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6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마태오 9,18-26)
"Courage, daughter!
Your faith has saved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오늘 복음은 액자처럼 구성된 이야기입니다. 회당장의 죽은 딸을 되살리는 이야기 안에 혈루증을 앓던 여자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이야기는 모두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과 병을 앓는 여자가 보여 주는 굳은 믿음과 간절함을 강조합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회당장의 청은 놀랍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께서 죽은 이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게 하신다는 것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회당장이지만 딸에 대한 간절함은 그의 믿음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과 청원처럼 예수님께서는 그의 딸을 되살리시어 회당장의 품에 돌려주십니다.
열두 해 동안 병을 앓던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에서 벗어나고픈 그녀의 간절함과 절실함은 그녀를 구원합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그녀의 간절함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믿음입니다. 이에 어떤 화가는 이 장면에서 한 여자가 많은 사람들의 발 사이로 기어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모습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회당장과 병을 앓는 여자의 치유 이야기는 그들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선물은 믿음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보여 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죽음조차도 넘어섭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난 3월, 코로나 19로 세계가 시끄러울 때, 성지는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봉안당 시설과 지하 성당 리모델링을 하고 있었습니다. 공사를 하면서 자주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설계도면입니다. 이 설계도면으로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설계도면과 똑같이 공사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설계도면만으로는 완성된 모습을 제대로 상상하기가 힘들더군요. 내부 실내장식을 하나씩 하면서 점점 완성된 모습이 만들어져 갑니다.
주님을 알아가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기도 몇 차례 하고, 성경을 조금 읽었다고 해서 주님을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행했을 때, 조금씩 주님과 가까워지면서 또 주님에 대해 선명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의 최종 목적지라는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소녀를 살리시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부인의 치유입니다. 아픈 이가 온전하게 되고, 죽은 이에게는 생명이 돌아옴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혈루증을 앓고 있는 부인의 모습에서 머무르게 됩니다.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열두 해라는 시간을 보내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아마 병으로 자신의 몸이 힘든 것을 떠나서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기가 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병을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던 때였기에, 더군다나 피를 흘리는 부정한 병을 가졌으니 사람들이 보여주는 경멸의 시선이 얼마나 힘들고 두려웠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 곁에 가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큰 용기가 있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죄 많은 여인이라면서 쫓겨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조차 자신을 죄인이라면서 공개적으로 비난할 것 같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용기를 내어 주님께 몰래 다가섭니다.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보살펴 주실 것이라는 믿음, 다른 사람들처럼 비난하기보다는 이해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 죄인의 삶이 아닌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내게도 가능하다는 믿음…….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22)
믿음은 자신 없는 상황에서도 한 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주님께 한 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청을 합니다. 이 부분은 주님의 몫이 아닌, 우리의 몫인데 말입니다.
용기를 내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이 용기를 통해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으며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시작이 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택’,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후회’,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후회없는 선택’.(김이현)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
5월 4일, 갑곶성지에 있는 ‘천국의 문’ 봉안당을 시작하면서 많은 분이 성지를 방문하셨고 지금도 계속해서 방문하십니다. 아마 수도권 지역 내에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봉안당 모두가 만장 되었고, 거룩한 순교자의 정신이 새겨진 갑곶성지 내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어느 날, 아침 일찍 연세 있으신 두 분과 젊은 자매님 한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봉안당 안내를 하는데, 연세 있으신 어르신 한 분이 옆에 있는 젊은 자매님을 가리키며 “이 아이 몰라요?”라고 하십니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저로서는 도대체 누구인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 ‘연예인인가?’ 싶었지만 알 수가 없어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텔레비전을 보지 않아서 누구신지 잘 모르겠네요.”
유명한 성악가였습니다. 얼마 전에는 유명한 오페라의 주연까지 맡아서 호평받은 것으로 인터넷에 나와 있더군요. 그러나 저는 몰랐습니다.
모두에게 잘 알려진 사람이지만 몰라본 이유는 제가 클래식에 문외한이고 방송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려는 노력이 없었으니 당연히 알 수 없었습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려는 노력 없이 주님을 알게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지금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하십니까?
하루를 더 살고 싶다면, 내일 왜 살아야 하는지 오늘 써 놓아라!
-전삼용신부-
의미 있게 죽는 것이 나을까요, 의미 없이 사는 게 나을까요? 만약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면 우리는 의미 있게 죽는 것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사느냐입니다. 그리고 그 사는 이유가 있는 곳이 ‘집’이 됩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병원에 입원하시어 20일 만에 췌장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볼 때마다 “집에 가자!”라고 하셨습니다. 집에는 왜 가려고 하셨던 것일까요? 집에 가면 하루를 살아도 의미가 있고, 병원에서는 의미를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생존보다는 의미입니다.
워싱턴주 올림피아 인근 세인트헬렌스산에 살던 헨리 트루먼 할아버지는 1980년 화산이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상황임에도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화산 폭발이 임박하자 정부는 화산 근처 모든 사람에게 대피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트루먼 할아버지만 끝까지 버텼습니다. 강제로 연행하여 구출할 수도 있었지만, 여론과 할아버지의 연세를 생각하여 그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화산이 폭발하였고 할아버지는 16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화산재에 묻혔습니다. 할아버지는 말했다고 합니다.
“이 집이 사라지면 어차피 나도 일주일 내로 죽을 것입니다. 나는 이 집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겠습니다.”
[참조: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책한 민국’, 유튜브]
할아버지의 선택이 어리석었다고만 할 수 있을까요? 할아버지는 하루를 살더라도 의미 있게 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모든 삶의 의미는 집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의미를 잃고 생존에만 집착하는지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잊고 생존에만 집착할 때 사실 건강도 잃고 죽음을 재촉하게 됩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의미’입니다. 이것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이 찾아낸 결론이었습니다. 사람은 생존 자체가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입니다.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기적은 살고 싶다는 희망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완벽하기만 했던 26세의 홀리는 결혼 하였고 사랑을 받았고 케이시라는 예쁜 딸을 출산하였습니다. 그런데 3주 뒤부터 손가락부터 시작하여 몸이 서서히 마비되더니 결국, 마비가 전신으로 퍼져 호흡기 없이는 숨도 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그녀에게 희귀 난치병인 GBS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온몸이 마비되기는 했지만, 통증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말하는 능력을 잃어가며 “나 너무 아파!”라는 말만 하였습니다. GBS는 그녀를 서서히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하지만 끔찍한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딸 케이시는 엄마의 곁을 지켰습니다.
홀리는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딸을 바라보며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가 바라던 엄마가 되어주지 못해 그게 가장 고통스러웠어요.”
사랑해주어야 할 아기에게 사랑을 줄 수 없는 고통이 죽음의 고통보다 컸던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 포기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마비된 지 두 달 되던 날 홀리는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팔을 움직이고 혀를 움직여 딸에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움직일 수 있는 손으로는 딸에게 처음으로 우유를 먹였습니다. 70일 뒤 호흡기 없이 자가 호흡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여기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재활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양손으로 휠체어를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딸을 안아줄 강한 엄마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87일째 되는 날 그녀는 간호사들의 도움으로 두 발로 일어섰습니다. 홀리는 엄청난 투혼으로 하루가 다르게 강해졌고 4달째 되는 날 그녀는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딸 케이시와 함께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집은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1년 뒤 엄마, 홀리는 마라톤을 완주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고통이 우리를 끝장낼 건지, 아니면 더 강하게 만들 건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출처: ‘딸아이 출산 후 전신 마비된 26세 엄마가 내린 결단’, 포크포크, 유튜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두 여인을 치유해 주십니다. 한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더라도 12년 동안 앓던 병이 나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소녀의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손을 얹으시면 나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아직 할 일이 남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당연히 살려주실 것이라는 믿음에서 오지 않을까요? 마치 어린이가 부모님께 ‘학교에서 선생님이 꼭 필요한 걸 사 오라고 했는데 설마 돈 안 주시겠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언가 청하려면 그 청하려는 것이 의미 있다고 믿을 때 강력하게 청할 수 있습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건강이나 생명이라면 그 건강이나 생명이 의미 있을 때 강력하게 청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의미가 기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의미는 청할 때 모든 망설임을 이기게 해 줄 힘을 지닙니다. 내일 또 살게 해 주시기를 청하고 싶다면 오늘 저녁에 내일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지 적어놓으십시오. 그러면 내일도 주님께서 더 살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확신을 두고 청하는 것은 다 들어주십니다. 그 확신은 내가 청하는 것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오늘을 의미 없게 산다면 내일도 살 수 있게 청하는 것은 자신 안에서 힘을 잃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매일 아침 텃밭에 물을 주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었습니다. 처음 모종으로 심었을 때는 별로 차이가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물을 주면서 커가는 텃밭의 친구들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잘 자라라!’ 지나다닐 때는 잘 몰랐는데 직접 물을 주니까 하나하나 구별이 되었습니다. 어떤 것은 쑥쑥 잘 자라고, 어떤 것은 더디 자랍니다. 어떤 것은 잎이 윤기가 흐르고, 어떤 것은 잎이 쪼그라들었습니다. 같은 햇빛을 받고, 같은 물을 주었는데도 자라는 것은 각자의 몫인 것 같습니다. 텃밭의 방울토마토, 고추, 오이가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꽃들이 피는 걸 보니 곧 열매가 달릴 것 같습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시는 어머니의 마음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똑같은 사랑을 주지만 자녀들은 각자의 개성과 각자의 몫으로 자라기 마련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70억 인구의 생각, 마음, 행동이 다 다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지만 텃밭의 친구들이 각자의 몫으로 자라듯이, 우리들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저는 텃밭의 친구들이 잘 자라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들 각자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알고, 충실하게 살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매주 평화신문 지면에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가 소개됩니다. 회당장이 자신의 딸이 죽었지만 예수님께서 살려 주실 것이라고 찾아왔듯이, 하혈하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기만 해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듯이 매주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는 안타까운 사연이 소개됩니다. 사업의 실패와 건강의 악화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습니다. 고치기 힘든 딸의 병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한국으로 와서 돈을 벌어 고향으로 보내던 외국인이 사고로 병원에서 지내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사연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따듯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피어는 곳에’를 읽은 독자들 중에서 후원금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딸을 죽음에서 살려주셨듯이, 하혈하던 여인의 병을 고쳐주셨듯이 독자들의 따뜻한 마음과 후원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이 되고 있습니다. 밀린 월세를 내 주기도 합니다. 추운겨울을 날 수 있도록 보일러를 설치해 주기도 합니다. 병원비를 내주고, 건강하게 퇴원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외국인에게는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는 항공료가 되기도 합니다. 지난주에도 할아버지께서 손녀딸의 손을 잡고 신문사로 찾아 오셨습니다. 사랑이 피어나는 곳으로 보내달라면서 후원금을 주셨습니다.
세상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뉴스가 넘쳐납니다. 거짓을 사실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조회 수만 많아진다면 개인의 인권과 인격을 무참하게 무너트리기도 합니다. 그런 뉴스를 만드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아름다운 세상에 독을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따뜻한 이야기, 용기를 주는 이야기, 희망을 주는 이야기가 분명 많이 있습니다. 담백하지만, 구수한 된장국 같은 뉴스가 많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아름다운 세상에 믿음의 거름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물을 주는 것입니다. 희망의 빛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쁜 소식을 찾아 읽는 식별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때,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네 복음서에 실린 이적(異蹟) 사화 혹은 기적 사화 30편은 크게 네 가지 사화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병을 치유하는 치유이적사화, 악령을 추방하는 구마이적사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소생이적사화,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자연이적사화 4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마태오 복음서에는 두 가지 이적사화, 즉 치유이적사화와 소생이적사화가 동시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이적사화들을 통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과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대부분의 치유이적사화에서 강조되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치유를 위한 가장 1차적인 조건은 믿음입니다. 치유를 이행하는 제자들에게도 믿음이 필요하지만, 치유대상자인 환자의 믿음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치유되면 고맙고 되지 않아도 괜찮고가 아니라, 주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므로 꼭 치유시켜주시리라 믿는 강한 믿음이 치유의 전제조건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신 이유는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치유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치유자와 치유 대상자 사이의 교감과 공감입니다.
이미 숨이 넘어간 회당장의 딸을 소생시키신 예수님의 기적을 묵상하면서 드는 한 가지 생각입니다. 소생사화가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교훈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으로 소생된 회당장의 딸은 물론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얼마간인지는 모르지만 남아있는 생애를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3~40년 세월이 흐른 후 또 다시 죽음 앞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생이 무한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소생보다는 영원한 주님 나라에서의 영생에 더 큰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생사화가 우리에게 건네는 진정한 의미는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삶과 죽음을 지배하시는 주님이 되셨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는 필멸(必滅)의 존재이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때,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복음 11장 25~26절)
곰곰히 생각해보니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은 바로 저였습니다. 근원적 결핍과 모남과 나약함으로 인해 틈만 나면 여기저기 상처입고 영혼의 피를 흘리던 저였습니다. 피투성이 인생에도 불구하고 그 잘난 자존심때문에 혈루증 여인처럼 솔직하고 용기있게 주님께 매달리지 못하는 제가 더 심각한 중증의 환자입니다.
어떻게서든 혈루증 여인처럼 용기를 내야겠습니다. 주님 옷자락 술에 내 손길만 닿으면 반드시 회복되리라는 간절한 믿음을 지니고, 주님을 향해 손을 뻗어야겠습니다.
돌아보니 죽은 회당장의 딸이 바로 저였습니다. 육신은 버젓이 살아있지만 영혼이 죽어버린 상태로, 허깨비처럼, 좀비처럼 흐느적 흐느적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어둡고 깊은 동굴 속에 잔뜩 웅크리고 앉아, 숨만 겨우 쉬고 있지, 진정으로 살아있지 못한 삶을 마지못해 연명해왔습니다.
다시금 용기를 내야겠습니다. 주님 손길에 온전히 의탁함을 통해, 그분께서 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고, 나를 온전히 차지하게 하시게 되길 바랍니다. 내 안에서 나는 점점 사라지고 주님께서는 점점 더 커지시는, 그래서 잠시라도 참된 삶을 살수 있도록 나를 완전히 비워봐야겠습니다.
믿음은 새로운 나로 살게 합니다
-반영억신부-
어느 한 수도원이 있는 깊은 산속에 한 은수자가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도원의 원장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 이유는 한창 번성하였던 수도원이 쇠퇴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원장은 수도원을 어떻게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은수자에게 조언을 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은수자는 “죄송합니다. 저는 아무런 조언도 드릴게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당신들 가운데 구세주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수도원장은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다섯 명 밖에 남지 않은 수도원에 “구세주가 계시다”는 은수자의 말을 모두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들 중에 구세주가? 구세주가 있다고?’ 다섯 중에 누가 구세주란 말인가? 그 날부터 수도자들은 구세주일지도 모르는 서로를 깊은 존경심과 사랑을 가지고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수도원의 분위기는 전과는 사뭇 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점차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수도원을 찾아와 그 수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고 수도자가 되겠다고 지원하는 젊은이들도 많아져 옛날처럼 번창한 수도원이 되었답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이웃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 볼 수 있는 눈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개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는 생각을 가지고 당신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을 아시고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9,22). 하고 이르시며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불치병을 낫게 하셨지만 ‘내가 너를 낫게 하였다.’고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병을 낫게 하는 육적인 치유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인 것은 주님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완성에는 인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의 공로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의지에 의한 협력을 기다리십니다. 여인은 감히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당시의 율법으로는 부정을 탄 여인이 그렇게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내어 믿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과거에 매여 있지 않고 새로운 구원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능력의 손길에 협력하면서 ‘내 믿음이 나를 구원 하였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결코 인간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새로운 나로 살게 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능력이상을 체험케 합니다. 인간은 끝이라고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는 시작하십니다. 사람들은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소란을 피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곧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몰아내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그를 비웃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마음이 한번 비딱해지면 기적을 보고도 또 비웃을 것이며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리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이웃 안에 계신 주님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가득한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딸의 손을 잡아주셨듯이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고 일으켜 주십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
인간을 다시 살리는 힘
예수님의 자비는 단순히 어떤 감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을 주고 인간을 다시 살리는 힘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리고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려냅니다.
주님은 항상 자비로이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자비로이 우리를 바라보시며 기다리신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그분께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분은 자비로 가득한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내적 상처들과 우리 죄들을 그분께 보여드릴 때 그분은 우리를 항상 용서하십니다. 그분은 정녕 온전한 자비이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를 고쳐 주시고, 또 어떤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신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생명의 주님’이신 분”
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해석할 때, “예수님을 믿고 간절하게 기도하면 누구든지
불치병을 고칠 수 있다.” 같은 식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믿음과 간절한 기도는 중요한 일이고 또 필요한 일이지만, 주님이신 분의 주권을
침해할 정도로 ‘결과를 강요하는’ 것과 같은 기도는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비를 믿고 겸손하게 청하면서, 결과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바라던 결과를 얻지 못해도 실망하지 말고, 주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마태 9,20-22).”
이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강조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 여자의
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여자의 병을 고쳐 주셨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 예수님의 ‘옷자락 술’만 만져도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던 것 같고(마르 6,56), 이야기 속의 여자도 그 소문을 들었을 텐데,
여자가 예수님 앞에 나서지 못하고 옷자락 술을 만지려고 한 것은
그 소문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앓고 있는 병의 성격 때문입니다.
자신의 병을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어서 예수님 앞에 나서지 못한 것인데,
어떻든 여자는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은 믿지 않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만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이고, 미신입니다.)
이야기에 ‘구원’이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여자가 생각한 ‘구원’은 ‘병의 치유’였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은 병의 치유와 영혼의 구원을 모두 뜻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여자의 치유를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이제부터는 영혼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라고
격려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고서 이 말씀을 “믿기만 하면 병이 낫는다.”,
또는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병을 고친 것은 여자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에 대한 응답입니다.
여자의 믿음과 예수님의 자비와 병의 치유 가운데에서
무엇이 가장 먼저 있었던 일이고, 무엇이 가장 나중에 있었던 일인가? 를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마태 9,18-19).”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마태 9,23-25).”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권능에 초점을 맞추면,
두 이야기는 모두 예수님 덕분에 죽음에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 참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는 실제로 죽은 것은 아니지만,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죽은 것과 다르지 않은 심정으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었는데 예수님 덕분에 병을 고친 일은 새 생명을 얻은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회당장의 경우도, 딸의 죽음 때문에 죽고 싶은 심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랬다가 딸이 살아난 뒤에는 회당장 자신도 다시 살아난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절망’에 초점을 맞추면, 두 이야기는 모두 예수님 덕분에
절망에서 해방되어서 ‘참 기쁨’을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절망에서 해방시켜서, 우리에게 참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 희망은 이미 이루어진 것과 같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희망이기 때문에
우리는 미리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은 세속의 즐거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 기쁨’입니다.
(여자는 죽음과 같은 절망 속에서 살다가 예수님 덕분에 해방되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소녀의 심정은 알 수 없습니다.
소녀의 아버지인 회당장의 경우는 여자의 경우와 거의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가 예수님의 은총으로 해방되었고, 참 기쁨을 얻었습니다.
소녀만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소녀의 아버지도 은총을 받았고,
사실은 그가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입니다.)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라는 말씀은,
‘죽음’은 ‘긴 잠’과 같은 것일 뿐이며 ‘끝’이 아니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마치 잠든 사람을 깨우는 것처럼 이제 당신이 소녀를 살리겠다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이 생명과 죽음에 대한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원하시면 누구라도 죽음에서 살리실 수 있는 분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누구라도 영원히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절망에 빠져 있는 병자들과 병자의 가족들이 많이 있습니다.
‘병고’는 인간을 가장 괴롭히는 고통입니다.
인간의 의술이 많이 발전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의술로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
많이 있고, 살고 죽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는 병에 걸리고 누구는 건강하게 사는 것을 보면서,
또 누구는 간절하게 기도해서 치유의 기적을 얻고 누구는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을 얻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불공평하다고 느끼거나,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할 때가 많습니다.
위대한 바오로 사도도 평생 병고에 시달렸는데, 그 병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간청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청을 거절하셨습니다(2코린 12,7-9).
그런 일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고통들이 다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것,
우리의 목적지는 변함이 없다는 것, 남들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버리지 말고, 인내해야 한다는 것,
십자가는 십자가로 끝나지 않고 영광과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건강하다면 자만심에 빠지지 말고 병자들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9,18-26: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 살아난 회당장의 딸
오늘 복음에서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는 것과,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부인의 치유기적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죽은 이에게는 생명이 돌아오고 아픈 사람은 온전하게 된다. 회당장이 예수님께 청하고 있다. 회당장은 율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백성, 그 딸을 위해 기도한다. 율법과 예언서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들을 양육하였고,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소녀를 살리신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18절) 회당장은 갑자기 예수님께 나타나 예수님께서 곧 가 주실 것과 딸에게 손을 얹어주실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시리아인 나아만이 엘리사 예언자에 대해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2열왕 5,11) 하였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하는 법이다.
이 때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 주님께서 걸어가실 때 그분께 다가간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소녀에게 가시는 길에 또 한 여인을 치유하셨다. 여자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떳떳하게 주님께 다가가지 못하였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여인의 지속적인 하혈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레위 15,25 참조). 그래서 여인은 자신을 감추었다. 여인은 모습을 숨긴 채 있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눈길이 여인에게 가도록 여인을 내세우신다.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서 두려움을 없애주셨고, 그 여인의 믿음을 모든 이에게 본보기로 세우신다. 그러시면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위해 준비된 것을 이제는 평범한 이민족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당장의 딸은 유대 민족을 상징하고, 여인은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상징한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24절)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집에 가셔서 죽은 소녀를 보신다. 믿음 없는 마음을 믿음으로 데려 오시기 위해, 회당장의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비웃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의 지도자들과 구경꾼들을 본다. 그들은 이 위대한 은총이신 주님까지도 비웃고 무시했다.
소녀는 예수님께서 살려 주신다. 이 소녀의 모습은 우리 구원의 신비 전체를 예시한다고 보아야 한다. 루카 복음에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리고 하신다. 이것은 신앙인이 성령을 받아 생명으로 돌아올 때, 주님께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고 하신 거룩한 빵을 먹어야 한다는 가르침도 받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물러들 가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마태 9, 24)
-한상진신부-
어떤 눈빛으로
주위를
바라보는지를
되돌아봅니다.
한마디의
진심어린 대화가
더 중요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부딪히고
갈등하며
우리 자녀들은
성장합니다.
뒤돌아보면
모두가
부족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반성문이 필요한
우리들
시간입니다.
집착을 펴면
서로를 좀더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안에
건강한 성장이
있습니다.
성장하려는
자녀를 부모가
가로막아서는
안됩니다.
너무 큰 기대에서
실망과 아픔이
누군가를
짓누르는 억압이
됩니다.
성장이라는
열매를 맺기위한
여정을 가로막지
마십시오.
쓰러짐과
일어남
자고 깨어남을
반복하며 우리는
성장하여
나갈 것입니다.
믿음의 눈빛이
사랑을 깨우는
치유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세 여자가 등장합니다. 복음 속, 죽었다 살아난 회장장의 딸, 예수님 옷자락에 손을 대어 치유된 혈루증 여인, 그리고 주님의 아내가 된 호세아서의 여인입니다. 이 여자들은 각자 나이도 다르고 처한 상황도 상이하지만, 모두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마태 9,18).
한 회당장이 예수님께 와서 이야기합니다. 얼마나 다급했을까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죽어가는 딸 곁을 지키다 속절없이 떠나보내고는 한달음에 예수님께 달려왔을 겁니다.
오늘 이 회당장은 하느님 아버지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사랑으로 창조해 애지중지 키운 자녀 이스라엘이 아버지에게서 오는 생명과 돌봄의 맥박을 놓치고 목숨을 잃습니다. 하느님 백성의 생명줄은 아버지와 나누는 사랑의 친교와 믿음이기에, 이 관계성의 소멸은 생명의 고갈이자 죽음일 겁니다.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마태 9,25).
성부 하느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보내시어 죽은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키게 하십니다. 배반과 불충실로 꼬여버린 탯줄을 다시 풀어 사랑의 영이 흐르도록 하시는 겁니다. 화해와 용서로 아버지와 다시 연결되어 새생명이 주입된 이스라엘은 주님의 자비로 화색이 돌 것입니다. 되살아나는 겁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마태 9,20)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 또한 병들어 신음하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짐승의 피로 맺은 옛 계약의 자취가 계속 손쓸 겨를 없이 유실되어 날로 생명력을 잃어 갑니다. 치유를 위해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전부 쏟아 부은"(마르 5,26 참조) 그녀의 노력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우상들에 매달려 탕진한 이스라엘의 믿음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그 기간이 열두 해라는 것은, 완전한 수만큼 때가 차서 예수님이 오신 것임을 드러냅니다.
"내가 저분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태 9,21).
그런데 그 여인이 이제 구원의 확신을 가집니다. 혈루증은 육체적 고통과 쇠약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도 부정하다고 치부되어 영혼과 육신이 함께 죽어가는 병입니다. 열두 해 견딜 만큼 견디고 싸울 만큼 싸운 그녀가 새로 등장한 예수라는 치유자에게 희망을 겁니다. 전해 들은 그분의 언행으로 보아 율법을 따지며 자기를 단죄할 것 같지 않으니 용기를 내어 다가가지요. 부정한 여인이 먼저 손을 뻗어 예수님을 만집니다. 과연 믿음이 아니고서는 감행할 수 없는 용기일 것입니다.
당시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민중은 그분의 가르침과 행동에 희망을 걸었지요. 이 여인이 바로 새 희망으로 예수님께 다가가 감히 부정한 손을 내밀어 자비를 청하는 죄인들의 무리를 보여 줍니다. 그녀가 곧 새 이스라엘이고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며 '순결한 창녀'인 교회, 우리 모두를 가리킵니다.
제1독서는 사랑의 예언서인 호세아서의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호세 2,16).
주님께서 당신을 두고 다른 우상에게 몸과 마음을 바친 이스라엘에게 다시 사랑의 기회를 주십니다. 사랑의 반전이라 할 수 있지요.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호세 2,21).
하느님은 부정한 아내를 참아주고 사랑해 주시는 당신을 보여주시려 호세아 예언자에게 창녀와 결혼하라 하시고(호세 1,2-3 참조), 또 집을 나가 다시 창녀짓을 하던 그녀를 몸값까지 치르고 데려와 다시 살게 하십니다(호세 3,1-5 참조). 예언자는 전하는 말뿐 아니라 삶으로도 하느님을 가리켜 보여 주어야 했기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당신과 멀어진 이스라엘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신부로 맞으십니다. 그리고 이 계약은 "영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나약한 믿음과 게으름, 곁눈질과 양다리로 절름거리며 서성이는 불결한 우리를 감내하시면서 당신 곁에서 신부의 자리를 치워버리지 않으십니다. 언젠가 새 이스라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묵시 21,2 참조) 당신 곁으로 되돌아오길 기다리고 또 기다리십니다.
오늘 말씀 속 세 여인에게서 이스라엘을,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를, 그리고 우리 자신을 봅니다. 나약하고 어리석은 인간 실존을 안고 질척대며 걷는 우리지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부족하고 부정한 제 몰골에 지쳐 주님께 손을 뻗길 주저하지 않는다면 구원은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벗님에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22).
그러니 믿고 주님께 다가갑시다. 믿음 안에서 손을 뻗어 주님을 만지고 구원을 얻는 오늘 되시길 기도합니다.
주님은 믿기만 하고 사랑치 않는 자는 구원치 않으신다.
-김찬선신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은 여러 번 하신 말씀이고,
그리고 이것이 주님께서 구원해주시는 정식입니다.
그렇다면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해주시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제 생각에 구원해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원해주실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에 주님께서는 사랑이 충만하시어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즉시 치유해주시려고 채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는 마치 전화만 오면 왕진을 가려고 준비된 의사와 같고,
총소리가 울리면 용수철처럼 튀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100 m 육상 선수와 같아서 당신 치유의 힘을 믿는 사람이
믿음으로 치유를 청하기만 하면 즉시 힘이 빠져나가 그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오늘 혈루증 여인의 치유입니다.
그는 주님께 치유해달라는 말을 감히 할 수 없었고,
그래서 손도 아니고 다만 옷자락을 믿음으로 만졌을 뿐인데
손을 대자마자 주님으로부터 치유의 힘이 빠져나가 그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는 의사를 믿지 않는 사람이 의사의 지시를 받아들이지 않는 데 비해
믿는 사람은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도 잘먹고 지시도 잘 받아들이는 거처럼
주님의 치유도 받아들이는 이에게만 치유의 힘이 들어가 치유하시는 거지요.
그러나 이 여인의 치유는 어찌 보면 새치기 치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작 예수님께 치유를 청한 것은 여인이 아니라 죽은 소녀의 아버지였고,
그래서 소녀를 살리려 가는 길인데 여인이 새치기에다 말로 청하지 않아
주님께서 모르셨는데도 여인이 믿고 손을 대니 주님의 힘이
말하자면 옆으로 빠져나가 치유된 겁니다.
이것이 여인의 치유라면 소녀의 치유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여인의 경우는 요청이 없었지만 이 경우엔 분명한 요청이 있었다는 점이고,
더 중요한 차이는 믿는 이에게 주님의 치유의 힘이 들어가는 것인데
소녀의 경우 믿은 것은 소녀가 아니라 아버지였고 그런데도 치유된 거지요.
그러니까 아버지의 믿음으로 딸이 치유된 거지요.
며칠 전 중풍 병자가 치유될 때도 이웃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께서
중풍 병자를 구원해주신 얘기를 통공의 교리 차원에서 얘기한 적이 있지요.
오늘 아버지의 믿음과 간청으로 딸이 부활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본인의 믿음과 간청으로 치유해주시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의 믿음과 간청으로도 치유해주시는 분이시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고통과 구원에
개인적인 차원과 공동체적인 차원이 있음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고통과 죽음은 나의 것이고 어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지만
사랑이 크면 클수록 함께 아프거나 함께 죽을 수는 있는 것이고
구원도 내가 원치 않으면 안 된다는 면에서 열쇠는 내가 가지고
있는 거지만 사랑이 크면 클수록 사랑하는 이의 구원을 같이 갈망하지요.
그러니까 오늘 주님께서 아버지의 믿음에 딸을 구원하신 것은
딸이 원치 않는 구원을 아버지의 구원 차원에서 베푸신 것이 아니라
딸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인 아버지와 딸의 공동 구원인 것입니다.
우리는 공동의 구원을 믿고 그 믿음을 살려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믿음을 보시고 나를 구원해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이웃의 믿음과 사랑을 보시고 나를 구원해주시는 분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그러나 나만 믿고 나만 구원받으려는 자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시긴 하셨어도 주님은 믿기만 하고
사랑치 않는 자를 구원해주시는 분이 아님도 우리는 믿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마태오 9,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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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회당장과 병을 앓는 여자가 보여 주는 굳은 믿음과 간절함을 강조합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회당장의 청은 놀랍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께서 죽은 이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게 하신다는 것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회당장이지만 딸에 대한 간절함은 그의 믿음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과 청원처럼 예수님께서는 그의 딸을 되살리시어 회당장의 품에 돌려주십니다.
열두 해 동안 병을 앓던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에서 벗어나고픈 그녀의 간절함과 절실함은 그녀를 구원합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그녀의 간절함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믿음입니다. 이에 어떤 화가는 이 장면에서 한 여자가 많은 사람들의 발 사이로 기어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모습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허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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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진정한 의미를 잊고 생존에만 집착할 때 사실 건강도 잃고 죽음을 재촉하게 됩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의미’입니다. 이것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이 찾아낸 결론이었습니다. 사람은 생존 자체가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입니다.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기적은 살고 싶다는 희망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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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불치병을 낫게 하셨지만 ‘내가 너를 낫게 하였다.’고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병을 낫게 하는 육적인 치유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인 것은 주님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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