내가 왜 이런 고통 속에서 힘들어해야지?” 등의 말을 하면서 불만이 가득합니다.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고 나약함을 인정해야 새로운 변화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이제까지 누렸던 욕심과 이기심만을 계속 드러낸다면 새로운 변화, 새로운 길은 내 앞에 절대로 펼쳐질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는 겸손만이 하느님의 손길을 인정할 수 있으며, 세상의 기준에서 나오는 모든 불평불만을 내 안에서 제거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래야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불의한 집사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습니다. 주인의 관점에서, 집사의 행동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주인이 재산을 낭비하는 집사를 쫓아내려고 하지요.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집사는 쫓겨날 때를 생각해서, 주인에게 빚진 사람을 불러서 빚을 깎아줍니다. 지금으로 치면, 서류조작을 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는 행동을 더 한 것이니, 그는 커다란 벌을 받아야 마땅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과 달리, 이 주인은 오히려 영리하게 대처했다면서 칭찬합니다.

고개가 갸웃거릴 것입니다. 세상의 논리로는 받아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재산의 낭비를 아까워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이 만들어지는 것을 더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집사의 예견과 사리 분별, 영리함을 배우라고 이르십니다. 우리 것이 아닌, 이 세상의 사라져 없어질 물질을 활용하여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들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욕심과 이기심만을 간직하고 있으면, 도저히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겸손과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수용의 마음만이 하느님 뜻에 맞춰서 미래를 준비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정직을 잃은 자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J.닐리).


일과 돈의 상관관계

1)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
2)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못 버는 것.
3)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
4)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돈을 못 버는 것.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몇 번입니까? 당연히 1번일 것입니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 것은 몇 번입니까? 당연히 4번이겠지요. 이렇게 가장 극단적인 1번과 4번을 제외하면 몇 번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2번입니다. 잘하면 1번으로도 올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몇 번을 선택하시겠습니까? 1번은 도저히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아마 대부분 3번을 선택합니다. 문제는 이 3번이 아주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잘해야 돈만 버는 것이고, 잘못하면 4번으로 건너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순간에서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한 번 더 생각함으로 인해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돈을 쓴다고 다 친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전삼용신부-


오늘부터 시작하는 루카 복음 16장은 인간이 재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15장에서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하고 떠난 탕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는 유산을 가지고 나가서 그것을 탕진하였습니다. 그때 그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재물이 사라지자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청지기가 많은 친구를 사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왜 같은 돈을 써도 누구에게는 친구가 생기고 누구에게는 생기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친구를 사귀는 도구는 ‘불의한 재물’이지 나의 재물이 아닙니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재물이 나의 것이라고 느끼면 그것으로는 친구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쓴 돈을 반드시 회수하려 합니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보다는 부담스러운 마음을 줍니다. 따라서 주면 보답은 받을 수 있으나 관계가 형성되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그 사람 것이 아니니 갚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게 베풀어야 친구가 생깁니다. 오늘 청지기가 그렇게 재물을 써서 친구를 사귄 사람입니다.

 

       누군가 쓴 「왠지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다」란 글을 소개해 드립니다. 왜 우리는 남에게 잘해주면서도 친구가 생기지 않을까요? 이 글에 그런 고민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싫지는 않은데 더 가까워지는 게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다. 이야기해 보면 재미있고 공유하는 느낌도 많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다 좋은데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될 것 같은, 커피 같은, 아이스크림 같은 그런 사람이 있다. 멀어지면 걱정이 되고 오래 말 안 하면 이대로 침묵이 굳어질까 두려운 사람이 있다. 함께 오래 이야기 나누는 좋은 사람, 부담 없이 이야기해도 되는 사람, 그래서 여기서 그냥 말하고 싶은데 슬슬 다가와 앉거나 더 친절해지려 하거나 있어야 할 경계선 같은 걸 무시하려 하는 그런 사람이 있다. 사실 알맞지 않으면 저도 힘겨울 텐데, 저도 다 생각이 있을 텐데 이쯤이 그래도 좋다는 걸 저도 알 텐데 슬그머니 자꾸 가까워지는, 나도 모르게 가까워져서 놀라서 뒤로 발을 빼게 되는 사람이 있다. 왜 그러는 걸까. 그가 생각하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 것이 다른 걸까. 내가 잘못 생각한 걸까. 서로 오해에서 이만큼 다가선 걸까. 아니, 그런 건 아니다. 잘못 생각할 것이 무엇이 있다고. 그 또한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는 것을. 그 또한 가끔 침묵하고 서먹하고, 쑥스럽기도 한 것을. 사람 사이란 벽돌처럼 가운데에 쌓아 올리는 경계가 아닌 것을, 물 흐르듯 흐르기도 하는 것을, 그래서 가끔 내가 넘어가고 저가 넘어와 서로 미안하기도 한 것을. 그래서 더 걱정돼서 물러나, 그 부담스러움을 다시 일깨우는 것을. 아니, 솔직히, 친절해지고 싶지만 그걸 호감으로 느낄까 봐 두려운 사람이 있다. 호감이 아니란 건 아니지만, 호감 이상으로 느낄까 봐 두려운 사람이 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아니 원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저대로 나대로 잘 있으면서 쿨하게 그래 쿠울하게 부담 없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조금만 더 잘해주면 내가 잘해준 것보다 더 잘해줘서 위험한 사람이 있다. 알맞은 마음을 재는 내 마음이 고장 난 걸까. 알맞은 마음 이상으로 늘 퍼주려 하는 그 마음이 고장 난 걸까. 늘 한결같이 친절하고 고맙고 따뜻하고, 그래서 불편한 좀 오래갔으면 좋을, 친구가 되고 싶은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다. 누군가에게 나도 이런 사람일까.”

 

      왜 우리는 잘해주면서도 누군가에게 부담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그 사람 속에 자신이 준 것에 대한 보답을 받겠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것이니까 손해를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약삭빠른 종에게 이것저것 탕감을 받는 이들의 마음엔 부담이 없습니다.

‘어차피 자기 것 주는 것도 아닌데 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고맙기도 한 것입니다. 비록 갚아야 할 의무는 없지만 고마워서 내가 할 수 있을 만큼의 보답만 하면 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친구 사입니다. 우리는 그런 편안한 사람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친구가 생깁니다.

      유튜브 채널 ‘애니멀봐’에 「할머니 장례식에서 눈물 흘리던 백구가 2년 동안 한 일」이란 짧은 동영상이 있습니다. 할머니가 노환으로 돌아가시자 나이가 많고 몸도 성하지 않은 백구는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할머니와 함께 걷던 떡집과 절 등을 순례합니다.

보통 젊은 주인이었으면 개에게 밥을 주거나 보살펴 줄 때도 무언가 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부담 없는 사랑을 베푸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사랑을 받았어도 할머니의 사랑이 더 순수하고 깨끗하여 할머니를 더 생각하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

      ‘어차피 나도 받은 건데 뭐’라고 생각하며 재물을 쓴다면 그 재물을 받는 이들은 그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이만큼이나 해 주는데’라고 생각한다면 상대는 부담을 느낄 것입니다. 고마움을 느끼게 할 것인지, 부담을 느끼게 할 것인지는 주는 사람의 자세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친구가 생기고 안 생기고가 결정되고, 하느님 나라에서 나를 맞아들일 사람이 생길 것인가, 아닌가가 결정됩니다.

 

      부담이 아니라 감사가 나오게 재물을 사용해야 친구가 생깁니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과 거저 주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사랑스럽겠습니까? 예수님은 감사가 나오게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십니다. 그 이유는 그것을 당신 것으로 여기지 않고 다 아버지께 받은 것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는 모든 것, 그것들은 항상 본래 나의 것이 아닌 ‘불의한 재물’이어야만 합니다. 세상에 나의 것은 없습니다.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줄 때는 친구가 생길 수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뉴저지에 있는 뉴튼 수도원엘 다녀왔습니다뉴튼 수도원은 한국과 인연이 깊은 수도원입니다수도원에서 평생을 사셨던 마리노스 수사님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을 안전하게 북한에서 남한으로 데려왔습니다당시 배에는 5명의 임산부가 있었고그 중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모친도 있었다고 합니다마리노스 수사님이 하느님의 품으로 가시기 전에 뉴튼 수도원은 한국의 분도 수도회에 수도원의 운영을 부탁하였고, 2001년부터 한국의 분도 수도회의 사제와 수사님들이 뉴튼 수도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수도원의 성당피정의 집넓은 정원탁 트인 호수를 보면서 뉴튼 수도원의 미래를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미주 지역의 여행사에서 젊은이들을 위해서 수도원 체험과 미국 동부의 문화체험을 연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수도원에서는 젊은이들이 머물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하고수도원에서의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평화신문은 이를 홍보하고기사를 만들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수도원에서 지낼 수도자가 줄어서 걱정이라고 합니다젊은이들이 수도원 체험을 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낀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지금은 코로나19로 상황이 여의치 않지만많은 젊은이들이 수도원 체험을 하는 모습을 보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14세기 러시아의 성인이자 수사이며 화가이니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yov; 1360-1427)가 1400년에 완성한 삼위일체(The Trinity)’를 본 적이 있습니다삼위이신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세상을 사랑하시고하느님을 닮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율법의 정신과 뜻을 모르고 율법으로 죄인을 만드는 인간을 보셨습니다전쟁과 폭력으로 서로를 죽이는 모습을 보셨습니다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는 모습을 보셨습니다성화를 보면서 삼위이신 하느님의 연민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의 축복을 주셨습니다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는 1646년에 그린 아브라함과 세 천사에서 이 장면을 아름답게 묘사했습니다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세상의 기준으로 뉴튼 수도원을 운영하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힘들게 농사를 짓지 않고도매일 기도하지 않고도 수도원을 현대식으로 멋지게 신축할 수 있을 겁니다경제적인 이익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겁니다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수도원의 넓은 땅은 충분히 이용 가치가 있을 겁니다호숫가에는 식당과 별장을 만들 수도 있을 겁니다빛의 자녀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봅니다수도원 미사에 자주 참례하면 좋겠습니다피정과 교육의 장소로 이용하면 좋겠습니다관심을 가지고 기도와 후원을 해 주면 좋겠습니다뉴튼 수도원이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평화와 위로를 주는 안식처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현실의 짧은 삶이 아니라천상에서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아주 작은 것들을 충실하게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무엇이 있을까요첫째기도입니다아침기도저녁기도묵주기도를 자주하면 기도의 힘으로 우리는 살아 갈 수 있습니다차를 타면 간단하게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도 안전 운전에 큰 도움이 됩니다기도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둘째선행입니다. ‘선행을 베푸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주님께서도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시오.’라고 하셨습니다보답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하는 선행도 좋지만보답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하는 선행을 하느님께서는 더 좋아하십니다셋째성사생활입니다자주 미사에 참례하고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은 말씀의 양식과 성체를 함께 받게 됩니다혼인성사로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하느님의 커다란 축복입니다내 마음에 쌓인 죄와 분노미움과 시기들은 고백성사를 통해서 버려야 합니다.

 

기도와 선행 그리고 성사생활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그러나 그것을 아무나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께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내가 세상 속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만큼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나의 신앙도 키워나가도록 해야겠습니다. 


영리한 선택  

-반영억신부-


앞날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현명합니다. 재물에 투자하는 것보다 사람에게 배려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성공하려면 인재를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온갖 정성을 쏟는 것보다 하늘의 영광을 헤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되 약속된 미래, 영생, 천상행복을 생각하면서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그가 정직하지 못해‘해고 통지’를 했습니다. 해고 통지를 받은 집사는, 고민을 하다 자신의 장래를 보장받기 위한 부정을 또 저질렀습니다.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빚을 탕감해 주고 훗날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리라는 생각을 하였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것을 보고 그를 칭찬 하였습니다. 세속적인 사람이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려 애쓰는 모습은 칭찬할 만합니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었으니 결국 세속적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 그 권력에 기대어 잇속을 챙기는 사람들은 하늘 앞에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영리함을 발휘해야 합니다.

세상의 자녀는 세상의 것에만 영리하면 됩니다. 현세적인 이득이나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 자녀교육이나 재산의 축적과 같은 일을 위해서는 위장전입이나 탈법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오히려 잘나가는 사람으로 생각하니 말입니다. 아파트 청약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소문난 좋은 유치원에 등록하기 위해 길바닥에 텐트를 치고 밤을 지새우던 부모의 모습을 보면 정말 감동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세상일에는 정말 많은 수고와 땀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고위 공직자들의 자녀들은 너나할 것 없이 병역면제를 받는 것을 보면 참 약삭빠릅니다. 유전 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듯이 재물은 사람을 부리고 그래서 거기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죽는 줄 모르고 죽습니다.

세상일에도 이렇게 정성을 쏟거늘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더 해야 하겠습니까? 세속의 자녀도 막다른 골목에서 돈을 팔아 사람을 사거늘 마지막 날 주님의 대전에서 서게 됨을 알고 있다면 그 준비를 미리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합니다(루카12,43). 그리고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카12,4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로운 덕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이며, 마땅히 피할 바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다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따라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잘 이용하여 주님 마음에 들게 미래를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은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길 기다리는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제 삶을 일구는 능동의 삶입니다.

사실“많은 일을 해도 해야 될 일을 안 한 사람은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해도 해야 될 것을 한 사람은 많이 일한 것입니다. 그러니 말만 앞서거나 부산함만 피우지 마십시오”(성 요한보스코). 세속 일도 중요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한 일,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일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적 가치는 이 세상 안에서 실천해야 할 삶의 원리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만큼 큰 수고와 정성으로 복된 날 만드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어떻게 하지?-옳지, 이렇게 하자,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이영근신부-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 중의 하나는 우선 돈이라는 재물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권을 사들고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하고, 돈을 쫓다가 살인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돈이 주는 순 기능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의 역기능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인간을 파괴시키기도 합니다. 사실, 재물은 우리에게 선물임과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약은 집사의 비유는 재물과 맺는 관계가 하느님과 이웃들과의 관계 맺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주인의 재물을 맡아 관리하던 집사는 관리인으로서의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고 관리를 맡긴 분의 뜻을 거역하고, 맡겨진 재물을 자신의 뜻에 따라 쓰고 낭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를 “집사 일을 그만두게” 하자,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와 지금 있는 자리,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자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질문하고 답합니다.

“어떻게 하지? ~옳지, 이렇게 하자.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16,3-4)

 

그는 비록 불의한 관리이었지만, 지혜로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려 마지막 한 몫을 더 챙기려하지 않고, 오히려 재물을 나누었습니다. 쌓아놓은 재물을 나누고, 움켜쥐었던 것을 내주었습니다. 횡령하고 착복했던 것을 아낌없이 퍼주었습니다. 주인처럼, 아버지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떤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라는 질문을 떠올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이어지는 부분에서, 이 비유를 해설하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어주겠느냐?”(루카 16,12)

 

그러니, 이 비유는 결코 약삭빠른 청지기의 처신이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자녀들도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건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실, 자신에게 맡겨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고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는 신앙의 진실성을 드러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이 지금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와 우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아니면, 압박과 침해와 불목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어떻게 하지? ~옳지, 이렇게 하자.”(루카 16,3-4)

 

주님!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재물과 소유를 횡령했습니다.

제 자신을 마치 저의 것인 양 횡령했습니다.

입으로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제 자신을 주인인 양 섬겼습니다.

당신이 맡기신 이 몸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이 저의 주님입니다.

저를 자애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은 집사의 비유

-송영진신부-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루카 16,1-2)”

 

이 비유를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면,

고용주와 피고용자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반적인 상황입니다.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말은, 의무를 게을리 해서

주인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뜻인데, 주인의 뜻에 합당하게 재산을 관리하지 않고,

그 재산이 자기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손해를 끼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집사 일을 청산하라는 주인의 말은 장부를 제출하라는 뜻이고,

후임자에게 집사 일을 넘겨 줄 준비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집사를 해고하겠다는 통보입니다.

 

이 비유를 영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은 ‘주님이신 하느님’이고, 집사는 각 개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인생을 관리하는 집사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자입니다.)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막 사는 것은 주님의 재산을 낭비하는 일입니다.

그러다가 이쪽 세상에서의 인생을 마치고 하느님 앞으로 불려 가는 때가 올 텐데,

그때가 바로 집사 일을 청산해야 할 때이고, 자기의 인생을 정산해야 할 때입니다.

하느님께서 그것을 언제 통보하실지, 그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마지막 날을 맞이하면 장부 정리를 할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루카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연상됩니다.

“......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19-20)”

목숨을 되찾아 가신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은 인간들의 목숨의 주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약은 집사의 비유’에서 주인이 집사 일을 청산할 시간을 준 것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하느님께서 ‘오늘 밤에’ 라고 예고를 하신 것은 모두

인생을 정리하고 회개할 시간을 주신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시간을 얻지 못하고 그냥 떠납니다.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시간을 주시는데, 사람들 쪽에서 그것을 무시하거나

외면하고, 자기는 안 죽을 것처럼 오만하게 살다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아무런 정리도 하지 못하고, 회개할 틈도 없이 생을 마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3-4)”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면, 이 내용은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고

막막해진 집사가 먹고살 길을 찾으려고 잔꾀를 부리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면, 계기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려고 마음먹는 상황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계기로 해서 “계속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이제부터는 정신 차리고

회개하면서 주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지.” 라고 결심하는 사람도 있고,

같은 일을 겪어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아무 변화도 없이,

살던 대로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5-8).”

 

집사가 사람들의 빚을 줄여 준 일을 ‘먹고살 길을 찾기 위해서 잔꾀를 부린 일’로

생각하면, 잘못한 일이 있어서 해고당한 사람이 그 잘못을 뉘우치지는 않고

더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 됩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이 비유는, 그 집사가 먹고살 길을 찾으려고 ‘신속하고 민첩하게’

움직였다는 것 외에는 교훈으로 삼을만한 내용이 별로 없는 비유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그 집사를 칭찬했다는 8절의 말을 근거로 해서

집사가 옳은 행동을 한 것으로 해석하면,

사람들의 빚을 줄여 준 일은 잘못한 일을 바로잡은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에, “너희는 동족에게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신명 23,20).”

라는 율법이 있습니다.

아마도 집사는 주인의 뜻과는 다르게 자기 마음대로 이자를 받았을 것이고,

그리고 그 이자를 자기가 가로챘을 것입니다.

그랬다가 집사 일을 청산하라는 통보를 받게 되자 잘못을 뉘우치고,

자기가 잘못한 일을 모두 바로잡고,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았을 것입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것만 회개가 아니고,

잘못한 것을 바로잡는 일까지 해야 회개입니다.

<먹고살 길이 막막해서 잔꾀를 부린 것으로만 생각하면,

집사가 한 일은 회개가 아니고, 칭찬을 받을 정도로 올바른 일을 한 것도 아닌데,

그 막막한 심정이 회개의 계기로 작용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가 한 일은

잔꾀를 부린 일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도 작은아들이 회개하게 된 계기는

‘굶주림’이었습니다(루카 15,16-19).>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라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의 잔꾀를 칭찬하시는 말씀은 아니고,

위기가 닥쳤을 때 신속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칭찬하시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미적거리지 말고 지금 당장 회개하여라.” 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회개는 미루면 안 되는 일입니다.

언제나 항상 ‘지금 바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말로만 하는 회개가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즉 잘못된 삶을 바로잡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6,1-8: 약은 집사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는 교활한 사람이었다. 노예이기는 하였지만, 주인의 큰 재산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아 일했던 사람이었다. 오늘 복음의 집사는 자기가 맡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횡령을 하고 있다. 그런데 청지기뿐 아니라 빚진 사람들 역시 교활한 모습을 보인다. 당시 지주들에게 지불되는 빚이란 흔히 임대료를 말하는데 그것은 돈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나는 소출로 지불되었다.

 

이때 주인은 자기의 부정을 알아차리고 이제 자기를 해고하겠다고 통고한다. 그래서 그는 그야말로 기발한 생각을 해낸다. 그는 장부를 조작하여 빚진 자들에게 실제로 빚진 액수보다 훨씬 적은 액수로 고쳐 쓰게 했다. 그렇게 해두면 자신에게 해고라는 최악의 불운이 닥치더라도 빚진 자들에게서 자기가 또 받아낼 수 있는 좀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러한 처사에 주인은 충격을 받았지만, 그 약은 집사의 교활한 처사에 감탄하며 그 집사를 칭찬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들이 세속적인 삶을 위해서 얼마나 교묘한 수단 방법을 짜내고 있다는 것이다. 약은 집사의 비유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즉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는 이 집사와 같이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면서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는 종말론적 가르침이 담긴 말씀이다.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 이들이 이처럼 갖은 재주, 갖은 꾀를 다 동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사람들이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 돈이나 부귀영화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만큼 하느님과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삶, 신앙생활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집사가 횡령하고 사기를 쳐가면서 준비한 그래서 그토록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삶은 언젠가 끝나고 말 삶이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우리의 육체적인 삶을 위해서 노력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도 모든 노력을 다할 수 있는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도 언젠가는 하느님 앞에 우리가 책임을 갖고 관리하던 우리 자신의 집사 일에 대한 셈을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셈을 바치는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날에 대비하여 언제나 준비되어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고, 항상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주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항상 지금 여기에서부터 구원을 체험하고 그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그래서 우리도 그만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여야 우리가 맡은 집사 일을 잘하는 것이다. 언제나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 8)

-한상우신부-

변화무쌍한
우리 삶의
모습이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 보다는
위기의 이 상황은

우리가
새로워지는
발전의
계기이다.

성장은
위기 속에서
찾아온다.

위기 속에
성장이 있다.

성장은
현실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것이다.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변화된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리한 집사는
주인을 탓하거나
자신의 상황을
탓하지 않았다.

대처할 방법을
끊임없이
찾았다.

그 방법이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다.

세상의 자녀도
빛의 자녀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삶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이
삶이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삶이란

다시 태어나고
다시 시작하는
변화의 삶이며
관계의 삶이다.

지금이
새로워질
변화의
때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4)

어떤 부자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이 들리는 집사를 해고하려 하자 그 집사가 묘수를 냅니다. 그가 적극적으로 결백을 호소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낭비에 대한 소문은 얼마간 사실인가 봅니다.

그의 계획은 집사 자리에서 쫓겨났을 때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 사람들을 미리 만들어 두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주인에게 빚진 이들을 불러 그들의 빚을 주인과 상의도 없이 감해 줍니다. 빚이 경감된 이들이 집사의 월권 사기 행각을 알고도 동조한 거라면 공범이 되겠고, 주인의 자비로 받아들여 감사했다면 주인을 위한 그들의 축복이 하늘에 올라갔겠지요.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루카 16,8)

주인은 제 재산에 손실을 입게 된 것도 모르고 오히려 집사를 칭찬합니다. 낭비에 손해까지 끼친 이를 칭찬하는 주인의 모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여럿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온다면 거짓과 사기가 미화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 주신 비유 속 집사는 이 세상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억지로 본받고 교훈 삼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영악하고 이악스럽게 영리할 뿐, 지혜롭고 슬기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세상 셈법과 계산, 처세술이 능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비유 안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마치 숨은그림찾기처럼 감추어져 있습니다. 바로 주인의 모습에서입니다. 집사에게만 집착하면 찾기 어려운 사랑이지요.

처음 집사가 낭비한 재산은 아마도 그 집사 자신을 위해 쓰였겠지만, 해고 통보 뒤에는 타인을 위해 쓰여집니다. 물론 이 역시 집사 자신의 미래를 위한 것이니 순수한 동기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만, 빚에 허덕이는 가난한 이들이 덕을 본 건 사실이지요. 주인은 제 재산의 손실보다 가난한 이들의 무게가 덜어진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비록 집사의 얕은 꾀에서 나온 처사였지만 그 혜택이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갔기에 주인은 흡족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세상의 자녀와 빛의 자녀를 대비시킵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필리 3,19-20)

오늘 집사는 시종일관 자신만을 위해 계획하고 움직입니다. 자신을 하느님 자리에 두고 우상처럼 섬기는 세상의 자녀답게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 자신의 안위와 이익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좋게 돌리는 분은 주님이시니, 과연 한수 위에 계십니다.

빛의 자녀는 세상의 자녀들처럼 잇속에 영리하지는 못해도 지혜롭고 슬기롭습니다. 지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이기에 세속적 이치에 밝은 계산속으로는 범접할 수 없지요. 다만,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피조물을 위해 이 모든 걸 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빛의 자녀들의 헌신 못지않게 세상 자녀들의 열매도 주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쓰고 계십니다.

세속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도구가 되고 싶은지, 빛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도구가 되고 싶은지,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어느 편이 되었든 어차피 우리는 그분의 도구로 쓰일 운명이니까요. 하늘의 시민, 빛의 자녀답게 주님의 충실한 집사로 그분의 집을 살피고 돌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목소리를 빌어 주님께서 벗님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의 화관인 여러분, ... 사랑하는 여러분!"(필리 4,1) 

선심 팍팍!    

-김찬선신부-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회개한 집사.

저는 오늘 복음의 비유에 나오는 집사를 회개한 집사라고 하고 싶습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그를 불의한 집사라고 하고, 그러나
불의가 드러나자 영리하게 대처하였다 해서 영리한 집사라고 하지만
그 속뜻을 들여다보면 이 집사는 회개한 집사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불의한 집사였습니다.
집사란 주인을 대신하여 주인 재산을 잘 관리하는 것이 그의 임무인데
자기 마음대로 낭비한 자였으니 불의한 자가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자를 주인이 그대로 놔두면 계속 낭비를 일삼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에게 집사 자리를 내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살 궁리를 하고 이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곧 주인에게 빚 진 종들의 빚을 탕감해주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얼핏 생각할 때 이것은 또 다른 불의가 아닐까?
또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 것보다 더 불의한 짓이 아닐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만 주인의 생각은 다릅니다.

주인의 재산을 가지고 선심을 쓰는 것이
주인이 집사에게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이신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시기에
선심을 쓰는 것, 당신의 종들이 잘 되게 집사가 마음 쓰기를 원하십니다.v
본래 집사가 하는 일이 종들에게 제 때에 양식을 나눠주고
종들이 건강하고 충실하게 일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
곧 요즘 말로 하면 종들의 복지를 담당하는 것인데 그것을 잘한 것입니다.

사실 집사는 자기가 주인인 양 행세해서도 안 되고,
주인의 재산을 착복하거나 자기를 위해 흥청망청 써서는 안 되지만
맡겨진 재물을 종들에게 골고루 쓰는 것은 주인이 원하는 바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 하느님은 선이시고, 모든 선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모든 선의 주인이시고, 모든 선은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그런데 모든 선의 주인이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은,
내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실은 내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며,
이렇게 생각하며 사는 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가난이지만
우리가 살아야 할 또다른 것은 하느님 것의 선용입니다.

곧 하느님의 것을 내것인 양 너무 인색하게 굴지 말고,
하느님의 것을 가지고 이웃에게 팍팍 선심쓰는 것이 선용이라는 것입니다.v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수도원에 하나밖에 없는 성경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며
성경에 좋은 일을 하라고 쓰여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으며,
하느님께서 쓰라고 주신 것을 내가 필요하면 내가 쓰되
더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줘야 한다고 하였지요.

그런가 하면 프란치스코는 서리도 잘 하였지요.
어느날 길을 가다가 때가 되어 형제와 같이 포도를 따먹었었는데
동료는 도망가 붙잡히지 않았지만 프란치스코는 붙잡혀 많이 얻어 맞았고,
길 가는 내내 '맛세오는 잘 먹었네, 프란치스코는 잘 맞았네' 하며 갔다지요.

프란치스코에게 포도밭의 주인은 하느님이고,
서리란 하느님의 것의 위치 이동이기에 죄의식이 없었던 것인데,
다만 자기가 포도밭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한 대 얻어맞은 거지요.

내게는 가난하되 이웃에게는 팍팍 선심쓰는, 그런 가난과 사랑을 오늘부터!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11월 4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