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5월 24일 주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Margaret K 2020. 5. 23. 19:11

2020년 5월 24일 주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오. 28,16-20 )

 

Go, therefore, and make disciples from all nations.

Baptize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and teach them to fulfill all that I have commanded you.

I am with you always until the end of this worl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의 모습을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오른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부활과 발현을 목격하고 체험하였습니다. 더 이상 새롭게 체험할 거리가 없는, 그야말로 예수님에 대하여 모든 것을 보고 느낀 이들이 지금 갈릴래아의 산에 올라와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가운데 더러는 의심하였습니다. ‘의심하였다’라고 번역된 그리스 말의 본디 의미는 ‘주저하였다’입니다. 모든 것을 보았음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데 주저합니다. 신앙이란 그런가 봅니다. 애써 노력해서 깨닫고 이해하였다 싶다가도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막막한 것이 신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많은 성인이 이른바 ‘어두운 밤’과 ‘사막’을 겪었고, 또 지나왔습니다. 신앙하면서 체험하는 의심과 주저함은 신앙의 반대말이 아니라 신앙 그 자체입니다.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 신앙이고, 의심하고 주저하다가도 다시 힘을 내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모습 안에 늘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멋지고 잘난 이들을 선별하시어 화려한 본보기로 내세우시고자 제자들을 부르시고 소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의심하고 주저하는 이들의 나약함 안에서 당신께서 몸소 움직이시고 가르치시고자 산으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께 우리 삶의 자리를 조금씩 내어 드릴 수 있도록 오늘의 삶을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 삶에 빈자리를 만드는 일입니다. 그 빈자리에서 천상과 지상이 온전히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 승천의 참된 의미입니다.

 

 

주님 사랑의 중개자

-키엣 대주교-

 

우주선은 서로 만날 수 없는 멀고 먼 하늘과 땅을 연결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인간과 신을 연결해주는 중개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태어나셨고 돌아가신 후 지하 세계에 묻히셨지만 부활하시어 다시 땅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구름에 감싸여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 옆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하늘은 사랑으로 하나된 삼위일체 하느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승천이란 물리적 공간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가장 고귀하고 충만한 생명을 일컫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알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신 것이 아니라 더 확실하고 강한 새로운 존재가 되셨습니다.

우리 곁을 떠나신 주님께서는 이제 그 어느 곳에도 계십니다. 하느님께 인도하는 성경 속에 계시며, 영혼의 양식을 주시는 성체성사 안에 계십니다. 함께 기도하는 형제 자매들 안에 계시며 사랑과 자비를 갈망하는 소외된 이웃의 눈빛 속에 계십니다. 또한 더 아름다운 세상, 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들 안에 계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승천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언제나 우리 모든 사람 옆에 영원히 함께 하는 존재가 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도달해야 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운명이 곧 우리 인간의 운명이라는 믿음을 주시기 위해 고귀한 생명의 세계로 먼저 들어가심으로써 우리를 하느님께 직접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해 준 완벽한 중개자이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이 바로 우리를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이 우리는 삼위일체의 사랑과 삶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을 사랑하시고,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이러한 깊은 사랑의 교감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주님과 같은 중개자가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더 많은 의미 있는 만남을 갖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중개자가 되십시오. 사랑을 전하는 만남이 커질수록 세상은 더욱 깊은 사랑의 교감으로 서로 돕고 아끼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르고 주님의 겸손과 봉사, 사랑의 길을 따른다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계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중개자가 되도록 인도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승천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우리 곁에 존재하십니다. 함께 하시는 주님을 느껴보십시오.

2. 주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중개자로서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3. 주님의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겠다

-임상만신부-

 

마태오 복음의 마지막 장은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중 마지막 부분인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을 만나서 나눈 이야기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에게 선교와 더불어 세례를 주라는 명령과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으로 끝난다.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이스카리옷이 죽고 남은 11명의 제자는 갈릴래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은 수백 명이 넘는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시어 그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셨다. 

예수님의 이 명령은 교회가 해야 할 일,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다. 그래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선교에 힘써야 한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13)라고 선포한다. 바오로 사도는 이어서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라고 하면서, 생각이나 기도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입을 열어 상대에게 말을 하고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지상 명령이기 때문이다.

신자들의 자발적 선교와 순교로 이뤄진 한국 천주교회는 축복받은 교회였다. 하지만 요즈음은 많은 신자가 선교에 관심이 사라진 듯하다. 이는 선교를 하면 더 귀찮은 일들이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예비신자를 신앙적으로 챙기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돌봐야 하는 예비신자 때문에 자기가 누릴 시간이 없어져 개인 신심 활동을 열심히 함으로써 선교의 의무를 대신하려 한다. 

그러나 선교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이다. 후에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보다는 얼마나 선교를 했는지 물어보실 것이다. 그 대답에 따라 천국과 연옥의 갈림길이 될 수도 있다. 우리도 누군가의 선교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선교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의 사랑을 선물로 받지 못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선교는 복음의 빚을 갚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이에게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태 28,20) 이것은 결정적인 임마누엘의 약속이다. 임마누엘로 예언되고(이사 7,14), 임마누엘로 탄생하신 예수님께서는(마태 1,23) 결국 승천하시기 전에 다시 한 번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겠다고 확증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사실 인간은 그 누구도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할 수 없다. 이별이 있고 분열도 있고 사별도 있다. 주님께서는 끝날까지 ‘항상’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다시 부활하셨으므로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의 약속은 우리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고, 모든 이들을 구원해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따르는 한 우리에게 변함없는 약속으로 주어진 것이다. 사명과 약속은 함께 있다. 

부활을 기념하는 이 시기에 예수님의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이 약속을 다시 새김으로써 현실에 대해 더 이상 좌절하지 말고 훌훌 털고 일어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매번 깜짝 놀랄 일들을 선물로 주실 것이다.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시편 8,4

 

그리스도인은 이미 승천한 하늘의 존재입니다.

-장재봉신부-

 

어떤 마음으로 오늘 아침을 여셨는지요? 저는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오래도록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스테파노 성인처럼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뵈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이 덜 자란 마음을 주님께서 어여뻐하실 것만 같아, 잠시 설레기도 했네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무엇보다 사랑하는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향한 하느님의 기쁨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며 매일 매일 “보시기에 좋다”시던 그 세상이 인간들에 의해서 일그러지고 파괴되는 것이 너무도 가슴 아팠던 하느님께서 오늘은 크게 웃으며 안도하셨을 것만 같으니까요. 당신 아들 예수님의 희생으로 세워진 교회를 통해서 상처투성이인 세상이 고쳐지고 치유될 것을 기대하시며 하느님의 마음은 벅차오르셨을 것도 같으니까요.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으로 세상에는 교회를 통한 하늘길이 환히 열렸습니다. 어느 누구나 하느님의 뜻을 듣고 하느님의 마음을 이해하여 하느님의 시선으로 살아갈 수 있는 복된 은총이 선물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던 그 날,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의심”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기막히고 갑갑한 일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어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한 세상의 불신을 생각하면 쉬이 이해됩니다. 솔직히 처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기를 낳았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니까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무조건적으로 목숨을 바치셨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니까요. 그러니 죽어 무덤에 묻힌 예수님이 멀쩡한 몸으로 살아 승천하셨다는 사실은 더더욱 믿어지지 않을 겁니다. 때문에 세상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증거’를 요구하여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는데요. 무어라 똑부러지게 답을 할 수 없으니 난감해지기도 하지요. 
 

벤자민 웨스트의 ‘승천’.


그런데요. 우리는 그 진리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작은 아기로 세상에 오셨고 마침내 우리 죄를 씻어주시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으며 마침내 부활하시어 승천하셨으며 이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의심치 않습니다. 

이 깨우침이야말로 성령의 도우심이기에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에 임하셨다는 증거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힘이 그 증거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며 기쁘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고백이 성령입니다. 때문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증거를 요구하는 세상에 우리의 복음적 삶이 곧 해답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처럼 손해를 보면서 감사하는,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주며 행복해하는, 져주고 또 전부를 내어주면서도 기뻐하는 천국인의 삶을 살아냄으로써 세상의 우문에 대한 현답을 줄 수가 있음을 깊이 새기게 됩니다. 

성경에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189개의 질문을 드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는데요. 예수님께서 답하신 것은 겨우 3개에 불과하답니다. 이야말로 세상의 우문에 당신의 삶으로 답을 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세상의 모든 의문은 하느님의 마음과 시선으로 대할 때에 저절로 풀리는 것임을 일깨운 것이라 싶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처럼 삶으로 해답을 알려주라는 일깨움이라 믿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약속을 내 방법으로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주님의 약속을 믿고 묵묵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인은 하느님의 계획을 앞당기려 애쓰지 않고 오로지 순명합니다. 이러고저러고 모자란 남의 삶을 마음에 담지 않습니다. 다만 내 안에 넣어 주신 믿음의 유전자를 잘 키우기 위해서 골몰합니다. 타인이 아닌 내 삶을 꼼꼼하고 세밀하게 점검하는 일에 철저합니다. 스스로를 살펴, 원하지 않는 고통도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이겨내며 살아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점검합니다. 어떤 일에서나 기도하고 인내하며 감내할 힘을 청하고 있는지, 어떤 처지에서나 감사하고 긍정하는 마음을 지녔는지, 숨이 턱에 닿을 만큼 힘든 고통일지라도 믿고 희망하며 사랑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마음을 단속합니다. 

고통과 슬픔에 젖어 한탄하지 않고 새 날과 새 일을 바라보며 희망하는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인 까닭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순명했던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이 땅에서 승천의 삶을 살아가는 비법이며 묘수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주님께서 주신 명령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은 그닥 어렵지가 않습니다. 정말 이뿐일까 싶은 만큼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는 것뿐이니까요. 번잡한 생각을 정리하는 것만으로 이미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니까요. 

주님께서는 승천하시는 그날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는 멋지고 대단하고 웅대한 사명을 부여해주셨습니다. 

이천 여 년 동안, 이 아름다운 명령을 고스란히 살아낸 교회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고귀한 명령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우를 범한다면 하느님의 뜻은 세상에서 잊힐지 모릅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은 더디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당신께서 주신 명령을 제대로 살아낼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할 명백한 이유입니다. 내가 살아낸 삶이 곧 세상이 던지는 의문에 대한 해답이며 정답이 되는 것이 하느님께 기쁨을 선물해 주는 최고의 삶이라는 걸 잊지 않기 바랍니다. 제발 하느님의 자녀답게 천국의 법에 예민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신속히 반응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단순한 진리를 명심하여 이 땅에서 하늘의 지혜를 살아내시길 당부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승천한 존재임을 깊이 새기시어 이 땅에서 천국인의 품위를 지켜 주시길, 소원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승천인의 긍지와 천국인의 품격을 이 땅에서 살아냄으로 하느님께 큰 웃음을 선물해 드리는 자녀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주님

-허영엽신부-

 

몇 년 전 동생 신부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한 달간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자신이 체험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순례 초기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많은 사 람들이 함께 길을 걷는데, 보름 정도가 지나면 걷는 속도가 사람마다 달라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 혼자서 끝도 없는 들판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한 채 걸은 적이 있 었답니다. 그날 동생은 아침부터 뜨거운 햇볕 아래서 묵주 기도를 하면서 걷다가 오후쯤 시원한 그늘이 있는 숲속을 지나갔다고 합니다. 동생은 그 숲속에서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돌아가신 부모님과의 만남에 대해서 동생에게 더 이상 묻 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이상합니다. 하지만 동생 이 세상을 떠난 부모님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계속 제 머릿 속을 맴돌았고,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마지막 만남의 순간 이 떠올라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며칠 후 저는 ‘우리가 믿는 부활의 체험이 바로 그런 것 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원 히 사는 것, 원한 생명, 부활은 우리 믿음의 핵심이고 전 부입니다. 사람들은 부모님을 여의는 것을 흔히 하늘이 무 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에 비유합니다. 저도 부모님이 갑자 기 돌아가셨을 때 그러한 체험을 했습니다. 죽음의 깊은 구  속에서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

로 부활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주님 안에 서 다시 재회할 수 있다는 부활의 믿음이 큰 슬픔을 이겨내 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부활의 완성, 마침표를 찍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바로 세상과 천국을, 하늘과 땅을 하나로 묶어주고 서로 통교하게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사흗날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신 것이 바 로 승천입니다. 

1980년부터 주님 승천 대축일을 홍보 주일로 정해 지내 고 있습니다. 무엇을 홍보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이란 바 로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 은 부활의 믿음을 다른 이에게도 전하는 거룩한 사명을 지 닙니다.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사명은 선교이기 때문입니 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선 포하며 세례를 베풀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가르치 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우리 삶의 현 장에서 잘 홍보하고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물론 어렵고 힘 든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말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무엇을 알릴 것인가?

-오대석신부-

 

오늘은 홍보 주일입니다. 홍보, ‘널리 알리다’라는 뜻인데요. 그럼, ‘무엇을 알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겠지요? ‘왜 알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본능과도 같은 것이니까요.

저는 홍보국장으로서 교회 소식을 알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요? 어떤 분은 가족에게 가족으로 서 무언가를 알리시고, 어떤 분은 친구에게 친구로서, 본당 교우로서, 직장 동료, 같은 국민 등등. 누군가에게 누구로서 무언가를 계속 알리는 것, 태어나면 울음으로써 태어남을 알리고, 죽으면 죽 었다고 알리는 모습까지. 어떻게 보면 우리 삶이란 알려지는 내용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 의 삶을 끊임없이 알리는 인간, 참 신비하고 흥미로운 존재입니다.

교황님께서 오늘 홍보 주일 담화 주제를 ‘이야기’로 정하셨습니다. 담화를 통해 “인간은 이야기 꾼”이며, “모든 사람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이야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알리는 내용 즉 우 리네 삶 전체는 하느님의 이야기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우리 삶을 통해 당신을 알리신다는 것입니다.

참 기쁜 소식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당신을 알리신다니 말입니다. 늘 기뻐하고 감사하게 사는 나를 통해 하느님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사람들에게 알리십니다. 코로나19의 두려움 앞에 서도 이웃에 대한 배려와 믿음을 잃지 않는 나를 통해 하느님은 당신을 알려 주십니다. 아픔과 상 처를 이겨내려는 나를 통해, 좋은 것을 먼저 나누려는 나를 통해, 어려움을 함께하려는 모습 안에 서,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처럼 먼저 이해하고 위로하며 사랑하고 용서하는 모습 속에서, 보잘것없 이 작디작은 성체를 모시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사는 데에 인생 전체를 거는 여러분을 통해 하느님은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당신을 알리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가장 잘 알려 주시기 위해 선택하신 분이며, 하느님을 가장 잘 알려 주시는 분이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오늘 이야기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하느님이신 분께서 여러분과 함께 끝까지 가신답니다. 이 한 말씀에 용기를 내어, 여러분 삶 이야기를 늘 알리며 엮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희망과 기쁨을 안고 삽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박병래신부-

 

  “교회에는 호교론자보다 증거자가 더 필요합니다.”(교황 비오 12세)   전임 신부님께서 집무실 벽에 붙여놓은 문구입니다. 말하기보다 직접 삶으로 실천하려고 무척 노력하셨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는 것이 말하기보다 힘들다는 것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절실하게 노 력하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들을 지킬 것입니다.”(요한 14,15)  “내 계명들을 받들어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요한 14,21) (200주년 기념 성경)  사람들은 ‘계명’이란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생각해 봅니다. 다른 사람들도 저처럼 부담스러울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계명’을 ‘인생사용지침’ 정도로만 생각하면 계명을 욕되게 하는 것일까라는 좀 뚱딴 지같은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러면 계명이 덜 무겁게 느껴져, ‘가벼워지면 들고 다니기가 좀 수월할지도 모르 겠다.’ 그런 생각이지요.   요즘은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들도 많지만, 길거리에 버려진 고양이, 또 야생 고양이들도 있습니다. 야생 고양이들은 입가가 빨갈 때가 많습니다. 금방 식사를 했다는 표시지요. 새들이 고양이에게 잡아먹히지 않 으려면 방심을 하면 안 됩니다. 늘 경계를 하고 민첩하게 움직입니다. 딱새는 작지만 모양도 예쁘고 지저귀 는 소리도 농부의 귀를 즐겁게 합니다. 인가 주위에 둥지를 틀고, 사람들과 좀 친근한 텃새라고 생각됩니 다. 주로 암수 두 마리가 함께 다니는데 한 마리만 있는 딱새를 보면 애틋한 마음이 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삶의 나침판, 삶의 지침이 ‘계명’이고, 우리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 법이 계명을 사는 노력일진대 부활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또 새로이 노력해야겠지요.   ‘오뚝이’는 넘어지는 것을 가정하고 만들어졌다는 게, 만든 사람의 인생에 대한 이해가 놀랍습니다. 주님 께서는 나약해 넘어지고, 잘못이 아파 눈물 흘리는 우리들을 돕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어쩌면 우 리들을 오뚝이로 이미 알고 계셨으리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토록 사랑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어떤 책의 제목인데, 우리를 위해 살과 피를 내놓으시고,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신 주님의 사랑을 참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변명하지 말고 우직하게, 오뚝이같이 또 살 수 있 기를 염치 불고하고 기도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에디슨의 명언을 하나 말해 보라고 하면, 아마 대부분이 이 명언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에디슨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한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영감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천재는 1%의 영감이 없으면, 99%의 노력도 소용없다.” 

노력의 중요성을 사람들이 강조하기에 이렇게 바뀐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천재는 곧 노력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1%의 영감 없이는 노력도 소용이 없다고 에디슨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1%의 영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국어사전을 보니 이렇게 정의합니다. 

1. 신령스러운 예감이나 느낌. 

2.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기발한 착상이나 자극. 

신앙인에게 영감은 어쩌면 성령의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것은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 없이는 천재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어떤 능력을 발휘할 수도 없습니다. 이 은총에 우리의 적은 노력이 더해져서 더 큰 힘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1%의 은총이 99%의 노력보다 더 중요하다.’

자기 노력만으로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교만은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힘에 맡길 수 있는 우리의 겸손을 통해 세상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천재’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인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신,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는 구절을 전해줍니다. 제자들에게 정말로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을 맡기신 것이었지요. 

제자들은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수난 예고에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호언장담했었지만, 잡히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도망치는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한심해 보이기까지 하는 제자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중요한 일을 맡기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의 이 약속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기에 함께 하십니다. 따라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추고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이지만,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커다란 역할을 담당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재판관인 양심이 있다. 그러므로 항상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톨스토이). 

 


슬럼프


어떤 분이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도 슬럼프를 겪은 적이 있으세요?”

운동선수의 경우 슬럼프가 오는 경우가 자주 있다고 합니다. 글 쓰는 작가도 무기력해지며 아무것도 하기 싫은 슬럼프가 온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제로 사는 저의 경우는 어떤지를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글이 잘 안 써질 때가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슬럼프라고 부를 정도의 무기력감을 느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슬럼프는 뜻대로 잘 안 풀리는 상황과 게을러져 버린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그럴듯한 핑계일 뿐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공감이 됩니다. 게을러져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 불안감을 느꼈던 적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께 기도하면서 함께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게을러지려는 나 자신을 바로 잡을 수 있게 해주십니다.                   

 

믿으려거는 전하라!

-전삼용신부-

 

저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 개신교 학교를 나왔습니다. 그래서 매주 예배를 보아야 했고 종교 수업도 해야 했습니다. 중학교 때 종교 수업을 하시던 선교사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몇 년 동안 돈을 모아서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아프리카 오지로 선교를 하러 가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학교도 없는 정글에서 아이를 키우겠다는 것도 대단했고 그것에 아내도 동의했다는 것이 참 대단하게 보였습니다.

      어느 날 돈이 다 모여 아프리카로 떠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분이 참 좋아서 다른 종교 교육 교사가 바뀌는 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은행에서 돈을 찾아 집에 올 때 골목에서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몇 년을 걸려 모은 돈이었지만 선교사님은 그 돈 봉투를 강도에게 그냥 줘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꿈을 접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할 때는 잘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계속 그분에게 종교 수업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며칠 뒤 희한하게도 개신교 선교 단체에서 모든 자금을 지원해 줄 테니 선교를 떠날 수 있느냐고 연락이 왔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그 이야기를 수업 시간에 하면서 매우 신이 나 계셨습니다. 분명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고 계심을 섭리를 통해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지만, 반드시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체험하면 기쁨에 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날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가르치고 세례를 주라고 명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하십니다.

      승천하시는 예수님은 더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다만 복음을 전할 때 당신께서 함께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천사들만 본 여인들은 그 복음을 전하러 가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든든하게 살고 싶거든 먼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저에게 주님께서 저와 함께 계심을 언제 가장 많이 느끼느냐고 묻는다면 ‘강론 준비할 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서품을 받고서는 강론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해야 할 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해, 두 해가 지나면서 새로운 것들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정말 피가 마를 지경이었습니다. 사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말은 아마 “했던 강론 또 하네!”일 것입니다. 어떤 때는 고해성사 주면서 강론을 생각하다 고해 내용을 듣지 못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제단 위에 딱 올라가면 강론 거리가 막 떠오르는 것입니다. 심지어 복음을 읽는 순간 떠오르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정말 제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게 됩니다.

 

      그런데 교구청으로 들어가니 강론 쓰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조금 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을 쉰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생겼습니다. ‘부모님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우리를 한 번도 굶기신 적이 없는데 목자가 자기 양들을 굶길 수 있는가?’, 혹은 ‘양식을 제 때에 주지 못하는 깨어있지 못함으로 주님을 갑자기 맞이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두산 천지에 오를 일이 있었는데 그때 “천지를 맑게 보게 해 주신다면 강론을 다시 시작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천지는 구름 한 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구름이 약간 흘러가는 것을 말한 것이지 이렇게 완전히 맑은 것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며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제가 강론을 다시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물론 영성관에서도 강론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성체 조배실이 바로 사제관 옆에 있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아침마다 성체 조배실에서 한 시간만 앉아있으면 매번 새로운 강론을 주십니다. 한 번도 그러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요즘만큼 강론 쓰기가 편한 적이 없었습니다. 전엔 다음 날 강론을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서 졸음을 쫓아가며 인터넷을 뒤졌던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할 말이 없었는데 요즘은 성체 앞에만 앉아있으면 예외 없이 강론 거리를 주십니다. 물론 마음 한편에는 ‘내일은 안 주시면 어떡하지?’라는 불신이 여전히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의심은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강론 준비할 때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어머니가 밖으로 나가실 때 숙제하라고 하셨다면 돌아오실 때 똑같이 숙제했느냐고 물으실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어머니를 만날 준비는 바로 마지막 때 하신 말을 실행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어머니가 기다려지고 사실 이미 만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떠나실 때 하신 명령은 우리를 만나러 오실 때도 똑같이 하실 것입니다. 만약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았다면 내가 예수님을 두려워하며 만나기를 꺼리게 될 수 있습니다. 믿고 싶거든 전합시다. 전하면 만나게 되고 만나면 믿게 됩니다. 믿으면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은 ‘Uncontact Society(비대면 사회)가 가속화 될 것이라고 합니다. 개인들은 접촉이 아닌 접속의 삶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백화점에서 물건을 구매하기보다는 인터넷 쇼핑을 통해서 물건을 구매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혼밥, 혼술 문화가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카카오톡, 페이스북, 트위터는 굳이 만나지 않아도 소통할 수 있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화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발전하였습니다. 저도 카카오톡을 통해서 한국에 있는 동창들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행을 가지 않아도 바다 건너에 있는 사람과도 소통하고 있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원하는 물건을 집 앞에서 받아 볼 수 있는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은 비대면 사회를 더욱 익숙하게 할 것입니다.

 

학교도 모습이 바뀌었습니다. 교실은 학생과 선생님이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운동장은 학생들이 함께 어울려 노는 장소였습니다. 코로나19는 이런 학교의 모습도 바꾸었습니다. 개학은 연기 되었고, 컴퓨터 앞에서 학생과 선생님이 만나고 있습니다. 사이버 대학, 방송통신 대학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교육현장의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미사가 중단된 가운데 방송으로 진행되는 미사의 시청률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본당이 홈페이지를 통해서 미사를 공유하였고, 사제들은 본당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교황님께서도 신자들이 없는 가운데 방송으로 성삼일 전례를 진행하였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도 이와 같은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신학적인 성찰을 해야 할 것입니다.

 

직장의 모습도 바뀌었습니다. 화상회의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화상회의는 불필요한 말을 줄일 수 있게 하고 있으며, 문제를 파악하는 사람이 이야기를 하기에 오히려 문제 해결을 더 빠르고 쉽게 한다고 합니다.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도 화상회의를 통해서 G20의 정상들에게 코로나19에 대한 한국식 방역 모델을 설명하였습니다.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회사를 운영하는 비용도 절감된다고 합니다. 혈연, 지연, 학연, 성별, 세대, 이념이 사회를 구성하는 고리가 되었지만 코로나19 이후로는 능력, 업적, 재능, 창조성, 기술, 참신함이 사회를 구성하는 고리가 되고 있습니다. 북미주 사제협의회, 동북부 사제협의회, 브루클린 사제협의회도 카카오톡으로 회의를 하고, 정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대면 사회와 비대면 신앙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아버지께로 갈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진리의 협조자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다.” 제자들은 비록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고, 마귀를 쫓아내었고, 병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심을 믿으며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비대면 사회에서 교회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성서입니다. 성서를 읽고, 성서를 쓰는 모임이 있으면 좋습니다. 성서 백 주간, 청년 성서 모임이 있으면 좋습니다. 마르코 복음으로 성서공부를 했었습니다. 신학적인 내용도 필요했지만, 사회학적인 내용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본당에서 성직자, 수도자들은 교우들과 함께 성서공부를 하면 좋겠습니다. 복음 나누기 7단계는 성서를 묵상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주님을 초대하고, 주어진 본문을 읽습니다. 그중에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보물을 찾은 것처럼 기뻐하며 선포합니다. 성서 말씀을 읽고 느낀 점을 나누어도 좋고, 생활 나눔을 해도 좋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매일 새벽에 그날의 복음 묵상을 본당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일이 있어서 평일 미사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읽으셨고, 좋아하셨습니다. 하루의 시작을 복음을 묵상하면서 시작해서 좋다고 하셨습니다. 미주 가톨릭 평화신문 홈페이지에도 오늘의 묵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묵상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말씀에 충실한 신앙생활은 비대면 사회에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주는 날개가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영근신부-

 

 오늘은 주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신 주님승천대축일입니다.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주신 날입니다. 그 누구도 열지 못했던, 아벨의 의로운 피로도 아브라함의 굳은 믿음으로도, 모세의 열성으로도 예언자들의 충성으로도, 결코 그 누구도 열수 없었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닫힌 하늘의 문을 그리스도께서 열어주신 날입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는 모두 승천에 대한 말씀입니다.

<1독서>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시는 장면인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자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흰옷을 입은 사람 둘이 나타나 말합니다.

왜 하늘만 쳐다보고 서 있느냐?”(사도 1,11)

 

하늘, 그것은 지붕이 없는 저 위 어디쯤의 어느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무소부재하시니, 그 모든 곳이 하늘입니다. 특별히 하느님이 내 안에도 계시니, 내 자신이 하늘입니다.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거처이니 말입니다. <2독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 편에 앉히심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복음>은 승천하시어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을 전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승천에 대한 이야기가 몇 군데 나옵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담의 6대 후손인 에녹이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하느님께서 데려가셨는데(5,24), 이를 두고 <히브리서>에서는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옮아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1,5). <열왕기 하권>에는 예언자 엘리야를 하느님께서 회오리바람에 태워 하늘로 데려 올라가셨고(2,11), <토비트서>에서는 라파엘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2,20).

그렇다면, 승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곧 사도신경의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믿나이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하늘이 물리적인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듯, 승천도 물리적인 하늘의 어느 공간에 좌정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승천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로 어느 한 장소로 있던 예수님께서, 이제는 어느 공간에서나 같이 계시는 새로운 모습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심을 의미합니다. 곧 승천을 통해서 육신의 모습은 사라지셨지만,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신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심과 동시에, 우리에게도 그 영광을 주시려 찾아오심을 뜻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처럼, 승천은 떠나감이 아니라, 오히려 오시어 함께 계심을 말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는 새로운 모습으로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시오 벗이요 동반자이십니다. 그러니, 영광의 왕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이 식탁의 자리에 와 계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당신의 몸과 피를 먹이십니다. 이토록, “주님 승천 대축일인 오늘은 우리에게 복이 내리는 날이요, 우리가 영광을 입은 날입니다.

승천은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았다.”(마태 28,18)라고 말씀하셨듯이, 영광스럽게 하늘나라에 들어가시어 모든 것의 주님이 되신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지상 삶의 완성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삶은 우리가 단지 기억할 수 있는 과거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현양되신 주님께서는 이제 장소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으시며, 항상 우리에게 가까이 현존하심을 의미합니다. 곧 세상 끝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권능을 지니신 주님으로 살아계시고,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영광을 모든 민족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오늘은 홍보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의사소통의 참된 힘은 이웃되기(48차 홍보주일 담화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이웃이 될 수 있는가?를 답하셨습니다. 곧 어려운 형제를 돌보아주는 것이 이웃이 되는 길임을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사소통이 고통을 달래주는 향유가 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맛좋은 포도주가 되길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웃되기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승천의 삶이 될 것입니다. 곧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며 걸으며, 동료와 손을 잡고 걷되 다름 아닌 그분과 함께 걷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

 

주님!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가르침을 배워 익히고 지키는 자 되게 하소서!

당신께 뿌리박고 살아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게 하소서!

어디에 있더라도 당신께 눈을 떼지 않고 당신께 속한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되고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너희는 가서 

-송영진신부-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6-20)”

만일에 예수님의 승천이 ‘떠남’이라면,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는 약속의 말씀과 모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키지 않을 약속을 하신 셈이 됩니다.
그리고 ‘재림’ 때까지는 우리 곁에 안 계시는 것이 되고,
예수님은 지금 ‘부재중이신 분’이 됩니다.)
그러나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승천은 ‘떠남’이 아닌 것이 됩니다.
이 말에 대해서, 사도들이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모습을 목격한 것으로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동안
그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9-1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 앞에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신 일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신 일 자체는
놀라운 일도 아니고 새로운 일도 아닙니다.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시는’ 모습을 사도들이 목격했다는 점인데,
그 ‘하늘’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과 같은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승천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루카 24,50-53).”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사도들의 반응입니다.
사도들은 승천하시는 예수님께 경배했고, ‘크게 기뻐했고’,
그 뒤에는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이지 않게 된 것에 대해서
아쉬워하거나 서운해 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슬퍼하기는커녕 크게 기뻐했습니다.
사도들의 큰 기쁨은,
예수님의 승천은 ‘떠남’이 아니었음을 나타내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하늘로 올라가셨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셨다.”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하늘’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시는 영적 공간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라는 천사들의 말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서 재림하실 것이다.”로
해석됩니다(마태 24,30; 25,31).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사도들이 크게 기뻐한 것은
자신들의 신앙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신앙은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신앙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일을 통해서
자신들의 신앙이 진리라는 것을 확인했고,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떠남’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심’으로 존재 방식이 변화된 일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승천을 이별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승천은 예수님의 존재 방식이 변화된 일”이라는 것을 바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지금 부재중이신 분’이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마태오복음의 예수님 말씀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은
“사람들을 구원하거나 구원하지 않을 권한”을 뜻하는데,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마태 18,14),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한을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에 사용하십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모든 사람을 구원하라는 임무를 맡기셨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으라는,
즉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주라는 지시를 내리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라는 천사들의 말은,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지 말라는, 즉 ‘땅을’ 바라보라는 뜻이고,
이 말은, 사도들이(교회가) ‘땅에서’ 할 일이 있음을 깨우쳐 주는 말입니다.
그 일은 땅 끝까지 가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지시는 당신이 하실 일을 사도들에게 떠넘기신 일이 아니라,
당신이 하시는 일에 협력하라는 지시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선교활동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애쓰시는 예수님의 일을 도와드리는 일입니다.
< ‘내가’(우리가) 하는 일을 예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내가’(우리가) 도와드린다는 것입니다.>

선교활동은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활동이면서
동시에 내가 구원받기 위한 활동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라.)” 라는 지시를
이미 내리셨습니다.
소금과 빛에 관한 말씀은 사도들에게만 내리신 지시가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내리신 지시이고(마태 5,1-2),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온 삶으로’ 신앙을 증언하고 고백하면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지시입니다.
만일에 신앙인이 선교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쓸모없는 소금’으로 전락시키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쓸모없는 소금은 밖에 버려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태 5,13).
(밖에 버려진다는 말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 그것은 중요한 ‘사랑 실천’입니다.
세상과 담을 쌓고 사랑 없이 혼자서만 하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천상에 대한 희망

-조욱현신부-

 

오늘의 주제는 천상이다.  천상은 시공의 제한을 벗어나 우리와 더욱 친밀한 일치를 이루는 그분의 존재 양식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그분은 우리와 더 친밀히 일치하시고, 그러기에 그분이 가신 데로 우리도 따라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천상에 대한 향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순수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그리워하며 그분의 영광스러운 생명에 결합하고자 하는 여망이다. 그러므로 주님 승천 대축일이 우리를 초대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천상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고 추구해야 하지만, 그 때문에 지상에 있는 것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콜로 3,2).

 

1독서: 사도 1,1-11: 예수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

주님 승천은 이제 막 일어나려 하는 보다 큰 사건의 출발점이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 앞에 눈부신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난다. 이 천사들은 구원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지 역할을 한다. ‘구름은 예수님을 못 보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특별한 구원 계시의 상징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실 구름은 일반적으로 신적인 발현의 장면을 묘사하는 데 쓰일 뿐만 아니라, 다니엘서에서는(7,13) ‘종말론적 재림의 상징과 예고로도 사용된다.(마태 24,30; 1테살 4,17; 14,14-16 참조)

 

루카는 예수승천을 통해서 종말에 일어날 일에 대해 예고해 주고 있다.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11). ‘그 모양으로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이 하늘에 올라가시는 것처럼, 그렇게 오셔서 당신의 통치권을 확인시키고 온 인류의 역사를 당신 안에 모아들이실 것이다. 그 때문에 주님의 승천은 이별이 아니라 다시 오심에 대한 보증이다. 떠남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으로 더욱 위로를 주는 당신의 현존에 대한 약속이다.

 

복음: 마태 28,16-20: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과 사도들의 마지막 만남을 전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거리가 되는 것은 마지막 말씀의 선교 사명이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18). [마태오는 복음 여러 곳에서 권한’, 즉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권위에 대해 말한다.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기 때문에”(7,29), 또는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며 당신께 죄를 사하는 권한이 있다고 하시고(9,6-7),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실 때 대사제들과 원로들은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21,23)라고 묻는다].

 

주님께서는 이 권한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권한이 그분의 부활과 함께 그분에게서 충만히 드러난다. 즉 부활은 승천으로 완성되며, 예수님을 성부 오른편에 영원히 자리하게 하시어 온 세상의 주님이 되게 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신다. 주님 승천의 의미는 이렇다. 하느님이신 분이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다시 하느님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 하늘이신 분이 다시 하늘이 되신 것이며,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주님이 되신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권위를 가지셨다.

 

예수께서는 이 권위로 사도들을 파견하신다.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19). 사도들을 온 인류를 향해 파견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은 신앙 외에 세례와 그분이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도들이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세례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신비에만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그 신비 자체에 잠기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부활과 승천으로서 인류가 하느님 아버지의 품 안에 들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도 똑같은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세례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지상적인 생활보다는 천상적 생활 형태로 삶을 바꾸어 나갈 때 진실한 것으로 증명된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20)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온 인류의 여정을 이끌어 주실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때까지 자랄 것이다. 이 교회는 지상의 순례를 마치면서 사랑을 통해 실현되는 율법의 의미가 드러나고 생명의 신비가 벗겨지게 되면 사명을 다하고 끝나게 되며,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축복받은 이들만이 예수께서 당신 성령을 통해 미리 마련하신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 18)

-한상우신부-

우리 삶의 자리
거기에서 
더 깊어지는 
승천의 신비입니다.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승천입니다.

욕망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하는
사랑의 승천입니다.

사랑이 넘치면
자연스레 승천을
향합니다.

승천은 사랑의
힘을 믿게 합니다.

참된 사랑은
모든 경계를
허물어 뜨립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며 더욱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승천처럼
모두 하느님께로
돌아가고 모두
하느님 
사랑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승천은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고 멀어지는 
이별이 아닙니다.

더 깊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사랑은 성장하고
사랑은 깊어지고
사랑은 넓어지는 
승천의 신비입니다.

주님 승천은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주님을 닮아
성장하는 사랑임을
보여주십니다.

사랑은 
하늘과 땅
이 모두를 하나로
깊어지게 합니다.

사랑또한
주님 승천처럼
성장해야 서로를
살릴 수 있음을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신 날을 대축일로 경축합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 승천 사건과 그 이후 교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마당에 영원히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만나는 무수한 신비의 역설 중 하나일까요?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을, 비움에서 풍요를, 가난에서 행복을 이야기하듯, 주님의 떠남에서 오히려 영원한 현존을 거머쥐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사실 다른 공관 복음서 저자들은 마태오 복음사가와 달리, 예수님께서 사명을 부여하신 후 승천하셨다는 한두 줄의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어쩌면 마태오는 예수님의 승천을 하늘로 올라가신 물리적 사건에서, 본래 신성의 자리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 시야에서는 사라지셔도 그로써 더욱 긴밀히 함께하신다는 영적 현존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행전 저자는 예수님 승천 사건을 구체적으로 소상히 기록했습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사도 1,6)

제자들은 이 극적인 만남의 순간에도 하느님 왕국의 도래가 확실히 "언제"인지 알고 싶어합니다. 제자됨의 의미를 아직 깨닫지 못한 이들의 조급함이랄까요. 그들은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더러는 의심하였다"(마태 28,17)고도 하지요.

"그 때와 시기는 ... 너희가 알 바 아니다"(사도 1,7).

예수님께서 선을 그으십니다. 그건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일이고 당신도 모르신다고 이미 분명히 언급하셨지요(마태 24,36 참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승천 사건과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이 세상에 주님 현존을 이어갈 부활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 1,9)

이미 주님의 부재를 처절히 체험했던 제자들이 다시 주님을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첫 번째 상실과는 달리 영광과 위엄의 모습으로 떠나시지요. 게다가 현존의 약속을 단단히 새겨 주셨으니, 이제 그들은 빈 하늘을 하염없이 올려다볼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와 이 세상을 가득 채운 주님을 찾고 감지하고 느껴야 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성 삼위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기를 기원하며,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의 현존을 이야기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에페 1,23).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에페 4,6). 주님을 머리로 하는 우리는 영원히 주님과 떨어질 수 없지요. 그분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제 영광과 영달을 위해 예수님을 곁에 붙잡아 두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걸 제자들은 알아가는 중입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함께함이고 내어줌이라 하지요.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공이나 부귀영화의 보장보다 더 값집니다. 변치 않을 사랑의 보증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오실 분, 성령을 기다리며,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승천은 파견이다.   
.-김찬선신부-

 

오늘 사도행전에서 천사들은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고 말하는데 어찌 이런 말을 하는지 의아합니다

스승이요 주님이신 분께서 하늘로 오르시는데
어찌 하늘을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하늘로 올라가시니 이제 당신은 우리하고 끝입니다.'하고
제자라는 사람들이 매정하게 돌아서도 된다는 말입니까?

사실 승천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사도가 아니라도 하늘을 봐야 하고,
더 나아가서 주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야지요.
그래서 오늘 미사의 본기도와 봉헌기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올라가신 하늘나라에
그 지체인 저희의 희망을 두게 하소서."
"이 교환의 신비로 저희도 성자와 함께 하늘로 오르게 하소서."


그러므로 주님의 승천축일에 하늘나라에 희망을 두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하늘나라에 희망을 둬야 할 것이고,
하늘나라로 가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늘나라로 올라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사도행전의 천사들은 하지 말아야 할 말,
주님의 뜻과는 다른 말을 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그러니까 주님의 승천은 우리에게는 파견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들을 주님이 안 계신 지금
이제는 제자들이 이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하던 일을 아들이 이어서,
스승이 하던 일을 제자들이 이어서 하듯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성찰할 때 두 가지 극단을 보게 됩니다.
올바르고 건전한 신앙인이라면 하늘도 보고 땅도 봐야하는데
하늘만 보는 사람과 하늘은 보지 않고 땅만 보는 사람입니다.
먼저 하늘은 보지 않고 오직 세상살이만 몰두하는 사람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적으로 볼 때 '지금 여기'만 보는 사람들이고,
지금 여기서 끝장보자는 자들로서 하느님 나라를 보지 않는 자들이며,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서 실현코자 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자들입니다.

반대로 하느님 나라를 지금 아닌 죽고 난 뒤에나 가겠다는 사람이나
하느님 나라를 여기 아닌 하늘에서나 이루겠다는 사람은 패배주의적
현실도피자이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신
주님의 복음 선포와도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거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참 그리스도교 신자이고 또한 프란치스칸이라면
하늘은 나중에 가고 지금은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가서 주님의 가르침을 가르치라는 오늘 주님 말씀대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에게 가는데 먼저 지금 여기서 출발을 해야겠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위해 가는 순서는 이렇게 됩니다.
지금은 지금 여기서,
나중엔 모든 민족에게,
더 나중엔 하늘나라로.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5월 28일 주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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