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6일 연중 제9주간 토요일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마르코 12,38-44)
“Amen, I say to you, this poor widow put in more
than all the other contributors to the treasury.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의 모습은 구약에서 엘리야가 만난 과부를 떠올리게 합니다. 엘리야가 사렙타에 사는 과부를 찾아가 물 한 그릇과 빵 한 조각을 청합니다. 이때 과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1열왕 17,12).
오늘 복음의 과부가 봉헌한 돈은 렙톤 두 닢입니다. 요즈음 돈의 가치로 환산하자면 그녀의 전 재산은 약 천 원에 불과합니다. 한 끼를 겨우 때우기에도 부족한 이 돈을 그녀는 왜 하느님께 봉헌하려고 하였을까요? 어쩌면 그녀는 더 이상 살아갈 여력이 없는 것에 한탄하며 가지고 있던 돈을 하느님께 바치고 난 뒤에 사렙타의 과부처럼 죽으려고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그녀가 놓인 상황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과부의 헌금을 두고 하시는 말씀을 전 재산을 바친 것에 대한 칭찬으로만 알아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풍족하게 가진 것이 많음에도 목숨이 위태한 과부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백성들의 완고한 마음을 두고 탄식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헌금을 내는지에 대해서는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지난 목요일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3)라는 율법 학자의 말을 두둔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에서 우리는 어떤 메시지를 새겨들어야 할까요? 단순히 교회에 많은 헌금을 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새겨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사람들, 하루하루 삶의 무게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무심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기를 오늘 복음이 가르쳐 줍니다.
조명연신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창던지기 종목에서 영국 선수 스티브 베클리는 동메달을 땄습니다. 그리고 4년 뒤의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더 좋은 성적을 낼 것이라고 사람들은 기대했고, 그 역시 그 어떤 때보다도 열심히 훈련했습니다. 그런데 올림픽을 6개월 앞두고 발목 부상을 입었습니다. 6주 동안 목발을 짚어야 했고 훈련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은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는 6주 동안 목발을 벽에 기대어놓고 의자에 앉아 창던지기 상상을 했다고 합니다. 창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고, 손가락으로 꽉 쥔 서늘한 금속 손잡이의 감촉을 느꼈습니다. 완벽한 창던지기 자세를 취했고, 던진 창이 높이 아치형을 그리며 날아가는 순간에는 그의 근육도 긴장했습니다. 창이 저 멀리 날아가서 땅에 꽂히는 장면을 계속해서 상상했습니다.
이미지 트레이닝이 중요하다고 말하지요. 실제로 많은 스포츠 선수들이 이 훈련으로 향상된 성적을 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만약 스티브 베클리 선수가 ‘훈련을 할 수 없으니, 나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없어.’라고 포기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방법만 있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그 방법을 사용할 수 없을 때는 좌절하며 포기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을 이 세상 안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의 말씀처럼 자비의 빈손, 믿음의 빈손, 정결의 빈손으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닢을 넣습니다. 사람들은 비웃었겠지만, 주님께서는 지향을 보시기 때문에 그녀를 칭찬하십니다. 자신의 생활비를 모두 다 넣을 정도로 하느님을 사랑하시는 그녀의 지향을 보신 것입니다.
자캐오도 자기 재산의 절반으로 하늘 나라를 차지할 수 있었고, 과부도 동전 두 닢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부자가 베푼 많은 재산과 가난한 사람이 건넨 두 닢이 하늘 나라에서는 똑같은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재물에 온 힘을 기울이는 것보다 하느님께 온 힘을 기울이는 사랑의 지향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내게 사랑의 지향은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주님께 봉헌할 재물이 없다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음을 더 슬퍼해야 합니다.
누구나 약속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약속을 이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에머슨).
자기 자리를 지킴.
어느 석상이 야외에 서 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리고 햇볕이 뜨거울 정도로 쨍쨍 내리쬘 때도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습니다. 석상의 입장에서 볼 때는 불만스럽지 않을까요?
석상을 만든 작가가 이곳에 세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석상도 기쁠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자신을 보고서 감상을 하며 기쁨을 간직하는 사람을 볼 때가 아닐까요?
이렇게 말없이 자리를 지키는 석상을 보면서,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모습도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불평불만으로 지금 자리를 떠나려고만 애쓰는 모습이 아니라,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이 자리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특별한 것을 바라지 않고 자기의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기뻐할 수 있습니다.
저 먼 나라의 어린이가 굶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전삼용신부-
히틀러 정권에 항거하다가 8년 동안 옥고를 치른 마틴 니뭴러(Martin Niemoller)라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가 옥고를 치른 후 위대한 「2차 대전 책임백서」라는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그 책 가운데 이런 체험이 나옵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어느 날, 니뭴러 목사가 일곱 번이나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한 줄로 서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데 심판대 앞에 선 사람들은 한 사람도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자신만 바라보고 자신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비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니뭴러 목사도 그 대열에 서 있는데 어떤 한 사람이 이상하게 죄를 고백하지도 않고 회개도 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면서 자꾸 변명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누구인지 자세히 바라보니 그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히틀러였습니다. 히틀러는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나를 반대하고 욕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내게 사랑으로 예수님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신은 평생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다고 믿고 있었던 니뭴러 목사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히틀러가 이렇게 된 것이 바로 네 책임이다.”
이 말을 들은 니뭴러 목사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네가 8년 동안 히틀러 정권에 대해 항거만 했지 한 번이나 그에게 복음을 전했느냐?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킨 죗값이 너에게도 있는 것이다.”
이 똑같은 꿈을 일곱 번이나 꾸고 “이 전쟁의 책임이 바로 나에게 있었구나!”라고 가슴을 치면서 회개의 눈물로 쓴 책이 「2차 대전 책임백서」라고 합니다.
신앙인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율법 학자’와 ‘율법주의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보기에는 율법주의자일뿐인 이들이 율법 학자라고 내세우며 다니는 것에 질책하십니다. 우리는 율법 학자가 되어야지,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차이는 바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생각으로 결정됩니다.
저 먼 나라의 한 어린이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그 책임이 나에게 없다고 말하면 그 사람 안에는 ‘율법’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모든 책임을 나에게 지웁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는 자연과 세상이 이렇게 되어 가는 것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믿지만, 율법주의자는 남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 학자들은 겉모양으로는 모든 율법을 다 알고 지킨다고 사람들이 여기게끔 꾸미고 다니지만 실제로는 이웃의 가난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 곁에는 천 원밖에 없는 가난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 과부는 천원까지 헌금통에 집어넣었습니다. 주님께만 희망을 거는 행위입니다. 주님께서 보살펴주시지 않으면 더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율법은 그런 사람을 자신의 형제처럼 사랑하라는 책임감을 심어줍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들은 그런 책임을 무시하면서 완전한 율법주의자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 학자가 아니라 실제적인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린 이유는 자기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율법까지도 이용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낳은 아들이 카인입니다. 그는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이 동생을 지키는 사람이냐고 그 책임을 회피합니다. 그 말 안에는 자신 안엔 율법이 없다는 뜻이 숨어있습니다. 율법은 책임입니다. 이웃에 대한 나의 책임을 깨우쳐주는 것이 율법인 것입니다.
일본 소프트 뱅크의 손정희씨가 중병에 걸려 오래 못 산다는 판정을 받았을 때 그는 아프리카의 한 이름 모를 소녀를 생각했습니다. 그녀에게 꽃 한 송이, 사과 하나라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처럼 미소짓게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자 병이 나았습니다. 그때 율법이 비로소 그의 마음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은 생명이요 건강이신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건강이 회복된 것입니다. 율법은 세상 가장 먼 나라의 한 아이까지도 나의 책임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런 책임이 일지 않으면 나는 구원되는 율법 학자가 아니라 구원 못 받는 율법주의자로 머물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산보 가는 길에 새의 둥지를 보았습니다. 소나무 가지 사이에 둥지가 있었습니다. 어미 새가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어미 새는 몇날 며칠 둥지를 떠나지 않았고,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지켜보지만 어미 새의 정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벌써 10일 이상 지났으니 곧 둥지에서 새끼 새를 볼 것 같습니다. 한 마리의 새끼 새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어미 새의 눈물겨운 품기가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돌아보면 쉽게 포기한 것이 참 많았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포기하기도 했고, 게으름 때문에 포기하기도 했고, 열등감 때문에 포기한 적도 있고, 이기심 때문에 포기한 적도 있고, 주변의 환경을 탓하며 포기한 적도 있습니다.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 쇼’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저도 예전에 몇 번 들었습니다. 지난달에 마지막 방송을 했는데 1987년부터 진행했으니 33년이 되었습니다. 방송할 때는 20대 였는데 지금은 50대 후반이 되었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눈이오나 비가 오나 시청자들을 위해서 방송했다고 합니다. 33년이란 긴 시간 빠지지 않고 자리를 지켰던 강석, 김혜영 진행자에게 수고하셨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충실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잠시의 방심과 나태함 때문에 또다시 어려움이 시작되곤 합니다. 한국은 코로나19에 대해서 대처를 잘 하였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개학을 앞둔 시기에 이태원에서의 감염이 있었습니다. 확진자가 늘어나면서 개학이 연기되었습니다. 밀폐된 공간에서 밀집된 공간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었다고 합니다. 바이러스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사람들 사이를 신나게 돌아다녔고, 확진자는 다시 늘어났습니다. 정부와 지방 자치단체의 적극적인 대처로 일단락되었지만 경각심을 주기에는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진리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화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하는 말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은 ‘죽비’가 되어 제게도 신발 끈을 다시 조이게 합니다.
신앙인은 천사들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미카엘 천사처럼 나의 신앙을 굳게 지키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 담대히 신앙을 증거해야 합니다. 신앙이 약한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처럼 나의 뜻이나 나의 욕심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라파엘 천사처럼 신앙의 여정에 좋은 안내자가 되어야 하고, 상처 입은 이웃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 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을 베푸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나의 마음에 무엇을 쌓아 놓을 것인지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를 지냈으면 합니다.
“저희를 성자의 살과 피로 기르시고 주님의 성령으로 다스리시어 저희가 말보다 진실한 행동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마침내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헌금이나 있어서 금액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마음이요, 정성입니다!
-양승국신부-
‘미드라쉬(히브리어, 성경 이야기를 해석하는 방법) 가운데 랍바(랍비들의 가르침) Ⅲ’에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사제가 어느 가난한 여인이 봉헌한 한줌 밀가루 제물을 손에 받아들고는 너무 어이가 없어 거절했습니다. 그 사제는 즉시 하느님으로부터 경고를 받았습니다. 바로 그밤 꿈에 그는 이런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여인이 바친 것을 멸시하지 말아라.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은 것과 같으니라.”
봉헌과 관련해서 오늘 우리 역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합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우리의 예물이 보다 귀하고 값진 것이면 좋겠습니다. 보다 큰 액수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주어진 처지가 각자 다릅니다. 10만원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10만원이 하늘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액수보다는 마음과 정성을 더 높이 평가하십니다.
따라서 봉헌이나 자선 금액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해서는 절대 안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헌금 때문에 소외당하거나 상처받은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각종 헌금이나 기부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사목자들은 없는 교우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더욱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곘습니다.
성 목요일이 저물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입구 헌금함 맞은편 계단에 앉아 계셨습니다. 저 건너편에는 13개의 헌금함들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의 큰 명절이었던 과월절을 맞아 수많은 유다인이 헌금을 하러 몰려왔습니다. 어떤 부자들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양손 가득 동전을 들고 왔습니다.
값어치가 큰 금화나 은화를 하나 조용히 넣고 돌아서면 간단하고 좋을텐데, 그들은 ‘있어 보이려고’, 뽐내려고, 수많은 동전들을 갖고 와서 요란스럽게 헌금함에 넣었던 것입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을 아주 소중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헌금의 액수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깊이와 비례한다고 여겼습니다. 많은 헌금을 한 부자들은 그렇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의 보잘것 없는 헌금을 크게 업신여겼습니다.
이윽고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헌금을 하는데, 금액이 고작 렙톤 두 닢이었습니다. 렙톤은 그리이스 화폐 단위 가운데 가장 낮은 것이었습니다. 두 렙톤은 로마 동전 한 과드란스와 동일한 가치를 지녔는데, 껌이나 한통 살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시는 예수님께서는 렙톤 두 닢이 과부가 지니고 있던 전재산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 돈을 넣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테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코 복음 12장 43~44절)
가난한 과부가 하느님께 드린 선물은, 그 가치에 있어서 다른 어떤 사람들의 큰 기부금보다도 더 뛰어납니다. 그녀가 두 렙톤을 헌금하는 데에는 큰 희생이 뒤따랐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주님께 봉헌하기 위해 그날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쓰고 남는 것을 바쳤습니다.
헌금이나 기부, 자선에 액수가 중요치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곧 마음이요, 정성입니다.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도 가진것을 곧 생활비를 다 넣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엄하게 질타하십니다. 남에게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찾으며, 약한 자들의 재산을 등쳐먹으면서도 기도는 오래 바치는 위선의 삶을 질책하십니다. 우리 자신도 혹 이렇지는 않는지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복음>의 “뒷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렙톤 두 개를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높이 칭송하십니다. 부자들은 나름대로 여분의 것에서 일부를 바쳤지만, 이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기에 가장 큰 봉헌을 한 것이라고 칭송하십니다. 과부의 헌금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내면적 헌신의 외적인 표시”였습니다.
이는 헌금의 의미가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봉헌과 나눔도 바로 이러한 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마지막 음식마저 내어주었던 사렙다의 과부처럼, 자신이 가진 동전 전부를 내어놓았던 이 가난한 과부처럼, 아니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다른 이들과 하느님을 위해 믿음과 사랑으로 마음으로 헌신하여야 할 일입니다.
이는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많이 해야 한다는 돈 모금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봉헌의 참뜻을 일깨워 주시고자 하십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곧 믿음의 삶이요, 예수님 당신을 따르는 삶임을 밝혀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곳곳에서 약한 자와 억울한 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과 관심을 강조하십니다. “참된 봉헌”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마침내는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참된 봉헌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사실, 이 과부는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그의 전부를 바쳤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하였을까?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고 싶은 이를 만났는가? 전부를 내어주고도 가지지 못한 것마저 만들어서라도 주고 싶은, 그런 이를 만났는가? 그렇게 소중하고, 그렇게 귀한 이를 만났는가? 주군이신 그분,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그분을 만났는가?
진정, 우리가 그분을 만났다면,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비싸서 그 어떤 많은 돈으로도 결코 얻을 수가 없지만, 또한 너무도 싸서 ‘단 돈 두 닢’으로도 얻을 수가 있는 마음입니다. 곧 순수한 마음의 지향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지향’이라는 보화가 있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는 그 ‘지향’을 보십니다. 마음 속 ‘지향’이 순수하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아무리 거대하고 큰 일리라도 마음 없이 한다면 결코 예수님 마음을 얻을 수 없지만, 비록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이지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한다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아닌 것입니다. 혹은 크고 거창한 일을 하느냐 작고 미천한 일을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오직 ‘마음의 지향’에 달려 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지향’이 얼마나 순수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곧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 마음을 얻는 길일 것입니다. 이는 요한 까시아누스가 수도승의 목표로 제시한 “마음의 순결”(puritas cordis)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순수한 마음의 지향으로 하고 있는지를 모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주님!
제 마음의 지향을 깨끗하게 하소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하게 하소서.
전부를 내어놓은 가난한 과부처럼, 목숨을 내어놓은 당신처럼,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저의 전부이오니, 전부를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부분은 전부보다 클 수 없다
-반영억신부-
초등학교 2학년 학생들에게 숙제로 ‘우리 집 자랑거리’를 써오라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자랑거리를 보니 “아파트가 넓다, 차가 좋다. 대형스크린 텔레비전이 있다.”등 물질적인 것들을 적어오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정말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나 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큰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렙톤은 당시 통용되는 화폐단위의 최소단위 입니다. 그렇다면 금전적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하찮은 금액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십 원짜리 동전 두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그 이유를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마르12,43-44). 하고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가진 것의 일부를 내었고 가난한 과부는 있는 것 전부를 내었습니다. 일부는 액수가 얼마든 전부보다는 많을 수 없습니다. 전부는 액수가 적어도 부분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마음과 사랑을 봉헌한 것과 생색내기로 봉헌한 것은 분명 차원이 다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8,9).
세상은 돈을 좋아합니다. 많은 돈을 가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쫓아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나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초등학생들이 벌써 물질을 자랑거리로 삼는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우리 기성세대입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든 가운데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그리고 민첩하게 자선을 베푸는 삶을 살았더라면 그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사실 과부의 헌금이 소중한 것은 가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바쳤기 때문입니다. 남김없이 바칠 수 있는 마음을 언제나 간직할 수 있을지……... 무엇을 봉헌하든 사랑의 마음으로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생계야 어찌되든 재산을 다 팔아 성당에 바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재물이든 시간이든 근심걱정, 내면의 상처까지도 온전히 주님께 맡길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본당신부를 하면서 많은 선물을 받고 살았지만 기억되는 선물이 있습니다. 한 어르신으로부터 받은 네잎클로버입니다. 들에서 발견했는데 신부님께 복을 빌어주려고 가져오셨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물질적인 선물은 할 수 없지만 이것이라도 받아주십시오. 제 마음입니다." 하셨습니다. 저는 아가다 할머니의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사랑이 담긴 네잎클로버는 다른 무엇보다도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12,38-44: 과부의 헌금
예수님께서는 먼저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그들은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고 실천하지만, 외적인 것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은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잔칫집에서 윗자리에 앉는 것에 더 신경을 쓴다고 하시며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도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고 하신다. 내적인 것에 관심이 없고 껍데기에만 신경 쓰는 그들의 불행을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부인들을 위해 마련된 13개의 헌금 궤가 있다. 그것들은 매일 드리는 제물이나 성전의 비용을 위한 헌금 궤이다. 많은 사람들이 상당한 액수의 헌금을 하였다. 그런데 한 과부는 동전 한 닢에 해당하는 렙톤을 헌금 궤에 넣었고, 예수께서는 그 과부를 칭찬하셨다. 그것은 그 과부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희생하고 바쳤다는 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더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부의 동전에 관한 이야기가 율법 학자들에 대한 가혹한 표현과 직접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겉꾸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대우받기를 원하면서도 뒤로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40절). 이렇게 위선에 가득찬 율법학자들과 단순하고도 충만한 과부의 믿음을 비교하고 있다. 그 과부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까지도 바쳤다.
과부의 헌금은 그 무게가 아니라 그것을 봉헌한 선한 마음으로 재어진다. 즉 예수님께서는 과부가 봉헌한 돈의 양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시고, 그 여인의 아낌없는 마음만 보셨다. 얼마 안 되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여 충실히 응답하는 이들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귀퉁이만으로 응답하는 이들보다 더 깊은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다. 마르코는 은총에 호응하지 못하는 율법학자들과, 조건 없이 단순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응답하는 과부를 비교하고 있다.
자선을 베푸는 데 필요한 것은 마음가짐뿐이다. 비록 지독하게 가난한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면서도 동전 두 닢을 넣는다면 우리는 힘자라는 대로 모든 일을 다 한 것이다. 보리빵 한 조각밖에 없으면서도 그것을 나눈다면 우리는 자선행위의 가장 중요한 것을 행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냉수 한 잔으로 하늘 나라를 얻는 것과 같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오늘 헌금을 한 과부의 모습을 통하여 자비로운 마음과 믿는 마음을 즉 신앙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것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당신의 모든 것을 즉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는 삶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오늘의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비로운 마음과 신앙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청하여야 하겠다.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 44)
-한상우신부-
생활에 쫓겨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된
봉헌을 일깨워
주십니다.
생활의 봉헌은
생활의 간결함으로
이어집니다.
간결할수록
깊어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생활의
봉헌으로 자연스레
드러납니다.
우리를 위한
생활의
봉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과부의
정성이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어줍니다.
자신의 생활에서
온 마음을
봉헌합니다.
생활을
먹고 사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슬픈 현실에도
가장 가난한
과부를 통해
희망을 보여주시는
주님께 의지합니다.
우리의 생활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께
봉헌하는 맑은 날
되십시오.
생활에서 출발하는
봉헌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저마다 삶의 상황이 다른 세 부류의 사람들, 율법 학자, 부자들, 가난한 과부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고루 겪게 되는 삶의 기회들, 시기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마르 12,38).
문맥으로 보면 현재 예수님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사두가이들과 두루 마찰을 빚고 계시는 중인데, 오늘의 대목에서는 율법 학자들을 정면으로비난하십니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 예수님께서 단지 그들을 같이 비난하고 손가락질하자고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건 아닐 것 같습니다.
율법 학자는 지식과 권위를 소유한(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권력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그들의 적나라한 모습, 인사받기를 즐기고 높은 자리와 윗자리를 찾고 과부를 등쳐먹으며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는 태도는 오늘날 심심찮게 문제가 되고 있는 위선과 갑질의 전형이지요.
그들은 앎과 삶이 분리되어 심각한 불균형 상태에 빠진 우리의 단면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 공동선을 위해 우리 손에 쥐어 주신 지식과 권위, 능력과 영향력을 제 명예와 영광을 위해 오용하고 남용하는, 어찌 보면 주님 눈에 불쌍하기 짝이 없는 몰골이지요.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마르 12,38).
그들은 하느님께 무언가를 봉헌하는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꼭 재물만이 아니어도 탈렌트나 시간, 건강 등 우리 삶에 이런 풍요의 순간이나 기회가 없지 않지요. 그때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되돌려 드리는 태도는 결코 작거나 하찮지 않습니다.
그런데 봉헌의 지향이 하느님의 더 큰 보상을 바라는 마음에서인지, 헌금함에 돈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찬사를 보내줄 사람들 때문인지, 사심 없는 감사의 표현인지에 대해서는 하느님만 아십니다. 중요한 건, 사람은 그 봉헌의 물리적 수량을 보지만 하느님은 마음을, 지향의 순수성을 보신다는 점입니다.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렙톤 두 닢을 넣었다"(마르 12,42).
보호자 없는 과부는 사회적 지위로 볼 때 아주 취약한 약자입니다. 게다가 가난하기까지 하니 그녀는 생활 이전에 생계와 생존의 위협을 받고 살았을 겁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재산도 사람도 위로도 기대할 수 없이 철저한 고독으로 밀려났던 시기를 떠올려 줍니다. 저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고, 혹 지금 이 순간 그 어려움을 겪고 있을 수도 있지만, 인간은 실존적으로 이러한 가난의 체험을 거치게 마련입니다.
그때 절망의 나락에서 추스르고 일어나 제단 앞으로 나아가는 건 놀라운 결단입니다. 게다가 자기에게 남은 것을 있는 것 없는 것까지 박박 끌어 모아 주님께 바칠 수 있는 건 대단한 용기지요. 자신을 이런 바닥까지 몰아넣은(몰아넣었다고 여기는) 신을 원망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자신을 그분께 의탁하는 태도는 엄청난 신앙입니다. 어쩌면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가져야 할 모습이지요.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 가난한 과부입니다. 사실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께 우리가 바치는 건 그게 무엇이 얼마나 되었든 액수에 관계 없이 렢톤 두 닢도 못 되는 가치니까요. 또 돈, 인맥, 제도 등으로 겹겹이 보호막을 치고 살아도 생로병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 외에 인간에게 진정한 보호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바라시는 건, 단순한 의탁과 겸손한 봉헌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유언에 가까운 내용을 전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2티모 4,2).
이미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린"(2티모 4,7) 선배로서 바오로가 충고합니다. 그는 기회가 늘 좋거나 평탄하지만은 않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압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2티모 4,5)라는 권고에는 사랑하는 제자이며 후배에게 갖는 짠하고 안쓰러운 심경까지 비칩니다.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박해와 모욕과 죽음의 위협 속을 걸어가는 복음 선포자의 삶이 세상 눈에는 그저 렙톤 두 닢 어치도 못 되는 가치일 수 있지만, 하느님 눈에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마르 12,43) 봉헌한 것이지요. 그 가치는 하느님과, 확신을 가지고 그 길을 걸어간 이들만이 압니다.
"이제 다 늙어 버린 이 몸을 버리지 마소서. 제 기운 다한 지금 저를 떠나지 마소서"(화답송).
시편 저자는 복음 속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담아, 아니, 저마다 가난하고 초라한 실존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담아 노래합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나약하고 가련한 실존을 지고 꿋꿋이 살아가는 길은 우리의 가난을 그 약함과 부족함, 죄악까지 주님 발 앞에 바치는 의탁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복음 환호송).
사랑하는 벗님! 우리의 가난과 겸손으로, 온 세상, 온 우주를 통틀어 가장 부요하고 완전하신 성삼위 하느님을 기리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준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부자가 아니어서, 가난해서 행복한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기회가 좋건 나쁘건
-김찬선신부-
이번에 코로나 전염병 대처와 관련하여 우리 정부와 우리 의료진들과
우리 국민이 얼마나 잘 대처하였는지 잘 드러났고,
그래서 그동안 우리가 자부심을 가지지 못하고 우리나라와
우리 자신을 비하하고 '헬 조선', 곧 '지옥과도 같은 한국'이라고
얼마나 자학하며 살아왔는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이 얘기를 꺼낸 것은 우리도 이제 자부심을 갖자는 뜻이
아니라 위기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얘기하기 위함입니다.
왜냐면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라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아닐지라도 위기에 대한 올바른 대처는 지레 죽고 들어가거나
어떻게든지 위기에서 도망치려는 패배주의적이고 소극적인 대처가 아니라
어떻게든지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는 적극적인 대처라고 얘기하지요.
우리 정부가 제대로 된 정부일 때는 위기의 국면에서 오히려 국민을 위하고,
국민은 아엠에프 때 금 모으기에 자발적이고 헌신적으로 동참했고 이번에도
의료진들은 참으로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국민은 정부의 지침을 잘 따랐지요.
그랬더니 지금까지 우리는 말끝마다 유럽 몇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칭하며
우리는 후진국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우리가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국가,
곧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위기를 기회로 제대로 활용한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을 가진 우리는 더더욱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바오로 사도가 하는 말이고 저도 하고 싶은 말입니다.
왜냐면 우선 복음 선포 자체가 좋은 기회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좋든 나쁘든 복음을 선포하라고 할 때
무엇이 좋은 기회이고 무엇이 나쁜 기회입니까?
우리를 '어서 오십쇼.'하고 환영하는 그런 곳과 그런 때입니까?
다시 말해서 반대나 박해가 없는 것이 좋은 기회입니까?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곳에 선교나 전교를 나갑니다.
선교나 전교는 그렇게 해도 되고, 그렇게들 많이 합니다.
가톨릭을 환영하는 곳에 나가서 가톨릭 교회를 세우고
좋은 일도 많이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 선포는 복음이 없는 곳에 그러니까 복음이 선포되지 않은 곳에
가는 것이고, 복음이 선포된 적이 한 번도 없거나 지금 선포되지 않는 곳이
오히려 더 필요하기에 선포해야 하는 것이지요.
제가 관구장일 때나 선교 책임자일 때
어디를 선교해야 할지 참 고민을 많이 하였습니다.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로 돈을 가지고 가 선교를 가면 환영도 받고,
그래서 선교의 결실도 눈에 보이게 맺을 수 있는데 그곳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종교를 아편이라고 하며 탄압하고 특히 천주교를 극히 경계하는
그런 공산주의 나라들이나 이슬람 국가들에게 갈 것인가 결정해야 할 때
저는 복음이 없는 곳을, 없으니까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쪽을 선택했지요.
그리고 기회가 되면 적극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기회가 좋지 않으면
조용히 복음을 살면서 현존하는 방식으로 살도록 했는데 그것은
프란치스코가 수도회로는 처음으로 선교에 대한 규정을 수도규칙에
넣으면서 허용이 되면 복음을 선포하고 세례도 주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선
"아랫 사람이 되고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 가톨릭은 사목자건 신자들이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려는 안이함이 전반적으로 있고 특히 저를 포함하여 일부 사목자는
복음을 선포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목을 하며 왕노릇이나 하려고 합니다.
이런 저에게 오늘 서간은 큰 도전을 하며 마지막으로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코 12,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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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율법 학자’와 ‘율법주의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보기에는 율법주의자일뿐인 이들이 율법 학자라고 내세우며 다니는 것에 질책하십니다. 우리는 율법 학자가 되어야지,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차이는 바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생각으로 결정됩니다.
저 먼 나라의 한 어린이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그 책임이 나에게 없다고 말하면 그 사람 안에는 ‘율법’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모든 책임을 나에게 지웁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는 자연과 세상이 이렇게 되어 가는 것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믿지만, 율법주의자는 남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일본 소프트 뱅크의 손정희씨가 중병에 걸려 오래 못 산다는 판정을 받았을 때 그는 아프리카의 한 이름 모를 소녀를 생각했습니다. 그녀에게 꽃 한 송이, 사과 하나라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처럼 미소짓게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자 병이 나았습니다. 그때 율법이 비로소 그의 마음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은 생명이요 건강이신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건강이 회복된 것입니다. 율법은 세상 가장 먼 나라의 한 아이까지도 나의 책임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런 책임이 일지 않으면 나는 구원되는 율법 학자가 아니라 구원 못 받는 율법주의자로 머물게 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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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난한 과부는 재산도 사람도 위로도 기대할 수 없이 철저한 고독으로 밀려났던 시기를 떠올려 줍니다. 저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고, 혹 지금 이 순간 그 어려움을 겪고 있을 수도 있지만, 인간은 실존적으로 이러한 가난의 체험을 거치게 마련입니다.
그때 절망의 나락에서 추스르고 일어나 제단 앞으로 나아가는 건 놀라운 결단입니다. 게다가 자기에게 남은 것을 있는 것 없는 것까지 박박 끌어 모아 주님께 바칠 수 있는 건 대단한 용기지요. 자신을 이런 바닥까지 몰아넣은(몰아넣었다고 여기는) 신을 원망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자신을 그분께 의탁하는 태도는 엄청난 신앙입니다. 어쩌면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가져야 할 모습이지요.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 가난한 과부입니다. 사실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께 우리가 바치는 건 그게 무엇이 얼마나 되었든 액수에 관계 없이 렢톤 두 닢도 못 되는 가치니까요. 또 돈, 인맥, 제도 등으로 겹겹이 보호막을 치고 살아도 생로병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 외에 인간에게 진정한 보호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바라시는 건, 단순한 의탁과 겸손한 봉헌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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