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0. 7. 13. 06:10

2020 7 14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코라진아, 너는 화를 입으리라. 베싸이다야, 너도 화를 입으리라.

너희에게 베푼 기적들을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들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날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마태 11, 20-24)

 

"Woe to you, Chorazin! Woe to you, Bethsaida!
.For if the mighty deeds done in your midst
had been done in Tyre and Sidon,
they would long ago have repented in sackcloth and ashes.
But I tell you, it will be more tolerable
for Tyre and Sidon on the day of judgment than for you
.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으십니다.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은 모두 갈릴래아 호숫가에 있는 마을입니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고을’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예수님께서 많은 시간을 보내셨던 곳입니다. 코라진과 벳사이다 역시 카파르나움에서 북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을들로, 지금도 그곳에는 무너진 마을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 근처의 이 고을들은 오늘 복음에서 불행 선언의 대상이 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다른 곳보다 더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한 표현이지만, 그 결과는 항상 예수님을 향합니다. 기적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가장 많은 기적을 일으키신 이 고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예수님을 더 믿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 하였지만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그만큼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큰 용서를 받은 사람도 그만큼 많이 용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받은 사람 역시 더욱 참된 신앙인으로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받는 것에만 익숙하고 베풂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은 감사한 마음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더 좋은 것을, 더 큰 것을 받고자 애쓸 뿐입니다. 우리는 얼마만큼의 은총과 사랑을 받고 용서를 체험하였습니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작년에 제 조카가 집 축복을 해달라고 해서 집을 찾아갔습니다. 신혼여행을 하고 온 뒤에 찾아간 첫 방문이었지요. 그런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집이 너무 넓게 느껴져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둘이 사는데 왜 이렇게 큰 집을 구했니?” 

아직 아기도 없는 상태에서 둘만 쓰기에 이 집은 너무나 커 보였습니다. 조카는 이렇게 웃으면서 말하더군요. 

“짐이 없어서 그래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살림살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 집이 커 보이는 이유는 벽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란다의 공간을 터서 거실로 사용하니 훨씬 더 넓어 보였습니다. 

집이 넓어 보이는 이유는 벽이 없고 물건이 없기 때문이었지요. 실제로 벽이 많은 건물 안에 들어가면 좁아 보인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그리고 세간살이가 많으면 아무리 넓은 집이라고 해도 좁게만 느껴집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요? 마음이 넓은 사람을 잘 보십시오. 우선 마음에 벽이 없어서 누구나 포용합니다. 또 복잡한 문제들로 마음을 채우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넓은 마음을 가진 큰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큰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계속해서 알려주었으며,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실제로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었던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에서 벙어리들이 목소리를 찾아 주님을 찬양하고 눈먼 이들이 보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다리 저는 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이를 직접 보고서도 믿음에 대한 그리고 회개에 대한 확고한 의지도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불신의 벽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세상 것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각종 지저분한 짐들을 마음 안에 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사람들을 회개시키려고 매섭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외침이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전해집니다. 불신의 벽을 계속 쌓아가는 우리를 향해, 욕심과 이기심 그리고 각종 죄로 마음을 지저분하게 만들고 있는 우리를 향해 똑바로 살아야 함을 경고하십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이사 7,9)고 말씀하십니다. 굳은 믿음을 갖고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결정하는 것이다(벤 스타인).

 


만년필 사랑.


저는 글을 모두 만년필로 씁니다. 누구는 특별한 날에만 만년필을 쓴다고 하지만, 만년필을 좋아한다면 특별한 날에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더 많이 사용할수록 길이 들어서 그 활용도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년필을 사용하는 이유도 참 많습니다. 

첫째, 잉크를 주입할 때의 그 느낌이 좋습니다. 이렇게 잉크를 넣었는데, 그 잉크가 모두 활자화되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둘째, 똑바로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만년필의 방향을 바꿔쓰면 글씨가 잘 써지지 않습니다. 항상 똑바른 방향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지요. 내 삶도 그렇습니다. 

셋째, 물이 닿으면 안 됩니다. 만년필로 쓴 글에 물이 묻으면 번져 버립니다. 그래서 무슨 글씨인지 알아보기 힘듭니다. 그만큼 내가 쓴 글을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죄도 이와 비슷합니다. 물방울 하나가 글씨를 온전히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처럼, 죄 하나가 진짜의 나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불편함이 많은 만년필이지만 삶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지침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래서 더욱더 만년필을 포기할 수가 없네요. 

제가 만년필을 사랑하는 이유였습니다.                     

 

은총이 많을 때가 가장 위험한 때다

-전삼용신부-

 

어떠한 판단을 내릴 때, 배가 부를 때 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배고플 때 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배가 부르면 교만해져서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판단을 할 때 될 수 있으면 배가 고플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세상은 이전보다 많이 배가 부른 상태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하는 선택들 때문에 결국 자멸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아이 석상’으로 유명한 남태평양의 이스터섬이 있습니다. 비교적 높은 수준의 문명이 존재했던 이스터섬은 1,200년을 전후해 인구가 2만 명에 이를 만큼 번창했었습니다. 그러나 1722년 이들을 처음 본 네덜란드인들은 이스터섬이 황량한 모래로 가득 차 있었으며 3,000명 정도의 원주민들만 비참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왜 풍요롭기만 했던 이들이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일까요? 바로 높이가 20미터에 이르고 무게가 90톤이 되는 정교하게 조각된 거대 석상인 모아이를 운반하기 위해 수많은 나무를 베어 숲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사라지자 섬이 황폐해졌고 겨울엔 땔감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더 문제였던 것은 나무가 없으니 물고기를 잡을 카누도 만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가장 풍요로울 때 거대한 석상들을 만들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려 했고 그것이 멸망의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나라나 모든 개인은 이런 식으로 망합니다. 인간은 배부를 때 어리석은 생각을 많이 합니다. 동식물이나 자연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교만 때문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오쩌둥은 1949년 정권을 잡았을 때 가장 어리석은 결정을 내립니다. 당시 중국은 보건 문제가 심각하여 콜레라, 흑사병, 말라리아 등의 전염병이 창궐했습니다. 그래서 ‘제사해 운동’을 시작합니다. 모기와 쥐, 파리와 참새를 박멸하려는 노력입니다. 모기는 말라리아를 퍼뜨리고, 쥐는 흑사병을, 파리는 성가시니까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참새는 한 마리당 곡식을 4.5킬로그램이나 먹어치웠습니다. 전쟁은 승리로 끝났습니다. 쥐 15억 마리, 모기 1,100만 킬로그램, 파리 1억 킬로그램, 참새 10억 마리가 소탕된 것입니다. 그런데 참새 10억 마리가 먹어야 할 해충들이 득실거리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메뚜기 떼가 구름처럼 중국의 곡식들을 싹쓸이하였습니다. 1959년에서 1962년까지 중국에 대기근의 큰 원인이 이것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적게는 1,500만 명, 많게는 3,0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교만해지면서 자연을 마구 훼손하게 되었고 그렇게 자신도 피해를 보게 됩니다. 인간의 능력이 향상돼서 자연을 좌지우지하게 될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인간이 잘살게 된 것은 많은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은총 바로 뒤에는 멸망이 따라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은총이 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은총은 죄에서 벗어나라고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선물들을 받으면서도 더 큰 죄로 빠져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코라진, 벳사이다를 꾸중하십니다. 당신께서 많은 은총을 부어주셨음에도 그들은 더욱 악한 길로 빠져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소돔’ 이야기를 하십니다. 소돔도 당시 있었던 도시 중에 은총을 가장 많이 받은 동네입니다. 먹고 살 걱정이 없었고 심지어 두 천사가 다른 동네엔 안 들어가도 그 동네엔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은총 충만의 바로 뒤에는 멸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은총이 충만할수록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합니다.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배고플 때 나쁜 짓 하는 것보다 배부를 때 더 많이 하고 더 크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은총을 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은총을 주시면서도 그 결말이 안 좋을 것을 아시고 지금도 경고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더 잘살게 될수록 더 악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은총이 많은 시대에 멸망이 아닌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돔 꼴을 당합니다. 은총을 부여잡고 롯처럼 이 어리석음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카파르나움, 코라진, 벳사이다도 풍족한 동네였지만 지금은 돌무더기만 남아있습니다. 은총이 많을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우리는 은총이 충만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언제나 ‘은총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도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배부를 때를 항상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그때 장자를 만났다.’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책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높은 벼슬에 있을 때도 담담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벼슬에서 쫓겨났을 때도 담담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수련을 하셨기에 벼슬에 있을 때나, 쫓겨났을 때나 그렇게 담담하십니까?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행복이 벼슬에 있을까요? 나에게 있을까요? 행복이 벼슬에 있다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담담할 밖에요. 행복이 나에게 있다면 벼슬과는 상관없으니 벼슬에서 쫓겨나도 담담할 밖에요?”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그리스와 터키도 갔었고, 샌프란치스코도 갔었고, 뉴멕시코도 갔었고, 과테말라도 다녀왔을 겁니다. 몸은 피곤했겠지만 좋은 추억을 만들었을 겁니다. 신문 홍보도 했을 겁니다. 코로나19로 텃밭을 가꾸고 있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산보를 다니고 있습니다. 이웃 본당의 사제들과 친교를 나누고 있습니다. 고추도 자라고, 오이도 자라고, 호박도 자라는 걸 봅니다. 매일 산보를 하면서 기도하고, 강의도 듣습니다. 멋진 추억을 만들지는 않지만 뉴욕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습니다. 정부에서 지원금도 나왔으니 그것도 좋은 일입니다.

 

1년 전입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역사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만남입니다. 저는 당시 태국에 있었습니다. 좋은 결과를 기대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랬을 겁니다. 미국의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이 시작되고, 북한의 비핵화가 가시적으로 드러나길 바랐습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 북한의 모습은 상당히 달라졌을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노이의 만남은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미국은 그저 그런 하루였겠지만 북한의 입장은 자존심이 상한 하루였을 겁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도 안타까운 하루였을 겁니다.

 

최근 북한은 남한과 맺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합의를 깨겠다고 합니다. 개성공단에 있던 연락사무소를 폭파했습니다. 당분간 남과 북의 관계도 긴장이 계속될 것 같습니다. 저의 기억 속에 북한은 두 가지의 모습이었습니다. 김신조와 함께 내려온 무장간첩, 남한까지 내려오는 땅굴, 판문점 도끼 만행과 같은 사건입니다. 남한에서는 대규모 규탄행사가 있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 스포츠를 통한 교류, 한반도기를 들고 올림픽에 함께 입장, 남북 정상회담과 같은 만남입니다. 대결과 긴장을 바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평화와 화합을 바라지만 늦어진다고 좌절할 것도 없습니다. 국제질서의 냉혹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럴수록 우리의 힘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외부에서 오는 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주시리라고 예언합니다.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르친과 아람, 그리고 르말야의 아들이 격분을 터뜨린다 하여도 이 둘은 타고 남아 연기만 나는 장작 끄트머리에 지나지 않으니 네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린 다윗을 통해서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을 따른다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는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시대가 있었습니다. 한국전쟁과 남북 분단의 시대가 있습니다. 군인들이 정권을 잡은 시대도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는 역경과 고통을 이겨낸 역사이기도 합니다. 독립운동이 있었고, 독일로간 광부와 간호사도 있었고, 중동으로 간 건설 노동자도 있었습니다. 박종철, 이한열이 걸어간 민주화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물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개하는 사람은 이스라엘에서도 바빌론의 유배지에서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하느님,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티끌 같은 나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얼마나 강렬하고 뜨거운 것인가?

 -양승국신부-

 

갈릴래아 호수 연안에 자리 잡았던 명품 도시 코라진, 베싸이다, 카파르나움이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단체로 혼쭐이 나고 있습니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유난히 공들였던 도시, 자주 들르셨던 도시, 기적을 많이 일으키셨던 도시들이었건만, 끝끝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보다 훨씬 앞선 시기, 또 다른 잘 나가던 도시, 그러나 끝끝내 회개하지 않았던 도시들이 또 있었습니다. 

 

팔레스티나 북쪽에 자리잡은 티로와 시돈이라는 도시가 대표적인 도시들이었습니다. 경제적 부를 이루다보니 하느님 두려운줄 모르고 교만이 하늘이 찌르던 도시들이었는데, 그 결과 쫄딱 망해 지금은 유적지로 남아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 역시 한때 크게 번성했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우상 숭배에 깊숙히 빠져들어갔습니다. 악하고 음탕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지금 지구상에서 그 자취가 지워져버렸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듬뿍 받은 도시들이 그 숱한 은총들을 거부했습니다. 그냥 무상으로 주시는 은총과 축복을 그저 감사하면서 받아들이면 됐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굴러 들어온 복을 자기 발로 차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시는 회개, 회심을 위해서는 칼같이 단호한 결기가 필요합니다. 내일이나 다음 주가 아니라 바로 오늘, 이 순간, 이 자리에서의 회개와 회심이 필요합니다.

  

또한 회개, 회심은 평생이 단 한번이나 두번이 아니라, 매일 아침마다, 아니 매 순간마다 되풀이되어야 마땅합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 그리고 우리 인간의 나약함과 보잘 것 없음을 기억한다면 시시각각 되풀이되는 회개, 회심이 필요합니다.

  

나 자신의 변화와 성장의 가능성을 굳게 신뢰하며, 또 다시 회개, 회심이라는 멀고 먼 여정을 새롭게 시작해야겠습니다.

  

회개, 회심의 주체가 나 자신인 줄로 알았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 주인공은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 뜨거움, 강한 구심력, 흡인력, 중력으로 인해 자연스레 우리의 발길이 자동으로 그분께로 돌아서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지상 순례 여정 중에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과제는 회개, 회심입니다.

  

회개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깨달임입니다. 한 가지를 깨달았다는 것은 이 세상 그 어떤 값진 보물을 얻는 것 보다 더 소중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깨달음이 목숨 다하는 순간까지 계속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제가 체험한 한 가지 깨달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정말 행복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불붙는 생지옥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아직 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큰 마음 먹고 한번 죽어 보십시오. 재물에 죽고, 자리에 죽고, 탐욕에 죽고, 집착에서 죽고, 거짓에 죽고 위선에 죽고...

  

그렇게 부단히 한번 죽어보십시오. 우리가 진정 죽는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천국문이 열리고, 새하늘 새땅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꼭 재물이나 자리 뿐만 아니라 마음에 안드는 직장 상사에게 죽고, 깊은 상처를 주고 받은 동료에게 죽고, 나 자신에게 죽고, 또 죽어야 합니다.

  

또 다른 중요한 깨달음이 하나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먼지 같은 나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는 얼마나 크고 오묘한 것인가? 티끌 같은 나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얼마나 강렬하고 뜨거운 것인가?’

 

은총은 풍부하다

-반영억신부-

 

심판 날이 다가 온다는 것은 기쁨인 동시에 두려움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대가 됩니다. 열심히 노력하였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다고 자부하는 이에게는 충만한 행복을 누리는 때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심판의 날이 두렵습니다. 살아온 지난날이 허물로 누벼놓은 날이요, 마음이 흔들 비쭉이었기 때문입니다. 

에제키엘서에 보면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그렇게 하여 죄가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라”(에제18,3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걸어온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 아니 지금 이 순간에 어떤 길을 걸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자칫 잘 살아왔다고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될 때 그 인생이 올가미에 걸려들게 되고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코라진, 벳싸이다, 가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열심히 활동하신 지역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필립보는 벳사이다 출신입니다. 카프르나움은 예수님 활동의 근거지요, 가장 많은 기적을 행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은총을 거부하였고 결단의 시간을 낭비하였기에 불행합니다. 반면에 티로와 시돈, 소돔은 이방인 도시로써 교만과 사치스러운 부의 표본이 된 곳으로 퇴폐와 음란, 악의 도시로 알려진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더 큰 구원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기적이 그곳에 있었더라면 그들은 분명 회개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은총이 아무리 많아도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인연을 내세우고 예수님을 자주 모셨다고 해도 그것이 곧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나 구원을 받지는 못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걸 맞는 삶의 변화를 가져올 때 완성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코헬12,14)고 하셨으니 마음을 다잡아 오늘을 충실히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불속에 던지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니 만큼 알곡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먼저 자신을 잘 살핀다면 심판은 기쁨이요, 곧 하늘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두려워 마십시오. 자신을 갖고 심판을 맞이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기를 다짐하며 이 날을 봉헌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악에 대해서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경우에 악에 대해서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침묵 중에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말씀하시면서 응답하셨습니다. 그 응답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말씀은 사랑이요 자비이고 용서의 말씀입니다. 또한 그것은 심판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구원됩니다. 만일 내가 그것을 거부한다면 저는 단죄 받게 되는데 이것은 그분에 의한 단죄가 아니라 나 자신이 내리는 단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하시며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2013년 3월 29일 콜로세오 십자가의 길에서 행한 연설).   

 

‘지금’ 회개하여라 
-송영진신부-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0-24)”

여기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께 자비를 간청해서 원하는 대로 은총을 받은 사람들”로 해석됩니다.
그 고을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는 일이 많았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다른 고을들보다 더 많은 은총을 받게 된 고을들입니다.
그런데 그 고을 사람들은 은총을 받기만 하고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특정 고을 사람들을 편애하신 것도 아니고,
다른 고을의 사람들보다 그 고을의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은총을 주신 다음에
그것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기를 바라신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회개하지 않았다는 말에는 예수님을 안 믿었다는 뜻도 들어 있고,
받은 은총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청해서 받기만 하고, 받은 다음에는 고마워하지도 않고,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가버린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이름이 언급된 고을들은,
사실은 예수님을 안 믿고, 회개하지도 않은 유대인들을 상징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특정 고을 사람들만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안 믿고, 회개하지도 않은 유대인들을 꾸짖으셨다는 것입니다.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은총을 받아도 받은 줄도 모르고 살면서
믿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오늘날의 사람들도 모두
꾸중의 대상에 포함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심판과 처벌을 예고하시는 말씀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지금이라도 회개해서’ 구원을 받으라는 호소입니다.)

여기서 티로, 시돈, 소돔은,
하느님을 안 믿는, 또는 믿기를 거부한 이방인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도시들을 언급하신 것은 그곳 사람들을 칭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다고 자랑하면서도 받은 은총에 응답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것은 사실상 안 믿는 것과 같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심판 날에는... 견디기 쉬울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이 말씀은, 자기 탓이 아닌 이유로 하느님과 예수님을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은
심판 때에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지만,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었고,
은총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은 심판 때에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안 믿는 사람들이 심판 때에 더 유리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심판 때에 더 유리한 쪽은 믿는 쪽입니다.
어떻게 해야 심판 때에 구원 선고를 받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알고 있다면 그대로 살면 되는데,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살면,
하느님과 예수님을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보다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의 오만함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오만함’은 카파르나움이 특히 더 심했지만,
카파르나움만의 문제는 아니었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의 문제였습니다.
자기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있고, 잘 지키고 있으니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유대인들의 오만이었습니다.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오만함’에 대한 벌로 지옥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성경과 교리를 잘 알고 있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에 더 쉽게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더 쉽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 더 쉽게 들어갑니다.)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을 꾸짖으신 말씀과 다음 말씀이 비슷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져 황폐해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때까지,
정녕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마태 23,37-39).”
예수님은 심판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요한 3,17).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도 구원의 대상입니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이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또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잘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받게 됩니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때까지”는
“주님의 재림 때까지”이고, “정녕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는
“버림받게 될 것이다.”인데, 심판을 받고 완전히 버림받게 된다는 뜻은 아니고,
회개와 보속을 하라고 주어진 기회를 뜻합니다.
그래서 재림 전에 서둘러서 회개하라는 것이 이 말씀의 진짜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실 때에는 심판관으로서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재림의 날이 언제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회개는 ‘지금’ 해야 합니다.
(재림 때에 심판관으로서 오신다고 해도,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뜻이 변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애쓰실 텐데, 사람들 쪽에서
회개하지도 않고, 구원받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하려는 예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1,20-24: 회개하라

오늘 복음에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벙어리들이 목소리를 찾아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고 눈먼 이들이 보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다리 저는 이들이 치유되어 뛰어다니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 것을 보았지만 믿음도 회개도 하지 않는 것을 염려하여 애태우는 슬픔이 서린 탄식의 말씀을 하신다.

 

그러면 무엇이 소돔과 고모라의 죄보다도 더 악하다고 코라진과 베싸이다를 꾸짖으셨는가? 갈릴래아 지방에 있는 이 코라진과 베싸이다 지방은 띠로와 시돈, 소돔과 고모라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많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면서도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써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를 거절한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우리의 잘못된 삶으로 주님을 배척하게 된다면, 우리도 유대인들과 똑같은 말씀을 하실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이렇게 참으로 중요하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23). 이 말씀은 그들이 주님의 예언을 거역했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뜻일 수도 있고, 예수님의 자비와 기적과 행적으로 하늘까지 들어 올려지는 특혜를 받았건만, 그들은 믿지 않았기에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회개했더라면 이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 나아가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일어났을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들의 사악함을 드러낸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24). 이 고을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서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벙어리들이 목소리를 찾아 주님을 찬양하고 눈먼 이들이 보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다리 저는 이들이 걸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났지만 그처럼 놀라운 기적들로도 믿음을 가지려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티로와 시돈에서도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발견된다.

 

코라진과 벳사이다가 비난을 받는 이유는 주님께서 몸소 그곳에 가셨는데도 그분을 믿지 않았지만, 티로와 시돈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믿었기 때문에 용서를 받았다. 예수님께서 소돔에 대해 말씀하신 데는 이유가 있다. 소돔에 빗대 이 고을들의 죄를 강하게 따져 묻기 위해서이다. 에제키엘서에서 예루살렘을 질책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저지른 그 모든 역겨운 짓으로 너의 자매들이 오히려 의롭게 여겨지도록 만들었다.”(에제 16,51)

 

이 고을들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어 오래 머무신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강하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회개에로 부르시고자 하신 것이다. 우리 자신이 그러기에 올바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지 못하면, 주님께서는 이 고을들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도 하실 것이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 20)

-한상우신부-

가장 큰 기적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자신의 
진정한
회개입니다.

사랑이
회개입니다.

복음의 열매는
우리의 
회개입니다.

참된 행복의
첫걸음또한
우리자신의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느님 사랑을
우리가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회개의 삶으로
하느님을
우리 삶안에서
되찾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통하여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참된 회개는
모든 것이
은총이 
되게합니다.

시작도 마침도
회개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의 길이
바로 회개의 
길입니다.

회개는 삶을 위한
가장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사랑하게 하는
회개가 가장
큰 기적임을
믿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발견하는 가장
멋진 날 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믿음으로 모든 일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의미를 찾으라고 촉구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마태 11,21)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에 오를 성 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마태 11,23).

세 고을,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이 예수님께 혼쭐이 나고 있습니다. 당신 백성에게 축복을 베풀러 오신 예수님께서 지금은 추상같은 목소리로 그들을 꾸짖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각 도시의 이름을 마치 사람에게 하시듯 인격적 존재처럼 의인화해 부르십니다. 이 도시들은 예수님께서 특히 많은 기적을 베풀어 주신 곳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니지요.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마태 11,21)
고을 안의 누군가에게 특별한 기적이 허락되는 건, 그것이 한 개인이나 그 집안만을 위한 특혜나 행운을 넘어서, 이를 보고 듣는 모든 이에게 표징이 되라는 뜻입니다. 치유받은 이를 보면서 자기 삶에서 감사를 끌어올리고, 되살아난 이를 보면서 희망을 굳히며, 구마를 보면서 하느님 주권을 찬양합니다. 특히 용서와 해방의 기적은 보는 이를 자기 성찰과 회개로 이끌지요. 이것이 기적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여야 합니다.

하나의 기적을 대하는 다수가 저마다 자기와의 연결 고리와 표징을 감지하고 의미를 끌어낸다면 먼저 그 자신이 변하고, 이어 그 고을도 변하고 결국 세상이 변해갈 것입니다. 기적에 대한 각자의 반응은 믿음의 깊이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데, 오늘 예수님께서 세 고을들에게 가장 안타까워 하신 부분일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아람과 이스라엘의 침략으로 두려워 떠는 유다 임금 아하즈가 등장합니다.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이사 7,4).
"네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이사 7,4).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이사 7,7).

주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보내시어 겁에 질린 아하즈를 위로하십니다. 이미 아람이 에프라임까지 진주한 터라 '임금과 백성의 마음이 바람 앞에 떠는 숲의 나무와 같았다.'고 성경 저자가 상황을 묘사할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화가 어떻게 마무리되는지, 열왕기 하권과 역대기 하권을 잠시 들춰봅니다.

"아하즈를 포위하였지만 정복하지는 못하였다"(2열왕 16,5).

이것이 당장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기적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하즈는 이사야를 통한 하느님의 장담에 믿음을 두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하즈는 만군의 주님께 의지하기보다 아시리아에 기대기로 결심하지요. 처음에는 아시리아 임금이 아하즈를 돕는 듯 보이지만, 종국에는 아하즈가 자기에게 바친 모든 성전과 궁궐의 재물에도 불구하고 그를 도와주지 않고 외면합니다. 그런데도 이 과정에서 아하즈는 줄곧 주님을 배신하고 이방 신들을 유다 땅에 끌어들여 백성을 타락시키고 주님의 화를 돋웁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이사 7,9).

아하즈는 예언자까지 보내어 자기에게 경고하신 주님의 이 말씀을 새겨들었어야 했습니다. 동맹이나 군사력이 아닌, 지금 눈앞의 외세를 막아주신 만군의 주님을 의지했어야 했지요. 그에게 꼭 필요했던 말씀으로 힘을 주시던 그분께 마음을 돌렸어야 했습니다.

"믿지 않으면"
믿지 않는 이에게는 기적도 은총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남의 일, 가십거리에 불과합니다. 그런 이는 그 기적과 은총을 제 것으로 할 수 없지요. 한 고을, 한 공동체에 베푸신 기적과 은총이 아무리 모두를 위한 것이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싶어도 믿지 않는 냉랭하고 무심한 마음이 미리 방어벽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온 세상에서 베풀어지는 기적과 표징은 나를 위한 것이 됩니다. 또 나에게 베푸신 은총과 선물도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이 되지요. 그러니 매순간 사람과 사건을 통해 당신 뜻을 전하시는 기적과 표징들 안에서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에 귀 기울여, 회개와 헌신의 열매를 맺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과 기적들을 되새겨 보면 어떨까요. 또 우리 공동체와 우리 나라에 베푸신 놀라운 기적들에 깊이 감사함으로써 우리 안에는 주님께서 가슴 미어지게 불행을 한탄하시는 일이 더 이상 없기를 희망해 봅니다.

 

행복 회개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70035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7월 17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