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마태 10, 34~11,1)
"Whoever loves father
or moth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d whoever loves son or daught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d whoever does not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after me is no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놀랍고 두렵습니다.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며 속죄하고 화해하는 것이 중요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자를 통하여 전해지는 이 말씀은 청천벽력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선포합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몸과 마음과 생각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제물을 바치는 것은 속죄하고 화해한 것을 보여 주는 행동입니다. 그보다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은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이고 화해입니다.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비슷한 의미로 들립니다. 다른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요구입니다. 사람 간의 관계에 얽매여 있고 그 관계 안에서만 나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참된 자신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 관계를 무시하고 무조건 벗어나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느님 앞에 있는 자신만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이웃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을 평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언자를, 의인을 그리고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진정한 평화가 시작됩니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깨끗이 하라는 말씀처럼,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통하여 이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평화를 위한 길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늘 좋은 일만 생겼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끔찍한 실패도 경험했고, 그 무엇으로도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은 아픔도 있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수렁에서 헤맸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시간을 이겨냈기에 그들은 ‘성공’이라는 상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성공’은 단순히 세상 사람의 부러움을 받는 정도의 가치가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을 이겨낸 가치의 결실이기에 그 어떤 것보다도 커다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언젠가 어떤 분의 이런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기적이에요.”
도저히 풀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풀리는 기적을 체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계가 없는 일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믿는 만큼 자신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힘든 시간이 찾아와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극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기적을 사는 것이 됩니다.
기적을 살고 있습니까?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면, 나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 순간 기적이 내 곁에 다가올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편안과 안락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때로는 세상의 것을 과감하게 잘라버려야 하기도 합니다.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말해 보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리에 커다란 종기가 났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이 종기를 제거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종기를 가만히 두는 것이 평화일까요? 아니면 칼로 이 종기를 제거하는 것이 평화일까요? 내 몸을 불편하게 하는 종기를 제거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칼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잘라버릴 수 있는 칼을 주십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속된 이익을 위해 살다가 영원한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하느님을 위해 죽어서 영원히 사는 편이 훨씬 낫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선순위에 따라 사랑하며 그것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들을 주님께서는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늘 가슴 깊이 담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이사 1,16)”
사랑스러운 눈을 가지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좋은 점을 보아라(오드리 햅번).
비교는 하지 마세요.
‘비교는 기쁨을 훔쳐 가는 도둑이다.’(테디 루즈벨트)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와 비교하려 할 때, 그래서 나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려고 할 때 이 말을 떠올리려고 노력합니다.
학창 시절에는 남과 비교를 많이 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 운동 잘하는 아이,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아이 등등…. 저보다 더 나은 아이가 많았고 그러면서 남과 비교하는 횟수도 늘어만 갔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제 안의 기쁨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실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면 그만입니다. 내가 비교해야 할 것은 과거의 나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뿐입니다. 그 외의 비교는 기쁨을 훔쳐 가고, 지금을 힘들게 만들 뿐입니다.
삶의 의미를 잃었을 때
-전삼용신부-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나 무기력증에 빠진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은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삶에는 의미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삶에는 본래 의미가 없고, 그냥 태어났으니까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이라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살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보면 삶의 의미가 생존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합니다. 니체는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과연 삶에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있다면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을 찾았다면 삶이 어떻게 변화될까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이란 영화에는 죽고 싶었던 두 남녀가 살아있어야 하는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강동원 씨가 연기한 사람은 사형수입니다. 강동원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맞아서 눈이 먼 동생과 고아원에서 살았습니다. 엄마를 찾아가도 아빠에게 맞으니 그냥 고아원에서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고 동생은 길거리에서 얼어 죽게 됩니다. 그러다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자궁외임신이라 돈이 급히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는 형과 도둑질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강동원은 애인이 자신을 배신했음을 알고, 더는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아 살인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이나영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14살 때 사촌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자신은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 오빠는 결혼해서 잘만 살아갑니다. 이 이야기를 엄마에게 털어놓았더니 엄마는 딸의 탓을 합니다. 사촌 오빠가 밉고 엄마도 미워 3번이나 자살 시도를 한 사람입니다. 수녀님인 이모의 소개로 사형수 강동원과의 만남을 이어가며 서로의 깊은 이야기까지 털어놓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죽고 싶었는데 이제 살고 싶어집니다.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두 사람은 삶의 의미를 찾은 것입니다. 그 삶의 의미를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생기면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면 살아야 할 의미를 잃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신은 존재 자체이시기 때문에 언제부터 존재했느냐고 묻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신의 존재 이유는 신의 존재와 함께합니다. 존재 이유가 없으면 존재의 의욕을 잃고 그러면 진짜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소명을 완수하는 것이 아니라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생존과 사는 것은 다릅니다. 이유를 모르고 살면 생존이고, 이유를 알고 살면 비로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서로를 위한 존재이시기 때문에 하느님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존재 이유고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아주 가끔은 아이들이 불쌍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겠다는 분을 만납니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을 사랑해서 부모님을 위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유일한 목적은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야 합니다. 자녀들이 사랑할 줄을 알아 사랑하는 사람을 많게 만들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이들이 컸는데도 부모가 아이들이 자신들을 위해 살아주기를 바란다면 아이들은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부모가 계시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할까요? 그래서 인간에 대한 사랑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주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이웃도 저절로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알려주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위해 살면 자살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을 위해 살면 지치는 일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자신을 덜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는 가족들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도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부르심을 받을 때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이 당신에 대한 사랑이 줄어드는 것이라고 여기셨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느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사랑하여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살게 됩니다.
삶의 의미는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에 영원한 존재이듯, 이 삶의 의미를 찾을 때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우리 존재 이유는 하느님이 그러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미국 사회는 대부분의 물건이 우편으로 배달됩니다. 쇼셜넘버도, 운전면허증도, 신용카드도 우편으로 받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선택사항인 경우가 많은데 미국은 우편으로 받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지역이 워낙 넓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보낸 택배가 미배달 되었다고 합니다. 보통은 현관에 쪽지를 남겨놓는데 이번에는 쪽지가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보낸 택배의 송장번호를 우체국에 알려주니 택배를 찾아 주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지금 택배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물건에는 송장번호나 바코드가 있어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위치를 찾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한국에서 코로나19의 동선을 비교적 빨리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이라고 합니다. 스마트폰을 통해서 위치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메르스를 경험한 한국은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서 질병관리본부에게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고 합니다.
가톨릭 교리에 ‘인호(印號)’가 있습니다. “‘주님의 인호’는 성령께서 ‘속량의 날’(에페 4,30)을 위하여 우리에게 찍어 놓으신 표지이다. 과연 세례는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다. 끝까지 인호를 간직한, 곧 자신이 받은 세례가 요구하는 것에 충실한 신자는, 신앙의 보람을 지니고, 세례 때에 고백한 그 신앙을 보존하고, 신앙의 완성인 지복 직관(至福直觀)을 바라면서 부활에 대한 희망 속에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가톨릭교리서 1274항) 군대는 매일 ‘암호’가 바뀝니다. 암호는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는 표시가 되기에 꼭 암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암호를 알면 어둠 밤에도 걱정 없이 부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암호는 매일 바뀌지만 우리의 영혼에 새겨진 인호는 평생 바뀌지 않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인호를 받은 사람이 성사를 통해 요구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신앙생활의 보람을 느끼며 부활에 대한 희망 속에서 기쁘게 살아가면 주님으로부터 마지막 날에 환영받을 것입니다.
어릴 때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 특히 사제품을 받은 사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인호가 이마에 새겨져있다고 하였습니다. 인호는 암행어사의 마패일 수도 있지만, 인호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충실하게 살아야할 책임과 사명의 표시라고 하였습니다. 사제직을 중도에 포기한 사제는 직무의 사제직은 멈추었지만 인호의 사제직은 남아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겸손하게, 충실하게 이 세상에서 보속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하루 세례와 견진 때 주어진 인호를 생각하며 신앙인으로 더욱 성실하게 살도록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인호를 다 알고 계시지만 우리의 잘못을 벌하시기보다는 우리가 회개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십니다.
집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도도 들어오고, 전기도 들어와야 합니다. 냉방과 난방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인호를 받은 신앙인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를 명확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인호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필요조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조건이 아닙니다. 실천하는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갖추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천하는 신앙의 기준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것은 가족을 넘어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의 이익을 넘어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신앙의 기준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부귀함도, 건강도, 생명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강을 건너 영원한 삶에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0,34-11,1: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할 때, 우리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34절)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말씀이라는 칼을 통하여 하느님을 따르는 일치 곧 참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말씀의 힘을 통해 세례의 물로 새롭게 될 때에, 우리는 죄와 죄의 근원으로부터 갈라서게 된다. 그리고 죄 많고 불성실했던 과거의 나를 벗고 몸과 마음이 성령으로 새로워지면 우리는 죄스런 옛 삶의 습관들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가족들 간의 분열이란 바로 내 마음 안에 일어나는 갈등이라 하겠다. 선포된 복음은 평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분열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 때문에 서로 갈라져 있다. 어떤 집안에는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다. 여기서의 갈등은 악한 평화를 깨뜨리기 위한 필연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7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모님을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나 자식들은 그분 안에서 함께 할 것이라는 뜻이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8절)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스런 버릇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39절)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옛 악습을 끊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생명에로 태어나게 된다. 즉 완전히 변화된 내가 된다는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41절) 예언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 안에 계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의인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이 같은 상이 주어진다. 그는 바로 그들 안에 계시며 그들을 파견하신 그들을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와 의인에 합당한 영예를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작은 행위라고 하더라도, 즉 그들 신앙의 겉모습만 보고서 그에 마땅한 친절을 베풀었다 해도 희망을 품은데 대한 상을 빼앗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시원한 물 한 잔”(42절)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베푼 사람의 믿음에 상을 주시는 것이지, 사랑을 받은 사람의 위선에 상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원한 물 한 잔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지시하신 뒤, 그들이 당신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할 기회를 주시고자 그들을 떠나셨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을 잘 묵상하고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하는 삶을 가져야 한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 34)
-한상우신부-
평화는
자기성찰의
칼을
필요로합니다.
거짓된 자아를
죽이는 평화의
칼입니다.
평화와
성찰의 칼은
우리를
회심으로
이끕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칼은
사랑을 실천하는
칼입니다.
거짓과 갈라서는
결단의 칼이며
주님을 받아들이는
식별의 칼입니다.
하느님을
최고의
중심으로 두는
십자가의
칼입니다.
평화는 그래서
모두를 살게하는
말씀의 칼입니다.
평화는
집착이 아니라
모든 것을
깨어나게하는
감사의 칼입니다.
평화의 주님을
끝까지
따르기 위해선
잘라내는 아픔의
칼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평화와 칼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새롭게
비추어줍니다.
집착과 욕망을
잘라내는 참된
평화입니다.
평화는 그래서
가장 먼저
받아들여야 할
주님자체입니다.
가까운 거리
-김기현신부-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달라지는 것들이 있음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먼저 가까이 있는 동기 신부와 자주 만납니다. 전에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3시간 정도 걸렸을 때는 잘 만나지 않던 친구를 요즘 근처에 산다는 이유로 자주 만납니다.
그리고 신자 분들 가운데 몇몇이 축일이 되면 안부 문자를 하시곤 했는데, 지금은 제가 한국에 있으니 밥을 먹자고 하십니다. 멀리 있을 때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 거리가 가까워지니 생각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강화에 오기 전에 다른 본당 새벽 미사 부탁을 받았었습니다. 시골에 들어와서 조금 멀기는 하지만, 약속을 해 놓은 거라 새벽에 나가서 미사를 했는데요. 옆집에 사시는 신부님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아침에 문도 열려있지 않고 초 키는 데도 안 나와서 걱정이 되어서 무슨 일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 문자를 하셨답니다. 제가 보통 아침에 환기시키려고 문도 열어놓고, 신부님과 같이 신자들이 성전에 봉헌한 초를 매일 아침 키는데 말도 없이 보이지 않으니까 걱정이 되셨던 것 같습니다.^^;
그 문자를 받고 ‘가까이 있으니 사는 것이 보이고 걱정해 줄 수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는데 안부를 묻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아프거나 잘못 되도 아무도 모르겠다... 느낌이 있었는데, 가까이 함께 사는 분이 있으니 몇 년 동안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조금 낯설기도 하고, 감사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요즘 거리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가깝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들이 참 많고, 잘 알게 되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에 예수님이 여러 고을에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도 비슷한 느낌일 것 같습니다. 구약의 하느님은 그 위엄과 영광으로는 멀게 느껴지고 두려움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기 때문에 전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가능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고, 그분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가난하고 병든 이들은 그분의 손길로 치유 받는 것이 무엇인지 두 눈으로 아주 가까이서 체험하게 됩니다. 낫게 되고, 위로의 말씀을 듣게 되고,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그 하느님과 우리의 거리는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꿈만 같은 시간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그분과 거리를 좁힐 수 있다면 어떨까요? 말씀을 읽는 자리에 나아가고, 성체 앞에 나아가고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 그분을 가까이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마 멀리서는 알지 못했던 친밀함, 위로, 사랑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그분께 나아가고 거리를 좁히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고 실천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요즘 들은 아재 개그
-집에만 있었더니 확찐자가 되었다.
-백신을 이미 스님들이 모두 매점매석했다고...
(모두 하얀색 고무신을 신고 계신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여러 갈래로 등장합니다. 그 안에서 오늘 그분이 우리에게 정말로, 정말로 바라시는 게 무엇일까 머무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마태 10,42).
이 말씀은 낯선 곳으로 파견 받아 떠나는 제자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아무리 건장한 장정이어도 볼모지로 떠나는 초보 복음 선포자에게는 어느 것도 녹록치 않을 테니까요. 제자들은 스승 곁을 떠나는 순간, 미지의 고장에서 누군가의 관심과 친절로 새 힘을 얻을 "작은 이"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은 선교지에서 만나게 될 이들 중에서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가난하고 약하고 움츠러든 "작은 이들"을 찾아 눈길을 주고 다가갈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그분에게서 보아온 대로 말입니다. "작은 이"가 되어본 제자가 "작은 이"를 알아 봅니다.
"받아들이는"(마태 10,40-41)
작은 이들과 물 한 잔이라도 나누는 것은 그를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그는 내가 베푼 친절에 상응하는 보상을 할 수조차 없는 처지일지 모르지만, 애초에 마음에 그런 계산 따위는 떠오르지조차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도 별 영양가 없어 보이는 가난하고 힘 없는 작은 이를 받아들이는 거라면 더 그렇지요. 그가 내 직계 가족이나 친족, 이해관계로 결속된 사람이 아닐 땐 더 그렇습니다.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마태 10,35).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깜짝 놀랄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가정의 화목을 경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혈연 지연 등 세속 인연들 너머로 시선을 돌리라 하시는 겁니다. 가족, 친인척, 내 편의 울타리 안에 코를 박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마음이 따뜻하고 생각이 바르더라도 울타리 밖의 작은 이들, 하느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가난한 이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은 당신 속마음을 밑바닥까지 드러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동안 잘 하느라고 올렸던 축제와 제사, 제물들을 "물렸다"고, "싫다"고, "견딜 수 없다"고, "지쳤다"고 솔직히 토로하십니다. 참다 참다 내뱉는 적나라한 표현 안에는 혐오감까지 그대로 묻어납니다. 신과 인간을 막론하고 마음 없는 예의의 위선이 상대를 얼마나 슬프고 아프고 괴롭게 하는지 여실히 드러납니다.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 1,17).
주님의 말씀이 인간의 위선에 대한 역겨움의 토로로 끝나지 않고 주님께서 진정 바라시는 것으로 귀결되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적어도 그분이 왜 언짢아 하시는지, 무엇을 바라시는지 깨달아 노력할 여지가 있으니까요.
주님께서 언급하신 "억압받는 이, 고아, 과부"는 고통 받는 약자들, 하느님 외에는 보호자가 없는 이들을 대변합니다. 복음 속 "작은 이들"과도 연결이 되지요. 그들은 세상에서 기댈 곳 없는, 온갖 특혜에서 제외된, 자기 인권과 행복권에 대해 실낱같은 목소리조차 잃어버린 이들이지만 주님의 제자들이고 그들 자신이 곧 주님의 현존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그들을 받아들이는 이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은 가장 작은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내가 바로 그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세속적 성공 보루를 갖지 못한 작은 이들은 물 한 잔에도 크게 감사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이 올리는 감사와 축복의 기도는 구름을 뚫고, 하느님 궛가를 적시어 그분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마태 10,42)이라고 힘주어 약속하십니다.
자,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 예식 참여가 주님께서 진정 기뻐하실 예물이 되려면 작은 이들과 함께여야 한다는 진실을 배운 겁니다. 내가 속한 가족, 공동체, 이웃, 사회, 국가, 인류, 모든 피조물 안에서 누가 "작은 이"인지 우리 마음은 모르지 않지요. 그들에게 시원한 물 한 잔, 따뜻한 안부, 진심어린 격려 한 마디 건네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니, 미리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이렇게 쉽습니다. 그 하느님 만나시는 기쁨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자기초월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69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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