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1월 11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0. 11. 10. 06:16

2020 11 11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루가 17,11-19)


"Stand up and go;
your faith has saved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나병 환자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병에서 낫게 된 기적은 이렇게 짧게 표현됩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은 예수님께 자비를 청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만이 유일한 희망이었고, 유일하게 병에서 해방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람대로 병에서 치유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한 명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의 감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 그는 구원을 얻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 복음은 치유와 구원에 대하여 말합니다. 나을 수 없는 병에서 치유된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그것이 곧장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병 환자의 치유가 구원으로 이어지는 그 사이에는 ‘감사’라는 요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께 많은 것을 청하지만, 그 기도와 청원이 모두 실현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도와 청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자주 체험하고는 합니다. 우리는 꼭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청하는 것에는 익숙하고 감사하는 것에는 더딘 우리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청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고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고 더 나아가지 못한다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 기쁨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비와 감사는 하나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올해의 가장 큰 이슈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올 초부터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 전파는 우리의 삶 전체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목적으로 비대면 활동이 강조되었고, 건강에 대한 염려를 많이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이 코로나바이러스 전파로 인해서 우울증이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코로나 블루’라고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는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로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치면서 생긴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을 뜻합니다. 어떤 정신의학과 의사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하면 안 되는 일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에 숨이 막히는 것입니다.”

감염병 예방을 위해서 하지 말라는 것들을 잘 보면, 원래가 안 하던 것들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하지 말라!!”는 말을 듣다 보니 숨이 막히고 힘들어지는 것이지요. 바로 이때 필요한 것이 긍정적인 상황을 찾는 것, 특히 감사의 이유를 찾는 것이라고 합니다. 감사의 이유를 찾게 되면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것들이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환자들을 고쳐 주실 때의 모습과는 다른 말씀으로 고쳐 주십니다. 즉,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하시지 않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하고 이르십니다.

나병이 치유된 자들에게 그렇게 할 것을 율법이 지시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그들이 사제에게 몸을 보이고 병이 나은 것을 감사하는 예물을 올리라고 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없애러 오신 분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분이지요. 그래서 그들이 당신의 힘으로 치유되었으니 그 증거를 사제들에게 가서 보이라며 율법에 따른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제 나병 환자 열 사람은 사제를 향해 갑니다. 그런데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진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이때 그들의 선택은 어떠했습니까? 아홉은 사제를 향해서 갔고, 단 한 명만 그것도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사제에게 가라는 주님의 명령에는 율법을 따르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드려야 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감사를 드려야 했을까요? 단순히 사제에게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자비를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올려야 했습니다.

이렇게 구원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또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명은 단순히 병의 치유만을 받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며 주님 앞에 나온 사람은 훨씬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누군가를 알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이고 진지하게 노력하면, 그 결과 우리는 상대의 본질에 어느정도까지 다가가 있을까(무라카미 하루키).


우리의 근현대사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해집니다. 개항기에는 신분 해방을, 일제강점기에는 조국 해방을, 현대에는 빈곤 해방을 위해 노력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노력을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노력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다음 세대에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쫄쫄 굶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자녀들에게 교육했습니다.

이 꿈이 실제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 경제 12위의 위치까지 올라갈 정도로 부유함을 또 안정이라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지금 현재는 신분제도 없고, 또 어느 나라의 식민지도 아닙니다. 외국에서 돈을 빌려주지 않을 정도로 가난한 절대 빈곤에서도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특히 코로나로 전 세계가 힘들어할 때 보여 준 우리나라의 힘은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의 과제는 무엇일까요? 우리 선조들이 하셨듯이, 우리 역시 다음 세대를 위해 꿈을 꾸어야 합니다.

봉사하면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의 주제도 역시 ‘믿음’입니다. 믿음을 더해달라는 제자들의 청에 종이 주인이 시킨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라고 하신 비유에 이어지는 또 다른 말씀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분명 주님을 받아들였을 것이고 주님을 받아들였다면 주님의 부르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누군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면 새로운 소명이 생깁니다.

    제가 대학생 때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5년 동안 읽으며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동시에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싶어 사제가 되고 싶은 꿈이 생겼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따르고 싶어집니다. 문제는 그 소명을 따르면서 벌어지는 상황입니다. 부르심을 따르면서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10명을 치유해 주십니다. 어쩌면 이것이 주님을 받아들이기 이전과 이후의 상태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주님을 받아들여 새로운 소명의 길로 나아가면 그 이전의 상태는 마치 나병이 걸렸을 때와 같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소명으로 받는 성령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소명도 주시지만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도 주십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고 치유해 줄 때가 아니라 당신께서 불러주시고 치유해 주신 것에 감사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불러주신 것에 감사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직 믿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유튜브 채널 ‘감동 실화 영상’에 ‘어린 강아지는 자신을 구조해준 남성을 만나자...’란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캐나다에 사는 와그너씨는 심한 피부병에 걸린 유기견을 근처 병원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는 와그너씨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아 목숨엔 지장이 없었지만 아무도 심한 피부병을 앓는 그 녀석을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모조’란 이름을 지어준 그 녀석이 어떻게 되었는지 와그너씨가 동물 병원에 전화했지만, 모조는 여전히 동물 병원에 있었습니다. 와그너씨가 모조를 키우기로 하고 병원에 다다르자 피부병으로 털이 하나도 없는 모조는 와그너씨에게 달려들어 마구 반가운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와그너씨로부터 키워진 모조는 이제 털도 자라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모조는 길거리에서 지내던 삶에서 와그너씨 집에서 살기 위한 규칙을 준수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런 규칙을 강요한다고 와그너씨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분명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은 이와 같은 것을 느낍니다. 나병이 치유 받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봉사하면서도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유튜브 채널 ‘애니멀봐’에선 4년 동안 계속 자신의 집이 있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백구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래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간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시고 집은 재개발로 지정돼 허물어졌습니다. 그렇지만 백구는 아무도 보살펴주지 않는데도 4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것을 안 동네 아주머니가 2년 동안 백구에게 먹을 것을 놓아주었습니다. 백구에게 지금 가장 행복한 일은 자신을 보살펴주었던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기 이전의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무엇을 해야 좋은지 몰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삶의 의미를 알려주셨습니다. 그 의미를 일단 맛보았다면 다른 삶은 다시 나병이 걸리는 삶과 같습니다. 사람이 개 한 마리를 불러준 행복이 이 정도라면,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행복은 얼마나 더 클까요?

    본당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억지로 시켜서 자신도 억지로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봉사하면서 받는 주님의 성령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을 받았다면 봉사하기 이전의 삶은 나병에 걸렸던 삶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봉사하며 감사하지 못한다면 아직 영적인 나병 상태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봉사한다면 감사하고 주님을 찬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성령의 보답은 그 봉사를 통해 겪는 모든 고통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을 더 완고한 파라오로부터 빼내는 작업은 엄청 힘에 부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모세에게 성령으로 상징되는 지팡이를 주셨습니다. 자신이 이전에는 절대 할 수 없었던 능력으로 감옥에 갇혀있는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모습을 볼 때, 도망치기 급급했던 40년 전의 자신의 모습은 나병이 걸렸던 것과 같이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봉사하기 이전의 삶이 그립다면 그건 절대 주님께서 불러주신 봉사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응답했다면 부르심을 받기 이전의 상태가 마치 나병의 상태와 같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하느님께서는 제가 생각하지 않은 방법으로 제게 길을 보여 주신 적이 많습니다몸이 조금 피곤하고지쳤을 때입니다일주일 전에 잡힌 약속을 취소하기 어려웠습니다신부님들과 전임 사목위원들과의 약속이었습니다하루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날씨가 안 좋아서 일정을 취소한다고 하였습니다당일 날 날씨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지친 몸과 마음을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2020년의 코로나19는 신문사의 운영에도 커다란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신문 홍보는 신문사의 재정에 큰 도움이 되는데 전혀 홍보를 나가지 못했습니다신문의 광고도 도움이 되지만 예년에 비해서 광고도 많이 줄었습니다그러나 코로나19는 저 자신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함께 지내는 사제들과 돈독한 정을 나누는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의 미사를 도와 줄 수 있었습니다코로나19가 아니라면 마음이 있어도 할 수 없었습니다. ‘주사위는 사람이 던지지만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잠언의 말씀을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어제 내린 비 때문에 오늘 옷이 젖는 경우도 없습니다아직 내리지 않는 비 때문에 우산을 쓰는 경우도 없습니다근심과 걱정보다는 감사와 희망으로 사는 것이 좋습니다.

 

이민 초기에 한인 성당이 생길 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본당 신부님을 도와서 열심히 일하였다고 합니다아이들과 함께 겨울 여행을 가는 문제로 의견이 나뉘었다고 합니다주말에 가면 가족들이 모두 함께 갈 수 있고미사를 봉헌할 수 있으니 주말에 가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당시에는 주중에는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는 교우들이 많았다고 합니다주중에 갈 수 있는 사람만 가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모두가 갈 수 없는 상황이라면 갈 수 있는 사람만 가자고 하였습니다주일에는 본당 미사를 비울 수 없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결정은 본당 신부님의 몫이었습니다본당 신부님은 자신의 의견과 다른 결정을 하였고그 뒤로 본당의 봉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늦은 나이였지만 다시 대학에 입학하여 교사가 되었고 학생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쳤다고 합니다대부분의 한인 공동체에 한국학교가 생겼고아이들은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배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그런 열정이 결실을 맺어서 한국어가 제2외국어로 고등학교 교과에 채택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비록 신부님과 의견이 달라서 섭섭했지만 돌아보면 이민사회에서 교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합니다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라는 말이 제게는 깊은 감동으로 남았습니다.

 

부부는 함께 사는 것이 기적이라는 책이 있습니다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하지만 부부는 엄연히 이심이체(二心異體)’입니다단정하고 깔끔해서 좋았고자유롭고 편해서 좋았지만 결혼하면 깔끔한 것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자유로운 것은 질서를 깨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과 몸을 가진 사람이 부부가 되어 사는 것이 기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나와 생각이 다르고삶이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사는 것이 부부입니다삶의 기반이 다르고생각이 다르고직업이 다른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모였을 때 문제가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중요한 것은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지혜가 필요합니다그래서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나의 의로움 때문에 공동체가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에 공동체는 부족함에도 하느님께로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질문을 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습니까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습니까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십시오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습니다.” 이제 단순히 피부가 깨끗해 진 것을 넘어서 영혼이 구원받았음을 선포해 주십니다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 같지만사실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과 우리들의 뇌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어쩌면 눈은 사물을 바라보는 창문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기쁜 마음으로감사하는 마음으로고마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렇게 기쁘고감사하고고맙게 보일 것입니다원망하는 마음으로탐욕스러운 마음으로시기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이비귀환으로 보일 것입니다우리들의 마음이 있는 곳에우리들의 몸도 있는 것입니다.

 

당신 이름 위하여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당신 함께 계시오니두려울 것 없나이다당신의 막대와 지팡이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모든 일에 감사하여라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 


살아있는 사랑, 그 가장 구체적인 표현은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 측은지심입니다!

 -양승국신부-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님의 축일이 다가올 때 마다, 마음씨 따뜻한 한 형제님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저희 수도자들에 대한 마음이 각별하셔서, 언제나 뭐 하나 더 못해주셔서 안타까워하시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한번은 형제님께서 저희 수도원을 방문하셨는데, 살아있는 성인(聖人) 같은 분이셨지만, 그에 못지 않게 장난끼가 많으셨던 노신부님을 만났습니다. 마침 날씨가 스산해지는 겨울 초입이었는데, 형제님 보시기에 운동을 마치고 들어오시는 반팔차림의 신부님 모습이 너무 마음에 걸리셨던가 봅니다. 

 

형제님께서는 갑자기 당신이 입고 계시던, 당시 전국민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당시 그 자리에서 현찰과 맞바꿀 수도 있었던 점퍼를 벗어 신부님께 입혀 드렸습니다. 그 순간 얼굴이 환해지신 신부님의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형제님이 입고 계신 바지를 가리키면서 하시는 말씀 “이 바지도 아주 좋아보여요!”

  

그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형제님께서는 조금도 지체없이 바지를 갈아입으러 당신 차로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당혹스런 나머지 형제님의 팔을 잡으면서, 바지만을 절대 안된다며 겨우 만류했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님께서도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한 추운 겨울 날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군인으로서 열심히 예비자 교리를 받고 있던 마르티노가 말을 타고 교외로 나갈 때였습니다. 

 

한 가련한 거지가 나타나 마르티노에게 손을 벌렸습니다. 태생적으로 인정 많고 마음 따뜻한 그였기에, 즉시 지갑을 꺼내 지폐 몇장을 쥐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필 그날 따라 지갑은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잠깐 난감한 기색을 하던 마르티노는 지체없이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들었습니다. 물론 그 순간 거지는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이 군인이 갑자기 왜 이러시나?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나 마르티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뽑아든 칼로 자신이 걸치고 있던 외투를 반으로 잘랐습니다. “형제님! 지금 제가 가진 돈이 없어 정말 죄송합니다. 날씨도 추운데 이 외투로라도 찬 바람을 막으십시오.”

  

반쪽짜리 외투만 걸친채 숙소로 돌아가는 마르티노를 본 사람들은 다들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마르티노의 꿈에 반쪽짜리 외투를 입은 거지가 나타났는데, 그분은 곧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옆에 서 있는 천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입고 있는 이 외투는 아직 예비 신자인 마르티노가 내게 준것이란다.”

  

그 특별한 꿈은 마르티노 생애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에게 있어 세상 속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은 곧 예수님이셨습니다. 그의 자비심과 측은지심은 점점 커져갔고, 그로 인해 해방되고 새 삶을 시작한 노예나 종의 숫자는 이루 다 셀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간절히 바라던 세례를 받자마자 마르티노는 군대를 퇴역했습니다. 성 힐라리오 주교를 찾아가 사제품까지 받았습니다. 투르의 주교가 선종하자 역사상 전무후무한 특별한 일이 생겼습니다.

 

투르 교구 내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 일동이 한 목소리로 들고 일어나 마르티노를 투르 교구의 주교로 추대했습니다. 지극히 겸손했던 그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몸을 숨겼지만, 사람들은 끝까지 그를 찾아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많은 사목자 투르에게 장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당시로서는 초고령인 80세까지 살게하셨습니다. 최후의 모습 역시 장엄했습니다. 교구내 가장 외진 지역을 사목방문하던 중 중병에 걸려 선종했습니다.

  

제자들은 투르 주교의 병상 주변에 둘러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전국민적인 애도가 계속되었습니다. 그와 관련이 컸던 두 지역 포아티에와 투르는 성인의 유해를 서로 모셔가려고 쟁탈전까지 벌였습니다. 

 

결국 마르티노가 주교로 사목했던 투르에서 장례미사가 거행되었고, 거의 모든 시민이 장례미사에 참석했으며, 2천여명이 넘는 수도자들이 장례행렬은 장관 중의 장관이었다고 전해집니다.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절실히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사목자가 교우들을 지극정성으로 사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사목자가 교우들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은 일방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사랑은 오고가야 바람직합니다. 또한 사랑은 멈춰서 있어서는 안됩니다. 역동적으로 움직여야 참 사랑입니다. 살아있는 사랑, 숨쉬는 사랑, 그 가장 구체적인 표현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 배려심, 측은지심입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나병을 치유 받은 열 사람 중에서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17,18)

 

만약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아홉 중에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고 있다면, 대체 무엇 때문일까? 이 질문은 가장 분명한 영적인 선택 하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묘하게도,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믿지 않기가 일수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는 마음속에서 그 실상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감사하지도 기뻐하지도 못하고, 자비를 입었음에도 여전히 무엇인가를 채우고자 안달하거나, 불평하고 원망하는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마치 아버지께서 베푸는 잔치에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 서 있는 큰 아들과 같습니다. 그래서 나병을 치유 받았으면서도, 하느님을 찬양하지도 감사를 드리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와 감사드린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를 불러온 것입니다. 그러니, 나병의 치유가 구원인 것이 아니라, 그 치유가 하느님의 사랑임을 믿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은 감사를 불러옵니다. 그러기에, 지금 감사하며 기쁘게 살고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결국, 그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지, 아닌지는 ‘그가 감사와 가쁨의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닌지’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아침 식사 때 빵에 발라먹는 꿀 한 숟가락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꿀 한 숟가락, 이를 위해 하느님은 몇 천 마리의 벌을 몇 천 시간 동안 날아다니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몇 천 가지 꽃들을 피게 하셨고, 태양을 비추셨습니다. 비가 오면 벌들이 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지구를 약간 기울어지게 만드셨음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해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해마다 발육과 성숙을 체험하고, 죽음과 소멸도 체험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같은 계절만 있었을 것입니다.

또 밥상의 반찬을 두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음식들이 바로 나를 위해 목숨 바치고 있음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목숨이 나를 위해 몸 바쳤는지! 닭은 나를 위해 몇 마리 쯤 목숨을 바쳤을까요? 또 몇 마리의 소가, 몇 마리의 멸치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쳤을까요?

이처럼, 감사하는 일은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의식하면서, 모든 삶을 지속시켜주고 있는 많은 기적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의 신비를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기적을 일으키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눈! 신비를 바라보는 눈! 우리 안에서 살아계시며 활동하시는 그분을 볼 줄 아는 눈이야말로, 바로 감사의 눈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페 5,20).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루카 17,16)

 

주님!

감사하게 하소서!

청하기도 전에 듣고 계시는 당신께 감사하게 하소서.

베풀어지기도 전에 이미 품으신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치유보다 치유시키는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모든 것 안에 깃든 당신의 자비와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무감각하지 않게 하소서.

치유를 받고도 감사할 줄을 모르는 배은망덕은 말게 하소서! 아멘.


돌아가 감사를 드렸다  

-반영억신부-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5,16-18)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차고 넘칠 때는 물론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고, 잘못되면 탓을 다른 사람이나 하느님께 돌리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서운함이 앞섭니다. 그 처지가 어떠하든 감사하면 또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는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또 은혜를 입고도 전혀 아닌 양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아니, 더 받아야 하는 데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에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부르며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17,13)하고 외쳤습니다. 사실 그들은 부정 탄 사람들로 낙인이 찍혀 멀리 동네 밖에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 졌는데 한 사람만이, 그것도 유다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와’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제에게 몸을 보이는 것보다 먼저 예수님을 뵙고 감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누려야 할 혜택을 누린 것뿐이었습니다. 얼른 가서 사제에게 보이고 자신의 삶을 원래 자리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습니다. 아니, 하느님의 은총보다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어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구원의 혜택은 이방인, 죄인에게도 열려 있고, 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과 그 사람 자신의 믿음과 협력이 중요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자녀들 가운데 들지 않는 이방인이었고 자기가 하느님께 어떤 것을 내 세운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를 간구했고 결국 얻었으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몸의 치유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이 더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그야말로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달랐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여 큰 은총을 입었음에도 하느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선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은혜를 당연히 생각 말고 은혜를 통해서 능력의 하느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매사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결국은 불평불만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감사할 것을 찾아보십시오. 살아있음이 감사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신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받기만 하는 것, 기다리기만 하는 것, 청하기만 하는 것, 이제는 그만할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28,7). 구원은 감사하는 이들의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홉은 어디에 있느냐? 

-송영진신부-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2-19)”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열 명의 병자 모두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자기들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여기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병자들의 말은 병을 고쳐 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라는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아마도 “너희가 청하는 대로 해 주겠다.” 라고

약속하시는 말씀도 하셨을 것입니다.

병자들은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사제들에게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병을 고쳐 주신 다음에 그들을 보내시지 않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병을 고쳐 주셨을까?

그것은 “그들을 ‘당신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또 “몸의 치유로 그치지 않고 영혼의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라고 해석됩니다.

열 명 모두, 처음에는 예수님을 ‘병을 잘 고치는 의사’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랬다가 병이 나은 뒤에,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은 구세주’ 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고,

구세주를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구세주이신 분만이 주실 수 있는

영혼 구원을 얻기 위해서 되돌아왔습니다.

다른 아홉 명은 똑같은 기적을 체험했지만

‘예수님은 구세주’ 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고,

그저 운이 좋아서 병을 잘 고치는 의사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런 차이가 생겼을까?

 

사마리아 사람은 몸의 치유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도 희망했지만,

다른 아홉 명은 몸의 치유만을 희망했을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속을 꿰뚫어보시는 분이니까

다른 아홉 명의 생각과 믿음과 마음을 알고 계셨을 텐데,

그리고 그들이 그냥 가버릴 것도 아셨을 텐데,

그것을 아시면서도 왜 그들이 청하는 대로 병을 고쳐 주셨을까?

그러면 안 된다고 미리 가르쳐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우리가 예수님의 생각을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자유의지와 선택권을 존중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과가 그렇게 될 것을 아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믿음’과 ‘감사하는 마음’은 강요할 수 없습니다.

또 ‘깨달음’도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단순히 ‘수명 연장’만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몸의 건강’만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건강한 몸으로 살면서 장수를 누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난다면 허무할 뿐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5)”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만수무강, 부귀영화,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허무하게 끝나는 것은 똑같습니다.

(실제 현실을 보면, 만수무강,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자만심에 빠지고 교만해져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도 회개하는 사람이 있긴 할 텐데,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자신이 누리는 부귀영화를 버릴 것입니다.)

 

<혹시라도 “온 세상도 얻고, 만수무강과 부귀영화도 누리고, 저쪽 세상에 가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천지창조 이후로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누리고,

모든 것을 다 얻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어떻든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 대답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에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원천 봉쇄되었습니다(창세 3,24).

그랬다가 예수님께서 오셔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 뒤를 따라간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그 생활은

세속적인 만수무강, 부귀영화와는 너무 거리가 멉니다.

“왜 꼭 그래야만 하는가?”

이 물음의 답은, “믿음의 순수성을 위한 단련이다.”입니다(1베드 1,7)>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 사마리아 사람만 되돌아오고

다른 아홉 명은 그냥 가버린 것이 서운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고,

그들이 몸의 치유로만 만족하고서 영혼의 구원은 희망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입니다.

(은총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서 감사드릴 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감사드릴 줄 모르는 믿음은 많이 부족한 믿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에게 하신,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그의 치유를 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하고,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흔들림 없이 가라.” 라고 격려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복음: 루카 17,11-19: 한센병 환자 열 사람의 치유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10명의 한센병 환자들을 만나신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14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영적으로 깨끗해지도록 율법에 따라 그들을 사제들에게 보내신다. 아울러 치유도 해 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깨끗해졌기 때문이다. 율법은 그들이 사제에게 몸을 보이고 병이 나은 것을 감사하는 예물을 올리라고 명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다른 한센병 환자에게 그러셨듯이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하시지 않고 사제들에게 보이라고 하신 이유이다. 성 라자로 마을의 피정의 집을 “아론의 집”이라고 명명했다. 아론은 사제이다. 구약에서 사제가 오늘 복음에서와같이 한센병이 걸린 사람이 치유되었을 때, 보고 치유되었음을 선언한 다음 정상생활을 할 수 있었듯이, 아론의 집의 의미도 같다. 아론의 집에 들어와서 모든 치유를 받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인 사제들은 늘 그분의 영광을 시기하였다. 한센병 환자들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사실을 증거하였다. 주님께서 그들이 치유되기를 바라시자 자신들이 불행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먼저 고쳐주지 않으시고 사제들에게 보내셨다. 그들은 나병의 증세와 그것이 치유되었음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17절)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고쳐주신 한센인들을 꾸중하신다. 그들은 자기를 고쳐주신 분에 대해서보다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가 있었다. 결국, 한 사람은 나머지 아홉보다 훨씬 많은 은총을 받았다. 병이 나은 것 말고도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유대인 한센인들 아홉은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으로 이스라엘이 마음이 굳어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임을 보여주신다. 외국인인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이 아닌 타민족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반면 유대인은 그토록 은총을 입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몰랐다는 것을 알려준다.

 

감사드리는 이들과 찬양하는 이들은 같은 마음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은총을 내리신 분을 찬미한다. 바오로 사도가 모든 사람에게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20) 하고 권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사야도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섬에서마다 그분에 대한 찬양을 알려라.”(이사 42,12) 한다.

여기서 과연 우리는 나에 대해서 이런 반성을 해 보아야 한다. 나는 과연 신앙인으로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며 사는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인지를! 우리가 모두 하느님 앞에 똑같이 사랑받는 귀중한 존재임을 알고 서로 사랑하며 항상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 19)

-한상우신부-

얼마만큼
우리 믿음을

내면화 시키고
있는지를
성찰하는
때이다.

믿음의 본질을
가리고 있는
껍데기를 벗을
시간이다.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에서
믿음은 시작된다.

치유도 믿음도
내면화의 여정을
걸어간다.

내면화의 여정은
기억하고 감사하는
우리들 삶이다.

비참했고
고통스러웠던
그때를
기억한다.

믿음이 가고자
하는 길은
치유이며
구원이다.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치유의 여정이다.

치유의 여정이
믿음의
여정이다.

믿음안에
따뜻한 치유가
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주시는
믿음의
하느님이시다.

깨끗해지는
믿음이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우리자신이다.

올바른
믿음의 삶은
추하지 않고
아름답다.

믿음이
구원이다.

믿음은
치유라는
내면화의
여정을 필요로
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감사의 은총을 보여 주십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2-13)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을 발견하고는 외칩니다. "멀찍이." 전염 가능성 때문에 공동체에서 소외된 이들이라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합니다. 예수님과 그들 사이의 거리감이 가슴 한켠을 아리게 합니다. 아마 그들의 외침을 들으시는 예수님 마음도 그리 아프셨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루카 17,14)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환자들의 몸을 어루만져 주시면서 치유를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 "가서 사제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이미 당신은 치유를 결심하셨기에 한시도 지체하지 않게 하신 것 같습니다. 또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삼가며 "멀찍이" 서 있는 그들의 마음도 존중하신 것이지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루카 17,16)

예수님 분부를 "믿고"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에서 치유가 일어납니다. 얼마나 신기하고 또 기뻤을까요? 아홉 명은 말씀하신 대로 사제를 찾아 달려간 것 같습니다. 어서 '정결한 상태'라는 선언을 듣고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겠지요.

그런데 한 외국인, 사마리아 사람이 가던 길을 돌이켜 예수님께 돌아옵니다. 감사드리고 싶어서였지요. 그에게는 공동체의 정결 선언이나 복귀 허가보다 예수님께 올리는 감사가 더 시급하고 중요했습니다.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예수님과 거리상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던 그가 바로 발 앞, 그분 가까이까지 다가옵니다. 그와 예수님 사이는 거리도 가까울 뿐더러 아무 장애물이 없습니다. 감사를 잊지 않은 그는 치유만이 아니라 "주님 가까이"라는 관계성까지 획득한 겁니다.

감사는 거리를 좁힙니다. 물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심리적, 영적 거리도 친밀하게 바꿉니다. 감사는 상대방이 나에게 베풀어 준 호의를 내가 안다는 뜻입니다. 그로 인해 내가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 보여주고, 축복의 마음을 가득 담아서 이 모든 게 당신 덕분이라고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치유받은 사마리아 사람은 육신의 회복과 더불어 주님 가까이를 차지했던 영적 경험까지 간직하게 된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구원의 원리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티토 3,5)

우리가 받는 은혜와 도움은 우리 자신의 공이 아닙니다. 죄악으로 부패해 가면서 악취를 풍기는 영육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려는 주님 자비의 덕입니다. 이 기적은 때로는 멈추어서, 때로는 가는 길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께서 이르시는 대로, 때로는 멈추고 때로는 가던 길을 계속 가면서 그분의 뜻이 내 존재 안에서 이루어지길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드릴 것은 감사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자기 능력 밖의 일 투성이라는 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 곧 인생일 터이니, 주님 발 앞에서 점점 더 무력해지고 점점 더 작아져가면서 바칠 수 있는 건 감사뿐입니다. 겸손하고 솔직할수록 감사는 더 깊은 진정성을 띱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복음 환호송)

감사는 주님 가까이에서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드리는 친밀한 행위입니다. 세상을 다 가지신 주님이시건만, 보잘것없는 우리 감사에 그분은 감동하고 행복해하십니다. 감사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 더 내밀해집니다. 이로써 우리가 받은 은총과 우리의 믿음이 확증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 "멀찍이서" 맴돌지 말고 가까이, 아주 가까이 다가가 그분께 마음을 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속삭이는 찬양과 흠숭과 영광, 사랑과 감사로 주님께서 흡족하고 기쁘실 겁니다. 

치유가 아닌 사랑과 구원  

-김찬선신부-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사랑도 아니고 구원도 아닌 치유.
이것이 오늘 복음을 읽으며 제가 느낀 것입니다.

달리 얘기하면 사랑은 받아도 구원은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병을 고쳐줬는데 병만 치유 받지 사랑은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치유가 사랑이고, 사랑이 구원인데 사랑도 구원도 발생하지 않고,
하느님도 발생치 않은 것이 오늘 아홉 나환자의 불행이고,
우리도 이 아홉과 같다면 같은 뜻에서 불행합니다.

우선 치유만 받고 사랑은 받지 못하는 경우를 보겠습니다.

치유만 받고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치유를 사랑이라고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치유가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치유가 사랑이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의 병을 치유해주는 것은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요 의무이지 사랑이 아니지요.

같은 식으로 어머니의 밥이 사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사랑으로, 지극 정성으로 밥을 지어 자식에게 먹이는데
자식은 그것을 부엌데기 엄마의 당연한 일,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사랑이 발생치 않습니다.
다음으로 사랑을 받아도 구원이 발생치 않고
하느님이 발생치 않는 경우를 보겠습니다.

이 경우는 믿음이 없고, 믿음의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릇 모든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만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고,
엄마의 사랑도 하느님의 사랑이고,
친구의 사랑도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엄마의 사랑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것을 자주 실패합니다.
우리는 친구의 사랑에서 친구와 친구의 사랑만 봅니다.
연인끼리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풋사랑일 경우,
다시 말해서 사랑이 초보일 경우 다 그렇습니다.
서로를 볼뿐 같이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서로를 볼뿐 하느님 안에서 상대를 보지 못합니다.

가끔 우리 형제를 영적 동반하면서 이성문제를 안고 있는 형제를 만납니다.
그때 저는 그 자매와의 사랑을 그만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보다는 그 자매가 바로 하느님의 자녀이니
그 자매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사랑하라고 충고하고,
그럴 때 자매의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현현이고 현재가 될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형제가 저의 충고대로 할 경우
자매와의 사랑은 하느님과의 사랑에 오히려 도움이 되고
심지어 이웃과의 사랑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때까지의 사랑이 관념적이고 메마른 사랑이었음을 이 사랑이 깨닫게 하고,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촉촉한 사랑을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이웃사랑들을 보고,
하느님의 사랑들인 이웃사랑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1월 14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