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25일 부활 제7주간 월요일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29-33)
In the world you will have trouble,
but take courage,
I have conquered the worl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심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완전한 믿음이 삶의 행복이나 성공으로 이어지면 좋을 텐데, 오늘 복음은 오히려 제자들이 흩어지고 고난을 겪게 된다는, 다소 불행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조금 더 알아 가는 과정과 그분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여정이 신앙생활일 텐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현실의 삶과 예수님의 가르침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을 겪는 일이 많습니다. 세상의 유혹뿐만 아니라 어쨌든 살아 내야 할 현실의 무게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허황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은 세상의 힘겨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 안에 포탄처럼 떨어져 터져 버리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이른바 ‘육화’의 신비를 체험하는 것은 지금 짊어진 삶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 내는 이들의 삶 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서 시작합니다.
팍팍한 삶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모두가 썩었고 악하다는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셨고 또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용기를 내는 일이지, 팍팍한 삶 말고 편안한 삶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일이 아닙니다. 팍팍한 삶 한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을 주셨지요. 삶이 팍팍할수록, 악할수록, 힘겨울수록, 우리가 할 일은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을 위하여 오늘도 용기를 내야겠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모래, 자갈, 철근, 시멘트가 모여 있습니다. 이것으로 무엇을 만들 수가 있을까요? 건축일을 하는 분은 곧바로 아실 것입니다. 단단한 콘크리트를 만드는 재료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 재료들을 다 섞어도 단단한 콘크리트가 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무엇인가를 넣어야 합니다.
바로 ‘물’입니다. 물을 넣어 위 재료들을 잘 섞었을 때, 아주 단단한 콘크리트가 됩니다. 그런데 다른 재료들은 몇 달 뒤에도 다 남아 있지만, 하나는 사라집니다. 이 역시 ‘물’입니다. 물은 원하는 구조물이 굳어지면서 증발해서 사라집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고통이 물의 모습과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통은 내 마음을 더욱더 단단하게 만들어 흔들리지 않게 한 후에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지요. 그래서 언젠가 피정 강의에서 들었던 ‘고통이 생기면 오히려 감사하라.’라고 하셨던 어느 신부님의 말씀이 와닿습니다. 그런데 그 누가 고통이 오기를 원할까요? 고통이 없어야 행복하다고, 고통이 없어야 하느님의 은총 속에 사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고통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를 분명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통은 은총을 수반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겪을 환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즉,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이미 왔다고 하시지요.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다가오는 고통스러운 환난의 시간을 도망치라는 의미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평화를 얻는 방법은 도망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굴복하면서 사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 안에 머물 때만 평화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용기를 내고 주님 안에 머물러 마음에 평화를 지녀야만 합니다.
주님 안에 머물라는 초대는 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세상은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만큼만 힘을 쓸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하나 될 때 세상과 세상의 모든 반대를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해지는 위로와 사랑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에 대해 피하려는데 급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께서 마련하신 특별한 섭리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평화를 마음 안에서 간직할 수가 있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단지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다(헬렌켈러).
천사가 되십시오.
자기 자신을 천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 누구도 스스로를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온 천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천사가 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시는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충분히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먼저 물어보고 그 문제를 해결해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뜻밖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저의 천사입니다.”
도움받은 감사의 표현을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아주 난처한 상황에서 저의 도움이 마치 천사가 와 준 것처럼 느끼셨나 봅니다. 아무튼, 제가 천사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분명히 저는 천사가 아닌데도 말이지요.
우리 모두 천사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내미는 손이 천사의 손이 되고, 힘과 용기를 주는 말이 천사의 입이 되며, 그와 함께 하는 발이 천사의 발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사가 되어 주님의 일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천사 되기를 매 순간 거절하면서, “나는 천사가 아니에요.”라고 부정하는 것은 아닐까요?
두려움을 두렵게 만들자!
-전삼용신부-
우리는 수많은 거절당하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젊은 시절 조금만 용기를 낼 수 있었다면 지금 삶은 매우 다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배우자가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절당할 두려움 때문에 연애도 못 하고, 취직도 못 하고, 사업에도 성공을 못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삶이 어쩌면 우리 모두의 삶입니다.
‘거절 당하기 연습’의 저자 지아 장도 이러한 경험을 겪었습니다. 앱 개발 회사를 설립하여 투자를 받기 위해 완벽한 제안서를 준비했습니다. 투자 안 하는 사람이 이상하다 여길 정도로 자기 딴에는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투자가 거절당했고 그는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는 거절당하는 아픔을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어렸을 때 삼촌에게 운동화에 바퀴를 달면 어떻겠냐고 했다가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핀잔받고 나서 영어단어 외우는 일에만 열중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기서 주저앉으면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거절당하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100번 거절당하는 연습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경비원 아저씨에게 100달러를 꿔 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거절당하였습니다. 얼굴이 붉어졌고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고 빨리 다른 곳으로 숨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회를 거듭할수록 거절당하는 두려움은 사람들의 반응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실망할 것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도너츠를 올림픽 모양으로 해 달라고 했을 때 어떤 매장에서는 그것을 해 주었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제안을 하며 그것을 해 주면 자신도 들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거절당하는 두려움을 극복하면 더 발전할 수 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고 거절당하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수많은 거절당함 속으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자기 그림자를 피하려면 더 큰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누구도 빠져보지 못한 수렁과 같아서 좀처럼 용기를 낼 수 없게 만듭니다. 다만 누군가가 그 두려움으로 들어가 그 두려움이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면 우리도 용기를 낼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두려움을 먹고 우리를 노예로 삼습니다. 돈을 벌어야 하고, 자존심을 지켜야 하며, 성공해서 자신을 비웃는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줘야 합니다. 그런 굴레 속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실망하게 만들기 싫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반대로 돈이 없어도 되고, 자존심이 상해도 되며, 바보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을 누군가가 보여준다면 우리는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비로소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사시고 멸시받으시고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십자가에 벌거벗겨져 못 박히셨습니다. 죽음의 공포까지 이기게 해 주시기 위해 죽음까지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들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는 세상의 모든 두려움 속으로 자유롭게 뛰어드는 일만 남았습니다.
영화 ‘그것’(2017)은 마을에 숨어 사는 광대와 왕따 당하는 아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은 각자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어떤 아이는 엄마를, 어떠한 아이는 괴롭힘 당하는 것을, 어떤 아이는 화재 때 부모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을, 어떤 아이는 문둥병자를, 어떤 아이는 무서운 얼굴의 괴물을 무서워합니다. 광대 모습을 한 괴물은 아이들의 두려움을 먹으면 더욱 커지고 강력해집니다. 아이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것과 당당히 맞섭니다. 그리고 결국 괴물을 물리치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페니와이즈라는 이 괴물은 그들에게 죽어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서워!”
이 세상엔 우리 두려움을 먹고 사는 ‘그것’이 존재합니다. 그냥 세상 자체가 ‘그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일으켜 우리를 자신의 힘 안에 가두어놓으려 합니다. 이 세상을 이기려면 두려움과 맞서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려면 용기가 필요한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두려움으로 들어가셨고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용기만 내면 됩니다. 그러면 진리로 자유롭게 됩니다. 진리로 두려움을 두렵게 만듭시다.
-조재형신부-
작년 사제성화의 날에 교황님께서는 모든 사제들에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같은 내용을 교황님께서는 올해 성소주일에 모든 신앙인에게 말하였습니다. 오늘은 교황님의 편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앙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첫째, ‘감사’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의 능력, 자신의 재능, 자신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잘 사는 것도, 지금 건강한 것도, 지금 높은 직책에 있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런가하면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상실하면 이웃을 탓하거나, 원망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성체성사는 ‘감사’의 마음이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체성사의 중심에는 ‘감사’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둘째, ‘유혹’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습니다. 사제복을 입었어도, 수도복을 입었어도,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어도 유혹은 바람처럼 소리 없이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도 3가지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입니다. 높은 데서 뛰어내려보라는 유혹입니다. 권력을 주겠다는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극복하셨습니다. 악의 세력은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다음에 하지’라는 유혹입니다. ‘남들도 다 그러는 데’라는 유혹입니다. ‘나는 안 돼’라는 유혹입니다. 게으름과 자기 합리화 그리고 열등감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유혹은 공든 탑을 무너지게 하고, 다된 밥에 재를 뿌리게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주님 안에 편히 쉬기까지 내 마음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성덕이 깊어도, 오랜 수양을 했어도 유혹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셋째 ‘고단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하느님의 큰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가야 합니다.
넷째는 ‘찬미’입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만나서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이제로부터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 능하신 분이 큰일을 내게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 이시로다.” 초대교회 신자들도 날마다 모여서 찬미와 찬송을 하였습니다. 행복은 찬미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부모님은 아이들이 기뻐 뛰어노는 것만 보아도 행복해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찬미와 찬송을 드리며, 서로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령의 힘을 저희에게 주시어 주님의 뜻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거룩한 삶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2)
-이영근신부-
그동안 부활시기 내내, 우리는 예수님의 고별담화인 요한복음 13장 후반부부터 14장, 15장, 16장의 다락방에서의 유언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마지막 장면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약해질 때가 올 것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혼자 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요한 16,32)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좌절하고 절망할 것입니다. 의혹에 휩싸이고 혼동에 빠질 것입니다. 각자 제 갈 길로 가도 말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믿음은 “약하고 더듬거리고 무지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강함은 우리의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이신 주님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주님의 믿음이 우리를 지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땅에서 열린다.>의 저자인 루돌프 스테르텐브링크는 “우리가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지탱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제자들의 믿음의 약함을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그들을 질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위로와 굳셈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아니, 선물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평화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33)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남겨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말하는 평화란, 그 어떤 곤란과 슬픔 속에서도 하느님께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을 말합니다.
평화란 단순히 갈등이나 시련이나 고통이 사라진 상태, 분열이나 전쟁이 없는 상태, 혹은 그 어떤 낙담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을 말합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요한 16,33)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당신이 주시는 평화를 말씀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만드는 평화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좋은 환경이나 자기만족에서 얻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오로지 ‘당신 안에서’ 얻게 되는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데서나 평화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자신의 마음 안에서 찾는 마음의 평화가 아닙니다. 오로지, ‘그분 안에서’ 평화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주시고자 ‘당신 안에’ 마련한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당신이 주시는 이 평화는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주님의 믿음이 주는 평화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 안에서’ 얻게 되는 평화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2)
이제 그분이 주신 평화로, 우리도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주님!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옳고도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죄마저 뒤집어쓰고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지는 무능이 이기는 전능임을 알게 하소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에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이 이기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자신을 이기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세상을 이기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용기를 내어라
-반영억신부-
사람의 약점 중에 하나가 ‘따뜻하면 몰려들고 추우면 버리는 것’입니다. 안 그런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되는 것을 보면 인간은 분명 의지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소위 줄서기를 잘못하면 낭패를 봅니다. 굶주릴 때는 달라붙고 배부르면 떠나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인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고 신앙을 고백하자마자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믿음을 고백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이 흔들릴 것을 아셨기에 당신이 유다인들에게 체포될 때 제자들이 도망갈 것이라고 미리 예고하신 것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여 감동을 하더라도 손발에 머물러 증거하거 하기 까지는 갈 길이 멀기만 합니다. 믿음은 아직도 더 무르익어야만 합니다.
이제 곧 모두가 다 각자의 유익한 곳으로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혼자가 아니십니다. 아버지께서 항상 그분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살며 아버지와 하나입니다. 요한 복음 10장38절에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이듯, 제자들과 예수님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 길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언젠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하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처럼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열매는 손발에서 맺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하시며 시련에 굴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정신을 잃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세상을 이긴 예수님을 바라보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용기를 내어라’고 하신 예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용기가 있는 곳에 희망이 있고, 희망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있고 하느님도 계십니다”(성 도미니꼬). 춥다고 버리지도 말고 배부르다고 떠나지도 마십시오! 흔들림 없는 믿음과 소신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굳건한 믿음은 시련 속에서 빛납니다. “조금만 더 참고 이겨내면 하느님의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위로를 얻기 전에 하느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찾아나서는 일부터 해야 할 때입니다”(박병규).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송영진신부-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2-33).”
이 말씀은, 최후의 만찬 때에(체포되기 직전에) 하신 말씀인데,
“내가 세상을 이겼다.” 라는 말씀은, 당시 상황과는 너무 안 어울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길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겼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기는 것으로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 예고 말씀’을 하실 때마다 ‘부활 예고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 말씀도 당신의 승리를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이미 이겼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일의 결과를 알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고,
또 아무도 그것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결과를 알고 계셨으니 십자가 수난의 고통이 덜했을까?”
아마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심하게 고통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이 잘 만들어진 각본대로
진행된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하느님의 뜻(계획)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우리가 보기에는,
항상 그 과정은 대단히 복잡하고, 돌발 상황도 많이 생깁니다.
(대부분 인간의 자유의지 때문에 그렇게 복잡해집니다.)
특히 각 개인의 ‘끝’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개인의 구원과 멸망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모릅니다.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결과’로 이어집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승리자 편에 설 것인가?
패배자 편에 설 것인가?” 라는, 선택과 결단에 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편에 서는 것은 승리자 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박해자 편에 서는 것은 패배자 편에 서는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에, 그의 눈에는 박해자들이 승리자로, 예수님이 패배자로
보였고, 그래서 그는 박해자들 편에 섰고, 그것이 그의 배반입니다.
(다른 사도들은 박해자들 편에 서지는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모두 달아났습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 일이 예수님의 패배로 보였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체포되고,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당하는 모습을 승리로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패배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생각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세상을 이겼다.” 라는 말씀의 이유(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세상은 나를 이기지 못한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전능하신 하느님보다 강한 존재는 없기 때문에, 그 어떤 존재도 하느님을 이길 수
없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분도 이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은,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고 내 편에
서겠느냐? 그것을 안 믿고 박해자들 편에 서겠느냐?” 라는 질문이 되기도 합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도 예수님 곁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이 없다면 예수님을 버려두고 달아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자신의 인생살이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여러 가지 고난과
시련과 불행을 겪어도 굴하지 않고 그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없다면 금방 굴복할 것이고, 포기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것을 예상하셨고, 그래서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너희가 고난을 겪지 않도록 내가 막아주겠다.” 라는 약속이
아니라, “고난을 겪겠지만 굴복하지도 말고 포기하지도 마라.” 라는 격려입니다.
이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6-19).”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무조건 막아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목숨을 잃는 일이 생기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잃지 않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해서 “사는 동안에 사람들에게 미움만 받고,
죽도록 고생만 하고, 결국 목숨을 잃는다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믿는다 해도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신앙생활이 그렇게 힘들기만
하다면 누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또는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행복과 평화를 여기에서 미리 누릴 수는
없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생이나 하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다음에나 누리게 될 천국의 행복은 죽은 다음의 일이고,
우리는 살아서도 그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냥 무턱대고 참으면 되는가?
답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이 말씀의 실제 예를 사도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의회 앞에서 물러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사도 5,40-42).”
박해를 받아도 굴하지 않고, 또 기쁨과 평화를 잃지 않고,
흔들림 없이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의 모습은 승리자의 모습이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이미 누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무턱대고 참기만 한다고 인내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주님께서 나를 지켜 주신다는 믿음 속에서 참고 견디는 것이 인내입니다.
그 믿음과 인내에서 힘과 용기가 생기고, 기쁨과 평화를 얻게 됩니다.
(말로는 단순하지만, 실제로는 꾸준히 노력해서 도달해야 하는 일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삶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6,29-33: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제는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시고 비유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29절) 제자들은 스승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것 같이 이야기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지난 토요일 복음에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줄 때가 온다.”(16,25)고 하셨는데 그때는 아니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비유로 말씀하시지만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고, 자신들이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하였고 그분을 체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30ㄱ절) 선생님이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묻기도 하고 질문도 받는다. 묻기도 하고 질문도 받는 것은 학생들이 더 많이 알게 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묻는 것이지 자기가 알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그분께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분은 제자들이 묻기도 전에 그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의 생각을 아시는 것은 주님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30ㄴ절)고 한 것이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31절)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심으로써 제자들이 나약한 어린애라고 하시는 것이다. 앞에서 그들은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으며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제자들이 스승님께서 잡혀가시자 행동으로 그분을 버렸으며, 믿음마저도 버렸다. 제자들은 혼란에 빠졌고 지금 믿는 것조차 버렸다. 제자들은 완전히 절망에 빠져 자기들의 믿음이 죽게 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그분을 떠나게 되어 그분을 일이보지 못하고 만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32절)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33절) 제자들은 총독들과 임금들 앞으로 끌려가 온갖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그분의 이름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고백은 언제나 지배자들의 격노를 불러 일으켰다.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어도 사악한 범죄자를 대하듯 그들에게 온갖 형벌과 고문을 가한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순교자들은 언제나 평화를 누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신 뒤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는 제자들이 그분 안에 머물며 평화를 누리게 된다. 그때에 그들은 환난을 받으면서도 그분을 버리지 않았다. 이 고을 저 고을로 피해 다녔지만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 않았다. 박해를 당하지만 그분에게서 달아나는 도망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을 피난처로 삼고 그분 안에서 평화를 누렸다. 성령을 받았을 때,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며 더욱 용기를 내었기 때문이다. 이 평화를 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궁극적 목적이었다. 이 평화는 끝이 없을 것이고 모든 선행과 선의는 이 평화를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하신 덕분에 우리는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용기백배한다. 그리고 그분은 참으로 세상을 이기셨다. 그래서 우리는 살게 되었다. 우리가 말씀을 모른다는 것은 두려움 때문에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고 그분을 팔아넘기는 것은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덕을 위해 이겨낸 모든 환난의 결과는 기쁨이며, 모든 수고의 결과는 안식이며, 모든 치욕의 결과는 영광이다. 즉 덕을 위한 모든 고난의 결과는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영원히 그분과 함께 머물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세상을 이기며 참된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아가도록 주님께 도움을 청하자.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33)
-한상우신부-
지나가는
시간입니다.
지쳐있는
우리들에게
용기를 내어라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내맡기는 용기를
주님께 청합니다.
부서져도
쓰러져도
다시 시작하는
용기입니다.
시련을 통해
용기를 배웁니다.
실패를 통해
용기를 배웁니다.
삶이란 이와같이
용기가 빚어내는
용기의 연속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주님께서도
용기를 내어
십자가의 길을
완주하십니다.
삶의 주인이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믿습니다.
용기가 우리를
비추고 쓰러진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믿음은 용기와
함께 자라납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복음 말씀에는 세 번의 "그러나"를 통해 세 차례의 반전이 있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요한 16,31).
첫 번째 "그러나"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제 알아듣겠다고, 이제는 믿는다고 고백하자마자 예수님의 입에서 나옵니다. 너희가 믿는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두려움으로 날 버리고 도주하리라고 예언입니다. 이는 제자들을 탓하거나 부끄럽게 만드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뒤에 나옵니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요한 16,32).
자기들이 스승을 버리고 흩어지리라는 말씀에 흠칫 놀랐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두 번째 "그러나"로 위로하십니다. 너희가 혹 날 버리더라도 난 혼자가 아니니 너무 미안해 말고, 자책하지도 말고, 스스로에게 너무 실망하지 말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마태 26,31; 즈카 13,7 참조)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신 바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너희에게 이루어진 것이니 너무 괴로워하지 말라는 당부 같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33).
그러니 의기충전한 제자들에게 굳이 "그러나" 하셨던 이유는 결국 "그래도 나는 괜찮다"는 속내를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당신이 제자들에게 주신 평화, 세상의 그것과 다른 평화가 자기 혐오나 죄책감으로 깨지지 않길 바라시는 겁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세 번째 "그러나"로 제자들에게 무한한 격려가 이어집니다. 고난과 박해와 죽음이 없다는 게 아니라,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결국 당신이 승리와 생명을 쟁취하시리라는 확언입니다. 그러니 제자의 길은 어쩌면 결과를 알고 시작하는 전투와 같을 수도 있습니다.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 선교 내용을 담았습니다.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그들은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사도 19,6-7).
바오로는 요한의 세례를 받은 에페소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내리시도록 돕습니다. 마치 오순절 현장에서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이 오셔서 신령한 언어와 예언의 은사를 받게 되지요. 그 수가 완전한 수, 열둘쯤 되었다는 것은 온세상 모든 이를 자녀로 삼으시려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는 전망을 담고 있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바오로는 석 달 동안 회당을 드나들며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토론하고 설득하면서 담대히 설교하였다"(사도 19,8).
우리는 지금 바오로 사도의 활약을 보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 같은 뜻과 지향으로 목숨을 걸고 선교하는 다른 사도들의 모습 또한 그를 통해 관상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몇몇 제자들 말고도 교회 전승과 역사가 기억하는 제자들, 또 세상 기록에서 이름을 거두어들인 무명의 숨은 제자들까지, 그들 모두가 "세상을 이기셨다!"는 예수님 말씀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약함을 다 아시지만 "그러나" 믿어 주셨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들이 자기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당신을 따르길 바라셨으니까요. 과연 제자들은 그렇게 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역시 제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부족함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시고 격려하십니다. 약함을 부여잡고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약함에 성령께서 오시면 무언가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처럼 우리 삶에도 무수한 "그러나"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약함, 타인의 부족함, 세상의 불합리 앞에서 속으로 고요히 "그러나"를 되뇌이며 주님의 생각과 결을 같이 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단죄와 책망보다 신뢰와 위로, 격려가 행복한 반전을 선물할 것이라 믿습니다. 아멘.
믿는다고 다 따르는 것은 아니다.
-김찬선신부-
오늘 제자들은 자기들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저희는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이 믿음 고백을 바로 부정치 않으시고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고 수긍하시는 듯 되물으시는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하시며 제자들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말이 되는 것입니까?
믿는데도 주님을 떠날 거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우리의 상식으로는 믿으면 떠나지 않는데 그럴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고 보면 믿는다고 다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안다고 다 따르지 않는 것처럼 믿는다고 다 따르지 않습니다.
복음에서 악령들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는 것을 다 알지만
예수님을 자기들과 상관없는 분으로 여기고,
구원자가 아니라 자기들을 괴롭히는 분으로 여기기에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오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은 알았고,
그래서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라는 것을 이제 믿게까지도 되었지만
그러나 그런 주님을 결국은 따르지 못하고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제 믿는다.'고 한 그때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자기들이
주님을 배반하고 떠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의 배반을 주님께서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는 결코 배반하지 않을 것이고
더 나아가 목숨까지 바칠 거라고 하였지만 결국 배반했듯이
다른 제자들도 같은 마음으로 처음엔 떠날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애초부터 주님을 따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떠난 것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라는 것을 이제 믿는데
앞서 아버지에게서 나와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고 말씀하신 대로
이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실 거라는 것도 믿는 것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 아버지께 갈 생각이 없거나
적어도 지금은 주님을 따라 아버지께 갈 생각이 없습니다.
사실 제자들처럼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 중에도
천당 가는 것은 좋지만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싫은 사람이 꽤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천당 가는 것이 좋은데 왜 이 세상을 떠나기 싫어합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찾아온 부자 청년에게 주님께서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자
그는 주님 따르기를 포기하고 울상이 되어 떠난 얘기를 하면서
저는 이런 질문을 짓궂게 던지곤 합니다.
지금 천당 가기를 원하는 분 계시냐고.
다음으로 지금 당장 가기를 원하시는 분 계시냐고.
그런데 천당 가는 것에는 대부분 손을 드시는데
지금 당장 가시는 것에는 소수가 손을 드십니다.
그렇다면 천당 가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 겁니까?
이 세상 사는 것보다 천당 가는 것을 진정 좋아하는 겁니까?
천당 가는 것이 이 세상 사는 것보다 좋으면 지금 당장 간다고 할 텐데
대부분이 살 때까지 살다가 죽게 되면 지옥보다는 천당 가고 싶다는 거지요.
아무튼 믿기에 자기 전 인생을 걸고 주님을 따르는 믿음과
믿지만 주님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가는 믿음도 있음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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