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0. 7. 8. 05:30

2020 7 9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가서 하늘나라가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은 고쳐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오 10,7-15)

 

"As you go, make this proclamation: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Cure the sick, raise the dead,
cleanse the lepers, drive out demons.
Without cost you have received;

without cost you are to giv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사람들에게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을 모으신 목적을 실행에 옮기시는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기쁜 소식을 전하고 행동으로 그것을 드러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길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과 비교하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대부분 걸어서 가야 하는 이들에게 여비와 신발과 여벌 옷은 당연한 준비물이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준비물 가운데 꼭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겉옷과 지팡이입니다. 겉옷은 저녁의 추위를 막아 주고, 지팡이는 들짐승이나 위험에서 자신을 지키는 데 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다른 것들은 물론 ‘지팡이’마저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시의 제자들에게는 이 말씀이 대단히 야속하게 들렸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하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은 지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파견된 제자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처럼 가장 먼저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를 선포하셨고, 그들과 함께 머무시며 그들을 낫게 하시고 그들에게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함께 머물며 평화를 빌어 주는 것. 지금도 여전히 선교에서 중요한 모습이며 예수님 삶의 요약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면서, 참된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떤 자매님께서 요즘 건망증이 심해졌다면서 걱정을 하십니다. 분명히 무엇을 하려고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서 그냥 멍하니 가만히 있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무엇을 하러 주방에 가기는 했는데 기억나지 않아서 그냥 물 한 잔만 마시고서 다시 거실로 나왔다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기억나지 않는지, 혹시 치매의 시작이 아니냐면서 걱정을 하시더군요. 

기억이 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알 수 없으면 찾을 수가 없습니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면 답답한 마음만 가득해집니다. 기억이 났을 때, 또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답답함은 사라지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걱정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더 걱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주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 답답한 마음을 간직한 채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창조주,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이 많습니까? 이런 마음을 벗어던지고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가는 방법은 주님을 알고 주님을 기억하는 것뿐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의 파견에 사도들은 철저하게 순종합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는 명령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도 평화를 빌면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했습니다. 사도들의 이 전교 여행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모든 것을 비우는 행동에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모습, 이 모습을 통해 사람들은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모습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제자들을 통해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지상의 모든 보물은 주님께로 가는 데 해가 될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라는 옷만 있으면 됩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고백한다면, 내가 버려야 할 이 세상 것은 무엇인지를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혹시 이것도 가져야 하고, 저것도 지녀야 한다면서 꼭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을 붙잡을 손이 없다며 그냥 주님을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요? 

모든 것을 버려야 세상에 기쁜 소식을 용기 있게 전할 수 있으며, 내가 세상의 것에서 벗어날 때 주님의 평화를 전해줄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의식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능력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보다 더 용기를 주는 것은 없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행복을 가리고 있는 것은 누구?


이상하게도 졸음이 계속 몰려옵니다. 읽고 있는 책이 지루한 것도 있겠지만, 너무 일찍 일어나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창문이라도 열어 환기하려고 창문을 가리고 있었던 블라인드를 걷었습니다. 그 순간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하늘이 너무나 예뻤고, 그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세 그루의 은행나무는 멋진 조화를 보여 주었습니다. 

평상시 햇빛이 들어온다고 블라인드로 가리고 있었던 창문이었습니다. 이 블라인드를 걷어내고 나니 평상시 쉽게 볼 수 없었던 풍경을 비로소 볼 수 있게 됩니다. 행복했습니다. 

이 행복을 그동안 누가 막고 있었던 것일까요? 블라인드를 친 사람이 저였으니 당연히 저입니다. 행복을 스스로 가리고 있던 ‘나’였습니다. 

지금 행복을 스스로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 앞을 가리고 있는 것을 걷어낼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자녀 위로 쏟아지려는 유황불을 볼 수 있는가?

-전삼용신부-

 

미국의 개척사에 보면 18세기 초 두 명의 젊은이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배를 타고 와 신대륙인 미국에 내렸습니다. 그 두 사람은 ‘마르크 슐츠’와 ‘에드워즈 조나단’입니다.

      그런데 마르크 슐츠라는 사람은 ‘내가 이곳에서 큰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서 내 자손에게는 가난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도록 돈을 벌어야 하겠다.’라고 생각하고 뉴욕에다 술집을 차렸습니다. 그의 소원대로 엄청난 돈을 벌어서 당대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왔으니 이곳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다.’라고 생각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150년이 지나 5대 자손들이 태어난 후에 뉴욕시 교육위원회에서 이 두 사람의 자손들을 추적해 어떻게 되었는지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결과는 이랬습니다.

      마르크 슐츠의 자손은 5대를 내려가면서 1062명의 자손을 두었습니다. 교도소에서 5년 이상인 형을 살은 자손이 96명, 창녀가 된 자손이 65명, 정신이상, 알코올 중독자만 58명, 자신의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문맹자가 460명, 정부의 보조를 받아서 살아가는 극빈자가 286명이었답니다. 모두 965명이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반면 에드워드 조나단은 당대에 프린스턴 대학을 설립하고 5대를 내려가면서 1394명의 자손을 낳았습니다. 자손 중에 선교사 목사만가 116명이 나왔고, 예일 대학교 총장을 비롯한 교수, 교사가 86명, 군인이 76명, 나라의 고급관리가 80명, 문학가가 75명, 사업가가 73명, 발명가가 21명, 부통령이 한사람, 상하원의원 주지사가 나왔고, 교회 장로 집사도 286명이 나왔습니다. 모두 816명이 사회의 명망있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출처: ‘믿음의 유산을 남기는 부모가 되라’, 다음 블로그, ‘풍성하고 행복하게’]

 

      대통령까지 지냈던 케네디 가문도 사실 술장사를 해서 그런지 자손이 대부분 안 좋게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담배 농사로 부를 축적한 조지아주 레스터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개신교 측의 과장된 자료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일면 수긍이 가는 면도 있습니다. 술, 담배 사업이나 무기 사업, 자연을 파괴하는 사업 등으로 유산을 물려주면 후손이 힘들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물려주어야 할 것이 믿음이면서도 재물만 물려주며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링컨의 어머니 낸시는 개척자의 아내로서 무수한 고난과 빈곤과 싸우면서도 링컨이 9살 때 생을 마감하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얘야! 나는 너를 두고 하느님 앞으로 먼저 간다. 나는 네게 좋은 집도, 좋은 땅도, 많은 재산도 물려주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네게 이 성경책 한 권을 유일한 유산으로 주고 간다. 너는 한평생 이 가운데 있는 말씀을 보배로 삼고, 재산으로 삼고, 양식으로 삼아 이 교훈대로 살아나가거라. 그러면 네 길이 형통할 것이다.”

      링컨은 새로운 엄마 사라를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도 대단한 분입니다. 아버지 토마스는 링컨이 장작 패는 일이나 하며 평범한 농부의 길을 걷기를 원해서 성경과 책을 읽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그때마다 사라는 그의 남편을 설득합니다.

 

“나는 링컨의 엄마예요. 링컨을 낳아준 엄마 낸시처럼 키우고 싶습니다. 낸시는 성경의 가르침과 책의 가르침을 통하여 아이를 양육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성장시키고 싶습니다. 협조해 주세요.”

링컨은 두 어머니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내가 잘한 것은 우리 어머니 덕입니다. 두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유산은 성경의 가르침과 책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진정 후손에게 재물을 물려주어야 할까요? 믿음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학원 가는 것은 허락하며 성당 가지 않겠다고 하면 참아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믿음을 물려주지 않으면 그 자녀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 지금 볼 수만 있다면 목숨을 걸고 믿음만을 물려주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의 결말을 이렇게 말해주십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내가 복음을 제 때에 전하지 못해 자녀가 나중에 유황불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한다면 그래도 성당이 아닌 학원에 보낼 수 있을까요? 복음을 전하는 이는 이런 절박한 심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롯과 아내, 두 딸을 구하기 위해 들어간 두 천사의 절박한 심정을 헤아립시다. 그 천사들은 소돔 위로 막 떨어지기 직전의 유황불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는 과장된 위협이 아닙니다. 무섭게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내 사랑하는 이들 위에 쏟아지려는 유황불을 볼 수 있어야 참으로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사도가 됩니다.

 

-조재형신부-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말이 있습니다. 포정이라는 사람은 소를 다루는 백정이었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백정은 한 달에 한 번씩 칼을 바꾼다고 합니다. 뼈를 베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백정은 1년에 한 번씩 칼을 바꾼다고 합니다. 살을 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포정은 19년을 같은 칼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뼈와 살의 빈틈을 베기 때문입니다. 포정은 소를 다루면서도 도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서핑을 처음 하는 사람은 파도를 헤쳐 나가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위험하기도 하고, 쉽게 지친다고 합니다. 서핑을 잘하는 사람은 파도를 탄다고 합니다. 좋은 파도가 오면 파도에 몸을 맡긴다고 합니다. 좋은 파도가 지나가면 기다린다고 합니다. 좋은 파도는 또 오기 때문입니다. 포정이 소의 빈틈을 알아 칼을 오래 사용하듯이, 파도를 타는 서퍼가 바다를 즐기듯이 우리는 삶이라는 파도에 몸을 맡길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명분이라는 이름으로, 자존심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삶의 파도에 맞설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래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려 깊은 식별입니다. 신앙인에게 식별의 기준은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의로움입니다.

 

본당에 있을 때의 경험입니다. 태풍 곤파스로 성당 뒷산의 나무들이 뽑혔습니다. 성당 뒷산과 접한 아파트의 옹벽이 밀려났습니다. 시장도 왔었고, 구청장도 왔었습니다. 뒷산이 있어서 그러니 뒷산의 높이를 낮추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시장도 의견에 동의했고, 구청에서 뒷산을 9미터 정도 깎았습니다. 성당에 작은 마당이 생겼습니다. 저는 그 마당만으로도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몇몇 분들은 이왕에 마당이 생겼으니 조금 더 큰 마당으로 만들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태풍으로 작은 마당이 생긴 것도 감사할 일인데 더 욕심을 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사려 깊은 동창 신부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동창 신부는 제게 마당을 넓히는 과정에서 비난을 받을 수 있지만, 본당 신자들이 친교를 나눌 수 있는 넉넉한 마당이 생길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태풍과 뒷산에 빈틈이 있었고 우리는 약간의 비용을 들여서 넉넉한 마당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자존심에 머물렀다면 힘들었을 겁니다. 명분에 집착했다면 마당은 마련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넓어진 마당에서 윷놀이도 하고, 성모의 밤도 하고, 성탄절에는 따끈한 어묵을 먹었던 생각이 납니다.

 

강한 바람이 불면 가장 먼저 풀잎이 눕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멈추면 풀잎은 언제나 다시 일어섭니다. 아무리 바람이 세게 불어도 풀잎은 뽑히는 법이 없습니다. 커다란 나무는 강한 바람에도 당당하게 맞서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멈추면 뿌리가 뽑히고, 넘어진 나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라는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습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손을 자주 씻고, 마스크를 착용해야 합니다. 불필요한 모임은 자제하고,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실천해야 합니다. 풀잎이 강한 바람에 먼저 눕듯이, 코로나19는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조심해서 극복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유혹의 바람이 불곤 합니다. 욕망의 바람이 불곤 합니다. 시기와 질투의 바람이 불곤 합니다. 원망과 분노의 바람이 불곤 합니다. 풀잎이 바람에 눕듯이 우리는 겸손하게 누워야 합니다. 기도하며 누워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며 누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는 평온의 바다가 펼쳐집니다. 우리의 마음은 큰 숲이 되어 많은 사람이 머물게 됩니다. 나무는 바람에 뽑힐 수 있지만 숲은 바람을 보듬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큰 숲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고,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큰 숲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교회는 성사(聖事)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누가 숲이 되고, 누가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누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은총으로 드러내는 성사가 되어야 할까요? 바로 우리들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가장 가난한 이웃들보다 덜 일하고, 덜 고뇌하고, 더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을 큰 죄악으로 여깁니다!

 -양승국신부-

 

언젠가 장장 12~3년이나 되는 오랜 양성기간을 마무리한 형제들, 이제 곧 사제품을 받고 본격적인 사목 일선에 투입될 형제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길이기에, 다양한 어려움이 곳곳에 산재한 십자가 길이기에, 선배로서 이런 저런 충고를 하다보니 말이 자꾸만 길어지더군요.

  

“잘 아시는 바처럼 사제품은 끝이 아니라 출발입니다. 여러분은 신입사원도 아니고 수습사원인 셈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궂은 일을 하는데 주저하지 말길 바랍니다. 만나게 될 신자들과 청소년들, 함께 일하는 직원분들 앞에서 한결같이 겸손한 자세를 유지해 주십시오. ‘내가 신부인데! 내가 시설장인데!’하는 말은 절대 금지입니다. 무엇보다도 머리둘 곳 조차 없으셨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한평생 가난한 사제로 살아주십시오. 소임이동 때는 여행용 가방 두개면 충분합니다. 양손에 가방 두개 달랑 들고 고속버스 타고 이동해주시면 그 자체만으로 사제로서 성공한 삶입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목 실습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저처럼 훈시 한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 용 짐을 이런 식으로 꾸리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를 ‘여장규범’이라고도 합니다. 여러 말씀 가운데 유독 다음의 말씀이 가슴이 꽂힙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오 복음 10장 8~10절)

  

돌아보니 저도 형제들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요구는 무리한 요구를 넘어, 해도 해도 너무한 상상을 초월하는 요구였습니다. 

 

짧지 않은 여행길이었을텐데, 적어도 갈아 입을 여벌 옷 몇벌, 그리고 옷을 넣을 보따리 하나 정도는 지니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벌 옷도, 보따리도 챙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시 여행 중에 강도나 산짐승들을 만날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방어용 지팡이 하나는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생존 수단인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긴 여행길에 많은 돈은 아니어도 만일을 대비한 비상금은 필수입니다. 그런데 비상금 한푼 조차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에게 럭셔리한 부자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떠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이 자신의 힘이나 세상의 힘을 믿기 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 유사한 말씀이 ‘열두 사도의 가르침’ 11장 6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 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목자들이 교우들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 자신은 스스로 천막짜는 노동을 해서 생활비와 전도 여행 경비를 마련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오늘 날 우리 교회와 수도회를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의 부유한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청빈의 삶, 무방비의 삶, 머리 둘곳 조차 없는 떠돌이로서의 삶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히 정착하고 안주했으며, 충분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복음적 청빈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몇몇 수녀회 수녀님들을 바라보며 실낱같은 희망을 지닙니다. 그분들은 가장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들보다 덜 일하고, 덜 고뇌하고, 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 생활을 큰 죄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사목 활동 지역은 언제나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이 살아가는 거주 지역입니다. 그 지역이 개발되어 부촌으로 탈바꿈하면 아무 미련없이 또 다른 가난한 지역으로 떠나갑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10,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의 삶의 기본자세를 철저한 무소유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말단을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들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일합니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의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사도직 행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곳에서 당당하게 자존심을 지키며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철저한 무소유를 통해 가진 자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돈에 사로잡히고 출세를 노리는 사람은 안 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봉사하는 대신에 출세하려고 안달하고, 돈에 얽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제들과 주교들이 그러고 있는지 보았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슬픕니다. 아닙니까? 복음의 근본, 예수님의 부르심의 근본은 이것입니다. 봉사하는 것, 자기 자신을 잊고 봉사에 몸 바치는 것, 멈추지 않고 언제나 저 너머로 가는 것입니다. 지위의 편의성. 저는 하나의 지위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광장을 지나다니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바리사이들처럼, 정직하지 않게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봉사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를 장사꾼이 되게 합니다." 

사실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용해야 할 곳에 제대로 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 때문에 하느님을 소홀히 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다 뭐냐’ 고 합니다.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셨으며 물질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쌓아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야말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잠시 맡겨 주신 것이니 만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사용해야 합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보통 돈과 물품만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금전적인 도움은 즉각적으로 수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받은 돈이 떨어지면 또 다른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공감해 주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보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요즘은 재능기부도 많이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삶의 경륜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주십시오. 그렇지만 기왕이면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결코 물질 때문에 하느님께 소홀히 하는 일은 없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것을 거저 받고서는 선심 쓰듯이 주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선교활동 
-송영진신부-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12-13).”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는 “평화를 빌어 주어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예수님의 평화’를 전해 주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른,
‘영원하고 참된 평화’입니다(요한 14,27).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의 평화’를 전해 주려면
나 자신이 그 평화를 이미 받아서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에게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 평화를 받아서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1.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언제나 항상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 믿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믿게 만들 수 있습니다.>
2. 물질적인 것에 대한 걱정과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 예수님께서 빈손으로 가라고 지시하신 것은(9절-10절)
걱정을 모두 내려놓고 믿음만으로 가라고 지시하신 것입니다.>
3. 선교활동의 결과에 대한 걱정도 버려야 합니다.
< 성공과 실패는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우리가 할 일에 대해서만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은
“예수님의 평화를 얻기를 희망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집이라면”입니다.
< 겉으로는 표시가 안 나더라도,
누군가가 와서 복음을 전해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에티오피아 내시,
또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간수가 좋은 예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렇게 복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선교활동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찾아내서 인도하는 활동입니다.>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집에는 선교사가 빌어 주는 ‘예수님의 평화’가 내리고”입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신앙여정이 시작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마땅하지 않으면”은 “복음을 거부하면”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보다 무시하고 외면하고 거부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이 선교활동의 현실입니다.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의 책임은
거부한 사람 자신의 책임이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결과에 집착할 때가 많습니다.
선교활동은 활동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활동입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0,14-15).”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는 행동은 심판 때에 먼지가 털려 나가듯이 멸망하게
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행동이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회개하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나 이 행동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화풀이’는 아니고,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아서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한 ‘호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사랑’만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전하는 복음을 사람들이 받아들일 때에는 그들이 구원받게 된 것을
기뻐하고, 사람들이 거부할 때에는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슬퍼합니다.)
예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언급하신 것은
심판 때에 멸망을 선고받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마태 10,8-11).”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업’이 아니라, ‘사랑 실천’입니다.
사랑을 줄 때에는 대가를 바라지 말고 그냥 주어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은, 선교활동이란, 자기가 받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사람들에게 다시 나누어 주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나의 것’을 주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것’을 사람들과 나누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은, 즉 ‘빈손’으로 가라는 말씀은, 선교활동이란
‘돈의 힘’으로 하는 활동이 아니라 ‘믿음의 힘’으로 하는 활동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만일에 돈의 힘으로 한다면, 돈과 함께 망할 것입니다(사도 8,20).
“그래도 활동비와 생활비는 필요하지 않은가?”
예수님께서 활동비와 생활비도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걱정하다가는 그런 것만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하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단순하게 ‘그냥’ 믿어야 합니다.
자꾸만 토를 달고, 비유니 상징이니 하면서 복잡하게 해석하고,
그래서 본래의 가르침을 왜곡하면, 그것은 정말로 믿음 없는 태도가 됩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당연히 먹이신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걱정은 반대쪽에 있습니다.)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누군가가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하거든 감사히 받아들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맞아 줄 사람을 찾아내라는 뜻도 아니고,
민폐를 끼쳐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호의와 친절을 베풀어 주는 사람이 있거든 하느님의 은총으로 생각하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0,7-15 :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자세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당신의 예언적 가르침과 치유기적의 능력을 주신다. 즉 악한 영들과 질병들을 제압하는 권한을 주셔서 영광스럽게 하셨다. 이러한 권한은 그들에게 필요했다. 이러한 권능으로 사도들은 사람들을 신앙과 의화에로 초대하여 구원과 생명으로 가는 길을 일러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 능력을 보고 사람들은 그들의 말씀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지니고 가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제자들이 자기들이 먹을 양식마저도 걱정하지 않고 세상의 온갖 염려와 세상일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신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다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들의 영광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데 있다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이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양식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쓸데없는 염려로 마음이 산만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 55,23)는 말씀대로 먹을 것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마태 6,24)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돈도, 금이나 은도, 신발도 없이 보내신다.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칭송을 듣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뛰어다니며 가져다주는 은총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이사 52,7) 우리의 발은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어야 한다.

 

또 그렇게 돌아다닐 때 그들은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풍습에서 나그네를 마치 하느님의 천사처럼 대했다. 즉 필요한 것, ‘먹고 자는 것을 무료로 제공할 줄 알았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행위로 알았고 또한 이를 통해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음식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5)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서 묻은 먼지는 하느님의 백성을 더럽히지 않고 하느님의 집에 더러운 것이 묻어 들어가지 않도록, ‘새 성전으로 들어갈 때 그 먼지를 털어 버려야 한다.

 

뛰어나지도 않고 갖춘 것도 별로 없는 이 제자들을 통해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정복하실 수 있다. 나 자신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주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을 감사하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우심을 구하자.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 10)

-한상우신부-

단순함이
참된
믿음입니다.

믿음안에서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게하는 
믿음입니다.

무거운 것을
단순함으로
바꾸어주는
믿음은 언제나
간결함으로
이끕니다.

간결함의
크기만큼
믿게되고
열리게 되는
따름의 여정입니다.

많은 물질이
오히려 우리를
찌르는 걱정이
되고 족쇄가 
될 때가 많습니다.

많은 것을
지니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내어놓는
삶의 참된
기쁨입니다.

내려놓아야 할
집착이며
비워야 할
욕심입니다.

걱정과 욕심이
단순한 삶의
믿음이길
기도드립니다.

간결한 삶으로
나가게 하소서.

거저 받은
오늘의
시간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때"를 숙고하도록 초대합니다.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들춥니다.

"그들의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하니 이제 죗값을 치러야 한다"(호세 10,2).

주님께서 풍요와 번영을 허락하시고 축복을 베푸실수록 이스라엘은 우상을 위한 제단 수를 늘이고 기념 기둥들을 더 세웁니다. 참 이상하지요. 꼭 이스라엘뿐 아니라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주님께서 잘 살게 해 주시면 해 주실수록 더 잘 살 궁리를 하면서 다른 주인을 찾기 일쑤이니 말입니다.

예언자는 이제 곧 이스라엘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의지하던 산당들은 무너지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제단들 위에까지 뒤덮일 황폐와 멸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백성은 우상 따위에는 관심조차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하고 피폐해져 이 모든 몰락을 하릴없이 지켜보게 될 것입니다.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호세 10,12).

하지만 주님의 날은 단순히 주님을 배반한 이들에게 쏟아지는 분풀이나 징벌의 때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날의 도래는 주님 곁을 떠났던 백성이 다시 주님께 돌아와 제 자리를 찾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세상의 주인을 좇느라 무뎌진 영적 감각, 하느님의 목소리가 뚫고 들어올 수 없이 굳어버린 마음, 두꺼워질대로 두꺼워져 굳은 살로 뒤덮여 버린 양심... 이 묵은 땅은 뒤집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가까이 오신 주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러니 모든 것이 무너지고 전복된 지금이 주님과의 사랑을 회복할 때입니다. 주님 앞에 자신의 제자리를 되찾을 때입니다.

복음은 열두 제자의 선정과 예수님의 당부를 들려 줍니다.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마태 10,1).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 중에서 특별히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명을 뽑아 사도라 부르십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예수님 "가까이" 다가간 것이지요.

주님 "가까이"는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영혼의 제자리입니다. 거기에 서서 거기에 머물러 거기서 주님과 지내야만 제자로서 사도로서 다음 스텝이 나올 수 있습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병과 마귀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도와줄 수 있도록 권한과 능력을 주십니다. 제자들의 영달을 위한 게 아니라 하느님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하늘 나라"
하느님 주권, 곧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랑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를 가리킵니다. 이제 그날, 하느님의 때, 하늘 나라가 실현되는 때는 징벌과 멸망의 아비규환이 아니라 위로와 희망의 장이 됩니다. 이방인 압제에 신음하며 희망을 잃어가는 이스라엘에게 치유와 회복을 알리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하느님의 때를 징벌과 멸망의 종말로만 받아들인다면 두려움과 거부감이 크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 "때"를, 우리 영혼을 저 밑바닥부터 뒤집어 산소를 불어넣고 수분과 영양을 공급하는 때, 고착된 자아에서 거미줄을 걷고 먼지를 털어내어 새롭게 단장하는 때, 길 잃고 헤매던 영혼이 진리를 듣고 제 길에 들어서 생기를 되찾는 때로 보여주십니다. 당신이 먼저 우리에게 위로의 존재가 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그런 존재로 양성해 파견하시지요.

어차피 그때와 그 시간은 아버지 외에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언제인지를 가늠하며 따지는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지요. 우리는 그저 두려움보다는 희망으로, 미련보다는 기대로 하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며 주님 가까이, 제자리에 머무르면 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 가까이에 머무르며 주님을 찾는 영혼에게 주님의 때는 먼 미래의 언제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입니다. 당장 맞이해도 여한 없이 충만한 사랑 속에 하늘 나라를 쟁취하는 것이지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지금 여기, 우리 자신에게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미처 못다한 사랑의 책무에 두려워 떨지 말고 가진 것을 다 못 누렸다고 아쉬워도 말고 담담하고 충만히 오늘의 하늘 나라를 누리며 나아가길 축원합니다. 그분은 위로와 자비의 주님이시니까요

 

복음 선포 지침    

 -김찬선신부-

 

 주님께서 드디어 제자들을 파견하시는데 그러시면서
복음 선포의 Guideline, 곧 지침 같은 것을 주십니다.

첫 번째는 무엇을 선포할 것인가, 곧 복음 선포의 내용인데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는 것이며,
딴 얘기하지 말고 하늘나라에 대해서만 얘기하라는 것이고,
그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도 얘기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딴 얘기란 무엇입니까?
자기 자랑이나 자기 지식을 늘어놓는 것이고,
이 세상 처세술이니 심리학이니 인문학을 얘기하는 것이며,
심지어 신학이나 성경을 지식적으로 얘기하는 것일 겁니다.

그러므로 제자들과 오늘의 우리가 선포해야 할 복음은
주님께서 틈만 나면 가르쳐주신 하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얘기하고,
그 나라가 주님께서 오심과 더불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전해야 사람들이 잘 받아들일지 이제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방법은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입니다.

이 말씀대로 나도 의사가 되어 하느님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쳐주며
복음을 선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우리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끔 수도자 성직자들에게 무료로 진료해주시는 신자 의사들을 보며
그것도 교회 사랑이고 하느님 사랑이지만 일반 환자들, 특히 비신자들에게
하느님 사랑으로 진료를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같은 생각을 하는데
그런데 그게 꿈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분들이 계시고 제가 선교 협동조합을
하며 주말 무료 진료를 조합에서 하려는 것도 바로 이런 거지요.

두 번째 지침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입니다.
그런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것은 복음 선포의 방식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 자체가 하늘나라의 삶이고 복음적인 생활양식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거저'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주는 것은 받기 위해 주는 것입니다.
거저 받은 경험, 곧 은총체험이 없기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은총체험을 한 사람만이 거저 줄 수 있는데
세 번째 지침,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도 바로 이것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 의지하여 복음 선포를 위한
무전여행을 한 번이라도 떠난 사람은 사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거라는 체험을 하였을 겁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은 또 다른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 선포를 돈으로 하지 말라는, 돈에 의지하여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어서 제게 항상 어려움이랄까 문제가 있습니다.

뭐냐 하면 제가 어려운 분들을 만날 때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많은 분들이 어려운 분들을 위해 쓰라고 제게 돈을 주시고,
제 딴에는 그 뜻에 맞게 쓴다고 생각하는데 간혹 어떤 분이 돈을 바라고
제게 오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될 때 하느님을 돈으로 파는 것이 아닌가,
내가 과연 복음 선포를 옳게 하는 것인가 식별의 어려움이 있는 거지요.

끝으로 복음을 선포하면서 머물고 떠나는 것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하십니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간혹 개신교 신자들의 경우 열정이 지나쳐 권유를 넘어 강요를 하는데
복음을 선포하면서 강요하지도 말고 질척거리지도 말라는 겁니다.
이 경우 복음 선포는 사랑이 아니가 나의 욕심이 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7월 12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