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5월 29일 금요일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Margaret K 2020. 5. 28. 18:56

2020년 5월 29일 금요일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26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사람은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 대로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그대로 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바라는 예수님을 만들어 냅니다. 잘못된 신앙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돌아가심으로써 세상에 생명을 주셨는데, 우리는 죽어 가는 길을 살고자 하는 길과 대척점에 놓고 늘 죽음을 회피하고는 합니다. 
김영민 교수가 쓴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게 좋다’라는 칼럼이 있습니다. 아침부터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테지요. 김영민 교수는 살고자 아우성치는 우리 한국 사회가 죽음의 문화에 무참히 갇힌 이유를 역설적이게도 죽지 않으려는 오만과 탐욕의 결과로 봅니다. 오히려 죽었다 생각하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 살려고 바둥대다 보면 서로를 죽이게 됩니다. 서로 움켜쥐려고 애쓰다 보면,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고 미워 보이고 심지어 해치고 싶은 마음까지 가지게 될지 모릅니다. 밀알이 되어 죽어 가는 것이 오히려 우리를 살리는 일이라는 사실은 명확합니다. 
우리 나라의 수많은 순교 성인들의 생애가 그러할 것입니다. 남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 세상의 생명은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굳이 어려운 일을 찾기보다 지금 나의 자리에서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여유를 지녔으면 합니다. 이것만이 아닌 다른 무엇이 있음을 생각하는 여유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이 세워 놓은 탐욕을 없애고 다른 이와 함께 나눌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서로 팔짱을 끼고 아주 천천히 걸어가는 노부부를 봅니다. 그래도 건강해 보이는 할아버지와 달리, 지팡이를 잡고 계신 할머니께서는 거동이 불편해 보입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팔짱을 끼워 불편한 몸을 대신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참 보기에 좋았습니다. 물론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 모습은 저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제 옆에 있었던 한 젊은 연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 할아버지, 할머니. 너무 멋지다.”

사랑은 이렇게 함께 걸어갈 때 멋지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만약 각자 따로 걷는다면 어떨까요? 자신은 건강하다고 할아버지가 할머니보다 5m 앞서간다면 어떻게 보일까요? 그러면서 왜 이렇게 천천히 오냐면서 소리를 지른다면, 이 모습은 결코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과도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걸어가는 모습만이 아름답고 멋진 모습으로 보이게 됩니다. 따라서 세상일을 해야 한다면서 앞서서 가면 안 됩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먼저 채워야 한다면서 함께 하는 것을 거부해서도 안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분을 초대해서 팔짱 끼고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아름답고, 멋져 보입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124위 순교 복자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순교자들은 어떤 분인가를 묵상해 봅니다.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길이 아픔과 상처를 가져다주더라도 주님과 함께라면 상관없다며 기쁘게 가는 사람입니다. 

순교자들은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하나의 밀알로 봉헌해서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 결과 이 땅에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숫자만 생각해봐도 순교자들의 피가 어떤 영향을 가져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세워진 많은 교회 건물을 봐도 그들의 피가 절대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 순교자들의 이 모습을 기억하면서 지금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멋진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나요? 세상일에 대해서는 앞장서서 나의 영광만을 드러내려고 하고, 어렵고 힘들 때는 주님만을 내세우면서 피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과 함께 걷지 못하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과거 자랑스러운 우리 순교자들의 모습을 본받아,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멋진 신앙인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분명 아름답고 멋진 삶입니다.

남들보다 잘 하려고 고민하지 말라. 지금의 나보다 잘하려고 애쓰는 게 더 중요하다(윌리엄 포크너).

 


인간으로 사는 길.


인간과 동물은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가장 큰 차이점에 대해 어느 철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가 죽는 것을 모르는 동물 같은 사람이 되어 가는 것만 같습니다. 죽은 후에 자기가 가지고 갈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이 세상에서 남긴 사랑뿐입니다. 이 사랑을 보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고 주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죽는다는 것을 아는 우리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겠습니까? 자기가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에 모든 힘을 기울이는 모습은 결국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면 최고라는 생각, 남을 밟고 그 위에 올라가는 것이 능력이라는 생각 등은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본연의 모습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인간으로 사는 길입니다.                   

 

미워하란 말은 흘려보내란 뜻이다

-전삼용신부-

 

2014년 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광화문광장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주님의 종들을 복자품으로 올렸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많은 성인이나 복자들의 삶은 우리가 세세히 잘 알지는 못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윤지충 바오로가 어떠한 분이신지, 왜 124위 한국 복자들의 대표가 되었는지는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는 누구일까요? 이승훈 베드로입니다. 그렇다면 최초의 사제는 누구일까요? 당연히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는 누구일까요? 바로 윤지충 바오로인 것입니다.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함께 순교하였지만 아무래도 윤지충 바오로가 더욱 용맹하였고 먼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기에 복자들 중 첫째로 놓은 것 같습니다.

 

      윤지충 바오로가 순교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사’ 때문이었습니다. 제사 문제가 불거지고 교황청에서는 공식적으로 제사를 금지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양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윤지충 바오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위폐를 불살라버리고 천주교 예절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전라 감사가 그를 문초할 때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그것을 부모처럼 공경했다면, 땅에 묻는 것은 혹 그렇다 치더라도 어찌 불사를 수 있단 말이냐?”

그러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그것을 부모처럼 공경했다면 어떻게 그것을 불사를 마음을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신주에는 제 부모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알기 때문에 불사른 것입니다. 그것을 땅에 묻든 불사르든 먼지로 돌아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매를 맞아 죽어도 천주교를 버리지 못하겠느냐?”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갈 수가 있겠습니까?”

      전라 감사는 윤지충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문을 당할 때 피를 흘리고 살이 터지면서도 찡그리거나 신음하는 기색을 얼굴이나 말에 보이지 않았고, 말끝마다 천주의 가르침이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임금의 명을 어기고 부모의 명을 어길 수는 있어도 천주의 가르침은 비록 사형의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코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니, 확실히 칼날을 받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뜻이 있었습니다.”(「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791년 12월 8일 윤지충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얼굴로 군중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하면서 씩씩하게 나아갔다고 합니다. 그의 나이 33세였고 “예수, 마리아”를 여러 번 부르며 태연하게 칼을 받았고, 9일 만에 친척들이 시신을 거둘 수 있었는데 몸이 전혀 상하지 않았고 방금 피를 흘린 것처럼 형구에 묻은 피가 선명했다고 전합니다. 그 피를 닦은 손수건을 만진 이들의 병이 나은 일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목숨을 저렇게 버리는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한 것일까요, 미워한 것일까요?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기에 이웃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요?

 

      사람은 자기 목숨과 자기 자신이 같은 것이라 혼동합니다. 목숨은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아 소유한 것입니다. 목숨을 잃어도 자신은 남습니다. 목숨은 피입니다. 피를 자기 자신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피는 생성되었다가 죽는 것을 반복합니다. 만약 피를 좋아해서 자신 안에 모아두려고 하면 썩어서 자기 자신을 죽이게 됩니다. 따라서 피를 몸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생명도 흘려보내야 자신이 살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생명을 미워하라는 것입니다. 부모, 형제를 미워하라는 말은 붙들고 있지 말고 흘려보내란 뜻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맏아들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며느리에게 흘려보내지 않아서 며느리도 죽고 자신도 아들의 사랑을 잃게 된 예화를 제가 자주 씁니다. 이것이 생명과 같은 자녀를 붙들어놓으려고 해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미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 안에 사랑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미워하라는 말은 세속적인 미움이 아니라 ‘흘려보내라’라는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란 책에서 선물 받았던 난을 흘려보내니 그렇게 마음이 편했다는 것처럼, 내가 가진 모든 것, 그것이 생명일지라도 그것을 흘려보내야 많은 열매를 맺고 자신도 영원한 생명을 계속 공급받게 됩니다. 피가 흐르지 않고 죽지 않으면 새로운 피가 생성되지 못합니다. 영원히 살고 싶다면 지금의 생명이 썩지 않게 이웃에게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또한, 내가 흘려보낸 목숨으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건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시 얻는 방법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미워하는 것뿐입니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그리고 이들 중 5(이일언, 신태보, 이태권, 정태봉, 김대권) 1839년 전라도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날입니다. 이들은 한국초기교회의 순교자들로서, 시대로는 오히려 103위 성인보다도 앞서 사셨던 분들입니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는 병인박해 순교자 103위를 시성했으나,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교회를 일궈낸 이들이 누락되었다가, 2014년에 프란치스코 교종에 의해 신해박해(1791)부터 병인박해(1866)까지의 124위 순교자들이 시복된 것입니다.

(그들은 <순교시기별>로는 첫 대규모 박해로 기록된 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 순교자가 14, 신유박해 순교자가 53, 기해박해(1839)를 전후한 순교자 37, 병인박해(1866) 순교자 20명이며, <지역별>로는 한양(서울) 38, 경상도 29, 전라도 24, 충청도 18, 경기도 12, 강원도 3위입니다. 124위 중 최연소자는 12세로 이봉금 순교자이며, 최고령자는 75세로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 순교자입니다.)

이들 가운데, 첫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은 이종사촌입니다. 전라도 진산 출신으로 1790년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신주를 불사르고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렀다가 체포령을 내려지자 자수했습니다. 1791 12 8일에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 첫 성직자입니다. 구베아 주교의 파견으로 조선인으로 변장하고 1794년 입국했습니다. 강완숙 집에 숨어 지내면서 성사를 집전해 6년 만에 조선교회 신자 수를 1만 명으로 늘리는 데 큰 공로를 세웠습니다. 신유박해 때 귀국을 결심했다가 순교하기로 마음먹고 자수했고, 새남터에서 효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은 성 정하상 바오로와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의 아버지입니다. 형 약전에게 교리를 배우고 가톨릭에 입교했습니다.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 2권을 집필해 주문모 신부의 인가를 얻어 교우들에게 보급했고, 평신도 단체 '명도회' 초대 회장을 지내다 1801년 순교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순교자들은 대부분 유해가 없습니다. 묘소 또한 있을 리 없습니다. 다만 박해에도 죽음을 무릅쓴 동료와 가족들의 노력으로 수습된 순교 복자들의 유해는 비밀리에 매장됐고, 구전을 통해 전해지는 묘소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묘소가 남아 있는 복자들은 124위 중 18(14.5%)입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 첫 기념일을 앞두고 당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 특별위원회 위원장 안명옥 주교님은 <특별담화문에서, 그들은 신분 차별과 불평등, 가난이 일상화되었던 시대에 그리스도의 형제애를 보여주었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었다고 말씀하시면서, 복자들에게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 그분들의 도움으로 우리도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자고 권고하였습니다.

또한, 현재 한국 교회가 추진하고 있는 최양업 토마스 사제 시복과 이벽 세례자 요한과 동료 132 시복,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 시복,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와 동료 37 시복을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직 시복되지 않은 순교자들과 알려지지 않은 많은 순교자들도 함께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윤지충 바오로를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진산 군수가 네가 사교(邪敎)에 빠져 있다는 게 사실이냐?”고 묻자, 저는 전혀 사교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천주의 종교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길입니다.” 라고 대답하였고, 또 다른 곳에 이송되어서도 왜 사교에 빠져 방황하느냐?”고 문책하자, 저는 조금도 사교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사교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하였다고 전합니다.

이는 그야말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대로,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는 말씀을 몸으로 보여줍니다. 곧 목숨을 바쳐 섬기는 순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섬김이야말로 곧 순교입니다. 섬김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섬김의 순교를 통하여 복음이 증거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

 

주님!

함께 있는 이를 존중하게 하소서!

함께 있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함께 있는 저를 결코 무시하지 않듯,

 

저 역시 곁에 있는 형제를 종중하고, 함께 있는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더 큰 사랑으로 !

-반영억신부-

 

오늘은 잊었던 감격을 일깨우는 날이 되기를 희망하며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강론을 다시 묵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124위 시복식미사 강론 전문 (2014,8,16)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8,35). 성 바오로는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의 영광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 신앙의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과 결합시키시어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셨고, 그분의 승리는 또한 우리의 승리입니다. 

오늘 우리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안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승리를 경축합니다. 이제 그분들의 이름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이름 옆에 나란히 함께 놓이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에 저는 그분들에게 공경을 드렸습니다. 이 순교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환희와 영광 속에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함께 참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무엇보다도 위대한 승리를 우리에게 선사하셨음을, 순교자들은 성 바오로와 함께 증언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순교자들의 승리, 곧 하느님 사랑의 힘에 대한 그들의 증언은 오늘날 한국 땅에서, 교회 안에서 계속 열매를 맺습니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이처럼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복자 바오로와 그 동료들을 오늘 기념하여 경축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여명기, 바로 그 첫 순간들로 돌아가는 기회를 우리에게 줍니다. 이는 한국의 천주교인 여러분이 모두 하느님께서 이 땅에 이룩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며, 여러분의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애덕의 유산을 보화로 잘 간직하여 지켜나가기를 촉구합니다. 

하느님의 신비로운 섭리 안에서, 한국 땅에 닿게 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민족,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적 호기심과 종교적 진리의 탐구를 통해 촉발되었습니다. 복음과 처음으로 만난 한국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더욱더 많이 알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에 대한 무언가의 깨달음은 곧 주님과의 만남으로 이어져, 첫 세례들과 더불어 충만한 성사 생활과 교회적 신앙생활에 대한 열망, 그리고 선교 활동의 시작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전통적인 사회적 신분의 차별과 상관없이, 믿는 이들이 모두 한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던 초대 교회의 삶(사도 4,32 참조)에서 영감(靈感)을 받아, 한국의 신자 공동체들 안에서도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에게 평신도 소명의 중요성, 그 존엄함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저는 여기 있는 많은 평신도 여러분에게 인사를 드리며, 특별히 날마다 삶의 모범으로 젊은이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화해시키시는 사랑을 가르치는 그리스도인 가정에 저의 인사를 전합니다. 또한 여기 있는 많은 사제들에게도 특별한 인사를 드립니다. 그들은 헌신적으로 행하는 직무 수행을 통해, 지난 세대의 한국 천주교인들이 일구어 온 풍요로운 신앙의 유산을 지금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진리로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그리고 세상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고 지켜 주시기를 간청할 때, 아버지께서 우리를 세상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기를 청하지 않으셨다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하시어 세상 안에서 거룩함과 진리의 누룩, 즉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가야 할 길을 제시합니다. 

이 땅에 믿음의 첫 씨앗들이 뿌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자들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당신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요한 17,14 참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됨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것은 박해를 의미했고, 또 나중에는 산속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게 됨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그들을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즉 재산과 땅, 특권과 명예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들의 진정한 보화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자주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 의해 도전받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그 다음에 이 세상의 다른 온갖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관련해서 보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 

또한 순교자들은 그들의 모범으로, 신앙생활에서 애덕의 중요성에 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 증언의 순수성이었고, 세례 받은 모든 이가 동등한 존엄성을 지녔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대의 엄격한 사회 구조에 맞서는 형제적 삶을 이루도록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 계명을 분리하는 데 대한 그들의 거부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형제들의 필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막대한 부요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들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순교자들의 모범은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러한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형제자매들에게 뻗치는 도움의 손길로써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요구하시며, 그렇게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간직했던 그 숭고한 자유와 기쁨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오늘의 이 경축을 통하여, 이 나라와 온 세계의 헤아릴 수없이 많은무명 순교자들을 마음에 품고 기리고자 합니다. 특별히 지난 마지막 세기에,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쳤거나 그분의 이름 때문에 모진 박해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만 했던 이름 없는 순교자들을 기리며 기억합니다. 

오늘은 모든 한국인에게 큰 기쁨의 날입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 순교자들이 남긴 유산, 곧 진리를 찾는 올곧은 마음, 그들이 신봉하고자 선택한 종교의 고귀한 원칙들에 대한 충실성, 그리고 그들이 증언한 애덕과 모든 이를 향한 연대성, 이 모든 것이 이제 한국인들에게 그 풍요로운 역사의 한 장이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유산은 선의를 지닌 모든 형제자매들이 더욱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화해를 이루는 사회를 위해 서로 화합하여 일하도록 영감(靈感)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와 온 세계에서 평화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인간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이바지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전구와 더불어 모든 한국 순교자들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온갖 좋은 일과 믿음 안에서, 또 한결같이 거룩하고 순수한 마음과 사도적 열정 안에서 항구함의 은총을 받아, 사랑하는 이 나라에서부터 아시아 전역을 거쳐 마침내 땅끝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증언하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말은 십자가를 진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곧 자기를 버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것은 결국 아버지 뜻 앞에서 내 뜻을 버리신 것입니다. 내뜻을 버린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내뜻을 버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더 큰 것, 곧 아버지의 듯이 이루어 지고 그분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이 힘겹게 고생하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이라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러나 매 순간 내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선택하게 될때 주님의 영광에 함께하게 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이 주님의 뜻 앞에서 자기를 내려놓라는 말씀으로 다가오는 오늘입니다.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집자실지' 움켜잡는 자는 그것을 잃는다' 명에도 재물도, 목숨도 그렇다. 먼저 내려놓으면 잃어버리는 일은 없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송영진신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 희생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일이
보잘것없는 죄수가 처형당한 일로만 보였겠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희생과 헌신이었습니다.
여기서 ‘밀알’은 예수님을, ‘많은 열매’는 구원받게 된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순교자들의 순교에도 자주 적용됩니다.
순교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일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심어진 일이고, 박해와 순교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인이 더 많이 생기고,
교회가 더 발전한 일은 그 밀알에서 많은 열매가 나온 일입니다.

관점을 조금 바꿔서, 이 말씀을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밀알 하나를 땅에 심는 것은 육신적이고 현세적인 것을 포기하거나
희생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풍성한 은총을 받으면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육신의 목숨을 바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원래 뜻인데,
목숨을 바친다는 말을 꼭 실제로 죽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고,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육신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많은 열매’ 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좋은 땅’이 많은 열매를 맺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14-15).”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가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 같은 것만 신경 쓰다가
숨이 막히는 것은, “밀알 하나를 땅에 심지 않고
한 알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면서 실천하고
인내하는 것은 “밀알 하나를 땅에 심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열매를 얻고 싶으면 씨를 심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 지금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즉 자신의 모든 것을 땅에 씨로 심는 생활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이 말씀의 뜻은, “육신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않으면,
그것들을 모두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도 얻지 못하고,
그 애착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이 공관복음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5-26)”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그것이 영원한 생명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쓸모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가장 귀한 것 하나를 얻기 위해서
쓸모없는 것들을 모두 버리는 생활입니다.
버리지 않으면 얻지 못합니다.
순교자들은 버려야 할 것들을 버려서 얻어야 할 것을 얻은 분들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6).”

이 말씀이 공관복음에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을 따라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말씀이고, 공관복음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섬긴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묵시 22,3-5).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나의 뒤를 따라와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도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린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존중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그 삶이 대단히 영예로운 삶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누리시는 영예와 영광을 함께 누리는 삶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려면
자신을 버려야 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말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버린다는 뜻이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어려움들을 참고 견딘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버리지 않고, 십자가를 지는 일도 없이,
그냥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수는 없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일”과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은
따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일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 자체가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만일에 자신을 버리지도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도 없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과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신앙인들을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구경꾼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구경꾼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살다가는 저쪽 세상에 가서도 하느님 나라를 밖에서 구경만 하고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게 될 것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2,24-26: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오늘은 한국천주교회의 초기의 순교 복자들 124,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이다. 떼르뚤리아누스 교부는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다.?(호교론50,13)라고 했듯이 이분들은 참으로 우리 한국천주교회의 씨앗이 된 분들이다. 지난 2014 816일 서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주례로 시복되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 우리 순교자들은 모두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한 알의 밀알이었다. 그 밀알이 죽음이라는 행위를 통해 다시 살아나 많은 열매를 맺었다. 오늘의 한국천주교회의 모습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신 길과 같다. 예수께서 지상 생활을 하실 때는 하느님의 영광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으로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십자가와 부활의 열매로 모든 이가 그분을 알게 되었듯이 순교자들의 피는 이렇게 열매를 맺은 것이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 이 말씀의 의미는 이렇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자신의 삶에 대해 과도한 욕망에 빠짐으로써 자기를 파괴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돈에 대한 집착 때문에 자기 자신이 파멸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이러한 집착에서 자유로우며 진정으로 하느님 안에 살아있는 사람이다.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위해 우리 자신을 이겨 나가야 한다. 순교자들이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늘 하느님의 뜻 때문에 자신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 그분을 올바로 섬기려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 그분은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다.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그분이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1요한 2,6 참조) 사랑을 실천할 때, 선을 행하려는 뜻 말고 다른 의도가 있어서는 안 되며,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마태 6,3 참조)

 

오늘의 순교 복자들처럼, 우리도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면서 그분을 닮도록 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으며, 당신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위해 가장 큰 사랑을 드리셨다. 우리가 지금 순교 정신을 산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같이 나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끊고 나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실현하며 그분을 체험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분의 길을 가지 못하면서 그분을 따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삶으로 순교자들을 기리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한상우신부-

언젠가는
우리도 하나의
밀알처럼 기꺼이
죽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죽어야 할 대상은
욕심으로 가득찬
우리자신입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하나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죽어야
하느님의 뜻이
생명의 길이 되어
활짝 열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시간은
나의 뜻을 
내려놓는 
거기에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자신을
하느님께
맡기지 
못하는 것은

우리자신이
너무 커져버린
것입니다.

자아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드러낸
이들이 바로
이땅의 
순교자들입니다.

순교자들은
열매를 맺는
생명의 길을
걸어가신 
분들입니다.

죽는 밀알처럼
하느님의 열매를
맺는 우리들의
일상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오상선신부

 

부활 시기가 무르익어가면서 말씀이 성령 강림 대축일을 향해 한 방향으로 흐르다가, 오늘은 잠시 주제를 달리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며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

섬김은 본시 종의 몫이었습니다. 고대 신분 사회에서 종의 처지는 그저 소유자인 주인을 섬기고 그의 뜻에 따라 그가 원하는 걸 하는 재산의 일부분이었지요. 그러니 신분적 종에게 있어 섬김은 강제적 성격이 컸겠지요.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마태 20,28)

그런데 예수님은 친히 종의 자리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천명하셨지요. 이 선택에는 여느 종들에게 부여된 것 같은 세습적 강제성이 없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섬김의 패러다임을 바꾸신 것이지요.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며 나를 따라야 한다."

무엇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님은 섬김과 따름을 직결시키셨다는 점입니다. 신분적으로 종이라 불리는 이들은 주인을 섬길망정 엄밀히 말해 따를 필요는 없었습니다. 주인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켜 주면 되지, 굳이 주인의 언행이나 가르침, 모범을 따르거나 닮으려 애쓸 이유는 없었지요.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따름으로써 섬깁니다. 섬김과 따름이 별개의 태도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주님을 섬기는 우리는 그분이 하신 대로,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제자들입니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요한 12,26).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섬김은 함께 함, 동반, 함께 머무름입니다. 예수님은, 한 편은 일방적으로 봉사하고 또 한 편은 받기만 하는 걸 섬김으로 보지 않으시지요. 섬기는 이는 주인이 있는 곳, 길바닥이든, 성전이든, 십자가 위든, 무덤 속이든, 천상 혼인잔치든, 거기가 어디든 함께 있는 존재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6).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아버지에게까지 연결됩니다. "존중"! 어쩌면 신분 제도 계급 사회의 모든 종들이 간절히 바라던 가치가 아니었을까요? 자청해 종의 자리로 내려가 섬기는 이에게 아버지는 "존중"이라는 선물을 주십니다. "존중"은 그저 사람을 대하는 외적 테크닉이 아니라 그 존재 전체에 대한 인정과 수용, 존경을 포함하는 전인적 표현입니다.

그런데 지금이 계급 사회도 아니고, 자청해 주님의 종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더 주님께 가까이 가려는 영혼에게는 악의 유혹과 어둠의 힘이 더 기승을 부리게 마련이니까요.

제1독서는 악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노래하는 요한 묵시록의 대목입니다.

"우리 형제들은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그 자를 이겨냈다"(묵시 12,11).

주님을 섬기는데 목숨을 바친 이들은 썩은 밀알이 되어 새 생명을 틔웁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당신과 함께 있는 영예를 주시지요.

실제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름으로써 주님의 증언자가 된 이들의 승리는 세속적 육적 승리가 아닙니다. 어쩌면 세상 눈으로는 몽상가에 불과한 실패자일 뿐이지요.

어둠의 권세, 유혹과 죄악의 굴레를 쳐부순 이들의 승리는 비록 목숨은 잃었지만 끝까지 신앙과 사랑을 지킨 승리, 한 목숨으로 무수한 생명을 구한 승리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승리로 이끈 도구가 무엇인지 주목해 봅시다. 바로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이지요. 결국 우리가 악에게 승리할 수 있는 힘은 주님의 희생제사와 그분 말씀입니다.

순교, 희생, 죽음... 이런 말씀들 앞에서 작아지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이천 년 전, 성령을 받기 전에 주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죽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고 함께 하고 닮으려다 보니 가게 된 길이지요. 죽음을 위한 죽음이 아닌 생명을 위한 죽음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그러니 미리 겁 먹고 움츠러들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들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헌신하며 나아가는 동안, 미사성제와 말씀으로 정화되고 성화되고 굳세어져 주님과 함께 승리의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니까요. 오늘 하루 우리가 엮어가는 일상이 바로 그 여정 안의 한 걸음입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거듭되는 주님의 질문-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55347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