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28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20-26)
"I pray not only for these,
but also for those
who will believe in me through their word,
so that they may all be on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요한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의 정신을 가다듬는 기도입니다. 본디 구약의 대사제의 기도를 각색해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속죄일에 대사제가 하느님과 백성이 화해하는 예식을 거행할 때 드렸던 기도를 요한이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기도입니다.
하나 됨의 기도의 본질은 ‘화해’에 있습니다. 지난 시간 동안 하느님을 저버리고 제 잇속과 욕망에 휩쓸려 하느님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본디 모습조차 잃어버린 시간들을 하느님 앞에 온전히 내어놓고, 오늘을 다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담아내는 기도가 하나 됨의 기도입니다.
요한 복음은 그 하나 됨의 원천을 ‘사랑’으로 제시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존중합니다(1코린 13장 참조). 규칙과 조건을 내건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께서 하나이시듯, 믿는 이들이 하나 되는 유일한 조건은 그저 사랑하는 일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서로 껴안아 주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 그것은 상대를 위한 행동이지만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이 하느님과 하나 되어 있다는 방증입니다.
사랑으로 우리는 각자의 정체성을 만들어 갑니다. 오로지 세상의 악을 처단하고 이웃의 부조리를 심판하는 것이 우리 각자의 모습으로 정립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존감이 낮은 이들은 세상을 탓하고 이웃을 들먹입니다. 하느님 앞에 떳떳하고 자유로운 이, 하느님과 하나 되는 이는 그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사랑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이가 세상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세상과 하느님은 하나가 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심리학자 맥퍼슨은 악기를 연습 중인 157명의 어린이를 추적했습니다. 그런데 9개월 후부터 아이들의 실력에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다. 연습량도 똑같고, 다른 조건도 다 비슷한데도 차이가 벌어졌습니다. 타고난 재능의 차이일까요?
그는 문득 연습을 시작하기 전 아이들에게 던졌던 질문이 생각났습니다. 그 질문은, “너는 음악을 얼마나 오래 할 거지?”였습니다. 아이들의 대답은 세 종류였습니다.
“저는 1년만 하다가 엄마가 그만하래요.”
“저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만 할 거예요.”
“저는 앞으로 쭉 계속할 거예요.”
계속 음악을 하겠다는 아이의 수준은 1년만 하겠다는 아이보다 4배 이상 높았습니다. 똑같은 기간 동안, 똑같은 시간 동안 연습했는데도 말이지요.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의 마음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딱 1년만 열심히 봉사할 거예요.”
“저는 지금 본당 신부님 계실 때까지만 봉사할 거예요.”
“저는 앞으로 쭉 계속 봉사할 거예요.”
누구의 신앙 수준이 더 높아질까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주님 앞에 조건을 내세우기보다 영원히 함께해야 할 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믿는 이들의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과 갈라놓는 ‘죄’에서 깨끗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수많은 조건을 내세워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의 삶을 철저하게 실천해 나갈 때,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당신의 친아들과 비슷한 모습을 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진정한 일치를 가져올 수 있게 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있는 곳에 우리도 있게 되기를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사는 주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가 아니라, 주님 계신 곳에 우리도 있게 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완전하게 하나 될 장차 올 시대에는 우리가 느끼고 이해하고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 속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때 악은 완전히 사라지고, 참 기쁨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순간을 미루면 인생마저 미루게 된다(마틴 베레가드).
우리의 의식과 선택.
바람직한 삶은 중요할까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젊은이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되신 성녀 마더 데레사와 영국의 다이애나 황태자비에 대해서였습니다. 질문은 이렇습니다.
1) 누가 바람직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2) 당신은 둘 중에서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첫 번째 질문의 답으로 성녀 마더 데레사가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의 답은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압도적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의식과 선택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람직한 삶이 옳다고 분명히 의식하고 있지만, 그런 삶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방송에 누구보다 올바르게 사는 동료 연예인을 칭찬하던 한 연예인이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정말로 올바르게 사는 모습을 존경하지만, 저는 그렇게 살기는 싫어요.”
바람직한 삶이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은 그렇게 살 수 없다고 단정을 짓는 것일까요?
바람직한 삶이 진짜 행복으로 나를 이끌어 줍니다. 문제는 가짜 행복이지만 남들이 보기에 부러워 보이는 삶, 물질적인 만족을 얻으려는 내 욕심이 진짜 행복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한 이기주의자가 돼라
-전삼용신부-
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는 살인 누명을 쓴 바보 아들을 살리기 위한 엄마의 사투를 그린 영화입니다. 엄마는 자기는 생각하지 않고 아들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처음엔 아들의 유일한 친구를 의심하여 그의 골프채를 훔치고, 그다음엔 살인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를 찾아가 아들의 누명을 벗겨주려 합니다. 그런데 그 유일한 목격자는 살인의 범인이 엄마의 아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에 엄마는 아들을 위해 그 할아버지를 살해합니다. 나중에 풀려난 아들은 그 할아버지 집에서 엄마 물건을 찾아 가져다주며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를 이용했던 것임을 알게 합니다. 엄마가 5살 때 박카스에 농약을 타서 자신을 마시게 하려던 것에 아들이 엄마를 이용하고 복수한 것입니다. 어쩌면 모든 엄마가 자신의 자녀가 잘되게 하려고 남의 자녀에게 약간의 피해를 주어도 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내 자녀가 1등이 되게 하려고 다른 자녀들은 1등씩 밀려도 상관없다고 여깁니다. 봉준호 감독은 그런 엄마들 속에서 세상이 지옥이 되어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 것 같습니다.
엄마는 자녀 중심적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꼭 좋다고만 할 수 있을까요? 자녀를 위해 자기는 아무래도 괜찮다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요? 아닙니다. 어떤 때는 엄마가 자신을 먼저 돌보지 않는 것이 자녀에게는 해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려면 일단은 자기중심적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지금 아버지께 기도하시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기 위해 아버지께 청하는 기도와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에게 성령을 보내주시라고 청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여기에서 ‘영광’이란 단어는 ‘성령’을 가리킬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께서 ‘이름, 말씀, 영광, 사랑, 물, 피’임을 알면 요한복음을 이해하기 매우 쉽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성령을 보내시는 것이 아드님을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르단강에서 그랬고, 부활 때도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을 받으셨기 때문에 당신을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라 말씀하실 수 있으셨고 죽은 사람도 살리는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물론 성령을 통하여 부활하셨기 때문에 제자들과 40일간 머무시며 그들을 가르치실 수 있으셨습니다.
먼저 성령을 받지 않으면 죽은 사람처럼 되어 누구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성령을 통하여 먼저 자신이 행복해지도록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예수님은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거룩’도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거룩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사랑인데, 사랑을 위해서는 어쨌거나 성령 앞에서 우선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어야 합니다. 성령은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주시는 분이시기에 예수님은 ‘행복한 이기주의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행복을 이제 제자들이 아닌 그들을 통해 복음을 듣게 될 이들에게 확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라고 하시며 당신 중심에서 밖으로 점점 그 범위를 확대해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받으신 ‘아버지의 이름’, 즉 ‘사랑’을 통해 마치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서 그러하신 것처럼 당신을 믿는 이들 가슴에 머무십니다.
어떤 분들은 본당에서 봉사하시며 사랑과 기쁨을 잃기도 합니다. 자신밖에 봉사할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봉사하며 일만 시켜놓고 관심을 두지 않는 본당 신부와 게으른 다른 봉사자들에 대한 원망이 생깁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봉사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기쁘지 않으면 성령을 받는 삶이 아닙니다. 그런 봉사는 자신 영혼 구원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자신 먼저 행복해야 합니다. 성령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봉사를 접고 조용히 성체조배를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휘어지는 나무는 고추나무를 똑바로 서 있게 할 수 없습니다. 성령 앞에서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쨌거나 행복은 나를 통과해서 흘러가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려면 먼저 자신을 도와주십시오.
-조재형신부-
요즘 동양의 고전 ‘중용’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중용에서 인간의 본성은 감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모두 감정과 더불어 살게 됩니다. 이성이 하드웨어라면 감정은 소프트웨어와 같습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면 사기꾼이 되기도 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이 감정을 잘 다스리면 현자(賢者)가 되기도 합니다. 결국 지식은 감정이 가는 길을 따라서 오기 마련입니다. 감정이 가는 길을 도라고 말합니다. 도는 바른 길이 되기도 하고, 도는 나쁜 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교육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결국 교육은 스스로의 절제와 스스로의 수양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듣지 못하는 곳에서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군자는 홀로 있음에도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감정은 언제 어디서나 나를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락다운(Lockdown)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오랜 시간 같이 있으니 가족의 허물이 자꾸 보여서 다투기도 합니다. 코로나19의 원인을 따지고 잘 대처하지 못한 정부를 탓하기도 합니다. 여행도 갈 수 없고, 친구도 만날 수 없고, 공연도 볼 수 없는 현실이 짜증납니다.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늦게 일어납니다.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감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가족들과 정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읽고, 글을 쓰기도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하지 못했던 부모님께 편지를 보내기도합니다. 영상으로 미사를 보기도하고, 좋은 강의를 듣기도합니다. 그림을 그리기도하고, 음악을 듣거나 연주하기도 합니다. 코로나19 이후에 인류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성찰하기도 합니다. 락다운은 충전의 시간이 됩니다.
신문사는 락다운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도 직원들과 단축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수요일까지는 근무를 하고 목요일부터는 쉬고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묵상하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산보를 하고,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느슨해지는 저를 봅니다. 이성은 락다운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감정은 락다운에 점차 지쳐가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동안 감정이 가는 길(도)을 충실하게 닦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제 곧 락다운도 풀릴 것입니다. 다시금 일상의 생활이 시작될 것입니다. 홀로 있음에도 스스로를 돌보며 바른 길로 가야 하겠습니다. 감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폭풍우를 피하기보다는 폭풍우 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운다고 합니다.
‘멘탈 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신력이 강한 사람을 뜻합니다. 감정의 길을 잘 다스리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멘탈 갑이었습니다. 감옥에서 지혜롭게 자신을 변호하였습니다. 모진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였던 베드로 사도에게도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신앙 안에서 어떻게 하면 멘탈 갑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늘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여인처럼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야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지금 죽어도 좋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하나 됨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본성은 하느님에게서 왔습니다. 하느님에게 온 본성은 하느님께로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홀로 있음에도 스스로를 절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중용에서는 그것을 교육이라고 했지만 신앙 안에서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당신이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새 마음으로 주님의 뜻에 따라 살게 하소서.”
소유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주는 사랑, 집착하는 사랑이 아니라 성장시키는 사랑!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을 해나가시던 내내 당신의 의식 속에 지니고 계셨던 한 가지 확신이 있었으니, 사랑받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다름아닌 하느님 아버지로부터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며, 나와 일치하고 계시며, 나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확신은 예수님의 행동거지와 삶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갈 때도,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도, 나홀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함께 걸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절대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굳건히 지켜주실 것이다.’는 의식으로 인해 그 어떤 시련이나 위험 앞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흔들림 없이 당신의 길을 걸어가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충만한 아버지 사랑 체험은 예수님의 당신 사명 완수를 위한 발걸음을 더욱 당당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복음 선포 과정에서 맞닥뜨린 갖은 박해와 반대, 협박과 모함, 결국 십자가 위에서조차 굳센 믿음과 신뢰심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 사랑 체험 때문이었습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는 것! 참으로 소중하고 은혜로운 체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 누구나 사랑에 좌지우지되며 살아가는 존재들인 듯 합니다. 사랑을 먹고 자라나는 존재가 우리 인간임이 확실합니다.
아이 어른 할것 없이 제때 제때 충분한 사랑을 공급받지 못함으로 인해, 결핍된 사랑으로 인해, 텅텅 비어버린 사랑의 탱크로 인해, 갈증을 느끼고, 방황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합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때 우리 삶은 얼마나 낙관적이고 희망적으로 변화되는지 모릅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때 우리네 인생은 언제나 화사한 봄날이 될수 있습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때 우리는 기적을 행할 수 있습니다. 혹독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눈부신 미소를 지을 수 있습니다. 바로 사랑이 주는 힘 때문입니다.
돈보스코 역시 이런 자신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온 몸과 마음으로 체험했기에, 그 사랑을 당신 사랑의 교육학에 적극 반영하실 수 있었습니다.
돈보스코께서 언제나 입에 달고 다니시던 감동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청소년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사랑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돈보스코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그냥 사랑이 아니라 참사랑입니다. 통속적인 사랑, 말초적인 사랑, 지나가는 사랑이 아니라 영적 사랑, 아가페적 사랑, 영원한 불멸의 사랑입니다. 소유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주는 사랑, 집착하는 사랑이 아니라 성장시키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참 사랑인지 자주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란 존재를 더욱 그답게 만들어주는 사랑, 그의 인생이 더욱 빛나도록 지지해주는 사랑, 그의 인생이 더욱 충만하게 꽃피어나도록 격려해주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7)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한 기도에 이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곧 제자들과 세상의 관계를 말씀하시는 부분과 당신의 사명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는 청원기도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그 절절한 순간에 제자들이 “하나”되기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구원의 사명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를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적 일치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본성적 일치요, 다른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 간의 사랑의 일치, 성령의 일치입니다. 곧 그리스도는 본성상 아버지와 같으시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곧 그리스도의 주입된 사랑으로 말미암아 일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치는 제자들에게로 번져갑니다. 곧 다음의 두 가지로 번져갑니다. 하나는 <사도행전>에서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사도 4,32)라고 말할 때처럼, 그리스도인들 간의 하나 됨이요, 또 하나는 <코린토서>에서 “우리는 유대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1코린 12,13)라고 말할 때처럼,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는 단순히 혼합되어 짭뽕이 된 것도 아니요, 혹은 깡패의리로 뭉친 것도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 된 것임을 말합니다. 곧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룬 것을 말합니다.
그리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3)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곧 일치가 그들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기쁨 없는 채로 버려두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셨고 제자들이 아버지께 속하게 되었지만, 세상은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미워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그들을 지켜주시기를 청하면서 기도하십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7)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진리이십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나는 진리이다”(요한 14,6)라고 스스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진리 안에서 기쁨을 얻고,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됩니다. 그러니, 진리이신 말씀을 행함으로서 우리 안에 거룩함은 더욱 자라게 됩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7)
주님!
깨끗하기보다, 진실 되게 하소서.
흔들리지 않기보다,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단지 함께 있기보다,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 안에서 사랑하되, 행동하게 하소서.
진리 안에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거룩함을 드러내소서. 아멘.
오직 사랑에 사랑을 더하라
-반영억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많은 기도를 받고 또 기도를 부탁하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기도하는 것은 방법이 다를 뿐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에 상관없이 삶 안에 젖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생각해 보면 ‘무엇을 해 달라’는 기도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하느님의 은혜로움에, 그분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막상 기도를 시작하면 나의 바람만을 쏟아놓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참되게 기도하기위해서는 먼저 침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침묵 없이는 제대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버지 하느님께 매달릴 수 있는 것도 자녀의 특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증언하는 말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17,26). 하고 말씀하셨듯이 사람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바로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사랑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랑의 관계 안에서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되고 예수님께서도 그들 안에 머물러 사시게 됩니다. 결국 제자들을 통하여 믿게 된 이들, 바로 우리들도 예수님과 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사랑의 관계를 확고히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17,24). 하고 간절히 기도한 것은 바로 당신이 누리는 영광을 믿는 이들에게도 전해주고자 하는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도는 사랑이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믿는 우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정성어린 기도를 봉헌하되 이기적인 기도를 벗어나 사랑의 기도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기도는 오직 사랑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요한 비안네는 말합니다 “기도를 잘 하기 위해서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실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분께 마음을 열며 거룩하신 하느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에 한 없이 기뻐하는 것, 이것이 가장 훌륭한 기도입니다.” “기도란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여 그분과 대화하고 그분을 바라보는 것”(오리게네스).이고,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 잘못됨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더 많이 사랑하여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그 사랑의 일치를 이웃과도 이룰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송영진신부-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20-21).”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이라는 말은, 사도들의 선교활동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과 믿게 될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사실상 ‘모든 사람’입니다.
지금 안 믿고 있는 사람들은 선교 대상자들이고,
잠재적인 신앙인들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는
‘모든 사람’이 하나로 일치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된다면,
분열과 갈등도 없을 것이고, 전쟁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가 그토록 갈망하던 참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하느님 나라’는 바로 그런 나라입니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라는 말씀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일치가 ‘하나가 되는 것’의 원형이고 모범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하나의 조직으로 뭉치는 일이 아니라,
아버지와 예수님의 일치처럼 ‘선과 사랑’으로 일치되는 일입니다.
(‘선과 사랑’ 없이는 진정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 만일에 인류가 하나가 된다고 해도, 하느님과 상관없이 하나가 되거나,
아니면 하느님을 거슬러서 하나가 된다면, 그것은 불행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 바로 그런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바벨탑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거슬러서 하나가 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으셨고,
그들을 온 땅으로 흩어버리셨습니다(창세 11,9).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라들을 보면, 자기들끼리는 무척 단결을 잘했습니다.
그것도 역시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서
자기들끼리만 하나가 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귀들도 자기들끼리는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것들이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하느님 밖에서’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또 어떻게 하나가 될 것인지가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라는 말씀은,
‘저를’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신앙인들이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 있는
모습은, 주님으로 섬기고 있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언하는 일이 되고,
그 증언 덕분에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세상은 아직 예수님을 안 믿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보내셨다는 것을’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신앙인들이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 있는 모습은 ‘구원받은 모습’이고, 그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메시아를 보내셨음을 증언하는 일이 되고, 그 증언 덕분에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과 메시아를 믿을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아버지, 예수님, 성령이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것은,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나타내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기도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라는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서 하느님의 일치에 참여하기를 바라시는 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완전함에 도달하기를 바라시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방법은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입니다(마태 5,43-47).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만일에 친한 사람들끼리만 사랑을 나누고, 원수 같은 사람들은 멀리한다면,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하나가 되어서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은
각 개인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불완전한 존재들이 모여서 하나가 되고,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줌으로써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게 됩니다.
부족한 부분 가운데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의 부족입니다.
그리고 불완전한 사랑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서 첫 번째로 실천해야 하는 일은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사람들에게 ‘너희는 모두 하나가 되어라.’ 라고 명령하셔도 될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셨을까?”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너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고,
또 한 가지 이유는 사람들이 분열되기를 바라는 사탄의 힘이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사탄의 힘을 이길 수 없고,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 합니다.)
사탄은 하느님과 사람들이 분열되기를 바라면서 이간질하고,
또 사람들과 사람들이 분열되기를 바라면서 이간질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열을 목적으로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은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서 일하는 것입니다.)
‘분열’은 사탄의 일이고, ‘일치’는 성령의 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성령)께서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 자신들도 일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데,
분열된 채로는 아버지의 나라를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각 개인의 경우에도, 마음속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품은 채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일치를 위한 기도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7,20-26: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20절)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 우리도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를 기도하신다. 일치를 원하시는 것을 볼 때, 일치와 평화를 해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이렇게 구원을 받고 평화 안에 살기를 원하셨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안에서 하나이며,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2베드 1,4)하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 주신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21절)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며, 같은 뜻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신앙생활이 의지적인 것이듯 하나를 이루는 것도 의지적인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성체성사를 통해서 우리를 하나가 되도록 해 주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축복하시고 그들을 당신과 또 그들끼리도 한 몸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 된 모습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인 관계에 참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22절) 주님께서 영광을 청하신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받고’ ‘주고’ ‘높이 들어 올려지고’는 모두 우리와 관련된 말이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당신 안에서 거룩해지도록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거룩하게 하시기까지 하신다. 아들의 영광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모두가 하나가 되게 하려는 뜻이었다. 그래서 모든 이가 영광 안에 하나가 되었다. 우리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하는 영광은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신다.
우리가 완전히 하나 되는 것이 세상에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여러 다양한 모습의 당신의 사람들이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서로 상반되는 성향과 욕망과 죄로 인해 그들 스스로는 한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당신 안에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들은 그분의 사랑을 통하여 정화된다. 그들은 매우 화목한 상태에서 같은 복됨을 향해 같은 뜻으로 일함으로써 하나가 되고 사랑의 불길에 의해 한 마음이 된다.
하나가 된 그들이 하느님 안에서 그분과 함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주님과 함께 살고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으려면 우선 당신을 통해 아버지와 결합되고 그분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아버지와 결합되고 아버지께 사랑을 받으려면 우리가 아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영광은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어 아들이 누리시던 영광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영광에 참여하기 위함이다. 아들과 같이 되어 그분을 닮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25절)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아는 이들 말고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알기를 바라셨지만 그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은 주님을 알지도 못했고 미워했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을 받아들였고, 그분의 말씀을 따랐고 그분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아들을 알고 또한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26절)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 안에 모신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아들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고 한 몸을 이룬 우리 지체들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머리와 지체가 모두 포함된 한 몸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 계신분이시다.
항상 우리는 그분 안에 하나가 되고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가 그분과 하나가 되고 한 몸이 될 때에 우리 모두는 한 몸 그리스도가 되어 하느님께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삶에 필요한 도움을 청하자.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7, 23)
-한상우신부-
여전히 삶은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신비는
...... ......
완전히와
하나 되는
이 길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한 순간에
지나가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극단으로 치우친
우리를 치유하여
주시는 일치입니다.
기도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기도로 갈증을
채워주십니다.
간절하신 기도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당신 사랑을
강렬하게
드러내십니다.
기도는 완전히
하나가 되고자
하시는 사랑의
일치입니다.
가장 먼저
사랑은 기도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이 던지는 화두는 "하나 됨"입니다.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요한 17,20).
예수님의 기도가 이어집니다. 이 기도의 지향은 미래의 신자들,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입니다. 제자들의 "말을 듣고", 즉 그들의 증언을 받아들여 새로운 길에 들어선 이들의 행렬은 이천 년을 지나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지요. 이미 이를 아시는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겁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예수님께서 반복해 청하시는 "하나 됨"은 참 미묘한 가치인 것 같습니다. 우선 그것은 소수의 의견과 다수의 맹목적 추종으로 움직이는 외형적 단일체를 가리키지 않을 겁니다. 또 모든 구성원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공산품들처럼 똑같은 모습과 사고와 이념을 공유하는 획일화도 아니지요.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채 저마다 고유한 영혼과 육신으로 창조된 우리에게 주님께서 바라시는 "하나 됨"은 과연 무엇일지 묵상해 봅니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예수님은 "하나 됨"을 위해 우리에게 어떤 조건을 갖추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하나 됨"을 위해 이미 하나이신 성삼위 하느님 안에 우리를 끌어안으려 하십니다. 그 완전한 사랑의 관계 안에 들기에 너무도 굼뜨고 불결하고 모자라는 우리를 두 팔 가득 끌어안으심으로써 하나를 이루려 하시는 겁니다.
같은 하느님을 고백하면서도 인종, 문화, 빈부, 배움, 지향과 선호가 너무도 다른 우리가 하나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성삼위 하느님 안에서 그 유대 안에 머무를 때 주어집니다. 즉 우리 각자가 주님 안에 머무르고, 또 주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심으로써 가능해집니다.
감사하게도 그럴 수 있는 길을 이미 주님께서 남겨 주셨지요. 바로 말씀과 성체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경청하고 되새기고 실천함으로써, 말씀이 우리 안에, 우리가 말씀 안에 머무르는 상태를 이어갑니다. 또 같은 빵을 쪼개어 나눠 먹음으로써 같은 주님을 모시고, 그로써 주님의 일부가 되지요. 이렇게 우리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미지의 형제자매들과 말씀으로, 성체로 하나를 이룹니다.
같은 아버지의 자녀로서 같은 믿음을 고백하고 같은 사랑을 나누는 우리는 예수님 기도의 열매로 하나를 이루어 살아갑니다.
제1독서는 하나 됨의 반대 상황이 벌어지는 장면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면서 회중이 둘로 갈라졌다"(사도 23,7).
유다교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 두 분파는 부활, 천사, 영의 존재와 관련해 견해를 달리합니다. 사실 바리사이 측에서 새로운 길에 들어선 바오로가 썩 달가운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부활의 가능성 측면에서는 바오로를 인정하며 사두가이와 맞서게 됩니다.
한 하느님을 소유한 이들 안에서도 교리와 이념의 간극을 극복하지 못하면 갈등이 일어나고 분열을 초래합니다. 단순한 결별 정도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증오와 공격으로 이어지는 비극도 비일비재하지요.
"하나 됨"은 다름, 다양성을 끌어안고 성삼위 하느님 안에 함께 들어갈 때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이 세상 우리 모두의 다름이나 다양성보다 성삼위의 품이 훨씬 더 크고 넓고 깊지요. 우리 모두 충분히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연대가 우리를 하나 되게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도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나누고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하나이시니 그렇습니다. 또 우리가 머무르는 주님께서 한 분이시니 더욱 그렇습니다. 주님을 이루는, 작지만 소중한 지체인 우리 모두를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어디에 있을까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55032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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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우리는 각자의 정체성을 만들어 갑니다. 오로지 세상의 악을 처단하고 이웃의 부조리를 심판하는 것이 우리 각자의 모습으로 정립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존감이 낮은 이들은 세상을 탓하고 이웃을 들먹입니다. 하느님 앞에 떳떳하고 자유로운 이, 하느님과 하나 되는 이는 그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사랑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이가 세상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세상과 하느님은 하나가 됩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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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성령을 받지 않으면 죽은 사람처럼 되어 누구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성령을 통하여 먼저 자신이 행복해지도록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예수님은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거룩’도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거룩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사랑인데, 사랑을 위해서는 어쨌거나 성령 앞에서 우선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어야 합니다. 성령은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주시는 분이시기에 예수님은 ‘행복한 이기주의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자신 먼저 행복해야 합니다. 성령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성령 앞에서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쨌거나 행복은 나를 통과해서 흘러가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려면 먼저 자신을 도와주십시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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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증언하는 말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17,26). 하고 말씀하셨듯이 사람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바로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사랑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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