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사람 대접을 받을 것 이다."
(마태5,17-19)
Whoever obeys and teaches these commandments
will be called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아우토반’이라는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독일의 고속 도로 이름입니다. 우연히 이 도로에서 운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길이 잘 닦여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운전자들이 추월선과 주행선을 확실하게 지키기 때문에 안전하게 10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운전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기회에 이집트에 갔습니다. 땅이 넓은 곳이라, 독일만큼은 아니지만 고속 도로가 어느 정도 잘 닦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운전자들은 차선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고속 도로임에도 무단 횡단을 하는 이들까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평균 60킬로미터 정도밖에 달릴 수 없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였습니다.
이 두 나라의 운전 상황이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도로 사정이 약간 다르기는 합니다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도로 규칙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도로 규칙은 사람들의 안전을 지켜 줍니다. 그리고 그 규칙 자체는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니 힘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지켜야만 하고, 힘이 없는 사람도 당당하게 운전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정녕 예수님께서는 율법 안에 사랑을 담아 그 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어 율법 안에서도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을 더 이상 우리를 옭아매는 덫이 아니라 온전하고 자유롭게 하느님 나라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징검다리로 삼게 해 주셨습니다. 유다인이든 이민족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말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형제님으로부터 “저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누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10분 정도 기다리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다시 만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면서 많은 예측을 합니다. 경제, 정치, 문화……. 그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것을 예측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단 한 번 본 것을 가지고서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을까요? 선거 때 보면 선거 전에 여론 조사를 몇 차례 합니다. 예측을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단 한 번의 예측은 부정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정확한 예측만을 계속해서 쏟아내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예측을 하며 말합니다. ‘너무 어려워.’, ‘안 될 거야.’, ‘못해’, ‘나는 부족해’, ‘소용없어. 그래봤자 달라지지 않을 거야.’ 등의 예측을 자신을 향해서 합니다. 그러나 이 예측이 틀렸을 경우가 더 많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전문가들의 미래에 대한 예측도 50% 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동전의 앞뒤를 맞추는 것보다 더 낮은 확률입니다. 이 낮은 확률을 왜 맞다고 생각하면서 단정을 짓습니까?
이런 잘못된 예측은 하느님께 대한 잘못된 예측으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의 뜻을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어떻게 정확하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마치 자신이 하느님 양 끊임없는 예측을 하면서 그것만 맞다고 단정 짓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잘못된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시고,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서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음을 말입니다.
예언서와 율법의 완성은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사랑이 예언서와 율법의 정신이고, 따라서 이 사랑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될 수밖에 없고, 사랑을 철저히 지키려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리게 될 것입니다.
잘못된 예측은 사랑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 대한 잘못된 예측을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철저히 적대적인 모습을 취했고, 그 적대적인 모습이 후에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했습니다.
섣부른 예측보다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아주 작은 사랑이라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 나라의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시련은 결국에는 축복이 되기 마련이다(리처드 바흐).
행동 자체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종종 “그 사람은 ~한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어떤 행동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행동만으로 그 사람을 정의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즉, “저 사람은 할 일을 뒤로 미루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은 할 일을 뒤로 미뤄요.”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 화장실을 갑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오줌싸개’라고 할까요? 아닙니다. 단지 화장실 가는 행동을 할 뿐입니다. 이렇게 행동 자체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경한 사람’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내 행동을 보고서 믿으라고 말씀하셨지요. 주님께서는 ‘~한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옳지 않음을, 대신 행동 자체를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율법은 사랑이라는 완전한 걸작과 같다
-전삼용신부-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거의 지옥이 없는 것처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있다고 하시는데 왜 어떤 분들은 없다고 가르치는 것일까요?
고해 성사를 할 때 어떤 신부님은 저에게 자신과 화해하고 화가 날 때는 화를 내고 성욕이 올라올 때는 굳이 막으려 하지 말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하시고,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라고 가르치십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루카 11,42; 마태 23,23)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지금 제가 십일조에 대해 말하면 마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가르치는 듯 이상하게 바라봅니다.
마치 지옥도 없다고 말하고, 화를 내도 되고 성욕도 좋은 것이라고 말하며 십일조와 같은 것들은 개신교나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자비로운 사제로 여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어쩌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왜 율법에서 아주 작은 계명이라도 소홀히 하면 안 될까요? 모든 율법을 하나로 모으면 ‘사랑’이란 한 자가 나옵니다. 즉, 율법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총합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이 표현된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니 율법 자체는 하느님처럼 완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모자이크나 훌륭한 작품에서 어떤 한 조각이 빠지면 완전한 작품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주 작은 율법이라도 어기거나 또 그래도 된다고 말하면 하느님의 모습을 그만큼 훼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자세로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사람이 가져간 작품은 무언가 빠져있거나 불완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작은 율법 가운데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만 지키고 나머지는 바꿔버리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교만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이 하느님의 생각보다 나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까지도 자기 뜻대로 변형시키게 됩니다.
5천 명의 시민이 사는 스페인 북부 작은 시골 마을 보르하의 한 성당에는 19세기 화가 엘리아스 가르시아의 벽화 ‘에체 호모(여기 사람이 있다)’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붉은 망토를 걸치고 가시관을 쓰고 깊고 그윽한 눈빛으로 하늘을 응시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매우 정밀한 걸작이었습니다.
그런데 히메네스라고 하는 할머니가 성당 청소를 하다가 습기 때문에 벗겨진 그 그림을 보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려진 예수님께 뭐라도 해 드리고 싶어서 벗겨진 부분을 물감으로 덧칠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예수님의 얼굴을 마치 원숭이처럼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이에 화가의 손녀에게 소송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습니다. 물론 이 사건이 신문에 나자 오히려 그 그림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려 시에 큰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하느님의 법을 우리가 수정할 수 있다고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지옥이 있다면 있다고 믿고, 십일조를 내라고 하셨다면 내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다면 그러려는 노력을 시작합시다.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가 그린 하느님의 법을 들고 올라가야 합니다. 저런 식으로 하느님의 법을 망쳐놓았고 그것을 가져간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율법은 하느님 본성인 사랑을 그려낸 걸작입니다. 거기에 인간이 손을 댔다가는 훼손만 될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새겨봅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조재형신부-
처음 외국에서 지낼 때입니다. 2005년이니까 15년 전입니다. 한국에서 당분간 지낼 수 있는 돈을 가져왔습니다. 교구에서도 매달 생활비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돈을 쓰기가 어려웠습니다. 분명 지갑에 돈이 있었는데 낯선 곳에서 지내는 두려움, 외로움 때문에 잘 쓰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은행 계좌도 만들었고, 한국 성당에 주일미사를 도와주었고, 강의를 다니면서 시간도, 여유도 생기면서 돈을 쓸 수 있었습니다. 돈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입니다. 삶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지금은 두 번째 외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월급도 나오고, 한국에서 쓰던 카드가 있어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여유롭게 돈을 쓰고 있습니다. 성격 탓인지 아직도 몇 번씩 생각해보고 마트에서 물건을 구입하기는 합니다.
군자는 중용의 삶을 산다고 합니다. 소인도 중용의 삶을 산다고 합니다. 군자의 중용이 시의적절한 중용이라면 소인의 중용은 무기탄의 중용이라고 합니다. 군자는 약속 장소로 가는 길이 범람해서 갈 수 없다면 강물이 낮아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소인은 약속했으니 불어난 강물을 건너다 위험에 처합니다. 군자는 쓰임과 재능과 본성을 알아보는 겁니다. 큰 기둥은 문을 부수는 데는 유용하지만 구멍을 막기는 어렵습니다. 쓰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리지만 쥐를 잡는 데는 고양이만 못합니다. 재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올빼미는 밤에는 작은 벌래도 볼 수 있지만 대낮에는 산도 보지 못합니다. 본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소인은 쓰임과 재능과 본성을 알지 못합니다. 소인은 열심히 달리지만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쓰임과 재능과 본성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도 중용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율법은 알았지만 율법의 진정한 쓰임을 몰랐습니다. 안식일을 지켰지만 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지 의미를 몰랐습니다. 단식하고 기도했지만 자신의 뜻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단식과 기도의 진정한 가치는 하느님의 큰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징표와 시대의 흐름을 아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의 어부에게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재능을 보셨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의 재능을 교회를 세우는 재능이 되게 하셨습니다. 부정한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을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죄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열등감 때문에 닫혀졌던 하느님의 모상을 사랑으로 깨우셨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게 하셨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중용의 삶이며,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 때 보는 세상은 예전에 보는 세상과는 다른 법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율법이라는 ‘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율법 앞에 무기탄의 중용을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라는 ‘틀’을 넘어 시대의 징표와 흐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앞에 시의적절한 중용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심판과 비판이 아닙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과 자비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구속과 억압이 아닙니다. 율법의 완성은 자유와 용서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
-이영근신부-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들과 다른 점을 하나를 들라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 하나를 들라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들과 구별 짓게 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이 강조하는 문자적 의미의 율법준수를 종종 거부하시곤 하셨습니다. 곧 안식일 법, 정결례 법, 단식 법 등을 지키지 않으시고, 또한 율법을 모세의 이름이 아닌 당신 자신의 이름으로 가르치시고, 죄의 용서를 선포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파괴자’라는 낙인이 찍히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폐지나 단절이 아닌, ‘율법의 완성’으로서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이는 복음을 예표하고 있던 구약의 율법이 이제는 복음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갈라 3,34)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줄 따름이었습니다.”(로마 3,20)
결국, 당신 자신이 구약이 지향하고 있는 종말론적인 목표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이는 율법의 단절이 아니라 영속성을 말해줍니다. 곧 율법이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불완전함이 보충되고 완전하게 되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는 율법이 당신의 가르침과 행위를 계속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가장 작은 계명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잘 지키는 데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먼저’ ‘지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지키는’ 것으로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곧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 지킴으로써 타인들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지켜질 때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성취되게 됩니다. 곧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 안에서 성취됩니다. 그러니 “스스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스로 지킨다는 것’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그리고 그는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마태 5,19)
주님!
제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 제 행동의 뿌리가 되게 하소서!
행동으로 가르치게 하소서.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파괴하지 않게 하소서!
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아 행하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큰 사람이 되십시오
-반영억신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되려면 아는 것을 제대로 사용할 때 힘이 됩니다. 실천이 없으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되고 맙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을 실천하여 하나라도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머리를 크게 하기 보다는 가슴을 키워야 하고 손발에서 열매를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고 하셨습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완전하게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이 사랑인데 그 부족한 사랑을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가르침과 삶,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13,10). 그리고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입니다(로마2,13).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의 핵심인 사랑을 살고 또 가르침으로써 큰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작은 것,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직은 것이라도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큰 사람처럼 보이려 하지 말고 정말 큰 사람이 되어합니다. 남을 위한 작은 배려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큰 사랑을 모아서 하려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성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삶을 잘 따라 살 수 있길 희망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업적을 쌓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억지로 마지못해서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지킬 것을 지키는,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는 가운데 큰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계명의 근본을 고수하는 기쁨 안에 머물기를 기도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과 율법
-송영진신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이 말씀은, 하느님의 계명과 율법들이 미완성 상태여서 그것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너무 부족하고 잘못되어 있는 상태여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가르치러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법을 폐지하고 당신의 독자적인 법을 세우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하느님 법의 실천’을 잘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오셨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바리사이파의 ‘율법주의’는 잘못된 신앙생활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겉으로만 보면 계명들과 율법들을 철저하게 지키는,
완벽한 신앙생활로 보이지만,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겉으로만,
또 형식적으로만 계명들과 율법들을 지키는 잘못된 신앙생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계명들과 율법들을 주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식일을 지킨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은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는 날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안식일을 정하신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율법주의적인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일 잘 지키고, 교무금 잘 내고, 판공성사 잘 보고, 단체 활동 잘하고...
그러나 이웃의 사정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가 복을 받아 누리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겉으로만 보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지만, 가장 중요한 사랑 실천은 없는...
그런 모습도 율법주의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법은 영원하다는 뜻이고,
또 아무도 그 말씀과 법을 마음대로 폐지하거나 바꿀 수 없다는 뜻입니다.
(폐지와 개정은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도 그 권한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했던 음식에 관한 율법들을
예수님께서 폐지하셨는데(마르 7,19), 그 율법들의 바탕이 되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5).” 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폐지하신 것은 아니고,
이 계명을 실천하는 방법을 올바르게 바로잡으신 것입니다.
십계명의 경우를 보면, 원래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이었던 제3계명을
우리 교회는 주일을 지키라는 계명으로 바꾸었는데,
예수님께서 주일에 부활하심으로써
안식일보다 주일이 더 중요한 날이 되었기 때문에 주일로 바꾼 것입니다.
이것은 안식일을 정하신 하느님의 뜻과 주일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뜻을
모두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 본래 ‘안식일의 정신’은
쉴 틈 없이 일만 해야 하는 노예들도 쉴 수 있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 그렇게 하여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4-15).”>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 말씀은, 계명들과 율법들은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똑같이 중요하니까, 똑같이 지켜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으로 구분해서,
덜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 것을 무시하고 안 지키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자기 혼자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도 그것을 시킨다면,
그것은 더 큰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 율법주의의 반대쪽에 편의주의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형식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신앙인으로서 실천해야 할 기본적인 의무들을 자기 마음대로 무시하는 것,
그것이 바로 편의주의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가, 아닌가? 를 판단하는 것은,
신앙인 자신이 마음대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여기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라는 표현 때문에,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신경과민증에 걸릴 정도로 세심하게 율법을 지키라고
강요하시는 것은 아닌가?” 라고 오해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니고,
인간들이 마음대로 계명들과 율법들을 분류하고, 무시하는 것을
금지하신 말씀입니다.
(“가장 작은 것 하나” 라는 말은,
“인간들이 자기 마음대로 가장 작은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 하나” 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가장 작은 것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라는 말씀과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 쏟아서,
계명이 큰 것으로 보이든지 작은 것으로 보이든지 간에,
하느님의 계명들을 모두 다 잘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작은 것’이라고 판단하고 무시하는 것은 사랑 없는 태도입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자세는 ‘정성’입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믿고 섬긴다면, 정성을 다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앙생활에 정성이 없다면 그것도 사실상 형식주의이고, 율법주의입니다.
무대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가들은
음 하나라도 틀리지 않으려고 엄청나게 집중합니다.
만일에 한 음이라도 틀리게 연주하면, 그 연주 전체를 망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바로 그렇게 집중하고, 바로 그렇게 정성을 다 쏟아야 하는 일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5,17-19: 새로운 정신과 옛 율법
율법과 예언서를 만드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를 통하여 이 모든 것을 완성하셨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사람들이 건네준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 “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고 하심으로써 모두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다. 그리고 이미 파스카 식사의 신비를 당신의 수난으로 완성하셨을 때 율법을 완성하셨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이 모든 것들은 아무리 작은 계명이라도 잘 보존하며 열심히 성실하게 가르쳐 하늘나라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작은 것들도 하늘나라라는 위대한 미래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말만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하다. 가르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르치려는 것을 행하여야 한다. 율법과 예언서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과 살아가는 일에 관한 법이 담겨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8절)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때, 그때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해주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옛것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는 율법에서 가장 작다고 여겨지는 것조차도 영적인 상징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의 가르침이 얼마나 참되며 거룩한지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해 알고 있다. 주님께서는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이신데 어떻게 실제로 행하지 않으실 수 있었겠는가? 그분은 당연히 율법의 가장 작은 것까지도 지키셨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는 하느님의 계명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주님의 계명을 가르치지만 지키지는 않는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무서운 경고를 담고 있다. 계명들 가운데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과 반대되는 법을 만들어 낸 자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뜻을,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법이란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공동 약속이다. 그리고 그것은 최선의 것은 아니다. 법은 어떤 최소한의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그것을 어기게 되면 불편해지는 것이 법의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법의 한계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기에 법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인간이 법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주의에 매여,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도 하고 그 때문에 마음의 죄를 짓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율법에 나의 이웃을 대입시키고 판단하는 그러한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좀 더 하느님의 눈으로 성서의 정신을 따라 인간을 생각하고 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율법주의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 17)
-한상우신부-
뒤집을 수 없는
삶의 질서가
있습니다.
생명에도
폐기할 수 없는
생명의
기본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그분과의 관계가
일회용 관계가
아니듯 일회용
율법이 결코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기본으로 지켜야 할
삶의 질서속에서
서로의 자리를
빛나게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무질서에서
질서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하느님을 향한
경외심을
되찾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으로
모호한 율법이
아닌 선명한
사랑의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생명의
고유성을
되찾는 여정이길
기도드립니다.
혼돈에서
질서를
완성하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단 한순간도
주님 사랑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사랑을
완성하시는
주님께
우리자아를
의탁합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말씀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웁니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서들을 완성하러 왔다고 선언하십니다. 기존 종교 지도자들과 결이 다른 목소리를 내는 예수님에 대해 의구심과 의혹이 술렁이기 시작하던 차입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은 절대 가치를 지닙니다. 다만 해석과 적용 과정에서 가중된 부수적 규정들에 본질적 정신들이 가려져 버렸지요.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계명이 사랑이며,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임을 몸소 보여 주실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마태 5,18).
그런데 예수님께서 율법의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시한을 언급하신 걸 보니, 율법이 영원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지면 율법도 변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예수님은 구약 성경이 당신에 대해 예언한 바를 모두 이루시고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희생제사를 바치십니다. 사랑만이 그 동기이고 목적이지요. 이제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는 새 이스라엘이 새 계약을 통해 주님의 백성이 됩니다. 율법은 이 모두를 준비하고 지탱하지요.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은 그러나 여전히 여정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새 하늘 새 땅에서 맞이할 새 예루살렘,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자들입니다.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는 성전이 없다고 합니다. 성전이신 분이 현존하시니 그렇습니다. 이어 묵시록 저자는 그 도성에 해도 달도 필요없다고 하지요. 빛이신 분이 계시는 그분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날이 오면, 율법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말씀이신 분이 현존하시는 앞에서 조례나 판례를 뒤적이는 건 좀 우스꽝스러울 것 같습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셨으니 이제 율법은 사랑이 되어 존재할 것입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마태 5,19).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그분 자신이 말씀이시고 사랑의 완성이시니까요. 예수님은 인간인 우리의 약함을 잘 아시면서도 우리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지키는 바를 가르치는 존재가 되길 바라십니다. 곧 사랑하고, 사랑을 전파하는 존재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를 제1독서에서 만납니다.
제1독서에서는 매우 극적인 장면이 벌어집니다. 사백오십 명의 바알 예언자들과, 단 한 명 남은 주님의 예언자 엘리야와의 대결입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1열왕 18,21)
엘리야가 먼저 온 백성에게 묻습니다. 야훼 하느님의 백성이면서 당장 이득만 된다면 적당히 다른 우상들을 기웃거리며 섬기는 행태에 도전장을 내미는 겁니다. 절뚝거린다는 표현은 두 다리의 균형을 잃은 모습을 희화한 것이지요. 앎과 삶, 지식과 실천, 신분과 태도가 통합되지 않으면 겉보기엔 제대로 걷는 듯해도 실은 영혼이 절뚝거릴 수 밖에 없습니다.
어제(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에서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도 같은 의미의 권고를 서간에 담았습니다.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말하고 마음으로는 세속을 원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라"고 하셨던 권고의 다른 표현으로 들립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것은 믿음과 실천의 일관성, 통합입니다. 그리고 사랑만이 이 둘을 아우르며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제가 당신의 종이며, 당신의 말씀에 따라 제가 이 모든 일을 하였음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1열왕 18,36).
엘리야의 고백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이루실 표징이 제 힘에 의한 것이 아님을 자신과 거기 모인 모든 이에게 선포합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그저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말씀에 따라 행하는 존재일 뿐임을 명확히 합니다. 말씀을 사는 사람의 근본 정신이고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말씀의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알게 된 사랑을실천하는 사람이지요. 그 자신이 곧 복음입니다. 말씀과 함께 하루하루를 사랑으로 엮어가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고 나누며 말씀의 향기를 퍼뜨리는 벗님은 진정 "하늘 나라의 큰사람"(마태 5,19 참조)입니다. 아멘.
소인배와 대인배
-김찬선신부-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큰사람과 작은사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큰사람이 허우대가 큰사람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
작은자가 되려는 프란치스칸이 경계하는 그런 큰사람도 아닐 겁니다.
우리 프란치스칸이 얘기하는 작은자는 세상에서 작은자라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큰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큰사람이겠지요.
실제로 복음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는 이런 뜻으로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루카 7,28)
그러나 이 세상에서도 큰 인물은 좋은 뜻입니다.
특히 소인배와 반대되는 뜻일 때 좋은 뜻입니다.
소인배란 도량이 작고 간사한 사람이라는 사전적 정의가 아니라도
우리에겐 즉시 목전의 작은 이익에 눈 먼 나쁜 사람이 떠오르는데
그렇다면 대인배, 큰 인물은 인장지덕목장지폐人長之德木長之弊,
곧 나무는 큰 나무 밑에 있으면 폐해만 입지만
사람은 큰사람 밑에 있으면 덕을 본다는 말이 있듯이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고,
공동선을 위해 자기의 이익쯤은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실 누구 덕분에 잘먹었다고 할 때처럼 덕이 많은 사람은
덕이 많기에 덕분德分할 수, 곧 덕을 나누어줄 수 있으며,
그러므로 큰사람은 덕이 많아 덕을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에서 큰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인장지덕이나 진배없습니까?
덕중에서 애덕이 많은 사람이라는 뜻에서는 진배없을 것입니다.
율법 학자가 주님께 와 율법에서 첫째가는 계명에 대해 물었을 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답하시는데
마태오복음에서만은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는 말씀을 굳이 덧붙이십니다.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을 위해 쓴 마태오복음은 율법이란
본래 사랑의 계명이라는 해석을 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주님도 율법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거나
율법을 잘 지키고 가르치는 사람은 큰 사람이라는 오늘 복음도
다른 복음에는 없고 마태오복음에만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율법을 잘 지킨다는 것은
율법을 하느님의 뜻, 곧 율법의 정신에 따라 지키는 것이며,
율법을 스스로 잘 지킬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까지 한다면
그런 사람은 큰사람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요즘 코로나 시점에서 소인배와 대인배를 생각해봅니다.
어제 수녀원 미사를 오면서 안양천을 걸어왔는데 엄청 더웠지요.
그 더위에도 대다수가 마스크를 충실히 쓰고 걷고 있는데
쓰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중에는 젊은 사람들의 비율이 높았습니다.
나는 건강하니까 옮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자신은 건강해도 남을 배려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사실 랑만큼 배려하는 법이고,
사랑이 큰만큼 작은 것까지 배려하는데 대인배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소인배는 남을 위한 배려가 없음은 물론 고려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 안에 자기밖에 없는 사람은 작은 사람이고,
자기말고 수많은 사람이 있는 사람이 큰사람임을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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