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6월 1일 월요일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Margaret K 2020. 5. 31. 19:00

2020년 6월 1일 월요일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 19,25-34)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아드님을 두고 성모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비통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드님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담아 그 곁에 ‘서 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행동에서 예수님을 향한 성모님의 믿음이 얼마나 크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던 베드로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형수가 되신 마당에 그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이라도 되면 큰일 날 것이라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로마 군사들의 무자비한 폭력과 위협을 눈앞에 두고서도 그 자리에 서 계셨습니다.
영어로 ‘이해하다’(understand)는 말은, ‘밑에’(under)라는 말과 ‘서 있다’(stand)가 합쳐진 것입니다. 곧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 밑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밑에 묵묵히 서 계신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그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와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고 에덴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선악과 나무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온 인류의 죽음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시어 골고타 언덕 한가운데에 있는 십자가 곁에 끝까지 서 계심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의 열매를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에서 나아가 새 인류의 어머니, 새로운 하와가 되셨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제 어깨 위에는 자그마한 흉터 하나가 자리잡혀 있습니다. 아마 제 또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의 어깨 위에는 이런 흉터 하나씩은 있을 것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땐가 2학년 땐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당시 맞았던 불주사 자국입니다. 결핵 예방으로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이 주사를 맞았습니다. 예전에 우리나라가 가난해서 일회용 주사기를 사용할 수가 없어서, 유리 주삿바늘을 알코올 불에 소독해서 주사를 놓은 것입니다. 

당시 저에게 이 불주사는 엄청난 공포로 다가왔었습니다. 그냥 주사 맞는 것도 무서운데, 주삿바늘을 불에 달구어서 어깨에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몇몇 아이는 주사를 맞기 전에 울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정말로 울고 싶었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먼저 주사를 맞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친한 친구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하나도 안 아파!”라고 큰 소리로 말합니다. 이 친구의 말에 용기가 생겼습니다. ‘얘도 괜찮다고 하는데 내가 못 맞을까?’라는 마음이 생긴 것이지요. 

이렇게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커다란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우리입니다. 이 점을 우리 주님께서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십니다. 이제 곧 죽음이 임박한 상태이지요. 더구나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공포에 싸입니다. 스승을 배신했다는 죄책감과 더불어, 자신 역시 스승처럼 죽음으로 내몰리지 않겠냐는 공포입니다. 

그런 두려움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는 당신도 커다란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당신은 죽으니, 요한을 아들로 삼아서 살라는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도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하셨겠지요.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사시듯 요한 안에 사시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실상 당신 자신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에 대해 보살핌을 맡긴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곧 제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어머니 하면 생각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제자에게 전해주신 것입니다. 즉, 교회의 어머니로 공적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이 말씀으로 어머니도 또 제자들도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힘을 얻습니다. 우리의 어머니신 성모님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사랑해 주면 기뻐하여 잊지 말고, 부모가 미워하시더라도 송구스러이 생각하여 원망하지 않고, 부모에게 잘못이 있거든 부드러이 말씀드리고 거역하지 말아야 한다(증자).

 


고통 속에서 바치는 기도(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오 주 예수님.
올리브 산에서, 십자가 위에서
주님의 거룩하신 마음이 겪으신 
비길 데 없는 그 슬픔으로
견줄 데 없는 그 외로움으로
주님을 잃으신 성모님의 비탄으로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에
지금 저희 마음을 결합해 드리오니
저희에게 이겨낼 힘을 주시고
주님 친히 저희의 기쁨이 되어 주소서. 

나의 고통이 주님 안에서, 성모님 안에서 치유가 됩니다. 그분의 고통은 나의 고통을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사랑의 징표다

-전삼용신부-

 

오늘은 성모 마리아께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공식적으로 성모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고 칭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을 통해서이지만,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믿어온 것은 교회의 오랜 전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성모 마리아와 요한 사도를 모자 관계로 맺어주십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태어난 교회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니 성모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입니다.

 

      유학 때 마리아론 시험에 이 문제가 나왔었습니다. 교수님이 “성모 마리아가 너의 어머니인 것이 왜 중요하냐?”라고 물으셨을 때, 저는 엉겁결에 “십자가상에서 고통 받으시는 예수님께서 말 한마디 하기도 힘들어하시면서 저희에게 성모님을 어머니로 맡기셨는데, 그것이 어떻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절대로 중요하지 않은 말은 하실 수 없으십니다.”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왜 어머니인 것이 중요한지는 잘 모르겠고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것만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그래도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이제 그것에 대한 보충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도 정답은 될 수 없겠지만, 지금 만약 그런 문제를 다시 물으면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랑의 징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는 아버지는 어머니께 끊임없이 무언가를 가져다 바치고 어머니는 그것에 만족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번은 신문지에 3백만 원이나 하는 돈뭉치를 가져오신 적이 있습니다. 땅을 팔아서 어머니에게 돈을 가져오신 것입니다. 그때 어머니가 처음으로 만족해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빚을 갚고 나면 남을 것이 별로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농사일을 접으시고 주유소에서 일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주유소에서 매출에 비례하여 월급을 주었습니다. 한 번은 20여만 원밖에 안 되는 돈 봉투를 어머니에게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이것 가지고 어떻게 한 달을 사느냐며 하소연을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항상 부족한 돈만 가져다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미안해하셨습니다. 그다음에 아버지는 막일하시며 평생 어머니에게 돈을 가져다주셨습니다.

 

      지금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4년이 넘었습니다. 이제 어머니만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를 볼 때 어머니만 보일까요? 아닙니다. 아버지도 보입니다. 어머니에게 그렇게 돈을 가져다 바치셨던 아버지가 안 보일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을 위해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가져다 바친 기억이 어머니 속에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것으로 힘겹게 저희를 양육하셨습니다. 만약 두 분 중 한 분만 안 계셨어도 저희는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저는 젊은 부부가 이혼하고 자녀들을 아버지가 양육하게 되었을 때, 그 아버지가 어쩔 수 없이 자녀들을 보육원에 맡겨야 했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도저히 어린 아이들을 키우며 돈을 벌러 나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어야 하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할 수 없는 일을 자녀들을 위해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내어주신 이유는 당신의 피로 자녀들을 돌보아야 하는 어머니가 당신 자녀들을 위해 필요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를 보며 교회의 머리요, 아버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봅니다.

      제가 신학교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할 때 제가 다니던 성당 성모님이 진짜 성모님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때는 겨울이었고 시간은 새벽이었고 저는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습니다. 그때 저를 불러주시는 것이면 나타나서 표징을 보여달라고 예수님께 청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모 마리아를 보내주셨습니다. 물론 그때 술을 마신 상태였기 때문에 저의 착각이라고 믿고 내려오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면 무척 부담스럽고 도망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상이 진짜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겁이 나서 머리를 들 수 없었는데 예수님이 나타났다면 더 무서워서 제가 돌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부드러운 어머니를 보내주시며 그 안에서 당신의 사랑을 발견하라고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성모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우리 교회를 위해 성령님을 중개하시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성모 마리아의 청에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기적을 해주셔야 했습니다. 저는 성모님을 보면 어머니를 보는 것 같고 예수님을 보면 아버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자녀를 위해 청하는 성모님 앞에서 예수님은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당신 피까지 다 부어 주십니다. 그런 어머니를 둔 교회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성모님 덕분으로 우리는 언제나 죄를 용서받는 고해성사를 할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어머니로서 중개하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아버지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품고 있는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조재형신부-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는 언제나 저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미국으로 오기 전 어머니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잘 다녀오라고 하시면서 격려해 주셨습니다. 자식은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부모님을 닮게 됩니다. 아버님은 성격이 강인하셨고, 판단력이 좋으셨지만 건강한 체질은 아니셨습니다. 어머니는 성격이 온유하셨고 건강한 체질이셨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아버님의 체질을 닮았고, 어머니의 성격을 닮았습니다. 제가 강하지 않기에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었습니다. 건강한 체질이 아니기에 늘 조심하였고, 아직까지는 건강에 큰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성격과 어머님의 체질을 닮았으면 하는 생각도 했지만 지금은 저의 성격과 저의 체질에 만족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본당 신부가 되고나서 어머니께서 3년을 같이 지냈습니다. 주방을 도와줄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기쁜 마음으로 사제관에서 지내셨습니다. 아버님께서도 3년 동안 혼자 계시는 것을 참아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께도 감사한 일이지만 아버님께 정말 감사할 일입니다. 어머니는 레지오 활동도 하시고, 대모도 해 주시면서 신자들과 잘 지내셨습니다. 아버님도 가끔 오시면 어르신 복사 연습시켜 주시고, 어르신들과 장기도 두시면서 잘 지내셨습니다. 제가 3년 동안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께서 함께 지냈기 때문입니다. 아버님께서 지혜를 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담벼락 넘어 뻗어있던 은행나무 가지를 잘랐습니다. 태풍에 가지가 부러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수녀원 마당에 꽃을 심었더니 수녀님들이 좋아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가끔 제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대녀가 많은 어머니는 돌봐줄 일도 많았습니다. 대녀의 딸이 혼배성사를 받아야 하는데 주례를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의 청이기에 별 일 없으면 혼배 주례를 해 주었습니다. 대녀의 아들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병자성사를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역시 어머니의 청이기에 별 일 없으면 다녀왔습니다. 어머니의 부탁을 좀 더 많이 도와 드리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어머니의 부탁은 사제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도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께 부탁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고, 성모님은 그 사실을 아셨습니다. 성모님은 누구보다 예수님의 능력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모님의 부탁을 기쁨 마음으로 들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성모님의 따뜻한 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께 사랑하는 제자를 부탁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이제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온다고 우리는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들의 어머니인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분이 이제 당신의 어머니입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따뜻한 모성으로 우리들의 청을 예수님께 전구해 주십니다.

 

주님을 낳으신 행복한 동정녀, 복되신 교회의 어머니,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를 길러 주시네.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오시는 그날까지 나그네 길을 걷는 교회를 어머니의 사랑으로 보살피시어 하늘의 고향으로 들어가도록 자비로이 지켜 주시나이다.”

 

가장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선포합니다!

-양승국신부- 

 

가정 안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정말이지 중차대합니다. ‘어머니’는 가정의 주인이요, 태양, 여왕이요 중심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어린이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초인종을 눌러도 무반응입니다. 가방 속에서 키를 꺼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아무도 없는, 그래서 어두컴컴하고 황량한 집 속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반대로 살맛나는 가정이 있습니다. 순전히 어머니 때문입니다. 아이가 초인종도 누르기 전에 어머니는 아이의 발자국 소리를 직감적으로 알아듣고 문을 열어줍니다. 활짝 웃으면서 아이를 꼭 안아줍니다.

 

 

뿐만 아닙니다. 간식으로 과자 한 봉지 툭 던져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수제 간식을 아주 정성껏, 직접 만들어 줍니다. 공부하다가 모르는 것 있으면 자상하게 가르쳐줍니다.

 

 

남편이 힘겨웠던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귀가할 때도 마찬가지겠지요. 남편이 퇴근길에 멀리서 바라보는데 집에 불이 꺼져있습니다. 짜증 제대로 나겠지요.

 

 

반대로 아내가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으며 반겨줍니다. 집안 전체는 맛갈진 음식 냄새와 소리가 진동합니다. 고등어 자반 굽는 냄새, 얼큰한 매운탕 끓는 소리, 압력밥솥 돌아가는 소리...생각만 해도 기분이 흐뭇해집니다.

 

 

어머니는 가정의 여왕이자 주인이 분명합니다. 어머니 없는 가정은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입니다. 어머니 없는 가정, 허전하고 쓸쓸할 뿐입니다.

 

 

가정 안에서 어머니의 역할이 막중한 것처럼, 하느님의 집인 교회 안에서도 어머니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교회의 어머니 역할을 할 여인을 선택하셨는데, 그분이 곧 성모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양떼, 우리 교회를 위해 성모님을 간택하셔서 우리의 협조자, 동반자, 조력자가 되게 하셨으며, 우리를 위한 갖은 수고를 다 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봉사와 조력의 삶을 살도록 성모님을 이끄셨습니다. 주님의 영광스런 그날이 오기까지 성모님께서 우리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도록 준비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서’계십니다. 그런데 그냥 서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방관자나 감독관으로 서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중개자로, 협조자로, 안내자로, 인도자로 그렇게 서 계십니다.

 

 

어떻게 하면 부족한 우리의 입을 대신해서 하느님께 잘 말씀드려줄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실수나 과오를 잘 변호해줄까? 어떻게 하면 우리를 하느님께 잘 드릴 수 있을까? 순간순간 고민하시고 노심초사하시는 분이 교회의 어머니 성모님이신 것입니다.

 

 

“가장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즉 하느님의 모든 백성, 신자들과 사목자들의 어머니로 선포하며, 마리아를 가장 사랑하올 어머니로 부르는 바입니다.”(바오로 6세 교황님)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

-이영근신부-

 

 이제 우리는 성령강림대축일을 끝으로 부활시기를 마치고, 다시 연중시기를 맞이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20182 11일 루르드 성모 발현 축일(160주년)에 성령강림 대축일 다음날인 월요일을 '교회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제정하셨습니다.

교회의 창립일인 성령강림대축일 다음날 거행되는 이 기념일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새롭게 탄생된 첫 교회를 어머니의 보호 아래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이 보호의 원천은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마리아와 우리를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로 만들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곧 예수님의 명으로 마리아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

 

이를 교황청 경신성사성 장관 로베르 사라 추기경은 교회의 어머니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교령을 반포하면서, 성모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사랑의 유언을 받아들이시고 교회의 자애로우신 어머니가 되셨다.”고 선언하십니다. 곧 성모님을 예수님의 어머니이자 교회의 어머니로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 교령에서는 성모님께서 교회의 어머니 되심을 이렇게 밝히십니다.

참으로, 십자가 밑에 서 계신 마리아는 당신 아들이 남기신 사랑의 유언을 받아들이셨으며, 모든 이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아들딸로, 사랑하는 제자로 각각 맞아들이셨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맡기신 영이 있는 교회의 자애로운 어머니가 되셨다.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사랑하는 제자 안에서, 모든 제자들을 당신이 사랑하시는 어머니를 향한 자녀로 선택하셨고, 어머니를 제자들에게 맡겨 그들이 자식 된 도리로 어머니를 모실 수 있게 하셨다.”

 

실제로 성모님께서는 성령 강림 이후 탄생한 교회를 어머니로서 돌보셨습니다. 다락방에서 사도들과 기도하시고, 오실 성령을 기다리며 이미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셨습니다(사도 1,142,4 참조). 프란체스코 교종께서는 바로 여기서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드러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사실, 교회의 어머니라는 마리아의 호칭은 이미 교부시대 때부터 사용되었는데,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 지체들의 어머니라고 하였고, 성 레오 대교종은 교회의 지체들의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오로 6세 교종께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을 반포(1964)하시면서, 성모님께 이 호칭을 부여하셨습니다.

 

오늘의 <독서>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들었던 <창세기>의 하와 이야기와 또 하나의 독서는 <사도행전 1,12-14>인데, 그 의미는 같습니다. <창세기> 독서는 하와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창세 3,20)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이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라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독서는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행전 1,14). 그리고 이는 십자가에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아들을 맡기신 오늘 <복음>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처참해진 모습을 애끓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장면과 예수님께서 모친 마리아를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시는 장면입니다. 아들의 죽음과 함께 서 계시는 성모님의 이 광경은 인간적인 고통과 신앙적인 굳셈이 함께 연출되면서, 그지없이 비통하고 비장하면서도 동시에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고통과 믿음을 동시에 드러나고 있듯이,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성모님의 모습에서도 성모님의 고통과 믿음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시면서 예수님의 공통과 믿음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십니다.

그토록, 성모님께서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 십자가 아래에 서 계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십자가의 죽음이 실패요 패배로 보이지만, 어머니께서는 그 속에서도 승리를 보고 계십니다. ‘피앗의 응답으로 서 있는 것이며,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꿋꿋이 서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시고 화해를 이루시며, 동시에 성모님께서는 십자가 밑에서 고통을 받으시며 화해를 이루십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시며, 아버지의 뜻의 완성에 협조하십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서 계시는 성모님을 만납니다. 우리도 언제나 믿음으로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불신과 불목을 떨치고 신뢰로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서로를 믿고 신뢰하는 일, 그만큼 위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와 의탁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도 꿋꿋이 서 있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고통 속에서도 그분의 현존에서 사랑을 배우는 일입니다. 곧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신비를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르신 성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요,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그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도 복된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우리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 되신 일이 벌어집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는 그분의 어머니께서 서 계셨습니다.”(요한 19,25)

 

 

어머니!

당신과 함께 십자가 밑에 있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아들의 남은 고통 받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믿고 응답하게 하소서.

십자가 밑이 저의 자리가 되게 하소서. 아멘

 

교회의 어머니

-반영억신부-

 

우리는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교회를 ‘자모이신 성교회’라고 칭합니다. 그것은 성모님의 믿음을 바탕으로 제자들의 믿음이 자라났고, 교회의 믿음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필생의 과제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의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차동엽).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단순히 예수님과의 모자관계로만 머물지 않고 사랑하는 제자의 어머니로,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어머니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어미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많은 이들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예수님에 의해 성모님은 많은 이들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늘 함께 하셨던 어머니이셨습니다. 어머니는 엘리사벳의 고백처럼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복되신 분”이셨습니다. 그 복이란 세상이 생각하는 부귀영화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끝까지 지켜내는 믿음의 복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과 순종으로 아기 예수님을 품으셨던 어머니 마리아는 신앙인의 삶의 본보기요, 모범으로 사셨습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예기치 못한 많은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죽음의 길을 걸을 때 묵묵히 함께 걸으시면서 아들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픈’ 고통을 품으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날을 받아들였습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어머니요, 믿음의 어머니이십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어머니로 부를 수 있음은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일 때 당당할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성모님과 모자관계를 형성하고 산다는 것에 감사하고 한없이 자애로우신 어머니의 전구에 힘입어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제자들을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19,2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에 순명으로 사신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아들로, 딸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우리 삶의 여정에 어려운 모든 것들을 헤쳐 나아가는데 필요한 은총을 당신의 아들 예수님께 빌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어머니와 동행하는 신앙의 길에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6-27).”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를 어머니에게 맡기신 일과
어머니를 잘 모시라고 제자에게 당부하신 일은 모두
당신의 교회를 어머니에게(또는 어머니의 ‘모성애’에) 맡기신 일입니다.
이 일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4,18-19).”
이 말씀은 당신의 부활을 암시하신 말씀인데, 당신이 안 계신 동안에
신앙인들이 고아처럼 된다는 것을 예고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신앙인들을 맡기신 일은
신앙인들이 고아처럼 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신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또 어머니의 보호를 받으려면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인은 ‘믿음’과 ‘삶’이 일치되어 있는 신앙인입니다.
머릿속으로 믿는다고 생각만 하면서 그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니고, 그 사람은 살아 있는 신앙인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사이의 기간에만 잠깐 적용된 말씀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예수님을 떠나 있는 신앙인은
고아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실제로는 고아가 아닌데도 고아처럼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또 어머니는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도 응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살아 있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살아 있게 되고,
예수님의 사랑과 어머니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고아’ 라는 말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르 2,20).”
‘신랑을 빼앗길 날’은 원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날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죄를 짓거나 믿음이 흔들려서 ‘예수님을 떠나 있는 날’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 있는 그 모습도 ‘고아’와 같은 모습입니다.
(누가 밀어낸 것이 아닌데도 자기 스스로 고아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떠나 있을 때에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과 같은
나를 찾아 나서실 것이고, 자애로운 어머니께서는 나를 위해서 기도하실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 되돌아가기를 바란다면 당연히 회개를 해야 합니다.
‘회개’는 나를 찾아 나서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나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이고, 살아 있으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다음 말씀은 예수님의 마음을 잘 나타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37).”
이 말씀은, 믿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으면서
멸망을 향해서 가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 잘 듣고 착한 사람들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이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이라는 말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나타내는데,
그 마음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과 같습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도 예수님의 마음을 잘 나타냅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 18,12-13).”
‘잃은 양’을 찾았을 때의 목자의 기쁨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애쓰시는(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라는 말씀과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라는
말씀은, 실제로 그렇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양을 잃었을 때의 애타는 심정과
찾았을 때의 큰 기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양을 찾으면 크게 기뻐하신다는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양을 잃게 되면 크게 슬퍼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수난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슬픔과 기쁨을 모두 겪으셨습니다.
사도들 가운데 하나였던 유다의 배반은 큰 슬픔이었습니다.
아마도 제자에게 배반당한 고통과 그 제자가 영영 멸망의 길로 가버렸다는 고통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도
예수님께 큰 슬픔을 드린 일이었고,
그랬다가 곧바로 회개한 일은 예수님께 큰 기쁨을 드린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뿐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도 그것뿐입니다.
신앙인의 신앙생활의 목표도 그것 하나뿐입니다.
그것만을 목표로 삼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다른 목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목표를 달성하면, 그것은 우리에게도 큰 기쁨이 되는 일이고,
어머니와 예수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시는 일이 됩니다.
진심으로 성모님을 어머니로 섬기는 사람은, 또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따르는 사람은, 성모님과 예수님께 슬픔을 드리는 짓을 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어머니와 주님께서 주시는 큰 기쁨을 얻어 누리는 생활이면서
동시에 어머니와 주님께 큰 기쁨을 드리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9,25-34: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오늘은 교회의 어머니로서 마리아를 공경하는 날이다. 마리아께서는 성령강림 때에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셨으며, 늘 교회와 함께하셨다. 여기서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드러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조하며 2018년 성령강림 대축일 다음 월요일을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새로운 자녀들을 잉태하는 신비를 담고 있다. 우선은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라고 기도하시면서 숨을 거두셨다. 이렇게 아들의 영은 아버지께로 갔다가 다시 아들을 통하여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지며, 그 아들의 영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와같이,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26) 그리고 사도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27) 라고 하시며 우리를 마리아의 자녀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교회의 표상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낳아주셨고, 교회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계속 낳아주고 있다. 교회는 그러므로 마리아의 모습을 완전히 구현할 수 있을 때, 진정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참 교회의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모두 마리아가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아들을 낳아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시고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셨던 마리아와 같이 되는 것이다.

 

목마르다.”(28)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사람들의 믿음을 목말라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믿음 대신에 쓸개즙을 탄 신 포도주를 마시라고 드린다. 목말라하시는 그분께 우리는 무엇을 드리고 있는가? 믿음이 없음을 나타내는 신 포도주를 드리고 있지나 않은지? “다 이루어졌다.”(30) 주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모두 이루어졌다고 하신다. 십자가의 신비가 모두 이루어졌고, 고개를 숙이시고 숨을 거두심으로써 사흗날에 다시 일어날 당신의 육신에 평화로운 잠이라는 휴식을 주셨다. 착한 목자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34) 인간이 죽으면 피는 엉기고 흘러나올 수가 없다. 그런데 주님의 몸에서는 피와 깨끗한 물이 흘러나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는 죽었지만 생명의 원천을 쏟아부어 줄 수 있는, 그 육신 안에 있는 위대한 생명의 힘을 알도록 일어난 일이었다. 첫째 아담이 잠들었을 때, 하와가 그 옆구리에서 나왔듯이, 둘째 아담이 십자가에서 잠드셨을 때, 그 옆구리에서 신부인 교회가 탄생하였다. 교회는 새 아담의 신부이다. 우리가 모두 마리아를 닮아 참으로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며 이끌어주시는 신부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오늘의 신비를 사는 의미일 것이다. 언제나 신랑과 일치하려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 27)

-한상우신부-

예수님을 부르는
유월의 뜨거운
첫 시작입니다.

교회는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처럼 서로를
향해 뜨겁게
서 있습니다.

어머니의 
삶 하나가
우리 삶을
헤집으며 아프게
들어옵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안내합니다.

우리모두를
너무 사랑하여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이
분명 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를
먹고 사는 우리들
여정입니다.

교회는 어머니같이
우리를 자라게합니다.

교회와 어머니는
우리를 위한
최고의 선물입니다.

신앙의 삶은
어머니를 닮아
끝끝내 포기않는
가시덩굴의 삶입니다.

십자가에서
모두 만나게 되는
교회의 어머니십니다.

신앙의 힘은
십자가를 
견디어 낸
어머니의 힘입니다.

 

-오상선신부-

 

성령 강림 대축일의 은총 속에서 부활 시기를 마무리한 우리에게 또 다른 귀한 선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이십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그를 통해 우리에게) 어머니로 내어주십니다. 삼십여 년 전 천사에게서 주님의 어머니가 되시리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와는 다르게 마리아는 지금 아무 질문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늘 그러셨듯 모든걸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시지요(루카 2,19 참조).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7).

스승의 어머니와 스승의 제자가 한 가족이 됩니다. 이 새로운 가족의 구성은, 자식 잃고 홀로 된 노쇠한 과부와 스승께 신의를 다하려는 제자의 보은 행위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하느님이 우리 모두의 아버지시고, 예수님이 우리 모두의 친구요 형제이시듯, 마리아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십니다.

"자기 집에 모셨다."

교회는 마리아를 어머니로 공경하고 사랑합니다. 하느님 구원 사업에 오롯이 순종한 용기 있는 여인을, 한생을 성자 예수님 곁에서 침묵과 기도로 인내하고 동반한 강인한 여인을 어머니라 부릅니다. 믿는 이들의 모임인 교회는 공동체 안에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고, 우리 각자도 내면에 그분을 어머니로 모십니다.

어머니 앞에서는 체면도 자존심도 무장해제 됩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드리는 전구의 요청이 훨씬 더 구체적이고 실존적이고 염치불구한 내용이 되기도 하지요. 어머니에게는 그래도 될 것 같으니까요. 살아가면서 내 바람이 옳은지 그른지 교리적으로 검열하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졸라도 되는 존재가 있다면, 내 바닥까지 다 알면서도 완전 내 편인 존재가 있다면 행복합니다. 감당키 어려운 어둠이 닥쳐도 결국 영육의 건강을 회복하고 오뚜기처럼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니까요. 어머니의 존재는 그런 힘입니다.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수난과 죽음의 희생제사를 완성하시지요. 이와 더불어 세상에 당신 어머니를 수여하심으로써, 세상은 영원한 모성을 얻고, 마리아는 교회 안에 현존하실 거처를 마련하십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건너며 귀양살이에 지친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해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사려 깊은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과 인류 사이에 난처하고 송구스런 대화가 오가고 있습니다. 누가 먼저가 되었든 피조물들이 제 주인을 넘보았고 거역했으니까요.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창세 3,20).

첫 아담의 죄가 새 아담이신 예수님의 은총으로 씻겨졌듯, 첫 어머니인 하와의 욕망이 새 하와이신 마리아의 순종으로 정화됩니다. 새로운 하와 마리아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인 동시에 천상과 지상에 머무르는 모든 영혼의 어머니이십니다.

"마리아와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네"(입당송).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머니와 함께 바치는 기도가 절실한 때입니다. 성찰도 전망도 중요하지만, 당장 굶주리고 병들고 죽어가는 가련한 자녀들의 몸을 부둥켜 안고 울어 줄 어머니가 그리운 순간이 닥쳐왔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그러니 우리,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기도합시다. 이 고난과 분열의 시기를 무사히 지나가게 해달라고, 함께 손잡고 걸어 달라고, 아픈 데를 어루만져 달라고, 꼭 안아 달라고 매달립시다. 지금 세상 곳곳에서 아파하는 모든 이에게 엄마가 되어 달라고, 비록 죄인이지만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빌어달라고 청합시다. 이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지치지 말고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기도합시다.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여,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죄인들의 피신처 마리아여,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흔들리는 교회가 성령의 교회로   
-김찬선신부-

 

오늘은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 축일입니다.
새로 생긴 성모 마리아 축일입니다.
또 생긴 성모님의 축일인 것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성모님 축일이 모자라서 또 생겼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잖아도 성모님 축일은 많고도 넘친다고 생각하는 분도 사실 많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교회 내 신심은 지금까지 시기와 장소에 따라 참으로 많은 신심이 있어왔고,
사라지기도 하였는데 마리아 신심은 그 중에서도 종류가 많은 신심이지요

신심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지요.
곧 사랑과 열정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
그 어떤 것에 사랑과 열정을 쏟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사랑과 열정이 없는 사람은 신심이 근본적으로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열정이 있더라도 신앙이 없는 사람은
그 사랑과 열정을 신앙적인 것에 쏟지 않으니 신심이 없으며,
신앙이 있더라도 신앙을 특별히 살고자 하는 원의가 없으면
일반적인 신앙생활은 할지라도 신심생활은 하지 않게 되겠지요.

그래서 신심생활은 신앙을 열정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면도 있지만
신심이 잘못 가면 광신적으로 그리고 한쪽으로 치우친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측면도 있지요.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큰 도움만큼이나 큰 장애가 되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어제는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하신 분들의 봉헌예절이 있었는데
그래서 저는 그 예절을 주례하며 염려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었고,
이분들의 신심이 우리의 보편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나 이웃에 대한 사랑에 이바지하는 것이기를
바라며 그분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지내는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 축일은
또 하나의 마리아 신심이 아니라 우리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우리 교회는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믿어왔는데
그것은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께서 성모님을 사랑하는 제자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고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께서 돌아가신 후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신 분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성령 강림 대축일 바로 다음 날 이 축일을 지내게 한 것인데
보호자이신 성령과 함께 성모님도 교회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우리들의 보호자요 교회의 보호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아울러서 우리가 성모님의 보호를 받을뿐만 아니라
성모님처럼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일 겁니다.
우리 교회가 흔들리는 교회에서 성령의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성모님처럼 기도하는 사람 말입니다.

우리의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오늘날 우리 교회가 처한 상황이
세속주의로 인해 외부로부터 위협을 당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세속화의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고 보시고
베드로 사도가 잡혀갔을 때 신자들이 다 같이 기도했듯이 
성모님과 함께 교회를 위해 기도하라고 이 축일을 정하셨을 것입니다.

실로 요즘 우리 교회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근자에 많이 보았듯이 교회의 문제를 미디어들이 성역없이 파헤치고,
신자들도 교회를 불신하며 교무금 내지 않기 운동과 같은 것을 하며
교회를 흔들고 있는데 이는 교회가 그만큼 복음에 충실치 않았기에
불가피할 뿐 아니라 교회를 공격하는 신자들도 교회의 쇄신을 위해
이렇게 공격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대범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교회를 사랑한다면 교회의 쇄신을 요구하더라도
성모님처럼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고,
교회를 위한 기도도 교회에 대한 공격을 막아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성령의 은사로 교회가 쇄신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해야할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6월 10일 월요일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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