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30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21,20-25)
Jesus said to him,
“What if I want him to remain until I come?
What concern is it of yours?
You follow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요한 복음에 나타나는 ‘사랑받는 제자’는 1세기 말엽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의 본보기가 되는 상징적 존재입니다. 사랑받는 제자는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습니다. 요한 복음 1장 18절의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이라는 구절에서 ‘가장 가까운’으로 번역된 그리스 말을 직역하자면 ‘가슴에 기대어’입니다. 말하자면, 사랑받는 제자의 모습이 곧 이 세상에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모습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또 다른 그리스도’라고 하지요. 예수님처럼 살아갈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지니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증거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과 말로써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세상에 또다시 살아 계시고 활동하시며 가르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모든 일에서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것은 자신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행여 누군가가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조금이라도 기뻐하거나 행복해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께 참으로 값진 예배를 드린 것이 됩니다. ‘증거의 삶’은 어렵지 않습니다. 나의 일상이 예배가 되는 길은 그리 복잡하거나 까다롭지 않습니다. 그저 지금 하는 일들을 하느님 마음에 드시도록 정성을 다하여 차근차근 성실하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이라도 정성껏 하는 모든 일은 사랑받는 제자, 곧 ‘또 다른 그리스도’의 일이 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한국은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경쟁이 치열한 나라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창 놀아야 할 어린이까지 이 경쟁의 무대에 올라가서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고, 각종 학원을 섭렵합니다. 신부가 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서울에서 어떤 교육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은 2등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1등만이 기억되고 살아남았습니다.”
이 강사는 당시 유명한 컴퓨터 잡지의 사장님이었고, 실제로 이 잡지는 업계에서 항상 1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잡지를 20년이 지난 지금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몇 년 뒤에 폐간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2등이었지만 사람들이 아직도 기억하는 잡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출판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2등도 기억됩니다. 또 2등도 살아남습니다. 1등만이 최고라 생각하는 경쟁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오래 그리고 꾸준한가가 중요합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반짝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떤 형제님께서 “신부님, 제가 그래도 어렸을 때 복사도 서고 정말 열심히 성당에 다녔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지금은요?”라고 물으니, “지금은 사는 게 바빠서 못 다닙니다. 냉담 중이죠.”라며 겸연쩍은 표정을 짓습니다.
신앙도 꾸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반짝이는 1등보다, 그렇게 특출나게 보이지는 않아도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하면서 꾸준히 주님과 함께 하는 이를 기억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어떻게 되겠는지를 묻습니다.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라는 의문을 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에 대해 부러운 마음에 그런 질문을 던졌을까요? 아니면 오지랖이 넓어 주변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그랬을까요?
이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후 베드로가 담대함을 지니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선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교회의 반석이라는 영예를 얻었고, 또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이런 영광을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았습니다.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냐고 자신이 직접 말하지 못하고,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물어보라고 시킬 정도로 소극적이었습니다. 또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했던 그가 예수님께 다른 제자에 대해 직접 질문합니다. 이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족함 투성입니다. 그래서 지금 모습은 분명히 1등이 아닙니다. 그러나 꾸준히 주님의 뜻을 따라가면서 자기 자리에 충실할 때, 우리 역시 주님께서 기억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편견을 비난하지만, 아직은 모두가 편견을 가지고 있다(H.스펜서).
편가르기는 이제 그만!!
국회의원 선거에서 어느 지역구에서 여당 의원이 이겼습니다.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했지요.
‘하느님은 여당을 지지하는구나.’
여당 지지자는 기뻤고, 야당 지지자는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지역구에서는 야당 의원이 당선된 것입니다. 이번에도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께 묻습니다.
“하느님은 어느 편이세요?”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람 편이다.”
이럴 것 같습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상관없이 남을 위해 일하겠다는 사람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쳐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것에 너무 익숙합니다. 자신의 편이 아니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것으로 생각하며 틀렸다고 말합니다.
이 모습이 하느님께 틀렸다며 따지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하느님은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정치 성향에 흔들리지 않으며, 외적인 모습, 소유하고 있는 부, 세상의 지위에도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유일한 흔들림은 ‘사랑’ 때문입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인해 하느님은 계속해서 흔들리십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편 가르기보다 인간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완벽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완벽해질 수 있습니다.
사랑을 지속하려면 의지를 주는 제삼자가 필요하다
-전삼용신부-
윌리엄 보드는 억만장자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큰 낙농 회사를 경영하고 있을 때 태어났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아버지는 세계 여행을 시켰습니다. 온 세계를 알려 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여행 중에 그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행 중에 그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저는 복음 전파를 위하여 모두를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성경 앞에 썼습니다.
“남김없이”
예일 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주님을 위하여 남김없이 온전히 헌신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주님만을 사랑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예일 대학에 입학한 후 친구 한 명과 아침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단둘뿐이었습니다. 대학교에 다니면서 그는 뉴헤이븐 거리를 방황하는 노숙자들을 돕기 시작하였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노숙자, 홈리스 피플을 돕는 예일 호프 미션(Yale hope mission)이란 단체를 세웠습니다. 4년 후 윌리엄 보드가 졸업할 때에는 이런 모임이 대학교 안에 1,000개가량 되었습니다.
대학재학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많은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습니다. 졸업하면서 이렇게 일기를 썼습니다.
“늘 나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에게 순종하리라.”
그리고 성경 뒤에 이렇게 썼습니다.
“후퇴 없이”
뒤돌아보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중국 간수성에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중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중국어를 배우고, 이슬람 선교를 위하여 아랍어를 배워 이집트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풍토병에 걸렸습니다. 천수막염이라는 병이었습니다. 그는 카이로에서 25살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곳에 묻혔습니다. 예일 대학에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학생이 수천 명이 되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성경에서 세 문장이 발견되었습니다.
“남김없이”(No Reserves)
“후퇴 없이”(No Retreats)
“후회 없이”(No Regrets)
사랑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요? 사랑은 분명 단순한 감정이나 상대가 나에게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요한에 대해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대에 대한 관심표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관심을 상대에게 두기보다는, 상대가 어떠한 상태더라도 참고 사랑할 수 있도록 자신을 다잡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세 번씩이나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다음 이야기입니다. 세 번씩이나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 양들을 돌보라고 하십니다. 양을 치는 마음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위해 먼저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목적을 양들에게 두지 말고 당신께 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랑은 둘의 행복을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 자신들만을 위한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런 사랑은 감정이 위주가 되는데, 사랑의 감정은 금방 식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위해 제삼자가 필요한 이유는 그 제삼자가 사랑에 ‘의지’를 불어넣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부가 이혼하고 싶은데, 아프신 부모님이 계신다면 그 부모님을 위해 조금 더 참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의지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사라지게 됩니다. 혹은 자녀들을 위한 사랑이라면 자녀가 결혼할 때까지만 참아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사랑의 의지를 죽기까지 일으켜줄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그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사랑한다면 죽기까지 지속하는 ‘사랑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양들을 사랑하는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였습니다. 그렇게 상대보다는 하느님을 위해 사랑할 수 있기에 양 떼를 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한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 합니다. 마치 두 기찻길의 선로가 공통된 목적지가 없다면 서로 만나버리거나 갈라져서 어떤 기차도 다닐 수 없게 됩니다. 둘이 명확한 목적지를 향하고 있다면 선로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그 위에 기차가 다닐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의 목적을 하느님께 둡시다. 그러면 어떠한 시련도 참아내며 끝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상대도 그런 마음이라면 둘의 사랑은 영원할 것입니다. 사랑은 의지로 이루어져 있고, 그 의지는 그 사랑을 보증해주는 제삼자를 통해 생겨납니다. 사랑이 영원하려면 그 제삼자를 영원한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면 이웃에 대한 사랑도 영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요한복음으로 성서공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로 등장합니다. 요한은 ‘이 제자’라고 이야기됩니다. 이는 요한복음을 쓴 사람은 ‘이 제자’라는 말을 한 사람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에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는 요한복음을 쓴 공동체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다른 관점에서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점이 다를까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으로 표현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고, 말씀이 하느님이셨다고 이야기합니다. 토마 사도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나와 하느님은 하나입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공동체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는 착한목자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입니다. 나는 세상을 이겼습니다.’ 이런 표현은 공관복음에서는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요한복음은 일관되게 복음서를 쓴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알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주는 물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죽었던 나자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세상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지혜’가 세상을 구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교회 안에도 영지주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런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여겼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서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성서를 읽고 묵상하며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서도, 아테네에서도,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삶으로 실천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이웃에게 전한다면 우리의 삶은 ‘가브리엘행전, 요한행전, 바오로행전, 베드로행전, 안나행전, 마리아행전, 글라라행전, 리디아행전’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행전을 쓰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는 신앙생활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첫째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근심, 걱정은 모두 버려두고 살아야 합니다.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면 봄의 아름다움을, 철쭉의 싱그러움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대인들의 고소로 죄인이 되어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감옥에 갇혔었고, 나중에는 군인들이 지키는 가택연금을 당했습니다. 2년 동안 가택연금을 당하면서도 바오로 사도는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가택연금 중에도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과 같습니다. 때로 시련의 비가 내리기도 하고, 고통의 파도가 밀려오기도 하고, 고독과 외로움의 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그럴 때 일수록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면 우리는 구름에 가려진 태양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의 파도를 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멀리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산에 있는 꽃들은 멀리서 볼 때 더욱 아름답습니다. 멀리서 바라볼 때 구름, 바람, 시냇물과 조화를 이루는 자연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너무 가까이서 보면 미처 피지 못한 꽃도 있고, 색이 바란 꽃도 있고, 이미 시들은 꽃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얼굴도 비슷합니다.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삶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주름도 있고, 점도 있고, 작은 상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웃도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허물과 단점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꽃은 분석하고 나누고 평가하면 그 아름다움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만나는 이웃을 평가하고, 분석하여 판단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그 안에 숨어있는 가능성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시적인 측면도 필요하겠지만 거시적인 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의로우신 주님은 의로운 일을 사랑하시니, 올곧은 이는 그분 얼굴 뵈오리다.”
요한에게는 요한의 길이 있고,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의 길이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제자들을 떠나가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수제자 베드로 사도를 향해 꽤나 의미있는 말씀, 그러나 알쏭달쏭한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 복음 21장 18절)
요한 복음사가 해설에 따르면 위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랍니다. 베드로 사도의 운명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미래와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은 수수께끼 같습니다. 단 말씀의 분위기를 봐서 편안한 죽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 확실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끝난 이후부터 베드로 사도의 행적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전해 주지 않습니다. 나머지 행적을 밝혀 줄 수 있는 정확한 자료가 없기에, 전승이 전하는 이야기들을 토대로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추정컨데 베드로 사도는 안티오키아, 코린토 등 여러 지역으로 선교 여행을 다녔을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 사도는 생애 마지막 시기를 로마에서 보내셨습니다. 네로 황제에 의해 자행된 대박해 때 체포되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셨다고 전해집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 사도는 엉뚱하게도 사도단 안에서 언제나 앞서거니 뒷서거니 했던 경쟁자이자 절친이었던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다시 말해서 요한 복음사가의 운명에 대해 질문합니다. 그게 몹시 궁금했던가 봅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복음 21장 21절)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미래에 대해서 알쏭달쏭 수수께기 같은 대답을 하셨던 것처럼, 요한 사도의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복음 21장 22절)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호기심을 반기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종착점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그 사람 운명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 인간 각자는 저마다 지닌 역량이 다르고, 부여받은 사명이 다릅니다. 궁극적인 도착점은 동일하지만 목적지로 나아가는 길은 조금씩 다릅니다. 요한에게는 요한의 길이 있고,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의 길이 있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 눈을 의식하거나 눈치보지 말고 당당히 우리 각자의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돌아보니 주변 사람들 의식하느라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피곤하게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들 눈치보고, 다른 사람들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며 살다보니, 내 삶에 나도 사라지고, 주님도 사라져버린 어색한 삶을 꾸역꾸역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 인생은 그 사람에게 맡겨야겠습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 인생도 주관하시고 안배하시니 대폭 신경을 꺼야겠습니다. 엉뚱한 곳으로 분산되는 에너지들을 대폭 줄여야겠습니다. 대신 내 삶을 좀 더 주도적으로, 좀 더 충만히 살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이영근신부-
오늘 우리는 내일 성령강림대축일을 앞두고 부활시기를 마무리 합니다. 그동안 부활시기 내내 요한복음 13장 후반부부터 시작되는 다락방 고별담화와 예수님의 기도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호숫가에서 나타나시어 아침을 차려 먹이시고, 베드로에게 세 번이 사랑을 확인하신 후에 사명을 맡기시고, 베드로의 장래를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곧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 21,18)라고 하시며, 그가 순교 당하여 죽게 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은 사도 요한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장래에 대한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장래에 대해서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할지라도 ,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요한 21,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오해를 불러일으켜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는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으로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사가는 초대교인들에게 그 진원지를 밝히면서 이러한 소문이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우쳐줍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참 아이러니하고 재미난 내용을 드러내줍니다. 곧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랑을 확인까지도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다른 제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베드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오랜 고향 친구입니다. 그러니 그의 장래가 궁금한 것은 당연할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아마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혹은 찬구를 경계하거나 비교하거나 경쟁하는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여기서 베드로는 요한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곧 “요한을 위해서 묻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요한을 무척 사랑했고, 또한 그들의 친밀한 관계는 사도행전 2-4장과 요한복음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면서, 본문에서 베드로는 전에 최후만찬에서 배신자에 대해 예수님께 직접 묻지 못하고 요한을 시켜서 물었기에, 이제 요한을 위해서 호의로 직접 묻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고 하십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일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베드로는 벌써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목숨을 내놓고까지 따르겠다고 하고서 이미 세 번이나 배신하고 도망가지 않았던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를 호숫가에서 제자로 부르실 때에도,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올라갈 때에도, 부활하시어 나타나셔서도, 오늘 <복음>에서도 여전히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죽을 것입니다. 곧 베드로는 증거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증언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는 활동의 사목직을 요한에게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관상의 역할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한 베드로에게는 교회를, 당신이 사랑하신 요한에게는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주님!
길을 가다가 멈추지 않게 하소서! 멈추다가 떠밀려가지 않게 하소서!
떠밀리다가 뒤로 휩쓸리지 않게 하소서! 휩쓸리다가 가야할 길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을 따라 가게 하소서! 눈길을 돌리느라 옆길로 새지 않게 하소서! 자신을 따르느라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고, 당신만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쓸모없는 호기심은 걸림돌이다
-반영억신부-
“남의 떡은 더 커 보인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 것보다도 남의 것이 훨씬 더 좋아 보인다.’는 말입니다. 자기 것에 만족하고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과 비교하며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허세를 떨기도 하고 분수없이 지낼 때가 있습니다. 잘 보이려 하지 말고 지금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이 아름답건만 그것이 마음 같지 않아 힘들어 합니다. 나는 나의 삶을 사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그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해 주면 속을 끓일 이유가 없건만 안타까움이 큽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운명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던 사람입니다(요한21,20). 그런데 그 제자는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21,21)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일생이고 너는 너의 갈 길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나를 따라라.”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 제자가 나의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비교하지 마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각자가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이 있고 탈랜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길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베드로가 다른 제자의 운명에 관심을 갖는 것은 동료애를 발휘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쓸모없는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기서 영원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지나친 호기심은 걸림돌일 뿐입니다. 그것은 상관을 넘어서서 간섭을 하기에 이릅니다. 우리와 상관없는 일을 끌어안고 괴로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루카9,62) 되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흔들림 없는 나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걷는 발걸음에 복이 넘치시길 기도합니다. 요한복음의 핵심주제는 “서로사랑하자.”로 요약됩니다. 우리 삶을 사랑으로 물들이고 그 길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구원은 다른 사람의 삶에 끼어들어 비교하고 험담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따라라”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송영진신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 희생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일이
보잘것없는 죄수가 처형당한 일로만 보였겠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희생과 헌신이었습니다.
여기서 ‘밀알’은 예수님을, ‘많은 열매’는 구원받게 된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순교자들의 순교에도 자주 적용됩니다.
순교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일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심어진 일이고, 박해와 순교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인이 더 많이 생기고,
교회가 더 발전한 일은 그 밀알에서 많은 열매가 나온 일입니다.
관점을 조금 바꿔서, 이 말씀을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밀알 하나를 땅에 심는 것은 육신적이고 현세적인 것을 포기하거나
희생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풍성한 은총을 받으면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육신의 목숨을 바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원래 뜻인데,
목숨을 바친다는 말을 꼭 실제로 죽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고,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육신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많은 열매’ 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좋은 땅’이 많은 열매를 맺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14-15).”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가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 같은 것만 신경 쓰다가
숨이 막히는 것은, “밀알 하나를 땅에 심지 않고
한 알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면서 실천하고
인내하는 것은 “밀알 하나를 땅에 심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열매를 얻고 싶으면 씨를 심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 지금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즉 자신의 모든 것을 땅에 씨로 심는 생활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이 말씀의 뜻은, “육신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않으면,
그것들을 모두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도 얻지 못하고,
그 애착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이 공관복음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5-26)”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그것이 영원한 생명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쓸모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가장 귀한 것 하나를 얻기 위해서
쓸모없는 것들을 모두 버리는 생활입니다.
버리지 않으면 얻지 못합니다.
순교자들은 버려야 할 것들을 버려서 얻어야 할 것을 얻은 분들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6).”
이 말씀이 공관복음에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을 따라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말씀이고, 공관복음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섬긴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묵시 22,3-5).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나의 뒤를 따라와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도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린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존중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그 삶이 대단히 영예로운 삶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누리시는 영예와 영광을 함께 누리는 삶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려면
자신을 버려야 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말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버린다는 뜻이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어려움들을 참고 견딘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버리지 않고, 십자가를 지는 일도 없이,
그냥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수는 없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일”과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은
따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일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 자체가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만일에 자신을 버리지도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도 없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과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신앙인들을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구경꾼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구경꾼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살다가는 저쪽 세상에 가서도 하느님 나라를 밖에서 구경만 하고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21,20-25: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
예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나를 따라라”(19절) 하셨을 때 베드로가 돌아다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따라오는 것을 보고,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1절) 하고 물었을 때,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22절) 라고 하신다.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속세의 악을 견디는 일에서 당신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나를 따라라.”고 하신다. 요한에 관해서는 영원한 행복을 되찾아 주시기 위해 당신이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하신다.
행동적인 신앙은 주님의 수난의 본을 보고 완전하게 배웠으니 주님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지금 막 시작된 관상은 주님께서 오셨을 때 완전하게 될 것이기에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견디어 내는 신심은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따르지만, 지식의 충만함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채워지며 그때야 완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다.”는 말은 요한이 죽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는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다. 즉 지금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완성된다는 의미이다.
요한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요한은 죽었다. 외경에 보면 요한은 자신의 무덤을 마련하라고 했는데, 아직 요한은 건강했다고 한다. 무덤이 세심하게 마련되었을 때, 요한은 마치 침상에 눕듯 몸을 누이고는 곧바로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소문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요한이 실제로는 죽지 않고 죽은 듯이 보이는 상태로 누워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무덤에 안장하고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요한은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신 뒤로 73년을 더 살며 트라야누스 황제 때까지 살다가 다른 사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 평화롭고 평온하게 하늘나라로 떠났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요한이 오래 살아 내가 올 때까지 지상에 남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해도 너는 그것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마라. 너는 너의 것, 곧 네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나를 따르기나 하여라.’라고 하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온 세상도 다 담아내지 못할 만큼 많은 일을 기록할 수 있었지만 단 한 권의 복음서만을 남겼다. 요한은 묵시록도 썼으며, 또한 매우 짧은 서간도 한 편 남겼다. 지금 성경에 있는 세 편의 서간은 모두가 요한의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세 편을 다 합쳐도 100줄이 되지 않는 글이다. 이 복음을 자신이 썼다고 드러내는 이유는 그는 복음을 제일 마지막으로 썼고 복음을 쓴 이유가 그분이 자기를 사랑하셨고 자기 기록이 믿을만한 것이며, 이 일을 하게 된 것은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25절).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만물을 지혜로 창조하셨으며 그분의 지혜는 한계가 없으므로(시편 147,5 참조) 한계가 있는 이 세상은 무한한 지혜에 관한 이야기를 자기 안에 다 담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한계가 있는 우리 인간의 지성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여야 한다. 끊임없이 말씀을 실천할 때 우리는 궁극적인 유익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것들을 잘라 버리고 선을 실천하여 성숙해짐으로써 자신을 밝게 하고 시야를 넓혀야 한다. 그리하여 구원 자체이신 주님을, 하느님을 차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삶을 주님께 청하며 오늘을 봉헌하자.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요한 21, 22)
-한상우신부-
정말 중요한
관계를 놓치며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주님이 빠진
자리에는 언제나
서로를 탓하며
등돌리는
어리석음만
있을 뿐입니다.
중지될 수 없는
하느님과 우리의
생생한 관계입니다.
소중한 관계를
끊어지고 갈라지게
만드는 장본인또한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에
정직해지는 것이
상대를 탓하는
비겁함과 무책임에서
벗어나는 참된
길이 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길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길
기도드립니다.
참된 관계의
본질을 이해하는
출발점은 언제나
기도임을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성령 강림 대축일을 하루 앞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성령께서 주실 은사를 잘 받을 수 있도록 우리 각자를 준비시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부활하신 예수님께로부터 방금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7)는 명령을 받은 베드로의 눈에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가 들어옵니다. 누구보다 예수님 가까이에서 그분 마음을 듣던 제자였지요. 평소 베드로가 그에 대해 어찌 느꼈는지 모르지만, 오늘 이 질문에서는 속내가 살짝 드러납니다.
어쩌면 동료인 그의 미래에 대한 염려일 수도 있겠고, 자신보다 영적으로 우월한 듯 보이는 그에게 평소 느낀 열등감과 비교의식일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일 수도 있겠지요.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베드로의 의중이 뭐가 되었든 예수님은 그의 속을 꿰뚫어 보십니다. 무슨 상관이냐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잘못 받아들이면, 그동안 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상충되는 것처럼 들리지요. 하지만 이는 유기체이고 한 몸의 지체인 형제적 관계성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뜻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압니다.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나 교회 공동체에서까지 비교와 키재기에 지친 우리에게 죽비와 같은 말씀입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에게 맞게, 요한에게는 요한에게 맞게 달란트와 은사를 베풀어 주셨지요. 주님의 일을 수행할 몫이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주님을 따를 때, 베드로는 자신의 개인 소명에 맞게, 요한은 요한의 개인 소명에 맞추어 나아가면 됩니다. 이 개별성과 고유성은 이기주의나 개인주의와 다릅니다.
우리 각자는 자기가 받은 은사에 따라 고유하게 주님을 섬기면 됩니다. 사심 없이 자신의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영혼은 비슷한 마음을 지닌 영혼들과 불협화음을 일으키지 않고 협력할 수 있습니다. 반면 시기와 질투, 비교의식에서 정화되지 못한 불경한 곁눈질은 그 대상보다도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지요.
제1독서는 사도행전의 끝 부분으로, 이방 지역이면서 당시 정치, 군사, 문화의 중심지였던 로마에서 이루어진 사도 바오로의 적극적인 복음 선포 활동을 서술합니다.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사도 28,30).
황제에게 상소한 죄수 처지라 가택연금 상태이긴 하지만, 사도 바오로는 큰 방해 없이 자신의 사명을 수행합니다. 곧 "모든 사람"이 선교 대상입니다. 주님께 이방인을 위한 도구로 선택받은 그는 민족이나 혈통, 율법이나 할례의 굴레를 뛰어넘어 제 몫의 은사를 완성해 갑니다.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사도 28,31).
자기 영광과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담대하다고 하지 않고 뻔뻔하다고 하지요. 이 뻔뻔함은 확실히 담대함과 질적으로 다른 기운입니다. 담대함은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이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힘입니다. 바오로는 동족의 손으로 이민족에게 넘겨져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처지에서도 자신의 소명에 매진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성령께서 우리 각자에게 맞는 은사와 열매를 가지고 오십니다. 우리의 개인 소명은 교회 전체의 보편적 소명 안에서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이 고유성은 타인과 비교해서 우열을 가릴 필요가 없지요. 다름과 다양성이 오히려 교회를 더 풍요롭고 충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달라서 고맙고, 고유해서 아름다운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저마다 제 자리에서 제 색깔과 제 향기로 주님께 영광 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소서, 성령님!
상관해야 할 것과 상관치 말아야 할 것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55625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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