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6월 7일 삼위일체 대축일

Margaret K 2020. 6. 6. 18:54

2020 6 7일 삼위일체 대축일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18)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Son,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might not perish
but might have eternal lif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부모님을 잘 알고 있는 교우분들 가운데 어느 분이 말씀하십니다. “신부님은 아버지를 참 많이 닮으셨네요.” 옆에 있는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은 어머니를 쏙 빼닮으셨어요.” 저는 이 두 분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였습니다. “제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닮으셨어요.”
사실 생각해 보면 제 어머니와 아버지가 태생적으로 닮았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 분이 서로 사랑하고 한 가정을 함께 책임지며 살아가는 동안 습관, 식성, 생활 방식, 가치관 등을 공유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까지도 비슷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비단 제 부모님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본당 주임 신부 시절, 수많은 부부를 바라보며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라는 말이 떠오를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닮은 정도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를 이루시지 않겠습니까? 유한한 사랑을 하는 이들이 서로 닮는데,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영원무궁토록 무한한 사랑을 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세 위격은 서로의 존재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에리히 프롬이 말하였듯이 사랑은 본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는 상대방을 자기 방식대로 끌어들이지 않고, 상대방의 존재 방식을 있는 그대로 잘 간직하도록 애써 줍니다. 그리하여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서로 일치하시는 가운데서도 성부의 위격이 다르고 성자의 위격이 다르고 성령의 위격이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외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 사랑의 신비 안에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매 순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고 받는 하나된 사랑

-키엣 대주교-

 

삼위일체 신비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아주 오래 전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너무도 사랑하여 당신의 모습까지 내어주신 하나뿐인 아드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것을 아드님에게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아버지에게 받은 사랑으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용서하셨고 아버지께 받은 모든 사랑을 다시 아버지 하느님께 드렸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어느 순간에나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고 실천하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당신의 모든 뜻을 버리셨기에 아버지의 마음과 행동, 생각이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비록 죽음이 두렵지만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생애를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절대 순종이야말로 아버지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완전한 봉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끊임없이 불타오르는 사랑의 용광로이며 언제나 마르지 않는 사랑의 원천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아드님 예수님을 이어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신 성령입니다. 주고 받는 삶, 그것이 바로 진실된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한 사랑이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랑의 시작은 삼위일체로부터 시작됩니다. 삼위일체의 사랑과 같은 완벽한 하나의 사랑이 이루어질 때 가장 행복한 사랑이 됩니다. 행복은 삼위일체 사랑 속에서 사랑을 주고 받을 때 비로소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을 파괴하는 온갖 미움과 증오와 죄가 사랑으로 씻어지기를 바라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분열의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출 수 있는 사랑의 불꽃, 용서와 사랑을 갈구하는 메말라가는 세상을 사랑의 비로 씻어주어 사람의 마음 깊은 곳까지 고귀한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삼위 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성호를 긋고 우리 마음 깊은 곳에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이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의 사랑에 저희가 함께 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영원히 타오르는 사랑의 용광로의 불꽃이 되게 하여주소서. 삼위일체 사랑 속에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헌신하고 용서하는 사랑을 배우게 하여주소서. 삼위일체 사랑의 진정한 행복을 알게 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예수님께서는 기도 중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데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2.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 그대로 아드님 예수님을 만드시어 이 땅에 내려 보내주셨습니다. 나도 과연 아버지 주님과 같은 사랑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3. 삼위일체 신비를 이해한다면 주님과 형제 자매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여야 할까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돌봄

-염수정추기경-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께서 같은 본성의 한 하느님이시라는 신비를 기리는 날입니다. 우리 신앙의 근본 교리인 삼위일체의 신비는 단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체험적으로 나타나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지난 몇 달 동안 코로나19로 박해 시대에도 경험하지 않았던 ‘공동체와 함께하는 미사 중지’라는 신앙생활의 공백기를 체험했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 완화에 따라 지난 4월 23일부터 조심스럽게 미사를 재개해서 지금까지 각 본당에서 철저한 방역지침에 따라 미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를 침착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잘 대응해주신 신부님들과 신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코로나19 이후(post corona)에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사회의 많은 부분은 코로나19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고 크게 변화될 것이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19 이후 우리 교회의 사목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돌봄’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활절 전날 우리 교구의 ‘가톨릭사랑평화의집’을 찾아 도시락 배달을 하며 쪽방에 살고 있는 여러분들을 만났습니다. 저는 그날 같은 쪽방에 살고 있는 분들의 삶에도 너무 큰 격차가 있는 것에 놀랐습니다. 여기서도 이렇게 차이가 많이 나는데 우리 사회에서 빈부의 격차가 어느 정도인가를 상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많은 전문가는 코로나19 이후 사회의 빈부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라 예상합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우리 교회의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가난으로 고통을 받는 이웃들을 우선적으로 기억하고 필요한 도움을 베풀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형제자매이고 그들을 돕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고에 따라 불우한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자선은 교회가 지닌 본질적인 사명 중의 하나입니다. 현대 사회는 얼마나 많이 소유하느냐가 인간의 정신과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습니다. 끝없는 소유욕과 지나친 소비가 전 세계에 걸쳐 많은 사람을 절대적 가난으로 몰아가고 있으며, 빈부의 차이를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진정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먼저 물질 중심의 삶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루카 16,13 참조)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는 길입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의 신비'

-김창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한 분의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교회는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기립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초기교회 때부터 그리스도 신앙의 원천입니다.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우리는 이 신앙의 진리대로 성삼위께서 이루시는 친교와 사랑의 일치에 참여합니다. 

우리는 기도의 시작과 끝에 성호경을 긋고, 삼위일체의 하느님께 영광송을 바치며 깊은 절을 합니다. 또한, 주일이나 대축일 미사 때 신앙 고백을 합니다.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신경(Credo)의 표현대로 전능하신 성부께서는 천지의 창조주이십니다. 성부와 한 본체이신 성자께서는 저희 구원을 위하여 동정 마리아께서 육신을 취하시고, 십자가 수난과 죽음에서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계시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발하시는 성령께서는 생명을 주십니다. 

삼위일체의 교의는 주님 계시(마태 28,19)에 따라 초기교회 때 이미 세례와 신앙 고백, 설교와 가르침, 교회기도문에 반영된 신앙의 뿌리입니다. 교회사가 말해주듯이 2~3세기경에 신앙을 왜곡시킨 이단의 주장과 분열의 위기 속에 교부들의 호교론과 동·서방 교회가 함께한 공의회(니케아 325, 콘스탄티노플 381)에서 이 교의가 정립되었습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이 교회 전례력에 들어온 것은 요한 22세 교황(1334) 때입니다. 
 

안토니오 데 페레다의 ‘삼위일체’.


‘삼위일체’란 말이 성경에 직접 언급된 적은 없으나 주님의 계시로 그 신비가 드러납니다. 구약 성경은 존재(Being, I Am) 자체이신 한 분의 하느님과 다른 위격들의 존재를 암시합니다(창세 1,2.26; 탈출 3,14; 신명 6,4: 미카 5,2 등). 신약성경은 성자의 강생과 세례, 거룩한 변모, 고별담화, 부활, 복음 선포의 사명 등에서 삼위의 위격을 분명히 밝힙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본체(실체, Substance)와 위격(Persona)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합니다. 본체란 한 분이신 하느님의 신적 존재를 가리키며, 위격은 삼위 간에 서로 구별되는 지위입니다. 삼위의 관계는 친교로 사랑의 일치를 이룸에 있습니다. 오늘의 감사송은 위격은 서로 다르면서도 본성(신성)으로는 한 분이신 삼위일체의 신비를 노래합니다. 

신앙의 베일에 가린 삼위일체의 신비를 깨달아보겠다고 성직자나 수도자에게 여러 번 청해 설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한 성인 사제(St. Patrick)께서 삼위일체의 상징으로 아일랜드 국화인 애기괭이밥(클로버) 풀잎을 들고 “한 잎인가, 세 잎인가?”라는 질문을 한 뒤, 신자들이 “한 잎이며 세 잎이다”라는 대답을 할 때 “하느님도 그렇다” 하셨답니다.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 40일간 단식기도하는 동안 백성들은 제멋대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신으로 섬깁니다. 이를 목격한 모세는 하느님께서 쓰신 돌판을 깨트려버립니다. 제1독서는 모세의 중재기도와 새 돌판을 받는 장면입니다. 백성을 당신 소유로 삼으신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탈출 34,6).”라는 표현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고백(민수 14,18; 시편 103,8; 요나 4,2 등)입니다. 그렇습니다. 존재 자체이신 주님은 자비와 은총, 진리와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제2독서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2코린 13,13)라는 구문은 신약의 가장 분명한 삼위일체의 표현으로, 초기교회 때부터 원문 그대로 사용되어온 미사 전례의 인사말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품 안에서 성삼위의 친교와 형제애를 나누며 하느님의 내적 생명에 참여하는 성도입니다. 

오늘 복음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알고 삼위의 친교와 일치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하느님 구원계획의 궁극 목적을 밝힙니다(가톨릭 교리 260). 그러므로 성자의 강생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성자의 파견목적은 세상의 심판이 아니라 구원에 있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믿지 않는 자는 스스로 심판을 받았습니다(요한 3,18). 

“사랑의 신비인 삼위일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삼위일체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고 일러주신 한 스승의 가르침을 회상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이 꽃을 피워 열매 맺기를 기다리십니다. 주님 사랑의 파트너인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되는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을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영감과 은총으로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내적 생명을 이미 누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원한 사랑의 파트너인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와 성사로 신심을 길러, 주님만을 섬기고 사람을 돕는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면, 세상은 변화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삼위일체에 대한 성녀 마더 데레사의 우문현답

-김재복신부-

 

“지식이 늘어난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지식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더 크게 보여줄 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종종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이해하기 위해, 삼위 일체를 이해하기 위해, 하느님 창조의 장엄함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삶 가운데 아름다운 실례가 있습니다. 그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우연히 모 랫구멍에 바닷물을 채우려던 작은 소년을 만났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그 아이에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고 그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 구멍에 바닷물 전부를 다 채우려 하고 있습 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이 구멍에 대양 (大洋)을 채우는 것이 그대가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쉬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태평양의 물 한 방울 정도라는 것을 잘 알아요. 그러나 이 물 한 방울이 태평양에 있지 않다면 태평양의 물은 어쨌든 그만큼 줄어드는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어린이집’과 ‘영생의 집’ 을 짓지 않았다면 우리가 데려온 이 어린 창조물들은 거리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나는 모든 인간에게서 하느님을 봅니다. 내가 나환자의 상처를 씻을 때 예수님을 돌보는 느낌을 받 습니다. 어찌 아름다운 경험이 아니겠습니까?”-성녀 마더 데레사사전적으로 우문현답(愚問賢答)이란 ‘어리석은 질문을 받고 현명하게 답함’입니다. 그러나 요즘엔 ‘우 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뜻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아우구스티노 성인처럼 머릿속이나 이론에서 답을 찾은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찾았으니 이야말로 우문현답이라고 생각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이라는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하 는 기준이 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탐구와 사색에서 나온 정의라기보다는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 령을 체험한 사람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는 한마디로 사랑의 신비라 할 수 있습 니다. 삼위일체는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사랑의 실체입니다. 이웃을 위해 봉사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하 느님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사랑과 봉사의 삶을 통해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길로 생각됩니다

. “If we pray, we will believe, if we believe, we will love, if we love, we will serve” (우리가 기도하면 믿게 되고, 믿으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한다면 봉사하게 됩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삼위이시며 일체이신 하느님

-박재현신부-

 

  교회는 오늘 대축일에 삼위일체 하느님께 이렇게 믿음을 고백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과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 한 위격이 아니라 한 본체로 삼위일 체 하느님이시옵니다. 주님의 계시로 저희가 믿는 주님의 영광은 아드님께도 성령께도 다름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위격으로는 각각이시요 본성으로는 한 분이시며 위엄으로는 같으심을 흠숭하오며 영원하신 참하 느님을 믿어 고백하나이다.” (미사 「감사송」 중)

  교회는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삼위는 한 하느님이시다. 세 신들이 아니라, 세 위격이신 한 분 하느님, 곧 ‘한 본체의 삼위’에 대한 신앙 을 우리는 고백한다. 하느님의 삼위는 신성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각 위격이 저마다 완전한 하느님 이시다. 성부께서는 성자의 본성을 지닌 바로 그분이시며, 성자께서는 성부의 본성을 지닌 바로 그분이시 고, 성부와 성자께서는 성령의 본성을 지닌 바로 그분이시다. 곧 본성으로 한 하느님이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53항)

  “하느님의 세 위격은 서로 실제적으로 구별된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지만 홀로는 아니시다.’ 세 위격 은 서로 실제적으로 구별되므로 성부, 성자, 성령은 단순히 하느님의 존재 양상을 가리키는 이름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성자이신 분은 성부가 아니시며, 성부이신 분은 성자가 아니시고, 성령이신 분은 성부나 성자 가 아니시다.’ 세 위격은 그 근원이 가진 관계들로써 서로 구별된다. ‘성부께서는 낳으시는 분이시고, 성자께 서는 나시는 분이시며, 성령께서는 발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단일성은 삼위로 이루어져 있다.” (『가톨릭 교회교리서』, 254항)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사람이 피조물에 대해서도 다 알지 못하고 잘 알지 못하는데, 창조주 하느님께 대 한 신비를 알아듣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이 신비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겠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사랑한다 면 성삼위의 그 사랑에 다가갈 수 있겠습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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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성공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성공한 삶은 무엇인가요? 돈 많이 버는 것일까요? 아니면 출세하는 것일까요? 얼마 전에 읽은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책에서 성공한 삶에 대한 정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성공한 삶이란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바로 그 유일무이한 모습을 실현하는 것이다.’

나의 유일무이한 모습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실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명령하셨지요. 교통이 불편해서 두 발로만 다녀야 했고, 그러다 보면 길가에서 강도나 사나운 짐승을 만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명령에 대해 충분히 불평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떠났습니다. 만약 불평이 있다면 떠나지 않았겠지요. 그리고 전교 여행을 마치고 기쁨에 차 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명령을 따랐기에 성공의 기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모습은 무엇일까요? 사랑 안에서 그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고 하셨지요. 결국, 사랑의 길을 가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고, 이 안에서만이 성공의 체험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각각 온전한 고유성과 온전한 자유를 지니면서도 한 분으로 행동하신다는 가르침입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이해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교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 보여 주시는 사랑의 일치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자녀가 함께 살아가는 가정인데, 서로가 마음에 맞지 않아서 겉으로만 가족일 뿐 따로 살아간다면 어떨까요? 결코, 화목한 가정이 될 수 없고, 이 가정 안에서 어떤 힘도 발휘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에게 사랑을 나누면서 함께 한다면 어떻습니까?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그 순간을 잘 이겨내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은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 고유한 분이시나 항상 사랑으로 하나 되어 한 뜻을 이루시기에 서로가 다른 분이 아니라 한 분 하느님”이라고 강조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이 사랑의 모범을 가정 안에서부터 따르는 것이 바로 성공하는 삶의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명령이고 이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는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바로 그 유일무이한 모습을 실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조그마한 친절이, 단 한 마디의 사랑의 말이, 저 위의 하늘나라처럼 이 땅을 즐거운 곳으로 만든다(J.F.케네디). 

 


손해보는 장사?


경제 전문 기자 토마스 람게가 쓴 ‘행복한 기부’에는 색다른 계산식이 나옵니다. 

“2-1=3”

산수를 할 줄 아는 초등학생도 이 등식이 잘못된 것임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등식처럼, 하나를 나누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득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타주의는 역설이다. 남을 돕는 자는 스스로를 돕는다.”라고 합니다. 

남을 도울 때 괜히 손해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가 아닌 ‘+’에 더 힘을 줍니다. 그러나 남을 도우면서 얻는 행복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나의 사랑을 보고 또 다른 사람도 동참하면서 행복의 강도는 더욱더 세지고 커갑니다. 

남을 돕는 사람은 물질적으로는 잃을지 몰라도, 사람을 얻고 하느님의 마음까지도 얻게 됩니다.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닙니다.         

 

천국의 행복과 지옥의 고통은 세트 상품이다

-전삼용신부-

 

개신교에서는 매우 유명한 ‘김동호’ 목사가 있습니다. 작년에 폐암 판정을 받고 폐 일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수술보다 더 힘든 것은 항암이었다고 합니다. 항암 중 졸도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옥의 고통을 느끼던 지난 한 해가 평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하늘을 두고 거짓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항암의 고통 중에 침대에 쓰러져 밥도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이사야 40장 1절의 말씀을 주셨다고 합니다.

“내 백성을 위하라!”

처음엔 ‘지금 내가 죽게 생겼는데 무슨 내 백성을 위하라고 하시나?’라고 의문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로 암의 고통을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그 고통만큼 당신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전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너도 아파 봤으니까 알잖아. 내 사랑을 전하라!”


      침대에 실려 다녀야 하는 상황에서 바로 집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침 6시마다 “날마다 기막힌 새벽”이란 이름으로 항암의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위해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벌써 300회가 넘었고 1년에 벌써 구독자가 12만 명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고통스러운 가운데 복음을 전할 수 있어서 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말기 암 환자분의 자녀가 이런 댓글을 달아주셨다고 합니다.

“그 지옥같이 고통스러운 나날을 천국 같이 지내다 가셨습니다.”

[출처: ‘김현정의 뉴스쇼’, 김동호 목사, ‘지옥 같은 항암, 천국처럼 행복했다’]

 

      번지점프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은 위험한 외줄 타기나 암벽등반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그런 위험한 스포츠를 즐길까요? 그 이유는 죽음 가장 가까이에 있을 때 가장 살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안전한 곳에서는 살아있음도 느끼기 어렵습니다. 이는 삶과 죽음이 세트 상품이기에 그렇습니다. 삶과 죽음은 한 세트이기 때문에 하나가 커지면 다른 것도 커집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재미없는 관계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관계입니다. 그 안에서는 친밀함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행복은 친밀한 관계에서 옵니다. 그런데 관계가 친밀하려면 그만큼 멀어지는 고통도 감수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발에 줄 하나 매달고 뛰어내릴 용기를 내지 못하면 살아있다는 쾌감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관계도 하나의 모험입니다. 내 전부를 내어줄 용기가 없다면 친밀한 관계에서 오는 행복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관계가 ‘믿음’에 바탕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선물’에 의해 생깁니다. 모르던 두 사람이 사귀면 상대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선물을 합니다. 선물 안에 그 사람의 사랑이 담깁니다. 누군가 사랑한다고 말하며 이쑤시개를 준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과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선물 안에는 그 사람의 존재가 담깁니다. 선물 안에 그 사람의 생명이 담길 때, 그리고 상대가 그 선물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친밀한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 친밀한 관계에서만 맛볼 수 있는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자유’라는 것이 있습니다. 상대의 선물이 부담스러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명과도 같은 선물이 쓸모없게 됩니다. 이때 선물을 주는 사람이 받는 상처는 그 선물을 위해 얼마나 투자했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만약 그 선물이 생명과도 같다면 그 사람은 거부당할 때 지옥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관계를 위해 조금만 투자합니다. 상처받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로라면 상처는 받지 않을지언정 삼위일체 관계가 이루어져 느끼는 천상의 행복은 맛볼 수 없습니다. 천국의 행복을 맛보려면 지옥의 고통도 감수해야 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관계 안에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지옥까지도 내려가십니다. 구원 역사 안에서의 이런 관계는 삼위일체 관계의 계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차거나 뜨거우면 삼키겠지만 미지근하면 뱉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딱 그 정도만 선물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적당히 신앙생활 하며 만약 하느님이 안 계시더라도 크게 손해 볼 것이 없는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그리스도와의 삼위일체 관계를 통해 느끼는 행복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당신 살과 피를 선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 선물이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는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성령 선물의 보답으로 당신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부활과 승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누리십니다. 이렇게 되실 수 있으셨던 이유는 관계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줄 아는 용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삼위일체 행복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투자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습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아니 관계의 친밀도에서 옵니다. 관계의 친밀도는 내어줌의 정도에 의해 결정됩니다. 조금 내어주는 관계는 조금 깊은 관계이고 많이 내어주는 관계는 아주 깊은 관계입니다. 평생 친구 같은 친구 하나 없이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친밀한 관계를 맺어갈 것인지는 내가 관계를 위해 지옥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의 내어주심을 통해 우리도 삼위일체 관계에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관계를 통한 천국의 행복과 지옥의 고통은 세트 상품입니다. 사랑을 위해 지옥을 감수할 용기가 있다면 삼위일체 행복을 이 세상에서부터 체험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뉴욕에 살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이 있습니다. 한국은 도시봉쇄를 하지 않고 전 국민이 마스크를 착용하면서 코로나19에 대응했습니다. 도시봉쇄를 하는 것은 사회적인 비용도 많이 들고 생활이 무척 불편합니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은 쉬운 마스크 착용을 미루고 도시봉쇄를 먼저 했습니다. 엄청난 비용이 소모되었으면서도 확산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와서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한다고 합니다. 길에서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하면 조금 이상합니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포기하고 가래로 막는 것 같습니다. 좋은 것이라면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서도 배울 수 있으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존심, 우월감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기 때문에 마스크 착용을 꺼려한다고도 합니다. 도시봉쇄조치는 마스크 착용보다 개인의 자유를 더욱 제약하는 면이 있습니다. 마스크 착용은 심리적으로도, 의학적으로도 코로나19의 확산을 막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확실합니다.

 

행복은 깃털보다 가벼운데 우리는 그것을 짊어지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파리의 세느강에서는 유람선을 타지만 한강의 유람선은 타려하지 않습니다. 에펠탑은 몇 시간씩 기다려서 올라가지만 남산타워는 올라가려하지 않습니다. 막상 다녀오면 한강이 참 넓고, 한강의 야경이 세느강에 뒤지지 않습니다. 막상 다녀오면 에펠탑에서 보는 전망보다 남산타워에서 보는 전망이 뒤지지 않습니다. 소중한 것이 곁에 있음에도 우리가 늘 보기 때문에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발이 맞으면 발을 느끼지 못합니다. 신발이 작거나, 크면 발의 소중함을 느끼곤 합니다. 허리띠가 딱 맞으면 허리를 느끼지 못합니다. 허리띠가 작아서 숨 쉬기가 불편하면, 허리띠가 커서 바지가 헐렁하게 느껴지면 그제야 허리의 소중함을 느끼곤 합니다. 멕시코로 휴가 간 대기업의 간부가 민박집 주인에게 하루에 몇 시간 일하는지 물었습니다. 어부인 민박집 주인은 4시간만 일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대기업 간부가 말합니다. 하루에 8시간을 일하면 좋다고 합니다. 어부가 묻습니다. 왜요? 간부가 대답합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고, 배를 더 살 수 있고,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부가 묻습니다. 그래서요? 간부가 대답합니다. 그러면 나처럼 이렇게 휴가를 즐길 수 있습니다. 어부가 대답합니다. 나는 이미 이렇게 매일 휴가를 즐기고 있는데요? 행복은 깃털보다 가벼운데 많은 사람이 행복을 다른 곳에서 찾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교리를 신앙의 신비라고 이야기합니다. 위대한 교부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은 작은 웅덩이를 파고 그곳에 바닷물을 담으려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마스크를 착용하면 해결 할 수 있는 문제를 굳이 도시봉쇄를 먼저 하려는 것과 비슷합니다. 자동차의 구조와 엔진을 잘 몰라도 우리는 능숙하게 운전할 수 있습니다. 운전은 자동차의 구조와는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운전은 교통신호를 지키고, 기술을 익히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성서에 먼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먼저 선포한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신앙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였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신앙 안에서 나누었습니다. 아기가 문법을 배우지 않았어도 말을 하는 것은 부모님의 사랑을 체험했고, 부모님을 따라했기 때문입니다.

 

성부이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자이신 하느님께서는 말씀과 표징과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를 알려 주셨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이 끝이 아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와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성령이신 하느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우리들에게 은사를 주시고,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지혜를 주시고, 굳셈을 주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온유와 친절과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목적은 우리를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친교, 나눔, 사랑의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권한을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권한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용하셨습니다. 성령은 이제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를 따뜻하게 감싸 주시고, 용기와 힘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삼위이신 하느님은 교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가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 나눔, 사랑이 드러나는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입니다. 아빠의 권위는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행사되어야 합니다. 엄마의 사랑은 가족들을 위한 배려와 희생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아빠의 보살핌과 엄마의 사랑을 받은 자녀들은 가정의 미래가 될 것입니다.

 

본당 공동체에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 나눔, 사랑이 드러나야 합니다. 불화와 대립을 극복하고 화해와 일치의 삶을 사는 것,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누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이 신자생활의 이상입니다. 성호경을 할 때마다, 영광송을 바칠 때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살도록 다짐하고 그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과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 한 위격이 아니라 한 본체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시옵니다. 주님의 계시로 저희가 믿는 주님의 영광은 아드님께도 성령께도 다름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위격으로는 각각이시요 본성으로는 한 분이시며 위엄으로는 같으심을 흠숭하오며 영원하신 참 하느님을 믿어 고백하나이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 표현, 삼위일체!

 -양승국신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사제로서의 지난 삶을 돌아보니, 삼위일체 대축일 때 마다 얼마나 생뚱맞고 엉뚱한 교리를 선포했었는지,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입니다. 하느님께도 크게 송구스럽고, 적절치 않은 예로 인해 고개를 갸웃거리셨을 교우들에게도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삼위일체의 신비에 둘러쌓인 하느님, 오묘하신 하느님을 인간의 제한된 지식과 언어로 설명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대축일이 다가올때 마다, 제 자신이 지니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신앙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것인가를 재확인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틈만나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고백하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성호경을 통해서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며 성호경을 긋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성삼위로 존재하고 계심을 믿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미사 시작 때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인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이렇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은연 중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관련된 지식에 있어서 둘째 가면 서러워할 바오로 사도 역시 ‘하느님 찬가’를 부를 때 아주 겸손한 신앙 고백으로 시작했습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로마서 11장 33~34절)

  

결국 하느님은 파악이나 결론을 내릴 대상이 아니라 신비와 신앙의 대상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방식, 접근 방식 역시 더없이 신비스럽고 심오하며 불가사이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양식과는 완전 다른 초월적·신비적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역시 이런 맥락에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은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방식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훨씬 초월적이고, 훨씬 풍요롭고, 훨씬 조화롭고, 더없이 뜨겁고 극진한 사랑인데,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성삼위께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상호 일치 안에서 통합된 사랑을 우리 인간에게 보내시는데, 곧 성삼위의 사랑입니다. 

 

우리네 인간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강한 정복 욕구입니다. 적정선에서 물러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 끝끝내 파헤쳐야 속이 시원합니다. 그 어떤 오지이든 탐험하고 깃발을 꽂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 마저도 인간의 머리로 딱 떨어지는 공식이나 이론으로 설명하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정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연구의 대상도 아닙니다. 신비 그 자체입니다. 알량한 인간의 머리로 파헤쳐지고 결론이 딱 떨어지는 대상이 절대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하느님의 실체가 명확하게 설명되고 낯낯이 밝혀진다면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 신비하며 불가해한 하느님의 영역은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게 현명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 앞에 우리는 더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을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 자체이신 성삼위 존재 앞에 더 뜨겁게 그분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더 깊이 동료 인간들을 사랑할때, 삼위일체의 신비는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이다. 이는 모든 신앙의 신비의 원천이며, 다른 신비를 비추는 빛이다. 이는 ‘신앙 진리들의 서열’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본질적인 교리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34항) 

 

결국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미천한 인간에게 당신에 관한 가장 내밀(內密)하며 지고(地高)한 신비인 삼위일체를 드러내시는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길 빕니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 떨리는 신비입니다. 알아듣기에는 어려워도 참으로 벅찬 사랑의 신비입니다. 너무 깊어 헤아려지지 않아도, 오히려 다 헤아려지지 않기에 더 깊이 매료당합니다. 다 이해되지는 않아도, 그 사랑은 충분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는 이 신비의 내용을 알아듣는 데는 한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중요한 것은 이 신비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듣는 일입니다.

이 용어가 생겨난 역사적 배경은 3세기에서 5세기에, 교회에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하느님이 실제 하느님과 다르고  성령과 하느님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이런 주장들 앞에서 신앙인들은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때, “삼위일체란 이 용어를 통하여 신앙인들이 고백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알아듣는 하느님은 실제 하느님이고, 또 신앙인들 안에 숨결로 일하시는 성령도 실제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는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2독서>에서,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전에 이미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길 빕니다.”(2코린 13,13)

 

이는 은총의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의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의 하느님이신 성령께서는 같은 하느님이심을 말해줍니다.

 

오늘 <말씀전례> 삼위일체에 대한 의미를 잘 드러내줍니다. 곧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가운데 나타났는지를 드러내주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를 말해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이 신비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축복을 의미합니다.

<1독서>에서, 모세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구름에 싸여 내려오셔서 모세와 함께 그곳에 서시어,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셨다.”(탈출 34,5) 주님,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주시기를 바랍니다.”(탈출 34,9)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2코린 13,1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길 빕니다.”(2코린 13,13)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네 인간들과 함께 사시기를 원하셔서 당신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의 동행자로 삼으시고 벗이 되어 함께 있게 하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느님의 참사랑입니다. 곧 아들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는 사랑입니다. 이 참사랑을 단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함께 있음 입니다. 그리고 함께 한다는 것은 복음적 의미로는 사랑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있음이 사랑입니다.  함께 있음이 곧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성입니다. 곧 따로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아니하고,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귐으로 친교를 이루며, 상호교제하고 상호 교환하며, 상호 내재(내주)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내어주어 타자 안에서 일치를 이루며, 자신 안에서 타자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함께 있음”, 그것은 유대와 연대의 관계 맺음이요, 우애와 형제애로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사랑으로 서로 함께 있고, 서로 속해 있고, 서로의 것이 되는 참으로 아름다운 결합의 일치요,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사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얼마나 밀접하게 관계 맺고 계시는 지를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께서 인류 역사 안에서 얼마나 다양하고, 얼마나 은혜롭게, 그리고 얼마나 깊게 일하시는 지를 드러내주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시라는 의미는 하느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살아계시고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지금 이 자리에 현존하신다.”는 것, 우리와 함께 살아계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우리와 동행 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참으로 하느님은 삼위로 함께 계시기에 사랑이십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이렇게 함께 있음이 바로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우리가 여기 이 수도가정에서, 이 성당에서 함께 만나 한 분이신 주님을 찬미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서로 사랑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되는 거룩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성 안으로 쏙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은 이토록 아름답고 거룩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자신을 바로잡으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 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길 빕니다.”(2코린 13,11-13).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기도 -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양손을 못에 내어주고 가슴을 열어 창을 받아들이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질 줄을 알게 하소서.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느님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복음말씀을 인용하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이 말씀은 모든 믿는 이들이 가슴에 품어야 할 성경구절입니다.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십니다. 더군다나 영생을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를 사랑자체이신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우리를 이웃과 하나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이 시간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으로 계신다는 계시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사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빚어 만드시는 분이시고 아들은 만드시는 분의 손이시며 성령은 빚어 만든 흙덩이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는 분입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곧 생명을 주신 모든 것의 근원이시고 목표이시며 시작이요, 마침이십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위해 아들을 넘겨주신 분입니다. 

아들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시며 존경과 순명을 가르치신 분입니다. 죄인의 대변자요, 억압 받고 소외 받는 이들의 변호자이십니다.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원자 이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 머물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시고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 주시며 또한 능력을 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탄식해 주시고 새로움을 더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각기 역할이 구별되면서도 삼위일체로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신비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받아들여집니다. 루카 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잉태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탄생과정부터 성부, 성자, 성령의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고 결실을 이루시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루가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 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3,21-22) 라고 적혀 있습니다. 세례 때도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18-20)고 하시며 아버지의 모든 권한을 받아 아버지와 하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요한16,14)하시며 역시 아버지와 하나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요한 16,13.14)하셨는데 요한 17,17에 보면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이하에서는 “한 처음에 말씀이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고 아들과 성령께서도 하나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무한히 모든 것을 주시는 사랑을, 아들은 무한히 수용하는 사랑을 성령께서는 무한히 자신을 남에게 연결하고 전달하는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C.S 루이스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살아 움직이신다.”고 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기도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으로, 성자는 기도를 도우시며 중재하시는 분으로, 성부는 기도를 들으시며 응답해 주시는 분으로서 우리의 영적 생명 안에 활동하신다.”고 말하였습니다. 부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신비가 사랑 안에서 확인되고 체험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흔히 부부간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표현합니다. 일심동체가 되었다는 것은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한 마음이 되고 한 마음이 되면 두 몸은 이미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한마음, 한 몸을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가난해도 풍요로울 수 있고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더욱 의지하고 더욱 일치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힘들면 힘이 들수록 더 큰 사랑이 요구됨을 압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은 사랑하는 이들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높은 지위에 있어도 외롭고 쓸쓸하게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어느 것으로도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능력이고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도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곳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게 되고 믿음이 더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많이 행하게 되고 주님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혹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여 사랑으로 하나가 되신 하느님의 신비를 생각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세상을 향합니다. 모든 이를 향합니다. 재능이 있고 성공한 사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 죄인들을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리고 너무나(이런 식으로) 사랑한 하느님 이십니다. 십자가에 목숨을 내 놓기까지,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표현되기 전까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외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보냈다는 큰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3,17-18) 여기서 우리는 사랑과 심판의 역설을 봅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을 보면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하는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3,19-20) 

결국 심판하는 자는 하느님이나 예수님이 아니라 빛을 거부한 인간자신입니다. 이 말은 빛이신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그 순간부터 계속 어둠 속에 머물게 된다는 말이고 그것은 그 사람이 자초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들이 모세의 손에 높이 들린 구리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믿음은 그렇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하는 사람은 새로 태어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고 맙니다. 믿음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살리시는 분입니다. 구세주이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모세의 손에 들린 구리 뱀을 본 사람은 살았듯이 십자가에 높이 들린 예수님을 보고 그분의 명을 그대로 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요즘 많이 더웠죠? 퀴즈 맞춰 보세요.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바다는? 열바다.
가장 차가운 바다는? 썰렁해
가장 따뜻한 바다는? 사랑해

@@@ 남자는 체면을 먹고 살며 여자는 기념일을 먹고 산답니다.
그리고 신부는 신자들의 불평, 불만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체면이나 기념일, 불평불만을 먹고 살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살아야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 
성체를 모시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  

 

사랑의 신비 
-송영진신부-

 

성부이신 아버지 하느님과 성자이신 아들 예수님과 성령이
위격으로는 서로 다른 분으로 구분되지만
본체로는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그런데 위격(位格), 또는 신격(神格)이라는 말은 너무 막연한 느낌을 주고,
세 분이지만 한 분이라는 말은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의 정답은 “모른다.”입니다.
강론을 하는 이들이나 교리를 가르치는 이들은 흔히 ‘어떻게?’에 집착하면서,
이런저런 예를 들어서 삼위일체를 설명하려고 애를 쓰는데,
그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입니다.
삼위일체는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신비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일부 종파는 삼위일체라는 말이 성경에 안 나온다는 이유로 삼위일체를 안 믿고,
또 인간들이 억지로 만든 교리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들이 만든 교리가 아니라,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믿음을 통해서 ‘깨달은’ 교리입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신학자들이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신 분”이라는 교리는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교리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가 아니라,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신 분”이라고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10).”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1요한 4,14).”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인간들에게 주십니다.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일은,
즉 내주신 일은,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일은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쪽에서 생각하면,
아버지께서 가라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인간 세상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인간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오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일치되어 있고,
인간들에 대한 사랑에서도 일치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성령께서 내려오신 일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4,16-17).”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청을 받아들여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일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신 일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서 언제나 항상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4,13).”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랑’이고,
성령의 사랑은 ‘우리와 함께 있어 주는 사랑’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랑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왜
이렇게 복잡한 방식으로 사랑을 주시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방식인가?” 라는 질문도 “어떻게 삼위가 일체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처럼 “모른다.”가 정답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인간들에게 가장 좋은 방식으로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방식이 아니라
인간들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방식을 선택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떻든 하느님은 한 분이시라는 믿음과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믿음과
‘성령도 하느님’이라는 믿음이,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신 분’이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졌고, 그 깨달음을 통해서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우리를 위한 ‘사랑의 신비’ 라는 믿음으로 이어졌습니다.

< 지금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어도
언젠가는 모든 것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우리를 구원하는 것만이 하느님의 뜻이고 바람이라는 것을 믿을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티토 3,5-7).”>

삼위일체를 믿고,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그 다음에 할 일은 무엇인가?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1-12).”
‘믿는 사람들’이 할 일은 바로 ‘사랑 실천’입니다.  

 

신앙인의 삶의 모델

-조욱현신부-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이다.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과 수난 죽음 부활이라고 하는 구원의 업적이 모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업적임을 고백하면서 이 신비를 거행하게 하였다. 삼위일체의 우리 구원의 주역이시며,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우리의 몸은 성령의 살아있는 궁전”(1고린 6,19)이다. 바로 삼위일체는 그리스도인이 살고 움직이고 행동하는 생명의 공간이시며, 자기 삶의 모델이시다.

 

2독서: 2코린 13,11-13: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과 친교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성 삼위의 이름으로 인사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13). 이 말씀은 전례 때에 당시의 신자들이 서로 포옹하면서 삼위일체의 축복을 주고받았다. 그 축복은 본질에서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11) 안에서 통교를 이루어 서로 결합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분은 항상 우리에게 먼저 오시며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구원의 은총은 무상임을 알게 해주며, 우리 생활의 모든 것이 은총임을 체험하게 한다. 가장 근본적인 은총이 바로 그분이시다. 다른 은총들은 그다음에 그분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 때 하느님의 모습, 즉 사랑의 참모습도 발견하게 해준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분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의 선물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크다.

 

하느님의 가장 큰사랑으로 표현된 선물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또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을 완전히 계시하시는 결정적인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즉 그분은 아들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동시에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의 고귀한 실체를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신다. 그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게 하여 주셨으며, 그럼으로써 이제는 또한 당신의 자녀들을 통하여 당신을 반영시키고자 하셨다. 이제는 우리도 우리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내셨듯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성령의 친교란 성령 안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일치를 이루는 성령의 능력도 뜻한다. 즉 성령은 신자들을 결합하는 원리이시고, 교회를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공동체로 만들어주는 분이시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 안에 드러나게 해주시는 분이시다. 실제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위격과 사명으로 명확히 구분하면서도 신비스럽게 하나로 일치시켜 영원히 결합하는 사랑이시다.

 

복음: 요한 3,16-18: 외아들을 보내주신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과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삼위일체의 신비가 잘 소개되고 있다. 즉 아들을 보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성부와 성자의 구원적 사명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하느님이 무한하게 사랑하시는 분으로 게시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16). 여기서 내주신다.’(parédoken)라는 말은 죽게 하다.’(갈라 2,20; 로마 4,25; 8,32 참조)의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 즉 아버지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세상의 구원을 위해 사랑의 선물로 주시기 위해 포기하시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세상은 모든 인간과 우주 전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우주 만물을 포용하신다.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믿기 거부하는 사람은 그 순간부터 무서운 심판이 내려지고 있다는 것이 이해할 만하다. 그것은 가장 큰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의 문을 닫고 사랑을 떠난 멸망의 상태에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1독서: 탈출 34,4b-6.8-9: 나는 주 하느님이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지금까지 하느님의 신비를 사랑의 신비로 강조하고 있다. 1독서 역시 이런 의미이다.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6) 라고 선포하신다. 이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으로 나타나실 때 그 사랑은 무한히 펼쳐질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 앞에 있는 문제는 이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이 놀라운 삼위일체의 구조를 실현하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삼위일체의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의 계획이 성취되는 곳이다. 삼위일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위격으로 구분되지만,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서로의 개인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삼위일체의 모습을 닮아가게 될 것이다.”(Y. De Montcheuil).

 

삼위일체의 신비가 사랑으로 하나 된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이제 먼저 우리 가정에서부터 이루어지는 삶으로 삼위일체의 모습을 닮을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7)

-한상우신부-

하느님을
하느님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 삶의
전체가 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의 
삶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기쁘게
건네십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을
예수님의 삶에서
뜨겁게 보게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십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의
근원은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사랑은 이와같이
성자, 예수님의
관계맺는 사랑의 
삶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누고 함께하며
지속하는 사랑의
놀라운 속성입니다.

드러난 사랑은
우리 모두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성령의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이와같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우리들이
사랑을 위해
살아야 함을
가르쳐주며

그 사랑은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지는
구원의 은총임을
관계맺음 안에서
일깨워줍니다.

주어도
또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의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 사랑의 신비에
우리자신을 
맡겨드립시다.

삼위일체
하느님이시여
우리의 사랑또한
당신 안에서
온전케 하소서.

 

-오상선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성삼위 하느님의 현존이 가득합니다.

제1독서는 새 증언판을 받으러 시나이 산에 올라온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나타나시어 당신을 선포하시는 대목입니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탈출 34,6).

하느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한낱 인간이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면 허황된 자기 인식이나 착각 혹은 교만이 지나치다고 봐야지요. 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든 덕목의 최대치, 극대치가 곧 하느님의 속성이니까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그런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너무나"는 사실 "지나치다"는 의미가 내포된 단어라서 엄밀히 따지면 부정적 표현과 호응하는 수식어지요. 그럼에도 이 구절에서 "매우, 아주, 대단히" 등의 표현대신 굳이 "너무나"를 쓴 것은, 그만큼 "하느님 사랑"의 엄청난 강도를 강조하려는 의도 같습니다.

성삼위 하느님께서 성자의 강생을 결심하시고 강행하신 것은, 예수님을 당신들에게서 분리해 떼어내신 것이라기보다, 그렇게 세상에 보내져서 육화하신 예수님을 통해 당신들도 이 세상에 함께하시려는 마음이십니다.

성삼위 하느님은 예수님의 현존을 통해 이 세상에 함께하십니다. 또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지니고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 덕분에 성삼위 하느님의 사랑 또한 무한히 확장되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 사랑 안에 머무르려는 우리 모두가 감히 성삼위 하느님의 사랑 안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이 참여가 곧 구원이지요.

"하느님이 당신 아드님의 영을 너희 마음에 보내셨다. 그 영이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신다"(영성체송).

우리 안에 오신 성령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하느님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모르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지요. 성령에 힘입어 우리는 기탄없이 아버지를 부르고 마음을 송두리째 열어보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필요와 결핍을 더 잘 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 이름으로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 안에서 우리는 성삼위 하느님과 일치를 이룹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2코린 13,13).

미사의 시작 예식 때 자주 듣는 인사입니다. 얼마나 완전하고 충만한 인사인지요! 은총과 사랑과 친교는 우리를 성삼위 하느님 안에 머무르게 하고, 그분들에 맞갖도록 거룩하게 해 줍니다.

은총과 사랑과 친교는 우리 안에 심어진 하느님 모상성을 극대화하여 결국 우리를 하느님처럼 되라고 이끕니다. 우리 영혼은 교부들이 말하는 신화(神化, Deificatio)의 여정 안에 있음을 감지하고 전율합니다.

비록 삼위시지만 한분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성삼위 하느님을 사랑할 순 있습니다. 또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참여할 수 있지요. 성삼위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이는 세상 안에서 성삼위 하느님의 현존을 봅니다. 온 우주, 세상 곳곳을 가득 채우고 계신 하느님을 감지하고 소통하며 서로를 넘나들고 관통하지요. 충만함에는 빈곳도 경계도 없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한껏 사랑하는 행복한 축제의 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 기쁨과 평화 속에서 '신비'가 얼굴을 보여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벗님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예수님을 보내 주셨으니, 그건 벗님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랍니다. 그러니 벗님이 하실 일은 그 사랑을 믿기만 하면 된답니다(요한 3,16-18 참조). 하느님께서 특별히 그토록 극진히 사랑하시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따로가 아니라 함께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58407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6월 11일 삼위일체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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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행복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투자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습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아니 관계의 친밀도에서 옵니다. 관계의 친밀도는 내어줌의 정도에 의해 결정됩니다. 조금 내어주는 관계는 조금 깊은 관계이고 많이 내어주는 관계는 아주 깊은 관계입니다. 평생 친구 같은 친구 하나 없이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친밀한 관계를 맺어갈 것인지는 내가 관계를 위해 지옥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의 내어주심을 통해 우리도 삼위일체 관계에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관계를 통한 천국의 행복과 지옥의 고통은 세트 상품입니다. 사랑을 위해 지옥을 감수할 용기가 있다면 삼위일체 행복을 이 세상에서부터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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