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7월 7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0. 7. 6. 06:06

2020 7 7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시는 곳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마태오 9,32-38)

 

Jesus went around to all the towns and villages,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proclaim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curing every disease and illnes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내로남불.’ 좋은 말도 아니고 교육적이거나 윤리적이지도 않고 더욱이 신앙적이지 않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안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동일한 사건이지만 개인의 입장에 따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용하지 말아야 할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오늘 복음에서 하나의 같은 사건을 경험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자 말못하는 이가 말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들려 말을 못하였으니 마귀를 쫓아내자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당연해 보입니다. 예수님의 ‘구마’이자 ‘치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습니다. 군중은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라며 놀라워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 말하며 예수님을 비하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이런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정치나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해석하는 각자의 시선은 참으로 다릅니다. 때로는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입장과 시각이 다른 사람들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습니다.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고민하고 판단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무엇이 복음적인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시각과 잣대로 사건을 볼 것인지,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기준인지 끊임없이 되돌아보며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인으로서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무궁무진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되어있는 특허도 여럿 있었고 앞으로도 세상에 알릴 좋은 아이디어도 가득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회사에 소속되어 있다 보니, 자신은 월급쟁이로 별 볼 일 없이 살고 있고 회사만 자신의 아이디어로 큰돈을 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랫동안 이 문제로 고민한 형제님은 드디어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알릴 수 있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론을 말하면 “망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고 또 좋은 아이디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비전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이며, 여기에 실천에 옮기려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혼자서 다 하겠다고 생각하니 잘 될 리가 없었던 것이지요.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긴 회사 사람들의 도움을 그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기 생각의 틀에만 갇혀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 혼자만으로 모든 것이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너’가 있어야 했고, ‘우리’가 있어서 지금의 내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벗어나 남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는 주님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부정하고 보는 못된 심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행적은 가엾이 여기는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는 자신의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예수님을 무조건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이 옆에 있어도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주시는 풍성한 선물을 거두도록 도와줄 목자가 없는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십니다. 그래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 하십니다. 

수확을 할 일꾼을 알아서 보내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당신이 가엾이 여기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하다면 말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먼저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보시고 알아서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스스로 청할 수 있는 지혜와 올바른 판단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이기적이고 욕심 가득한 마음은 내려놓고, 겸손하고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먼저 내 이웃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때 주님과도 함께 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라.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도 그들만의 힘든 전투를 하고 있다(플라톤).

 


한 번 더 바라보고 생각하는 시간


사제들이 성당에서 입고 있는 검은 원피스(?)를 ‘수단’이라고 말합니다. ‘밑에까지 내려오는 옷’이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 수탄(Soutane)에 어원을 둡니다. 이 수단은 제의와 함께, 사제와 일생을 함께 하는 옷으로 죽음 후에는 수의가 됩니다. 

신학교 4학년 때 이 수단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3학년 때 수단을 맞추는데 가격이 25만 원입니다(지금으로부터 27년 전 가격입니다). 너무 비쌌습니다. 당시 대기업 초임 연봉이 1,200만 원 정도 했고, 대학 등록금이 100만 원 정도 할 때 이니 당시의 25만 원은 너무나 큰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되고 나니 이보다 싼 옷이 없는 것 같습니다. 27년 전에 맞춘 수단을 아직도 입고 있으니 말입니다. 또 끌러지 셔츠만 있으면 다른 옷은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이 정장이고 또 평상복이기 때문입니다. 비싸 보이지만, 가격대비 효율을 따져보면 가장 싼 옷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판단이 순간에 머무르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지금뿐 아니라 미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옷만이 아니라 삶 전체에서 바른 판단을 위해 한 번 더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불평의 동의어는 책임회피다

-전삼용신부-

 

우리는 하루에도 알게 모르게 평균 30번 내외의 불평을 한다고 합니다. 불평은 얼핏 지금의 안 좋은 상황을 바꾸어보려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지금 상황에 안주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습니다. 남 탓하며 자신이 책임지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을 변화시키려면 불평이 아니라 반성을 해야 합니다. 불평은 지금 닥친 상황에 나의 탓이 없다고 말하는 책임회피입니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2001)는 ‘게임 이론’으로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실존 인물 ‘존 내시’의 삶을 그렸습니다. 게임 이론은 인간관계 안에서 어떠한 선택을 하며 살 것인지를 수학적으로 풀어내었습니다. 그가 수학자이면서 인간관계에 집중했던 이유는 아마도 인간관계가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위대한 수학자였던 그는 어느 날 정부 요원에 의해 암호 해독을 하는 일을 비밀리에 수행합니다. 그런 중에 죽음의 위협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힘이 되어주는 유일한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아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이런 상황을 그 친구만 이해해주었고 그의 딸도 존 내시의 편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믿었던 친구가 배신하고 존 내시를 정신병원에 가두었습니다. 배신감을 느낀 내시는 크게 분노합니다. 자신이 나라를 구하는 일을 하는데 너무 방해가 많은 것입니다. 정신병원에서는 그가 정신분열과 피해망상증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정부 요원이나 친구, 그리고 여자아이는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허상이었습니다. 남편의 전쟁놀이에 참다못해 집을 떠나려는 아내 앞에서 그는 차를 멈추어 세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아이가 자라지 않아!”


      정신병원에서 나온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여자아이는 자라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세 명의 허상이 자신에게만 보이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연구를 계속합니다. 그렇게 나중에 노벨상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허상임을 인정했을 때 그것들의 존재가 사라졌을까요? 아닙니다. 존 내시는 그것들을 보며 평생을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갔습니다. 자신이 할 일을 하지 않게 만드는 핑계거리에 자신을 던지는 것을 멈춘 것입니다. 불평하지 말고 내가 할 일을 찾아야합니다.


      현재의 처지를 주위의 사람들에게 불평하는 것은 “나는 나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에 대해 불평하고 그런 하와를 만들어준 하느님께 불평했을 때 그는 죄에서 돌아설 마음이 있었을까요?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면서 변화할 마음이 없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아담을 그 자리에 계속 두실 수 없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는 것이 정당화됩니다. 자신들은 마귀의 힘을 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을 책임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나라도 저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담이 불평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와의 탓도, 주님의 탓도 아님을 인정하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만 남게 됩니다. 이것이 반성입니다. 불평하며 동시에 반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불평은 변하지 않으려는 책임회피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처지에 이렇게 하라고 권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불평하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좋은 일꾼이 되지 못하면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이라도 하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마음에 안 들면 불평하지 말고 남편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본당 사제가 마음에 안 들면 불평하지 말고 더 좋은 목자가 될 수 있도록 청하라는 것입니다. 불평하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됩니다.

 

      제가 신학생 때 거의 무전 여행하다시피 하며 우리나라를 조금 돌아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포항의 구룡포 성당 유아실에 몰래 들어가서 밤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늦은 밤이라 아무도 없어서 빨리 자고 빨리 나오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모기였습니다. 불을 켜고 모기를 잡을 수도 없었습니다. 몰래 들어온 것이 들통나기 때문입니다. 얼굴이 비뚤어질 정도로 밤새 모기에 물렸습니다. 어떻게 참았을까요?

“아이, 왜 이렇게 모기가 많아!”


      밤새 불평하며 참았습니다. 불평은 지금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불평하면 아무 발전이 없습니다. 그냥 물리면서 버티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나의 탓은 하나도 없고 그래서 발전도 없습니다. 불평하지 않는 습관을 들입시다. 40일 동안 불평하지 않으면 습관이 된 것입니다. 달력에 동그라미나 엑스 표를 하며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습관은 두 번째 천성입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자기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입니다.

 

-조재형신부-

 

요즘 읽는 소설에서 본 내용입니다. 저자가 체육관에서 본 글이라고 합니다. 공감이 가는 글이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Muscles are hard to get and easy to lose. Fat are easy to get and hard to lose. A painful reality, but a reality all the same.(근육을 얻기는 무척 힘들다. 그러나 근육을 잃어버리기는 무척 쉽다. 살찌기는 무척 쉽다. 그러나 살을 빼는 것은 무척 어렵다. 고통스러운 현실이지만 현실은 늘 같다.)” 성공한 대부분의 사람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고통스럽지만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실패한 대부분의 사람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차이는 5초에 있었다고 합니다. 인생을 의미 있게 사는 사람은 5초 안에 결정하고 행동한다고 합니다.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사람은 5초 안에 결정하지 못하고 행동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앙을 얻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앙에서 벗어나는 일은 쉽습니다. 하느님께 용서받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현실이지만 같은 현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신앙을 얻기 위해서 먼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신앙을 얻기 위해서 광야에서 40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카인은 질투 때문에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욕망 때문에 충실한 부하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아합은 욕심 때문에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나봇을 죽였습니다. 헤로데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어린아기들을 죽였습니다. 율법학자와 대사제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한국교회는 100년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신앙 때문에 재산을 버렸고, 벼슬을 포기했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는 것은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했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용감하게 순교로서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7000킬로를 걸었습니다. 행동으로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사제를 영입하기 위해서 얼어붙은 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습니다. 복녀 강완숙 골롬바는 목숨을 걸고 사제를 보호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박해를 받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신앙인이 정말 작은 이유로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고통스러운 현실이지만 같은 현실입니다.

 

앙드레 지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 가듯이 바라보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누군가가 지구별로 온다면 어떻게 이야기할까요? 부정적인 이야기를 해도 무척 많을 겁니다. 코로나19도 있고, 인종차별도 있고, 전쟁과 기아도 있습니다. 지진, 태풍, 스나미로 인한 피해를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를 해도 무척 많을 겁니다. 바람에 춤을 추는 꽃도 있고, 처음으로 웃는 아기의 미소도 있고, 처음으로 비행에 성공한 아기 새도 있습니다. 인류의 지성과 지혜가 담긴 고전, 아름다운 건축물,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도 있습니다. 어렵지만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쉽지만 의미 없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수확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은 적다.”

-이영근신부-

 

 마태오복음사가는 5~7장의 산상설교에 이어, 8~9장에서 10개의 기적 이야기를 모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마지막 이야기로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이를 치유하신 이야기와 추수할 일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 못한 이를 치유하신 다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6)

 

착한 목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음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를 그냥 둘 수 없는 당신의 마음입니다. 꺼져가는 불씨를 보고 마음이 상해서 못 견디시는 마음입니다. 가만 두고는 차마 못 베기는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온몸으로 몸서리치게 겪고 있으면서도 놓쳐버리지는 말아야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에 안달이 나신 그분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그 길은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에게서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음을 놓치지 않는 일입니다. 그를 못 본 척 하지 않고, 모른 척 하지 않는 일입니다. 무관심하지 않는 일입니다.

사실, 그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중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함은 우리가 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달리는 이들,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무능해서 시달리고, 고통과 슬픔, 질병과 가난, 근심과 절망에 시달리는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의 모습입니다. 기가 꺾여있는 이들, 인정해주지 않아서 고용해주지 않아서 거리에서 집에도 못 들어가는 기 꺾인 이들, 돈이 없어 자녀들에게도 기 꺾여 사는 이들, 고국을 떠나와 이방인이 되어 기가 꺾여 살아가는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의 모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은 적다.”(마태 9,38)

 

어쩌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꾼이 적어서가 아니라, 일꾼들이 제 할 일을 안 하는 데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느 날, 한 수도자가 벌거벗고 굶주린 채로 길거리에서 벌벌 떨고 있는 소녀를 보았습니다. 그는 화가 치밀어서 하느님을 성토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왜 두고만 보십니까? 왜 아무 것도 안 하시는 겁니까?” 하느님께서는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불현듯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안 했다니, 너를 만들었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시어 우리 안에 이미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굶주린 소녀,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는 이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수확할 밭의 일꾼으로 너희를 보내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우리가 일꾼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수확할 밭의 일꾼으로 저를 보내셨습니다.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절망과 슬픔에 기가 꺾인 이들 가운데 바람막이로 보내셨습니다.

제 손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게 하소서. 제 말이 꺼져가는 불씨를 끄지 않게 하소서.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에 제 마음을 심으소서.

제 마음이 그들을 어루만지게 하소서.

그들은 우리 가운데 있고 당신도 바로 우리 가운데 계시오니 못 본 척, 그들을 무시하지 않게 하소서. 모르는 척,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주님!

당신께서는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절망과 슬픔에 기가 꺾인 이들의

바람막이로 저를 보내셨습니다.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제 마음에 심으소서.

제 손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게 하소서. 제 말이 꺼져가는 불씨를 끄지 않게 하소서.

제가 그들을 어루만지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있는 그들을 더 이상은 못 본 척 무시하지 않게 하소서.

모르는 척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아멘.

 

가엾이 여기는 마음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9,38).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이 많다는 것은 돌봐줘야 할 사람이 많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보는 일을 할 사람이 적다니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 희생 봉사하는 사람보다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거두는 날 진정한 봉사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확을 한다는 것은 일을 마무리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마태3,12) 분으로 선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수확한다는 것은 우리인생 마지막 날의 심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정 심판의 날에 알곡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라는 곳간을 차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준비시킬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 일꾼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입니다. 주님의 도구요, 연장으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추수 날에 곳간에 모아들일 알곡이 된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성장되는 것입니다. 씨앗을 뿌렸으면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내며 관리를 해야 합니다. 햇볕을 쬐어야 하고 비바람을 맞으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아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뿌려졌다면 그 영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하고 영의 비추임을 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사실 매 순간이 마지막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 안에서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천국을 살지 못하는데 훗날 어찌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고 또 우리의 이웃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꾼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일꾼으로 복음의 선포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 주셨듯이 교육사업과 선교, 병원 사목과 복지사업에 헌신할 일꾼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헌신을 통해 구원사업이 완성되는데 한 몫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측은지심,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희망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엾은 마음!', 다시 말하면 애간장이 녹아나는 아픔으로 함께하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본다면 바로 그 자리가 기적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송영진신부-

 

“......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마태 9,32-34).”

예수님은 우리를 온갖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마귀 들린’ 상태는 마귀의 억압을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들과 마주치기만 하면 그것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 일은 마귀의 억압에서 인간들을 해방시킨 일입니다.
(마귀 들린 상태를 ‘병’으로, 마귀를 쫓아낸 일을 ‘치유’로 해석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해석해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인간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신 일입니다.)
여기서 “마귀 들려서 말을 못하는” 상황을,
마귀의 억압과 방해 때문에 하느님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진리를 말하지 못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수난 때에 사도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잠가 놓고서, 숨어 있었습니다(요한 20,19).
그 모습은 ‘두려움’이라는 마귀의 억압을 받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랬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평화’를 주셨고,
또 ‘성령’을 주셨습니다(요한 20,19-23).
그것은 사도들을 두려움이라는 마귀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신 일입니다.
그렇게 해방된 사도들은 숨어 있던 곳에서 밖으로 나갔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두려움 같은 것은 전혀 없는 모습으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사도 2장).
그런데 우리는 그 일들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사도들 자신들이 은총에 응답하려고 노력했고,
용기를 내려고 노력해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없었던 용기가 성령이 내리자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내려고 노력하니까 성령께서 도와주셨습니다.)

마귀 들려서 말 못하는 사람의 경우에도, 마귀를 쫓아내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셨지만, 말을 하는 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마귀가 쫓겨난 후에도 스스로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또는 말을 하더라도
‘빈말’만 한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헛일로 만들어버리게 됩니다.
독재자들은 예외 없이, 자신의 독재 권력을 지키려고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합니다.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빼앗긴 모습은 
꼭 ‘마귀 들려서 말 못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데 독재자를 몰아내고 자유를 되찾은 다음에도
제대로 말하지 않는 언론이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거나,
가짜 뉴스를 말하거나, 진실을 이상하게 왜곡하거나...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라는
바리사이들의 말은 전형적인 ‘가짜 뉴스’입니다.
(사이비 언론사가 진실을 왜곡하는 일들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5-38)”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군중은,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의
억압과 착취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힘없는 서민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경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40).”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율법학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지만,
실제로는 율법학자들뿐만 아니라 권력으로 사람들을 억누르는 자들 모두를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참 목자’이신 분입니다.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는데,
예수님은 가엾게 여기시는 것으로 그치는 분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가엾은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라는 말씀은,
“추수철이 다가오는데 아직도 수확에 동참하는 이들이 적다.”,
즉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와 있는데
아직도 회개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사람들이 많다.”로 해석됩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는 말씀은,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여서 회개하고, 믿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기도하여라.”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에는 “더 열심히 선교활동을 하여라.”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그 사업을 도와드리는 일꾼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세례를 받기 전에는 교회의 선교활동의 대상이지만,
세례를 받으면 선교활동을 함께 하는 일꾼이 됩니다.
그래서 선교활동은 일꾼을 모집하는 활동입니다.)
여기서 ‘일꾼’은 품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을 도와드리는 자녀를 뜻합니다.
품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은 ‘남의 일’을 하는 사람이지만,
자녀는 ‘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일은 곧 자녀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수확’을 심판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라는 말씀은,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데 심판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은 적다.” 라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에 ‘일꾼’은 심판 때에 구원을 받고, 예수님의 통치권에
참여하는 사람을 뜻하고, ‘일꾼이 아닌 사람’은 심판 때에 구원받지 못하고
심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일꾼이 되기를 바라신다.”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9,32-38: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사람들은 마귀 들려 말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다. 그는 말을 못했으므로 자신을 위해 청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데려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귀는 그의 혀를 묶어 놓았고, 영혼도 차꼬를 채워 놓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곧바로 그의 장애를 해결해 주셨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33)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33) 군중이 이렇게 놀라워 하니까, 바리사이들이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33)고 비방을 한다. 군중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고 한 때 그가 거부했던 분께 영광을 드릴 수 있도록 혀가 풀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하며 예수님을 헐뜯는다. 이 말은 그들의 사악함에서 나온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헐뜯는 자들을 꾸짖지도 않으시고, 오직 선을 행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두루 다니셨다. 하늘 나라의 복음과 병 치유라는 두 가지 축복을 가지고 그들을 직접 찾아 다니셨다. 그것을 주시기 위해 작은 마을도 지나치지 않으시고 온갖 곳을 두루 다니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왜 가엾은 마음이 들었을까? 주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더러운 영의 손아귀에 든 데다 율법의 짐까지 지고 있어서 가엾이 여기신 것이 틀림없다. 그들이 다시 성령의 보호 아래로 돌아가도록 도와줄 목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선물의 열매는 풍성히 준비되어 있는데 그것을 거둘 일꾼들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영의 선물은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줄지 않는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37-38) 주님은 하느님께서 수확하는 일꾼들을 넉넉히 보내시어 성령의 선물이 준비하고 있는 것을 거두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신다. 기도와 훈계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선물을 쏟아 부어 주신다. 풍성한 수확은 모든 믿는 이를 의미하고, 적은 일꾼은 수확을 위해 파견된 사도들과 그들을 본받는 사람들을 말한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 선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려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권한을 지니고 계심을 드러내신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이 청도 기도도 하기 전에 제자들을 사도로 지명하시며, 타작마당을 키질하여 알곡은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버리는 분에 관한 요한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그분 자신이 농부이며, 수확할 밭의 주인님임이 드러난다. 그분이 그들을 수확할 일꾼으로 파견하셨다면 수확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일꾼으로서의 삶을.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 36)

-한상우신부-

사람을 위한
가엾은 
마음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도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가엾은
마음입니다.

감출 수 없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입니다.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모두가
이해가 되는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연민의 걸음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연민은 어리석은
우리들 삶을
비추어줍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의 핵심은
연민입니다.

사람의 깊이는
연민의 깊이입니다.

하나로 
모이게 하는
마음이 바로
연민의 마음입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서로를 측은하게
바로보는 연민이
있기에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연민의 마음으로
사람의 존재를
다시 묻는
시간 되십시오.

연민의 마음에서
어려운 시간을
헤쳐나갈 길을
찾습니다.

막힌 길을
열게하는
연민(憐憫)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두 갈래로 듣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거듭되는 백성의 배반에 대한 주님의 탄식과 연민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나의 가르침을 많이 써 주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낯선 것으로만 여겼다"(호세 8,12).

사랑을 쏟아 주신 당신 백성에게서 소외되신 주님의 외로움이 읽힙니다. 주님이 백성에게 주신 율법과 계명은 사랑이지요. 하지만 받는 쪽에서 사랑을 읽어내지 못하면 과중한 의무나 형식적 의례일 뿐입니다.

"그들은 희생 제물을 좋아하여 그것을 바치고 그 고기를 먹지만 주님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호세 8,13).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적당히 형식적인 의무를 이행하면서, 제 손으로 만든 우상들에게는 사랑을 바쳤습니다. 율법이 정한 대로 때 맞춰 주님께 무언가를 드리기는 하나 그건 제 편의일 뿐,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았지요. 주님은 신부인 백성에게서 진정성 어린 사랑을 받고 싶으셨지만 그들은 영혼 없는 의무감으로 서늘하게 맴돌았습니다. 주님은 점점 이스라엘 백성에게 낯선 분이 되어 버립니다.

"이제 주님은 그들의 잘못을 기억하고 그들의 죄를 벌하리니 그들은 이집트로 돌아가야 하리라"(호세 8,13).

주님의 입에서 참 아픈 말씀이 나오고 맙니다. 손수 이집트에서 끌어 내어 계약을 맺으신 백성이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야 한다니요! 하지만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로 다시 몰아넣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집트는 장소 개념을 넘어 종살이를 의미합니다.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준 백성이 주님을 저버리고 우상에게 스스로를 묶었으니, 이미 그들은 스스로 종이 되는 길을 다시 택한 것입니다. 하느님 외에 인생의 목표로 추구하는 것들, 이를테면 재물, 명예, 외모, 학벌, 성과, 자기애 등등이 오히려 가혹한 주인이 되어 우리에게 족쇄를 채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복음의 대목은 짧지만 다양한 이야기가 집약되어 있습니다. 말못하는 이의 치유와 그에 대한 두 부류의 상반된 반응이 나오고, 이어서 예수님의 복음 선포 활동이 전개되지요. 끝으로 복음 선포를 위해 제자들이 아버지께 청해야 할 바를 일러주시는 것으로 숨가쁜 행적이 마무리됩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행적의 동기이고 출발점입니다 당신 백성에게 느끼시는 아버지의 한없는 연민과 측은지심이 아드님에게서도 그대로 흘러나오고 있지요. 제 스스로 우상 밑에 몸을 던져 자발적으로 종이 된 자녀들을 바라보는 애끓는 안타까움입니다. 그분은 이 연민에 가려 당신이 보이시는 기적에 대한 반응이 어떻든 개의치 않으십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당신이 하셔야 할 사명에 몰두해 성큼성큼 나아가십니다.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8).

예수님은 당신의 일에 제자들을 초대하십니다. 직접적인 복음 선포자로서 파견(마태 10,1-11,1)하시기 전에 기도를 명하시면서, 청원의 내용 또한 일러 주십니다.

"일꾼"

그런데 그 일꾼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이가 일꾼으로 불리움 받는 겁니다. 스스로를 묶었던 족쇄에서 벗어나 말씀을 듣게 되고, 진실을 말하게 되고, 진리와 정의에 올바르게 반응하게 되고, 여전히 억눌려 신음하는 이들을 연민하게 되고, 부족하나마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려 애쓰는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은총을 입은 말못하던 이처럼,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제자들처럼, 부족하나마 주님의 도구로 살아가는 우리처럼 말입니다.

슬프게도 오늘의 이야기 안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마귀 우두머리와 엮어 악으로 규정함으로써, 스스로를 율법에 묶어 노예로 남기를 자청합니다. 자기들이 추구하는 냉정하고 규격화된 율법의 온도에 비해 예수님의 사랑과 기적이 너무 뜨겁고 열렬하고 정스러워서 그랬을까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누구나 주님 안에 자유인이면서 동시에 영혼 곳곳에 노예 상태 때의 생채기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나의 생각과 의지, 꿈과 이상, 가치관과 선택을 끌어가는 힘 안에 무엇이 작용하는지 돌아보는 하루 되시면 좋겠습니다.

늘 주님께서 연민의 눈길로 바라보는 애잔한 자녀들이고, 또 주님의 명으로 제자들이 아버지께 청원하여 보내어진 일꾼들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무엇을 보고, 어디에 힘을 쓸 것인가?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68085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7월 10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시는 곳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마태오 9,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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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처지를 주위의 사람들에게 불평하는 것은 “나는 나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에 대해 불평하고 그런 하와를 만들어준 하느님께 불평했을 때 그는 죄에서 돌아설 마음이 있었을까요?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면서 변화할 마음이 없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아담을 그 자리에 계속 두실 수 없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는 것이 정당화됩니다. 자신들은 마귀의 힘을 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을 책임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나라도 저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담이 불평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와의 탓도, 주님의 탓도 아님을 인정하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만 남게 됩니다. 이것이 반성입니다. 불평하며 동시에 반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불평은 변하지 않으려는 책임회피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처지에 이렇게 하라고 권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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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 가듯이 바라보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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