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2일 연중 제15주일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마태 13,1-23)
But some seed fell on rich soil,
and produced fruit,
a hundred or sixty or thirtyfol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익숙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내용에 씨 뿌리는 사람은 한번 밖에 언급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씨나 씨가 뿌려진 땅에 관한 비유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씨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 당신이십니다. 비유의 시작에 표현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씨, 곧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우리에게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셨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입니다. 씨가 다양한 땅에 떨어지는 것처럼 말씀은 다양한 우리에게 씨처럼 뿌려집니다. 말씀을 선포하고 전하는 것은 예수님의 몫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잘 자라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과연 ‘나’는 어떤 땅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통하여 씨는 이미 우리 안에 뿌려졌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씨를 품고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는 것은 땅의 역할이고, 좋은 땅은 몇 배의 열매를 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결과를 가져옵니다. 씨가 열매를 맺듯, 우리 안에 뿌려진 하느님의 말씀도 우리를 통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그 말씀대로 살기가 언제나 유쾌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고 실천함으로써 많은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복음전파
-키엣 대주교-
사랑의 하느님, 사랑은 말로 드러나야 합니다.
천지창조부터 지금까지 하느님은 여러 방법으로 끊임없이 인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우주를 창조하셨고 허무하게 사라질 인간을 영원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느님 외에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사랑, 바로 창조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을 보살펴 주십니다. 바위에서 물을 찾게 하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보살핌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심으로써 인류와 하나가 되셨습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이 땅의 온갖 고난을 감내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냉담하고 무심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고, 주님의 은총은 물에 젖지 않는 감자 잎처럼 스며들지 않았습니다. 돌덩이처럼 굳은 수많은 영혼들에 의해 점점 시들어 갔습니다. 거친 가시덤불처럼 욕망으로 가득 찬 영혼들로 주님의 씨앗은 열매도 맺지 못하고 질식되어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끊임없이 씨를 뿌리셨습니다. 주님 당신 스스로 한 알의 씨앗이 되어 황폐한 땅에 묻히셨고 거름이 되셨습니다. 황폐한 땅을 풍부한 수확의 기름진 땅으로 만들기 위해 당신을 헌신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뒤를 이어 각처에서 쉼 없이 씨를 뿌려야 합니다.
씨를 뿌릴 때는 아끼지 말고, 어떠한 계산도 없이, 가리지 말고 모든 곳에 씨를 뿌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행복한 삶과 새생명을 주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한 명도 빠뜨리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라는 생명의 양식을 전해야 합니다.
사랑은 기름진 땅뿐아니라 모든 땅에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나를 싫어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열정적인 사랑만이 잡초와 잡석을 변화시켜 기름진 땅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2000년 주님께서는 베트남의 최북단 가장 어려운 교구인 랑선(Lang Son)이라는 황폐한 밭에 저를 보내셨습니다. 그 곳은 중국접경지역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울 뿐아니라 신앙적으로도 베트남에서 가장 많은 박해를 받았던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제가 태어난 곳입니다. 비록 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떠난 곳이지만 그분들은 저를 가족처럼 맞아주었습니다. 주교였지만 직접 종을 치고 교회문을 열고 청소를 하고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젊은 청년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더욱 잘 전하기 위해 말씀의 나눔, 이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자녀라면 지치지 않는 사랑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아끼지 말고 듬뿍, 쉬지 말고 꾸준히 희망과 사랑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뿌리는 대로 거둬 들일 것입니다. 자비를 뿌리면 사랑을 거둘 것입니다. 사랑이 충만한 주님의 자녀가 있는 곳이라면 그 어느 곳에도 주님의 사랑이 충만한 계절이 다가올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지치지 않고 말씀의 씨앗을 뿌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하느님께서는 쉼 없이 복음의 씨를 뿌리니다. 그 씨앗을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2. 하느님께 받은 사랑의 말씀을 다시 나누고 있습니까?
3. 쉼없이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고 있습니까?
밭을 갈아엎어야 할 때.....
-임상만신부-
언젠가 사목을 하던 본당에서 “더 이상 성당 모임에 안 나갔으면 좋겠다”는 한 형제의 볼멘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성당의 주 회합에 나가는 것은 좋지만, 그 모임이 끝나면 늘 2차 주회(酒會)를 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그 자리에서 오가는 대화들도 너무 세속적이어서 불만이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여러 종류의 생활이 있다고 하신다. 이 중에서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거나, 애써 듣기는 하지만 곧 세상 관심거리에 밀려 잊어버리는 사람은 결코 신앙생활에서 기쁨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라기 보다는 ‘씨를 받아들이는 밭의 비유’가 더 알맞을 것 같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좋은 결실을 보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에도 좋은 밭은 단지 하나뿐이고 나머지 세 개는 안 좋은 밭으로 나온다. 그만큼 혼탁한 세상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고수하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흔치 않다는 말이겠지만, 그렇다고 계속 밭 타령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의 처지가 자기의 탓이 아닌 원래부터 돌밭이거나 길가 혹은 가시덤불 때문에 씨를 뿌려도 싹이 나오질 않는 척박한 환경이라고 하여 신앙생활을 자포자기하고 대충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신앙의 결실을 원한다면 지금 자기를 어쩔 수 없게 만드는 그 밭을 갈아엎고 씨를 새로 뿌리는 특단의 수단을 취해야 한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있다.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환경을 먼저 올바르게 바꿔야 한다는 이 말처럼 우리 생활 주변이 대부분 세상의 재물이나 성공 그리고 정치 등에 대한 관심들로만 가득 찬 사람들뿐이고, 더욱이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세상의 재미나 음주 그리고 오락 등에만 열중하고 있다면 이제 성령께 도움을 청하며 그들과의 관계를 과감하게 정리하고 떠나야 한다. 그런 환경 속에서는 하느님 중심의 생활을 이루어가며 사는 것이 힘들고, 노력하는 만큼 신앙 축복의 열매를 맺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신앙생활을 10년 혹은 30년 이상 했음에도 믿음으로 축복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이런 엉터리 신앙의 토양에서 올바른 결실을 기대하는 것이 당치 않은 것이다.
물론 마음을 고쳐 잡고 신앙의 밭을 개간하려고 해도 주변의 상황들이 때로는 두렵고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조롱과 멸시 혹은 따돌림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고,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로 인해 사회적인 불이익이 염려되기도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 때문에 포기하고 그냥 안주할 것이 아니라 좋은 열매를 원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도움을 청해야 한다. 그리하면 많은 문제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는 데, 주님은 언제나 나를 위해 많은 준비를 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가 신앙의 열매를 얻기 위해서 한번은 넘어야 할 과정이고,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할 수 있다. 나쁜 토양을 갈아엎고 신앙의 환경을 바꾸어야만 우리가 아직 세상에 속해있지만 이미 세상과 다른 축복의 삶을 살고 있음에 감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15)
가시는 길마다 기름진 땅이 되기를
-임숙희-
“하느님은 이 땅에 찾아오시어, 넘치는 물로 풍요롭게 하시나이다. 하느님의 강은 물로 가득하고, 당신은 곡식을 영글게 하시나이다.”(시편 65,10) 저는 말씀 묵상을 준비할 때 오늘 화답송 시편 저자의 체험을 종종 합니다. 말씀은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의 삶을 건드리고 그 인간의 찬미는 기도가 돼 하늘로 다시 올라갑니다. 모든 것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이후의 일상에서도 이런 하느님 말씀의 활동은 매일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과 인간의 관계라는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치는 오늘 말씀은 참으로 생생하고 역동적입니다. 말씀 선포를 위해 하늘과 땅, 인간이 움직입니다. 하늘에서는 하느님 말씀이 비와 눈처럼 내려와 우리에게 뿌려야 할 씨앗과 양식을 주십니다.(제1독서) 땅에서는 하늘의 지혜이신 예수님이 어제의 위기와는 상관없이 오늘 성실하게 씨를 뿌리러 집에서 나오십니다.(복음)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수많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복음의 씨를 뿌렸던 자신의 삶을 전합니다.(제2독서)
■ 복음의 맥락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과 거부하고 비난하는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갈라짐이 점점 깊어갑니다.(마태 11-12) 이제 예수님은 마태오복음 13장에서 하늘 나라의 신비에 대한 여러 비유를 통해 군중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비유들의 의미와 그것들을 자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초대합니다. 먼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군중이 그분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집중하게 하면서 가라지, 겨자씨, 보물과 상인 비유 등 여러 가지 비유를 계속 말씀하실 것입니다.
비유의 목적은 들은 사람이 그 비유가 자신을 두고 하는 말임을 깨닫고 결단을 내리게 하는 것입니다. 듣고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 제자로, 세상이라는 하느님 밭에서 씨 뿌리는 농부로 살아갈 것입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을 항상 모세보다 뛰어난 교회의 스승으로 소개하는데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하늘 나라를 가르치는 지혜로운 교육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매료시킵니다. 말씀 경청의 첫 단계는 말씀하시는 분에게 매료당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표현한 이콘.
■ 예수님, 지혜로운 스승
예수님은 그분 선교가 위기를 겪는 상황에서도 제자들만 따로 불러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것이 더 보람 있고 열매를 쉽게 볼 수 있었을 텐데 오히려 낯선 곳으로, ‘변방으로’ 가서 가르치십니다. 호수에 떠 있는 배 안에서 물가에 서 있는 군중을 상대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가르치십니다.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교육이 일상화된 시점에서 복음을 읽으니 첫 인상은 이렇습니다. ‘우리 예수님, 적당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고 환기가 잘 되는 호수에서 군중을 상대로 대면 교육을 하고 계시네.’ 예수님은 구약의 지혜로운 교사들이 늘상 하듯이 청중의 수준에 맞게 가르침 도구로 비유를 택하십니다.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당신이 면밀히 관찰하고 선교생활에서 직접 체험한 것을 토대로 하늘 나라의 신비를 가르칩니다. 사실 씨뿌리는 사람 비유는 예수님 자신의 체험입니다.
제자들처럼 예수님께 다가와 질문할 수 있는 친밀한 관계가 아닌 사람들, 아직 ‘물가에 그대로 서 있는’(마태 13,2)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의 신비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영감을 불어넣고 자극하십니다. 결단을 내리라고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찾아 보도록 돕습니다. 또 제 시선을 끄는 것은 교사로서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태도, 무한한 관대함입니다. 가르쳐야 할 것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좋은 땅을 가리지 않고 아무 데나 뿌립니다. 바로 열매를 보려고 서두르지도 않습니다. 그분이 뿌린 씨의 완전한 수확은 그분의 공생활이 아니라 종말에 가능할 것입니다.
받아들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지금 따를 것인지, 나중에 올 것인지 청중의 자유를 존중하고 그들의 능력을 신뢰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한 것으로 돼 있는 비유에 대한 설명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라기보다 씨 뿌리는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마태오 공동체의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오 공동체는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랍비 유다이즘이 강화되는 시기에 소수 공동체로 살며, 이 비유를 되새기면서 위기와 역경 속에서 그들의 신앙을 심화시켰을 것입니다.
■ 보고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한 해를 은혜로 기름지게 하시니, 당신이 가시는 길마다 기름진 땅이 되나이다.”(시편 65) 하느님 말씀이 지나가는 길인 내 인생은 얼마나 ‘기름진 땅’이 됐을까? 우리 시대에 지혜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힘든 요소는 무엇일까 질문해 봅니다.
저에게 지혜의 말씀에 대한 경청을 막아 버리는 돌밭이나 가시덤불은 지혜 문학에서 자주 말하는 어리석음, 곧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고 쉽게 분노하는 것,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오만,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착각하는 자기 중심적 사고입니다. 불행하게도 이런 내부 요인이 아니라 환경의 영향으로 말씀이 뿌리내리기 힘든 땅들도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오늘 저녁 뉴스만 봐도 우리의 무관심과 편견 때문에 말씀의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땅들을 보고 듣고 깨닫게 됩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좋은 땅을 가리느라 노심초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복음서 전체에서 항상 장소를 가리지 않고 씨를 뿌리셨고 어떤 열매를 거둘지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면, 하느님 자녀인 우리도 ‘씨 뿌리는 전문가’인 예수님께 매일 씨 뿌리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씨 뿌리는 장엄한 권한을 나눠 주신 하느님께 결국 그분이 거두셔야 할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 아멘!
열린 귀를 갖도록 합시다~
신희준신부-
우리는 모두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이 지닌 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 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이렇게 강력한 하느 님의 말씀이지만, 이 말씀이 늘 손쉽게 우리 안에서 받아 들여지고 변화를 이끌어내며 눈에 보이는 결실을 맺는 것 은 아닙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하는 우리 신앙인들의 고 민을 예수님 역시 공감하시고, 도움을 주시고자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신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 비유를 살펴보면, 일단 4가지 유형의 땅이 등장합니 다. 첫째 땅은 길입니다. 단단해서 씨가 심기지 못하고 뿌 리도 내리지 못한 채 튕겨 나와 버립니다. 이런 모습의 사 람들은 편견 혹은 선입견 등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의 어 려움에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비판에도 일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둘째 땅은 돌밭입니다. 단단한 땅과 달리 돌밭 사이에는 틈이 있어서 일단 뿌리를 내리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날이 뜨거워지거나 큰비가 오면 뿌리째 타버리거나 뽑혀버립니 다. 이런 모습의 사람들은 깊은 신념을 갖지 못해서 자그마 한 어려움에도 생각을 쉽게 바꿉니다. 작은 어려움이 닥쳐 도 혹은 재미가 조금 없어도, 신앙생활을 형식적으로 유지 하거나 아예 저버립니다. 셋째 땅은 가시덤불입니다. 씨를 땅이 잘 받아들여서 뿌 리도 내리게 하고 또 땡볕 등으로부터 씨를 보호하기도 하 지만, 어느 정도 크면 더 이상 성장하는 것을 억압합니다. 사람들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원인은 무척 많습니 다. 우선, 내적인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과도한 걱정과 불안을 늘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 면 무엇도 감행할 용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을 갖고 걱 정과 불안을 떨쳐내야만 합니다. 그리고 외적인 원인도 있 습니다. 예컨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온갖 관습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다 보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심어주신 우리 의 ‘참모습’이 질식해서 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땅”, 서른 배, 예순 배, 혹은 백 배의 좋은 열매를 맺는 땅이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땅”은 어떤 땅일까요? 재미있게도 예수님은 이 비유를 군중에게 들려 주시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좋은 땅” 같은 사람이 되려면 여러 가지가 필요하겠지 만, 우선은 잘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 같 습니다. 잘 듣는 사람은 마음이 열려 있고, 다른 사람의 아 픔에 공감할 줄 알며, 걱정에 휩싸여 있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도하면서 “하느 님의 조용하고 부드러운 말씀”(1열왕 19,12)을 들으며 하느님 을 만나는 사람입니다. 아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시작
-강성구신부-
<말씀과 영원한 생명>
예수님 말씀의 중심에는 항상 ‘하느님 나라’ 가 있습니다.
모든 신앙인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살 아가야만 하는 이유는 그 말씀 안에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희망의 씨앗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들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를 통하여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과 구원에 필요한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모습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를 통하여 4가지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① 말씀을 듣고도 깨우치지 못하는 사람 - 길에 떨어진 말씀 ②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하는 사람 - 돌밭에 떨어진 말씀 ③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의 생명을 짓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 - 가시덤불에 떨어진 말씀 ④ 말씀을 듣고 잘 깨달아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 - 좋은 땅에 떨어진 말씀
<반성과 희망 그리고 기도>
개인 묵상과 사제의 강론 중에 분심과 잡념에 빠져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깨우치지) 못하는 생 활을 하고 계시지는 않나요? 개인 묵상과 사제의 강론에는 만족하지만 ‘말씀의 깨우침’ 이 머리와 가슴에 새겨지지 않아 희생과 사랑으로 십자가를 져야 할 때 쉽게 포기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생활을 하고 계시지는 않나요? 세상에 대한 걱정과 재물이 가져다주는 안락함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 말씀에서 점점 더 멀어져가는 생활을 하고 계시지는 않나요? 이러한 반성과 함께 희망을 생각해 봅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 (시편119,105) 이심을 굳게 믿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에 이기적이고 소극적이었고, 부족했던 자신의 모습을 반성 하고 세상을 향한 나눔과 사랑과 섬김(봉사)을 통하여 삼십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아가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생명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여, 많은 열매 를 맺어 기쁨과 평화의 삶을 살아가고 그 말씀을 선포하고 증언하게 하소서. 아멘
좋은 땅이 되도록 가꾸고 양분을 주자
-정석수신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초대에 근본적인 선택을 하도록 요구하 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과 씨를 받아들이는 다양한 환경이 있습니다. 씨를 받아들이는 첫 환경은 길바닥과 새들입니다. 완전한 거부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환경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입니다. 씨 앗을 받아들이는 조금의 가능성은 있었지만 뿌리를 내릴 수 없는 환경으로 이 역시 거부의 모습입니다. 세 번째 환경은 가시덤불입니다. 이 환경 역시 단단한 땅처럼 개방하지 않는 모습이요, 자신의 생각으로 무장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환경은 좋은 땅입니다. 좋은 땅이라는 것은 자신을 활짝 열고 받아들이는 선택으로 풍성한 결과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묵상하며 요한 묵시록(3,20)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 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복자 슈브리에 신부는 어느 글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 자가 된다는 것, 그것은 결국 우리의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자리를 차지하기 원하시는 예수님에게 자신의 문을 활짝 여는 것이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귀 를 기울이고 있는가? 그 소리에 나는 문을 어느 정도 열고 있는가? 문도 열지 않고 누구냐고 묻고 있는가, 아니면 문을 조금은 열고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문을 활짝 열고 앞에 서 계신 분을 환영 하여 집으로 맞아들이는가? 문을 열지 않는 사람은 씨앗을 받아들이지 않는 땅처럼 씨앗을 뿌리는 사람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문 을 반쯤 열고 얼굴을 보되, 안으로 맞아들이지 않는 사람 역시 돌밭이거나 가시덤불처럼 거부하는 모습입 니다. 자신이 그 집의 주인으로 고집하면서 자기 외에 아무도 집에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아 그 집과 자기 마음의 지배자로 남아 있는데, 긍정적 변화 즉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문을 활짝 여는 사람은 좋은 땅입니다.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될 희망의 땅입니다. 문을 두드리는 스승을 집안에 모시고 첫 자리를 내어드리며 기뻐하며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듣고 실행에 옮길 수 있 게 됩니다. “밭 가는 사람처럼, 씨 뿌리는 사람처럼 지혜에 다가서서 지혜의 온갖 좋은 열매를 기대하여라. 정녕 지혜를 가꾸는 데는 적은 수고를 들이나 곧 지혜의 소출을 맛보리라.”(집회 6,19) 좋은 땅이 되기 위해 서 땅을 갈아엎는 경작은 고생이 따르지만 끈기 있게 가꾸면 투자한 노력에 비하여 더 큰 결실을 맛보는 기 쁨을 누리게 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학생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학생의 어머니가 대화를 나눴으면 해서 이루어진 자리였습니다. 도무지 의욕 없이 살아가는 아이의 변화를 위해 대화를 나눠 달라는 것이었지요. 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렸을 때는 뭘 하고 싶었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되고 싶었죠.”라고 말합니다. 곧바로 “그렇다면 의사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보았니?”라고 질문을 하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습니다.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의사가 되기 위한 노력을 이제까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학생만 그럴까요? 어쩌면 모든 사람이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되고 싶은 모습은 있지만 이를 위한 노력이 없습니다. 잘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기를 원하지만 이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받기를 원하지만, 사랑 주기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아닐까요? 막연하게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다가 아니라, 그 나라에 가기 위해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 비유 말씀을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어떤 농부도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곳에 씨를 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면 농부는 씨를 뿌리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해서 뿌린 것이라면, 농부의 잘못이 아니라 씨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이 잘못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룰 가능성, 그래서 커다란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있기에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불가능한 이유만을 찾으면서, 자신의 모습이 변경 불가능한 돌밭이고 가시덤불의 모습처럼 생각합니다. 씨를 뿌리신 주님의 잘못이 아니라, 변하지 못한 우리의 영혼이 잘못입니다.
따라서 막연히 ‘어떻게 살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떠올리면서 적극적으로 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에 맞춰서 이 세상에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 굳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굳은 사람은 거룩한 씨앗을 받아들이지 않고, 더러운 영들을 위해 잘 다져진 길이 됩니다.
공기가 창문을 통해 이동하며 서로를 환기해주듯 삶의 가장 존귀한 것이 나를 통해 이동하는 것이 내가 남기는 유산이길 바란다(마크 네포).
불행한 사람
예전에 아는 지인들과 함께 동남아에 있는 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나라이고, 이제야 겨우 경제적인 성장을 조금씩 이루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인지 계속 길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가이드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도와주면 계속해서 사람들이 다가오니까 처음부터 그냥 무시하세요.”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가이드의 말을 따라서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매님이 지갑을 열어 1달러를 건네주는 것입니다. 이분의 남편이 “가이드가 무시하고 그냥 지나가라고 했잖아.”라고 핀잔을 주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 돼 보이는 얼굴이 계속 밟혀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도울 수 있는 여건이 되는 데도 돕지 않으니 힘들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함께 있던 사람 모두가 불편했나 봅니다. 그래서 다음에 도움을 요구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서로 나서서 조금의 도움이라도 주려고 합니다.
불행한 사람은 돈이 없고 높은 지위를 얻지 못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보다 가슴에 따뜻한 사랑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요?
마음이 정해지면 머리와 몸은 봉사한다
-전삼용신부-
살다 보면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들은 어떠한 것을 판단해놓고 그 판단이 옳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이런 경우를 오늘 복음에서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은” 마음이 무딘 사람입니다. 이들 마음 안에 아무리 진리의 씨를 뿌려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눈멀고 귀먹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한 가지를 깨달아야 하는데, 우리 안에 증거 자체 조작 기능이 내재하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주장을 확증해줄 근거를 찾는데 그 근거는 사실 그들 주장을 조작해 줄 도구밖에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증거가 믿음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믿음이 증거를 조작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믿어야 보이는 것이지, 보인다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결정하면 머리는 따라줄 뿐입니다.
2004년 5월 미국 FBI 요원들이 들이닥쳐 변호사이자 미군 전직 장교였던 ‘브랜던 메이필드’를 마드리드 폭탄테러 용의자로 체포하였습니다. 그해 3월 11일 192명이 사망하고 2천 명이 다친 끔찍한 마드리드 공격에 연루되었다는 혐의였습니다. 그는 미국인이지만 이슬람으로 전향했고 이집트 여성과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FBI에 계속 감시를 당하던 중이었습니다.
FBI는 마드리드 현장에서 폭발물이 담긴 파란색 쇼핑백을 발견하였는데 거기서 메이필드의 지문이 나온 것입니다. FBI는 그 지문이 100% 일치한다고 주장을 했고 그것이 틀릴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지문이 미국과 대서양을 가로질러 8700㎞ 떨어진 곳에서 발견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바로 그날 아침, 스페인 경찰청이 폭탄 공격과 관련 있는 인물로 알제리 남성 ‘우나네 다우드’를 체포하였습니다. 메이필드보다 그의 지문이 FBI가 무시했던 애매한 영역을 포함한 검지 지문에 더 잘 맞을 뿐 아니라 그의 엄지 지문도 쇼핑백에서 발견된 지문과 일치했던 것입니다. 메이필드는 다음 날 풀려났고 FBI는 굴욕적인 사과를 공개적으로 해야 했습니다. 물론 200만 달러의 피해보상금을 지급해야 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2001년 911테러로 공포에 휩싸여 있어 아랍인들에게 대한 편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전문가들의 판단을 맹신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미국 최고 지문 감식반의 판단이 틀릴 리가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참조: ‘지능의 함정’, 데이브드 롭슨, 유튜브 채널 ‘책한민국’]
사람들은 증거가 믿음을 만든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믿음이 증거를 조작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요구하는 세대를 비판하신 것입니다. 눈과 귀를 막아놓고 보고 듣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전문가들도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어버리면 눈이 감기고 귀가 막혀 남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하고 뻔히 보이는 것도 보지 않으려 합니다. 이런 경우는 세상 사람들이 똑똑하다고 인정해주는 전문가들에게 더욱 자주 일어납니다.
1920년대에 미국 심리학회 회장이었던 ‘루이스 터먼’이라는 유명한 학자입니다. 그도 자신의 편견을 배열하며 과학이라 믿었습니다. 그는 IQ가 삶과 직결되고 IQ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각 학급에서 IQ가 140 이상인 아이들을 골라내어 그 아이들의 인생을 수십 년 동안 수집하였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차이가 없었습니다. IQ가 높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아주 조금 좋은 성과를 내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 이유는 그 실험을 하며 터먼이 그들에게 특별한 지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실험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머리가 좋은 아이들에게만 특별한 지원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집 식구들의 IQ를 재서 지능이 높은 순서대로 식탁에 앉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화를 내었다고 합니다.
데이브드 롭슨의 ‘지능의 함정’이란 책에서는 이런 사례가 아인슈타인, 에디슨, 스티브 잡스 등 모든 고집불통인 뛰어난 천재들에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집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 고집은 한마디로 하면 ‘교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믿는 마음이 교만입니다. 자신을 믿는다는 말은 자신의 힘으로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오히려 진리와 반대되는 자아가 있습니다. 그 자아를 믿으면 진리에서 멀어집니다. 그 자아에 대한 믿음이 강할수록 주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약해집니다. 뱀이 하와를 그렇게 만들어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하였습니다. 나의 눈을 가리고 나의 귀를 막는 것이 내 자신임을 알지 못하면 이 교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길바닥에 씨가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씨를 먹는 까마귀가 창세기의 뱀이요, 탈출기의 파라오요, 우리가 버려야 하는 자아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자아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길이 되지 않으려면 겸손하면 되고, 돌밭이 되지 않으려면 절제하면 되며, 가시밭이 되지 않으려면 청빈하면 됩니다. 겸손과 절제와 청빈을 ‘복음삼덕’이라고 합니다. 복음삼덕은 세속-육신-마귀를 이기는 무기입니다. 나 자신 안에서 끓어오르는 교만과 육체적인 욕구와 재물에 대한 탐욕만 줄여가면 자아가 죽고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립니다. 그러면 진리의 말씀이 내 안에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농부가 뿌리는 말씀의 씨는 비유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비유로 우리 마음에 떨어집니다. 그렇지만 교만과 육욕과 탐욕은 그 비유를 이해할 수 없게 우리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을 멈춥시다. 그러면 교만이 줄어들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절제합시다. 그리고 십일조를 내봅시다. 그러면 눈이 열려 비유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인터넷의 어두운 소굴로 과감히 발을 들여놓으면 케리(Kery)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세상의 질서를 바꿀 해안을 가졌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는 캘리포니아 나바로 강 근처에서 몸에서 빛이 나는 너구리같이 생긴 물체를 만나 외계인에 납치되었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점성술을 절대적으로 믿고 에이즈 바이러스나 오존층에 구멍이 뚫렸다는 믿음은 다 가짜라고 주장합니다.
케리가 정신이상자처럼 보입니까? 케리 멀리스는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입니다. 다만 자신 안에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자아가 있고 그 자아를 믿으면 바보가 된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 비참합니다.
진리와 반대되는 자아의 주장이 자신 안에 있음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것을 모른 상태로 하는 과학적 연구는 모두 자체 증거 조작 기능에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멀고 귀먹은 마음이 무딘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결정하면 머리는 따라줄 뿐입니다. 또 눈과 귀는 머리가 찾는 것만을 보고 듣게 됩니다. 그래서 이미 완고해진 마음은 외부의 것들로 바꿀 수 없게 됩니다. 완고한 마음을 버리려면 내가 아닌 주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나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내 안에 뿌려지는 말씀이 진리이고 나는 그 진리를 열매 맺게 하는 좋은 밭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 때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릴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텃밭에 상추 모종을 심었습니다. 처음에는 물을 주어도 잘 자라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상추들이 빠른 속도로 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직원들과 삼겹살을 먹었어도, 여전히 텃밭에는 상추가 한 가득입니다. 옆에 있는 본당 사제관에도 나누어 드렸습니다. 방울토마토도, 고추도, 오이도 쑥쑥 자라는 걸 보니 참 신기합니다. 열배, 스무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물을 준 보람도 느낍니다. 텃밭의 야채가 그렇다면 사람을 만나고, 인재로 키우는 기쁨은 더 할 것입니다.
옛 어른들은 좋은 재목을 만나서 큰 사람이 되는 것을 보는 것은 인생의 기쁨이라고 하였습니다. 교구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중3 학생들을 면담하고 예비 신학생 기숙사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아이들이 묵주기도를 함께하고, 아침기도와 미사를 함께하는 걸 보았습니다. 저녁에는 양심성찰을 하고 잠자리로 들어갔습니다. 3년 동안 키도 커지고, 마음도 성숙해진 아이들이 신학교에 입학하는 걸 보는 것은 제게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신부님들과 자전거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20년 만에 자전거를 타니 다리도 아프고, 엉덩이도 아팠습니다. 부르클린 다리 밑에서 햄버거를 먹고 강 건너 맨해튼을 보았습니다. 뉴욕은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 있어서 좋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메고 갔던 가방을 놓고 온 걸 알았습니다. 다시 가보았지만 가방은 어디론가 가고 없었습니다. 이어폰, 보조 배터리, 차키, 안경이 있었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신부님들은 핸드폰과 지갑은 있으니 다행이라고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키는 여분이 하나 더 있어서 큰 문제가 없었고, 이어폰은 함께 가신 신부님이 새로 구해 주신다고 하니 더 잘 되었습니다. 안경은 한국에서 여유로 하나 더 가져왔으니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보조 배터리야 새로 구하면 됩니다. 20년 만에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했는데 아무 사고 없이 잘 다녀온 것만도 감사 할 일입니다. 엉덩이가 아팠는데 가방을 잃어버렸더니 엉덩이 아픈 것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고통은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한걸음 더 올라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기도 합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것도 삶의 방법입니다.
코로나19로 3달 동안 공동체 미사가 없었습니다.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하면서 공동체 미사를 재개하는 교구가 있습니다. 제가 속한 부르클린 교구도 공동체 미사가 재개되었습니다. 코로나19가 어떤 분에게는 길가에 떨어진 씨일지 모르겠습니다. 의무적으로 나왔던 성당을 안 나오게 되고, 신앙의 싹이 시들어갈지 모릅니다. 어떤 분에게는 돌밭에 떨어진 씨일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방송미사를 참석했지만 그것도 점점 귀찮아져서 그만두었는지 모릅니다. 어떤 분에게는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일지 모릅니다. 방송미사도 참례하고, 가족들이 기도했지만 날씨가 좋아지면서 깜빡 잊어버렸는지 모릅니다. 락다운(Lockdown)이 조금씩 해제 되면서 다른 것들에 마음이 갔는지 모릅니다.
어떤 분에게는 코로나19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일지 모릅니다. 집에 머물면서 성경책을 통독하기도 합니다. 미사 강론을 요약해서 이웃들에게 전해주기도 합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이들의 고민을 들어주기도 하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먹을 것을 나눠주기도 합니다. 성당 문이 열렸을 때 가장 먼저 가서 성체조배를 하기도 합니다. 박해시대에 사제 없이 공소예절을 하던 선조들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성체를 모시는 것이 순교의 길이 될 수 있을지라도 성체를 모시던 선조들의 뜨거운 신앙을 배우고자 합니다. 이제 공동체의 미사가 재개되고 우리는 예전처럼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나의 모습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였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이 더 풍성해지고, 영적으로 충만해져서 하느님을 더 깊이 찬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형제 여러분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땅이 가물고, 채소가 병이 들면 양수기를 가지고 물을 대기도 하고, 약을 치기도 하고, 우리들의 정성을 다 기울여 농작물을 키우고 많은 소출을 얻도록 노력을 기울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의 밭은 어떤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내 마음에 기도의 거름은 충분히 주고 있는지, 내 마음에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의 열매는 잘 자라고 있는지, 지금 내 마음에 하느님 은총의 비가 촉촉이 내리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아니면 욕심과 이기심의 비가 내리고, 시기와 질투의 바람이 부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한 인간 존재는 수많은 가능성과 폭발적인 에너지를 소유한 씨앗입니다!
-양승국신부-
공생활 절정기에 사목활동에 전념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은 정말 엄청났습니다.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은혜롭고 감미로웠던지 구름같은 군중이 몰려들었습니다.
종래 그 어떤 예언자나 지도자도 흉내낼수 없는 흥미진진하고 풍요로운 가르침에 사람들은 깊이 매료되어 에수님 가시는 곳 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엄청난 인파를 보신 타고난 교육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복음 선포가 보다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아이디어 하나를 내놓으셨습니다. 청중들은 갈릴래아 호숫가에 삥 둘러앉았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호숫가에 매어진 어선에 올라타 앉으셨습니다.
마침 호수 중심에서 호숫가로 불어오는 미풍에 실려 예수님의 말씀은 청중의 귀에 쏙쏙 들어와 박혔습니다. 상상만 해도 흥미롭고 은혜로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에 굶주린 당신 양떼를 향한 예수님의 배려와 따뜻한 마음이 크게 돋보이고 있습니다.
이윽고 예수님으로부터 선포되는 말씀은 기존 예언자들이나 지도자들의 말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고리타분하거나 현실과 크게 동떨어진 구름잡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그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쉽고 구체적인 말씀, 백성들의 구체적인 일상과 연결되는 현장감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만 해도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살아가는 농부들이었다면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마태오 복음 13장 3~8절)
팔레스티나 지방 농부는 씨앗 자루를 손에 들고 작년 추수 이후로 한번도 손대지 않은 채 널려 있는 들판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씨앗을 뿌립니다. 다음에 쟁기질을 합니다.
씨앗의 운명은 쟁기질이 끝난 후에 결정됩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에서는 아무런 수확을 얻을 수 없습니다. 굶주린 새들이 즉시 날아와서 쪼아먹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 역시 해가 떠오르면서 오래 가지 않아 메말라 죽어버립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가시덤불이 훨씬 더 빨리 자라면서 연약한 싹을 질식시켜 버리기에 성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라는 놀라운 수확을 거두게 됩니다.
씨앗 한 알을 유심히 살펴보면 참으로 보잘 것 없습니다. 우선 작습니다. 기대할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씨앗 안에는 엄청난 생명력과 폭발적인 에너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한 인간 존재는 수많은 가능성과 폭발적인 에너지를 소유한 씨앗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작은 씨앗 하나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원형 그대로 남아있기보다는 발아되기를, 풍요로운 결실을 맺기 위해 스스로를 내려놓기를, 썩어 없어지기를, 그래서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되고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뜻하시는 바
-김기현신부-
독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그 말씀을 읽으면서 코로나시기에 주시는 사명은 어떤 것이 있을까.. 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두 가지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첫 번째는 창세기 앞부분의 내용입니다. “땅은 푸른 싹을 돋아나게 하였다.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 물에서 우글거리며 움직이는 온갖 생물들을 제 종류대로, 또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을 제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창조의 파트너로서 자연을 가꾸고 돌보길 바라십니다. 그런데 세상은 더 발전하고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자연을 파괴합니다. 자연이 내는 신음소리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습니다. 스스로 멈추지 않으니 자연은 강제로 우리의 움직임을 멈추게 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의 한 모습이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는 더 생산하고 개발할 수 없는 상황이 절망스러울 수 있겠지만, 자연은 오히려 조금 숨을 돌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미세먼지가 사라지고, 중국과 인도의 하늘이 청정한 모습을 볼 때 그러한 느낌이 드는 것 같습니다.
경고의 신호가 주어졌을 때 늘 해오던대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그 신호에 귀를 기울이고 주위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달려오는 동안 많은 쓰레기들이 쌓여왔고, 땅과 바다가 점점 힘을 잃어 그 풍요로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지구의 온도는 점점 올라가 더 이상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황님의 ‘찬미받으소서’에 보면 “우리 후손들, 지금 자라나고 있는 우리 자녀들에게 어떠한 세상을 남겨주고 싶습니까?”(160항)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살 수 있는 환경과 세상을 전해주고 싶다면, 교황님이 말씀하시는 생태적 회개가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자연을 잘 가꾸고 돌보라.’ 는 사명을 수행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오늘 아침 성무일도 시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주께서 너를 구하셨으니 고요로 돌아가라 내 영혼아’ 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신앙의 모습은 조금은 낯선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전에는 마르타와 같이 활동적인 모습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 많이 모이고, 봉사하고, 성전을 힘 모아 지었습니다. 활기차고 열정적인 활동 속에서 만들어지는 외적인 것들이 우리에게 보람과 의미를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때로 그러한 외적인 성장에 하느님의 일은 있지만, 하느님과 함께 하고 동행하는 것은 잊어버릴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사제가 되고 심겨진 자리에서 성실하면 된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주어진 본당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러한 일이었는데요. 중국에 가서 그러한 외적인 일이 거의 없었고, 일에서 얻었던 보람이나 의미도 찾지 못했죠. 예수회 신부님의 말씀대로 조금은 내 삶의 광야인지도 모르겠는데요. 그 광야를 지나오면서 다른 건 모르지만 하느님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한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찾지 못했지만, 하느님께 늘 시선을 두려고 했었고, 하느님의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하느님과 동행하는 것은 늘 마음속에 두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시간이 하느님 안에서 깊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해 주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지나고 있는 이 시기도 외적인 활동은 거의 없지만, 말씀대로 고요로 돌아가 하느님 안에서 깊어지는 일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기인지도 모릅니다. 말씀과 성체, 그리고 기도 안에서 조금 더 깊어질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어머니가 보리싹 키워 먹으라면서
보리씨앗을 주셨다.
가르쳐주신 방법대로
몇 번 싹을 틔워보려고 했는데,
곰팡이만 생기고 싹이 트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보리 씨앗이 아니라,
다이어트 곡물을 주셨다고... ^^;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송영진신부-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마태 13,3-4).”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마태 13,19).”
씨 뿌리는 사람이 일부러 ‘길’에 씨를 뿌리는 것은 아닙니다.
실수로 길에 뿌리는 것도 아닙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백지 상태와 같은 ‘땅’에 씨를 뿌리는데,
어떤 땅은 ‘좋은 땅’이 되고, 어떤 땅은 ‘길’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이 됩니다.
(그 당시의 농사법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말씀의 뜻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또 ‘모든 사람’을 위해서 선포됩니다.
누가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릅니다.
모두가 다 처음에는 백지 상태와 같습니다.
본인들이 얼마나 노력하는가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좋은 땅’이 되고, 어떤 사람은 ‘길, 돌밭, 가시덤불’이 됩니다. 여기서 ‘깨닫지 못하면’이라는 말은, “믿지 않으면”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을 듣고서도 믿지 않으면, 그것은 들은 것이 아닙니다.
‘악한 자’, 즉 사탄이 와서 빼앗아 간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버리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것은, 자기가 들은 ‘말씀’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비신자 교리를 배우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안 믿으려고 하고,
자기가 정한 어떤 기준으로 복음을 판단하려고 하고......
믿음이란,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또 믿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기가 들은 복음을 사탄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마태 13,5-6).”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마태 13,20-21).”
뿌리가 없다는 것은,
의지가 부족하고 인내와 끈기가 없다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편안할 때에만 신앙생활을 하고, 힘들 때에는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경우,
또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갈 마음도 없고, 자신을 버리려는 노력을 할 마음도 없는 경우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라는 말은,
처음에는, 또는 편안한 시기에는 ‘돌밭’과 ‘좋은 땅’에 차이가 없음을 나타냅니다.
사실 아무 어려움이 없는 시기에는 누구나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습니다.
(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있는지, 없는지가 금방 드러납니다.
“선천적으로 의지가 부족하고 인내와 끈기가 없는 경우라면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의지, 인내, 끈기가 선천적인 문제인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떻든 신앙생활에서는 의지, 인내, 끈기는 ‘믿음’과 관련된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하면 믿음을 지키려는 의지도 부족해지는 법입니다.
그리고 인내와 끈기도 부족해집니다.
(순교자들은 ‘남들보다 더 믿음이 강한 분’들입니다.
그 강한 믿음에서 ‘남들보다 더 강한 의지’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강하게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 외에는 다른 비결은 없습니다.
“나는 원래 의지가 약한 사람이다.” 같은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마태 13,7).”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 13,22).”
‘가시덤불’은 현세에서 먹고사는 일을 ‘영혼 구원’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현세의 삶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빌기만 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린다는 말은,
먹고사는 일에 대한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점점 커져서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할 겨를이 없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신앙생활의 목표라는 것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먹고사는 문제를 소홀히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먹고사는 일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 않은가?”)
다음 말씀들을 이 질문의 답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빵도 필요하지만, 말씀이 더 필요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영원한 것은 잊어버리고 허무한 것에 대해서만 집착하면,
그것이 허무하게 사라질 때 그것과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2테살 3,10).”
“...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2).”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노동은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숨’이 막힐 정도로 물질에 집착하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조욱현신부-
오늘과 다음 주일 전례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 비유는 듣기만 하고 그것을 깊이 통찰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충분치가 못하다. 여기서 사도들은 군중들과는 달리 통찰하려는 노력의 자세를 갖추고 있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마태 13,11). 이것은 사도들의 자세에 대한 보상이다. 즉 알아들으려 하는 자세, 삶 속에 실천하려는 자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 마태 13,1-23: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예수께서는 비유를 먼저 말씀하시고(3-9절) 나중에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사도들에게 그 내용을 설명해 주신다(18-23절).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2절). 예수께서 이렇게 군중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는 모습은, 아마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보다는 그분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즉 제사보다는 젯밥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분에게서 멀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배에서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비유의 말씀은 팔레스티나 상황에서 사실에 근거한 비유의 말씀이다. 그 지방의 환경이 그렇다. 조그만 땅덩어리, 돌투성이인 밭들, 농사를 짓기 위해 가시덤불을 헤치고 만든 좁은 길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거친 땅이지만 모두 죽어버리지는 않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씨를 뿌렸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제자들의 믿음을 더해주시고자 하신 비유이다. 이는 그래서 ‘믿음에 대한 비유’라고 정의할 수 있다. 씨를 뿌리는 분은 예수님 자신이시다. 예수께서는 많은 씨앗이 실패를 하더라도 결실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당신 제자들에게 확신시키려 하신다. 그분의 사명은 씨뿌리기에 비교될 수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역사 속에 이미 시작되었고, 그 나라의 구원적 힘은 힘차게 퍼져나가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내적인 자세이다. 복음의 내용을 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우선 신자들이었지만, 자신들이 기쁘게 ‘들은’ 복음의 내용을 생활 속에서 일치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느님의 말씀이 최대의 ‘결실’을 낼 수 있는 ‘땅’이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설명해 주신다(18-23절).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으로부터 ‘가시덤불’과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에 이르기까지 말씀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 설명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은 각별한 정성으로 보호되지 않는다면 시들어 죽는다. 즉 하느님의 말씀은 피상적이고, 세상 이익에 대한 애착 등에 집착되어있을 때에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19절) 사람들과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23절) 사람들로 구분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23절)의 결실을 맺는데, 이들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들이다. 이 ‘깨닫는다.’는 것은 지적으로나 신학적 통찰력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의미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그 말씀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 올바로 ‘깨닫는 것’이다. 이제 그 말씀이 잘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그 밭에 있는 모든 돌과 잡초 가시덤불을 없애는 ‘수고’를 하여야 한다. 이 수고가 없으면 수확은 실패할 것이다. 수확이 실패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그 ‘말씀’을 지체 없이 받아들여야 할 ‘땅’, 즉 우리 각자의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1독서: 이사 55,10-11: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처럼...
제1독서에서도 제2 이사야가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의 말씀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여기서 야훼의 ‘말씀’은 지혜나(잠언 8,22; 지혜 7,22) 성령(이사 11,2)처럼 인격화되고 있고 오직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후에야 돌아오는 사자(使者)에 비유되고 있다. 비와 눈의 의미는 그 ‘말씀’의 풍부한 생산력과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변화시키는 힘을 말한다. 이 야훼의 말씀도 구약에서는 수없이 실패를 거듭하였다. 이사야가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말씀’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변화와 쇄신의 ‘능력’이다. 하느님 말씀의 능력은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인간들의 차원을 넘어서 또는 그 반대의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이룰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고 또 우리의 마음에 맡겨진 생명의 ‘씨앗’이 결실을 맺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바로 그 가능성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모든 위험이 있다.
제2독서: 로마 8,18-23: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모든 만물이 생겨 나온(창세 1장) 태초의 그 ‘말씀’의 찬란한 영광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도 실현되기 위해서는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무릅써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18.22-23절).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세대에 걸쳐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그들에게서 그 말씀이 결실을 거둘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신앙을 가진 우리들의 삶을 통한 결실이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신앙을 가진 나에게서 결실을 맺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결실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말씀의 씨앗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마음의 밭에 있는 자갈이나, 잡초, 가시덤불 같은 장애가 되는 것들을 모두 없앨 수 있는 ‘수고’가 기꺼이 따라야 한다. 그 수고가 없이는 결실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이 뿌리내리는데 방해가 되는 세상과 세상의 이익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은 좋은 토양으로 준비된 우리 마음과 우리의 삶 속에서 큰 수확을 얻을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 13, 3)
-한상우신부-
주님께서
뿌린 말씀의
씨앗입니다.
주님의
씨앗입니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시며
말씀으로 우리를
만들어갑니다.
끝까지
말씀으로
살길 원하십니다.
씨앗에서
열매까지
말씀은 우리와
함께합니다.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말씀으로
만나게되는
주님이십니다.
씨앗도 열매도
말씀이 만들어가는
말씀의 시간입니다.
마음만 있고
말씀이 없으면
삶은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음안에
있어야 할
말씀입니다.
마음은 말씀과
함께 가야합니다.
말씀은
씨앗과 열매를
닮았습니다.
말씀을 나누고
말씀을 줄 수
있는 삶이
되게하소서.
말씀으로
낮아지고
말씀으로
고개숙이는
씨앗과
열매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살게합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에서는 '말씀과 우리의 상호성'을 이야기합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
먼저 제1독서에서 우리는 당신 말씀의 성취에 대한 주님의 확신을 듣습니다. 사람이야 '말 따로 행동 따로'이기 일쑤지만 하느님은 그러실 수 없습니다. 그분의 의지가 그분 입을 통해 발설되니까요. 말씀이 곧 그분 의지의 표현이고, 성취는 그 의지의 완성입니다. 그분의 의지와 말씀과 성취는 일체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이라는 씨앗을 받아들이는 네 종류의 토양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마태 13,4).
말씀을 듣는 영혼의 땅이 "길바닥"이 되지 않으려면, 사람이든 사물이든 정보나 이념이든 아무것이나 내 영혼을 함부로 짓밟고 다니며 점령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깨어서 내 땅의 주권, 그 영혼을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마태 13,5-6).
마찬가지로 내 영혼의 땅이 "돌밭"이 되지 않으려면 내 안에 가득한 돌들이 부서지고 갈아져 흙이 되어야 합니다. 그저 딱딱하고 물기 없는 돌인 채로는 생명의 말씀을 품기 어렵지요.
돌이 흙이 되는 과정은 결코 쉽지도 않고, 간단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습니다. 시간도 걸리지요. 더 작아지고 미약해지고 무력해지는 과정을 견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산산이 부서지고 짓이겨지고 으깨진 흙이 되어서라도 말씀을 품을 수 있다면 인내와 견딤, 기다림은 가치가 있습니다.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마태 13,7).
말씀의 숨을 막는 가시덤불은 사실 내가 키우는 것입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은 장마 뒤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잡풀처럼 엄청난 번식력을 자랑하지요. 영혼이 가시덤불 땅이 되지 않으려면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서로 덩굴을 엮기 전에 잘라내어야 합니다. 걱정과 유혹에 한치의 땅도 허용해서는 안 되지요.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마태 13,3).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열매 맺습니다. 들음과 깨달음과 실행이 하나입니다. 이는 그의 들으려는 '의지'와, 깨달음이라는 '앎'과, 열매 맺는 '사랑'이 일체일 때 가능합니다. 그는 이미 의지와 말씀과 완성이 하나인 주님을 닮았습니다.
우리 영혼이 말씀을 품기 적합한 좋은 땅으로 유지되려면, 지향의 일관성이 필요합니다. 바라는 바와 아는 바와 움직이는 바가 하나를 지향해야 합니다. 그 하나가 곧 주님의 뜻이지요. 이런 영혼이 지닌 통합성이 곧 인격적 영적 성숙의 표지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의 지향을 이야기합니다.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로마 8,23).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서 구원되기를 바랍니다. 이 진정한 원의에서 우리 지향이 들음과 깨달음과 실행으로 구체화되고 방향을 잡고 성장해 나가지요. 결국 우리의 구원은 말씀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마음 밭, 영혼의 토양을 잘 가꾸시는 한 주간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 땅이 말씀을 잘 품어야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즐겨 이루실 것입니다.
말씀 수용의 단계들
-김찬선신부-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음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헛되이 돌아가는 일이 없고
뜻하는 바를 반드시 이루고야 만다고 하니 말입니다.
이에 비해 오늘 복음은 아무리 하느님께서 말씀하셔도
우리 마음 밭이 어떠냐에 따라 아무 결실이 없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말씀에 모순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순矛盾이란 창이란 뜻의 모와 방패라는 뜻의 순이 합쳐진 말로서
장사꾼이 창과 방패를 팔면서 자기가 파는 창은 모든 것을 뚫는다고 하고,
동시에 자기의 방패는 모든 것을 막는다고 한 데서 유래된 거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모순된 하느님 말씀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 모순될 리가 없겠지요.
이런 믿음으로 두 말씀을 묵상해보니 제게는 이런 뜻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물론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그래서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창세기 1장에서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생기라는 말씀대로
다 생겨났고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보시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뜻에서 하느님 말씀대로 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고,
우리 인간도 다 그렇게 되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태어나고 난 뒤에는 얘기가 달라집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라는 것을 주셔서
당신 말씀을 받아들일 건지 거부할 건지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비유에서 이 땅 저 땅 가리지 않고 씨를 뿌리셨지만
어떤 땅이냐에 따라 결실을 달리 맺는다는 것의 뜻입니다.
하느님은 폭군이나 조폭 두목처럼 말을 안 들으면 절단 내는 분이 아니시고,
당신이 사랑으로 하신 말씀을 우리 인간이 사랑으로 받아들이길 바라시고
그래서 선택의 자유도 주시고 시간을 갖고 선택할 수 있는 여유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길바닥과 같을 때는 하느님께서 벽에 대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치 않아 그 말씀에 전혀 관심이 없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수없이 그리고 간절히 말씀하셔도 와닿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깨닫지 못해서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시는데
깨닫지 못하는 것은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사랑치 않아서입니다.
이보다 나아진 단계로서 우리가 돌밭과 같을 때도 있습니다.
돌밭이란 돌과 흙이 같이 있는 것이고 그래서 흙이 있기에 일단
씨를 받아들이지만 돌들로 인해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를 오늘 비유 풀이에서 말씀을 처음에는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말씀 때문에 환난이 닥치면 걸려 넘어지는 단계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주님 말씀은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싫어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말씀만 들으려는 단계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세 번째 단계는 씨가 뿌리는 잘 내렸는데 가시덤불에 덮인 단계입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그래서 열매를 변변히 맺지 못하는 단계입니다.
한동안 많은 교회가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합니까?'라는 글귀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내걸었던 것처럼 믿음이 부족하여
하느님 말씀을 듣고도 걱정에 싸이거나 유혹에 흔들리는 단계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데
하느님 말씀의 열매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느님 말씀 때문에 인생이 바뀌고 행복하며, 생기와 활기가 넘치고,
그래서 남도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마태 13,1-23)
---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오히려 진리와 반대되는 자아가 있습니다. 그 자아를 믿으면 진리에서 멀어집니다. 그 자아에 대한 믿음이 강할수록 주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약해집니다. 뱀이 하와를 그렇게 만들어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하였습니다. 나의 눈을 가리고 나의 귀를 막는 것이 내 자신임을 알지 못하면 이 교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길바닥에 씨가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씨를 먹는 까마귀가 창세기의 뱀이요, 탈출기의 파라오요, 우리가 버려야 하는 자아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자아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길이 되지 않으려면 겸손하면 되고, 돌밭이 되지 않으려면 절제하면 되며, 가시밭이 되지 않으려면 청빈하면 됩니다. 겸손과 절제와 청빈을 ‘복음삼덕’이라고 합니다. 복음삼덕은 세속-육신-마귀를 이기는 무기입니다. 나 자신 안에서 끓어오르는 교만과 육체적인 욕구와 재물에 대한 탐욕만 줄여가면 자아가 죽고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립니다. 그러면 진리의 말씀이 내 안에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진리와 반대되는 자아의 주장이 자신 안에 있음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나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내 안에 뿌려지는 말씀이 진리이고 나는 그 진리를 열매 맺게 하는 좋은 밭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 때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릴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0) | 2020.07.13 |
---|---|
2020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0) | 2020.07.12 |
2020년 7월 11일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0) | 2020.07.10 |
2020년 7월 10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0) | 2020.07.09 |
2020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0) | 2020.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