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1월 15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Margaret K 2020. 11. 14. 06:36

2020년 11월 15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오 25,14-30)

 

'Well done, my good and faithful servant. 
Since you were faithful in small matters,
I will give you great responsibilities. 
Come, share your master's joy.’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하늘 나라는, 주인이 종들에게 능력에 따라 재산을 나누어 준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능력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누가 더 받고 누가 덜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누구의 능력이 더 큰지가 아니라 각자 받은 탈렌트를 어떻게 사용하였는지를 강조합니다. 따라서 탈렌트 양의 차이는 문제가 아닙니다.
주인이 맡긴 재산만큼 벌어들인 종들은 칭찬을 받습니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탈렌트, 곧 재능은 감추어 두거나 숨겨 두는 것이 아니라 잘 활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재능을 받은 이들이 그 재능을 세상에서 활용함으로써 하늘 나라는 풍성해집니다. 작은 일에 성실한 종에게는 이제 더 큰 일이 맡겨집니다.
‘성실하다.’라는 표현은 믿음과도 연결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께서 성실하신 분이시라는 것에 바탕을 두고,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성실하게 따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성실함은 하느님과 신앙인의 관계를 나타내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에 성실하다는 것은 하느님께 받은 재능을 통하여 하느님의 현존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재능을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은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는 것과 같습니다. 많고 적음을 떠나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가장 영원한 것을 선택하는 지혜

키엣 대주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 진정 우리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인간의 실체를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은 물론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생명이 있음으로서 소유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 없다면 지금의 나는 물론 영혼도 천국도 없습니다. 삶과 건강, 지혜, 재능 그 모든 것은 생명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를 존재하게 해주신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날로 강해지고 나날이 지혜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영혼의 미덕도 더 많아져야 합니다. 선한 영혼으로 가족과 자신을 위해 그리고 사회를 위해 더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의 번영과 평화, 질서를 위해 더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바오로 성인은 모든 형제에게 권유하였습니다.

“형제 여러분,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십시오.

노력도 없이 얻기를 원하는 사람은 주인을 배반하고 주인의 것을 도적질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많은 것을 가졌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움켜쥐고 있는 것들이 단지 허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풍요로운 세상에서 더 좋은 것을 소유하고 편안하기를 원하는 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먹고 입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희망, 사랑, 성실 등입니다.

생명은 귀합니다. 그러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믿음입니다. 육체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더 소중합니다.

물질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져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적 가치는 물질보다 더 견고합니다. 죽어도 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또한 귀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영원한 세상이 아니지만 우리의 다음 세상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세상입니다.

우리의 삶속에는 많은 선택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없을 때에는 가장 영원하고 가치가 있는 것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맞게 의롭지 못한 것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의 법을 따르기 위해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기 비난과 굴욕을 견뎌야 합니다. 주님을 선택하기 위해 명예와 야망을 버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을 선택할 때만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선택만이 진실한 생명을 줄 것입니다. 바로 이 선택만이 영원한 행복에 다달을 수 있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귀한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가장 영원하고 확고한 가치에 이르는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가장 가치있는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2. 주님의 자녀로서 내가 선택한 길은 올바른 길입니까?

3. 세상을 살다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세계 가난한 이의 날-남은 것에 감사하라

-임상만신부-


마태오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들이 두 차례에 걸쳐 나오는데, 우선 13장에 기록된 일곱 가지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에는 지상에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성장 과정에 대한 가르침이 담겨 있고, 후반부21장과 22장 그리고 오늘 복음 25장은 하느님 나라를 통해 곧 다가올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 심판에 대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는 대부분 다가올 ‘종말론적인 하느님 나라’를 직접 언급하면서 그 나라를 성실하게 준비한 사람들보다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무시하고 오직 옛사람의 모습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유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의 핵심은 다섯 탈렌트와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더 많이 벌었기에 칭찬받았다는 내용이라기보다는 한 탈렌트만 받았다는 이유로 그 가치를 외면하고 땅에 묻어버린 악하고 게으른 종에 대한 책망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은 결코 적지 않은 한 탈렌트나 되는 돈을 받은 종이 왜 게으르고 악한 종으로 전락하였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30억 원 정도의 엄청난 금액을 받았음에도 다른 종들과 비교해 볼 때 너무 적게 보였고 자기 능력에 비해 턱없는 대우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는 주인의 성실한 종이 아니라 주인의 반대편에 서서 그와 맞서보려는 잘못된 판단으로 게으르고 악한 종이 된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직후 의료사고로 뇌성마비가 된 시인 송명희는 그의 찬양시를 통해, 자기는 남에게 당연히 있는 그 무엇도 받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남들이 느낄 수 없는 ‘보는 마음’과 주님의 말씀에 기울이는 ‘듣는 마음’이 있기에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하며 산다고 고백하고 있다. 가진 정도에 상관없이 하느님께서는 이미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셨음에 늘 감사했다는 것이다.


복음에서는 받은 것에 감사하지 않는 게으른 종을 악한 종으로 동일시하고 있다. 사실 사람의 몸이 게으르다고 해서 그의 혀까지 게으르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게으른 사람일수록 그의 입은 불평하는 것으로 분주하고 모든 일에 핑계를 대느라 매우 바쁘기 때문이다. 이 게으른 종도 주인을 비판하기에 매우 바쁜 모습을 보인다. 성실한 종들은 단지“주신 것으로 더 벌었습니다”(20절, 22절)라는 말이 전부였지만, 게으른 종은 계속 불평하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느라 말과 핑계가 많아서 그의 혀가 분주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옛말에 “소인은 크고 특별한 것에만 성실하고, 위인은 평범한 것에도 성실하지만, 성자는 작은 것에 크게 성실하다”는 말이 있다. 따지고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도 아무 가치가 없어 보이는 작은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감사했기에 일어난 기적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하여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사는 성실한 신앙인의 삶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생활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불평하기보다는 아직 남아 있는 것에 대한 감사’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29)

 

좋은 기다림, 나쁜 기다림

-김혜윤수녀-

얼마 전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든 생각이 있습니다. 기다림은 이렇게 모두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마음을 모으는 거구나…. 코로나19의 종식만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에게 이제 정말 중요한 것은, 사라져가는 시간의 뒷모습만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시간의 앞모습을 성실히 맞이할 준비가 아닐까 합니다. 마치 버스의 앞모습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듯이….

오늘 전례의 본문은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착하고 성실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복음)의 대조를 통해 어떻게 기다려야 제대로 기다리는 것인지를 정확히 알려줍니다.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행복한 삶’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기다림’도 누구나 예외없이 경험하는 시간이지만 기다림의 ‘결과’는 분명히 다르게 나타납니다.

■ 복음의 맥락
지난주에 선포된, 미리 깨어 준비하는 기다림에 대한 주제가 이번에도 이어집니다. 비유가 전개되는 큰 맥락은 비슷한데, 모든 것을 결정지을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이제 그 주인의 도착이 거의 다다랐음을 알립니다. 다만 주인의 도착이 지연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도착이 구체적으로 언제일지 알 수 없다는 것, 주인을 기다리는 이들 중 몇몇은 확실한 신뢰와 전망 속에 성실히 준비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있다는 것, 결국 생각지도 않은 때에 주인이 와서 최종 평가가 이루어진다는 것 등입니다.
 

빌램 드 푸테르 ‘탈렌트의 비유’

■ 착함과 악함
비유에는 주인과 세 명의 종이 등장하며 주인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깁니다.”(마태 25,14) 이때 “각자의 능력에 따라”(15절)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한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세 번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가 주어집니다.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19절) 되는데, 두 명의 종들은 “착하고 성실한 종”(21.23절)으로 평가받습니다. 주어진 탈렌트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받은 선물을 잘 활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때 주인은 종들이 벌어들인 외적 성과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은 종에게나 두 탈렌트를 벌은 종에게나 동일한 평가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21.23절) 주인은 거저 받은 탈렌트에 대한 감사와 성실함이 있었는지의 여부에만 관심을 둘 뿐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26절)이라고 평가받습니다. ‘악’하다고 언급한 부분에 주목하게 되는데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25절)라며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는 종을 과연 ‘악’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유의해서 보면 심각한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받은 한 탈렌트를 그냥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24-25절) 이 대답은 현실에 대한 부정적 판단과 왜곡이 ‘악’임을 알려줍니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사실과 다른 거짓과 오해가 모든 문제를 발생시킨 악의 근원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을 완고하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심지 않고 뿌리지 않는) 인색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고, 동시에 그러한 왜곡은 근거 없는 공포로 이어집니다. 주인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한 이기적 보신(保身)주의가 위험을 감수하지 못하게 하는 무능함과 비굴함을 갖게 한 것인데, 이처럼 불합리하고 부당한 공포가 유혹과 유감의 실체가 됨을 알려줍니다.

■ 빛의 자녀와 훌륭한 아내
복음에서 제시된 두 부류의 사람들(“착하고 성실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의 대조를 제2독서에서는 “빛의 자녀”와 “어둠에 속한 이들”로 표현합니다.(1테살 5,5) 이 구분이 시작되는 지점은 ‘시간과 때’에 대한 이해인데(1절) 이 개념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마주하느냐에 따라 빛의 자녀로 살게 되기도 하고 어둠의 자녀로 살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그리스어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이며, ‘크로노스’는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이성적으로 측량할 수 있는 시간을, ‘카이로스’는 측정하거나 계획할 수 없는 시간이지만 결정적이며 의미 있는 사건이 발생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언제 주인이 올지 누구도 알 수 없기에 그 알 수 없이 지나가는 시간은 ‘크로노스’이지만 주인이 당도하는 시간은 ‘카이로스’입니다. ‘시간의 종말’은 크로노스이지만 ‘종말의 시간’은 카이로스입니다. 일상을 ‘카이로스’로 사는 지혜를 제1독서는 ‘훌륭함’으로 묘사합니다. “훌륭한 아내”의 모습을 통해 삶의 지혜를 알려주는데 그녀가 훌륭한 이유는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30절)이기 때문입니다.

 소통의 불가능성은 현대인들에게 자주 발견되는 한계이며 걸림돌입니다. 소위 ‘불통’이라고 불리는 현상은 대체로, 상대에 대한 의심이나 왜곡 때문에 발생하는데 불통 자체도 문제이지만 사실 더 심각한 것은 그로 인해 삶을 허비하고 스스로를 무기력한 좌절과 우울로 빠지게 하는 퇴행입니다. 1탈렌트는 6000데나리온 정도에 해당하고,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기에, 1탈렌트를 받았다 해도 사실은 매우 큰 돈을 받은 것입니다. 그다지 부당한 대우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마지막에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9절)라고 경고하십니다. 지나치게 과민한 부정과 왜곡은 불합리한 공포와 불안을 가져다주지만 겸손과 신뢰, 그로 인한 공감과 집중은 진정한 자유와 존엄을 가져다줍니다. 현실과 주변의 조건을 곡해하여 갈등하는 데에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성실하고 용감한 자세로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더 좋은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훌륭한’ 일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결정적인 순간, 그 ‘카이로스’에 불현듯 구원이 다가와 그동안의 견딤과 기다림의 결실을 보상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물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를 삶의 중심에 둘 때에 정립되는 가치입니다.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칭송을” 받기 때문입니다.(잠언 31,30)

 

서로를 돌본다면 이 세상은?

-황경원신부-


오늘 복음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성실하면 주인과 함 께 기쁨을 나눌 것’이라는 말씀입니다(마태 25,21 참조). 올 설 연휴를 지낸 직후부터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것 은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19’입니다. 많은 이가 자신의 안위에 몰두하며 마스크를 쓰고 누가 바이러스를 옮기지나 않을지 전전긍긍했습니다. 한편에서는 마스크가 없는 이들을 위해 집에 여유가 있 는 마스크를 모으자고 제안해서 필요한 곳에 나누기도 했 습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기기나 건물에 대한 방역작업 을 시민 스스로 모여 솔선수범했습니다. 서로를 돌보는 모 습입니다. 내(가족)가 소유한 자산(부, 재능)은 나만의 노력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으며, 지금 의 내가 있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노동과 자연의 도움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받은 것을 이웃과 나 눠야 하며,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나누는 것은 당연 한 이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재물이나 권력이 나 혼자만 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으로 여기며 함부로 휘두르는 경우 가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 대신에 그 어떤 것을 숭배(재물, 권력, 쾌락, 국가 등)하면 ‘우상 숭배’라고 가르칩니다(가톨릭교회교 리서 2113항 참조).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라고 하시며, 우리가 행해야 할 길을 분명히 제시 하십니다. 오늘은 ‘제4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이며, 교황님의 담화 주제는 “가난한 이에게 네 손길을 뻗어라”(집회 7,32)는 말씀 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회적 약자를 만날 수 있을까요? 우선, 우리 주위에 차별받는 분들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예를 들어 연령 차별, 계급 차별, 장애인 차별, 성차별, 인 종 차별, 종교 차별, 직업 차별, 학력 차별을 당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차별을 개선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회 제도와 구조를 만드는 일에 힘을 보탤 수 있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들을 때, 그것은 그리스 도께서 현존하시는 표징이 된다”고 선포합니다(가톨릭교회교 리서 2443항). 가장 약한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것은 서로를 돌보는 일입니다. 세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어느 것도 우리와 무관한 것은 없습니다. 

 

탈렌트의 비유

-안상호신부-


 ‘탈렌트의 비유’라고 불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 하느 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탈렌트’라는 선물을 주시고 계시다는 것과 우리는 이 선물을 어떤 자세로 활용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맞는 각기 다른 탈렌트, 즉 선물을 주십니다. 복음 말씀을 보면 어떤 사람에게 는 다섯 탈렌트를, 어떤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를,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 받았느냐 하는 게 아니라, 받은 것을 어떻게 활용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 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 그 이상을 요구하시는 분 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만큼은 충분히 잘 활용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각자가 받은 능력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이 동 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을 기울임에 있어서는 누구나 똑같을 수 있습니다. 그 러므로 가진 능력이 크든 작든 간에 최선을 다해 하 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잘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유에 등장하는 악하고 게으른 종 을 주목하게 됩니다. 다른 두 종과는 달리, 이 종만 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변 화를 두려워하고 노력도 하지 않은 종에게서는 그 어떤 발전도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는 벌을 받게 되는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노력을 하 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게으른 종은 탈렌트를 받 은 후 그대로 땅에 묻어 두었기 때문에 주인으로부 터 받은 탈렌트를 잃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 다. 자기가 받은 탈렌트는 다른 사람들보다 적은 것 이기에 노력한다 한들 큰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 고 생각하며, 노력할만한 가치도 없다고 미리 포기했 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능을 적게 받았다 하 더라도, 선한 일을 위해서 노력과 모험을 전혀 하지 않은 게으른 종을 책망하시면서, 노력하다 잃는 것 이 아예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 삶에 대한 참 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 각자가 노력하면 할 수록 더 많이 얻게 된다는 것과, 반대로 노력조차 하 지 않으면 가지고 있는 것마저 잃게 된다는 것입니 다. 따라서 우리가 받은 탈렌트, 즉 재능과 능력을 잘 보존하고 관리하는 방법은 하느님 사업에 적극 활용하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일에 잘 사용하는 것입 니다. 지속적으로 잘 써야만 그 능력이 더 커지기 때 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연중 시기가 막바지로 접어들면 서 우리의 죽음과 심판을 자주 묵상하게 됩니다. 오 늘 복음은 우리에게 주어진 각자의 처지에서 최선 을 다해 노력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하느님을 굳 게 믿고 그분의 약속에 희망을 두고서 인내하며 살 아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 순간을 ‘탈렌트의 비유’의 가르침대로 살아간다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합당한 자세로 기다릴 수 있게 될 것이 고, 심판자이신 주님을 잘 준비된 모습으로 만나 뵐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공재호 신부-


“시간이 좀 없어서요.” “정신없이 사느라.” “경황이 없었네요.” “제가 돈이 좀 없어서.” 그때를 모면하려 했던 나의 말들이다. 그런데 얼 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다 시 생각해 보니, 핑계요 변명에 불과했다. 결국 나 는 ◯◯가 없다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반면에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립 4,13). 주인에게 탈렌트를 나누어 받은 사람들이 등장한 다. 오랜 뒤에 주인이 돌아왔고 주인은 그들을 불러 셈을 시작한다. 셈이 끝나갈 무렵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그것을 도로 가져와 내어놓았다. 그러면서 그 는 이렇게 말했다. “주인님이 모진 분이어서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두려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능력이 없어서 못했어요.” 그래서 그는 땅 속 깊이 숨겨 두었다고 했다. ◯◯ 이 없어서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했고, 감사하 지 못했고, 나누어 사용하지도 못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겼다. 그의 말은 ◯◯이 없어서 못했다는 우리의 핑계와 변명거리를 떠올린다. 다시금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립 4,13). 연중 제33주일이다. 곧 전례력으로 마지막이며 갈 무리해야 할 시기다. 그동안 여러 핑계와 변명을 늘 어놓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이제는 땅 속 깊 이 묻어 두었던 탈렌트를 다시 꺼내야 할 때다. 가난 하고 버림받은 이를 돕는 것도 할 수 있다. 고통받고 외로움에 시달리는 이의 손을 잡아주는 것도 할 수 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할 수도 있 다. 마지막 때에는 내가 그토록 집착했던 것들을 내려 놓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주님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럴 때 주 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네 주인 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한 탈렌트의 콤플렉스

-허영민신부-


하늘나라는 종들을 불러 각자의 능력에 따라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난 것에 비길 수 있습니다. 여기서 탈렌트 (talent)의 뜻을 사전적 의미로 개인이 부여받은 선물이나 재능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 침을 본다면, 탈렌트는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 르는 이들에게 전해 주신 모든 것. 즉 당신이 주신 구원의 기쁜 소식, 아버지의 사랑, 성령에 가득 찬 삶 등등... . 바 로 당신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참으로 풍요롭게 늘려나가 야 할 보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최종적으로는 예수님 자신이 이 보물입니다. 오늘 복음 은 단순한 재능(talent)이 아닌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예 수님의 사랑을 나의 생명을 통해 이웃과 그 사랑을 나누 고 전하라는 초대입니다. 하느님께 당신의 가장 귀한 보화 는 우리 자신과 타인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상상 속의 두려움과 한 탈렌트의 콤플 렉스의 유혹에 넘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주인님, 저는 주 인님께서 모진 분이어서…” 그는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주인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손에 쥔 한 탈렌트를 잃어버리 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으름이 컸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적게 받은 탈렌트에 대한 열등감과 그에 따른 주인에 대한 증오심도 가졌을 것입니다. 땅에 한 탈렌트를 묻어두는 두려움과 게 으름을 넘어서서 담대한 마음으로 마지막 동전 한 닢까지 다 써버릴 수 있는 삶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서 우리에게 탈렌트를 주신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의 탈 렌트의 크기와 양과 상관없이 그것으로 이 땅에서 행복하 게 살고 그 행복의 열매를 가지고 당신의 나라에서 함께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주는 (잠언 31,20)’ 너그러운 손을 가져보기 시작해 봅시다. 호 주머니 깊게 손을 꽂아놓고 요지부동한 삶은 두려움에 꽉 찬 ‘한 탈렌트의 콤플렉스’ 삶입니다. 주님을 따라나선 여 정의 우리는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도, 아직 오지 않은 일 을 미리 걱정하지 말고 주어진 탈렌트를 다 쓰는 너그러 운 손의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스도인의 사랑 실천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 는 정성을 나누고 다른 이에게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래 서 이웃 사랑은 강요되는 계명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동 하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 여정의 궁극 적인 목표입니다. 그 무엇도 목표를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나 역시 선한 이웃들의 사랑을 받고 사랑으로 깨 어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어느 날 우리가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 실하였으니,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는 하늘나라의 초대장을 받기를 희망해 봅니다.

 

나눔만이 우리를 우리답게 합니다.

-김윤태신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떠한 지요? 영국의 정치경제학자인 애 덤 스미스의 “1명의 부자가 있기 위해서 500명의 가난한 사람이 있 어야 한다.”라는 말은 지구촌의 현 실 자본주의를 잘 대변해 주는 말 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경쟁적으 로 더 많은 가난한 사람을 만들어 가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때론 전쟁도 불사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오늘 연중 제33 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지 냅니다. 세상은 브레이크 없는 자 동차처럼 더 많이 가지려고 폭주를 하고 있는데, 우리 교회는 작은 브 레이크라도 되고자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지난 2월 5 일 교황청 사회과학 학술대회에서 “세상은 부유해졌지만 우리 주위에 가난한 사람은 늘어만 갑니다.” “부 자 상위 50명의 재산으로 가난한 모든 이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라 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훌륭한 아내는 여러 가지 중에서 “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잠언 31,20) 주는 사람으 로 묘사합니다. 자기 가족뿐 아니라 이웃의 어려운 사람도 보살피는 사 람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주님의 날이 도둑처럼 덮치지 않 을 것”(1테살 5,4ㄴ)이라고 합니다. 항상 함께 나누고 베풀면서 살아가는 그 리스도인은 어둠의 자식이 아니라,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은 달란트의 비유로 각자가 가진 것을 땅에 묻어 썩히 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럼 비록 얼마 되지 않는 것도 빼앗기거나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가 진 것을 모두 내어놓고 나누고 사 용하면 더 많은 열매를 맺고 더 받 게 된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명확히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지기 위해서 주어 져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이유 는 가지고 쌓아 놓기 위해서 아니 라, 더 많이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우리가 나누지 않고 쌓아 두 려고 한다면 가진 것을 빼앗길 것 이며, 심지어 도둑처럼 갑자기 덮 쳐와 우리를 데려가실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길은 오직 나 눔밖에 없습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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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때 제일 자신 없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턱걸이’입니다. 체력장에서 20점 만점을 받으려면 턱걸이를 20번 이상해야 했는데, 저는 단 한 번도 하지 못했습니다. 온 힘을 줘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턱걸이를 한 번도 하지 못하는 저를 본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합니다.

“너는 힘도 센데 왜 턱걸이를 못 하는 거야? 요령이 없어서 그래. 내가 요령을 가르쳐줄게. 이대로 하면 팔 힘이 없어도 5번 이상은 할 수 있다니까.”

그래서 가르쳐준 것이 소위 ‘배치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상하 반동을 이용해서 턱걸이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체력장에서 만점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요령 없이 저만의 힘을 이용해서 턱걸이 만점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사실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턱걸이를 못 해. 나는 힘이 없는 거야.’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한 번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령을 통해서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제 안에 있는 능력도 찾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부정적인 감정에 가두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긍정적인 감정에 둘러싸여 있어도 행복하지 않을 수가 있는데, 부정적 감정에 가두어져 있으면 과연 행복할까요? 따라서 나를 가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나를 가두어서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입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서 오늘 복음을 묵상해 봅니다. 주님께서 주신 여러 은사가 있습니다. 그 모든 은사는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문제는 이 은사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물을 충실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장차 그 선물을 더욱더 많이 받겠지만, 자기가 받은 것을 그대로 놀리는 사람은 그것마저 잃게 될 것을 오늘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해야 할 일을 안 한 죄가 얼마나 큰 단죄를 받는지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악행을 하는 자들, 살인자와 간음자만이 아니라 선한 일을 하지 않은 사람도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탈렌트는 각 사람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누구를 보호해주는 일일 수도 있고, 돈이나 가르침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자신이 받은 것을 활용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저는 한 탈렌트밖에 없고, 그걸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우리 구원과 우리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쓰도록, 우리에게 말하는 능력과 손과 발과 신체와 정신과 이해의 힘을 주셨습니다.
어떤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사랑, 두 번째로는 기술이 필요하다(안토니오 가우디).


집중만 하면 다 재미있다.

신부가 되고서 얼마 안 되었을 때, 본당신부님께서는 보좌신부인 제게 덕적도에 한 달 동안 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름 휴가에 맞춰서 많은 사람이 덕적도에 들어가니까, 그들을 위해 미사를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름 한 달 동안 덕적도에서 생활했습니다. 그 생활이 어떠했을까요?

솔직히 재미 하나 없었습니다. 미사를 하러 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닷가에 나가서 장사해야 하기에 평소에 오시던 동네 분들도 없었습니다. 공소 회장과 저와의 단둘의 미사를 할 때가 많았습니다.

저 역시 낮에는 바닷가에 나가 수영을 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며칠 하다 보니 지겨워졌습니다. 들고 간 책도 없어서 심심함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사제관에 갖춰 있는 책들을 하나씩 꺼내 보기 시작했습니다. 오래된 책이었지만 너무나 재미있었습니다.

집중할 것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집중하게 된 ‘오래된 책’. 그러나 너무나 재미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이때,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집중만 하면 어떤 책도 재미가 있다.”

지금 삶에 재미가 없다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내 삶에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집중하면 다 재미가 있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가능하다고 믿는 것뿐입니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을 향하기 때문에 ‘심판’에 관한 복음이 이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지난주엔 ‘열 처녀의 비유’였습니다. 여기에서는 기름으로 상징되는 ‘성령’을 지켜내기 위해 규칙적인 기도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구원은 ‘믿음’에 의해 결정되는데, 성령을 받기 위해 규칙적인 기도 생활을 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판결이 납니다.

      오늘 복음은 믿음을 판결하는 또 다른 방법을 말해줍니다. 바로 ‘자신이 믿는 자신의 능력’입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종은 두 탈렌트를 받은 종보다 더 많은 능력을 받았다고 믿고 두 탈렌트를 받은 종은 한 탈렌트를 받은 종보다 더 받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종은 하느님이 모질어서 자신에게만 적은 능력을 주었다고 불평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공평하신 분이시라 모두에게 다섯 탈렌트씩 주신 것입니다. 능력이 없다고 믿는 것은 그만큼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자비롭지 못하신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악과에까지 손을 뻗친 것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롭다고 믿지 못하는 이들은 그래서 하느님이 주인이심을 인정하기 위해 바치는 십일조도 소홀히 합니다. 그리고 불평만 하다 자신의 감추어진 능력을 땅속에 묻어놓고 삽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주님 앞에 빈손으로 가는 일이 없습니다. 이 믿음은 ‘자존감’과 밀접히 연결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에이미 커디’는 공부를 꽤 잘하는 학생이었으나 자동차 사고로 뇌에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지적 능력이 상당히 저하되어 남들보다 네 배는 더 노력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조금 느리지만 결국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까지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믿음은 혼자 힘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은사 교수님이 절망에 빠진 에이미에게 “너는 할 수 있고, 너는 하게 될 거야!”라고 말해 준 것에 기인합니다. 그녀는 그 말을 믿었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기 위해 원더우먼 자세나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는 자세를 2~3분만 취해보라고 합니다. TV에 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뇌는 침을 발산하게 합니다. 뇌는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리를 조금 벌리고 양손을 옆구리에 붙이는 원더우먼 자세를 취하면 뇌는 잠시나마 자신이 그런 능력자가 되었다고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슈퍼맨 자세도 있습니다. 슈퍼맨이 하늘을 날 때 양손을 위로 번쩍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선수들이 결승선에 들어올 때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데 이는 승리의 표시입니다. 개가 두려울 때는 꼬리를 자신의 몸쪽으로 내리고 머리를 숙입니다. 그러나 강함을 뽐낼 때는 꼬리를 올리고 머리를 치켜듭니다. 보통 사랑받는 주인이 자신과 함께 있어 줄 때 그렇습니다. 주인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기 때문에 움츠러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께서 아버지가 되어주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우리야 더 얼마나 어깨를 펴야겠습니까? 이것이 믿음이 아닐까요?

 

      강연에서 에이미 커디의 이야기를 접하고 이런 자세로 용기를 얻은 사람들의 수많은 사례가 그녀의 책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에 나옵니다. 그중 두 가지만 소개합니다.

      세이지라는 세 살짜리 아이가 공포영화를 보더니 자신의 인형들이 자신들에게 달려들 것이라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인형을 모조리 치워버렸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엄마는 세이지에게 물건을 가져오라고 시키거나 방에 혼자 있으라고 할 때, 잠깐이라도 원더우먼 자세나 슈퍼맨 자세를 취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인형은 숨겨두었지만 언제든 내면의 원더우먼을 불러낼 준비가 되어있다고 믿는 아이는 1년 뒤 두려움에서 거의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윌이라는 남성은 오리건 대학의 학생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업으로 배우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기획사가 윌에게 대형 상업영화의 오디션을 보라고 제안을 했습니다. 기껏해야 TV 상업광고에 몇 번 출연했고, 단편영화 두 편에 출연했으며, TV 드라마에 한 번 단역으로 출연한 것이 전부인 그가 전문 프로 배우들이 오디션을 보는 헐리우드 영화에 오디션을 봐서 붙을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까웠습니다. ‘어차피 떨어질 것, 그냥 경험 삼아 가보자!’라고 오디션에 응했습니다. 어차피 떨어질 것으로 생각하니 떨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자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숨이 목까지 찼습니다. 그는 친구의 조언을 기억하고 화장실로 뛰어간 심호흡을 하며 원더우먼 자세를 2분 동안 취했습니다. 얼굴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러자 어깨가 펴지고 당당한 자세로 앉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어떠한 초조함도 없이 스스로 참 잘했다 싶을 정도로 오디션을 잘 봤습니다. 그는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리즈 위더스푼 주연의 ‘와일드’란 영화에 당당하게 출연자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누군가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뿐입니다”라고 한 말이 생각이 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내가 무언가 불가능하다고 여긴다면 하느님께서 그만큼 나에게 능력을 주시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능력을 다 주셨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편하게 쉬며 여행 다니다가 죽는 게 어떻게 소원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한 탈렌트의 가치를 땅에 묻어놓는 것과 같습니다. 한 탈렌트도 6억 원에 가깝습니다. 그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금이 됩니다. 나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기도할 때 졸지 않기 위해 양팔 기도하듯 두 손을 들고 합니다. 그런데 에이미 커디의 책을 읽으며 이 자세도 슈퍼맨의 자세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몸이 쳐지지만, 양손을 위로 올리면 가슴이 펴집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 자세가 예수님의 십자가상 자세와 비슷함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제가 양손을 벌리며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자세와 비슷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자기를 죽이는 자세가 결국은 그리스도처럼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베드로가 한 것처럼 나도 물 위를 걸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믿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의 결론으로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더 가졌다고 믿는 것이 『더 해빙』입니다. 더 가졌다고 믿는 사람들이 더 가지게 된다는 진리를 세속적으로 풀어쓴 책입니다. 믿음은 더 가졌다고 믿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이 세상에서 성과를 내게 될 것이고 주님께 그에 합당한 칭찬과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이며교황님께서 제정하신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11월 달이면 저의 작은 형이 생각납니다. 10월은 가을이고 단풍이 아름답습니다추석이 있어서 가족들이 모이고풍요롭습니다. 12월은 한해의 끝이라서 설레는 마음으로 지냅니다성탄이 있어서 더욱 아름다운 달입니다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기뻐합니다. 11월은 가을과 겨울의 중간에 있는 것 같습니다왠지 아련하고쓸쓸해 보입니다큰형은 부모님의 기대와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장남이기 때문입니다셋째인 저는 부모님께서 어딜 가시면 데리고 다니셨습니다아직 어리기 때문입니다.

 

부모님께서 세 아들을 똑같이 사랑하셨겠지만 작은 형은 일찍 홀로서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11이라는 숫자는 다리처럼 생겼고젓가락처럼 생겼습니다우리는 다리를 이용해서 쉽고 편하게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다리가 없다면 멀리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우리는 젓가락을 사용해서 음식을 편하게 먹을 수 있습니다한국 사람이 손재주가 좋은 것은 젓가락을 사용하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작은 형은 어쩌면 다리처럼젓가락처럼 우리가족들을 위해서 일찍 홀로선 것 같습니다. 11월이 있기에 10월은 더욱 풍요로울 수 있었고, 12월은 더욱 빛날 수 있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세계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날을 제정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셨고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성서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여러분이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나는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을 위해서 왔습니다.”

 

착한 목자의 이야기도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겠습니까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합니다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이와 같이 하늘에서는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예수님 곁에는 가난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가엾은 마음이 들었다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당신은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율법학자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당신도 그렇게 하십시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글을 모르는 사람도세상의 지혜를 모르는 사람도특별한 수행을 하지 않은 사람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진리의 길은깨달음의 길은 구원의 길은 아주 평범한 곳에 밝혀 놓으셨다고 합니다하늘의 별구름들의 꽃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평범한 일상의 삶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하느님의 진리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내가 세상을 변화 시키는 것은 어렵지만내가 변하는 만큼 세상은 그만큼은 변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구원의 문제도 그리 큰 숙제는 아니라 생각합니다우리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면 세상은 그만큼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나태주 시인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가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가 싹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하늘나라는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 나른한 꿈이나 공상을 통해서 절대로 획득할 수 없습니다!

 -양승국신부-

 

하느님께서 제게 맡겨주신 탈렌트가 어떤 것이며, 어느 정도 되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요즘 시골에서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육체노동에 맛들이며, 스스로에 대해서 깜짝 깜짝 놀랄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우선 체력이 나이에 비해 완전 강철 체력인 것에 대해서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낮에는 들일하랴, 밤에는 밤바다를 거닐며 수렵활동하랴, 체력소모가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별탈없이 아침이면 꼬박꼬박 눈을 뜨고, 수도자로서의 영적 생활에 충실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여기저기 산더미처럼 널려있는 폐자재들을 재활용해서 이것저것 생활에 필요한 도구들을 만드는데, 제 안에 숨어있는 창작 본능에 또 한번 놀랍니다. 요리조리 궁리하면서, 세상 쓸모없는 것들을 멋드러진 모습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은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거친 파도 속에서 낚시를 할때나,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해루질을 할 때 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확을 거둡니다. 제안의 야생 본능, 자연인 본능을 발견합니다.

  

물론 다 좋은 것들로만 채워져있지는 않습니다. 때로 별것 아닌 것에 목숨거는 부끄러운 에너지도 잔뜩 들어 있습니다. 강한 승부욕도 만만치 않습니다. 때로 아니다 싶은 상황 앞에서는 부글부글 들끓는 분노나 공격성도 엄청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부르실 때는 각자 각자에게 고유한 선물을 안겨주시며 부르셨습니다. 각자의 처지나 능력을 고려한 탈렌트를 주신 것입니다. 

 

하루 온 종일 그저 뒹굴뒹굴 티비 리모컨만 손에 꼭 쥐고 영양가 없는 삶을 사는 날이 있습니다. 시험 답안에 엉뚱한 답만 잔뜩 늘어놓은 듯한 허탈하고 의미없는 하루를 보낸 날도 있습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하루는 과연 어떤 모습의 삶일까 생각해봅니다. 우리 안에 잔뜩 도사리고 있는 부정적인 에너지들을 적절히 분산시키며,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삶이 아닐까요?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들, 잠재 능력들, 탈렌트들을 적극적으로 계발하고 극대화시켜, 하느님과 이웃들을 위해 잘 활용하는 삶이 아닐까요?

  

오늘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봅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탈렌트는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맞춤형 선물은 무엇인가? 어느 정도인가? 어떻게 계발할 것인가?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어떻게 하느님께 봉헌할 것인가?

  

여차하면 드러누워 하릴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제일 절친같은 소파와 안락의자, 티비나 모니터와 과감히 결별하고, 부단히 일어서야겠습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시간을 하늘나라를 위해 어떻게 하면 창의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겠습니다.

  

하늘나라는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 나른한 꿈이나 공상을 통해서 절대로 획득할 수 없습니다. 잠에서 과감히 깨어나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매일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시간과 기회, 재능과 에너지를 활용해서 적극적으로 헌신하고 봉사함을 통해서, 우리 앞에 하늘나라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이영근신부-


연중 제 33 주간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전례주년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이 시기는 참으로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의 <말씀전례>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오실 것과 그분이 오실 때 준비하고 깨어 있어야 함을 되풀이 강조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범인 완벽한 아내의 모습을 들려줍니다. <제2독서>는 주님의 날이 도둑처럼 덮치지 않도록 빛의 자녀로서 복돈 희망을 품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도록 촉구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 제자들이 소명을 깨우칩니다.

이 비유는 ‘관리인이 된 세 종의 이야기’입니다. 곧 주인은 먼 길을 떠나면서 자신의 종들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맡기고 떠납니다. 이는 종들에 대한 주인의 ‘믿음’을 드러내줍니다. 믿음의 표시인 이 탈렌트는 주인의 선물임과 동시에 그에 따른 과업(소명)이기도 합니다. 곧 이 선물은 잘 보관하라고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잘 활용하고 베풀라고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달란트(선물)는 열매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종자돈처럼 씨앗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십자가가 질 수 있는 능력과 함께 주어지듯이, 탈란트(선물)도 마찬가지로 열매 맺기에 충분한 “능력에 따라”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종들과 셈을 하게 되었습니다.”(마태 25,19).

그렇습니다. 주인은 종들을 위해 “오랜 뒤에” 왔고, 충분한 시간과 사랑을 배려했습니다. 그리고 열매에 따라 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달란트를 잘 활용한 첫째와 둘째 종을 “착하고 충성스런 종”이라,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던 셋째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착하다’는 것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에게서 알 수 있듯이, 주인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이요, ‘악하다’는 것은 자신의 신변안전을 위해 주인의 선물을 땅에 묻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착하다’는 것은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신뢰와 믿어주신 분께 대한 충성스런 태도요, ‘악하다’는 것은 주인에 대한 불신과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도 않는 데서 모으는 착취자로 여기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태도는 결국 선물에 대한 태도를 불러왔습니다.

주인은 그들의 선물에 대한 태도에 따라 첫째와 둘째 종에게 말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23)

 

그리고 셋째 종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5,26-28)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은 모든 이에게 놀라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셈하실 것입니다. 그분을 믿고 말씀을 따라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겠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 이들에게는 엄청난 두려움이 될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셋째 종만도 못한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께서 주신 선물인 달란트를 잃어버려 간직하지조차도 못해 돌려드리지 조차 못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날에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지지 않도록 깨어 준비하여야 할 일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선물을 받은 이가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충실하게 열매 맺는 이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믿음과 충실함에 달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종들인 우리를 먼저 믿으셨고, 믿으셨기에 능력에 따라 충분한 선물을 주셨고, 그 선물을 통해 하느님나라로 초대하셨습니다. 이는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첫째>는 탈란트라는 ‘은총’, 곧 하느님의 사랑, 먼저 주신 사랑이요, <둘째>는 은총에 따른 ‘소명에 충실함’, 곧 은총을 열매 맺기 위해 믿음과 사랑으로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일’ 입니다. 그러니 ‘은총’과 ‘십자가’라는 하늘나라를 얻기 위해 이 지상에서 벌어지는 경기의 규칙인 이 둘은 이미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은총의 열매를 맺을 힘도, 십자가를 질 힘도 함께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은총 그 자체보다도, 십자가 그 자체보다도, 그것을 주신 분께 먼저 신뢰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또한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기 위한 주님의 사랑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은총이나 십자가나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마태 25,15)

 

주님!

당신은 신랑이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듯

제게 탈란트를 맡기셨습니다.

당신의 신뢰를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제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선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렌트의 

-송영진신부-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마태 25,14-18).”

 

이 비유에서 ‘탈렌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해석됩니다.

‘은총’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인데, 우리 마음대로 하라고

아주 넘겨주신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으라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은총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아주 주신 것이 아니라 맡겨주셨다는 말은,

나중에 다시 가져가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잘 활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은총을 함부로 낭비하거나 훼손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맺은 ‘은총의 열매’도 하느님께서 가져가시는 것은 아니고,

우리에게 주십니다.

즉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는 것도 바로 우리를 위한 일이고,

은총의 열매를 맺으라고 요구하시는 것도 바로 우리를 위한 일입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게 탈렌트를 주신다는 말은,

사람마다 다른 은총을 받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불공평하게 보이는데,

불공평한 일이 아니라 ‘다양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는 은총의 ‘크기’나 ‘양’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른 성격의, 또는 다른 내용의 은총을 받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비유의 내용 안에서 ‘다섯, 둘, 하나’ 라는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루카복음 19장의 ‘미나의 비유’에서는

종들에게 똑같이 ‘한 미나’씩 나누어 준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1코린 12,7-8).”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1코린 12,11).”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1코린 12,29)”

바오로 사도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능력에 따라’ 라는 말이

불공평하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왜 사람마다 다른 능력을 주셨는가?”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능력의 차이뿐만 아니라 은총의 차이도 있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은총을 받고, 더 많은 복을 누리는 사람이 있다고,

반대로 다른 사람들보다 적은 은총과 적은 복을 누리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될 때가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하느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이고,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똑같은 은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쪽 세상에서는 불공평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보면,

대단히 공평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인물은,

자기가 받은 탈렌트를 땅 속에 숨겼다가 그대로 주인에게 반납한 종입니다.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마태 25,24-25)”

여기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은다.” 라는 말은,

“주는 것 없이 가져가기만 한다.(착취한다.)” 라고 주인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은총과 복은 주시지도 않으면서 계명을 실천하라는 요구만 하신다.”

라고 하느님을 비난하는 말과 같습니다.)

그가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둔 것은 원금만이라도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투자를 잘못해서 원금까지 잃을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선행과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죄만 안 지으면 된다는 소극적인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른 사람이 받은 은총과 자기가 받은 은총을 비교하면서 자기는 적게 받았다고

불평하거나 받은 것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 또는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은

모르고 받기만을 바라는 사람도 세 번째 종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세 번째 종의 죄는 ‘아무것도 안 한 죄’입니다.)

 

주인은 세 번째 종에게 이런 선고를 내립니다.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5,28-30).”

세 번째 종에게서 한 탈렌트를 빼앗아서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는 것은,

최후의 심판 때 실제로 그렇게 죄인이 가지고 있는 은총을 빼앗아서

의인에게 준다는 뜻은 아니고,

구원받을 자격을 얻지 못한 죄인의 비참한 처지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까 나중에 취소하실 일을 하시지는 않습니다.

즉 한 번 주신 것을 취소하고 다시 빼앗아 가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죄인은 은총 상태를 잃어버리고

의인은 더욱 크고 풍성한 은총을 받는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면,

죄인이 가지고 있는 은총이 의인에게로 옮겨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는

“성실하게 노력해서 은총의 열매를 맺는 사람은

더욱 풍성한 은총을 받게 되고”입니다.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는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입니다.

‘쓸모없는 종’이라는 말은, ‘제 맛을 잃은 소금’이라는 말과 같습니다(마태 5,13).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하느님에게도 이웃에게도 그 자신에게도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 29)

-한상우신부-

삶은 여행과
같은 것이다.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풍경과 같다.

여행은
끝이 있다.

여행의 끝은
주님과의
만남이다.

거부할 수 없는
주님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어떻게 살다가
갈 것인가를
다시금
성찰하게 된다.

삶의 본질은
주님과의
만남이다.

주님께서는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가치 있는 삶을
살다가 당신께로
오길 바라신다.

삶을
구원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가 가진 것은
삶에 의미를 주시는
주님뿐이시다.

주님께서 주신
최상의 몫은
많이 나누고
많이 감사하는
사랑에 있다.

참된 사랑은
독단적이지
않다.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기쁘게
맞아주실
주님이 계신다.

변명이 아니라
기쁘게
받아들이고
기쁘게 자비를
청하는 우리의
삶이길 기도한다.

이 위령성월
제33 주일에
우리에게서

하느님과
우리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묻게된다.

삶의 의미와
삶의 가치가
하느님께 있음을
알게하는 멋진
여행을 기쁘게
나누며 걸어가자.

여행도 여행의
목적지도
삶도 죽음도
영원한 사랑의
여정임을 믿는다.


연중 제33주일: 가해: 탈렌트의 비유

-조욱현신부-


오늘의 전례도 또다시 우리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깨어 기다리라고 한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활동적’인 면이다. 즉 깨어있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이 열매를 맺도록 실천적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제1독서에서 강조되고 있다. 내용은 자기 가족들을 보살피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데 자신을 바치는 ‘훌륭한’ 여인은 ‘지혜’(8,22 참조)를 묘사한 것이다.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칭송을 받는다.”(잠언 31,30).

 

복음: 마태 25,14-30: 탈렌트에 대한 이야기

 

마태오는 이 탈렌트의 비유를 통하여 마지막 때의 의미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주인이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기는 행위는 ‘신뢰’에서 비롯된 행위이다. 이에 맞추어 종들도 그 재산이 자기 것인 양, 잘 관리하여 그 신뢰에 보답하여야 한다. 이 때문에, 맡긴 돈을 땅에 ‘묻었던’ 게으른 종은 주인의 신뢰에 대해 신뢰로 보답할 줄 몰랐기 때문에 지탄받는다. 1달란트는 금 42kg의 매우 많은 액수의 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의미한다. 여기서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를 준 것은 그 종들의 ‘능력’에 대한 평가이다(15절). 여기서 주인이신 그리스도는 인색한 분이 아니라, 베풀어 주신 선물에 비례하여 ‘요구하시는’ 의로운 분이시다. 하여간 앞의 두 종은 그 돈을 이용하여 두 배로 늘렸지만,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18절).

 

“오랜 뒤에” 주인이 돌아와 자기 종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19절). 주인은 돈을 두 배로 늘린 종들을 칭찬하고 상을 주었는데 “많은 일을 맡기겠다.”(21.23절) 한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주님의 “기쁨”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그분이 가지시는 통치권에 참여함으로써 누리게 되는 기쁨이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23절). 다른 곳에서는 천상잔치라는 상징적 개념으로도 표현되고 있다(8,11).

 

반면에 게으른 종의 태도에서 비유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는 두 사람의 좋은 결과를 보고 자기의 염려가 헛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두려운 나머지’(25절) 그가 맡은 한 탈렌트마저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25절) 한다. 이것을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받은 것을 되돌려 주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주인은 이러한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두려움’이란 ‘신뢰’의 관계에서는 의미가 없다. 그 종은 주인이 ‘신뢰’의 관계를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단순히 고용 관계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이것이 바리사이 같은 모습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주인의 뜻에 맞게 살지 못하고 탈렌트를 사용하지 못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어야 했다. 그 게으른 종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땅에 묻었다.

 

그렇다고 무책임한 모험을 하라는 것도 아니다. 용기는 개방이며,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어머니의 행위와 같은 사랑의 봉헌 행위이지 자기 자신의 안위 때문에 위험을 두려워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자연적 초자연적 선물 모두가 마땅한 결실을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권고가 담겨있다. 이때 하느님은 더욱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속해있는 공동체의 성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 개인이 성숙하지 못하면 교회도 성숙하지 못한다. “땅에 숨겨 놓은” 우리의 탈렌트는 곧 모든 이를 위한 기회의 상실을 말한다. 이 때문에 주인의 판결은 준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해 자신의 탈렌트를 열매 맺도록 하라는 것은 이러한 마지막 때라는 긴박 때문에 용기를 내야 하고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신앙이란 것은 단순히 신경을 암송하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은 내가 잘못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더라도 이 세상 안에서 용기 있게 행동할 수 있게 밀어주는 그런 신앙이어야 한다. 무엇인가 잃을까 ‘두려워서’ 무기력하게 있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8-29절). 이것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받을 상급보다도 더 큰 상급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며, 없다고 생각하여 ‘땅에 묻는’ 사람은 그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것과 같아서 잃어버려도 잃어버린 줄조차 모르게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충실하고 열심한 그리스도인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실 더 큰 선물을 기다리면서, 그분이 이 지상 생활에서 베풀어 주시는 모든 선물에 대해 감사드려야 한다.

 

사도 바오로께서도 테살로니카 신자들이 곧 다가올 주님의 재림에 대한 걱정을 없애주고자 하면서 “그 시간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며 주님께서 “밤도둑처럼”(1테살 5,1-2) 오실 것이니 깨어있으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빛’ 속에 살면서 ‘빛’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 때는 도둑처럼 덮쳐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깨어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태만하지 않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켜 가면서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러한 삶으로 주님께서 나누어주시는 선물들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분이 오시는 날, 우리는 그분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자가 될 것이다. 그분이 오시는 날은 ‘심판’과 ‘수확’의 날이다. 그날은 우리가 이룬 ‘결실’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항상 그분의 선물에 감사하면서 ‘활동적’인 삶으로 열매를 맺어 내어놓을 수 있는 생활을 이루어 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선명히 드러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마태 25,21.23)

주인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나누어 준 재산을 두 명은 받은만큼 곱절로 불렸고, 한 명은 땅에 묻었다가 원금만 되돌려드립니다. 받은 것을 성심껏 관리한 두 명에게 주인이 이렇게 칭찬을 하지요.

"작은 일에 성실함"

주인이 바라는 것은 대단한 성과나 큰 이윤이 아니라 받은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다루는 자세일 겁니다. 받은 것이 아무리 적어도 그것을 귀하게 대하는 이는 귀한 열매를 맺을 것이고, 하찮게 여겨 소홀히 하는 이는 받은 것마저 잃고 말 것입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마태 25,29)

이 "탈렌트"를 물리적 재능이나 재물로 보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이에게는 신앙과 영혼의 능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앙과 영혼의 성장은 거기에 마음을 쓰며 갈고 닦는 이에게 더 부여되는 은총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하찮게 여기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에게는 쓸모없이 사장되는 미물에 불과할 뿐이지만요.

마치 경기를 준비하는 운동선수들이 각자가 받은 육체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리듯, 영적 여정에 들어선 이들도 그러해야 합니다. 비록 스포츠의 기록처럼 눈에 보이는 숫자로 환산할 수 없지만, 그 성장을 주님은 아십니다. 어렴풋하게나마 자신도 알고요.

영적 은총이 비록 세속의 눈에는 작고 하찮고 눈에 띄지조차 않더라도, 주님 곁에 머무르는 우리에게는 진심과 성실을 다해 가꿔나가고 싶은 가장 귀한 보물이지요. 더 풍부히 키워 주님께 되돌려드릴 선물일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훌륭한 아내에 대한 칭송이 들립니다.

"훌륭한 아내를 누가 얻으리오?"(잠언 31,10)

오늘의 독서 대목은 '누가 훌륭한 아내를 얻을지'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은 남편될 자의 조건이 아니라 훌륭한 아내에 대한 묘사지요. 말하자면 다른 답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지혜문학에 등장하는 여인, 아내는 말 그대로 여인이고 아내일 수 있지만 "지혜"를 의인화하는 묘사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잠언의 저자는 지혜의 매력을 펼쳐 보여줌으로써 그런 지혜를 소유한, 지혜의 사람이 되라고 초대하는 겁니다.

"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준다."(잠언 31,20)

세상은 가난하고 불쌍한 이를 억압하고 착취하며 자기와 동등한 인격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가난과 절박함을 이용해 재산을 불리면서도 결정적으로는 소외시키지요. 하지만 영의 세계를 귀하게 여기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받아 소중히 성장시킨 영혼의 "지혜"가 하느님 마음을 고스란히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지요.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칭송을 받는다."(잠언 31,30)

여기서 콕 짚어 언급한 "우아함"과 "아름다움"은 세속적 차원의 위선을 가리킵니다. 있어 보이고 나아 보이고자 나름 공들여 겉꾸민 허세는 오히려 텅 빈 내면과 빈곤한 영혼을 증명할 뿐이지요. 지혜는 주님을 경외하는 영혼입니다. 내면과 영혼을 귀하게 여기며 가꾸는 이에게 지혜이신 주님은 당신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날을 위한 준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1테살 5,4-5)

어둠은 육과 세속과 죄악의 상태를, 빛은 내면과 영과 덕행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주님의 날"은 각자 삶의 지향을 어디에 두고 무엇을 가꾸며 살아왔건 결국은 맞이해야 할 순간이지요.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6)

깨어 있음은 영혼이 하느님과 사람, 세상 물질 사이에서 균형과 질서를 잡고 있는 상태입니다. 깨어 있는 이는 세속 물질보다 하느님과 이웃에 관심을 둡니다. 하느님을 향해 기도와 경외와 사랑을 올려 드리고, 사람을 향해 연민과 선행과 자선을 베풀지요. 재물은 하느님과 사람을 섬기기 위해 성실히 다루고 선하게 사용하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은 연중 마지막 직전 주일로서 '세계 가난한 이들의 날'입니다. 주님과 셈을 하는 그날, 우리가 품었던 모든 가난한 이들이 주님께 드릴 선물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가난한 이들과 날줄 씨줄로 엮어 기도와 눈물로 완성한, 아름답게 성장한 영혼이 그 선물입니다.

그날, 우리를 맞이하실 주님께서 흡족해 외치실 것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착하고 성실한 종인 벗님을 축복합니다.

인생결산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88059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1월 19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