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9일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오 5,13-16)
Your light must shine before others,
that they may see your good deeds
and glorify your heavenly Fat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미국 어느 강연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강연자가 목 부분이 부러진 낡은 바이올린 하나를 집어 들고 단상 위에 올라 물었습니다. “이 악기의 가치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웃었고 몇 사람은 목 부분을 고친다 하여도 수십 달러 정도밖에 받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바이올린 안쪽에 새겨져 있는 글을 읽자, 이를 들은 모든 이가 깜짝 놀랐습니다. 거기에는 ‘1723년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우스’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은 전 세계적으로 600여 대가 남아 있으며, 보존 상태에 따라 몇십 억 원이 넘는 고가에 팔리는 명품 악기라고 합니다. 강연자는 참석자들이 그 바이올린을 돌려 볼 수 있게 맨 앞줄 첫 사람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바이올린을 매우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도 숨죽이며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이 옮겨 가는 곳으로 시선을 집중하였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바이올린이 형편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바이올린을 만든 이가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태도를 바꾸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때로는 우리 자신이 어디에도 쓸데없고 볼품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으신 분께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의 작품이 바로 우리인데 어찌 우리가 명품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빛과 소금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이 더 이상 어둠에 덮이지 않고 참멋이 드러나도록, 세상이 더 이상 부패하지 않고 살맛이 나는 곳이 되도록 우리를 빛과 소금으로 지어내셨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하고 또 많이 듣습니다. 그렇다면 ‘판단’이란 무엇일까요? 국어사전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물을 인식하여 논리나 기준 등에 따라 판정을 내림.
2. 어떤 대상에 대하여 무슨 일인가를 판정하는 인간의 사유 작용.
그렇다면 우리가 대체로 하는 판단은 잘못될 때가 많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등, 단순한 이분법적 생각으로 나누어 평가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판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바라보는 판단이 더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분법적 판단은 우리에게 피곤함을 많이 가져다줍니다. 누군가를 탓하고 상황을 비난하고 있을 때,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습니다. 불편함과 더불어 이를 듣고 따라야 하는 피곤함을 간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 받아들이는 판단이 주님께서 보여 주셨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의 죄를 용서해주시며 받아주셨고, 지금 역시 우리의 그 많고 큰 죄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기회를 주면서 당신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 바로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소금과 빛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소금만을 즐겨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음식에 간을 맞추기 위해서 소금을 넣는 것이지, 소금 자체를 음식이라고 내놓지 않습니다. 소금은 이렇게 함께 할 때 그 소중한 가치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자신의 짠맛이 싫다고 소금이 자신의 짠맛을 포기한다면 아무 쓸모가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것입니다.
빛 역시 빛 자체만으로는 그 의미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어둠으로 어떤 사물이 보이지 않을 때, 이 사물을 환하게 보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빛입니다.
이처럼 함께하면서 그 소중함이 더욱더 드러나는 것이 소금과 빛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는 함께하는 데 필요한 판단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자기의 뜻과 생각만이 옳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 받아들이는 판단입니다.
때로는 정확한 판단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편함과 피곤함을 가져다주는 판단이 된다면 절대로 안 됩니다. 모두를 받아들이고 포용할 수 있는 판단이 될 때,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하느님을 따르는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됩니다.
지금 나의 판단을 점검해 보십시오.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주님의 판단을 따르고 있습니까? 그래서 내 이웃과 함께하고 있나요?
얼마나 시도했든, 얼마나 실패했든, 괜찮다. 다시 시도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자(사뮈엘 베케트).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유산 문제가 형제간의 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이제까지 꽤 많이 보았습니다. 장남이라는 이유로 모든 유산을 가져갔다는 것, 간병을 하면서 그동안 부모의 재산을 모두 빼돌렸다는 것, 돌아가시기 전에는 연락 한번 없다가 돌아가시자마자 찾아와서 유산 분배를 이야기한다는 것 등등…. 너무 많은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를 찾아오는 경우는 법적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화해하고 싶은데 어렵다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형제자매는 그런 화해를 하려 하지 않고 대화와 만남을 모두 거절해서 괴롭다고 말합니다.
안셀름 그륀 신부님은 이런 방법을 제시합니다.
1. 기도하기: 화해를 거부하는 형제자매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2. 내적으로 화해하기: 나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더는 미워하지 않으며, 단지 관계 깨진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면서 상대의 입장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야지만 참된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3. 작은 표지 만들기: 화해의 작은 표지를 만드는 일입니다. 카드, 편지 등을 보내는 것이지요. 질책이 아닌 축복을 담아서 말입니다.
이 세 가지 방법이 성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 자신이 분명히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을 통해 하느님께서도 함께해 주실 것이며, 하느님의 뜻도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나의 삶이 피곤하고 무기력하다면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은 세상을 맛이 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빛은 세상을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녹거나 타야만 하는 희생이 요구됩니다. 물론 그 힘은 자신 안의 성령을 통해 얻어집니다. 자신을 그렇게 소진하게 만드는 에너지는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며 그런 열정이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우울하고 모든 것이 귀찮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에 빠지게 되는 것일까요?
여자보다도 더 예쁜 남자, 미국의 대표 영화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유년기는 매우 불행했습니다. 부모의 이혼으로 극도의 가난한 환경에서 어머니와 살아야 했습니다. 하도 술과 마약이 흔한 지역에서 자라서 자신은 커서 절대 마약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안 좋은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어려서부터 돈을 벌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TV 광고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롬퍼 룸’이라는 아동용 교육 프로그램에 발탁되어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잘렸습니다. 아이가 무례하고 너무 산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디카프리오는 가난한 엄마를 위해 끊임없이 오디션을 보러 다녔습니다. 덕분에 시리얼, 풍선껌, 그리고 치즈 광고, 자동차 광고 등에도 출연을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었습니다.
그는 광고를 넘어서서 연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00군데가 넘는 소속사에 지원을 해 보았지만 그를 원하는 곳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거듭된 낙방에 절망한 디카프리오는 소질이 없음을 인정하고 연기를 그만두기로 합니다. 이때 그를 적극적으로 만류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미 재혼한 레오나르도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넌 지금도 잘하고 있고 어머니의 생계를 돕기 위해서라도 네가 꼭 배우로 성공했으면 좋겠다.”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격려 덕분으로 끝까지 해 보겠다는 열정을 다시 불태웠고 꾸준히 두드린 끝에 17살부터 여러 TV 프로에 단역으로 출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조금씩 연기로 인정을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감독과 연기 선배들을 통해 그의 인성도 스타의 반열에 들 수 있는 모습으로 변해갔습니다. 그 와중에 실패작도 분명 있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아름다운 남성의 전형은 ‘리버 피닉스’라는 배우였습니다. 그는 디카프리오의 선망의 대상이자 롤모델과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약물 과다복용으로 갑자기 사망하게 되었고, 영화계에서는 그를 대신할 인물을 찾을 수밖에 없었는데 디카프리오가 적격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디카프리오는 ‘리버 피닉스’ 대신으로 ‘토털 이클립스’를 찍어 조금씩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다음 해에 찍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통해 본격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다음 해의 ‘타이타닉’으로 월드 스타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 이후에도 그의 작품 대부분은 흥행하게 되고 ‘레버넌트’라는 작품으로 남우주연상까지 타게 됩니다.
성공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것입니다. 다른 대부분의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디카프리오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노력했다면 포기해도 벌써 포기했을 것입니다. 아니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평범하게 겨우겨우 사는 보통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힘을 주었던 분은 어머니입니다. 불쌍한 어머니를 위해 돈을 벌려고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만을 위해서는 더 힘을 낼 수 없을 때 아버지도 한 역할을 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기 위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면서도 무기력해지기 쉬운데 결국 그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것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영광을 위해서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하는 노력에 비해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처럼 여겨져 금방 실망하게 되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도 무기력해지게 됩니다.
우리 자신은 마치 블랙홀처럼 어떠한 성공에도 만족할 수 없는 본성을 지녔습니다. 아무리 성공해도 더 큰 성공을 요구합니다. 그 과정에서 작은 성공에서 얻는 기쁨을 빼앗기고 맙니다. 작은 성공의 기쁨들이 큰 성공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는데,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작은 성공에 만족할 수 없으므로 금방 무기력해지고 남 탓을 하며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체 현시 때 성체를 보여주는 성광의 유리는 투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리가 투명할수록 성체는 사람들에게 더 잘 드러납니다. 그리고 성체를 찬미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그 투명한 유리처럼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셔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영광이 나를 통해 더 드러날수록 우리는 그 기쁨에 절대 지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일할 때 지치지 않을 수 있게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해 산다면 영원히 지치지 않는 성령의 에너자이저가 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지난 ‘어머니 날’이었습니다. 코로나19로 공동체 모임은 중단 되었지만 ‘Drive through Blessing'이 있었습니다. 한국인의 번뜩이는 지혜를 볼 수 있었습니다. 교우들이 차를 가지고 성당 마당으로 왔습니다. 사제들은 차 안에 있는 교우들에게 강복을 주었습니다. 교우들은 차 창문을 열고 사제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였습니다. 어떤 교우는 마침 축일을 맞은 사제를 위해서 차에 ’신부님 축하합니다. 건강하세요.’라는 글을 적기도 했습니다. 사제와 교우가 함께 만나 미사를 봉헌하고, 강복을 받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교회에는 ‘강복, 안수, 축복, 축성’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비슷한 면도 있고, 약간 다른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된 점이 있다면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는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작을 앞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에게는 병을 이기고 마음의 평화를 얻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지만 사용할 때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새 사제의 첫 강복은 교황님과 주교님들께서도 무릎을 꿇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습니다. 교황님과 주교님은 새 사제의 강복을 받으면서 새 사제들이 참된 목자가 되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떠나는 아브라함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자녀가 많아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이사악, 야고보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야고보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위해서 씨름까지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자손을 많게 해 주시는 것이고,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이렇게 축복해 주십니다. ‘이제 여인에게서 한 아이가 탄생할 것이다. 그 아이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구약의 역사는 언제나 한결같으신 하느님의 사랑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지는 축복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많은 축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입니다. 나는 이제 여러분을 벗이라고 부릅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지만 벗은 친구가 하는 일을 다 압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줍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릅니다. 성령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내가 세상을 이겼습니다. 새로운 계명을 줍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십시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하셨고, 제자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비록 제자들이 두려워했고, 예수님을 배반하였지만 예수님의 축복은 한결같으셨습니다.
가정에서 부모님은 자녀들을 위해서 많은 것을 줍니다. 물질적인 축복을 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스펙’을 쌓아 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세례를 받은 날, 견진을 받은 날, 아이들의 축일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며 함께 기도하고, 축복해 주면 좋겠습니다. 사제서품 받은 날, 축일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면 좋겠습니다.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이를 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어쩌면 아름다운 교회의 전통을 낡은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너무도 쉽게 버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신화와 신앙은 먼 옛날의 낡은 이야기가 압니다. 신화와 신앙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담긴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소중한 유산입니다.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은 어쩌면 우리가 잊고 사는 ‘강복, 축복, 안수, 축성’의 의미를 새롭게 받아들이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신앙인이라는 것을 말이 아니라 삶으로 행동으로 드러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화려한 꽃의 모습이 아니라, 어두운 땅 속에서 양분을 찾는 뿌리의 모습으로 사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전에 한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이 세상은 어두운 밤하늘의 은하수와 같습니다. 은하수가 있기에 밤하늘이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양승국신부-
마태오 복음사가는 소금과 빛의 상징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함을 통해 그들이 부여받은 소명의식을 자각시키고자 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소금처럼 세상의 부패를 막고, 빛처럼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존재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소금이나 빛같은 존재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곧바로 이어지는 본문에 명확히 표현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오 복음 5장 16절)
여기서 착한 행실이란 산상설교(마태오 복음 5장~7장)의 가르침 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닷가에 살다보니 이곳 특유의 삶의 냄새가 풀풀 풍깁니다. 굴양식을 많이 하는 지역이라, 겨울이 되면 집집마다 어르신들께서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양식장에서 날라온 굴을 잔뜩 쌓아놓고 하루 온종일 까십니다.
그런데 알맹이를 빼고 남은 굴껍데기의 양이 엄청납니다. 문제 한 가지는 내용물이 빠져나간 껍데기는 그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애매하고 적당한 장소에는 어김없이 일생에 도움이 안되는 굴 껍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소금이 제맛을 잃어버리는 경우는 드믑니다. 그러나 사해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불순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습도가 상승하게 되면, 염분은 사라지고 불순물만 남게 된답니다. 곧 짠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으니 아무데나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입니다.
아무리 품질이나 바탕이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변질되고 부패되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지 못하다면, 알맹이가 빠져나간 굴껍질이나 짠 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상 도움이 안되는 의미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산상 설교의 삶과는 완전 동떨어진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예가 허다합니다. 방송매체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유명인사들 가운데 그런 분들 참 많습니다. 같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방법으로든 세상과 이웃에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변 동료 인간들 사이에서 모범이요 모델이 되어주는 존재여야 마땅합니다. 존재 자체로 이웃들을 살맛나게 해주는 사람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당부 말씀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건네실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인 동시에 엄청난 책임과 부담을 통고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유형의 소금인지 스스로를 잘 한번 돌아봐야겠습니다. 일조량이 많은 바닷가 염전에서 생산된 성숙하고 부드러운 짠맛,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국내산 소금인지? 아니면 염도가 사라져버린 눅눅한 사해산 소금인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신원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선언하십니다. 곧 우리가 어떤 존재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주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여라.”는 말은 바로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아들로서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행실을 보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무엇을 행하느냐는 문제라기보다 어떻게, 그리고 어디를 향하여 행하느냐? 문제입니다. 곧 무엇을 하든지 자신을 녹이고 자신을 태우는 일이요, 세상이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우리의 사명이나 역할 의 본질이 우리의 신원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는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곧 하늘의 아버지께서 ‘세상을 향하여 있는 분’이시기에,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요한 3, 16-17)하셨듯이, 우리의 신원도 ‘세상을 향한 존재’임을 드러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신원을 깨우쳐주고 밝혀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다.”(마태 5,13-14)
이는 우리의 신원이 세상을 향해 있는 존재임과 동시에 우리의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장소가 ‘세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세상 위에서 비추는 빛이고, 세상 안에서 녹는 소금이라 하십니다. 곧 세상 안에서 자신을 ‘녹여’ ‘세상’의 부패와 불의를 막고 세상의 맛을 내는 ‘소금’이라 하시고, 자신을 ‘태워’ ‘세상’을 비추어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이라 하십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문헌인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세상 안에 살되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곧 세상에 살되 세속 정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사명은 단지 어둠을 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막는 데 있고, 빛을 비추기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빛으로 이끌어 가는 데 있습니다. 곧 단지 자신의 영혼 구원만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랑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세상을 비출 수 빛인 것은 아닙니다. 단지 “빛의 자녀”(요한 12,36;에페 5,8)로서 그 사명을 수행할 뿐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헌장>(Lumen Gentium)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인류의 빛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비추는 빛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여야 할 일입니다. 이는 우리가 결코 자기 자신을 향하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과 타인’을 향하여 있는 존재요, ‘하느님’을 향하여 있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신원이요 사명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게서 빛이 불타오르게 하소서.
제 안에 심으신 심지에 불을 붙이시고 제 몸을 녹여 빛이 되게 하소서.
어둠을 피하지만 말고 막고 부수게 하소서. 빛을 비추지만 말고 껴안고 이끌게 하소서.
제 행실이 사람들을 비추고 세상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마태 5,16)
주님!
제게서 착한 행실의 빛이 타오르고, 세상이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소서
제가 타오를 수 있음은 제 안에 당신의 심지를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불을 붙이시어 제 심지를 태우소서.
영의 바람을 일으키시어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제 몸뚱아리를 녹이고서야 빛이 되어 밝힐 수 있기에, 부서지고 사라지게 하소서. 아멘.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반영억신부-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이미 소금이 아닙니다. 빛이 빛을 내어 밝게 비추지 못한다면 이미 빛이 아닙니다. 소금이 짠맛을 내고 빛이 빛을 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그 본성을 찾아 자기 몫을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의 역할에 충실할 때 빛과 소금이 됩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영광을 감사하며 그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4). 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미 소금이요, 빛이라고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맛을 내고, 비추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을 내지 못하고 빛을 내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 사람은 참으로 한심한 사람입니다. 내가 소금이고 빛이라는 것을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음에 부끄러움이 큽니다. 그러니 가끔은 스스로에게 ‘정신차려 이 사람아!’ 하고 꾸짖을 필요가 있습니다. 소금의 중요한 역할은 부패를 막는 것과 맛을 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부정부패를 막는 것과 살맛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빛나게 됩니다. 그리고 착한 행실은 곧 생활화된 신앙을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착한 행실은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칭찬을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제자들의 소명이나 오늘 우리의 소명은 결국 빛나는 삶의 행실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의 삶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모범으로 표양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그저 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선을 행하되 자신의 공로에 대한 생각이나 칭찬을 구하지 않음으로써 진실하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포장하여 들어내려고 애를 쓰지만 믿는 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통하여 그 믿음의 진실성을 확인 받게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에 관하여 탐구하지 말고, 선행을 통해서 하느님을 찾으십시오”(성 골롬바노). 그리고 “이 세상의 선한 행위는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되며 하느님께로 귀결”(십자가의 성요한) 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소금이요, 빛입니다. 그 맛을 잃지 않고 빛을 가리지 않는 가운데 행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위해 헌신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언제나 교회를 증명해준다. 비참함에 짓눌린 사람들은 ‘교회의 우선적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된다. 교회는 초기부터 많은 지체들의 과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들을 구제하고, 보호하고, 해방시키려고 노력해 왔다"(가톨릭 교리서 2448항). "교회는 언제나 잘못과 실수를 범해 왔지만, 가난한 이들과 자비의 활동을 할 때에는 언제나 성령님의 이끄심을 따랐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배려로 그리스도의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5,13-16: 세상의 소금과 빛
소금은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동시에 음식을 맛나게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들도 방부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자신이 지닌 참맛을 잃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타락하여 썩어 버린 창조계의 질서를 원래의 신선한 상태로 회복시키도록 불림을 받았다. 거룩한 지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악마의 배반에 넘어가 맛을 잃지 않도록 한결같이 굳건해야 한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소금은 사도들이 전해준 말씀으로 가득 찬, 참된 지혜로 가득한 마음을 의미한다. 그 소금이 우리 마음에 뿌려지면 지혜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자리 잡는다. 이런 마음을 소금에 비유하는 것은 소금의 좋은 맛과 신선함 때문이다. 소금이 없으면 음식을 썩지 않게 맛나게도 못하는 것처럼, 사도들의 가르침이 없으면, 우리는 건강하지 못하고 활기가 없으며 하느님 보시기에도 아름답지 못하다.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13절) 우리가 믿음과 지혜를 버린다면, 우리는 당장에 이단에 빠지거나 믿지 않는 이들의 어리석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악의 세력에 넘어가 제 맛을 잃고 믿음의 은총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된다. 한때는 믿음으로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맛들일 수 있었으나 이제는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빛”(14절)이라고 하는 것은 참되고 영원하신 분으로부터 비추어져 그들도 어둠 속에서 빛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태양이시고 이제 빛줄기 같은 제자들을 통하여 온 세상에 당신 지혜의 빛을 쏟아 주셨다. 우리 신앙인들은 진리의 빛을 보여줌으로써 오류의 어둠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달아나게 해야 한다. 십자가 위에 매달린 그 등불, 빛은 교회 안에 머무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빛을 비추신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15절) 이 등불은 아버지와 아들이 켜고, 그 등불은 말씀이다. 말씀의 등불은 교회에서나 세상에서나 길을 알려주도록 빛을 내는 것이다. 여기서 등경은 생명의 말씀을 지니고 있는 교회이며,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지니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다. “함지”라는 것은 악덕으로 “등불”이라는 덕을 감추는 것인데, 빛을 피해 어둠으로 숨는 사람들의 모습을 말한다.
예수님은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즉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16절)고 하셨다. 이것은 우리의 착한 행실이 남이 보더라도, 우리는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선행이 알려지도록 두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이는 사람들이 우리 신앙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착한 행실을 삶을 보도록, 빛나고 그들을 가르치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 13)
-한상우신부-
절절한 소금의
삶이란 기꺼이
내어주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굳어있는
소금이 아니라
녹아 스며드는
소금의 삶입니다.
녹아내려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내어주어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변하지 않는
우리들
자아입니다.
머뭇거리는
우리들에게
녹아 스며드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 말씀하십니다.
짠 소금이
되는 것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삶입니다.
믿음의 삶은
소금의 삶입니다.
내어주고
녹아들고
스며드는
소금의 삶이
생명의 길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 앞의 선함이 무엇인지 밝혀 줍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존재인지(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소금과 빛! 둘 다 인간 생명과 분리될 수 없는 요소지요.
소금은 몸의 신진대사를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입니다. 음식의 맛을 내는 효능 뿐만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고 인체 조직을 활성화하는 본질적 구성요소라고 하지요.
빛은 생명체를 성장시키고 신진대사를 촉진하지요. 또 활동 가능한 환경을 조성합니다. 빛의 가치를 깨달은 인간은 해, 달, 별 등 자연의 빛이 주는 효력을 연장하기 위해 전기를 만들어 빛의 시간을 연장해 사용하지요.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예수님은 소금처럼, 빛처럼 사는 삶을 "착한 행실"이라는 말씀에 집약시키십니다. 착함에 대해서는 사회 도덕 윤리적으로 다양한 정의가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께서 당부하시는 착함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제1독서에서는 엘리야와 사렙타 마을 과부 이야기입니다.
"그 무렵 엘리야가 숨어 있던 시내의 물이 말라 버렸다"(1열왕 17,7).
엘리야의 생명을 지탱해 주던 시냇물이 말랐다고 합니다. 이미 가뭄이 심화되었음을 보여주기도 하고, 또 하느님께서 보호하시던 예언자의 생명도 위협받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 위기는 엘리야가 하느님 뜻을 이루기 위해 말라버린 시내 주변을 떠날 시간이 되었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가뭄으로 세상과 모든 생명체를 멸하시려는 것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가뭄이라는 위기 상황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호기가 되지요.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1열왕 17,13)
생의 마지막 끼니를 준비하는 궁핍한 과부를 향해 엘리야가 요구합니다. 자칫 이기적인 갑질로 비칠 수도 있지만, 깊이 머물러 보면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가져야 할 본질적 마음가짐을 담고 있는 도전입니다.
"착한 행실"은 '나 먼저'가 아니라 '너 먼저' 그리고 이를 통해 '하느님 먼저'라는 정신의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선 나부터 잘 살고 보겠다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이웃의 필요와 하느님의 영광을 염두에 두는 마음입니다. 그 밑바탕에는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이 깔려 있지요.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진정한 "착한 행실"은 하느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합니다. 퍽 괜찮은 사람으로 비치고자 하는 자기 영광의 사심이 들어설 자리가 없지요. 크건 작건, 드러나건 드러나지 않건 모든 "착한 행실"은 하느님 찬양의 도화선이 되어야 합니다.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1열왕 17,16).
사렙타 과부는 엘리야를 통해 이르신 하느님 말씀을 믿고 따름으로써 참 생명을 얻습니다. 포기하려던 육신의 생명에 더하여 진정 믿음과 의탁의 열매를 체험하게 되었으니까요.
떨어지지 않는 밀가루와 마르지 않는 기름.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명을 지탱해 주는 양식의 원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잘것없는 밀가루 떡으로 당신 몸을 이루시어 우리를 살리시고, 성령께서는 거룩한 기름으로 온갖 은사와 치유를 베푸시어 우리 생기를 돋우십니다.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밀가루와 기름처럼, 하느님 영광을 위해 우리가 베푸는 "착한 행실"은 고갈되지 않습니다. 혹여 왕성한 신앙 활동과 봉사로 공허하고 지쳐간다면 그 지향이 누구의 영광을 향하고 있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소금의 역할로 하느님의 좋으심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빛의 역할로 또 하느님의 좋으심을 드러내지요. 우리는 착한 행실로 하느님의 선함을 이루어 갑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요. 우리는 지침도 고갈됨도 없이 세상에 그분을 보여 주는 "등경 위의 등불"(마태 5,15)입니다. 이를 통해 사랑하는 우리 하느님께서 찬양받으시길 빕니다. 세세 영원히. 아멘.
죄짓지 않는 것에 안주하지 말고
-김찬선신부-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그저 너희는 소금이요 빛이라 하지 않으시고,
굳이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런 주님의 말씀에 우리는 양극단의 잘못된 태도를 지닐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싫다는 태도와
내가 세상의 빛이라니 영광이라고 하며 으스대는 태도입니다.
저는 한때 평범하게 살겠다는 사람을 소시민이니, 꿈이 없는 사람이니
하며 평가절하하고 특히 수도자가 그렇게 살겠다고 하면 그럴 거면
뭣하러 수도자가 되었냐고 질타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소시민이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건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고,
'소확행'을 꿈꾸는 요즘 젊은 사람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요.
여러분은 '소확행'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그리고 이에 동의하시나요?
제가 강론에도 한두 번 얘기한 것 같은데 요즘 우리 젊은이들이
불의한 세상에 대해 분노할 줄도 모르고, 세상을 바꾸려는 생각이 없이
그저 '소확행' 그러니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나 꿈꾸며 살고 있지요.
그래서 민주주의를 위해 시위를 하고 피를 흘린 어른 세대,
집을 마련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산 어른 세대의 눈에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내 한목숨 바치려 들지 않는 젊은 세대가,
미래의 내 집 마련을 위해 허리띠 졸라매기보다 셋방 살더라도 좋은 차를
사 놀러 다니며 현재 작은 행복에 만족하려는 젊은 세대가 한심해 보이지요.
그러나 너무 욕심 부리다가 죄짓거나 아등바등 사는 것보다는
평범하게 사는 소시민의 삶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 욕심 부리지 않고 살기도 너무 어렵고
그래서 일생 욕심을 버리지 못해 삶을 망친 적이 너무 많기에
소시민으로 평범하게 살기로 이제 겨우 마음먹은 분들이 대부분이지요.
그리고 자기 욕심 채우려고 남을 죽이는 사람이 많은 세상에서
욕심부리지 않고 남에게 나쁜 짓 하지 않는 것만도 훌륭하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욕심은 우리와 다르고, 우리 욕심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래서 오늘로부터 이어지는 산상수훈에서 주님께서는
전에는 이렇게 얘기했지만 이제 나는 이렇게 애기한다고,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런 주님이시기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짓지 않는 것에 안주하는 것을
싫어하시고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고 하시는 것인데
우리는 자주 죄짓지 않는 것에 안주하려고 하고,
남이 뭔가 열심히 하려다가 잘못을 범하면 괜히 나서지 말고 중간이나
가라고 남도 가로 막는데 저는 이런 사람을 싫어하고 그래서 저는 같은
잘못을 또 저지르더라도 잘하고자 하는 의욕을 꺾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우리말에 참 좋은 말이 있지요.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냐?
그렇지요. 장을 안 담그면 구더기가 생기지 않긴 하지요.
그러나 구더기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지 장을 담그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제가 요즘 민감한 문제에 대해 한마디 하려고 합니다.
바로 이용수 할머니가 제기한 문제 때문에 <정의 기억 연대>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이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지
일부의 잘못을 가지고 그들의 활동 전체를 부정해서는 안 되고,
이것을 기회 삼아 위안부나 징용 배상 문제를 좌절시키려는
일부 극우 친일파들의 준동은 결단코 허용치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저도 그렇고 <정의 기억 연대>도 짠맛을 잃으면 버려질 뿐이니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는 회계 문제에 정확해야 할 뿐 아니라
사랑과 열성만큼 참으로 가난하고 겸손해야 함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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